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책책! 출판사 습격기 - 일상탈출 책벌레들의 거침없는 인문 출판사 탐방
조희경 외 지음 / 서해문집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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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에서 길어올리는 사랑이 있어야
 [책읽기 삶읽기 74] 조희경 외, 《출판사 습격기》(서해문집,2009)



 ‘기업맞춤형 전문취업교육-출판편집 과정’을 들은 학생들이 일곱 군데 출판사와 한 군데 책읽기모임을 찾아간 이야기를 담은 책 《출판사 습격기》(서해문집,2009)를 읽습니다.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 책 만드는 일을 배운 분들이 책 만드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만난 이야기를 묶은 책인데 왜 ‘습격기’ 같은 이름을 붙였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불쑥 찾아갔대서 습격기가 될까요.

 나는 ‘습격’이니 ‘공격’이니 ‘공습’이니 하는 군대말을 몹시 싫어합니다. 더구나, 책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군대말을 내세우는 일이 매우 못마땅합니다. “갑자기 상대편을 덮쳐 침”을 뜻하는 군대말 ‘습격(襲擊)’이 아니고서는 책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웠을까요. 이렇게 ‘세게’ 나가야 이 책이 사람들 눈에 뜨인다고 여겼을까요.

 생각해 보면 “출판사 방문기”나 “출판사 취재기”처럼 이름을 붙이면 ‘밋밋하다’거나 ‘느낌이 너무 옅다’고 할 만하겠지요. 그러면, 좋은 이름을 알맞게 찾아야 합니다. 책마을에서 함께 일하고픈 꿈을 꾸는 분들이라면, 일곱 군데 출판사를 찾아다니며 만난 사람들한테서 들은 알차거나 사랑스러운 이야기에서 책이름 하나를 어여삐 길어올려야 합니다. 책이름을 붙이는 일 또한 ‘책 만드는 일’인 한편 ‘책을 사랑하는 길’이니까요.


.. “갑자기는 아니고 출판사에 계속 근무했기 때문에 일에 대한 커리어가 쌓였고, 내 적성에 맞고 보람을 느끼는 이 일을 계속 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심을 하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결국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시작하게 됐어요.” ..  (88쪽/1인출판사 산처럼 윤양미 대표)


 책을 만드는 일은 남다르다 싶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책을 좋아하고 책 만드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며 책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 할 만한 일입니다. 더 많이 배웠대서 책마을에서 일할 수 있지 않습니다. ㅅㄱㅇ 같은 대학교를 나와야 책마을에 몸을 담글 수 있지 않습니다.

 나는 대학졸업장이 없습니다. 나는 대학졸업장 없이 출판사에서 네 해 즈음 일했습니다. 퍽 드물지만 나처럼 대학졸업장이 없는 사람도 뜻과 사랑과 믿음과 꿈이 있으면 얼마든지 책마을에서 땀을 흘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출판사를 차릴 수 있습니다.

 그저 돈만 벌 생각으로 출판사 일꾼이 되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예 돈벌이만 헤아리며 책을 내놓는 출판사 또한 있겠지요.

 어디에서나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돈만 바라보는 바보가 있고, 돈이 아닌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꿈을 이루려는 사람이 있고, 꿈은 부질없다고 여기는 바보가 있습니다.

 책마을이건 영화마을이건 노래마을이건 만화마을이건 춤마을이건, 돈만 바라보는 사람이 널리 사랑받거나 깊이 뿌리내리지는 못합니다. 참으로 책이나 영화나 노래나 만화나 춤을 알뜰히 건사하면서 애틋하게 아낄 때에 시나브로 사랑받으며 차근차근 뿌리를 내립니다.


.. 아침독서운동은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에 시달리고, 우리 주위에 제대로 된 도서관이 없는 현실 속에서 시작된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행복한아침독서의 최종 목표는 아이들의 책 읽는 권리를 제한하는 것들을 없애는 것이다 ..  (199쪽)


 똑똑한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닙니다. 가방끈이 긴 사람이 즐기는 책이 아닙니다. 누구나 읽는 책이며, 아이부터 할매 할배까지 두루 나누는 책입니다.

 어린이책이란 어린이부터 읽는 책입니다. 어린이한테만 읽히는 어린이책이란 없습니다. 사진책이란 사진쟁이만 읽는 책이 아닙니다. 사진쟁이부터 즐기는 책이 사진책이요, 사진쟁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즐기면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사진책입니다. 만화책이나 그림책이나 글책이나 노래책이나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즐기는 삶이면서 즐기는 책입니다. 사랑하는 삶이면서 사랑하는 책이에요. 좋아하는 삶으로 좋아하는 책입니다. 땀흘려 일구는 삶처럼 땀흘려 일구는 책이에요.


.. 돌베개에서 출간하는 책들은 돈과 풍요를 논하지 않는다. 출판계 사람이 아닌 우리로서는 이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없다 ..  (35쪽)


 책에서 길어올리는 사랑이 있어야 책을 만듭니다. 책에서 길어올리는 사랑으로 책을 마주하는 매무새여야 비로소 책마을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 ‘돈과 풍요’를 바라거나 꿈꾸거나 꾀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책을 다루며 책을 만드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서 ‘돈과 풍요’를 글로 쓰거나 삶으로 누리지 않습니다.

 책이란 사랑이니까요. 책이란 눈물이니까요. 책이란 믿음이니까요. 책이란 웃음이니까요.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믿음은 돈으로 팔 수 없습니다. 눈물은 돈으로 갚지 못합니다. 웃음은 돈으로 베풀지 못합니다.

 책은 오직 땀방울과 굳은살로 길어올리는 사랑씨입니다. 책은 꼭 하나, 사랑과 믿음을 어우르는 이야기바구니입니다.

 돈도 숫자도 경제도 풍요도 아닌 책이기에, 이 책이 더 낫고 저 책이 덜 떨어진다고 가르지 않습니다. 책은 그저 책이고, 사람은 그저 사람이며, 삶은 그저 삶입니다. 다 다른 삶에서 다 다른 사람이고 다 다른 책입니다.


.. 한국 사회에서 정통 인문 출판을 고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대중 인문서들은 어느 정도 수요를 기대할 수 있지만 이학사에서 내는 책들은 많은 시간 곱씹어 보며 공을 들여 읽어야 되는, 단적으로 말하면 읽기 힘든 어려운 책들이 많아 시장성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심지어 필자들이 편집자들에게 ‘어려운 원고 읽으려면 지겹거나 힘들지 않은지’ 물어 볼 때가 있다고 한다 ..  (138쪽/이학사)


 홀로 출판사를 꾸리는 윤양미 님은 “인문서는 주로 대도시 대형서점에서 판매되거든요. 그래서 ‘산처럼’이 거래하는 서점들은 대도시 대형서점과 인터넷서점에 국한되어 있어요(92쪽).” 하고 밝힙니다. 인문책을 내는 출판사만이 아니라 어린이책을 내든 자기계발이라는 책을 내든, 거의 모든 출판사는 큰도시 큰책방과 누리책방에 책을 넣습니다. 시골마을 책방에까지 책을 넣는 출판사는 거의 없으며, 시골마을 책방에 넣은 책으로 돈을 버는 출판사 또한 거의 없습니다. 시골마을 책방에서 팔아서 거두는 돈이라 해 보았자 서울에 있는 큰책방에서 한 시간 동안 팔아서 거두는 돈보다 훨씬 적을 테니까요.

 어쩔 수 없이 책방은 큰도시에 몰립니다. 어쩔 수 없이 출판사는 큰도시에, 이 가운데 서울에 쏠립니다. 큰도시에 몰린 책방에서 책을 팔고, 서울에 깃든 출판사에서 책을 만듭니다. 이러한 책에는 어떤 사람이 어떤 넋을 일구도록 이끄는 이야기꽃이 깃들까요. 부디, 사랑을 놓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을 살가이 보듬을 줄 아는 손길을 잊지 않으면 고맙겠습니다. (4344.8.27.흙.ㅎㄲㅅㄱ)


― 출판사 습격기 (조희경 외,서해문집 펴냄,2009.7.30./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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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현장의 이모저모
김성재 지음 / 일지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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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과 함께 걸어가는 내 길
 [책읽기 삶읽기 23] 김성재,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


 내 길은 책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나는 이 길이 좋다고 느껴서 걸어가지 않습니다. 나는 이 길에서 책탑을 쌓으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책삶으로 무언가를 이룰 뜻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책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어머니가 첫째 아이 넉 돌맞이 생일을 떠올려 주었습니다. 첫째는 음성 할머니한테서 생일돈을 받았습니다. 다만, 생일돈은 내 은행계좌로 넣어 주십니다. 이 생일돈으로 옆지기는 실꾸리를 장만합니다. 고맙습니다. 옆지기는 새로 장만하는 실꾸리로 아이 옷을 뜰 수 있고, 음성 할머니나 일산 할머니한테 드릴 옷가지를 뜰 수 있겠지요. 나는 이 생일돈으로 책을 삽니다. 새 보금자리를 찾으러 춘천으로 오는 길에 서울을 들러 올들어 처음으로 헌책방마실을 했고, 헌책방에서 아이가 즐겁게 읽을 그림책을 잔뜩 삽니다. 음성 할머니가 주신 생일돈을 옆지기하고 나는 알뜰히 다 써서 아이한테 선물을 마련한 셈입니다.

 서울마실을 하는 김에 세 군데 출판사를 들러 인사를 합니다. 새 보금자리로 옮기면 서울마실은 더 뜸할 테니까, 이렇게 온 김에 들러서 인사를 하지 못하면, 내 글을 찬찬히 엮어 책으로 펴낸 아름다운 땀방울이 고마웠다는 마음을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하며 입으로 말꽃을 피우지 않더라도, 서로서로 고운 마음꽃이 피면서 책 하나가 어떤 사랑인가를 느끼리라 믿어요.


.. 양질의 책을 꽤 많이 낸다 하더라도 질이 낮은 책도 아울러 내고 있다면 그 출판사의 평가는 자연 낮아질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좋은 책을 냈다 하더라도 그 공급 과정에서 품위를 잃어 책의 존엄성을 스스로 짓밟는다면 결고 높이 평가받을 수 없는 것이다 … 수많은 편집자들이 새 맞춤법을 익히느라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지 모른다.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도 새 맞춤법을 완전히 익히지 못하고 혼동하는 편집자들도 간혹 보인다 ..  (16, 100쪽)


 출판사에 들를 때면 그동안 새로 낸 책을 선물받기도 하고, 출판사 책꽂이에 꽂힌 여러 가지 책을 둘러보기도 합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며 만난 아름다운 책을 내 가방에서 꺼내어 보여주거나 빌려주기도 합니다. 두 번 다시 장만하기 어려울 만한 책을 빌려줄 때면 언제쯤 돌려받을까 궁금하지만, 거의 돌려받은 적이 없지만, 그러니까 출판사 일꾼도 어디에선가 잃어버려 그만 사라지는 책이 되고 말지만, 이러하건 저러하건 내 손과 당신 손을 거친 책에 깃든 이야기와 느낌은 오래도록 이어가리라 생각합니다.

 선물받은 책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살며시 펼칩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내 눈을 거쳐 머리를 지나 가슴속으로 스밉니다. 착한 사람 착한 나날 착한 책이 나한테 스며듭니다. 종이에서 나는 책내음을 맡고, 종이에 깃든 이야기에서 피어나는 책내음을 맡습니다.


.. 구순이신 (정문기) 선생님은 우리 출판사에 들르시면 “참 우연히 만났지.” 하곤 하셨다. 한국의 위대한 노인들을 저자로 모신다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  (45쪽)


 ‘일지사’라는 출판사를 일구는 김성재 님이 내놓은 책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일지사,1999)를 생각합니다. 일지사에서 내놓은 아름다운 책이 퍽 많은데, 이 가운데 《한국어도보》(1977,정문기 씀)는 아주 돋보입니다. 이러한 책을 펴낸 출판사가 놀랍고, 이러한 책을 생각하며 써낸 정문기 님도 놀랍습니다. 이러한 책을 내놓아 나눈 출판사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책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날 수많은 아름다운 책이 태어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좋은 넋이 좋은 마음씨가 되어 좋은 책으로 깃들고, 좋은 책은 좋은 책씨로 거듭나서 수많은 사람들 좋은 넋을 새로 보살피면서 새로운 좋은 책이 태어나도록 이끕니다.

 사람들 아름다운 삶이 책으로 스며들고, 책 하나가 천천히 퍼지면서 사람들 아름다운 삶을 북돋웁니다.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라는 책은 아름다운 삶을 스미고픈 꿈으로 책밭을 일군 한 사람 땀방울을 담습니다. 책 하나를 천천히 퍼뜨려 사람들 아름다운 삶을 북돋우려 했던 한 사람 눈물방울을 담습니다.

 책이라서 대단하거나 책이기에 훌륭하지 않습니다. 책이어야 하거나 책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날이기에 책이 태어나고, 책이 태어나면서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날을 적바림합니다.


.. 학술 출판사는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넓은 의미의 학술서인 해설서나 대학교재에 치중하거나, 다른 부문의 출판물에 의한 이익으로 충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벌어 놓은 돈을 까먹거나, 이잣돈으로 지탱하거나 하고 있는 것이다 … 서적의 소매가격을 서점에서 자유로이 결정한다면 무분별한 가격할인의 추악한 싸움이 벌어져 유통 질서가 문란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서점과 출판사의 도산이 속출할 것이며, 자본력이 튼튼하거나 저질 출판물을 내는 출판사만 살아남을 것이다 … 높은 질의 저작물은 저술해 봤자 서점에 꽂히지도 않을 것이며, 출판을 맡아 줄 출판사도 없을 것이니, 저작자들의 저술 의욕이 상실될 것이다 ..  (72, 122∼123쪽)


 책과 함께 살아가는 내 하루를 돌이킵니다. 책을 읽고 책을 쓰는 내 삶을 돌아봅니다. 책을 매만지면서 살붙이들 보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고운 이웃 고운 삶을 어깨동무합니다. 책을 쓰면서 좋은 벗님 아프거나 슬픈 어깨를 다독이고 내 눈물을 씻으며 내 웃음을 터뜨립니다.

 값싸게 사들여서 좋은 책이란 없습니다. 헌책방은 책을 값싸게 사고파는 곳이 아닙니다. 도서관은 책을 거저로 빌려 읽는 데가 아닙니다. 내가 땀흘려 일하여 일군 돈을 세금으로 냈기에 도서관이 태어납니다. 수많은 책이 더 너른 곳에서 더 너른 새 임자를 만나도록 징검다리가 되는 헌책방입니다.

 마땅한 값을 치르며 책을 사서 읽습니다. 책을 사서 읽기에 내 삶을 더 착하게 살찌우고 싶습니다. 옳게 값을 치르며 책을 장만하여 갖춥니다. 집에 울타리를 쌓으려고 하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과 함께 예쁘게 살아가며 우리 아이들이 예쁜 꿈을 사랑할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 좋은 학자들을 늘 대하게 되고, 한국학의 수준과 동향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  (270쪽)


 김성재 님은 참 기쁘게 글을 써서 당신 이야기를 적바림한 책 하나를 내놓습니다. 자랑할 일을 글로 쓰지 않습니다. 떠벌이거나 손가락질할 일을 글로 쓰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삶을 책으로 엮어 내놓듯, 좋아하는 책을 어떻게 아끼며 돌보았는가 하는 하루하루 이야기를 천천히 적바림해서 선물합니다.

 책마을은 사람마을이고, 사람마을은 이야기가 있는 터전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터전인 사람마을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날마다 새로운 손길로 내 살붙이를 어루만지며, 내 이웃하고 즐겁게 손을 잡습니다.

 길디긴 빗줄기가 살짝 그쳤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파랗디파란 하늘이 되면서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쬡니다. 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자전거를 몰아 우리 식구들 새 보금자리가 어디에 어떻게 예쁘게 있는가를 살펴야겠습니다. 아버지는 춘천 멧자락을 돌아다닐 테고, 어머니는 음성 멧자락을 바라보며 둘째 기저귀를 신나게 널겠지요. 마음책이 삶책이 되고, 삶책이 사랑책으로 거듭납니다. (4344.8.18.나무.ㅎㄲㅅㄱ)


―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 (김성재 글,일지사 펴냄,1999.9.15./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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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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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책은 그만 읽으셔요
 [책읽기 삶읽기 24]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둘레에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어 보았느냐고 더러 물었습니다. 글을 쓰며 살아가는 저한테 여러모로 도움이 되거나, 글을 쓰는 매무새를 되짚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 주곤 했습니다.

 책을 읽기 앞서 책이름을 들었을 때에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말은 참 옳다고 느꼈습니다. 이와 같은 매무새가 아닐 때에는 글을 쓸 수 없으나, 오늘날 이 땅 많은 글쟁이는 이 대목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이름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누구나 뼛속으로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뼛속으로는 ‘들어가야’지요. “뼛속까지 들어가서 써라”라 말해야 올바릅니다. 책을 덮은 뒤에는 이 생각이 더 맞다고 새삼 느낍니다. 글을 쓰고픈 사람이라면 ‘내 살갗에 머물지 말고 내 뼛속을 속속들이 파고들면서’ 글을 쓸 노릇이요, ‘내 이웃사람과 동무와 살붙이들 뼛속으로 깊이 들어가 하나로 얼크러지면서’ 이야기를 엮을 노릇입니다. 곰곰이 헤아린다면 ‘파고들기’라든지 ‘스며들기’라든지 ‘녹아들기’라든지 ‘부둥켜안기’라든지 ‘살아내기’ 같은 말마디를 넣었어야 알맞습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쓴 나탈리 골드버그 님은 말합니다. “대학생이던 나는 이미 영국을 비롯한 유럽 출신 대부분의 남성 작가들의 시와 이미 세상을 떠난 남성 작가들의 작품까지 죄다 읽었다고 자부했다. 문제는 내가 그들을 무척이나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의 일상 현실과 아주 먼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15쪽).” 이와 같은 흐름은 2010년대 한국땅이라 해서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한국땅에는 내로라 하는 여성 글쟁이가 제법 많기는 하지만, 여성다움을 살뜰히 풀어내는 글쟁이는 뜻밖에 그리 안 많습니다.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따순 사랑으로 온마음을 가누면서 글줄에 다부지며 씩씩한 기운을 담는 글쟁이는 얼마 안 됩니다. 살림꾼 글쟁이는 몇 안 됩니다. 바깥을 맴돌기만 할 뿐, 정작 내 뼛속을 깊디깊이 느끼며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여성 글쟁이는 아직 몇 사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내가 엘크론을 둘러싼 들판을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은 그곳의 지리학적인 정보를 안다는 뜻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 들판 속으로 영원히 산책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다(66쪽).” 같은 대목을 곱씹으면 어느 만큼 함께 헤아릴 수 있을까요. 문학이든 산문이든 지식정보를 다루는 책이든, ‘내 마음이 그 들판을 언제까지나 걷고 싶어 하는 줄 안다’는 마음결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을 얼마나 손꼽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나탈리 골드버그 님은 “진짜 인생은 글쓰는 행위에 있는 것이지, 같은 작품을 몇 년 동안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 것에 있지 않다(72쪽).” 하고 말합니다. 나 스스로 ‘작가’라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글쓰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요, ‘번듯한 문학이나 산문이나 (신문)기사’를 내놓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내 삶을 아로새기는 글’을 즐거이 쓰라는 소리입니다. 애써 남들한테 읽히거나 보여주는 글이 아닌, 내 삶을 즐기는 글이요, 내 동무한테 띄우는 편지와 같은 글이며, 내 아이나 어버이하고 주고받는 쪽종이 같은 글을 쓰면서 아름다이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그러나, 몹시 좋은 글이나 책일 때에는 여러 해에 걸쳐 얼마든지 또 읽고 거듭 읽을 만합니다. 읽으며 즐기되 얽매이거나 붙들리면 안 좋을 뿐입니다.

 글에는 어떤 틀이 따로 없습니다. 그림이나 사진에도 어떤 틀이 따로 없습니다. 골목길을 사진으로 찍으려 할 때에 ‘골목은 이런 모습으로 찍어야 한다’는 틀이 없습니다. 틀이란 아예 없는 글쓰기요 사진찍기요 그림그리기인데, 그래도 뭐 하나 틀이 있어야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하지 않느냐고 자꾸 묻는다면, 꼭 하나는 밝힐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매무새’ 하나를 틀이라면 틀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글을 쓰고, 내가 살아가는 무늬대로 사진을 찍으며, 내가 살아가는 빛깔대로 그림을 그립니다.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담는 글이고 사진이며 그림입니다.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을 들여다볼 때에 ‘추억’이나 ‘전통’이나 ‘옛것’이 떠오른다면 내 삶이 이러한 틀에 사로잡혔다는 소리입니다.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을 마주할 때에 따스하다고 느끼면 나 스스로 따스하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을 볼 때에 똑똑하구나 싶다면 지식을 머리에 잔뜩 담아 놓았다는 얘기입니다.

 “글쓰기를 대하는 올바른 눈이 떠질 때 우리는 세부묘사를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모든 진실을 반영시키는 것으로 다루게 된다(135쪽).”는 말을 찬찬히 곱씹습니다. 제대로 못 쓴 글이란 앎조각을 잔뜩 늘어놓은 글입니다. 제대로 못 찍은 사진이란 내 사진에 담긴 사람이나 사물이나 자리나 터전을 어느 한쪽 느낌으로 몰아간 사진입니다. 제대로 못 그린 그림이란 삐뚤빼뚤하거나 빈틈이 있는 그림이 아니라, 살가움과 이야기를 잃은 그림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그림을 그립니다. 어린이가 사진을 찍는다니 터무니없다고 여길 분이 있을는지 모르는데, 어린이도 얼마든지 사진을 찍고, 사진을 찍을 만하며, 사진 찍는 삶을 즐깁니다. 그러니까 어린이한테 글 한 줄을 쓰라고 시킬 때에는 억지스럽게 ‘어린이답지 않은 글’을 쓰도록 하면 안 됩니다. 열두 살 나이에는 열두 살 나이에 걸맞도록 글을 쓰고, 일곱 살 나이에는 일곱 살 나이에 알맞도록 글을 쓰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스무 살 젊은이는 스무 살 젊은이다운 글을 쓰며, 마흔 살 아저씨는 마흔 살 아저씨다이 글을 써야 아름답겠지요. 내 나이와 함께 내가 걸어온 길을 담고, 내가 살아내는 살림새를 담으며, 내가 부둥켜안는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담습니다. 내 넋과 얼을 담습니다.

 할머니는 할머니로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당신 아이나 동무한테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이처럼 조곤조곤 들려주는 삶자락을 가만히 종이에 옮겨 적으면 곧바로 ‘글’이 태어납니다. 글쓰기란 이렇게 합니다. 아이는 아이로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하루를 제 동무나 어버이한테 신나게 떠들어댑니다. 이렇게 신나게 떠들어대는 삶덩이를 바지런히 종이에 적바림하면 이내 ‘글’이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그나저나, 나탈리 골드버그 님은 “이미 잘 쓰는 글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더 앞으로 발을 내딛으려 하지 않는다(212쪽).”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제법 손꼽힌다거나 퍽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분들이 새로운 글이나 글쓰기나 글매무새로 거듭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 대목을 씁쓸히 읽습니다. 퍽 훌륭하다 싶은 글쟁이들은 왜 새롭게 거듭나지 못하거나 새삼스레 일어서지 못할까요. 빼어난 글솜씨를 왜 더 가다듬지 못하고 마나요.

 아무래도 글솜씨는 빼어나다 할지라도, 당신 삶을 더 북돋우거나 일으켜세우지 못하는 탓이 아니랴 싶습니다. 하루하루 당신 삶을 더 북돋우면서 일으켜세울 때에 비로소 당신 글 또한 이 삶결에 따라 저절로 북돋울 수 있고 일으켜세울 만하지만, 당신 삶부터 제대로 거느리지 못하는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을 가꿀 때에 글을 가꿉니다. 삶을 사랑할 때에 글을 사랑합니다. 삶을 아낄 때에 글을 아낍니다. 삶을 따스히 어루만질 때에 글을 따스히 어루만집니다.

 ‘문장수련’을 한다고 글이 나아질 수 없습니다. ‘작가학교’를 다닌다고 글재주를 키울 수 없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글을 잘 쓰지 않습니다. ‘이름난 스승한테서 배운다’고 좋은 문학을 길어올리지 않습니다.

 빠듯하며 벅차고 힘겨운 내 하루하루를 찬찬히 일구면서 내 삶을 살찌울 때에 바야흐로 글 하나 얻습니다. 지쳐 나가떨어지면서 고단히 잠을 이루었다가 무거운 눈꺼풀 겨우 올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하루하루를 살가이 돌보는 가운데 비로소 글 하나 이룹니다.

 살을 느끼고 뼈를 느끼며 염통이랑 허파랑 콩팥을 느낄 줄 아는 글쓰기여야지 싶습니다. 눈과 코와 입과 귀를 찬찬히 알아채거나 느끼면서 움켜쥘 글쓰기여야지 싶어요.

 이제 막 글쓰기를 해 보겠다 생각하는 분이라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같은 책이 제대로 도움이 되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한창 글쓰기를 하는 분일 때에도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같은 책이 썩 도움이 될까 아리송합니다. 글쓰기를 생각하며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으면 매우 따분하거나 괜한 앎조각만 머리에 가득 담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책은, 글쓰기 길잡이책으로 읽어서는 덧없습니다. 이 책은 ‘글쓰기를 좋아하는 어느 한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로 생각하며 읽을 때에 비로소 즐거우며 알차구나 하고 느끼리라 봅니다.

 한 가지 토를 달아 보면, 출판사에서 ‘눈여겨보면 좋겠다 싶은 대목을 함부로 큰 글씨로 적어’ 놓아, 책을 읽으며 자꾸 걸리적거립니다. 이 책을 쓴 미국사람은 퍽 쉬운 글로 썼을 텐데, 우리 말로 옮기면서 얄궂거나 딱딱한 낱말과 말투가 너무 많이 튀어나옵니다. “자신의 몸과 육체를 믿는 법(31쪽)”처럼 잘못 쓴 겹말마저 곳곳에 드러납니다. “동그란 원 형태로 앉았다(241쪽)” 같은 대목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4343.12.4.흙.ㅎㄲㅅㄱ)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글,권진욱 옮김,한문화 펴냄,2000.6.20./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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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여자 - 떠남과 돌아옴, 출장길에서 마주친 책이야기
성수선 지음 / 엘도라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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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수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삶
 [책읽기 삶읽기 6] 성수선, 《밑줄 긋는 여자》


 내 둘레에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쓴 책이 나온 이야기를 듣고는, 이이 책을 책방마실을 하며 사들일 때 느낌은 사뭇 다르다. 잘 모르는 사람이 쓴 책을 읽을 때하고 조금이나마 안다 싶은 사람이 쓴 책을 읽을 때는 조금 다르다.

 그렇지만 조금 안다 싶은 사람이 쓴 책을 읽는들 이이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읽을 때보다 잘 헤아린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꽤 잘 안다 싶은 사람이 쓴 책을 읽는들 이이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읽을 때보다 잘 받아들인다고 여기지 않는다.

 삼성정밀화학이라는 일터에서 해외영업을 맡으며 살아가는, 그러니까 요즈음으로 치면 ‘여느 회사원’인 성수선 님이 내놓은 《밑줄 긋는 여자》(2009)라는 책을 읽다. 글쓴이를 안다는 까닭 하나 때문에 이 책을 사서 읽는다. 그러나 나로서는 글쓴이를 아주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조금 안다고 말하기조차 쉽지 않다. 밥자리와 술자리를 몇 번 함께한 적이 있다고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얼굴을 안다고 하면 될까. 때때로 헌책방마실을 즐기는 분임을 안다고 하면 될까.

 아는 이 책이라 해서 늘 장만하지는 않는다. 아는 이 책이라 해서 더 사랑하며 읽지는 않는다. 나로서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읽고 싶을 뿐이다. 나는 내 삶을 일구는 손발에 기운이 나도록 돕는 책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

 《밑줄 긋는 여자》라는 책은 책이름 그대로 ‘책을 읽을 때에 밑줄을 그으며 읽은 여자’ 한 사람이 살아가며 느낀 이야기를 적바림한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다. 꼭 글쓴이가 살아가는 만큼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렸을 때 우리 아빠는 보쌈을 사오시곤 했다. 아빠 회사 앞에는 몇 십 년 전통 원조라는 유명한 보쌈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술을 한잔 하실 때마다 우리 얼굴이 어른어른하셨나 보다. 물론 어렸을 때는 아빠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투정을 부렸다. ‘치킨도 있고 햄버거도 있는데 아빠는 왜 만날 보쌈만 사오세요?’(1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나 또한 밑줄을 긋는다. 나는 “아빠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투정을 부렸다”라는 글월에 밑줄을 긋는다. 왜냐하면 나 또한 우리 어머니 마음이나 아버지 마음이나 옆지기 마음이나 아이 마음을 제대로 읽는다고는 느끼지 않으니까. 그러면 나는 투정을 부렸던가? 글쎄, 투정을 부릴 새가 어디 있을까. 어린 나날, 아버지한테 투정을 부렸다가는 몽둥이가 날아왔을 텐데. 늘 일에 눌려 고단한 어머니한테 어떻게 투정을 부릴 수 있는가. 학교와 집에서 여러모로 힘들던 형한테 투정을 부릴 수 있을까. 나로서는 투정을 부린다는 어린 나날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다만 내 둘레에서 ‘엄마 아빠한테 투정 부리는 동무’를 보며, ‘이야, 저렇게도 살아가는 식구가 있네?’ 하고 놀라기는 했다.

 “《삼국지》를 열 번 넘게 읽었다고 떠드는 사람들 중에 처세를 잘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 나 하나 살아 보겠다고 남을 속이고 피해를 준다면, 나 하나 잘되겠다고 남을 헐뜯고 이간질한다면 결국 다 함께 망할 뿐이다(6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다. 글쓴이 성수선 님은 그야말로 ‘여느 회사원’이다. 문학책을 즐겨읽는 분이면서 처세책 또한 곧잘 읽는다.

 사람들이 제대로 못 느껴서 그렇지, 처세책도 읽기에 따라 ‘문학을 읽는 마음’이 된다. 문학책도 읽기에 따라 ‘처세를 살피는 마음’이 된다. 어느 책을 골라서 읽든 내 마음이 흐르는 대로 받아들인다. 어느 책을 마주하든 내 삶이 나아가는 대로 곰삭인다. 《삼국지》라는 책을 읽으려 한다면 이 책에 담긴 줄거리대로 지식을 줄줄 외우는 읽기가 아닌, 내 삶을 한결 아름다우며 훌륭한 쪽으로 이끄는 읽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삼국지》이든 《태백산맥》이든 《토지》이든 읽는 분들이 당신 마음을 아름답거나 훌륭한 쪽으로 이끌고자 하는지는 아리송하다. 사람들은 참말 왜 책을 읽는가. 뭐 하러 책을 읽는가. 사람들은 참으로 왜 영화를 보는가. 뭣 때문에 영화를 보는가.

 내 삶을 볼 줄 모르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들 마음이 뭉클할 수 없다. 내 삶을 가꿀 줄 모르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들 마음을 살찌울 수 없다.

 “난 내 꿈이 뭐였는지조차 잊은 채 살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졸업하고 한 번 찾아오지 않은 제자를 그토록 기다리고 계셨다(143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빙긋 웃는다. ‘글쟁이로서 대단한 이름값’이 없는 여느 회사원인 성수선 님은 꿈을 잊었다고 털털하게 이야기한다. 아마, 적잖은 여느 회사원은 술자리에서 술잔을 부딪히며 ‘내 꿈이 뭐였더라?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고 읊조리다가는 이튿날이 되면 말끔히(?) 양복 차려입고 일터로 달려가 ‘회사에 큰돈 벌어다 주는’ 쳇바퀴 일거리에 매일 테지. 씁쓸하게 읊던 ‘내 꿈은 뭐지?’는 언제나 술자리에서나 읊는 말일 뿐, 정작 당신 삶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당신 삶을 흘리고 말 테지.

 《밑줄 긋는 여자》는 대단한 책이 아니요 대단한 책일 까닭이 없으며 스스로 대단한 책이 되고자 바라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를 바란다. “……을 읽다가 그만 펑펑 울어 버렸다(166쪽).”고 하듯 글쓴이 삶을 조곤조곤 털어놓으며 말문을 열기를 바란다. 애써 연 말문을 맞은편에서 고즈넉히 맞아들여 주기를 바란다. 여느 회사원으로 살든, 땅을 부치며 살든, 네모난 교실에서 똑같은 지식을 아이들한테 집어넣으며 살든, 날마다 바쁘게 살림하며 바깥사람한테 밥 차려 주고 빨래 해 주며 집 치워 주면서 살든, 저마다 곱고 사랑스러운 넋임을 느끼어 만나자고 말문을 열기를 바란다.

 우리들은 우리 삶을 빛내는 빼어난 세계명작 한 가지를 오른손으로 읽는다면, 우리 삶에 깃든 작은 빛줄기를 꾸밈없이 사랑할 수수한 ‘삶 이야기 담은 책’ 한 가지를 왼손으로 읽어야 즐거우며 어여쁘리라 본다. 즐거우며 어여쁘게 살아가고픈 사람이라면 훌륭한 얼과 수수한 넋을 나란히 사랑하며 아낄 수 있어야지 싶다. (4343.9.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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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번역가들
쓰지 유미 지음, 송태욱 엮음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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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35 ― 잇는 삶, 잇는 사람, 잇는 손
 : 쓰지 유미, 《번역과 번역가들》



- 책이름 : 번역과 번역가들
- 글쓴이ㆍ엮은이 : 쓰지 유미
- 옮긴이 : 송태욱
- 펴낸곳 : 열린책들 (2005.5.10.)
- 책값 : 12000원



 (1) 말을 다루는 책


 온누리 모든 책은 말을 다룹니다. 말을 다루지 않는 책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림만 있다거나 사진만 있는 책이라 한다면 말을 하지 않으며 말을 다루는 셈입니다. 글로만 이루어진 책이라면 이 숱한 글로 차곡차곡 말을 다루는 셈입니다.

 창작도 말이고 번역도 말입니다. 창작도 문학이고 번역도 문학입니다. 창작도 삶이며 번역도 삶입니다. 어느 자리에 서거나 어느 쪽에 있든, 우리들이 살아가는 결이 고스란히 담깁니다. 어디에 있거나 어디로 가거나, 우리들이 살아가는 결 그대로 말을 합니다.

 문학이 문학답자면 문학하는 삶이 문학하는 삶다워야 하며, 문학하는 삶다움을 건사할 때에 비로소 문학하는 말이 문학하는 말다웁습니다. 문학하는 삶이 문학하는 삶다웁지 못하다면 문학하는 말이란 문학하는 말다울 수 없습니다. 이는 정치에서든 경제에서든 과학에서든 사회에서든 교육에서든 종교에서든 매한가지입니다. 내 두 다리를 어디에 세우고, 내 가슴을 어디에 놓으며, 내 눈길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옳게 갈 수 있는 한편, 그릇되이 갈 수 있는 삶길입니다.

 글이란 억지로 지을 수 없습니다. 글이란 내 삶을 고스란히 풀어내어 쓸 수 있을 뿐입니다. 글짓기는 창작이 아니지만 문학 또한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 삶을 고스란히 풀어내기만 해서는 문학이 되지 않고 창작 또한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짓기’ 아닌 ‘쓰기’를 하는 밑바탕이 서야 하고, 이러한 밑바탕을 튼튼히 건사하면서 ‘아름다운 내 삶’을 일구는 손길과 땀방울을 알알이 서려 놓아야 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태어나면서 다 다른 아름다움을 붙안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를 다 다르게 느끼고 받아들이며 다 다른 아름다운 삶을 일굴 때에 저마다 따사롭게 빛나고 너그러이 자랍니다. 이때에, 키가 백오십 센티미터이든 백오십일 센티미터이든 백육십 센티미터이든 백팔십 센티미터이든 이백 센티미터이든 다 다르게 아름다운 몸뚱이입니다. 흔히 말하는 예쁜 얼굴이든 미운 얼굴이든 저마다 다르게 고우며 맑은 모습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좋고 저 사람은 저렇게 좋기 마련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삶이기에 반갑고 흐뭇하며 살가웁지, 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옷을 입으며 똑같은 말을 하는데다가 똑같은 삶을 꾸리면 하나도 반갑지 않고 조금도 흐뭇하지 않으며 터럭만큼조차 살가웁지 않습니다.

 아주 똑같은 넓이만큼 농사를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주 똑같은 낱알을 빻고 까부르고 일고 씻고 안쳐 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밥그릇에 밥알을 똑같이 담아 똑같은 숟가락질로 퍼서 먹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습니다.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다 다른 사람이고 다 다른 삶입니다. 같을 수 없는 사람이며 같을 수 없는 삶입니다. 같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같을 수 없는 말이요, 같을 수 없는 삶인데 같을 수 없는 글입니다.

 오늘날은 제도권 교육이 태어난 까닭에 보육원이나 어린이집부터 모든 목숨들을 똑같이 길들이며 가르치려 합니다.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부터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넋에 똑같은 몸짓에 똑같은 말을 하도록 짜맞춥니다. 아인슈타인이라고 하는 분은 ‘사람은 누구나 똑똑한 머리로 태어나지만 어버이와 교사가 똑똑한 아이를 망가뜨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내 아이를 이웃 아이랑 똑같은 지식을 갖추고 똑같은 일거리를 찾아 똑같은 돈벌이를 하는 사람으로 키우려 하기 때문에 망가뜨립니다. 교사는 교사대로 제도권 학교에서 똑같은 교과서 지식을 똑같은 부피만큼 집어넣어 좀더 시험을 잘 치르는 훈련병으로 내몰기 때문에 망가뜨립니다.

 우리 누리를 돌아보면 나날이 새로 쏟아지는 책이 꽤 많습니다. 그렇지만 새로 쏟아지는 책 ‘권수와 가짓수’는 많으나, ‘서로 다르다’고 느낄 만한 대목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글쓴이나 그린이가 서로 사뭇 다른 삶을 일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다른 일거리를 찾으며 서로 다른 사랑과 꿈을 노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서로 똑같은 틀에 똑같은 넋에 똑같은 지식에 똑같은 가방끈에 똑같은 눈썰미에 똑같은 글매무새에 갇혀 있습니다. 홀가분한 몸뚱이가 아니요, 가벼운 마음이 아니며, 가붓한 손길이 아닙니다. 얽매인 몸뚱이요, 무거운 마음이며, 짐을 잔뜩 짊어진 손길입니다.

 다시금, 모든 책은 말을 다룹니다. 모든 책이 다루는 말은 삶에서 비롯합니다. 모든 책에 차곡차곡 실린 글월은 저마다 다른 사람이 꾸리는 삶결이 고스란히 담긴 발자취이거나 열매입니다. 그런데, 아주 어린 나날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걷는 길이 다른 삶은 몹시 드뭅니다. 때때로 제도권 틀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더라도 제도권 울타리 안쪽에서 이리 가고 저리 옮기고 하는 모양새만 살짝 벌어지기만 합니다. 스스로 ‘내 삶 만들기’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내 길 걷기’로 뻗어나지 않습니다. 남 눈길을 살피고 남 눈치를 보며 남 삶을 기웃거립니다. 나 스스로 나한테 가장 알맞으며 나를 가장 빛낼 고운 삶무늬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나 스스로 나한테 가장 싱그러우며 나를 가장 알뜰히 여밀 참된 삶자락을 부둥켜안지 못합니다. 이러는 동안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한국땅에서 한국사람과 나누는 흐름이 무언긴가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겉보기로는 한글일 테지만 속보기로는 우리 말이 아니기 일쑤입니다. 일본 말투이니 번역 말투이니 하는 말썽거리뿐 아닙니다. 우리 말투이냐 아니냐에 앞서 ‘내 삶을 담은 나다운 내 말투’이냐 아니냐부터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날 농사꾼들한테서는 그 집 밥을 보고 푸성귀를 보며 장맛을 보면서 ‘아무개네 밥이구나’라든지 ‘아무개가 키운 푸성귀구나’라든지 ‘아무개가 담은 장이구나’라 말하며 다 다르게 느꼈습니다. 똑같은 밥맛 나물맛 장맛이란 없습니다. 집집마다 다 다른 밥맛이요 나물맛이며 장맛입니다.

 오늘날 농사꾼들한테서는 집집마다 다른 밥맛과 나물맛과 장맛을 느끼거나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 똑같은 비료와 농약을 쓰는데 무슨 다른 쌀이요 나물이요 열매요 장이 되겠습니까. 씨제이에서 만든 콩나물과 풀무원에서 만든 콩나물과 청정원에서 만든 콩나물이 어떻게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더욱이, 우리들은 공장에서 찍어내거나 뽑아낸 먹을거리에 길들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혀와 맛과 삶과 넋 모두를 스스로 내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책은 말을 다룹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삶은 다 똑같은 제도권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쓰며 오로지 돈만 벌고 겉치레 학벌에 매여 있을 뿐 아니라, 도시에서 시멘트 아파트와 자가용을 꼭 붙잡고 있으니, 으레 똑같은 책을 써내고 다 같이 똑같은 책을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라는 이름으로 찾아서 읽습니다. 똑같이 바라보고 똑같이 생각하며 똑같이 살아가고야 맙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얼굴과 몸매와 머리가 되려고 악을 쓰고 있습니다. 나한테는 내 멋이 있어야 하는데, 더 예쁘장하다는 아무개를 닮은 머리카락 모양으로 가꾸고, 더 곱다는 아무개가 입은 옷을 사서 입으며, 더 멋지다는 아무개가 타는 자동차를 장만하여 몹니다. 내 쓸모에 따라 내 삶결을 살피며 내 보금자리를 살찌우는 길을 걷지 않습니다.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으면 글쓰기를 익히면 되지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들어간다거나 글쓰기 강좌를 들을 까닭이 없어요. 사진을 찍으며 살아가고 싶으면 사진찍기를 하면 되지 대학교 사진학과를 들어간다거나 사진찍기 강의를 들을 까닭이 없습니다. 내 삶에 따라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줄 헤아리지 못하며, 내 삶에 따라 내 몸을 사랑하고 내 마음을 아끼는 흐름을 잡아채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이 땅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말을 다루는 책’들은 하나같이 닮은 꼴입니다. 하나같이 일본 말투와 번역 말투에다가 한국말답지 않은 매무새와 얼거리이기도 하지만, 이런 말틀과 말법와 말투에 앞서 저마다 오롯이 아름다운 삶결을 알뜰살뜰 실어낸 아리따운 책으로 우뚝 서지 못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야 틀릴 수 있고, 잘못된 낱말이나 말투야 아직 잘 모르니까 어수룩하게 쓸 수 있어요. 그러나, 겉모양이 아닌 속알맹이는 야무져야 합니다. 겉모양은 좀 투박하거나 못생기더라도 속알맹이는 튼튼하고 꽉 차 있어야 합니다. 참되고 착하며 곱게 속을 차려야 합니다. 맑고 밝으며 튼튼하게 속을 일구어야 합니다. 책 하나가 책다웁다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줄거리가 알차면서 즐거웁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2) 《번역과 번역가들》 제대로 읽기


 쓰지 유미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엮은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은 프랑스 둘레에서 번역일을 하는 사람들이 번역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하고, 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어려움을 들려줍니다.

 ‘번역을 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깊이 알고 싶어서’라고 이야기하며, ‘번역을 잘 해내려면 내 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을 잘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산문으로 옮긴 시는 진작에 시가 아니지만 산문조차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모르는 나라를 처음 찾아갔을 때 이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느끼려 하는가’처럼 새로운 작품을 처음 만나며 내 동무들한테 알려주고픈 마음으로 번역을 하고, ‘밥을 먹듯이 사랑을 하듯이 마실을 하듯이’ 번역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곰곰이 따질 수 있는 우리 넋이라면, 창작이든 번역이든 똑같이 문화이고 예술이며 삶입니다. 지난날에는 지식과 권력 움켜쥔 사람들만 책을 읽었다면 오늘날에는 지식이나 권력하고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지식하고 권력은 처음부터 바라지 않는 사람들 또한 책을 읽습니다. 지난날에는 지식과 권력 움켜쥔 사람들 스스로 책을 내놓았고, 지식과 권력 움켜쥔 사람들 사이에서만 책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지식과 권력 움켜쥔 사람들 스스로 책을 내놓고 나누기도 하지만, 이런 데하고 동떨어지거나 생각조차 않는 사람들 또한 스스로 책을 내놓고 나눕니다. 둘이 섞여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지난날 사람들한테는, 아니 지난날 한국땅에서는 창작이나 번역은 문화나 예술이 되기 어려웠고 삶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는 드문드문 문화나 예술이 되는 책이 나오며, 삶이 되는 책 또한 더러더러 마주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화가 되는 창작이나 번역이라면 지식이나 권력하고는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술이 되고 삶으로 거듭나는 창작이나 번역이라 한다면 지식이나 권력을 굳이 가까이 사귈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지식이나 권력하고 동떨어진 사람들하고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려는 매무새이기 때문입니다.

 번역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당신들 스스로 더 깊이 알고 싶어서 번역을 한다고 했는데, 창작하는 사람들 또한 누구보다 당신들 스스로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창작을 합니다. 창작하는 사람이든 번역하는 사람이든 당신들이 다루는 이야기감 하나를 대단히 다부지게 붙잡으며 파헤칩니다. 따숩고 너른 마음결로 보듬으면서 다룹니다. 자전거 이야기 하나를 쓴다고 할 때에, 자전거를 글쓴이 삶으로 녹여내지 않는다면 자전거 이야기를 쓸 수 없습니다. 자전거를 다루는 책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이도 그렇습니다. 아무렇게나 그림 하나 그려 넣고 ‘돈만 벌 생각’이라면 겉보기로는 예쁘장하거나 멋스러워 보이도록 그릴 테지요. 그렇지만 그린이 삶으로 자전거를 녹여냈다면 그리 예쁘장하거나 멋스럽지 않다지만 참 자전거다운 자전거를 그릴 뿐 아니라, 두고두고 들여다보며 질리거나 따분하지 않는 자전거를 수수하고 조촐하게 그려냅니다. 이는 번역하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라, 번역하는 사람 스스로 자전거를 아끼고 사랑하며 내 몸뚱이로 녹여낼 때에라야 비로소 자전거 이야기를 알뜰살뜰 옮겨 냅니다.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을 엮은 일본사람 쓰지 유미 님은 이 책 하나에서 ‘번역이란 무엇인가’하고 ‘번역은 어떻게 하는가’에다가 ‘번역은 어떤 일인가’와 ‘번역하는 뜻은 어디에 있나’를 차근차근 풀어내도록 숱한 사람들한테서 다 다른 삶을 다 다르게 끌어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번역을 다룬 책이 몇 가지 나오기는 했는데, 《번역과 번역가들》처럼 알뜰하고 살가우며 훌륭하게 엮지는 못했습니다. 쓰지 유미 님은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에서 ‘번역은 삶입니다’ 하는 목소리를 다 다른 번역쟁이들한테서 다 다른 목소리와 넋으로 풀어내도록 이끌었지만, 우리 나라에서 나온 번역 다룬 책들은 이 대목을 건드리지조차 못하거든요.

 살아가는 내 결에 따라 창작을 합니다. 살아가는 내 자리에 따라 번역을 합니다. 살아가는 내 터전에 따라 읽기를 합니다. 내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창작과 번역이 달라질 뿐 아니라, 나 스스로 골라서 읽는 책이 달라집니다. 내 삶이 어떻게 흐르는가에 따라 내 둘레 사람들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알아챌 수 있는 한편, 내 둘레 사람들 이야기에 귀를 닫거나 도리질을 할 수 있어요. 내 삶을 보듬는 모양새에 따라 어깨동무와 손잡기가 달라집니다. 내 삶을 어루만지는 매무새에 따라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말하느냐하고 엉뚱하게 생각하고 엉뚱하게 말하느냐가 갈립니다.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은 “글과 글쟁이들”이라든지 “사진과 사진쟁이들”이라든지 “기사와 기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고쳐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번역을 다루는 줄거리를 이루고 있으나, 속내를 찬찬히 굽어살피면 ‘번역 = 삶’이라는 물줄기를 잘 붙잡고 있기에, ‘번역’ 하나를 발판 삼아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아름다이 일구는 슬기로운 길을 스스로 찾자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즐겁고 산뜻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참말, 글은 쓰기 나름이고, 번역을 하기 나름이며, 책은 읽기 나름입니다. 삶은 일구기 나름입니다.
 



 (3) 좀더 나은 번역이 될 수 있다면


 무척 좋은 이야기를 다룬 책 《번역과 번역가들》이라고 느끼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옮긴 분이 썩 좋은 말투로 옮기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번역을 다루는 책인데, 아름다운 우리 말로 옮길 수는 없었을까 싶어 안타깝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름다운 우리 말밭으로 옮겨 내기란 너무 힘들기만 한가 싶어 아쉽습니다.

 어쩌면, 이 책에 나오듯, ‘한 해에 천 쪽이나 옮겨야 먹고살 수 있다면 제대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옮기신 분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당신 번역글을 좀더 알뜰살뜰 돌보거나 추스르거나 가다듬기 어렵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 책 하나를 여러 해를 두고 느긋이 옮기면서 차근차근 가다듬을 수 있었다면, 다른 수많은 세계명작 못지않게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이 명작다운 작품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3.7.26.달.ㅎㄲㅅㄱ)


[17, 20, 26, 101쪽] 내가 번역을 하는 것은 우선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 번역이라는 시련을 빠져나갈 때는 번역어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때는 정말로 이해했는지 어떤지가 가려진다 … 번역이란 원문 속에 간직된 것을 표현하는 일이다. 차원이 다른 의미가 중첩되어 만들어 내는 긴장감을 번역문에 옮겨 놓을 수 있을 때, 번역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내 생각에 번역한다는 것은, 일본의 독자가 일본어로 읽었을 때 그 작품이 주는 느낌에 가까운 것을 프랑스어 독자에게 줄 수 있도록 작품을 재구축하는 일이다 … 훌륭하게 쓰인 작품일수록 번역은 쉽다.

[20, 27, 38, 84, 102, 157쪽] 기원전 3세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쓰인 것 등은 지금의 중국어에서 보면 외국어 같은 것이다 … 일본어의 구어는 쉬워, 아이라면 자신의 생활환경에서 나오는 말을 쉽게 익힌다. 그러므로 구어 차원에서 보면 이중 언어 사용자는 얼마든지 있다 …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어 문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다 … 하나하나의 작품은 고유한 목소리나 에너지, 숨결이나 리듬으로 독자적인 말을 만들어 내고 있다 … 작품은 그대로 남지만 번역은 변한다 … 번역가에게 필요한 첫 번째 자질은 모어로 제대로 된 문장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번역문이 서툴면 원문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가 없다.

[31, 35, 51, 109쪽] 번역에는 양쪽 언어에 대한 확실한 지식, 특히 번역문의 언어에 대한 깊이 있는 교양을 빼놓을 수 없다 … 번역에는 문학이나 언어의 역사에 대한 아주 깊이 있는 지식과 함께 그 작가에 대해 깊숙이 파고든 연구를 빼놓을 수 없다 … 왜 번역하는가 하면 아마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컨대 어떤 제도의 명칭 같은 일본사 용어를 앞에 두었을 때, 만일 그것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지 않고 일본어 그대로 썼다면 그 말의 의미에 대해 정말로 잘 생각했는지 어떤지, 아마 나 자신도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일본의 역사에 대해 쓰는 것은, 물론 일본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된 책이기 때문이다 … 산문으로 번역된 시는 이미 시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산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77, 83, 123쪽] 번역할 작품을 차분히 읽어 친숙해지고 거기에서 일종의 일관성을 찾아내면 ‘자연스러운’ 번역문이라는 환상에 빠질 위험은 적어진다. 주문을 받아 번역하는 경우에 자주 있는 일인데, 번역할 페이지만 읽으면 함정에 빠져 의미라든가 중요한 것들이 사라져 버리고 감수성 같은 것만을 번역하기 십상이다 … 번역에는 여러 가지 함정이 있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출판사 측에 의해 생긴다. 잘 팔리기 위해서는 이른바 독자의 문학적 기호에 맞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출판사는 번역 원고에 손을 대 아주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번역 냄새를 지우기 위해 다시 쓰는 경우도 있다 … 네덜란드의 네덜란드어는 영어의 영향으로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그에 비해 벨기에의 네덜란드어는 과거의 것을 훨씬 잘 보존하고 있어, 19세기 말이나 중세에서 유래하는 표현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모르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는 벨기에 사람이 적어진다는 것은 네덜란드어의 풍부함이 상실되어 버리는 일이다.

[91, 101, 122쪽] 번역의 재미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여 다른 문화와 접하는 것 같은 일이다. 문화 탐색이라는 것은 정말 지평선을 넓혀 준다. 끝이 없는 일이다 … 문제는 훌륭한 번역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번역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양쪽 언어를 깊이 알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쓰는 것도 알아야 한다. 쓰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번역문의 표현력을 길어 낼 원천이 없다 … 단어의 의미라면 사전에 쓰여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각각의 저작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어조와 리듬, 물론 거기에는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

[114, 130, 198쪽] 에로와 범죄를 다룬 것은 새롭고 잘 팔리기 때문에 많은 출판사들이 그런 책을 출판하여 이익을 올리고 있다. 번역한 것도 잘 팔리는 것은 속악하고 장정의 예술성도 형편없는 책이다 … 나에게 중요한 것은 책이 번역되어 독자의 손에 건네지는 일이다 … 1년에 1천 페이지나 되는 번역을 해야 먹고살 수 있다면 질 높은 번역을 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128, 155쪽] 번역하는 데는 그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번역하는 언어의 나라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야 한다. 될수록 오랫동안. 그것은 이미 언어학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 나라의 음식을 먹고, 그 나라 사람들과 섞여 버스나 전철을 타고, 그 나라 여자 또는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 하나의 언어란 그러한 것 전부를 말한다. 번역하려는 문화, 문명, 생활은 그러한 것 전체이다. 그것은 음식이고 여행이며 연애이다 … 어떤 언어로 쓰인 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여 재창조하는 일이다.

[175쪽] 번역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그 번역을 읽은 사람들은 잘못된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톨스토이나 체호프를 대작가로 인정했다.

[204, 206쪽] 나의 번역학교가 성공한 것은 그것이 대학의 틀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 번역은 예술과 같다. 출판 번역만으로 생활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묻는 것은 피아노 연주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사는 것이라면 가능해도 피아노 연주로 먹고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 때로 학생들은 훌륭한 번역어를 찾아낸다. 나보다 훨씬 좋은 경우도 있다. 멍청하게 있을 수는 없다.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면, 자칫 자기만족에 빠져 자신의 번역에 쉽게 만족해 버리기 십상이다.

[235쪽] 최근 교양 있는 사람이나 문화ㆍ사회ㆍ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를 산다. 문학적 에세이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의 에세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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