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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출판 - 북페뎀 09
강주헌 외 21명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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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번역문화가 엉터리이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7] 북페뎀 9호, 《번역출판》


 우리 말로 옮겨진 책을 읽으면서 저는 제 깜냥껏 마음속으로 ‘줄거리만 읽으’려고 합니다. 문학책을 읽든 인문책을 읽든 만화책을 읽든 매한가지입니다. 옮겨진 말로 ‘글쓴이 생각’을 읽기보다, 옮겨진 말에 감춰지거나 못 다 실린 느낌과 넋을 곱씹어 보고자 합니다.

 한자 지식이 아닌 한문을 처음 배우던 중학교 1학년 때에는 한문 번역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부터 영어 동화책과 손쉬운 한문책을 함께 읽으면서 제 깜냥껏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그무렵에는 바깥말 솜씨를 키우려는 마음이었지, ‘번역이 믿을 수 없어’ 이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무언가 알쏭달쏭하거나 잘 알 수 없던 이야기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번역이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나라면 이러한 이야기를 어떻게 부대끼거나 살피면서 말로 나타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렴풋한 생각이었지만, 한문책을 읽을 때에는 한문에 적힌 말마디를 한글로 옮겨 놓는 일은 번역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영어책을 읽을 때에는 영어 낱말을 한글로 옮겨 놓으면 번역일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는 일본책이 아주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와 맞물려 영어권 책이 대단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 옆지기가 바느질에 푹 빠져 헌책방에서 갖가지 바느질 책을 사서 보고 있는데, 어제 찾아간 헌책방에서 장만한 책을 읽던 옆지기가 갑자기 웃으면서 저를 부르더니 ‘속스’를 좀 보라고 하더군요.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양말’을 ‘속스’라 적어 놓았더군요. 바느질이나 뜨개질 다루는 책은 지난날 일본책을 많이 베꼈고, 통째로 도둑질하기까지 했습니다. ㄱ출판사처럼 이름난 곳에서 펴낸 ‘아동백과사전(또는 과학백과사전)’은 아예 백과사전을 송두리째 도둑질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책 도둑질’이란 꽤 예전부터 이루어져 왔는데, 저로서는 헌책방을 다니지 않았다면 이런 모습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2000년대에 헌책방을 다니며 ‘어린이책 자료를 찾던 때’에 처음으로 알아차렸습니다. 헌책방에 있는 좋은 일본책을 사서 보는데 어딘가 참 낯익다 싶었더니, 다름아닌 제가 국민학교 다니던 때에 학교 도서실에서 보던 책들이더군요. 그래, ‘속스’란 무엇인가 하면, 일본사람은 제 나라 말로 이야기를 하기보다 영어 쓰기를 대단히 즐겨 하고 있는데, ‘양말’이라는 말조차 영어로 ‘socks’를 그대로 쓰고 있던 셈이며, 이렇게 ‘속스’로 적힌 일본책을 몰래 도둑질하던 한국 책마을 일꾼은 ‘속스’가 마치 어떤 남다른 옷뜨기인 줄 알고 그대로 적바림해 놓은 셈이었습니다.

 1950년대에 나온 세익스피어 번역책 가운데에는 ‘하-므렛’이라고 적은 책이 있습니다. ‘하-므렛’이 무엇이냐 하면 ‘햄릿’입니다. 일본은 ‘Hamlet’을 소리값대로 말하기 어려워 ‘하-므렛’처럼 말하는데, 1950년대 어느 번역책은 아예 ‘-’ 부호까지 넣으면서 일본책을 베꼈음을 보여준 셈이라 하겠습니다.


.. 진짜 문제는 부실 번역이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으로 한정해 보면 이 문제는 더욱 커진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따위로 된 고전적인 저작들이 부실하게 번역되면, 그건 한 사회의 지적 역량을 갉아먹는 일이 된다. 번역서로 공부를 해 본 사람이라면, 국내에 나와 있는 인문사회 고전들이 얼마나 엉망으로 번역돼 있는지 절감할 것이다(72쪽/고명섭) … 인문서 시장에는 고만고만한 입문서가 거의 포화 상태를 이루고 있다. ‘원 소스 멀티 유즈’가 바로 이를 말한다. 반면 전문서들은 전문서라는 고상한 이유를 들어 대중을 외면한다. 수준의 양극화는 독자들에게서 선택의 다양성을 빼았는다(82쪽/김정민) ..


 지난날 우리 나라에는 갖가지 해적판 책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 나라도에도 저작권법이 있고 세계저작권협정을 맺은 나라입니다만, 1999년 12월 31일까지 해적판 책은 그야말로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문화예술 책을 많이 낸다고 하는 ㅇ출판사 또한 1999년 12월 31일까지 ‘해적판 책 재고 떨이’를 하면서 책을 팔아치울 뿐이었고, 옳게 계약을 맺으며 책을 내지 않기 일쑤였습니다. 이는 우리 나라 인문책을 내는 다섯손가락에 드는 ㅊ출판사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나라밖 책을 제대로 인세 계약을 맺지 않으면서 드는 핑계는 이와 같이 계약을 맺어 책을 내면 출판사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소리 하나에, 외화 낭비라는 소리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핑계를 들던 우리 나라 책마을에서는 중국에서 한국책을 몰래 펴낸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크게 분통을 터뜨리곤 합니다. 중국에서 한국책을 해적판 책으로 내는 모양새는 1999년까지 이 나라에서 일본책이든 서양책이든 인세를 안 치르고 해적판으로 냈던 모양새하고 똑같은데 말이지요.

 2010년대로 넘어선 오늘날 우리 나라는 나라밖 책을 인세 계약할 때에 계약금으로 몇 억에 이르는 돈을 척척 내곤 합니다. 지난날에는 ‘그런 인세 계약을 하면 출판사 문을 닫아야 한다’며 벌벌 떨던 그 출판사들이 앞장서서 몇 억씩 갖다 바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잘 팔리는 책에만 몇 억씩 척척 갖다 바치는 계약금을 치를 뿐, 우리 인문밭이나 문화예술밭을 넓힐 숱한 책에는 그리 눈길을 두고 있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상업성을 가장 앞에 내놓고 있습니다.


.. 평소에도 워낙 헌책방을 자주 돌아다니기 대문에 나로선 이외의 수확을 얻는 경우가 종종 있다. 헌책방이라고 하면 보통은 남이 보다 버린 책이 있는 곳으로 아는데, 의외로 생소한 저자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물론 대학교재로 쓰는 고전들이 상당수를 차지하지만, 미처 우리 나라에서 소개되지 않은 외국책들이라든지, 때로는 외국서점에서도 고가로 팔리는 희귀한 책이 우리 나라의 헌책방에 버젓이 나와 있는 경우도 있다. 헌책방에서 책을, 즉 어떤 기획거리를 고를 때의 장점은 남들이 미처 모르는 책 또는 잊힌 책까지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장점은 자료 구입비가 무척이나 싸다는 것이다. 새책으로는 1만 원이 넘는 페이퍼백도 헌책으로는 겨우 2000∼3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의외로 헌책방을 경시하거나 외면하는 풍조가 없지 않은 것 같다 … 물론 나야 일본어를 모르니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유용한 자료라고 생각해서 평소 친분이 있는 한 출판사에 구입을 권유했는데, 의외로 시큰둥한 답변이 돌아와서 상당히 실망했다. 만약 책을 사라는 요청이 아니라 술이나 밥을 (나한테) 사라는 요청이었다고 해도 출판사에서 그렇게 시큰둥한 답변을 내놓았을까? ..  (122∼123쪽/박중서)


 마땅한 노릇이라 할 텐데, 돈이 있는 출판사는 돈이 있기 때문에 상업성을 좇고, 돈이 적은 출판사는 돈이 적기 때문에 상업성을 노릴 수밖에 없는 얼거리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 나라 삶터에 걸맞는 창작책을 펴내는 데에는 돈있는 출판사나 돈없는 출판사나 돈을 들이기 어려운 얼거리가 탄탄히 굳어집니다. 잘 팔리는 책에 몇 억을 들여 계약금을 치르고 척척 펴내면 몇 곱절에 이르는 벌이가 되는 구구단은 할 줄 알지만, 착하게 책을 기획하고 착하게 책을 만들어 착하게 나누려고 하는 마음밭 일구기하고는 자꾸자꾸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나라안에서는 창작책을 일구는 사람들이 좋은 책 하나를 이루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일구어서는 먹고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출판사는 살림을 꾸리고, 새로운 책은 꾸준하게 쏟아집니다. 창작책보다 번역책에 더 높은 무게를 두고 있다 보니 번역을 할 사람은 아주 많아야 하는데, 번역 일감이 많고 외국말을 다루는 사람(거의 일본말과 영어) 또한 고학력 실업자가 늘면서 제몫을 제대로 받기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써 번역을 했다 하여도, 번역한 글이 우리 말과 말법과 말투와 말결에 걸맞는지를 돌아볼 만한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영어 좀 알거나 일본말 좀 아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우리 말과 글을 어느 만큼 깊이 헤아리거나 살필 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번역 수요는 많을 뿐 아니라 넘치고, 번역책은 많을 뿐 아니라 넘쳐나고 있으나, 번역을 옳게 할 만한 사회 밑틀이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번역 공부를 하고 번역 밑일을 배우면서 번역 솜씨를 키울 배움터라든지 제도라든지 책이라든지 알차게 서 있지 않은 우리 나라인데, 번역책만큼은 어마어마하게 쏟아집니다.


.. 생각보다 많은 작가들이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 나라에 알려지지 않은 채 묻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 개인적으론 베스트셀러의 몸집이 좀 줄고 좀더 다양하고 고른 책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김밥이 잘 나간다고 뷔페식당의 90퍼센트를 김밥으로만 채울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좀 골고루 먹고살았으면 좋겠다. 하긴 베스트셀러만 먹기도 빠듯한 독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까? ..  (132∼133쪽/김선희)


 ‘북페뎀’ 9호로 나온 《번역출판》을 읽습니다. 우리 나라 번역 문화를 놓고 스물한 사람이 스물한 가지 목소리를 펼쳐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를 둘러보고 저기를 돌아보아도 번역책투성이인 우리 나라에서 번역을 놓고 오가는 이야기가 대단히 적기 때문에, 《번역출판》이란 몹시 반가운 책일 뿐 아니라, 너무 늦게 나온 책입니다. 앞으로 번역출판을 놓고는 더 많은 이야기와 더 깊은 이야기가 오가야 하며, 우리 스스로 우리 책문화를 비롯하여 ‘번역출판’뿐 아니라 ‘번역영화’와 ‘번역문화’를 두루 짚거나 다루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일본말과 영어에만 얽매인 번역이 아닌, 세계 여러 나라 번역을 골고루 다룰 줄 아는 우리 나라가 되는 한편, 세계 여러 나라 훌륭한 책과 문화를 우리 말글로 알차고 알뜰히 즐길 수 있는 터전을 이룩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싶지만, 워낙 우리 나라에는 번역이나 번역출판을 놓고 주고받는 이야기가 아주 드뭅니다. 이리하여 《번역출판》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가벼운 문제제기’나 ‘번역 실무자 잡담’ 눈높이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지난 2005년에 《번역과 번역가들》(열린책들)이라는 책이 옮겨진 적 있는데, 일본사람 쓰지 유미 님이 엮은 《번역과 번역가들》을 떠올리면 《번역출판》은 거의 아무런 이야기조차 짚어내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길 없습니다. 번역이란 무엇이고 번역출판이란 무엇인지, 번역문화는 어떠하고 번역 밑틀은 어떻게 짜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는 한 가지도 건드리지 못한 《번역출판》입니다. 스물한 사람이 스물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틀은 반갑습니다만, 스물한 가지를 하나로 어우르는 굵직한 벼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북페뎀’이라는 기획잡지를 엮어낼 때에는 뜻있을 뿐 아니라 오래도록 깊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책마을 문화를 다루려고 했을 텐데, 북페뎀 9호인 《번역출판》은 이래저래 아쉬움 한 가득입니다.


.. 번역가를 지망하는 사람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본인이 한국어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자신이 전공하는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188쪽/양억관) … 번역가들은 자신의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매일 독서를 한다. 고전을 읽고 그것을 해석해 주는 관련서적을 읽고 새로운 논평에 계속 귀를 기울이면서 영어 실력을 키우려고 힘쓰는 것이다. 나 또한 시내의 헌책방을 돌아다니면서 번역에 유익한 책들을 열심히 구입하고 있다(200쪽/이종인) ..


 제가 거쳐 온 길을 돌아보자면, 저는 통역과 번역을 꿈꾸면서 네덜란드말을 공부하겠다고 다짐하며 ㅎ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에 들어가 첫 수업을 받은 날부터 모든 꿈과 빛이 무너졌습니다. 아니, 첫 수업을 받기 앞서 새내기 배움터에 갔을 때부터 꿈이건 빛이건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네덜란드말을 놓고 통역과 번역을 할 생각이 없었으며, 이런 일로는 굶어죽을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1994년이니 한참 옛날 일이요, 2002년 월드컵을 앞뒤로 했다면 달라졌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축구단 감독을 맡은 히딩크 님은 네덜란드말이 아닌 영어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 통역을 붙이려 했다지만 통역자가 너무 어리숙해서 그냥 영어 통역자를 붙이기로 했다더군요. 우리 나라에는 아시아에 딱 하나 있는 네덜란드말 학과가 어엿이 있습니다만, 국가대표 축구 감독 통역자로 네덜란드말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붙이지 못합니다. 나라안에 옮겨지는 네덜란드 문학이 적잖이 있으나, 모두들 ‘네덜란드 책을 독일말로 옮긴 판’을 다시 옮기는 책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익히 아는 《안네의 일기》마저 네덜란드 학과 ㄱ교수님이 딱 한 번 ‘네덜란드말에서 한국말로 옮긴 적’이 있습니다만, 이 책은 거의 안 팔린 채 판이 끊겼고, 우리가 읽는 모든 《안네의 일기》는 ‘네덜란드말로 된 책을 독일말이나 영어로 옮긴 책’에서 다시 옮긴 판입니다. 네덜란드 그림쟁이 반 고흐 님이 동생하고 주고받은 편지 또한 모두 네덜란드말로 적혀 있습니다만, 이 또한 우리 나라에 옮겨진 반 고흐 님 편지 책은 ‘영어로 옮겨진 책’에서 옮기기 일쑤입니다. 그나마 ‘독일말로 옮겨진 책’에서 옮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반 고흐 님 편지를 묶은 책을 읽다 보면 사람이름이나 땅이름을 엉터리로 옮겨 적은 대목을 자주 봅니다. ‘네덜란드 말법과 영어 말법’이 다른데, 옮긴이는 네덜란드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책마을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스웨덴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작품을 ‘스웨덴 책을 곧바로 한국말로 옮기는’ 일이란 없습니다. 1982년에 종로서적에서 《말괄량이 삐삐》를 펴낼 때에 꼭 한 번 스웨덴말을 한국말로 옮겼습니다만, 오늘날 모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작품은 ‘스웨덴 책을 독일말로 옮긴 판’에서 한국말로 옮깁니다. 하기는, 아이작 바이셰스 싱어 님 책을 ‘이디쉬말에서 한국말로 옮길 사람’이 우리 나라에 어디 있겠습니까.

 번역책은 어마어마하게 쏟아지지만, 정작 번역문화란 찾아볼 길이 없는 우리 나라입니다. 번역문화가 없는데 번역책 문화를 말할 수 없고, 번역책 문화를 말할 수 없는데 자그마한 《번역출판》 한 권에서 번역 이야기를 옹글고 깊게 다룰 수 있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다만, 아쉽고 모자라나마 우리네 번역쟁이 삶자락을 돌아볼 수 있는 책이요, 번역쟁이들이 스스럼없이 펼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국땅에서 번역을 꿈꾸는 젊은이한테 좋은 길동무가 될 수 있는 책입니다. 모든 길을 보여주지는 못하나, 길자락 하나를 살며시 보여주면서 ‘번역문화뿐 아니라 다른 문화도 메마르고 팍팍한 한국’에서 대기업 회사원이 아닌 번역쟁이를 바라는 삶이란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가를 보여주는 가운데, 고달프고 힘들기 때문에 재미있고 보람있는 번역쟁이 삶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4343.3.15.달.ㅎㄲㅅㄱ)


 ┌ 《북페뎀 9호 : 번역출판》(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2009)
 ├ 글 : 강주헌, 고명섭, 권남희, 김선희, 김정민, 김진준, 박정선, 박중서,
 │      백원근, 안진환, 양억관, 오철우, 이규원, 이재형, 이종인, 임희근,
 │      정창, 조영학, 최경옥, 황보석, 쓰노 가이타로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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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어느 지하생활자의 행복한 책일기 1
윤성근 지음 / 이매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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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은 삶이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1]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1) 헌책방은 어떤 곳인가


 책은 책이고 사람은 사람이며 자연은 자연입니다. 책을 놓고 책이라 이름을 붙인다고 이름이 더 높아지거나 더 낮아지지 않습니다. 사람한테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인간’이라 한다고 이름이 더 높아지지 않으며 ‘사람’이라 한다고 이름이 더 낮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귀에 익숙하면서 좋다고 느끼는 이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지식으로 괜찮다고 여기면서 반가이 맞이하는 이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겉보기에 따라 겉느낌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밑바탕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밑바탕은 늘 그대로 있습니다. 밑틀이 흔들리거나 밑돌이 뽑히지 않습니다.

 ‘헌책’이라는 낱말이 꽃등에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예부터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모습을 헤아린다면 퍽 역사가 깃든 낱말입니다. 이와 달리 새로 나온 책을 가리키는 ‘새책’은 국어사전에 오르지 못합니다. ‘헌책’이 있으면 마땅히 ‘새책’이 있어야 하고, 새로 나오는 책을 가리키는 이름이 있어야 ‘신간 소개’이니 ‘북리뷰’이니 하는 자리에 알맞게 쓸 텐데, 2010년을 맞이한 오늘날에도 ‘새책’은 한 낱말이 못 되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오르지 못한 낱말이 ‘새책’ 하나뿐이겠습니까만, 사람들은 국어사전에 안 오르면 어쩐지 꺼려 합니다. 사람들은 국어사전에 오른 낱말이면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이를테면, ‘파티’나 ‘프라이’는 국어사전에 실려 있습니다. 이 낱말은 국어사전을 엮은 분들 스스로 ‘국어순화 대상’이라고 일컫는 낱말인데 국어사전 올림말로 다루고 맙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생일잔치’라 하면 시골스럽고 ‘생일파티’라 해야 멋스럽다고 여깁니다. ‘달걀부침’이나 ‘달걀지짐’은 먹지 못할 밥거리라 여기고, ‘계란프라이’나 ‘에그후라이’쯤 되어야 군침이 돈다고 느낍니다.


.. 그래, 진짜 책들은 헌책방에 있다. 헌책방에 있는 책들은 거기에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의 책장에서 이사할 때 버려지고, 유학 갈 때 정리돼 고물상이나 쓰레기장으로 들어간다. 그곳을 들추고 파내어 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 그 책을 깨끗이 닦고 다듬어 다시 서가에 넣어 두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헌책방에 있는 책들은 그렇게 복잡하고 위험한 모험을 거친, 거기서 살아남은 강인한 책들이다 … 헌책방에는 책과 사람이 함께 머물면서 동시에 같은 꿈을 꾸어야 한다고 믿었다. 책방에 책만 있어도 안 되고, 반대로 사람만 있어도 안 된다 ..  (30∼31, 33쪽)


 열 해쯤 앞서 중국 연변에 갔을 때에 중국사람이 연 ‘헌책방’에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이 중국 헌책방이 아직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중국사람이 중국 조선족 책손을 맞이하려고 붙인 한글 이름은 ‘낡은서적전매’였습니다. 이분이 ‘낡은서적전매’를 연 날 우연하게 이곳을 찾아갔더니 우리를 보고는 ‘낡은책방’이라고 붙인 이름이 맞느냐고 묻더군요. 중국과 북녘에서는 ‘낡은책’이라는 이름으로 쓰고 남녘에서는 ‘헌책’이라는 이름을 쓴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무척 많지만, 남녘에서는 ‘거위’가 날짐승이지만, 북녘과 연변에서는 ‘게사니’가 날짐승입니다. 북녘과 연변에서 ‘거위’라는 낱말은 ‘회충(蛔蟲)’이라고 하는 기생충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남녘사람이 “거위를 길러서 고기로 먹기도 한다”고 말하면 소름이 돋고 끔찍하다고 여깁니다. 북녘사람한테는 “기생충을 길러서 먹는다”는 소리가 되니까요.

 북녘과 연변에서 ‘낡은책’이라고 이름 붙인 모습을 놓고 남녘사람은 소름이 돋거나 끔찍하다고 여길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남녘땅에서 ‘낡다’라는 낱말은 몹시 나쁜 뜻과 느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낡은 집’이나 ‘낡은 건물’이나 ‘낡은 생각’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북녘이나 연변에서는 ‘헌’이라는 낱말이 남녘사람한테 ‘낡은’과 매한가지입니다. 북녘과 연변에서는 ‘낡은 건물’이라고 하면 좋고 나쁨을 떠나 “그냥 햇수를 조금 묵은 건물”일 뿐입니다. 이리하여, 북녘과 연변에서 ‘낡은책’이든 남녘에서 ‘헌책’이든 “햇수를 조금 더 먹은 책이거나 사람 손을 여러 차례 거치면서 조금 닳은 책”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름 하나를 놓고 너무도 말이 많습니다. 이름 하나 때문에 너무도 얽매입니다. 더 좋다고 하는 이름을 찾으려고 하는 매무새를 나쁘다 할 수 없지만, 이름찾기에 얽매이면서 정작 우리가 마음을 쏟아야 할 곳에 들일 품과 땀과 시간을 길에 흘리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내 이름이 돌쇠이든 먹쇠이든 마당쇠이든, 나는 나대로 내 길을 튼튼하고 씩씩하고 즐겁게 걸어가면 됩니다. 내 이름을 빛내려고 꾸리는 삶이 아니라, 내 삶을 빛내려고 하루하루 즐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헌책방’과 ‘헌책’이라는 이름이 부끄럽거나 창피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고등학생 때이든 한동안 대학생이던 때이든 출판사 영업직원이었든 편집직원이었든 늘 “저녁에 헌책방에 책 보러 가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빠지고 책을 보러 가고자 하는 마음에 담임 교사한테도 “저는 헌책방에 가야 하기 때문에 보충수업을 안 받겠습니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에나 이때에나 고등학교 교사들치고 헌책방으로뿐 아니라 새책방으로도 책 보러 다니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만, 여느 새책방도 아닌, 또 도서관도 아닌 헌책방으로 책을 보러 간다고 하니 담임이며 둘레에 있던 다른 교사들이며 킬킬거립디다. 그러나 헌책방에 찾아가 헌책을 읽겠다고 하는 일은 창피하지 않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요 더없이 알찬 책읽기입니다.


.. 어릴 때는 책이 그냥 옆에 있으면 좋았다. 그것뿐이었다. 나는 책에게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책도 나한테 무얼 바란 적이 한 번도 없다. 나와 책은 친구였다 … 책은 보고, 읽고, 느끼는 것이다 … 책은 숨쉬는 생명이고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다. 책은 사람 아래 있지 않다.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른다 … 이오덕 님 말씀대로 글이란 자기 생각과 느낌을 정직하게 쓰는 것이 당연한 기본이지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치를 부여하고 함께 읽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글 쓰는 사람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가치 있는 생각을 해야 한다. 만약 글쓰기가 어렵다면 바로 그런 삶과 생각이 어렵다는 말이 된다 ..  (32, 34, 53, 69쪽)


 우리는 겉읽기 아닌 속읽기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화책이든 소설책이든 책상맡에 반듯하게 앉아서 읽는 분이 있는 한편, 신문지를 책 위에 얹고 라면냄비를 올린 다음 후루룩 짭짭 하면서 보는 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든 똑같은 책읽기입니다. 반듯한 매무새로 책을 마주한다고 하여 더 속깊이 읽거나 ‘줄거리에 깃든 넋’을 샅샅이 헤아린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누워서 읽더라도 얼마든지 속읽기를 합니다. 지옥철에서 책읽기를 하든 발 디딜 틈 없는 버스에서 책읽기를 하든 누구나 속읽기를 합니다. 한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어르고 달래며 젖을 물리는 엄마들이 다른 한손으로 책읽기를 하면서도 속읽기를 합니다.

 책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책에 담은 속내를 살필 노릇이고, 책에 담은 속내가 어떻게 태어나 이렇게 종이뭉치에 글과 그림과 사진으로 담긴 예술품이 되었는지를 받아들일 노릇입니다. 글쓴이 이름값에 따라 골라 읽는 책이겠습니까? 이렇게 책을 찾아서 읽는 사람도 있을 터이나, 우리가 깊이 살필 대목은 ‘글쓴이가 누구냐?’하고 ‘펴낸곳이 어디냐?’가 아닙니다. ‘책 갈래가 무엇이냐?’ 또한 아닙니다.

 처세책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삶읽기를 하는 책읽기가 됩니다. 소설책이든 어린이책이든 인문책이든 예술책이든 과학책이든, 우리 스스로 우리 넋을 바쳐서 받아들이는 만큼 내 마음밭으로 스며드는 책읽기입니다.

 헌책방에서 헌책을 사서 읽는다고 책읽기가 엉터리가 될 리 있겠습니까. 새책방에서 새책을 사서 읽는다고 책읽기가 훌륭하게 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백만 권을 읽었어도 세상을 잘못 읽는 사람이 있고, 만 권을 읽었어도 어줍잖은 말마디만 쏟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작 열 권을 읽고 백 권을 읽었음에도 아름다운 생각밭을 고이 일구면서 이웃사랑을 듬뿍 나누는 멋쟁이가 있습니다.


.. 책방을 만들기로 생각한 순간부터 한 가지 다짐한 게 있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남들에게 권할 만한 책을 팔자’가 그것이다 … 어쨌든 어린이용 책들은 꼭 필요하고 좋은 책이지만, 이런 이유로 이상북에서는 팔지 않는 책이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이용 책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백지 상태다. 하얀 바탕 위에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특히 청소년과 꿈을 잃지 않은 어른들이 많이 와서 ‘이상한’ 일을 많이 하면 좋겠다 ..  (42, 45, 83쪽)


 헌책방이란 모름지기 열린 곳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으레 ‘퀴퀴하’거나 ‘낡은’ 곳처럼 보이니 ‘헌책’과 ‘헌책방’이라는 낱말조차 부끄러워 한달지 못마땅해 하기도 하지만, 이런 이름과 얼굴과 겉모습이 얼마나 우리 삶을 가꾸고 있겠습니까. 우리가 좋은 책 하나를 만나 좋은 앎을 얻고 좋은 매무새를 추스를 수 있다면, 남들이 무어라 떠들든 말든 내 옳고 바르며 기쁘고 신나는 좋은 길을 당차게 걸어갑니다. 우리가 훌륭한 책 하나를 장만하여 훌륭한 얼을 깨닫고 훌륭한 몸가짐을 다스릴 수 있으면, 세상 흐름이 어떻게 휘감고 있든 내 슬기를 빛내는 보람차고 넉넉하고 따사로운 길을 오순도순 걸어갑니다.

 조세희 문학을 새책으로 읽어도 좋고 헌책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곧 노래하는 삶 마흔 돌을 맞이하는 양희은 님이 쓴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은 헌책방 아니면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 도서관 가운데 이 책을 갖춘 곳은 몇 군데나 될까요? 국립중앙도서관에 이 책이 있을까요? 노래 삶 마흔 해를 빛낼 양희은 님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아보고자 하는 ‘음대 교수’나 ‘음대 학생’이 논문을 쓰고자 할 때에, 양희은 님 자료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시디로 듣는 노래와 테이프로 듣는 노래와 레코드판으로 듣는 노래가 다르다고 하는데, 양희은 님 노래 테이프와 레코드판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이 곳만은 지키자》 두 권을 펴낸 지 열두 해가 지난 다음 다시금 찾아가서 느낀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러면 열두 해 앞서 처음 나왔던 《이 곳만은 지키자》라는 책을 찾아보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츠보이 사카에 문학 《스물네 개의 눈동자》는 1997년에 정식번역으로 나온 판이 끊어졌을 뿐 아니라 2004년에 나온 판도 사라졌고, 1986년에 나온 어린이책도 새책으로는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1961년에 우리 말로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번역 문학과 번역 문화를 살피며 논문이나 책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 츠보이 사카에 문학을 살펴보자고 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학문을 하든 뭐를 하든 ‘책’과 얽힌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누구나 반드시 ‘헌책방에 가야’ 합니다. 헌책방에 가지 않고서는 우리 스스로 바라는 자료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1947년에 처음 찍은 《조선말 큰 사전》 1권과 2권을 도서관에서 구경할 수 있을까요? 1957년에 여섯 권으로 마무리된 《큰 사전》은 어디에서 만나겠습니까? 1950년대 국어사전과 1960년대 국어사전뿐 아니라 1940년대와 1930년대 국어사전을 어디에서 찾아볼까요? ‘문세영 국어사전’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바로 헌책방에 가야 합니다. 새책방을 꾸준히 찾아가면서 헌책방을 바지런히 찾아가야 책이 있습니다. 헌책방이 아니고는 이 나라에서 학문을 할 길이 없고 책을 만날 길이 빠듯합니다.

 그렇지만, 헌책방에 찾아간다고 해서 ‘내가 헌책방에 찾아간 그날’ 바로바로 내가 바라는 책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바지런히 찾아가고 꾸준하게 찾아가며 찬찬히 둘러보고 샅샅이 헤아리는 눈썰미를 키워야 합니다. 돈으로 긁어모으는 책이 아니라 마음으로 어루만지는 책이어야 합니다. 지식으로 쌓는 책이 아니라 삶과 슬기로 보듬는 책이어야 합니다.


.. 청소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가장 필요한 과목이 무엇일까? 국어? 수학? 영어? 과학? 아니다. 청소년은 물론이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수학도 영어도 아니다. 수능 점수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토익, 토플 점수가 이것만큼 결정적이지도 않다. 바로 평화다 ..  (110쪽)


 헌책방이라는 곳은 책 문화에서 한 자리를 다부지게 차지해야 합니다. 대학교 문헌정보학과에서는 헌책방을 옳고 바르게 가르칠 뿐 아니라, 헌책방을 찾아가는 매무새를 함께 가르치고, 틈틈이 헌책방을 찾아가는 버릇을 길러 주는 한편, 전국 헌책방 지도를 마련해야겠지요. 이런 일은 저 같은 쥐데기 하나가 할 일이 아니요, 이 나라 문헌정보학과 교수와 학생이 할 몫입니다. 이 나라 문화체육관광부가 할 몫이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소매를 걷고 할 몫이고, 국립중앙도서관이 나라돈을 들여 할 몫입니다.

 정작 참다운 일을 할 사람이 일을 안 하고 있으니 ‘헌책’과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업신여기거나 깔보고 맙니다. 우리 스스로 책길을 튼튼하게 마련하면서 즐겁게 걷지 않으니 ‘헌책’을 자꾸자꾸 ‘古書’라 가리키거나 ‘old book’이라고 일컫는 어줍잖은 일이 생깁니다. 좀더 오래되면서 값어치있는 책일 때에는 ‘옛책’이라 하면 되지만, ‘헌책-옛책’ 얼거리를 옳게 깨달으며 제대로 말할 줄 아는 책쟁이가 그지없이 드뭅니다. 아무래도 우리들 스스로 책을 책 그대로 껴안는 몸짓이 못 되기 때문에 새책방은 새책방대로 할인률과 마일리지 다툼을 벌이며 책값을 뻥튀기하거나 후려치기를 멋대로 하고 있으며,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은 또 이대로 우리네 책마을에서 ‘새책방-도서관-헌책방’으로 이어지는 세모꼴 이음고리를 옹글게 엮어내는 데에는 등돌리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2) 바로잡아야 할 이야기


 서울 은평구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줄여서 이상북)’을 꾸리고 있는 윤성근 님이 쓴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흔히 ‘이상북’이라 한다는데 책방 이름은 ‘이상한 나라의 북’이 아닌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입니다.

 동네 한켠에서 사람들한테 책이란 무엇이고 책을 마주하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나누면서 한 해 두 해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야기를 책 하나에 오롯이 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헌책과 헌책방을 다루는 슬기로운 책을 만나기 어려운 터에(저 스스로 쓰기도 하지만, 제가 쓰는 이야기는 아직 어줍잖다고 느낍니다), 헌책과 헌책방을 잘못 알거나 제대로 모르는 분들한테 괜찮은 길잡이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대목이 곳곳에 있어서 놀랍니다. 자칫 사람들한테 헌책과 헌책방을 잘못 이야기하거나 엉뚱하게 알도록 이끌지 않을까 걱정스럽기까지 합니다. 하나하나 들면서 바로잡아야 할 대목을 바로잡아 봅니다.


ㄱ. 이런저런 종류 책을 다 팔고 싶었다면 헌책방이 아니라 애초에 새책 파는 서점을 했을 거다. (47쪽)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책방이란 “이런저런 종류 책을 다 파는 곳”이 아닙니다. 책방이라고 해서 모든 책을 다 다루지 않습니다. 첫째, 크기가 작든 크든 어느 책방이든 저마다 제 깜냥에 맞게 “다룰 수 있는 갈래 책만 다룹”니다.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아무 책이나 마구 다루는 곳”이 아닙니다. 헌책방 또한 온갖 책을 골고루 다룹니다. 오히려 새책방보다 더 넓은 갈래와 깊은 갈래 책을 샅샅이 다루기까지 합니다. 윤성근 님이 꾸리는 책방 이야기를 하는 자리입니다만, 당신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자칫 책방 성격과 갈래를 얄궂게 바라보지 않도록 다잡아 주기를 바랍니다.


ㄴ. 책, 특히 헌책이라고 하면 말에서 풍기는 느낌부터 싸구려다. ‘헌책’이라니! 요즘에는 남이 입던 옷을 파는 가게도 생겨났다. 그러면 남이 입던 옷을 부를 때 ‘헌옷’이라고 부를까? 아니다. ‘구제’라는 말, 혹은 ‘빈티지’라는 멋진 단어를 쓴다. 그런데 책은 ‘헌’책이라고 부른다. 나는 헌책이라는 말보다 ‘중고 도서’, 아니 그것도 너무 초라하다. 그냥 똑같이 ‘책’이라고 불렸으면 한다. (51쪽)


 앞서 죽 이야기했습니다만, ‘헌책’이라는 낱말이 왜 싸구려일까요? 왜 ‘헌책방’이 초라해야 할까요? 스스로 헌책방을 꾸린다는 분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군말 없이 그냥 ‘책방’이라고 해야 한다면, 윤성근 님이 연 책쉼터 이름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 아닌 ‘이상한 나라의 책방’이어야 합니다. 윤성근 님은 여러 매체와 만난 자리나 당신 개인 누리집에서 “나는 헌책방을 하는 사람이다” 하고 밝히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퍽 자주 ‘헌책과 헌책방이라는 낱말은 싸구려요 초라하다’고 적고 있으니 여러모로 모순이 되기까지 합니다. 이런 글을 쓰고자 한다면, 윤성근 님은 당신 책방 이름부터 ‘이상한 나라의 책방’으로 하루빨리 고쳐야 할 줄 압니다.


ㄷ. 나는 그 헌책 전문가 얼굴을 잘 알고 있다 … 나와 그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 … 가장 유감이었던 건 그 사람이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헌책방도 아니다’라고 말한 부분이다 …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물론 다른 전통적인 헌책방하고는 겉모습이 좀 다르지만 세무서에 헌책방으로 신고를 했고 실제로 중고 책을 사고파는 일을 하는 곳이다. 〈숨어있는 책〉이나 〈아벨서점〉처럼 오랜 전통을 가진 건 아니지만 헌책방이 맞다. 오래된 서가에 책이 켜켜이 쌓여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헌책방이 맞다. 청소년 문화 행사를 열고 가끔은 노래하고 연주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헌책방이 맞다. (139∼140쪽)


 이 글에서 윤성근 님은 스스로 ‘헌책방’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싸구려요 초라하다고 여기는 ‘헌책방’을 한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오래된 서가에 책이 켜켜이 쌓여” 있어야 헌책방일는지요? 이런 모습으로 있어야 헌책방이지 않습니다. 저는 《모든 책은 헌책이다》와 《헌책방에서 보낸 1년》과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책뿐 아니라 〈오마이뉴스〉에 올리는 글에서도 ‘먼지 묵은 책이 켜켜이 쌓인 곳’을 헌책방이라고 못박는 말은 잘못이라고 수없이 되풀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숨어있는 책〉은 2010년으로 해서 고작 열한 해를 맞이하는 곳입니다. “오랜 전통을 가진” 곳이 아닙니다.


ㄹ. 불과 십 몇 년 전만 해도 헌책방 주인도 자기가 뭘 갖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떤 책을 찾으려면 손님이 직접 책방에 비집고 들어가서 책먼지 속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214쪽)


 헌책방 일꾼을 섣불리 깎아내려서는 안 됩니다. 헌책방 일꾼뿐 아니라 새책방 일꾼도 당신들 책방에 어느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잘 모르기 일쑤입니다. 교보문고 일꾼이라고 다 아는지요? 새책방 일꾼은 셈틀로 찾아본 다음 책꽂이로 달려가지, 책이름을 듣고 곧바로 어디에 있다고 알아채지 못합니다. 오히려 헌책방 일꾼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책이 이리저리 쌓이다 보면 잊을 수 있고, 헌책방을 찾아오는 책손들이 책을 보고 나서 아무 데나 쌓거나 꽂아 버리면 헌책방 일꾼은 ‘당신이 어디에 꽂았는지 알고 있던’ 책을 모르고 맙니다. 으레 이런 일이 벌어져서 헌책방 일꾼이 ‘책을 못 찾는’ 일이 생깁니다. 웬만한 헌책방마다 ‘보신 책은 반드시 제자리에 꽂아 놓으시기 바랍니다’ 하고 쪽지를 붙이는 까닭이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들부터 내 집에서 내 책을 못 찾아서 같은 책을 다시 사는 일이 생기기까지 합니다. “책먼지 속을 헤매고 다녀야” 같은 말은 그야말로 오늘날 우리 헌책방 모습을 엉터리로 나타내는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먼지구덩이 헌책방’은 손가락에 꼽을 만큼 거의 없습니다.


ㅁ. 인터넷 헌책방은 많지 않다. 중고 책을 다루는 특성 때문에 전산 입력이 쉽지 않다 … 그런데도 몇몇 헌책방들은 몇 해 전부터 인터넷으로 책을 팔고 있다. 하지만 대형서점들이 헌책 시장에 뛰어들면서 경쟁력이 떨어졌다. ‘알라딘’에서 시작한 전문 헌책 거래 시스템은 빠른 속도로 다른 서점에 영향을 줬다. 깔끔하고 정확한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헌책 거래에 신뢰를 주었고, 아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73쪽)


 인터넷 헌책방이 많지 않다니요? 제가 2006년에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을 써내면서 전국 헌책방 통계를 죽 그러모았을 때에도 쉰일곱 군데쯤 되었고, 2010년에는 백 군데가 훨씬 넘습니다. 어쩌면 인터넷 헌책방은 여느 ‘새책방 숫자’보다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라딘이나 인터파크가 헌책 팔기에 ‘끼어들었’지만, 예전부터 인터넷으로 책을 파는 헌책방은 꾸준히 잘하고 있습니다. 1998년부터 우리 나라에 생겨난 인터넷 헌책방들은 ‘헌책을 다루는 헌책방 특성’을 당신들 나름대로 알맞게 잘 키워 놓고 있습니다. 게다가 “여느 인터넷 헌책방은 깔끔하지 않고 정확하지 않다”는 듯한 느낌을 풍기니 기막힙니다. 여느 인터넷 헌책방들은 지난 열 몇 해에 걸쳐 꾸준하게 ‘누리집 고치기’와 ‘검색기 손질하기’를 해 왔고, 이제는 어느 곳이나 아주 훌륭한 얼거리를 갖추고 있습니다.


ㅂ. 최종규 씨 같은 분이 책에 대한 애정을 갖고 열심히 배다리 헌책방 거리 살리기 운동을 하고 있지만, 요즘에는 경기 침체 탓인지 안 그래도 어려운 헌책방 살림이 더욱 초라해지고 있다. (273쪽)


 저는 “배다리 헌책방거리 살리기 운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헌책방 문화를 글과 사진으로 담아서 나누는 사람입니다. 엉뚱한 감투를 씌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인천 배다리 골목동네’에 살림집이 있고, ‘사진책 도서관’을 동네도서관으로 열어서 꾸리고 있습니다. 제 고향동네가 인천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헌책방을 “더욱 초라하”게 다루는 모습이 슬픕니다.


 (3) 헌책방은 삶이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쓴 윤성근 님은 저를 놓고 ‘헌책방 전문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는 저한테 ‘헌책방 전도사’라고 하고 ‘헌책방 매니아’라는 이름을 붙이는 분까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다들 엉뚱한 이름을 붙이는가 싶은데, 저는 저 스스로 저를 말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은 듣지 않고 어디에서 엉뚱한 이야기를 듣고 엉뚱한 말을 붙이니 알쏭달쏭합니다. 저는 늘 ‘헌책방 즐김이’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헌책방 이야기꾼’이 됩니다.

 왜 헌책방을 즐기고 왜 헌책방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헌책방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진은 삶이다” 하고도 말합니다. “책은 삶이다” 하고도 말합니다. “말은 삶이다” 하고도 말합니다. 모두모두 우리 삶입니다. 빵굽기를 하는 분들한테는 “빵은 삶이다”가 이루어집니다. 저는 늘 손빨래를 하면서 지내고 있으니 “빨래는 삶이다”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삶이다”라 외칠 분이 있고, “노래는 삶이다”라 외칠 분이 있겠지요. “자전거는 삶이다”가 되기도 합니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리하여 “헌책방은 삶”입니다.

 초라해 보여도 헌책방은 삶입니다. 구지레하다고 여겨도 헌책방은 삶입니다. 책이 쌓여 있어도 헌책방은 삶입니다. 언제나 책삶이요 노상 책방삶이며 한결같이 헌책방삶입니다.

 앞에서 다룬 이야기를 한 번 더 되풀이하자면, 책을 다 읽는 사람 또한 제 집 책꽂이에서 제가 읽은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못 찾아내곤 합니다. 다시 사는 일이 흔합니다. 더욱이, 헌책방 일꾼은 “무슨 책 있어요?” 하는 말을 몹시 안 좋아합니다. 헌책방은 ‘책 자판기’가 아니라 ‘스스로 책을 살피고 찾아내어 손수 읽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헌책방 일꾼 가운데에는 “무슨 책 있어요?” 하고 물어 보는 책손한테 ‘이 책손이 찾는 책이 버젓이 있어’도 모르는 척 “그런 책 없어요!” 하고 쌀쌀맞게 대꾸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헌책방 일꾼은 책을 아주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책을 사려는 사람들이 책을 싸구려로 함부로 다루려 하면 책을 안 팝니다. 형편없는 책손 앞에서 책을 찢어 버리는 헌책방 일꾼이 있고, 어이없는 책손은 큰소리치며 내쫓는 헌책방 일꾼이 있습니다. 아무리 웃돈을 얹어 준다고 해도 책을 보는 몸가짐이 모자란 사람한테는 책을 안 파는 헌책방 일꾼이 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책이 우리네 책 문화를 조곤조곤 다루면서 우리들한테 책사랑을 널리 나누려 하는 뜻을 담고 있다면, 부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를 내어 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더 고개를 숙이며 한결 낮은 자리로 내려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헌책이나 헌책방을 구태여 더 높은 데로 끌어올려야 하지 않습니다. 밑바닥에 짜부가 되어 깔려 있더라도 헌책방은 헌책방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헌책을 얕잡아보더라도 헌책은 헌책입니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 책 문화는 더 굴러떨어지며 사람들은 책을 더 안 읽고 말더라도 책은 책입니다.

 책을 책 그대로 바라보고, 헌책을 헌책 그대로 껴안으며, 헌책방은 헌책방 그대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틀림없이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이상한 나라입니다. 이런 이상한 나라에서 책을 다루는 사람은 바보라 합니다. 헌책을 다루는 사람은 더 못난 바보라 합니다. 그런데 참 바보는 누구일까요? (4343.2.12.쇠.ㅎㄲㅅㄱ)


 ┌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매진 펴냄,2009)
 ├ 글 : 윤성근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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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헌책이다 - 함께살기 최종규의 헌책방 나들이
최종규 글 사진 / 그물코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 2010년 올해에 "헌책방 이야기" 세 번째 낱권책을 써내려 하는데, 시간이 될는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벌써 여섯 해가 지난 2004년에 내놓은 <모든 책은 헌책이다>를 놓고, 왜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는가를 밝혔던 글을 크게 손질해서 걸쳐 놓는다. 2004년이면 아직 '글과 말을 한창 가다듬으며 고치던 무렵'이라서 내가 쓴 내 글임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2010년 오늘 쓰는 글 또한 앞으로 2020년이 되어서 돌아본다면 다시금 못마땅할 테지. 2030년이나 2040년을 맞이한 때에도 나 스스로 내 글에 별을 다섯 꾹꾹 눌러 채워서 줄 수 있게끔 더 갈고닦으며 애써야겠다고 느낀다 .. 










 1. 모든 책은 헌책이다 (그물코 펴냄,2004)
 : 헌책방 사라질까 걱정되어 쓴 책



 (1) 왜 헌책방을 이야기하는 책을 냈는가?


.. 그저 인터넷과 헌책방 소식지로만 조용히 헌책방 이야기를 하고팠지만, 이러다가는 헌책방이 다 사라질지도 모르고, 헌책방을 소중한 책 문화와 책 쉼터로 느끼지 않거나 못하는 아쉬운 우리 현실과 눈높이를 가다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 하나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  (머리말)


 저는 ‘울타리 허물기’를 좋아합니다. 일부러 울타리를 허물지는 않으나,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엉뚱하고 말도 안 되는 울타리’가 참으로 많다고 느낍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일이라면서 모두들 쉬쉬하거나, 뒷꽁무니에서 몰래 울타리를 넘나들며 제 뱃속을 채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무런 울타리 없이’ 살면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2004년 여름과 가을에 국립국어연구원에서 우리 말 강의를 했습니다. 이때 국립국어원에서는 저보고 양복에 넥타이에 구두를 신고 오라고 몇 번이나 힘주어 말하더군요. 첫날은 그렇게 차려입고 갔습니다. 그렇지만 혼인잔치에서도 양복 차려입기를 힘들어 하는 저로서는 양복 옷감에는 두드러기가 납니다. 출판사에서 영업일을 할 때에도 우리 옷을 갖춰 입은 저로서는 참 죽을 맛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강의를 앞으로도 해야 하나 생각한 끝에, 저는 제 길대로 살며 제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니, 다음 강의부터는 양복을 벗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반바지를 입었습니다. 그러면서 늘 자전거를 몰고 찾아갔습니다.

 처음에는 건물 지킴이가 ‘웬 미친놈이 다 들어오나?’ 하면서 부리나케 달려와서 제 앞을 가로막더니, 제가 국립국어원에서 ‘강사로 모신 분’임을 안 다음부터는 꼬박꼬박 거수경례를 붙이더군요. 강사가 꼭 양복 차림이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머리에 지식을 가득 넣은 분들을 비롯하여, 건물을 지키는 분들까지도 옷차림으로 사람을 재고 따지는 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새삼 느꼈습니다. 아니, 난 분이든 든 분이든 찬 분이든 빈 분이든 하나같이 양복차림입니다. 가벼운 옷이나 시원한 옷을 입고 잘 가르치는 일이 우리한테 더 좋지 않을까요? 값싸고 겉치레하지 않는 옷으로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는 길이 우리한테 더 즐겁지 않을까요?

 헌책방을 생각해 봅니다. 헌책방 문화밭에도 ‘높직한 울타리’가 있습니다. 어느 헌책방에서든 그곳 이야기만 해야지, ‘그곳 아닌 다른 헌책방 이야기’나 ‘다른 헌책방을 알려주는 일은 하지 말’도록 말없이 서로서로 다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꾸리는 헌책방에서 다루지 않거나 없는 책이 있을 때에도, 웬만한 헌책방 임자들은 “다른 헌책방에 가도 없는 책이다” 하고 딱 잘라 말하기 일쑤였습니다. 그 헌책방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다른 헌책방이 있고, 제가 알기로는 당신 헌책방이 아닌 다른 헌책방에 바로 그 책이 틀림없이 있는데에도 그리들 말했습니다. 제가 ‘헌책방 길그림’을 그려서 사람들이 한 동네 곳곳에 깃들어 있는 헌책방을 두루두루 다닐 수 있도록 길잡이를 삼고자 나누어 주면, 헌책방 일꾼들은 이 길그림을 썩 못마땅해 했습니다. 당신 가게로 찾아오는 책손이 다른 가게로 빠져나갈까 걱정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더 나은 헌책방도 더 나쁜 헌책방도 없는데, 책을 500원이나 1000원 더 싸게 파는 곳이 훨씬 좋은 헌책방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는 헌책방 조합이 없기도 하지만, 어려운 가운데 서로서로 돕는 마음바탕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책손도 다르지 않습니다. 헌책방 헌책은 ‘세상에 딱 한 권’일 때가 잦다 보니, 헌책방이 어디어디에 있다는 정보는 아주 ‘고급’ 정보였고, 이 같은 정보를 다른 이(경쟁자)한테 눈꼽만큼도 알려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저는 서울 시내에 있는 250군데쯤 되는(2004년 요즘 잣대로) 헌책방을 그분들이 잘 모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웬만한 분들은 그럭저럭 이 많은 곳들을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저 일부러 아는 척을 안 할 뿐이요, 당신들이 바라는 ‘좋은 책이 나오는 텃밭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분들은 제가 그리는 헌책방 길그림 때문에 고급 정보가 새어나갈까 봐 몹시 안절부절해 했습니다.

 저는 이 모습도 싫고 저 모습도 싫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웅크리며 살아야 하는가요. 우리는 왜 내가 더 가지려 하는가요. 좋은 책을 다루는 마음밭이라면 좋은 넋을 키워야지요. 좋은 책을 읽는 마음그릇이라면 좋은 얼을 가꾸어야지요.

 나날이 헌책방이 사라지고 죽어 가는데, 이러한 헌책방 정보와 소식을 널리 나눠서, 헌책방을 즐겨 찾는 이와 헌책방을 그럭저럭 가는 이와 헌책방을 아직 잘 몰라서 안 거나 못 가는 이 누구한테나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94년부터 헌책방 나들이 이야기를 글로 썼어요. 박상준 님이라고, sf책을 즐겨 찾는 분이 쓴 ‘헌책방 순례기’가 열두 꼭지 있는데, 이 열두 꼭지에서 미처 다루지 않은 헌책방을 바탕으로 사람들한테 널리 알려지지 못한 헌책방을 찾아내어 이야기해 주고 길그림을 그리며 소식지를 펴내어 좀더 많이 즐겁게 헌책방을 드나들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1998년 1월 6일에는 〈헌책방 사랑 누리〉라는 모임을 만들어 정식으로 헌책방 정보를 나누었습니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2000년 9월 14일부터 헌책방 이야기를 올리며 더욱 널리 정보를 나누었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해에 걸쳐 차곡차곡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나라안에서 내로라하는 돈있고 이름있는 출판사 세 곳에서 책을 내자고 연락이 왔으나 모두 손사래를 치고, 나라안에서 내로라할 이름도 돈도 힘도 없는 작디작은 생태환경책 출판사인 ‘그물코’에서 인세를 안 받기로 하면서, 드디어 2004년 5월에 그동안 쓴 글을 갈무리하여 책 한 권으로 엮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숱한 헌책방에서 고마움을 듬뿍 받았고 수많은 헌책에서 사랑을 널리 얻었으니 이름난 출판사에서 큰돈 받고 책을 내는 일은 꺼림칙했습니다. 조용히 한길을 다부지게 가는 출판사에서 아무 돈 안 받고 책을 내어 헌책방마다 돌며 제 책을 선물해 드리는 길이 제가 그동안 받은 따스함을 갚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2) 책에는 무얼 담았나요?


.. 헌책방에는 고운 옷차림으로 오지 마세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쌓인 책을 고개 숙여서 볼 마음가짐으로 오세요. 두어 시간 동안 먼지 구덩이 속에 파묻혀서 옷과 얼굴과 손에 시커먼 책 먼지를 묻힐 마음가짐으로 오세요. 그러면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이 반갑고 즐거운 ‘내가 모르는 좋은 책’을 헌책방에 한 번 갈 적마다 한 권씩 꾸준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  (24쪽)


 먼저, 헌책방에서 만날 수 있는 책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싸구려 책, 교과서와 문제집, 아이들 책 전집 …… 으레, 헌책방 헌책은 이러한 줄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책은 헌책이다》를 내기 앞서나 이 책을 내놓고 나서나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 책을 내놓은 다음 신문잡지방송 기자들이 헌책방을 엉뚱하게 바라보며 엉터리로 다루는 기사를 바로잡으시라고 퍽 긴 편지를 써서 보내는 한편 제가 낸 책을 읽어 보시라고 했지만, 한 번도 ‘잘못된 기사가 바로잡힌’ 일이 없습니다.

 참말로 헌책방에서는 어떤 책을 만날 수 있을까요? 헌책방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헌책방에서 어떤 책을 만나고 있을까요?

 신문이나 방송에서 헌책방을 취재하면서 늘 하는 말이 ‘가장 오래된 책’은 무엇이고, ‘가장 귀한 책’은 어떠하느냐는 타령입니다. 틀림없이 무척 오래된 책이 있는 헌책방이요 퍽 드물며 애틋한 책이 있는 헌책방입니다. 그렇지만 헌책방은 이렇게 ‘값비싼 옛책(고서)’만 다루는 곳이 아닙니다. 늘 살아 움직이는 책을 다루는 곳이요, 세월이 백 해가 흐르건 이백 해가 흐르건 우리들이 즐겁게 찾아볼 수 있는 책이 있는 곳입니다. 언제 보아도 새로우면서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울리는 책을 만나는 곳이 바로 헌책방입니다. 널리 사랑받는 책이라 하여 수십 수백 권을 갖추어 팔 수 없는 헌책방입니다. 거의 한두 사람한테만 팔 수 있는 책을 갖가지로 갖추는 헌책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그때 들어와서 그때그때 팔리기에 바지런히 다리품을 파는 사람과 곰곰이 헤아리는 눈썰미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헌책방 헌책을 알아보기는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새책방은 새로 나온 책을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도서관은 어느 주제 하나와 얽힌 책을 널리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헌책방은 갓 나온 책부터 나온 지 아주 오래된 책에다가, 도서관에서 ‘폐기 대상 도서’라는 이름을 붙이며 버리는 책하고, 학교에서는 ‘맞춤법이 옛날 얼개로 된 책’이라 하며 버리는 책과 함께, 사람들이 살림집을 옮기며 ‘짐덩이가 되기에 내놓는 책’까지 두루 받아들여 나누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한테는 ‘버리는’ 책이지만, 어떤 사람한테는 ‘둘도 없는 보배’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보는 책과 좋아하는 책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이와 같은 ‘다름’을 아주 온몸으로 느끼는 곳이 헌책방입니다. 새책방이나 도서관에서는 ‘팔리지 않겠다’ 싶어서 버리는 책이지만, 이렇게 버려지거나 책시렁에서 사라지는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우리 문화사와 언론사와 생활사를 밝히는 소중한 자료가 많습니다. 쿠테타를 일으킨 박정희 씨가 1961년 5월 30일에 뿌린 《지도자도》라는 책자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물러난다”는 조항을 넣은 팜플렛인데, 박정희 씨가 삼선개헌을 하면서 죄다 거두어들여 불태워 없애려던 책자입니다. 이런 책자는 새책방이나 도서관에 없어요. 어쩌다가 헌책방으로 흘러나오면, 또 고물상에 들어갔는데, 그 고물상을 찾아온 샛장수(중간상인)가 찾아내어 헌책방에 내다 팔면, 이제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2010년 1월에 드디어 2심 판결이 나온 ‘유재순-전여옥 판결’이 있습니다. 누리신문 〈오마이뉴스〉는 2004년부터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정 다툼에서 말이 많은 책 《하품의 일본인》(청맥,1994)이 어떠한 책인가를 알아볼 길이 있겠습니까? 이 나라 도서관에 유재순 님이 쓴 《하품의 일본인》이 번듯하게 자리잡고 있을까요? 그러나, 이 책은 헌책방에는 있습니다. 다만, 늘 있다는 소리가 아니라, 헌책방에는 이 책이 들어옵니다. 저도 이 책 《하품의 일본인》을 헌책방에서 세 번 만났습니다. 〈월간조선〉 기자 조갑제와 정호승이 함께 지은 《김현희의 하느님》(고시계,1990)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시쓰는 정호승 님이 〈월간조선〉 차장으로서 조갑제 씨한테서 배웠음을 아는 분은 생각 밖으로 퍽 드뭅니다만, 이 두 사람이 《김현희의 하느님》 같은 책을 함께 쓴 줄을 아는 사람은 훨씬 드뭅니다. 다른 때도 아닌 전두환-노태우 두 군사독재자가 정권을 움켜쥐고 있을 때에 〈월간조선〉 기자로 일하며 낸 이 책 또한 도서관에서 찾아볼 길이란 없습니다. 아주 마땅하게도 헌책방을 뒤지고 훑으며 찾아냅니다. 《백두산의 옛 전설》 같은 북녘책이나, 《조선족백년사화》 같은 연변책 또한 새책방이나 도서관에서는 갖추지 않습니다. 정치나 사상하고는 아무런 이음줄이 가 닿지 않는 이 같은 책들이라면 이 나라 새책방과 도서관에서도 갖추어 주면 좋으련만, 이런 책마저 남녘땅에서는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오로지 헌책방마실을 할 때에 눈밝히며 찾아낼 수 있습니다.


.. 서울에서 파는 헌책과 제주에서 파는 헌책과 대구에서 파는 헌책과 청주에서 파는 헌책이 다릅니다 … 헌책방 헌책은 그저 책상머리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또각또각 단추를 누르며 주문할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 헌책은 책으로서도 값어치가 있고 책에 담은 줄거리로도 우리에게 즐거움과 일깨움을 줍니다. 나아가 옛 느낌을 지금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어요. ‘다른 이가 읽은 낡거나 오래된 책’만을 헌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  (56∼58쪽)


 다음으로는 ‘헌책’이 무언지 제대로 알리고 싶었습니다. 새책방이나 도서관을 찾아가 보면 서로 엇비슷해서 어디를 가나 구경할 수 있는 책이 비슷합니다. 이 책방에 가면 이 갈래 책이 더 있다거나, 저 도서관에 가면 저 갈래 책을 남달리 갖추었다고 하는 빛깔이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 나라 도서관은 공부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네 새책방은 잘 팔리는 책으로 장사하는 돛데기시장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전국 어디를 가도 똑같은 새책방이요 도서관입니다. 그러나, 전국 어디를 가든, 서울 시내 어디를 가든 다 다른 헌책방입니다. 동네헌책방이든 큼직한 헌책방이든 모양새와 매무새가 다릅니다. 갖춘 책이 다르고, 사고파는 책값이 다릅니다. 어느 곳에서는 어린이책이 값싸고, 어느 곳에서는 인문사회과학책이 값쌉니다. 대전에는 대전과 충청도 문화와 사회를 엿볼 수 있는 헌책이 있고, 광주에는 광주와 전라도 문화와 사회를 엿볼 수 잇는 헌책이 있어요.

 우리가 다리품을 팔면서 찾아가 둘러보고 헤아리며 사들이는 헌책 하나는, 오래된 종이를 만지는 느낌뿐 아니라, 책을 처음 만들었을 때 느낌과 때로는 지은이가 누군가한테 선사한 자국을 보면서 받는 느낌까지 풋풋하게 내 마음속로 삭이거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줄거리만 살피지 않습니다. 책 한 권과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통째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헌책방 헌책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책 문화가 더없이 낮습니다. 우리는 ‘경제 선진국’만을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돈벌이에만 목매달고 있는 탓입니다. 앞선 나라가 되자면, 돈만 잘 버는 나라가 아니라, 사람들 누구나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경제 선진국이란 그지없이 못난 이름이요, 참다운 앞선 나라라 한다면, ‘문화 선진국’이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이리하여,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건물임자가 멋대로 뻥튀기하듯 올리는 가게세 때문에 쫓겨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헌책방이 건물 한켠에 들어오면 다시 옮기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쓰고 도와줄 수도 있는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헌책방만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새책방 하나가 깃들어도 오래오래 자리잡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나라 헌책방은 ‘책방 장사’가 아닌 ‘고물 장사’ 대접을 받아 왔습니다. 아직까지도 적잖은 이들은 ‘헌책방 = 고물 장사’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새책 장사이든 헌책 장사이든 똑같은 책장사인 줄을 깨닫지 않습니다. 사회에서도 나라에서도 헌책방 장사를 아주 낮보고 깔보는 셈입니다. 우리네 헌책방은 언제 한 번 제대로 책 문화로 꽃피우지 못하는 찬밥 대접이었고, 낡아빠진 책이나 팔아먹는 ‘떨거지’쯤으로 여기는 비뚤어진 생각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3) 나는 계약서를 이렇게 썼다


 1.저작권법 제3장 출판권의 조항을 따른다.
 2.인세는 책에 매긴 값으로 따져 10퍼센트로 하되, 팔린 부수로 셈한다.
  (팔린 부수가 10만 권 단위로 넘을 때에는 1퍼센트씩 올린다.)
 3.출판권자가 책이름을 짓고 책값을 매긴다.
 4.지은이한테 첫 판은 10권, 새로 찍을 때에는 3권을 보낸다.
 5.지은이가 책을 살 때에는 책에 매긴 값으로 따져 70%로 판다.


 지난 2003년부터 올 2004년에 걸쳐 저작권법 공부를 아주 부지런히 했습니다. 저작권법이란 ‘저작물을 만드는 사람(책이나 노래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공연이나)’한테 권리를 지켜 주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작권법이 나쁘게 쓰이는 일이 아주 흔합니다. 출판사에서 지은이한테 내미는 ‘출판권 설정 계약서’를 보면, ‘대한민국 저작권법’을 거꾸로 풀이해서 저작권자한테 있는 권리를 빼앗아 마치 출판사한테 그러한 권리가 있는 듯 쓰는 일이 흔합니다. 제가 몸담았던 출판사도 그러했고, 제가 아는 분들 출판사도 그러합니다. 저작권협회에서 만든 틀과는 사뭇 다릅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우리한테는 우리 얼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책을 내려는 저작권자나 책을 펴내는 출판사나 저작권법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계약서를 쓰는 사람이 없겠구나 싶더군요. 따지고 보면, 책이름이나 책값을 출판사 마음대로 붙일 수 없습니다. 저작권법을 보면 책이름이나 책값은 저작권자(글쓴이)하고 뜻을 모아서 붙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작권법에는 겉그림과 판크기와 종이까지도 저작권자와 ‘협의’하라고 밝혀 놓습니다. 교정과 교열도 저작권자가 할 몫으로 되어 있으며, 다만 출판사에서 ‘도와줄 수 있다’는 보탬말이 있습니다. 아주 마땅한 이야기인데, 저작권자는 책에 얽힌 모든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출판사는 출판권자로서 책을 만든 다음에 ‘파는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출판사가 ‘책을 제대로 팔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저작권자는 언제라도 이 책을 판매중지를 시킬 수 있도록 저작권법에 똑똑히 나와 있고, 이에 따라 손해배상까지 물릴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계약서’에 낱낱이 밝히는 출판사는 아직까지 못 보았습니다.

 그래, 그물코 출판사하고 계약서를 쓸 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계약서는 제가 준비할게요.” 하고요. 그러면서 조항을 딱 다섯 가지로 줄여서 계약서를 마련했습니다. 요즈음은 계약서를 쓸 때에 다른 조항은 하나도 안 넣고 오로지 하나, 1번만 넣습니다. “대한민국 저작권법(일부개정 2003.5.27 법률 제06881호)을 따른다”고만 적어 넣습니다. 이런저런 군말이란 부질없고, 그저 우리 법률에 나와 있는 대로만 하면 잘못되거나 어긋날 일이 한 가지도 없습니다.
 책을 낸 출판사에서는 계약서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4) 책을 엮은 사람한테 듣다


 제 책을 내기 앞서, 제 책을 내주겠다고 한 출판사 일꾼한테 몇 가지를 여쭈었습니다. 먼저, “헌책방을 이야기하는 책을 낼 까닭이 있었나요?” 하고 여쭈었습니다. 출판사 일꾼은, “없어져 가는 것들, 꼭 있어야 하고 나누어야 하는 것을 조용히 한 사람이 오래 찾은 것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책을 읽고 나서 헌책방을 가면 더 많이 찾아가게 될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궁금해서라도 한 번 가 보면 자기 나름대로 헌책방의 매력을 찾게 될 거 같아요. 찾고 싶던 책을 찾게 되는 그런 것들 … 그래서 저와 사장님도 이 책을 낸 뒤 헌책방을 자주 가게 되었어요. (절판되어 찾기 어려운) 만나고 싶던 책도 만나게 되었고.” 하고 이야기합니다.

 다음으로, “책을 내며 아쉬운 대목이 있다면요?” 하고 여쭈었고, 출판사 일꾼은, “가장 빨리 눈에 띈 건 틀린 글씨 많은 거, 표지. (표지를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낱말모음도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찾아가는 길그림이 다 있었으면 좋겠는데, 내자 마자 이사하고 없어진 헌책방이 있고. (버스길도 다 적었는데, 이명박 시장이 7월 1일부터 버스길을 다 바꾸는 바람에 쓸모없이 되어 버리기도 했고.)”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물코 출판사는 환경책을 전문으로 내는 곳인데, 헌책방을 이야기하는 책과 환경은 어떻게 이어진다고 보시나요?” 하고 여쭈었습니다. 출판사 일꾼은, “쓰고 버리지 않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 쓸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중간 장치, 중간 기능이랄까요, 책에서 ‘하수구 기능을 하는’ 이야기를 한 것처럼, 다시 읽을 수 있고, 읽을 만하고, 읽으면 좋은 책인데, 그걸 버리지 않고 (다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것) 굳이 새 거 사지 않고 헌책 찾아 읽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5) 헌책 한 권으로 세상을 바꾸기


 《모든 책은 헌책이다》에 실은 서울 독립문 〈골목책방〉 꼭지를 보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1980년 7월 5일치 〈조선일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헌책방에서 만난 신문자료를 다룹니다. 언젠가는 1940년에 나온 〈조선일보〉 호외 한 장을 헌책방에서 찾았는데, 그 호외는 일본 내각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알렸습니다. 호외는 잠깐 뿌리고 사라지기에 쉽게 만나기 어렵지만, 신문이 흘러온 역사를 밝혀 주는 소중한 언론사 자료예요. 이런 자료를 하나하나 만나다 보면 잊혀지고 감춰졌던 우리 역사를 차근차근 아로새길 수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이나 자료가 뭐 대단하느냐고 묻는 분이 있지만, 그런 물음에는 늘 “참으로 대단하답니다” 하고 대꾸하곤 합니다. 한국외국어대 정진석 교수, 〈오마이뉴스〉 정운현 기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서울대 신용하 교수를 비롯해 숱한 교수와 기자와 지식인들이 헌책방에서 소중한 자료를 캐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파헤치거나 살피는 갈래와 얽힌 자료를 찾아내고자 눈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분들 누구나 헌책방에서 만나는 자료를 놓고 한낱 ‘종이뭉치’라 하거나 ‘싸구려 헌책’이라 하지 않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애틋한 책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헌책방이라는 곳은 소중하거나 애틋한 역사 자료라든지 생활문화 자료를 캐내는 곳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이삿짐 뭉치와 함께 이러저러한 자료가 함께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진평론가 정진국 씨는 《잃어버린 앨범》(눈빛)이라는 책에서 ‘사진관에서 찍는 가족 단체 사진’이 우리네 옛 생활문화 역사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헌책방을 다니다 보면 이사를 가거나 이민을 떠나는 집에서 내놓은 ‘사진첩’을 가끔가끔 구경하곤 합니다. 이 낡은 사진첩은 여느 자리 수수한 사람들이 어떤 옷차림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사진을 찍었는가를 살펴보도록 돕는 자료가 됩니다. 말 그대로 ‘생활문화 역사’를 보여줍니다. 여느 자리 수수한 사람들이 주고받은 편지도 그렇습니다. 서울 불광동 〈작은우리〉 꼭지에서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때, 베트남에서 보낸 ‘군사우편’ 봉투와 얽힌 여러 이야기를 다룹니다. “새마을 웃음을 짓는 국군장병”, “색출하자 붉은 마수” 그림이 들어간 끔찍한 엽서 …… 이 모두가 제도권 안쪽에는 거의 드러나지 못한 채 파묻히고 있는 우리 삶 발자취입니다.

 시간을 죽인다거나 심심풀이로, 가벼운 소설 한 권 찾을 마음으로도 헌책방에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가는 분이 많습니다. 참고서나 문제집을 사러도 헌책방에 갑니다. 좀 값싸게 책을 사고픈 마음에 가는 분이 많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이고 다른 이야기이니, 다 다른 까닭으로 헌책방을 찾아갑니다.

 이런 책을 찾는 사람한테는 이런 책이 있고, 저런 책을 찾는 사람한테는 저런 책이 있습니다. 하이틴로맨스소설이 한켠에 꽂히고, 세계문학전집이 한켠에 꽂힙니다. 둘은 나란히 꽂히는 책이요 똑같이 사랑받는 책입니다. 높이와 낮이가 따로 없습니다. 깊이와 얕이 또한 따로 없습니다. 모든 책은 고르게 다룹니다. 모든 책은 똑같이 사랑스럽습니다. 서울 인사동 〈통문관〉 이겸노 님한테 ‘풀꽃상’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만, 〈통문관〉 큰일꾼한테뿐 아니라 여느 동네헌책방 일꾼한테도 똑같이 풀꽃상을 줄 노릇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그렇다고 헌책방 장사를 하는 사람이 훈장을 받거나 공로패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고갱이는 ‘헌책방 장사’를 한 사람들이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에게 좋은 책을 하나 쥐어주려고 애썼던 일이 있었음을 잊지 말자는 거지요.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 눈에는 잘 띄지 않아도 뒤에서 힘이 되도록 밑바탕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밑바탕이 되어 주는 사람들은 헌책방 주인이기도 하고, 구멍가게 주인일 수도 있으며, 여관 주인일 수도 있고, 하숙집 주인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네들이 뭐 보상받겠다고 나서겠습니까 ..  (308∼309쪽)


 세상을 바꾸는 힘은 보통사람들 손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보통사람들이 투표를 해서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바꾸고, 여론을 모아 정치와 사회와 경제를 뜯어고치고, 집회나 시위를 벌이기도 하면서 우리 나라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모든 일은 ‘보상이나 훈장이나 공로패’를 바라며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 함께 즐거웁고자 하는 일입니다.

 헌책방에서는 반가운 책 하나를 값싸게 만나기도 하지만 소중한 자료 또한 만납니다. 사람들 살아가고 부대끼는 모습을 느끼고, 우리한테 그지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싱그러운 자리가 어디이며 어떠한 모습인가를 곰곰이 돌아보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와 책과 사람이 하나하나 모이고 뭉치면서 바야흐로 우리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올망졸망 북돋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믿음을 고이 품에 안으면서, 이 믿음에 살포시 힘을 실으면서, 우리들 보통사람 힘을 하나로 엮어낼 바탕을 배우는 ‘헌책 하나를 즐기자’는 뜻에서 《모든 책은 헌책이다》라는 책 하나 어줍잖게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4337.9.6.달.처음 씀/4343.1.16.흙.고쳐씀.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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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헌책 좋아하세요? - 대전 동구청 앞 헌책방이 모여있는 거리
    from 생활미감, 일상의 소소함에서 느끼는 행복 2010-04-15 11:08 
    헌책 좋아하세요? 저는 개인적으로 책에서 나는 향을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래된 책에서 나는 특유의 그 향들이 좋아하죠. 그래서 가끔은 책이 필요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헌책방을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전에서도 그 향을 즐길 수 있는 운치있는 헌책방들이 모여있는 골목이 있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위치는 대전 동구청 앞. 행정구역 상으로는 동구 원동(중앙시장길 100번지 일대). 서점의 수는 약 20여개가 모여있으며, 헌책 뿐만 아니라 고서적,..
 
 
카스피 2010-01-18 11:48   좋아요 0 | URL
모든 책은 헌책이다는 예전에 본 책이네요.저도 헌책방을 자주 드나드는데 예전 최종규님과 같이 헌책방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올리신 헌책방지도가 많은 도움이 도었지요.전국에 있는 헌책방을 다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강원도,경상남북도(대구,부산은 제외)만 못가보고 웬만한 곳은 다 다녀본것 같군요.심지어 제주도 한밭서점까지 다녀왔네요^^
그나저나 헌책방은 계속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새책도 워낙 안팔려서 헌책방으로 오는 책들이 많이 줄어서라고 오복서점 쥔장께서 말씀하시더군요.참 안타까운 현실이네요

숲노래 2010-01-18 16:38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책을 '골고루 읽고 사랑하며' 내 삶을 따스히 보듬으면서, 헌책방뿐 아니라 동네 작은 새책방도 살아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카스피 2010-01-25 22:18   좋아요 0 | URL
맨위의 사진은 지금은 증산동에 있는 예전 모아북 내부 사진같군요.두번째는 홍제 대양1서점 사장님같고,세번쨰는 뿌리서점 사장님 사진같고,마지막은 서울역부근에 있는 헌책방(갑자기 이름이 기억안나네요)사진 같은데 맞는지 모르겠네요.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 그리고 책과 함께 만난 그림들……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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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과 글이 내 삶이 되어야 태어나는 책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6] 곽아람,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12월 1일 아침에 광화문 앞길을 걸어서 지나가는데, 길거리에 선 나무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가 싶어 발걸음을 늦추고 올려다보니,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은 조그마한 전구가 달린 줄을 나뭇가지에 촘촘하게 걸어 놓고 있습니다. 이날 저녁 다시금 광화문 앞길을 걸어서 지나가다가 제 앞에서 걷던 몇몇 사람이 “이야, 예쁘다!” 하면서 ‘아직 불을 넣지 않고 전구만 달아 놓은 나무 모습’을 올려다봅니다.

 이튿날 12월 2일 아침에 광화문 앞길을 또 지나갑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나무마다 사람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광화문 둘레 나무들은 여느 때에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사람들 담배 연기에 시달려 왔는데, 이제는 십이월과 일월을 맞이할 때까지 ‘예수나신날 맞이 불밝히기’에 시달려야 합니다.


.. 감명 깊게 읽은 책 속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다가 거기에 걸맞은 그림들을 대입해 내계內界의 깊숙한 곳에 고스란히 저장해 놓는 것은 나의 오랜 독서 습관이다. 삶이 버겁고 힘든 날이면 고요히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 한 구석에 웅크린 채, 쌓여 있는 이미지들을 꺼내 하나씩 내면의 스크린에 비춰 보곤 한다. 그것이 내가 삶을 견뎌내는 하나의 방편이다. 외계外界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강도로 압력을 가해 올 때, 그 버거운 삶의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어떤 책들은, 그림이 되어 마음속 풍경으로 간직된다 ..  (머리말)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과 나무가 뒤집어쓴 전깃줄에서 눈을 뗍니다. 길을 빠르게 걸어가면서 책에 눈을 박습니다. 많은 사람들한테는 서울에 볼거리 놀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곳일 텐데, 저로서는 서울에 쉴 곳과 마음 둘 곳과 사랑 나눌 곳이 없다고 느낍니다.

 우람한 건물과 늦은 밤까지 꺼지지 않는 등불과 끝없이 오가는 자동차 물결이 있는 서울입니다. 그리고, 흙에 뿌리내리는 나무가 없고 바람에 씨앗을 날리는 들풀과 들꽃이 내려앉을 땅이 없으며 바람을 타고 흐르는 구름을 만나기 어려운 서울입니다. 버스 택시 짐차 오토바이 자전거 모두 몰려 있는 서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두 다리로 느긋하게 오가면서 둘러볼 터전이 없는 서울입니다.

 서울마실을 다루는 책이 곧잘 나오고, 서울 시내를 자전거나 두 다리로 다니며 만난 예쁜 맛집과 멋집을 다루는 책이 더러 나옵니다. 그런데, 이 넓고 크며 사람 북적이는 서울에서 ‘책에 몇 군데 모아 놓아야’만 하도록 맛집과 멋집이 적은가요. 굳이 책에 담지 않아도 되도록, 아니 책에 담을 수 없도록, 어느 곳에 깃들고 어디를 바라보아도 넉넉하고 알찬 서울은 될 수 없는지요.

 엊그제 혜화동 어느 술집에 들어갔다가 인천과 견주어 안주값이 두 곱이 비싼 차림판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시킨 안주가 나왔을 때에는, 이 안주값이 인천과 견주어 두 곱이나 되지만 부피는 반이 안 되고 맛은 더 떨어집니다. 다시금 크게 놀랍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습니다. 인천과 견주어 이곳 서울 혜화동 술집 자리값은 몇 곱이나 비쌉니다. 제가 드나드는 인천 술집은 가게를 꾸미는 데에 따로 돈을 들이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인테리어비로 몇 억이니 권리금으로 몇 천만 원이니 또 무엇무엇에 얼마니 하면서 들이붓습니다. 이렇게 들이부은 곳은 물건값도 높을 테지만 내어주는 밥상 부피도 작을밖에 없습니다.


.. 틈이 날 때마다 한 권씩 그 책(토지)들을 뽑아다 읽었다. 재미있어서 여러 번 읽은 권도 있고, 한 번 읽고 지나쳐 간 권도 있다. 계집아이다운 허영심이 강했던 어릴 때는 여주인공 최서희에 끌렸다. 오만하고 당당하고 미인에다 영리하고 자존심 강한,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의 머슴과 결혼하고 마는 여자 … 나는 여성적인 매력을 한껏 발휘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것이 페미니즘의 본령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가 자신이 모든 권력을 갖고 있다고 믿게 만들면서 실질적으로는 교묘하게 남자를 지배할 줄 아는 것이 대놓고 으르딱딱대어 그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지 않은가 ..  (20, 112쪽)


 인천은 제 고향마을입니다. 그러나 제 고향마을이라 해서 다른 데보다 더 낫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고향입니다. 예부터 인천사람은 인천에 뿌리를 내리려 하지 않았고, 으레 서울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인천에 머물거나 남는다든지, 저처럼 서울로 나아갔다가 거꾸로 인천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바보나 멍텅구리나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어리보기로 여겨 버릇합니다. 한 번 서울로 나아갔으면 두 번 다시 인천으로 돌아올 일이 없어야 하고, 인천에서 무슨 일거리나 일자리가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런 흐름이 아니더라도 똑같은 일을 인천에서 할 때와 서울에서 할 때에는 다릅니다. 받는 일삯이 서울에서 훨씬 높고, 받는 대접이 서울에서 훨씬 넉넉합니다. 시를 쓰건 소설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사진을 찍건, 인천에서는 아무 티가 나지 않을 뿐더러 작품을 그러모아 책을 내거나 전시마당을 마련하기는 벅찹니다. 그만큼 서울이 눈높이가 높다 할 텐데, 이렇게 서울만 홀로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인천은 인천다움을 잃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천은 부천다움을 잃고 수원은 수원다움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광명에서 광명다움을 찾기 어렵고, 안양에서 안양다움을 읽기 힘듭니다. 과천에는 어떤 과천다움이 있을까요? 성남에는 무슨 성남다움이 있을는지요? 고양은? 파주는? 남양주는? 군포는? 안산은? 시흥은? 구리는? 김포는?

 사람은 저마다 고유하게 아름답고 어여쁘며 사랑스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하게 반갑고 멋지며 믿음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터 흐름을 돌아보면 사람이 사람값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움을 추스르기 어렵습니다. 사람한테서 사람맛을 찾기 힘듭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볼 수 없도록 가로막힙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시험성적으로 차례를 매깁니다. 나이가 들면서는 학교이름으로 차례를 매깁니다. 학교를 다 마치면 은행계좌 크기로 차례를 매깁니다. 이러는 동안 옷차림과 자가용 크기와 아파트 넓이를 놓고 차례를 매깁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즐겁게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라, 사람이 숫자가 되어 서로 치고박으며 죽도록 다툼질을 해야만 하는 터전입니다.

 이는 보수나 수구라는 쪽에서만 벌어지는 싸움질이 아닙니다. 진보나 개혁이라고 하는 쪽에서도 똑같이 벌어지는 툭탁질입니다. 이제는 누구나 알듯이 ‘같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에다가 이주노동자가 서로 엇갈린 모임이 되었습니다. 공무원 숫자는 나날이 늘고, 교사 대접은 나날이 나아지는데, 공무원이 여느 사람 앞에서 온몸을 바친다든지, 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참 가르침을 펼친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늘 한결같이 들을 길이 없습니다.


.. 보내는 자는 인쇄체로 찍히는 말들에 대해 너그럽다. 받는 자는 무미無味한 그 자형字形 때문에 더욱 상처받는다. 홧김에 발신 버튼을 누르는 순간 메일이 발송된다. 그 어떤 손의 온기溫氣도 느껴 보지 않은 말들이 차갑게 점멸하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 수신인의 동공을 찌르는 것은 순간이다. 문자나 이메일로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54쪽)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곽아람 님은 스스로 ‘보수 신문’이라고 일컫는 〈조선일보〉 기자입니다.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라고 하는 일본 글쟁이를 뛰어넘는 글쟁이를 꿈으로 삼고 있는 서른한 살 젊은 넋입니다.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를 쓴 곽아람 님은 당신 일터를 ‘보수 신문’이라고 밝히지만, 〈조선일보〉는 조금도 보수 신문이 아닙니다. 곽아람 님 당신이 〈조선일보〉에 다니기 때문에 이 신문이 나쁘다거나 못된 짓을 한다거나 끔찍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어디에서 일을 하고 무엇을 읽으며 어떻게 살든 세상 흐름은 옳고 바르고 알맞게 바라보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일보〉는 보수 신문이 아닙니다. ‘수구 기득권’ 신문입니다. 글쓴이 곽아람 님은 당신이 ‘보수 신문에서 일하는 모습’하고 ‘아일랜드 망명자 코즈모폴리턴 조이스’하고 견주면서 쓴웃음을 짓는데, 누군가와 스스로를 견주는 일은 자유입니다만 밑바탕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견주기란 부질없는 말장난입니다. 뜬금없는 둘러대기입니다. 곽아람 님은 〈조선일보〉에 들어간 다음부터 “나는 취직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틀림없이 곽아람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그림이 그녀에게》에 이어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곽아람 님 당신은 부산과 경남 진주를 거쳐 서울에서 살면서 광화문 큰길을 거닐면서 기자로 일할 수 있습니다.


.. 당시의 국어 시간에 우리는 “난 보랏빛이 좋아!”라는 소녀의 말에 밑줄을 쫙 긋고 선생님이 불러 주는 대로 “보랏빛 = 죽음을 상징하는 색, 소녀의 죽임을 암시하는 복선”이라고 적어 넣곤 했다. 보랏빛과 죽음과 복선의 관계를 묻는 문제가 시험에 단골로 출제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이 눈에 따가웠다”라는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은 잊어버리고 오직 기계적으로 암기한 보랏빛에 대한 구절만 머리속에 남겨 놓은 채 성인이 되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어른이 된 후에도 소설을 떠올리고, 다시 읽고, 어렸던 중학생 때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애틋한 감정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인 걸까 … 근 20년 만에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고 나자 저절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악상惡喪’과 ‘잔망스럽다’의 뜻을 달달 외우며 읽었던 열네 살 때와는 판이한 감정이었다 …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강의를 빼먹어도, 숙제를 해 가지 않아도, 어떤 물리적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던 낯선 체제가 혼란스러웠던 우리 신입생들은 과방에 우루루 몰려 앉아 수군거렸다. “왜 이곳에서는 아무도 우리에게 무얼 하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지? 담임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어.” ..  (66, 68, 218쪽)


 곽아람 님 책은 저보다 우리 옆지기가 먼저 읽었습니다. 허먼 멜빌을 아주 좋아하는 옆지기는 멜빌이 쓴 책은 헌책방을 샅샅이 살펴 거의 모든 판본을 다 모아서 거듭 읽었습니다. 저는 이에 발맞추어 1960년대에 나온 영화 대본(영화 ‘모비딕’ 번역판 대본)을 헌책방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선물로 사 주기도 했습니다. 곽아람 님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에서도 허먼 멜빌 문학을 다룹니다. 그러나 곽아람 님이 다룬 멜빌은, 또 박경리는 박완서는 황순원은 최인훈은 카프카는 레핀은 포크너는 호손은 조이스는 …… 곽아람 님 스스로 당신 길을 찾으려고 만난 책이 아니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억지스레 읽거나 외워야 했던 시험공부였습니다. 대학교를 다니며 ‘독후감 보고서’를 내야 하는 책이었습니다.

 옆지기가 들려주는 말로도 느끼고 저 스스로도 이 책을 읽으며 느낍니다. 그리고 곽아람 님 스스로도 밝힙니다. 당신이 ‘어리고 푸른 날’ 읽은 책은 ‘읽기’조차도 하지 않은 숫자와 글자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제서야 뒤늦게 다시 읽으며 지난날에는 조금도 느끼지 못한 아름다움과 빛남과 사랑스러움을 받아들이며 눈물을 흘린다고.


.. 작가의 분신임에 틀림없는 가브리엘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눈에 안경을 쓴” 깐깐하고 자기중심적인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소설을 처음 읽은 지 정확히 8년 반 만에 다시 책을 꺼내어 읽으면서, 그새 이른바 ‘보수 신문’ 기자가 된 나는 영국 보수 신문에 글을 쓴다는 이유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부터 비난받는 가브리엘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국가도, 종교도, 가정도 섬기지 않겠다”면서 37년을 고국 아일랜드를 떠나 망명자로 떠돌았던 코즈모폴리턴 조이스도 참 살기 힘들었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  (100∼101쪽)


 곽아람 님은 짧으면 예닐곱 해, 길면 스무 해까지 거슬러 생각하면서 당신 책읽기가 이제서야 바른 자리로 접어들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직 곽아람 님은 ‘책읽기’로 스며들지는 못합니다. ‘책훑기’로 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책읽기를 한다고 할 때에는 줄거리를 읊거나 주인공 이름을 들먹이는 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삶이 달라지고 우리 눈길이 새로워지며 우리 몸이 거듭나는 데로 이어집니다. 참되고 그릇된 책읽기가 아니라, 책읽기라면 ‘줄거리 새기기’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죽이려고 책을 손에 쥐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괜한 겉멋과 겉치레를 키우고자 책을 사들여서 집구석 한켠에 으리으리한 서재를 키워 놓지 않으니까요.

 오로지 내 마음밭을 따뜻하게 하고자 책을 ‘읽’습니다. 오로지 내 마음바탕을 넉넉하게 일구고자 책을 ‘읽’습니다. 오로지 내 생각줄기를 알차게 갈고닦고자 책을 ‘읽’습니다. 헌책방에서 한 사람 손때 묻은 책을 찾아서 읽든, 도서관에서 숱한 사람 손길을 탄 책을 빌려서 읽든, 새책방에서 주머니돈을 탈탈 털어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을 장만하여 읽든, 우리가 책을 ‘읽는다’고 할 때에는 내 삶에서 무엇이 모자라거나 허전하거나 아쉬운가를 헤아리면서 어제와는 달리 살아가려는 매무새가 됩니다. 그런데 곽아람 님은 책을 읽고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당신이 어리고 푸른 날에 그러했듯이 오늘날 어리고 푸른 넋이 똑같이 ‘시험지옥에 매인 채 아름다운 문학과 삶을 못 느끼고 바보 입시기계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더 곽아람 님 당신이 스스로 ‘보수 신문’이라고 밝히는 그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 약간의 부러움을 섞어서 나는 말했다. “나는 취직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 A+를 받아 완벽한 ‘학점 세탁’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그 리포트의 이면에는 소설의 주인공을 미화해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자 했던 교묘한 술수가 숨어 있었다 ..  (221, 223쪽)


 스스럼없이 내 삶을 드러내는 글쓰기가 된다면 반갑습니다. 그러나 꾸밈없이 내 삶을 가꾸려 하는 땀방울이 배이지 않는 글쓰기로 달라지지 않는다면 안타깝습니다. 책읽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글쓰기는 내 생각과 내 이야기와 내 삶을 끄적이는 일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두질 같은 끄적거림이 아니라 한다면, 말 그대로 글‘쓰’기가 되고자 한다면, 나 스스로 ‘읽’은 책을 어떻게 온몸과 온마음으로 ‘삭’이는 가운데 내 삶과 눈길과 매무새가 ‘새’ 길로 접어들고 있는가를 ‘당차’게 밝히는 뚜벅뚜벅 걸음걸이여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림을 말하기 앞서 그림을 당신 삶으로 녹여내 주소서. 책을 이야기하기 앞서 책을 당신 삶으로 감싸안아 주소서. 삶이 묻어나지 않고서야, 곽아람 님 당신이 우러러보는 요네하라 마리 같은 사람들 머리끝에도 가 닿을 수 없습니다. 삶이 묻어나는 당신이라면 요네하라 마리는 요네하라 마리는 요네하라 마리대로 아름답고 곽아람 님 당신은 곽아람대로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황순원은 황순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헤세는 헤세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곽아람 님은 이 책 하나에서 ‘곽아람은 어떤 삶결’이라는 목소리와 몸짓과 빛깔을 보여주고 있는지요? 아직 중고등학교 ‘시험공부 독후감’과 대학교 ‘학점따기 보고서’ 둘레에서만 맴돌고 그칠 생각인지요? (4342.1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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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읽는다 - 강상중의 청춘독서노트
강상중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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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나한테 "이 책을 왜 '별 둘'만 붙였어요?" 하고 묻는다면, 

"별 하나만 붙이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꾸하리라. 

 

누군가 나한테 "이 책이 어째서 '별 둘'밖에 안 되나요?" 하고 묻는다면, 

"네, 별 셋을 붙이는 대신 '시간도 돈도 아까운 책'에 넣어 드리지요." 하고 대꾸하리라.

 


 책읽는 일본사람, 책 안 읽는 한국사람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4] 강상중, 《청춘을 읽는다》


.. 나는 도쿄 역시 ‘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적어도 이 상태로 가다가는 그렇게 될 것만 같다 ..  (61쪽)


 저는 서울 또한 무너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대로 가다가는 깡그리 무너지고 조각조각 부서지고 끝없이 망가지며 갈가리 쪼개지다가는 폭삭 주저앉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로서로 이름값 높이고 이름값 지키며 이름값 부풀리는 데로 치닫는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 같이 돈벌이 힘쓰고 돈벌이 매달리며 돈벌이 생각에 가득하다면 부서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도나도 겉치레 밝히고 겉치레 키우고 겉치레 사로잡히다가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라도 가방끈 붙잡고 가방끈 늘리며 가방끈 내세우다가는 쪼개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같이 쇠밥그릇 살찌우고 쇠밥그릇 홀로 차지하며 쇠밥그릇 빼앗으려고 싸우다가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이제 산시로 같은 느긋한 성격의 청년은 멸종되고, 반쯤은 여가를 즐기는 기분으로 모라토리엄을 만끽하는 학생들이 대학 캠퍼스를 활보하고 있었다 … 《산시로》를 읽고 이상하게 생각한 점은, 이 청년에게는 땅에 배어 있는 피와 땀의 기억과 같은 것을 거의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다 ..  (41, 49쪽)


 해 떨어지고 늦은 저녁,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단단하고 억센 쇠밥그릇을 붙잡고 있는 공무원하고 마주해야 하는 자리가 몹시 낯간지럽고 벅차서, 저녁을 나누는 자리에서 홀로 일어나 밥집 문을 쾅 닫고 나갔습니다.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데, ‘민간인’하고 어울리는 자리에서까지 그 티를 버리지 못해야 할까 딱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겉치레만을 살피는 매무새로 넉넉히 일삯을 받고 연금을 챙기면 세상 부러울 구석이 없다고 여기지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 공무원들은 책을 읽을까요? 이 공무원들도 아이들한테 ‘훌륭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좋은’ 책을 사다 주어 읽힐까요? 이 공무원들은 당신 딸아들한테 어떤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이 공무원들한테 믿음이 있다면 성경이나 불경을 읽을까요? 성경이나 불경을 읽으면서 무엇을 생각할까요? 나라안에 으뜸으로 손꼽히는 이원수 어린이문학과 권정생 어린이문학을 당신들 딸아들한테 읽힌 적이 있겠지요? 공무원 당신들은 이원수 권정생 책을 한 권쯤 읽어 보았을까요? 읽으면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 처음 상경했을 때는 그저 ‘도쿄는 대따 크구나’하고 감탄하기만 했는데, ‘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걸까’ 하고 탄식이 절로 나왔다. 북적거리는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해 보면, 모두들 얼굴은 있어도 아침 출근길의 러시아워 때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언짢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돌변해서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교성이 난무하고, 그런 북적거림 속에서도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 사람들이 부산스레 오가고, 그 뒤로 빌딩들이 들어서 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맹렬한 기세로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몸부림치는 그런 세계 속에서는, 잠시 멈춰 서서 영원불멸한 것을 생각하려 해도 그런 것은 허황된 거짓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  (81, 83쪽)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재개발 사업에만 눈이 먼 공무원하고 날마다 마주해야 합니다. 제가 일하는 곳에서는 성과 내는 사업에만 몸바치는 공무원하고 늘 부딪혀야 합니다. 어쩌다가 이런 삶이 되었는지 저 스스로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한테 이런 삶이 주어졌다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다만, 숱한 공무원하고 부대끼는 동안, 이 공무원이든 저 공무원이든 책을 읽지 않음을 낱낱이 깨닫습니다. 이 공무원이든 저 공무원이든 저마다 붙잡는 책에 담긴 속살이나 알맹이를 옳게 붙잡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움을 맛보지 못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훌륭한 줄거리 담은 책을 훑으면서 훌륭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 훌륭한 삶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재미난 얘기 넘치는 책을 읽으면서 참된 재미를 곰삭이지 못하고, 스스로 재미난 사람이 되어 재미나게 일하는 매무새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책은 그저 시간 때우기일까요? 책은 한낱 시간 죽이기일까요? 책은 그냥 책일 뿐이니, 읽는 이하고 쓴 이하고는 동떨어진 삶일까요? 줄거리만 욀 수 있으면 책읽기가 끝일까요? 줄거리를 읊을 수 있으면 책을 잘 읽은 셈일까요? 독후감 숙제를 낼 수 있고, 이 숙제가 100점을 받으면 책을 가장 잘 읽은 셈일까요?


.. 어째서 내 부모의 나라는 이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이렇듯 비참한 기분에 젖어야 하는 것일까? 왜 … 그러나 보들레르의 비극은 어떤 의미에서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무리를 지어 스스로 전위임을 내세우며 거들먹거리고, 음모를 꾸미듯 정치에 정신이 빠져 있었더라면 아마 이런 작품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 전위가 되려다 결국 피에로로 끝났을 때, 그런 사람들 가운데 전향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 … 좋고 나쁘고를 떠나 결국 그들은 소시민적인 안일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 근거지를 구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  (100, 104, 107, 108쪽)


 책이란 모두 같은 책입니다. 헌책방 헌책과 새책방 새책과 도서관 장서는 이름이 다를지라도 모두 같은 ‘책’입니다. 겉이 좀 헐어도 책이요 갓 찍어 따끈따끈해도 책이며 도서관 딱지가 붙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책입니다. 오늘 읽혀도 책이요 내일 읽혀도 책이며 글피에 읽혀도 책입니다. 부자가 읽어도 책이고 가난방이가 읽어도 책입니다. 대학교수가 읽어도 책이고 구멍가게 할배가 읽어도 책입니다. 가정주부로 일하는 연변조선족 아줌마가 읽어도 책이며 까맣고 큰 차를 끌고다니는 아줌마가 읽어도 책입니다.

 책이란 모두 다른 책입니다. 내가 읽는 책과 네가 읽는 책이 다릅니다. 똑같다고 하는 책을 읽을지라도 받아들이는 가슴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책입니다. 지난해에 읽을 때와 올해 읽을 때 깨닫는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책입니다. 우리들 하는 일이 모두 다르며 비슷한 일을 하더라도 생각과 느낌과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책을 읽는다 하여도 마음을 사로잡는 대목이 다르고 눈길을 끄는 글월이 다릅니다. 우리는 다 같은 책을 다 다르게 읽을 뿐 아니라, 다 다른 책을 또한 사뭇 다르게 읽습니다.


.. 1968년에 착공해 1970년 초여름에 완공된 4차선 경부고속도로는 총 길이 425킬로미터, 폭 22.4미터의 대동맥으로, 이 도로에 의해 서울과 부산은 1일생활권이 되었다. 이 대동맥의 완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은 농어촌 근대화와 소득증대를 내걸고 새마을운동을 추진했다. 그것은 ‘근면ㆍ자조ㆍ협동’을 슬로건으로 하여 위로부터의 힘으로 유교적 가족주의와 공동체의식을 파괴하고 민족과 국가에 봉사하는 국민을 양성하려 한 것이었다 … 너무나 무더운 날씨에 어느 마을 사거리에 차를 세우고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고 있을 때였다. 작은아버지가 마을 사람 하나와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 곁에 앉아 꿈쩍 않고 입을 다물고 있던 노인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자넨 일본서 왔는가보이. 여기선 다들 입이 무거워 아무 말도 안 하지만, 파쇼야, 이 나란. 일본인들 있을 때보다 더 심해. 그러니 자네도 경솔한 얘기는 입 밖에 내지 말게나.” 더듬더듬, 그러나 똑똑히 들려오는 일본어에 깜짝 놀라 절로 몸이 젖혀졌다. 게다가 ‘파쇼’라는 단어가 너무도 뜻밖이어서 얼토당토않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 노인이 나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려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돌아오자 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언론통제와 상호감시가 궁벽한 시골 구석구석까지 눈을 번득이고 있었던 것이다 … 땅바닥을 기는 듯한 하층노동자의 빈곤과, 그들의 머리 위를 달리는 고속도로. 이 두드러진 대조는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풍경이었던 것이다 ..  (143∼145, 156쪽)


 사람 숫자만큼 책이 있습니다. 사람 숫자만큼 책이 골고루 있습니다. 사람 숫자만큼 다 다른 삶이 밴 다 다른 이야기가 어우러진 다 다른 책이 있습니다.

 저는 새책방보다 헌책방을 즐겨찾지만, 새책방 또한 곧잘 찾습니다. 새책방에서는 새로 나온 책을 흔히 찾아 읽으려 하지만, 갓 나온 책보다는 제 마음을 따뜻하게 덥히거나 촉촉하게 적시는 책을 찾으려 합니다. 헌책방에서는 판이 끊어진 안타까우면서 아름다운 책을 찾아 읽으려 하지만, 굳이 지난날 책을 찾는다기보다는 제 넋을 올바르게 이끌거나 제 얼을 알차게 일굴 수 있는 책을 찾으려 합니다.

 새책방에서 책을 살 때에는 ‘내가 이 책 하나를 사면서 이 좋은 책을 힘껏 펴내 준 출판사한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기쁩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살 때에는 ‘내가 이 책을 사면서 이 반가운 책을 애써 캐내고 건져내어 새로 읽힐 수 있도록 손질한 일꾼들한테 작게나마 도움이 되는구나’ 떠올리면서 즐겁습니다.

 출판사 눈으로 보자면 도서관에서 책을 갖추는 일이 달갑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서관 책은 ‘한 권으로 수십 사람이 읽거나 수백 사람이 읽기’까지 하니까요. 그런데 어떠한 출판사 일꾼도 ‘도서관에서 책을 사들이는 일’을 꺼리지 않으며 싫어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출판사 일꾼은 헌책방에서 사람들이 책을 사는 일을 몹시 꺼리고 싫어합니다. ‘헌책방에서 사람들이 책을 사기 때문에 새책이 하나 덜 팔린다’고 생각합니다. 곰곰이 따지면, 헌책방에서 팔린 책은 한 권이요 고작 한 사람이 읽을 뿐이고, 도서관에서 사들인 책은 하나 갖고 수많은 사람이 읽으니, 도서관에서 책을 사들일 때야말로 ‘출판사 매출에 손해’일 테지만, 이렇게 낱낱이 따지고 살피는 출판사 일꾼은 아직까지 없는 줄 압니다.


..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절제와 근면과 노동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 아무리 땀을 흘리며 일한다 해도 돈을 벌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돈벌이가 뭐가 나쁘냐’라는 탐욕이 당당하게 행세하게 된다 … 이치로나 마쓰이 히데키 선수는 야구 배트를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100만 엔을 벌어들이지만, 나는 1년 동안 일해도 200만 엔밖에 벌지 못한다. 그래도 이곳에서 일하고 있으면 지역 사람들이 고맙다고 말해 준다. 나는 거기에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 ..  (226, 230∼231쪽)


 재일조선인이요 재일지식인인 강상중 님이 쓴 《청춘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당신이 젊은 날 읽으며 가슴에 알알이 맺히거나 새겨진 책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이 이 책만큼은 읽어 주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담은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강상중 님은 일본에서 일본말을 쓰면서 살기에 마땅히 ‘자이니치’라는 일본말을 쓸 텐데, 《청춘을 읽는다》라는 책에서도 ‘자이니치’라는 일본말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턱턱 막힙니다. 지난 2004년에 나온 《소년의 눈물》이라는 책에서도 ‘자이니치’라는 일본말은 몹시 껄끄러웠습니다. 일본에서 일본말을 하며 살아갈 때에는 마땅히 ‘자이니치’일 테지만, 한국에서 한국말을 하며 살아가고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눌 때에는 마땅히 ‘재일’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 이름은 ‘한국’이지 ‘코리아’가 아니며, 나라밖 사람이야 우리를 가리켜 ‘코리아’라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가리켜 ‘코리아’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청춘을 읽는다》를 펴낸 출판사와 옮긴이는 굳이 ‘자이니치’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이 낱말 하나 때문에 책을 못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낱말 하나쯤이야 살며시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얼마든지 지나쳐도 됩니다. 또한, ‘자이니치’란 일본말을 곰곰이 곱씹으면서 우리 터전을 돌이켜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제 마음에는 아쉬움이 여러 가득입니다. 한 가득이나 두 가득조차 아닌 여러 가득입니다. 강상중 님 당신한테 젊음을 빛내 준 책 몇 가지라고 하나, 우리가 굳이 이 책들을 같이 읽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깜냥껏 우리 터전에 따라 우리 마음을 빛낼 책을 찾아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는 다 다른 우리들은 다 다른 책으로 우리 젊음을 뽐내고 즐기고 누리고 나누며 어깨동무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강상중 님이나 《청춘을 읽는다》를 펴낸 출판사나 ‘꼭 이 몇 가지 책을 읽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 《청춘을 읽는다》는 이 나라 젊은이가 또다른 새로운 책으로 저마다 다른 젊음을 다 다른 모양새로 가꾸고 일구라는 쪽으로는 줄거리를 펼치지 않았습니다. 강상중 님 젊음을 흔든 책 몇 가지에만 눈길을 맞추면서 이 책이야말로 ‘젊음을 흔드는 책’이라는 목소리를 한결같이 되풀이했습니다.

 얼마 앞서 유시민 님도 《청춘의 독서》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에는 청소년책이 몹시 드물며, 청소년책을 꾸준히 내는 출판사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아주 적습니다. 처음 출판사를 열 때부터 오늘까지 한결같이 청소년책을 내는 외곬로 내는 출판사로는 ㅇ 한 곳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ㅇ이라는 출판사는 아직 ‘청소년이든 젊은이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책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책’은 한 번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푸름이나 젊은이한테는 ‘이 책을 읽자’고 하는 말보다 ‘이런 책이 있고 저런 책이 있으니, 저마다 눈길과 입맛과 마음에 맞는 책을 하나쯤 살피면서 저마다 다 다른 우리 삶을 생각하고 붙잡자’고 하는 몸짓으로 숱한 이야기책을 내놓을 뿐입니다.


.. 우리는 햇살 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는 건전한 청춘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남녀는 병적일 만큼 수척하고 뒤틀리고 문드러진 나체의 소유자들뿐이다 ..  (96쪽)


 강상중 님 책이나 유시민 님 책이나 똑같이 ‘젊음을 빛내고 일깨운 책은 이러저러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분이 손꼽은 책들은 모두 ‘고전’이라 일컬을 만한 책입니다. 가벼운 책이 없습니다. 가볍게 손에 쥐고 읽을 책이 없습니다. 무거운 책입니다. 무거워 손이 덜덜 떨리는 책만 들추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강상중 님이나 유시민 님 삶이나 눈높이에서 젊은이한테 《원피스》를 읽으라 하거나 《꽃보다 남자》를 들추라 하지는 못하겠지요.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나 《현시연》을 펼치라 하지도 못할 테고요.

 다시 한 번 책을 펼쳐서 읽어 봅니다. 책을 살피며 밑줄을 그었던 대목을 곰곰이 되씹습니다. 밑줄을 그었던 대목 말고는 왜인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습니다. 밑줄을 그었던 대목도 한 번 더 돌아볼 만할 뿐, 가슴을 콩쾅쿵쾅 뛰도록 하지 않습니다.

 거듭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우리 젊은이한테 ‘자, 젊은이들아 책을 읽자!’ 하고 이야기를 하겠다면, 젊은이들 가슴을 쾅쾅 울리거나 소복소복 적시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젊은이들한테 ‘이 책만큼은 젊을 때 반드시 읽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내 젊을 때 이 책들로 가슴이 울렁거렸는데, 오늘을 사는 젊은이한테는 어떤 책이 가슴이 울렁거릴까요? 저마다 다 달리 가슴을 울렁이도록 하는 책을 다 다른 삶자리에서 찾아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어요’ 하는 이야기로는 말문을 열 수 없었을까 궁금합니다.

 책읽기는 경력이나 권위나 학력이나 자랑이 아니거든요. 어떤 책을 먼저 빨리 읽었다고 더 빼어나거나 훌륭하지 않거든요. 어느 책을 못 읽었다 해서 바보이거나 멍텅구리가 아닙니다. 어떠한 책을 수없이 되풀이 읽었다 해서 슬기롭거나 똑똑하지 않습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이야기하려면, 책에 앞서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내놓으려면, 책과 함께 삶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내밀겠다 하면, 책 둘레에 얽힌 발자국과 손자국을 나란히 읽어야 합니다. (4342.11.14.흙.ㅎㄲㅅㄱ)


 ┌ 《청춘을 읽는다》(돌베개,2009)
 ├ 글 : 강상중 / 옮긴이 : 이목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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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09-11-16 16:56   좋아요 0 | URL
(돌베개 편집자께서 댓글을 두 가지 더 달다가 지우셨군요. 제 편지에 몇 조각이 남아 옮겨붙어 본다면)

제 생각이 너무 짧아 그런지, 된장 님이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저는 전혀 모르겠네요.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글을 읽고 나서 "이 책은 그야말로 읽을 값어치가 없구나" 생각하셨다니 그 이유가 정말 궁금합니다. 좋다, 싫다 단정을 할 때는 근거를 밝혀야 한다고 '책'에서 배웠습니다. 친절하게는 아니더라도 왜 제 생각이 너무 짧은지, 이 책에 5점이라는…

"제가 이런 글을 왜 썼는지, 편집자님께서는 하나도 알아채고 있지 않으십니다." 네, 전혀 모르겠습니다. "편집자님 생각이 너무 짧구나 싶습니다." 죄송하실 것은 없습니다만, 좀 무책임하신 듯합니다. 저는 편집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독자로서, 된장 님께서 이 책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신 부분이 있는 듯하여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물론, 이 책이…

숲노래 2009-11-16 17:03   좋아요 0 | URL
편집자께서는

(1) '돌베개 편집자'로 이 책을 생각하는지
(2) '돌베개 책만 읽는 독자'로 이 책을 바라보는지
(3) '출판노동자'라는 편집자로 이 책을 생각하는지
(4) '모든 책을 고루 사랑하는' 독자로 이 책을 바라보는지

'겸연'하게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도 '남이 쓴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댓글을 달아 놓는 일은 '제가 알음알이로 아는 출판사 책이라고 별 다섯을 붙이는 일 없이, 모든 책에 모두 공정하게 평가를 하며 별과 비평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짜증스럽고 딱합니다. 책을 그런 매무새로 만듭니까? 당신이 만든 책에 평점이 낮아 기분이 나쁩니까?

어떤 작가는 제가 별 둘을 붙이고 비평도 몹시 안 좋게 했지만, 옳게 읽어내 주었다면서 고마워 했습니다. 그 작가 스스로도 책이 나온 뒤로 좀더 야무지게 글을 여미지 못했음을 느꼈다며 부끄러워 했고, 앞으로 새 책을 쓸 때에는 모두 고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모든 책에서 모든 알맹이를 다 집어낸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거짓말을 하는 책에서는 거짓말을 느낍니다. 돈맛에 들린 책에서는 돈맛을 읽습니다. 사랑을 말하는 책에서는 사랑을 느낍니다.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책에서는 아름다움을 선물로 받습니다.

강상중 님 책에서는, 아쉽게도, 겉치레와 조금 우쭐해 하는 마음을 읽었습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이름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되었던 줄거리였으며, 재일조선임임을 들먹이려 했다면, 아직 제가 소개글은 안 썼지만, '고사명'이라는 분이 쓴 <산다는 것의 의미>라고 하는 아주 놀라운 책이 있습니다. 재일조선인 젊은이한테든 일본 젊은이한테든 한국 젊은이한테든 '젊음을 불태우는 삶과 책'을 말하려 한다면,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 "발가락 때만큼이라도 글에 온힘을 바치고 불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100점 만점에 5점조차도 섣불리 붙일 수 없습니다. 그나마 강상중 님 책에서는 '참된 마음'이 어느 만큼 드러났다고 느껴서 0점이 아닌 5점입니다.

부디, 돌베개라는 출판사 편집자인 당신께서, 이 책 <청춘을 읽는다>가 얼마나 "청춘을 못 읽고 안 읽고 엉뚱하게 읽은" 책인지를 깨닫고, 앞으로 '돌베개' 이름을 내걸고 나오는 책이 뜬금없거나 쓸개빠진 쪽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돌베개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붙인 댓글은 그동안 '돌베개'에서 나온 숱한 아름다운 책에 먹을 바르는 슬픈 몸짓입니다.

지나가다 2009-11-24 10:0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건 뭐 시비를 걸자고 작정하고 비뚤어지게 자기 주관을 마구 읊어대는 전형적인 글이군요. 꼬인 마음과 잘난척하는 유치함, 무조건 소수 의견으로 강요해대는 관성 같은 것들이 글에 지독하게 배어 있는 느낌입니다. 출판사 직원분이 호의로서 좋은 댓글을 달았으나 악바친 시비걸기 글에 그 의미가 사라지는 모습을 봅니다. 자기가 책에 대해 평하는 것이야 자유겠으나 이 글은 자유로운 서평보다는 흠집내기를 즐기는 모습으로 비칩니다.

숲노래 2009-11-24 14:25   좋아요 0 | URL
시비걸기로만 읽으셨다니 죄송합니다.

그러나, 시비걸기로만 읽으신 지나가다 님 마음씀이 슬픕니다.

저 또한 이러한 책을 '좋은 뜻'에서 비평을 하고 비판을 하지,
아예 쓰레기 같은 책이라면 사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지나가다 2인 2009-11-29 00:1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책을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니 참 흥미롭습니다. 그렇기에 된장 님께서 위에 쓰신 그야말로 '책이란 다 다른 책'인 거겠죠.

허나...님께서 이 책에 대해 비판하신 부분에 대해 제가 '전혀' 공감할 수 없음은 단순히 다 다른 책이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일까요.

그리고 오히려 이 책의 편집자님께서 조목조목 달아주신 답변들에 대해 죄송하게도 거의 100% 공감하게 됨은 또 왜일꺄요.

저는 책을 복잡하게 읽지도 못하며 또 복잡한 책은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자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갔는지는 조금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그게 흔히 얘기하는 소통의 일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된장 님께서도 댓글에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

이 책 '청춘을 읽는다'는 방금 막 완독했구요, 책을 읽고 나서 강상중 님에 대해 여러가지 궁금한 점이 생겨 서핑을 하다 우연히 여기까지 들어왔습니다. 책을 읽고 난 소감은...'꽤 괜찮다'입니다. 예전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던 대목을 저자께서 다시금 되새겨주셔서 반갑기도 했고 제가 잘 몰랐던 일본에 대해서 아주 작게 나마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편집자 님께서 올려주셨던 것처럼 저자가 읽었던 책 중에 어떤 건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이건...흠...별로겠어...라고 쉽게 넘겨버렸습니다. 전혀 '이 책이야말로'라는 강제성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잘못된 건가요?

그리고...된장 님께서 답해주신 내용 가운데

'제가 이런 글을 왜 썼는지, 편집자님께서는 하나도 알아채고 있지 않으십니다.

편집자님 글을 읽은 느낌은, "이 책은 그야말로 읽을 값어치가 없구나"일 뿐입니다. 아쉽지만, 편집자님 생각이 너무 짧구나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거 말입니다. 솔직히 제 느낌은 그렇습니다. 한 번 꼬인 걸 놓고 상대방이 마음 터놓고 풀어보려했는데 너무도 처참하게 무안주며 "야~ 너 진짜 못 알아듣는구나 너 그 수준밖에 안되니 우리 서로 말 섞지 말자"라고 하는 걸로 밖에 안보입니다.

아, 그리고 이건 또 뭔가요?

(1) '돌베개 편집자'로 이 책을 생각하는지
(2) '돌베개 책만 읽는 독자'로 이 책을 바라보는지
(3) '출판노동자'라는 편집자로 이 책을 생각하는지
(4) '모든 책을 고루 사랑하는' 독자로 이 책을 바라보는지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한 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된장 님께서는 (4)번의 입장에서 편집자 님이 댓글을 다시길 원했던 건가요. 글쎄요. 저는 위의 어느 입장이든 상관없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자신의 위치에서 진실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거 계속 얘기가 길어지는데요. 안하고 지나가면 안될 것 같아 이어봅니다.

'그렇게도 '남이 쓴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댓글을 달아 놓는 일은 '제가 알음알이로 아는 출판사 책이라고 별 다섯을 붙이는 일 없이, 모든 책에 모두 공정하게 평가를 하며 별과 비평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짜증스럽고 딱합니다. 책을 그런 매무새로 만듭니까? 당신이 만든 책에 평점이 낮아 기분이 나쁩니까?'

왜 함부로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왜 함부로 평점이 낮아 기분이 나빴냐고 지래짐작하십니까? 이상하죠. 오히려 '제대로 읽지 않은 분'은 된장 님인 것처럼 느껴지니 말입니다.

된장 님의 글에 대한 반박(?)은 이미 편집자 님께서 충분히, 그리고 속시원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제가 덧붙인다면 그야말로 사족일 수 밖에 없을 듯 싶습니다. 아, 끝으로... 지나가다 님께서 써주셨듯이 '시비걸기'로 읽혀지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음을 잊지않으셨으면 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한 번은 우연일지라도 두 세번 반복되면 그건 어떤 이유가 있어서이기 때문입니다.

숲노래 2009-11-29 08:44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이든 그 사람이 지내온 삶에 따라 '읽기'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 사람 삶에 따라 '좋게' 받아들일 수 있고 '아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강상중 님은 겉멋이나 겉치레로 살아온 분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강상중 님 책이 더없이 부질없거나 안타깝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어느 만큼 '독자를 얻을' 수 있겠으나 더 깊은 골을 찬찬히 짚지는 않았다고 느낍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쓴 <보도사진가>라든지 이시무레 미치코 님이 쓴 <슬픈 미나마타>라든지 얼마 앞서 유선진 할머니가 쓴 <사람 참 따뜻하다>라든지, 또는 팔리 모왓 님이 쓴 <잊혀진 미래>라든지 시모무라 고진 님이 쓴 <지로 이야기> 같은 책을 '가슴으로 새기며' 읽을 수 있으면 <청춘을 읽는다>에서 "청춘"과 "읽는다"가 제대로 삭여지지 못했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쓴 글을 '시비걸기'로 느끼든 말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시비걸기로 느끼는 분은 언제까지나 시비걸기로만 여기며 그 테두리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글에 '시비 거는' 사람이 '시비만 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뜻으로든 궂은 뜻으로든 '이야기 걸기'일 테니까요. 제가 보지 못한 대목을 짚으며 시비를 건다면 언제든지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눈길로 그예 트집잡기에 지나지 않으면 웃습니다 :)

지나가다 2인 2009-11-29 00:1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리고 된장 님께서 추천해주신 '산다는 것의 의미'는 앞으로 읽을 책 목록에 넣어놓겠습니다. 좋은 책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숲노래 2009-11-29 08:4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책을 읽는 분들이 '사람 삶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땀흘린 책을 알아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저는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 같은 만화책 또한 퍽 좋아하는데, 우리 옆지기는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이나 아다치 미츠루 만화는 좀 시큰둥하게 보더군요... <단순하고 소박한 삶> 같은 책은 4/5까지는 괜찮았는데 끄트머리 1/5에서 영... 어긋나 버려서...

지나가다3인 2009-12-02 17:5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안타깝습니다. '슬픈 미나마타'의 리뷰를 보고 된장님 블로그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요. 윗분도 지적해주셨다시피 모든 일이 한 번은 우연일지라도 두 세번 반복되면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편집자분이 지나가다가 몇 가지 정중하게 의문을 표한 글에 된장님이 다신 댓글은 근거와 배려가 부족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적어도 정성스럽게 책을 편집한 사람이 직접 남긴 댓글이니만큼, '편집자님의 생각이 너무 짧구나 싶습니다'라는 말로 그 글을 깔아뭉개는 것만은 하지 않으셨다면 좋았을텐데요. 물론 솔직한 생각을 표시하는 것이 나쁜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만큼 상대방 입장도 고려했으면 더 나았을뻔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우리 세상은 뒤틀리고 비틀리며 엉터리로 가고만 있습니다'라는 말도, 편집자의 댓글 몇 개만으로 결론 내리기엔 무리가 있는 말 같습니다.


숲노래 2009-12-02 20:45   좋아요 0 | URL
말씀 고맙습니다.

저는 제가 늘 가장 바르고 곧은 눈길로 사람과 세상과 삶을 들여다본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그날그날 살아가는 대로 적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요즈음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출퇴근하는 고달픈 고리'에 매여 있다 보니, 이런 댓글을 좀더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어쩌면, 이번 <청춘을 읽는다> 같은 책은 굳이 서평을 달 만한 무게나 값이 없었다고 느낀 그대로 아예 글을 안 썼다면 더 나았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아주 나쁜 책'이 아니라 '무언가 놓친 지점이 많은 책'이기에 그 대목을 넌지시 이야기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오늘 띄운 곽아람 님 책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와 같은 책이 '문제라거나 못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글쓴이와 편집자 모두 느끼거나 잡아채지 못하는 아쉬운 손길과 눈길과 마음길'이 무엇인가를 나중에라도 깨우쳐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님 말씀처럼 세상 모든 말과 생각은 '댓글 몇 개만으로 결론 내리기' 어렵습니다. 또한 결론은 함부로 내려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는 웬만한 댓글에는 아예 대꾸를 하지 않아야겠다고 느낍니다.

지나가다2인 2009-12-03 01:0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위에 글을 올렸던 지나가다2인입니다.^^;;

제가 달았던 글에 된장 님께서 어떤 답변을 다셨는지 궁금해서 들어와봤는데 얘기들이 좀 엉뚱하게('당신'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말 논쟁) 흘러가고 있었네요.

다른 건 그냥 그렇다 치고, 일단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몇 자 적어봅니다.

된장 님께서 '당신'의 용도가 다양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당신'은 3인칭 극존칭으로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거 '3인칭'입니다. 1인칭이나 2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쓸 때 극존칭이 되는 것이죠. 된장님의 예문도 3인칭인 경우의 문장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신'이 2인칭이 될 때는 부부끼리 부르는 경우를 제외하곤 존칭보다는 상대를 낮잡아 부르거나 편하게 부르는 용도가 되는 게 상식입니다. 된장 님께서 엠제이비 님을 호칭하실 때는 2인칭으로 '당신'을 사용하셨을테니 답은 어느정도 나온 것 같군요. 설령 된장 님께서 상대방을 높이는 용도로 '당신'을 사용하셨다고 해도 그건 전혀 일반적인 용법이 아닙니다. 백이면 백, 상대방이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거죠.

그리고...쓰다만 글을 상대방 동의 없이 올린 것은 분명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엠제이비 님께서 사과를 요구하셨으나 무시하신 거 맞죠? 흠...

끝으로 '앞으로 웬만한 댓글에는 아예 대꾸를 하지 않아야겠다고 느낍니다.'라고 하셨는데 무슨 악플을 단 것도 아니고 상식적인 수준의 댓글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하시면 블로그는 왜 하시는 건지 모르겟네요. 그냥 자기 컴퓨터 하드에 일기쓰듯 기록하시고 혼자 보고 싶으실 때 보시면 되는 것 아닌가요? 인터넷은 공공의 공간입니다. 검색하면 된장 님께서 쓰신 글들이 쫙 뜨는 거 아시잖아요. 그 공공의 공간에 글을 쓴다면 그 글을 통해 영향받을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책임감은 다양한 비판에 대한 겸허한 반응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된장 님께는 그런 면이 안보입니다. 아쉽네요.

숲노래 2009-12-03 05:59   좋아요 0 | URL
오늘날 우리들이 '당신'을 엉터리로 쓰고 있는데, 국어사전에서 이 흐름을 받아들여 '당신'을 '낮춤말'처럼 다루고 있습니다만, '너'나 '자네'나 낮춤말처럼 쓰는 낱말이고 '당신'은 예의를 갖추어 하는 말입니다. 또는 '싸움을 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도 엉터리로 쓰기 때문에 때때로 '님'이라는 낱말로 가리키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들이 쓰는 말을 옳고 알맞게 가누려는 마음이 없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자면 '님'이라는 낱말을 쓰는 일이 나을는지 모릅니다.

..

엠제이군 님은 '쓰다 만 글'이 아니라, 일부러 제 마음을 들쑤시려고 저만 보도록 해 놓은 악플을 그렇게 해 놓은 뒤 지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악플은 저한테 돌아오는 화살이 아닌, 바로 그런 악플을 쓰는 님한테 고스란히 돌아가는 글임을 알려드리려고 달아 놓았습니다.

저작권법에 따른다면 이렇게 붙여놓는 일은 잘못입니다. 법에 따라서 사과하라고 한다면 잘못한 일이므로 사과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삶을 돌아본다면,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을 그분이 느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왜 싸워야 하는가요?

책 하나를 놓고 어떤 이는 이런 마음을 느껴서 이런 마음을 나누고자 하는데, 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가요? '느낌글' 하나를 놓고는 '동의나 반대'가 아닌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고'가 있을 뿐입니다.

..

말 그대로 웬만한 댓글에는 대꾸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 글에는 댓글이 안 달려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웬만하면 댓글을 안 달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댓글을 다는 분들 스스로 '이야기(소통)'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면, 서로한테 부질없는 노릇입니다.

말이 좋아 인터넷이 '공공 공간'이지, 제대로 '공공 공간' 노릇을 안 하는 때가 얼마나 많을까요?

저라고 하는 사람은 '공공인'이 아니라, 알라딘 서재에 글을 쓰는 한 사람이지만, 저는 제 모습이 다 드러나도록 되어 있고, 다른 이들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댓글을 남깁니다.

님 말씀처럼 '다양한 비판'에는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다양함'이라는 옷을 입고 '다양하지 않게 헐뜯는' 말에는 그리 달가이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헐뜯기라 하여도 저한테는 밥이 되는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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