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의 사상
나카노 고지 / 자유문학사 / 199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34 ― 좋은 삶, 좋은 사람, 좋은 말
 : 나카노 고지, 《청빈의 사상》



- 책이름 : 청빈의 사상
- 글 : 나카노 고지
- 옮긴이 : 서석연
- 펴낸곳 : 자유문학사 (1993.5.15.)
- 판이 끊어짐

 





 (1) 좋은 삶을 찾는 길


 엊저녁 날씨가 차츰 쌀쌀해지더니 그예 얼음비가 내렸고, 밤에는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개나리며 봄꽃이며 가득가득 피어나겠구나 하고 생각할 즈음 온 동네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지난날을 떠올리면 사월에도 눈이 내렸고, 강원도 양구에서 군대살이를 할 적에는 부처님오신날까지 눈이 내렸습니다. 남녘땅에서는 삼월에 찾아오는 눈이란 드물지 않은 손님이요, 북녘땅에서는 더 늦게까지 눈손님이 찾아올 테지요.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를 집에만 둘 수 없기에 바깥마실을 나왔으나 얼음비나 눈이 내리기 때문에 걸리지는 못합니다. 우산을 받고 아이를 안으며 걷습니다. 아이는 비나 눈이 올 때에는 걸리지 않는 줄 아는지 찰싹 안긴 채 우산대를 한손으로 잡으면서 놉니다. 어스름이 깔리는 골목을 함께 거닐며 사진 몇 장 찍어 보고자 하는데, 날도 저물고 한손에는 아이를 안고 있으니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볍지 않은 사진기를 들고 숨을 참으며 아이가 가만히 있는 때를 살펴 찍기란 참 팔 떨어질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어스름 골목은 어스름 골목대로 멋이 있고, 눈발 흩날리는 어스름 골목은 눈발 흩날리는 어스름 골목대로 삶이 있습니다. 누구나 달콤한 삶과 함께 쓰디쓴 삶이 찾아올 터이며, 고단한 삶과 맞물려 홀가분한 삶을 마주할 터이고, 얄궂은 삶에 뒤잇는 반가운 삶을 즐길 테지요.

 골목마실을 하노라면 골목동네에서도 온갖 갈래 집을 만납니다. 넓은 마당이나 뜰을 마련한 부잣집을 만납니다. 손바닥만 하지만 아기자기하게 꽃밭이나 텃밭을 일구고 감나무나 대추나무나 고욤나무나 포도나무나 오동나무 들을 심은 조금은 넉넉한 살림집을 만납니다. 옛 기와를 고스란히 살린 살림집이나 개량 기와를 얹은 살림집을 만납니다. 골목 담벼락을 따라 꽃그릇을 주욱 마련한 집을 만나고, 담벼락 한켠에 시멘트를 섞어 삼십 센티미터나 오십 센티미터 너비로 죽 만들어 놓은 텃밭이나 꽃밭이 딸린 집을 만납니다. 꽃그릇 하나 놓을 수 없도록 비좁은 샛골목으로 이어진 데에서 다닥다닥 붙은 채 살아가는 한칸집을 만납니다.

 그런데 제아무리 한칸집이라 할지라도 그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골목을 따라 빨랫줄을 드리우기 마련입니다. 전봇대와 전봇대를 잇고, 옥상 작은 틈에 어떻게든 빨랫대를 세워 서로 조금씩 자리를 나누어 해바라기 빨래를 넣어 놓습니다. 겨우 한 사람 올라갈 만한 구멍을 뚫고 사다리를 놓아 옥상으로 올라가고, 지붕 한 끝과 다른 끝에 장대를 박아 놓습니다. 더욱이 이런 좁은 옥상에 꽃그릇 한둘쯤은 으레 올려놓습니다.

 하루이틀 사흘나흘 동네를 돌고 다시 돌고 거듭 도는 동안, 지난번에 보거나 마주한 모습을 새삼스레 느낍니다. 지난번에는 보지 못한 새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하며 뭉클함을 느낍니다. 해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모습에 반가움을 느낍니다. 동네마다 고추말리기를 하느라 빠알갛게 물들던 2008년 팔월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창 찍을 모습이 많을 때에 아이와 옆지기 곁에 붙어 지내느라 사진찍기 좋은 때를 가슴으로 삭이며 보냈습니다. 이듬해에도 아이 돌보는 데에 바빠 고추말리기 사진을 제대로 담지 못했습니다. 아마 올해 여름에도 고추말리기 사진을 담기란 퍽 어려운 노릇이 아니랴 싶습니다. 나 혼자 좋다고 나 혼자 좋을 일을 할 수 없으니까요. 내 일을 챙긴다면서 식구들 일을 뒷전으로 미룰 수 없으니까요. 함께 살아가는 살붙이라 한다면 함께 웃고 울 만한 일거리와 놀거리를 찾아야 알맞고, 함께 느끼고 함께 보고 함께 헤아리며 함께 부대끼는 삶이어야 조촐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곰곰이 돌아봅니다. 혼인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았을 때에는 혼자서 신나게 골목마실을 하고 책방마실을 했겠지요. 사진은 더 많이 찍고 책은 훨씬 많이 읽으며 살아가겠지요. 훌륭하다 싶은 사진을 대단히 많이 일구어 놓았을 테고, 아름답다 싶은 책을 꽤나 많이 머리속에 담고 있었을 테지요. 틀림없이 이와 같이 꾸리는 삶은 이와 같이 꾸리는 삶대로 뜻이 있고 값이 있습니다. 내 꿈을 한껏 펼치면서 내 마음을 그지없이 드높일 수 있으니 알차고 빛나는 삶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알차고 빛나는 삶은 누구와 함께 알차거나 빛날 삶이 될는지요. 내 이웃과 동무 앞에서 어떻게 알차거나 빛날 삶으로 아로새길 수 있을는지요.

 아름다운 사진은 참말로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멋진 사진은 더없이 멋진 사진입니다. 훌륭한 사진은 그지없이 훌륭한 사진입니다. 그러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고 멋이란 무엇이며 훌륭함이란 무엇인가요. 한 사람이 사랑할 삶에서 우리가 곱다시 껴안으면서 즐기고 나눌 아름다움과 멋과 훌륭함이란 무엇인가요.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우리 바깥에 있을는지요. 멋이란 노상 머나먼 곳에 닿아 있을는지요. 훌륭함이란 홀로 거룩하게 이루어 내는 일인지요.

 요사이 우리 옆지기가 뜨개질을 익히고 있습니다. 얼마 앞서는 바느질로 아이 인형을 셋이나 만들더니, 이제는 뜨개질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옆지기가 바느질을 하든 뜨개질을 하든, 한 번 손에 붙잡으면 아침부터 밤까지 이 일에 꼬박 매달립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이 밥때이든 무엇이든 하나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지 않더라도 밥차림이나 다른 집살림은 아빠 몫이었지만, 아주 깊이 빠져들며 바느질을 하고 뜨개질을 합니다. 처음에는 엄마한테 막 달라붙던 아이도 이제는 어느새 받아들였는지, 엄마가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면 옆에서 꽤 오랫동안 혼자서 책을 보고 쌓기놀이 들을 합니다. 어제는 새벽 세 시 반까지 뜨개질을 하던데, 한창 뜨개질 맛을 들이고 익힐 때이니 늦도록 마음이 끌리는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 또한 글쓰기에 폭 빠지는 때라면 새벽 세 시이든 네 시이든 오래오래 글 하나를 붙잡으며 갈고 다듬고 깎고 여미곤 합니다. 누가 읽어 주건 말건 저 스스로 마음에 들 때까지 손질하고 손보고 고쳐씁니다. 한 사람이 읽어 주든 백 사람이 읽어 주든 그다지 마음 기울이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흐뭇할 만한 글이어야 하고, 저 스스로 열 해 뒤에도 스스럼없이 사람들 앞에 내보일 만한 글일 뿐 아니라, 제가 읽어서 참 좋다고 느낄 글이 될 때까지 내처 붙잡습니다.

 지난 1998년부터 사진을 찍어 오면서, 제 사진감 몇 가지를 놓고 새로 찍고 거듭 찍고 또다시 찍고를 되풀이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사진책 몇 권을 묶을 만큼 꽤 대단하거나 멋진 사진은 수두룩하게 있으리라고. 그러나 저로서는 사진책 몇 권을 묶을 만한 대단하거나 멋진 사진을 찍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돈이 철철 흘러넘쳐서 마구잡이로 찍지는 않습니다. 제가 찾아다니는 헌책방이 좋고, 제가 살고 있는 골목길이 좋으며, 제가 타고다니는 자전거가 좋은 한편, 옆지기와 함께 키우는 아이가 좋으니까 사진을 찍습니다. 그저 또 찍고 거듭 찍고 새로 찍습니다. 좋기 때문입니다. 늘 마주하면서 좋은 느낌이기에 ‘오늘은 이런 좋은 느낌이 있네’ 하면서 새삼 찍습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언제나 곁에 있는 이웃인 헌책방이고 골목길이고 자전거인 까닭에 ‘이날은 이날대로 이런 느낌이 반갑네’ 하면서 신나게 찍습니다. 웃는 아이이든 자는 아이이든 땡깡 부리는 아이이든 밥 먹는 아이이든 조용히 책읽는 아이이든, 어느 모습이든 좋은 우리 아이 삶이기에 줄기차게 사진을 찍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도 참으로 좋은 책이라고 느끼니까 오래오래 읽습니다. 나와 옆지기한테 좋고, 나중에는 아이한테도 좋으리라는 느낌을 받으니 차곡차곡 갈무리를 해 놓습니다. 서른여섯 해 삶에서 열여덟 해 삶을 책사랑으로 걸어온 길이었기에 저한테 참 좋은 이 책을 혼자 간직하기에 아쉬워 동네 도서관을 열어 놓습니다.

 좋은 느낌을 담아 좋은 말을 나누고, 좋은 말을 나누며 좋은 뜻을 북돋웁니다. 좋은 뜻은 좋은 길로 이어지며, 좋은 길은 좋은 삶으로 마무리됩니다.


 (2) 좋은 책 하나란


 《청빈의 사상》이라는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판이 끊어진 지 꽤 오래된 책이라 헌책방에서 만났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 해 만에 겨우 다시 한 권 만났을 때에 기쁘게 장만한 다음 이웃집에 선물해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헌책방마실에서 이 책이 다시 눈에 뜨이면 기쁜 마음으로 장만해서 제 둘레 고운 이웃한테 선물해 줄 생각입니다.

 이웃이나 동무한테 선물해 주는 책이란, 저 스스로 대단히 좋은 책이라고 느끼는 책이어야 합니다. 아니, 저 스스로 대단히 좋은 책이라고 느끼지 않고서는 책 선물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먼저 맛을 보거나 맛을 어느 만큼 알지 않고서는 술이든 떡이든 밥이든 선물할 수 없습니다. 제가 먼저 기쁘게 읽거나 줄거리를 어느 만큼 알지 않고서는 책을 선물할 수 없습니다.

 《청빈의 사상》은 일본사람 나카노 코지 님이 쓴 책입니다. 일본 문화와 역사와 철학에 눈길을 두는 외국사람한테 ‘일본이라는 나라는 예부터 이러한 넋과 얼을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레 지키고 보듬으면서 이어왔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마련했던 강연을 갈무리해서 엮은 책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하면서 맑고 아름다운 일본사람 넋’을 다루는 책 《청빈의 사상》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일본이라는 나라는 없는 역사를 억지로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는 자그마한 아름다움 하나를 고맙게 건사하면서 알뜰히 빛내는 나라’라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일본과 이웃한 한국이라는 나라는 ‘싸움을 벌여 땅뺏기를 해 온 발자취가 역사인 줄 잘못 알고 가르치며 이야기하는’ 어설픈 나라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적을 돌아보면, 또 이 나라 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쓰는 교재를 살피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임금님 이름이나 무슨무슨 굵직한 사건사고를 가르칠 뿐입니다. 궁중음식 역사는 있어도 서민음식 역사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궁궐 안쪽에서 오가던 이야기를 놓고는 숱한 연속극을 찍지만, 궁궐 바깥쪽에서 살아가던 이야기를 놓고는 아무런 연속극이 없습니다. 지난날 이 나라에 농사꾼이 95%가 넘었고 고작 5%가 안 되는 이들이 양반이요 신하요 뭐요 하고 했다지만, 우리들은 95%가 넘는 여느 사람들 발자취란 아예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95%가 넘는 농사꾼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고려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를 아우르는 역사책 가운데 임금과 신하와 궁궐 둘레 이야기 아닌 이야기를 몇 가지나 적바림해 놓았습니까. 아무런 기록이 없으니 아무런 역사가 없다 여기고, 아무런 역사가 없다 여기니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무 배울거리가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음고리는 2010년에 돌아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문이며 방송이며 책이며 온통 ‘있는 사람’ 이야기일 뿐입니다. ‘없는 사람’이나 ‘앗긴 사람’이나 ‘눌린 사람’이나 ‘밀린 사람’들, 그러니까, 이 나라를 맨 밑바닥에서 받치면서 꾸려 나가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는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끝없는 경쟁과 싸움과 순위와 등수와 서열과 연고와 학연과 씨줄과 학벌과 재산과 주식과 아파트와 자가용과 정치와 경제와 스포츠만 있는 듯 시끄럽습니다. 여느 사람 여느 살림과 여느 골목동네 여느 웃음꽃 눈물꽃에는 아예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청빈의 사상》을 쓴 나카노 고지 님은 일본 옛사람 입을 빌어 이야기합니다. “죽은 뒤에 누구에게 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살아 생전에 주는 것이 좋다(33쪽).” 누구보다도 당신 스스로 일본사람들이 너무 바보스레 살아가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한국사람이 아닌 일본사람들한테 일본 옛사람 손을 빌어 글을 적바림합니다. “저축하고 착취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나누어 갖는 것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린다(204쪽).”

 자가용을 몰지 않는 사람들만이 서민은 아닙니다. 그러나 큰차가 아닌 작은차를 몰고 있다 해서 서민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서민, 곧 ‘낮은자리에 있는 가난한 사람’은 자가용이 아닌 두 다리를 믿습니다. 기계가 아닌 두 손을 믿습니다. 컴퓨터나 책이나 신문 같은 매체가 아닌 내 머리를 믿습니다. 문학이나 예술이나 종교나 체육이 아닌 내 가슴을 믿습니다.

 일본 옛사람들만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나누어 오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한국 옛사람들 또한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나누어 왔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 옛사람 가운데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 무슨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나누어 오고 있었는지를 읽어낼 만한 눈길과 눈썰미와 눈결과 눈매와 눈높이를 추스르는 오늘날 한국사람은 몹시 드물지 않느냐 싶습니다.

 똑똑하고 엄청난 생각이라고 나쁘지 않습니다. 잘나고 멋스러운 생각이라고 못마땅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로서는 똑똑한 생각보다는 티없는 생각이 반갑습니다. 잘난 생각보다는 어여쁜 생각이 반갑습니다. 돈 잘 버는 생각보다는 착한 생각이 반갑습니다. 잘 알려진 이름값 높은 생각보다는 수수한 생각이 반갑습니다. 진보와 개혁과 보수라는 금을 긋는 생각보다는 맑은 생각이 반갑습니다. 부자 생각보다는 가난한 생각이 반갑습니다. 반갑고 고마운 가난한 생각을 고이 섬기며 내 삶으로 삭이면서 즐기고자, 우리 집 살림은 늘 가난뱅이 살림입니다.


 (3) 책상맡에 놓고 늘 들추는 책이란


 책상맡에 놓고 늘 들추는 책이라 한다면 《청빈의 사상》쯤은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마음이 흔들리거나 어수선할 때에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벗님으로 삼을 만한 책이라 한다면 《청빈의 사상》 눈높이는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 책이 목숨을 얼마 잇지 못하고 판이 끊어진 대목이 몹시 안타깝습니다만, 찬찬히 헤아리면 우리 나라에서 이 같은 맑고 아름다운 책이 널리 잘 팔리기란 아주 힘들구나 싶습니다. 한국땅에서 이 책은 아주 마땅하게도 판이 끊어질 만한 책입니다. 한국땅에서 이 책은 매우 마땅하게도 쉽게 잊혀지고 제대로 안 읽히며 깊이 돌아보고자 하는 사람조차 나오기 어려운 책입니다.

 그래도 《즐거운 불편》이나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같은 책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기도 하는 한국땅입니다. 아쉽게도 한국사람 손으로는 아직 《청빈의 사상》이나 《즐거운 불편》이나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같은 책을 써내지 못합니다. 우리한테는 아직까지 맑고 아름다운 생각이란 멀디먼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눈물을 삼키고 콧물을 훌쩍이면서 《청빈의 사상》을 되읽고 곱씹습니다. (4343.3.10.물.ㅎㄲㅅㄱ)


[25, 26, 32, 33쪽] 묘슈는 간탐하여 부귀한 자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다. 간탐을 미워한 나머지, 그녀는 부귀한 자는 반드시 어딘가 간탐한 점이 있지 않는가를 의심하고, 가난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바귀하다는 그 자체를 죄가 많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 묘슈는 빈곤 때문에 생기는 불행보다도 부귀가 사람의 마음에 끼치는 해독을 중시하고, 사이비 인간이 되어 부귀한 것보다는 가난하지만 인간다운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 듯하다 … 마음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저택을 지니면 그 유지ㆍ관리에 많은 사람을 쓰게 되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종일 마음을 괴롭혀야 한다 … 사람은 소유가 많을수록 마음을 빼앗기고, 그리하여 그 마음은 재물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37, 42, 43, 84쪽] 중요한 것은 돈벌이가 아니다. 칼의 감정에 관한 한 자기들이야말로 으뜸가는 권위자라는 긍지와 자부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겼으며, 돈에 눈이 멀어서 그 긍지와 자부를 손상시키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내재하는 규율이다 … 일본인은 이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전에는 그들도 남들 앞에서 금전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주 멸시하고, 무엇보다도 명예를 존중하며, 고결하게 행동하는 것을 존중했다 … 일본이 세계에 자랑해야 할 것은, 이 나라가 경제 대국이 되었다거나 수출 대국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한 것, 즉 ‘무형의 인격’에 관한 사항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 료칸은 남들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지 마음쓰지 않았다. 바로 그 안에 삶의 충족이 있었으므로, 그것이 선경이었는지도 모른다.

[59, 176쪽] 먹을 것을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포식의 시대에는 먹을 게 있다는 그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굶어죽기 직전의 상태, 즉 끼니를 거르기 일쑤일 때 쌀 석 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 그저 가난한 생활을 했다는 것뿐이라면 아무도 그 사람에게 마음이 쏠리지는 않는다 … 일단 소유욕에 빠지게 되면 사람은 소유의 증대에만 관심을 빼앗기고 금전의 노예가 되어, 그밖의 인간의 중요한 일들에 마음이 미치지 못한다.

[75, 83, 88∼89쪽] 고독하지만 자기 뜻대로 살며,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자기 혼자만의 삶을 보낸 것이다 … 료칸에게는 시와 와카를 짓고 좌선을 하고 불경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 역시 속세를 떠난 세계에서 노는 방도였다 … 말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줄 뿐이며, 오직 그것만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그(료칸)는, 지나치게 자신을 책망하는 이에게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입을 다물며, 알려고 하는 이에게는 ‘공을 쳐 보려 무나’라고 다정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 료칸은 결코 설교 따위를 하지 않고, ‘오로지 도의로 중생을 감화시키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92, 102, 105, 108쪽] 요즘 쏟아져나오는 하찮은 소설을 읽기보다는 옛날의 그러한 일화집을 읽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 문인화는 정신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교가 제아무리 능한 자일지라도 속된 마음이 있으면 그림에 그것이 나타났다 … 예술에 정진하는 자에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마음이 있는 한, 참된 예술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 결국 시기, 즉 장삿속을 떨쳐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다다른 높은 경지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스스로 미(美)라고 믿는 바를 추구해서 그것을 행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요즘 그림은 옛것에 미치지 못한다 … 옛 학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고, 요즘 학자는 남을 위해서 한다.

[119, 132, 145쪽] 단순히 글귀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마음가짐에 이어지는 것이다 … 아케미는 이러한 참된 즐거움은 벼슬살이하면서는 이루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아무도 의지하지 않는 가난한 독립독보 생활에만 있음을 익히 터득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풍아는 그런 곳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 진실의 인식에는 시대가 없다.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닌 것이야말로 문화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이다 … 그러나 좌절한 체험이 없는 자는 평생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137, 139, 142, 224쪽] 죽음을 미워한다면 그 기쁨을 하루하루 확인하고 살아 있음을 즐겨야만 한다 … 사람이 모두 이와 같이 살아 있는 지금이 즐겁지 않은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세상일에 바삐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일에 마음을 빼앗겨 가장 솢우한 것을 망각한 점에서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 평균 수명이 얼마라는 식으로 자랑스럽게 늘어놓고는 하는데, 그것이 다만 육체적 생명의 연장만을 의미한다면 도대체 거기에 어떤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 사이교도, 바쇼도, 뛰어난 시인으로서의 언어를 통해 생에 대한 감각을 잘 표현하였지만, 단순히 언어를 구사하는 기술에 능숙했던 것만은 아니다. 언어 이전에 이 세상에는 자기 및 타인, 다른 생물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평소부터 가슴깊이 느끼고 있었던 사람들로, 그 깨달음의 깊이가 우리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147, 148, 152, 156쪽]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그 길을 걸어다닐 때 느낀 그의 행복감은, 이것이 마지막 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참다운 문예 작품은 대부분 생애의 마지막을 보는 눈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고 있다 … 자못 바쇼다운 말이며, 그는 평상시 한 작품 한 작품에 모든 힘을 기울여서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만을 지어 왔다는 사실의 표명이었으리라 … 마음의 빛깔이 아름답지 않으므로 표현으로 잔재주를 부리려 한다 … 나중에 반복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ㄷ르을 때와 단 한 번뿐이라는 각오로 들을 때는 듣는 사람의 주의력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163, 189, 215, 226쪽]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새로 돋은 푸른 잎 어린 잎 등은 모든 사람이 감탄하며 바라보는 바이지만, 그것을 ‘고귀하게 느꼈다’는 말로 표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시가를 읊조리기 위해 여기저기 명승을 찾아다니는 어설픈 풍류인의 마음가짐으로는 도저히 이런 식으로 순수하게 조화된 마음을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 이제는 오히려 ‘자연 보호’라든가 ‘환경 보존’이라는 것을 부르짖게 되었는데, 자연을 친구로 대해 왔던 선인들이 보기에 이것은 애당초 근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 이 이야기는 작은 새들에게의 설교라고 하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성 프란체스코가 평소에도 언제나 그와 같은 느낌으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 아마추어는 노래나 시구가 ‘말을 꾸며 내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데, 시가란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풍류를 간직하고 있는’ 그 마음 상태야말로 시가의 전부이다, 라고 사이교나 바쇼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236, 238∼239쪽] 지금도 서민이 모여 사는 도쿄의 어느 지역에 가 보면 뜰이 없는 집에도 화분이나 재배판에 작은 나무와 꽃을 심어 처마 끝에 놓아 두고 조석으로 물을 주는 광경을 볼 수 있다 … 환경보호라든가 사회 생태학 운동마저도 어머니들에게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누가 말하지 않아도 솔선하여 그것을 실천해 왔던 것이다. 청빈이란 단순히 가난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생명을 같이하고 만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240, 249, 256, 264쪽]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하늘의 은혜’라고 생각하며 단순히 금전으로 살 수 있는 상품으로만 간주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야말로 문화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이 아닐까 … 그렇게 터무니없이 쓰다 버리는 낭비 사회가 출현하고 있어도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풍요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라는 실감이 거의 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 지금 일본은 웬일인지 도처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규정이 만들어져 있어 생활, 교제, 복장, 행동에 틀이 형성되어 있는 것같이 보인다. 결혼식에서 사회자가 재촉하는 대로 손뼉도 치고 일어섰다 앉았다 하고, 사진찍는 것이 법으로 정해진 것도 명령하는 것도 아닌데, 그에 따르지 않으면 소외당한다는 규정이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다 … 자동차 따위를 제아무리 많이 수출한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조금도 일본의 자랑이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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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돼지 생명의 숲에서 길을 묻다 1
조슬린 포르셰 & 크리스틴 트리봉도 지음, 배영란 옮김 / 숲속여우비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41 ― 갇힌 삶, 갇힌 사람, 갇힌 밥
 : 조슬린 포르셰,크리스틴 트리봉도, 《우리 안에 돼지》



- 책이름 : 우리 안에 돼지
- 글 : 조슬린 포르셰,크리스틴 트리봉도
- 옮긴이 : 배영란
- 펴낸곳 : 숲속여우비 (2010.2.5.)
- 책값 : 7000원


 (1) 밥, 고기, 책, 삶


 스물한 달째를 맞이하는 우리 집 아이는 밥을 참 안 먹습니다. 왜 이렇게 밥을 안 먹을까 하고 곰곰이 헤아려 보면, 아이 젖떼기를 억지로 하지 않아서일 수 있고, 아이가 밥을 그닥 안 좋아할 수 있습니다. 젖을 먹으면 밥을 도무지 안 먹으려 합니다. 엄마가 젖을 안 주고 한참 굶겨야 비로소 밥을 날름날름 먹습니다. 아이 스스로 밥 있는 데로 쪼르르 달려가 손으로 조금씩 떠먹곤 하고요.

 아이는 저 스스로 몹시 배고플 때에는 밥이나 다른 먹을거리를 거의 가리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그리 배고프지 않으면 이도저도 받아먹을 생각이 없이 고개를 홱 돌리거나 아예 밥상 쪽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뒷걸음이나 옆걸음으로 슬금슬금 물러나서 옆이나 뒤를 보며 실쭉샐쭉 웃습니다. 이러면서 물만 잔뜩 마십니다. 날 때부터 이런 몸이었는지, 엄마와 아빠한테서 이런 모습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집은 하루에 두 끼니만 먹기는 하지만 그렇게 물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데.

 그제 저녁 세 식구가 오랜만에 전철을 타고 부평으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두 아이를 기르며 육아휴직을 하는 분 댁에 놀러갔습니다. 이분은 올 삼월에 학교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다시 한답니다. 이러면서 이분 옆지기가 육아휴직을 받아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로 했다는군요. 그런데 늘 바깥일이 많아 집에 늦게 들어와 버릇하는 아저씨가 하루 내내 집에서 아이하고 씨름하고 복닥이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얼마나 견디실는지 걱정입니다. 여자라고 아이키우기를 잘하도록 타고나지 않았고, 남자라고 아이키우기는 여자한테 떠맡기며 돈만 잘 벌어오면 되는 노릇이 아닐 터인데, 육아휴직을 받는다고 하루아침에 사뭇 달라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아파하고 힘들어하면서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눈여겨볼 수 있다면, 아이키우기란 밖에서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벌 때와 견줄 수 없이 보람이 있고 아름다우며 거룩한 줄을 살갗으로 느끼시리라 믿습니다. 세상 모든 목숨은 몸을 살찌우는 밥으로 숨을 잇는 한편, 마음을 북돋우는 사랑으로 넋을 가꾸기 때문입니다.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늘 가까이 어울리며 껴안거나 보듬는 따순 손길이 있어야 씩씩하고 튼튼하게 큽니다. 어른이 된 몸이라면 더 자라지 않으나, 더 자라지는 않더라도 살결과 몸뚱이가 싱그러우려면 좋은 먹을거리뿐 아니라 좋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어제 저녁 서울에서 우리 집으로 나들이를 오신 분이 있습니다. 손님맞이를 하려고 집에서 걸어 오 분쯤 되는 곳에 있는 가톨릭생협에 찾아가서 불고기 한 근과 남새만두 한 봉지를 장만합니다. 고기 장만은 무척 오랜만입니다. 지난해 여름쯤 한 번 장만해 집에서 해먹은 뒤 거의 열 달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식구는 가톨릭생협에서 푸성귀하고 곡식하고 두부하고 국수만 사먹지, 다른 먹을거리는 사먹지 않습니다. 동네 저잣거리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고기가 당기는 일은 드물고, 굳이 고기를 먹을 생각을 안 합니다. 나물 반찬에 누런쌀로 지은 밥을 파는 곳이 있으면 더없이 좋겠으나, 이러한 밥집을 찾기란 퍽 힘듭니다. 혼자 살 때에도 고기 반찬은 아주 가끔 해먹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술자리에서 고기 안주가 너무 자주 차려지니, 여느 밥자리에서는 고기 없는 밥상을 바라지 않느냐 싶습니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 어울리다 보면 으레 ‘고기집 가자’는 소리가 나오며, 길가 밥집들은 하나같이 고기집투성이입니다.

 얼은 고기를 물에 담가 녹인 다음 당근과 양파와 고구마를 썰어 스탠냄비에 물 조금 붓고 익힙니다. 살짝 익을 무렵 다 녹은 고기를 넣고 소금과 설탕을 골고루 뿌린 뒤 버섯을 뜯어서 얹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마련해 주신 불고기는 양파에 당근 조금 넣고 국물을 조금 많이 내어 밥을 비비거나 말아 먹을 수 있게끔 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하는 불고기 또한 국물로 밥을 비비거나 말 수 있는데, 지난날과 대어 보면 양파며 당근이며 다른 남새를 꽤 많이 넣습니다. 풀밭에 고기 한 점 있는 투로. 이렇게 불고기를 마련해 먹으면서도 고기 한 점에 반드시 밥을 한 숟가락 퍼서 함께 먹습니다. 사람들과 고기집에서 어울려야 할 때에는 노상 밥 한 그릇을 먼저 시키어 밥과 함께 먹거나 집에서 싸 들고 온 밥을 꺼내어 같이 먹습니다. 고기만 먹으면 욕지기가 나오고 이빨이 아프기 일쑤입니다. 고기를 먹은 뒤에는 으레 속이 더부룩합니다. 그런데, 이런 제 배속은 고기 탓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고기보다 풀과 곡식이 제 몸에 한결 어울린다고 여길 수 있는 한편, 풀과 곡식이라 하여도 농약과 비료로 키운 풀과 곡식이 아닌 거름과 땀으로 일군 풀과 곡식일 때가 몸에 잘 받고 즐겁습니다. 시골 농사꾼이 손수 기르던 닭과 염소를 먹어 본 적이 있는데, 이러한 닭고기와 염소고기는 매우 부드러우면서 입맛을 돋우고 몸에 잘 받았습니다. 공장에서 사료와 항생제로 한꺼번에 잔뜩 키워서 내보내는 닭고기는 양념을 아무리 맛깔나게 하더라도 제 입에는 맛있지 않으며 여러 날 속이 메쓰껍습니다.

 아이한테 능금을 사서 먹일 때이든 다른 과일을 장만해서 먹일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여느 저잣거리에서는 좀더 값싸고 굵직한 과일이 있으나, 이와 견주어 조금 더 비싸고 못생긴 과일을 생협에서 사다 먹입니다. 작고 못생겼다 할지라도 비료와 농약 아닌 거름과 땀으로 일군 과일이 몸에 즐겁게 받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도시에서 살아가며 내 몸을 살찌우는 먹을거리를 장만하려 할 때에는 나한테 먹을거리를 대어 주는 사람들이 제 보람을 누릴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책방마실을 하며 책을 장만할 때에 출판사에서 매긴 책값을 고스란히 치르며 장만하고자 하는 마음이니, 먹을거리를 장만할 때에도 알맞게 값을 치러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더 값싸게 파는 책방을 뒤적거리기보다 내 넋을 살찌우는 책장을 넘기고 껴안는 데에 품을 들이고 싶습니다. 더 에누리를 해 주는 인터넷을 알아내기보다 내 얼을 북돋우는 책을 살피는 데에 시간을 바치고 싶습니다.

 손님하고 마주앉은 자리에서 옆지기가 이야기합니다. 요즈음 좋은 커피를 갈거나 내려받아 마시는 사람이 많은데, 커피알만 좋은 녀석으로 갖추고 물은 제대로 걸러서 마시지 못한다고. 제아무리 유기농 커피라 할지라도 수도물에 타서 먹을 때하고 ‘맑은 물’에 타서 먹을 때는 맛이 크게 다르다고.

 그러고 보면 맑고 시원한 물은 두 손으로 떠서 맹물로 마셔도 참 맛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늘 시원하고 맑은 물은 다른 아무것을 안 타더라도 온몸에 새숨을 불어넣어 줍니다.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를 넘기면 물 이야기가 사이사이 나옵니다. 제아무리 밥을 맛있게 지어서 초밥으로 빚는다 하여도 ‘밥을 짓는 물’이 어떤 물인가에 따라 밥맛이 다르다고. 한 걸음 나아가 ‘처음 농사를 짓던 곳에 흐르는 물이 나락에 어떻게 스며들었는가’에 따라 깊은 밥맛이 다르다고. 마땅한 노릇이지만, 맑은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를 잡아 저밀 때하고 지저분해진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를 잡아 저밀 때에는 맛이 다릅니다. 맛뿐 아니라 우리 몸에 스며드는 숨 또한 다를 테지요.

 어쩔 수 없다지만 우리 삶터는 물다운 물을 언제 어디에서나 시원하고 맑게 마실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쩔 길 없다지만 우리 터전은 밥다운 밥을 언제 어디에서나 즐겁고 배불리 먹을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 탓만이 아닙니다. 국가보안법 탓만이 아닙니다. 새마을운동 탓만이 아닙니다. 고속철도와 뉴타운과 아파트 탓만이 아닙니다. 독재정권 탓만이 아니며, 무엇보다 이명박 대통령 탓만이 아닙니다.


 (2) 작은 책에 담은 큰 이야기


 《우리 안에 돼지》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책을 읽습니다. 1인출판사 ‘숲속여우비’에서 나온 세 번째 책입니다. 숲속여우비 출판사는 지난해에 《엄마가 사랑해》하고 《라니아가 떠나던 날》 두 권을 펴냈고, 올해에 《우리 안에 돼지》를 펴냈습니다. 《엄마가 사랑해》는 나라밖으로 입양된 한국 어린이 삶을 담은 책이요, 《라니아가 떠나던 날》은 노동착취로 푸른 삶을 잃는 어린이 발자취를 담은 책이며, 《우리 안에 돼지》는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으며 사람 먹을거리 또한 엉터리가 되는 슬픔을 담은 책입니다. 세 가지 책 모두 어린이 눈높이에 걸맞아, 아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읽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세상을 속깊이 들여다보도록 이끌어 주는 줄거리요, 어른들이 우리 세상을 차분히 돌아보도록 돕는 짜임새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터에서 어린이는 어린이다움을 건사하면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이 나라 기득권 사람들은 초등학교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며 다시 들썩이거든요. 한자 하나만으로 아이들 삶이 팍팍하지는 않습니다. 숱한 짐덩이를 아이들 어깨에 얹은 어른들은 한자라는 또다른 짐덩이를 아이들 어깨에 얹으려 하니 더더욱 팍팍해집니다.

 정작 아이들한테 베풀거나 나눌 손길이란 지식조각이 아닌 사랑이지만, 이 나라 기득권 사람들은 아이들한테 사랑 한 줌 쥐어 주려 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마다 억대가 넘는 돈을 들여 영어교실을 짓고 영어강사를 부르고 영어교재를 만들어 팔며 장사속 키우는 일로도 모자라 또다른 장사속을 불러들이려 합니다. 배움다운 배움하고 동떨어지는 학교입니다. 배움다운 배움을 생각하지 않는 교사이고 부모입니다.

 더 많은 교과서가 아닌 더 열린 운동장이어야 합니다. 더 많은 시험이 아닌 더 싱그러운 학교 둘레 자연이어야 합니다. 더 많은 지식조각이 아닌 더 열린 가슴이어야 합니다. 더 높거나 이름난 학교가 아닌 더 따순 손길이어야 합니다.

 시늉이 아닌 참다운 얼거리로 ‘비장애 어린이와 장애 어린이가 함께 배우는 터전’을 어린이집일 때부터 마련하여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두루 이어지는 틀을 짜야 합니다. 지식산업과 예체능산업만 키우는 교육 시설과 제도가 아닌, 저마다 착한 마음을 다스리며 아름다운 넋으로 어우러지는 세상을 이루는 튼튼한 한 사람으로 이끄는 한마당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 비좁은 우리에 갇혀 있는 암퇘지들의 사진이 그렇게 예쁘게 나올 것 같진 않네요. 하지만 우리 돼지들도 쥘리앙네 염소들처럼 그렇게 바깥에서 키운다면, 틀림없이 염소들 못지않게 예쁜 모습으로 사진이 찍힐 거예요(21쪽).”라는 대목을 여러 차례 곱씹어 봅니다. 돼지우리에서 냄새가 나서 싫다고 하는 사람이 많으나, 돼지우리에서 냄새가 나도록 하는 이란 바로 우리들입니다. 더 값싸고 더 많은 고기를 바라는 우리들이 돼지들 스스로 싫어하는 냄새 나는 돼지우리를 만들고 맙니다. 더 값싸고 더 많은 고기를 바라는 우리들인 까닭에 스물하루를 거쳐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가 무럭무럭 자라 중병아리가 되었다가 어른 닭이 되도록 하지 못하게 가로막은 다음, 너덧새만에 부화기에서 알을 깨도록 하고 갖은 항생제와 사료를 먹여 고작 한 달이 안 되는 때에 ‘어른 닭으로 만들어’서 닭고기로 팔아치우도록 만듭니다.

 병아리에서 닭이 되는 삶고리가 아닌, 한 달이 안 되는 나날에 고기닭이 되어 버리는 공장입니다. 풀밭을 뒹굴며 땅을 파고 놀면서 통통하고 예쁘장하게 자라는 돼지로 보내는 삶자락이 아닌, 좁은 시멘트바닥에 가두어 하루빨리 살을 디룩디룩 찌워 얼른 팔아치우는 돈셈을 하도록 내모는 공장입니다. 곱고 튼튼하고 착하고 씩씩하게 자랄 수 있는 어린이가 아닌, 어릴 때부터 더 빨리 더 많은 지식을 쌓아 더 애늙은이가 되어 버리게 한 다음, 더 이른 나이에 더 연봉 많은 큰회사에 사무직으로 일해야 하는 성과급 기계가 되도록 내모는 한국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모든 풀과 고기에 우리와 같은 목숨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이웃과 동무가 나와 같이 고운 목숨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살피지 않습니다. 나날이 더 갈라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입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한국 노동자와 이주노동자입니다. 계급이 있는 우리 사회이며, 신분이 뿌리깊은 우리 나라입니다. 너무 바쁘고, 참으로 바쁘며, 더없이 바쁜 우리 겨레입니다. 고요한 아침나라라는 말은 벌써 옛말일 뿐 아니라, 이러한 말을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시끄러이 밤을 새는 나라인 한국이요, 서로서로 더 빨리 많이 크게 누리려고만 하는 한국입니다. 나눔을 잊거나 잃고, 어깨동무를 모르거나 모르쇠이며, 두레를 버리거나 내치는 삶입니다.

 《우리 안에 돼지》라는 작은 책은 우리 안에 갇힌 돼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책을 덮으면서 가만히 헤아려 보면, 정작 우리 안에 갇힌 짐승이란 돼지가 아닌 사람입니다. 스스로 우리에 갇히려 하는 사람이고, 서로서로 우리에 가두려 하는 사람입니다. 나 스스로 갇히고 내 이웃과 동무를 가두고 있습니다. 너른 들판이 아닌 쇠우리에 갇히고 가둡니다. 푸른 하늘이 아닌 시멘트우리에 갇히고 가둡니다. 깊고 맑은 바다가 아닌 돈우리에 갇히고 가둡니다.


 (3) 작은 책 작게 읽기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은 대목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되읽으면서 생각을 가누어 봅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으나 누구도 쉽게 알고자 하지 않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새삼 느낍니다. 누구라도 꼼꼼히 알고 느끼며 우리 삶을 바꿀 수 있으나 누구라도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슬픔이 담겨 있다고 거듭 느낍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책에 갇힌 지식이 아닌 몸에 배는 슬기로 가다듬는 사람이 하루에 한 사람씩 늘어날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이러한 줄거리를 책에 머무는 지식이 아닌 삶에 녹아드는 넋으로 되새기는 사람이 한 해에 한 사람이라도 새로 태어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4343.2.26.쇠.ㅎㄲㅅㄱ)


[14, 15, 30, 55쪽] 축사 안에는 먼지가 많습니다. 구석의 작은 창문으로 햇살이 미끄러져 들어올 때면 날아다니는 먼지가 다 보입니다 … 돼지의 몸은 창살 안에 갇혀 있으며, 십여 개의 칸막이로 줄지어 늘어선 공간에는 암퇘지 십여 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돼지들이 벌을 받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마치 감옥처럼 보였거든요 … 쥘리앙 말이 돼지가 움직이지 못해야 몸집이 빨리 불어나고, 그럴수록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거라고 하더군요 … 사실 돼지 축사 건물 전체가 자연과 차단된 구조랍니다. 마치 이 세상에 자연이 없는 것처럼, 공기도 식물도 해도 없는 상태에서 동물을 사육합니다. 그런 것들이 동물에게 해롭기라도 한 양 말이죠.

[16, 23쪽] 아저씨는 돼지들을 보고 나온 뒤에는 으레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돼지들 때문에 짜증을 내는 것이냐고 물으니 아저씨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어요. “돼지는 그저 돼지일 뿐이야. 네 발 달린 햄이라고 생각하면 돼. 햄 좋아하니? 그럼 멀리 가서 찾을 것 없다.” … 축사 사무실에는 돼지들에 관한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는 컴퓨터가 한 대 있습니다. 컴퓨터에는 암퇘지들이 무엇을 먹는지, 언제 새끼를 가지는지, 어떻게 가지는지 따위의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 그런데 컴퓨터는 암퇘지들을 알지도 못하고, 구별하지도 못합니다. 컴퓨터는 다만 수치만을 알고 있을 뿐이죠.

[17, 33∼34, 36쪽] 돼지의 분만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은 ‘산파’가 아니라 ‘사육자’입니다 … 그날 이 돼지는 새끼를 낳을 때의 고통 때문에 온몸을 묶어 놓은 거였습니다. 아프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자칫 새끼들을 깔아뭉갤 수도 있거든요. 여기에서 중요한 건 암퇘지가 아니라 새끼들입니다. 사실 암퇘지는 죽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 암퇘지를 얼러 주고 다독여 줄 수도 있을 텐데, 그러기는커녕 입을 꽉 다물고는 마치 고장난 기계 다루듯 했습니다 … 두 사람은 어미 돼지의 몸에서 새끼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직접 만든 갈고리 같은 것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게 말을 잘 듣지 않자, 둘은 배를 갈래 새끼들을 빼낸 다음 암쾌지에게 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돼지는 죽었습니다.

[31, 40∼41, 66쪽] 내가 볼 때 어른들은 너무 바쁘기 때문에 ‘깊은 생각’이란 걸 할 겨를이 없어요 … 어른들은 텔레비전 앞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가만히 있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요 … 요즘에는 간호사들도 돼지 축사의 분만용 우리 같은 ‘아기 공장’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을 빨리 처리해야 돈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 끝도 없이 달리기만 하는 건 노동자들이지만, 정작 돈을 많이 버는 건 대규모 축산 공장의 업자들과 상인들이에요.

[59, 61쪽] 칸막이 우리는 썩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여기에 들어오면 돼지를 좋아하게끔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돼지 탓이 아닙니다. 온통 암흑천지에다 먼지투성이고 악취가 풍기는 칸막이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돼지들에게 무얼 바라겠어요 … 비좁은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돼지들은 너무 외로워 보였고 심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듯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돼지들과 잘 지낼 수 없는 걸까요?

[79, 81∼83쪽] 암퇘지들은 움직이고 싶어 하고, 다른 동물들과 함께 있어 싶어 합니다 … 암퇘지들은 미리 수퇘지에게서 채취한 정액으로 수정을 할 뿐, 수퇘지와 직접 교미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훨씬 더 빠르기 때문이죠 … “임신을 못하면 암퇘지로서는 끝인 거야. 실수란 용납이 안 돼. 먹이를 축내면서도 새끼를 못 낳는다면 그건 문제지 … 젊은 암퇘지가 한 번쯤 임신을 못할 수는 있어. 그런 건 괜찮단다. 그런데 늙은 암퇘지가 임신을 못한다면 그건 바로 도살장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손해가 얼마인지 아니? 온통 난리가 나는 거야. 우리에겐 판에 박힌 일이란다. 암퇘지는 새끼를 낳아야 해. 새끼를 낳지 못하는 암퇘지는 정상이 아니야.”

[89쪽] 나는 돼지들이 우리가 변화하기를, 우리가 조금 더 친절해지기를, 우리가 돌덩이같이 딱딱한 사람이 아니라 ‘가소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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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너지 시장 - 새로운 에너지 사회의 모습
이이다 데쓰나리 지음, 푸른아시아 옮김 / 이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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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자원도 ‘돈이 되어야’ 하는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2] 이이다 데쓰나리 엮음, 《자연에너지 시장》


 저한테는 운전면허증이 없습니다. 우리 집에는 자가용이 없기도 하나, 저로서는 자가용을 누가 거저로 준다 하여도 운전면허증이 없기 때문에, 이 자가용을 몰 수 없습니다. 누가 자동차 한 대를 준다 한들 받고픈 마음이 없기도 합니다. 자가용을 몰아야 할 만한 일이 있다고 느끼지 않으며, 아이와 옆지기와 저 셋이 자가용을 타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닌다 해서 더 느긋하거나 즐거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고픈 곳이 있으면 두 다리로 걸어서 가면 됩니다.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를 얻어타고 움직이면 됩니다. 아이가 좀더 자라면 자전거에 태워 함께 달리면 됩니다. 오늘날 이 나라 사람들한테 자가용이란 거의 ‘생활필수품’처럼 여기는 한 가지입니다만, 제 눈길과 삶결로 바라볼 때에는 ‘사치품’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자가용을 꼭 타야 할 만한 사람들이 꼭 장만해서 탄다기보다, 남들이 타고 있으니 따라서 탄다든지, 내 몸을 즐겁게 움직이는 일하고 동떨어지면서 탄다든지, 남 앞에서 자랑하거나 얼굴 세우기로 탄다든지, 이냥저냥 세상물결에 휩쓸리면서 으레 타야 하거니 하고 바라보는구나 싶습니다.

 어릴 적에는 ‘기름을 안 먹는 깨끗한 자동차’가 나온다면, 그때에 가서 운전면허증을 따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 아주 손쉽게 운전면허증을 딸 길이 있었으나 굳이 따지 않았습니다. 동무들은 면허시험 문제집을 사서 달달 외운 다음 필기에 붙고(잘 모르겠으면 3번 찍기를 하면서), 오토바이를 좀 몰아 본 손맛으로 실기에 붙곤 했습니다. 준비 한 번 없이 실기를 보고도 붙은 녀석들이 꽤 많았습니다. 나중에 실기시험이 까다로워진다면서 그무렵에 얼른 따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더더욱 운전면허증을 따는 일이란 부질없다고 느꼈습니다.

 왜 차를 몰아야 하는가를 먼저 깊이 생각할 노릇이요, 차를 몰아야 한다면 어떤 차를 몰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곰곰이 따질 노릇입니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 때에 쓰고자 미리 면허증을 딴다는 일은 달갑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직 제대로 마음닦이가 안 된 사람들한테 차열쇠를 건네는 일은 대단히 근심스럽고 무시무시한 노릇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우리는 자동차 부속과 교통법을 다루는 지식뿐 아니라, 차와 사람이 올바로 어우러지는 흐름을 함께 익히고 읽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버젓이 ‘학교 앞 길’임에도 경적을 울리며 싱싱 달리는 버르장머리없는 운전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걷는 길에 차를 올려놓고는 볼일을 보러 다니는 짓궂은 운전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짐을 실어서 나를 일이 있지도 않은데 골목길까지 자동차 머리를 들이미는 괘씸한 운전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몇 미터쯤 걷기 싫어 다른 자동차와 숱한 사람한테 피해를 끼치는 나쁜 운전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가 누리는 쾌적하고 편리한 생활은 석유 등 화석에너지를 대량 소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78쪽)


 새로운 자동차와 함께 새로운 자전거가 쏟아져나옵니다. 요즈음은 자동차꾼 못지않게 자전거꾼이 제법 늘었습니다. 자전거로 살아간다는 분이 제법 느는 한편, 몸을 생각하고 기름값을 줄이며 ‘자전거 모임’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즐거움을 누리는 분이 퍽 늘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즐기는 자전거꾼 가운데에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전거를 마련하면서 ‘나 혼자한테는 좋을는지 모르나 다른 이웃한테는 좋을 수 없는’ 매무새를 보여주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아무래도 자전거이든 자동차이든, 이와 같은 탈거리를 내 손에 쥐기 앞서 ‘이러한 탈거리를 내가 왜 타야 하고, 탈 때에는 어떻게 타야 하는가’를 곰삭이는 마음그릇을 제대로 닦지 않은 탓입니다.

 깊이 파고들어 보면, 우리네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옳고 바른 길을 가르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니, 우리네 학교는 아이들한테 옳고 바른 길을 가르치려는 마음이 없는지 모릅니다. 누구나 곱고 애틋한 목숨 하나를 선물받아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지 않고, 더 높은 점수를 얻어 더 이름값 있는 대학교로 갈 수 있도록 밀어붙이는 데에만 매달리는 학교 틀거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사람됨을 갈고닦는 학문이 아닌, 시험점수 잘 따는 입시기계로 내모는 교과서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허접한 교과서라 할지라도 교사들이 슬기로우면 되는데, 교사 또한 스스로 쇠밥그릇 월급쟁이에 머물면서 신나게 자가용을 몰기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 현재 대부분의 목질 연료는 임업과 임산업의 부산물로 생산되고 있고, 최대 공급량은 주산물의 생산량에 따라 결정된다. 목질 연료의 공급을 계속적으로 늘리는 유력한 방안은 성장이 빠른 에너지 수목을 인공적으로 재배하는 것이다 … 나무를 모으거나 마름질해 재목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계를 사용하려면 일정 정도의 작업 규모가 확보되어야 한다. 어떻게든 사람의 힘으로 처리했던 시대에는 규모에 따른 생산성의 차이가 적고 소규모 생산으로도 살아남을 여지가 충분했다. 하지만 기계화 시대에는 작업량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소유자가 다른 산림을 몇 개의 지역으로 묶어서 솎아베기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  (56, 73쪽)


 흔히들 자동차를 몰 때에 ‘쾌적하고 편리한 현대 생활’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빨래기계를 쓰고 텔레비전을 보며 큰 냉장고를 갖추는 한편, 갖가지 전기제품을 집안에 가득가득 갖추어야 비로소 ‘문명 혜택을 받고 즐거이 꾸리는 삶’을 펼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참말로 ‘신나고 즐겁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은 자동차를 비롯한 전기제품 들을 장만하는 데에 있을까 궁금합니다. 빨래기계를 안 쓰고 손을 쓰면서 두 손에 온통 물집과 꾸덕살이 잡히던 예전 어르신들한테는 신나거나 즐겁거나 깨끗하거나 아름다울 모습이 하나도 없었을까 궁금합니다. 장바구니를 들고 그날그날 저잣거리로 찾아가 먹을거리를 장만한 다음 손수 손질하여 차리는 밥상에는 즐거움이 없고, 자가용 몰고 ㅇ마트 ㄹ마트로 내달려 짐칸 가득 비닐봉지로 꾸역꾸역 채워서 집으로 돌아온 다음 냉장고를 꽉꽉 채워 아무 때나 꺼내어 차리는 밥상이 훨씬 즐거울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덜 써야 즐거운 삶일까요. 우리는 우리 돈을 더 써야 즐거운 삶인가요. 우리는 우리 마음을 덜 써야 기쁜 삶일까요. 우리는 전기와 물과 자원을 더 써야 기쁜 삶인가요.

 제가 사는 집에서 걸어가 5분 안짝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보리술 한 병을 사면 1700원입니다. 제가 사는 집에서 자가용을 몬다면 5분쯤 달려 ㅇ마트에 닿을 수 있고(저는 자가용이 없으나 차를 타면 이쯤 걸릴 듯합니다), 이곳에서 보리술 한 병에 1530원쯤만 치르고 살 수 있습니다. 구멍가게에서 보리술을 산다면 두어 병만 사는데, ㅇ마트에서는 ‘값이 퍽 싼’데다가 ‘다른 덤을 끼워 주’고 있으니 여러 병을 사고야 맙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가용을 모는 현대물질문명을 누리면서 170원을 아끼는 만큼 나한테 더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할 만한지요. 보리술 열 병을 사면 1700원을 아끼니 한 병을 더 사고도 170원이 남는다고 셈할 만한지요. 그러면, 자가용 한 대 값이며, 자가용을 10분 동안 굴리며 드는 기름값이며, 자가용이 다녀야 하는 길을 닦는 데 들이는 사회간접자본이며, 자가용에서 내뿜는 배기가스가 더럽힌 우리 삶터이며 ……는 어찌하지요.


.. 풍력발전은 특성상 송전선 등을 포함하여 아주 넓은 용지를 필요로 한다. 용지 확보 기간이 사업 기간에 맞는가, 사업 자산으로서 담보 설정이 가능한가, 토지 소유자의 수가 많은 경우에 원만한 합의 형성이 가능한가 등이 요점이다. 중요한 인프라의 하나인 송전선의 거리가 길다는 것은 경제성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 줄어드는 위험이 아니라 사업 성패의 근간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바람직한 조건을 계약에 명기해야 한다 … 소비자에게 전기란 ‘송전선을 통해 일률적으로 공급되는 것으로 그 발전 방식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전력 공급이 오랫동안 지역 독점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전기 사업자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 공급이 첫 번째 사명이 됐다. 이런 이유로 더욱 소비자에게 전력을 차별화하여 제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  (96, 128쪽)


 《자연에너지 시장》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석유도 자연에서 나오고 가스도 자연에서 나온다 하겠으나, 이들은 화석에너지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똑같이 자연에서 얻는다 하지만, 자연에서 태어난 목숨이 수만 수십만 수천만 해에 걸쳐 썩고 삭아서 이루어진 자원이기에 자연에너지 아닌 화석에너지이고, 이러한 화석에너지를 쓸 때에는 아주 마땅하게도 공해 문제가 불거집니다. 자연에너지란 공해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언제까지나 쓸 수 있는 자원을 일컫습니다.

 우리 삶터뿐 아니라 이웃나라 삶터 또한 화석에너지가 거의 모두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나라는 화석에너지를 접어 놓고 자연에너지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화석에너지가 나아가는 길은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는 길임이 뻔히 보이는데, 미련스레 화석에너지만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쓰는 자원도 자연에너지가 되도록 고쳐야 하는 한편, 우리 스스로 ‘얼마나 더 많은 자원을 써야 하느냐’ 하고 생각하면서 내 삶을 바꿀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화석에너지에서 자연에너지로 돌아서는 모습 또한 우리 스스로 삶을 바꾸는 노릇이고, 화석에너지를 쓰는 부피를 고스란히 자연에너지로 돌리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 마음이 한결 아름답도록 가다듬고, 내 삶이 더욱 싱그럽도록 추스르며, 내 목숨이 사랑스레 빛나도록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니 어쩔 수 없이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를 써야 하지 않느냐는 마음과 삶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든 시골에서 지내든, 나와 내 이웃이 다 함께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즐겁게 찾고 스스럼없이 어깨동무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나도 웃고 이웃 또한 웃는 삶을 찾고 싶습니다. 나부터 흐뭇하고 이웃 누구나 흐뭇할 곱고 빛나는 삶터를 일구고 싶습니다.


.. 사회적 관심이 국토 개발에만 쏠려 있던 시기에 자연보호를 외치기는 쉽지 않다 … 하지만 건강한 먹을거리처럼 자연보호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중요한 개념으로, 결코 유행 상품이 아니다 … 전문가라는 일부 사람들의 판단으로 에너지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비민주적인 정책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 원자력발전소의 입지 지역에는 원자력 정책을 정면에서 부정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없다. 입지 시정촌의 다수가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많은 교부금 등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해당 지자체의 주민은 같은 규모의 다른 지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공적인 혜택을 받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원자력 에너지의 유효성에 대한 시비를 과학적ㆍ논리적으로 냉정하게 논의하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 독일은 자연에너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치 역량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앞서 나가는 추진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에도 자연에너지가 단번에 정부 차원의 정책이 된 것은 아니다. 자치의 현장에서 작고 구체적인 방안의 실천이 자연에너지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최종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는 정책으로 성장하고 있다 ..  (263, 265∼266, 268쪽)


 《자연에너지 시장》이라는 책은 세계 자원시장에서 화석에너지 쓰임새를 줄이고 자연에너지 쓰임새를 늘리고자 하는 몸부림이 어떠한 길을 걷고 있는지를 통계와 표와 갖은 자료로 보여줍니다. 세계경제가 앞으로도 오늘과 같은 살림을 잘 지키면서 다 같이 살아남으려면 자연에너지 시장을 어떻게 새로 일구면서 키워야 하는가 하는 대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자연에너지를 넓히는 좋은 이야기와 자연에너지가 널리 뿌리내리지 못하는 아쉬움을 찬찬히 들려주고 있지만, ‘자원을 쓰는 우리 삶’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오늘과 똑같은 매무새로 앞으로도 ‘끝없는 성장’만을 한다는 바탕에서 자연에너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에너지 시장》에서 말하는 자연에너지란,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먹는 삶으로 바뀌었’으니, 더 많은 사료를 더 빨리 먹여 더 크고 먹음직한 고기를 길러내는 공장이 되어 버린 축산업과 매한가지로, 에너지로 돌릴 수 있는 자연을 ‘사람 손을 써서’ 더 빨리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흐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바꾸려는 몸짓이란 하나도 없이, ‘우리 수요’를 넉넉히 채워 줄 수 있는 자연에너지가 더 늘어야 한다는 쪽으로 마무리가 되고야 맙니다.

 올바르게 꾸리는 삶을 헤아리는 마음결을 어떻게 가꾸어야 하느냐는 이야기 하나가 빠진 《자연에너지 시장》입니다. 오늘날 우리 물질문명 터전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괜찮은가를 바라보는 눈썰미 이야기 하나가 담기지 않은 《자연에너지 시장》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어도 자연에너지를 말할 수야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사회는 ‘환경사랑’이라는 옷을 걸치면서 끝없이 쓰고 또 쓰라고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이니까요. 그런데 되살림과 되쓰기가 빠진, 허울좋은 ‘환경사랑’ 제품이 참말 환경사랑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터무니없이 많이 쓰는 화석에너지 높이에 맞추어 자연에너지 시장을 새로 열면 이 지구는 버틸 수 있습니까. 하기는, 자연에너지를 놓고도 ‘시장 개척’을 생각하고 ‘시장 개척 대책’을 생각하는 우리들로서는 자연에너지를 말하는 마당에서도 돈 걱정이 맨 먼저가 될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4343.2.7.해.ㅎㄲㅅㄱ)


 ┌ 《자연에너지 시장》(이후,2010)
 ├ 엮은이 : 이이다 데쓰나리
 ├ 옮긴이 : 푸른아시아
 └ 책값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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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 개념어 사전
어니스트 칼렌바흐 지음, 노태복 옮김, 박병상 감수 / 에코리브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사람으로 곱고 맑게 살아가는 길이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8] 어니스트 칼렌바크, 《생태학 개념어 사전》



 인천과 서울을 오가면서 해야 하던 일을 그친 지 스무 날이 넘었습니다. 스무 날이 넘는 동안 새 살림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싶었으나, 그동안 몸이 더 나빠진 옆지기를 돌보고 아이를 함께 보살피느라 어디로도 다니지 못한 채 거의 집에서만 붙어 지냈습니다. 이러느라 서울마실은 한 주에 한 번 살짝 할 뿐이었는데, 모처럼(?)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을 안 타다가 지옥철을 다시 한 번 타 보니 더없이 끔찍합니다. 날은 겨울이라 사람들 옷은 두툼해지니 자리에 앉아도 훨씬 비좁을 뿐더러, 다리를 벌리거나 신문을 쫙 펼치는 남자들 매무새가 짜증스럽습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찡기며 책장을 펼칠 때에도 밀치고 밟는 몸가짐은 매한가지라서 고단합니다. 집에서 식구들을 돌보고 쉬는(?) 동안에는 이맛살을 찌푸릴 일이 드물었는데, 고작 하루 지옥철을 다시 타면서 자꾸자꾸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책을 읽다가 덮습니다. 책읽기로 마음닦기를 하기보다 한손으로 이마를 지긋이 누르고 비비면서 마음을 다스려야겠다고 느낍니다. 이 지옥철에서는 나 홀로 고달프지 않을 테니까요. 이 지옥철에서는 나 혼자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타고내릴 때에 새치기를 하거나 불쑥 끼어들며 밀쳐대는 숱한 사람들을 부대끼면서 마음이 바뀝니다. 이 지옥철을 타는 사람들은 으레 ‘고단하다고는 안 느끼지’ 모른다고. 아주 자연스러운 당신들 삶으로 여기면서 ‘혼자 빨리빨리’ 갈 길을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남이야 어찌 되든 제 몸만 느긋하면 괜찮은 몸가짐으로 살아가고 있겠다고.


.. 환경운동은 근본적으로 경제적이거나 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엇이 옳고 적합하며 아름답고 만족스러운가에 관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삼는다 … 집에서 가까운 곳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휴가 기간에 당신이 자연을 가장 적게 훼손하는 방법이다 … 장거리 여행은 당신의 ‘생태적 발자취’를 크게 남긴다. 음식 공급 체계를 비롯한 여러 사안과 마찬가지로, 관광에도 ‘지역으로 돌아가기’가 필요하다 ’ 우리의 주요 책무는 우리가 고향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 자동차가 차지하던 땅을 되찾음으로써 우리는 도시를 더욱 푸르게 만들 수 있다 … 보존 운동이 우리 자연 유산이 파괴되는 속도를 늦추긴 했지만, 교육ㆍ정치ㆍ법률적 노력을 더 많이 기울여야 도로 포장과 오염과 벌목이 초래한 결과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몇몇 주요한 동물 종만 구제할 것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와 그 안에 서식하는 모든 동물을 보존하는 쪽으로 범위를 넓혀야 한다 ..  (17, 39, 58, 90쪽)


 ‘일상(日常)’이라는 한자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한자말을 쓸 일이 없으나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이란 바로 ‘일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욱이 서울 둘레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 또한 ‘일상’이로구나 싶습니다.

 한자말 ‘일상’이란 “날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말로 하자면 “늘 같은 삶”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과 글피가 같으며, 글피와 모레가 같은 삶입니다. 지난날과 오늘날이 같으며, 오늘날과 앞날이 같은 삶입니다. 어버이 삶이 아이 삶하고 같고, 이 아이 삶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낳아 기를 아이 삶하고 같습니다.

 이러한 삶이란, 경쟁과 학벌과 이름과 돈과 아파트와 자가용과 여행이라는 똑같은 틀거리에 맞춘 한결같은 삶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을 찾거나 누리지 않으면서 아이한테도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을 찾거나 누리도록 돕거나 이끌지 않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과 더 큰 힘을 바라면서 아이한테도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과 더 큰 힘을 바라도록 내몹니다.

 제아무리 헌법에 ‘인권과 기본권과 시민권’이 적혀 있다고 하여도 이 나라 푸름이한테는 어떠한 인권도 기본권도 시민권도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머리길이를 ‘교칙에 따라’ 짧게 맞추어야 하고, 치마길이와 치마통을, 옷차림과 신발을, 가방에 넣고 다닐 책을, 머리속에 집어넣는 지식을, 그 어느 한 가지 자유와 민주와 창조와 평등에 걸맞게 가다듬을 수 없습니다. 교육감이 무슨무슨 틀거리를 새로 짜야 하는 ‘청소년 머리길이’가 아닙니다. 법에 따라 어찌어찌 적어 놓어야 할 ‘체벌 규칙과 높낮이’가 아닙니다. 헌법에 따라 마땅히 지켜 주고 돌봐 주고 아껴 주는 인권이요 기본권이요 시민권이어야 합니다.


.. 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공기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 자동차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단순한 운전자로만 만들 뿐 관심을 가져야 할 시민으로 대하지 않게 한다 … 세상에 펼쳐진 아름다운은 상당 부분, 생명이 다채롭고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양식 물고기나 유전자 조작 식물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먹여살릴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음식을 생산하려면 인공적인 먹이와 화학비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다 ..  (30, 57, 112, 143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낳아 키우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참다운 권리를 베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부터 참다운 권리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맑은 물을 마시고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깨끗한 터전에서 오순도순 어울리며 즐겁게 두레와 품앗이를 펼치는 삶을 꾸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른들 누구나 제 은행계좌 숫자가 높아지고 제 아파트 평수가 넓어지며 제 자가용 크기가 커지기만을 꿈꿉니다. 내 은행계좌에 높아지는 숫자를 가난하거나 어려운 이웃한테 기꺼이 베푸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요? 구세군 냄비에 넣는 돈을 떠나, 소리와 소문이 없이 늘 기꺼이 나누며 삶을 꾸리는 어른은 얼마나 있는가요?

 지옥철을 타면서 ‘마음이 무너지는 끔찍함’에 몸서리치는 까닭은 오늘 하루 몸이 몹시 고달파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옥철이 되도록 서로서로 깎아내리는 이 터전을 비롯하여 우리 삶터 구석구석에서 내 밥그릇만 단단하게 붙잡는 모습이 훤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1초를 안 기다리고 새치기를 하는 이 사람들이 자가용을 몰 때에는 새치기를 안 할까요? 밀고 밟으며 새치기를 하는 이 사람들이 자가용을 몰며 골목을 달릴 때에 마구마구 빵빵거리며 아슬아슬하게 내달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무 데에나 침을 뱉는 일은, 옳지 않은 법이 자꾸 생겨나도 나 몰라라 하는 일하고 같습니다. 한 번 쓰고 나서 쓰레기로 버리는 물건을 끝없이 쓰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거나 보수를 외치는 사람은 모두 한통속입니다. 참다운 진보라면 마땅히 이 땅 터전을 옳고 바르고 깨끗하고 곱게 지키는 일에 온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참된 보수라면 누구나 이 나라 삶터를 알차고 슬기롭고 맑고 어여쁘게 가꾸는 일에 온몸을 바쳐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땅 이 나라에서 진보요 하고 외는 사람과 보수요 하고 나서는 사람치고 ‘참 자연사랑’으로 삶자락을 추스르는 분은 몇이나 됩니까.


.. 미국에서 처음에 야생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이 대부분 ‘바위와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산업 시설이나 교외 주택단지를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 우리는 쓰레기와 찌꺼기를 ‘버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계속 돌고 돈다. 우리가 환경이며 환경이 우리인 셈이다 ..  (150, 210쪽)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라는 책은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밑앎’을 차분하게 들려줍니다. 마르크스를 알든 공병호를 읽든, 대학 졸업장이 있든 대학원 학위가 있든,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밑슬기’를 먼저 닦아 놓고 있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내 몸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내 집이 어떻게 마련되었으며, 내 밥이 어떻게 밥상에 놓이는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머리통에 지식을 가득 채운다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며, 지식인이라는 이름은 가방끈으로 붙일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 책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몹시 슬픕니다. 이 책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굳이 읽어야 할 까닭이 없어 더없이 슬픕니다. 이 책은 ‘생태환경 갈래를 모르는 새내기’한테 길잡이 노릇을 하는 책인데, 생태환경 갈래 이야기를 이 나라 웬만한 지식인들은 한줌 지식으로조차 머리속에 넣어 놓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으로 읽어 머리속에 넣어 놓을 지식을 담은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이 땅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고 있으면 누구나 마땅히 시나브로 깨우치면서 몸뚱이로 익히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 소비 자본주의가 부흥하는 내내 서구인들은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종교와 문화는 부차적이라는 믿음을 고수했다 … 성숙한 도시일수록 유지 보수에 쓰는 에너지가 더 많으며, 도시 자체의 성장에는 에너지를 덜 쓰게 된다 … 우리 인간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로 땅을 점령해 버림으로써 생태계를 어지럽힌다 ..  (18, 56, 113쪽)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길잡이책입니다. 아니 ‘길잡이책을 알아보는 길에 한 번 들추어 보는 읽을거리’입니다. 이 땅과 사람과 목숨붙이 이음고리를 헤아리는 길잡이책이라 한다면 《수달 타카의 일생》(헨리 윌리엄슨)이나 《모래 군의 열두 달》(알도 레오폴드)이나 《슬픈 미나마타》(이시무레 미치코)나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이나 《체르노빌의 아이들》(히로세 다카시)이나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쿠루사)나 《나무처럼 산처럼》(이오덕)이나 《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이나 《너를 부른다》(이원수) 같은 책들입니다. 이러한 책을 먼저 차근차근 곱새겨 읽고 내 온몸으로 바르고 곱고 따뜻하고 즐거운 삶을 꾸려 낸 다음에 비로소 집어들면서 ‘이론을 갈무리해’ 보도록 거드는 《생태학 개념어 사전》입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우리 스스로 옳고 바른 삶을 꾸리고 있을 때에 앞으로 더욱 즐겁고 힘차게 이 길을 씩씩하고 튼튼히 걸어가도록 돕는 길잡이책입니다. 길잡이책이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맨 처음 읽는 책’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처음으로 쥐어들며 읽는 책은 ‘배움책’입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을 배움책으로 삼는다면 생태와 환경을 놓고 ‘지식 쌓기’는 할 수 있으나, ‘삶 다스리기’는 할 수 없습니다. 생태와 환경 이야기란 지식을 쌓으려고 알아보는 갈래가 아닌 만큼, 지식을 쌓으려는 배움책으로 《생태학 개념어 사전》을 만나려 한다면, 차라리 이 책을 안 읽느니만 못합니다.


.. 우선순위의 방향을 경제에서 생태로 전환해야 한다 … 땅 일부를 야생 지역으로 남겨 두면, 인간이 간섭하지 않은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지 언제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  (190, 206쪽)


 그런데, 책을 덮으며 여러모로 아쉽다고 느낍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 모자라거나 어리숙한 책이라서 아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번역이 그리 깔끔하지 못하며, 우리 말법과 말투에 알맞지 못한 대목이 많습니다. ‘쉽고 바르게’라는 잣대가 아니라, 우리 삶터에 발맞추는 말과 글이 못 되었으며, 우리 겨레 문화와 발자취를 곰곰이 되돌아보도록 돕는 말과 글이 아니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책 하나만 번역이 아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번역책들은 우리 말과 글을 옳게 살피지 않고 쏟아집니다. 외국말은 훌륭히 잘할는지 모르나 우리 말은 너무도 형편없이 못하는 분들이 번역일을 하고 있느라, ‘참 좋은 책’이 우리 말로 옮겨지기는 하지만, ‘참 좋은 모양새’로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좋은 책에 담긴 좋은 이야기를 좋은 넋을 살리는 좋은 말로 풀어내기란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서 대단히 힘든 노릇일까요. 좋은 책을 좋은 말로 엮어내며 좋은 삶을 보여주고 좋은 생각을 어깨동무하기란 우리 터전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노릇일까요. 아무쪼록, 앞으로는 우리네 지식인들이 우리 땅과 삶과 사람과 목숨에 걸맞는 ‘생태환경 이야기책’을 즐겁고 알차게 묶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4342.12.24.나무.ㅎㄲㅅㄱ)


 ┌ 《생태학 개념어 사전》(에코리브르,2009)
 ├ 글 : 어니스트 칼렌바크 / 옮긴이 : 노태복
 └ 책값 :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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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고 소박한 삶 - 아미쉬로부터 배운다 타산지석 12
임세근 지음 / 리수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29 ― 아름다운 삶을 찾아 ‘돈ㆍ이름ㆍ힘’ 버리기
 : 임세근, 《단순하고 소박한 삶》



- 책이름 : 단순하고 소박한 삶
- 글 : 임세근
- 펴낸곳 : 리수 (2009.9.28.)
- 책값 : 15900원



 (1) 내가 선 삶자리를 돌아보며


 날마다 되풀이하는 ‘아기 옷가지 빨래’는 더미더미입니다. 갓난아기일 때에는 날마다 서른 장이 넘는 기저귀를 빨아야 했고, 이제는 기저귀 빨래가 반이 못 되게 줄었으나 다른 옷가지 빨래가 넘칩니다. 오줌가리기를 할 무렵인 터라 아침부터 밤까지는 기저귀를 풀며 지내다 보니, 바지에 오줌을 싸든 마루나 방에 오줌을 지르든 하면서 옷가지 빨래와 걸레 빨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아기한테 젖떼기밥을 먹일 무렵이니 아이 키우기에 가는 손은 더없이 바쁩니다. 지난날 어머니들이 아이 키우고 집살림 도맡고 논일이며 밭일까지 함께 해낸 삶자락을 돌아본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식구가 맡은 몫은 우습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어머니들한테는 당신 다른 삶이 아무것 없었습니다. 온통 일에 일뿐이었고 다른 자리에 눈둘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남자 어른만 세상일을 돌보도록 하려고 여자 어른한테는 끊임없고 끝없는 일을 지나치게 무겁도록 얹어 놓지 않았나 싶습니다. 밥하기 옷짓기 빨래하기 집치우기 살림하기 아이보기 농사일 …… 이러한 일을 남자 어른이 하도록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자 어른 가운데 이 모든 집일을 스스럼없이 떠맡거나 어려움없이 잘 해낼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집일은 우습게 여기고 바깥일은 높이 섬기는 오늘 우리 삶터입니다. 어려운 말로 ‘가사노동 인정’을 안 합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버는 일’만 받아들입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버는 일이라고 수월하기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을 얼마나 집일에 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집살림 가운데 다문 한 가지라도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실을 잣고 물레를 돌려 천을 낸 다음 바느질을 하여 옷을 짓는 일을 오늘날 어느 누가 치를 수 있겠습니까. 솜을 틀고 이불을 누비며 빨고 다리고 하는 일을 요즈음 어느 누가 치를 수 있겠습니까. 끼니때마다 절구를 빻고 키질을 한 다음 쌀을 일어 안치고 찬거리를 마련하는 일을 요사이 어느 누가 옳게 치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수많은 기계가 나와 집일 짐을 많이 줄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빨래기계 밥기계 청소기계가 나온 뒤로 집일 부피는 조금도 줄지 않습니다. 그만큼 더 자주 빨래를 하고 더 자주 온갖 밥을 차리며 더 자주 집 안팎을 치워야 합니다. 지난날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수한 밥차림이었습니다. 김치 한 조각만 있든 나물 한두 가지만 있든, 콩밥에 국 한 가지만 마련하든 더없이 수수한 밥차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밥차림은 요리책을 보며 궁중음식을 배우느니 서양음식을 배우느니 하며 수없이 많은 반찬을 올리도록 합니다. 이에 따라 접시며 밥그릇이 수북하고, 네 식구 살림만 하여도 설거지감이 가득합니다. 집 치우기란 날마다 해야 하는 노릇이라지만, 서로서로 더 넓은 평수 더 큰 집에서 살면서 청소 시간으로 퍽 오래 잡아먹습니다. 아이한테 옳은 삶 착한 마음 바른 몸가짐을 가르치는 어버이는 자취를 감추고, 학원에 보내는 어버이만 늘어납니다. 아이들한테 ‘좋다는 책’을 읽히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아이들한테 ‘어버이로서 좋은 삶을 보여주는’ 일은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아빠나 엄마 되는 분들 모두 집밖에서 돈을 벌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쁩니다.

 수수함을 잃으며 누리는 물질문명입니다. 수수함을 버리며 즐기는 기계문명입니다. 수수함을 팽개치며 받아들이는 소비문명입니다. 수수함을 등돌리며 껴안는 자본주의 문명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지난 밤 사이 쌓인 기저귀와 아기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미지근한 물을 받으며 빨래를 하는 동안 ‘예전에 혼자 살 때에는 찬물로 빨래를 했잖아? 이제는 미지근한 물로 빨래를 하니 얼마나 나아진 삶이냐?’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나는 나대로 이렇게 사는 데에 바쁘고 힘들어 잘 먹고 돈 많다는 사람들 삶을 생각할 수 없구나?’ 하고 느낍니다. 거꾸로 잘 먹고 돈 많다는 사람들은 당신들 나름대로 돈굴리기와 집키우기나 다른 여러 가지로 바쁘고 힘들어 낮은자리에서 가난하고 고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할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꼭 돈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갈리리라 봅니다. 가난한 사람이면서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삶이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지만, 돈 많은 이웃이 아닌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는 삶이 있습니다. 스스로 수수하고 낮게 고개숙이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수수하고 가난하면서 사랑스러운 이웃을 생각합니다. 스스로 거들먹거리며 이름값과 돈힘을 키우는 사람은 언제나 이름값과 돈힘이 대단한 사람을 이웃으로 삼으려 하겠지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좋아하는 벗을 사귀고,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은 자전거를 즐기는 동무를 사귑니다. 땅장사 좋아하는 사람은 땅장사 좋아하는 이웃을 둘 테고,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하고 가까이 지내겠지요.
 





 (2) 아미쉬 사람들 삶자리를 헤아리며


 《단순하고 소박한 삶》(리수,2009)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을 읽기 앞서 《Amish Country》(1988)라는 사진책을 읽으며 아미쉬 사람들 삶을 돌아보았고, 《Nicole visits an Amish farm》(1985)이라는 어린이책을 만나며 아미쉬 사람들 삶자락을 좀더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번역일 하는 선배가 알려주어 《Amish Country》를 일찍부터 읽을 수 있었는데, 선배는 제 짧은 영어라 할지라도 찬찬히 읽어 보라며 이 책을 건네주었고, 이 책을 살피면서 ‘다른 삶’이 아닌 ‘좋은 삶’을 생각하면서 당신(어른)들 스스로 좋은 삶을 꾸리려 하고 당신 아이들한테 좋은 삶을 물려주려고 하는 아미쉬 삶자락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몇 해 뒤 헌책방에서 《Nicole visits an Amish farm》을 읽으며 아미쉬 마을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저처럼 돈없는 사람한테는 헌책방마실을 하며 나라밖 책을 만나는 일이 ‘비행기 타고 나라밖 나들이 떠나는 일’과 같습니다. 몸소 아미쉬 마을을 찾아가 보지 못하지만, ‘니콜’이라는 흑인 여자아이가 아미쉬 마을에 사는 동무를 찾아가 어떻게 지내는가를 겪는 모습을 슬쩍 엿보면서 ‘이렇구나’ 하고 살짝이나마 깨닫습니다. 아무래도 어린이 눈높이에서 다가서려는 이야기책이 좀더 또렷하면서 손쉽게 ‘아미쉬 사람 삶’을 한눈에 보여줄 테니까요.

 그러나, 나라안에서는 이처럼 나라밖 영어로 된 책 아니면 아미쉬 삶을 읽을 길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저야 헌책방마실을 하며 한두 가지 책을 만나서 읽는다지만, 아미쉬 삶을 좀더 많은 우리 이웃들이 읽고 생각하면서 우리 삶을 돌아본다면 우리 터전을 차근차근 가다듬으면서 새롭게 갈고닦을 수 있으리라 보았거든요.

 그나마 아미쉬 삶을 겉훑기로 아는 사람들은 “아미쉬 사람들은 일반인들과 이웃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187쪽)”는 줄 제대로 모르는 일쑤입니다. 아주 외따로 떨어진 채 살아가는 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기와 전화와 셈틀을 쓰지 않는 이들이 “‘과학의 발전’이 곧 ‘보다 좋은 삶의 질’을 의미하지 않는(208쪽)”고 여기기 때문임을 헤아리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아미쉬 마을을 제대로 모르는 품새는 이 땅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제대로 모르는 품새와 매한가지입니다.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품새가 아닌 슬기롭고 아름다우면서 낮고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보’나 ‘미친사람’쯤으로 하찮게 여기는 품새하고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있어 땅 사고 집 사서 시골로 가는 삶이 아닌 마음과 땀방울과 삶으로 시골살이를 하려는 사람들 넋을 읽지 않는 품새하고 똑같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며 더 많이 나누고 살겠다는 품새가 아닌, 조금밖에 못 버는 살림이더라도 늘 푼푼이 나누고 스스로 아끼면서 살겠다는 품새를 읽지 못하는 흐름하고 닮았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오늘날 물질문명하고는 거의 담을 쌓은 채 지내지만 ‘문명과 아예 담을 쌓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좋은 삶을 꾸릴 수 있을 만하면서 당신 아이들한테 좋은 삶을 물려줄 수 있는 테두리를 지킵니다. 당신들이 아름답게 삶을 일굴 수 있는 자리에서 당신 아이들한테도 아름답게 새 삶터를 일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도록 어우러집니다. 좋으며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기쁜 삶을 찾자고 하는 ‘믿음두레’가 아미쉬 사람들이 예부터 이어받고 물려주면서 가꾸는 마을입니다.
 





 (3) 거듭 읽는 마디마디


 반갑게 읽은 책을 덮고 옆지기한테 건네주었습니다. 끝까지 다 읽은 옆지기는 책 뒤쪽(4부)에 실린 ‘아마쉬 여러 계파 역사와 문화’가 지루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단순하고 소박한 삶》 뒤쪽에 실린 지식조각은 그리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나라에는 낯선 아마쉬 마을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같은 지식조각을 실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좀더 단출하게 줄이거나 아예 ‘부록’으로 밀어넣었다면 더 좋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보다는 아미쉬 사람들 여느 삶을 다루는 데에 자리를 더 내주었으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온몸을 사랑과 믿음에 바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요. 잘난 척하지 않고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면서, 책과 학교와 겉멋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를 더 낮추려고 하는 사람이니까요.

 저와 옆지기가 함께 읽으면서 좋았다고 느낀 대목을 밑줄을 긋고 거듭 다시 읽어 봅니다. (4342.12.13.해.ㅎㄲㅅㄱ)
 







[26, 54쪽] 아마쉬 사람들은 거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용모를 가꾸고 치장을 하는 일을 금하고 있기에 외모를 뽐내기 위한 목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만의 거울이 있다. 그게 바로 조상들이 흘린 피로 얼룩진 ‘순교자의 거울’이요, 일상을 통하여 마음과 정신을 비추고 가다듬는 일깨움의 거울이다 … 그때 나는 아미쉬 공동체에는 교회가 없고 돌아가며 교인들 집에서 예배를 보며, 예배당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들은 아미쉬 공동체의 학교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교회가 없으니 십자가를 높이 올린 뾰족한 종탑이 있을 리 없고, 벽이나 천장, 창문 곳곳을 장식한 성화가 있을 리 없다. 은은히 들려오는 예배당의 종소리마저도 아미쉬 마을에서는 들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신학교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성직자가 없고, 위엄을 갖춘 설교연단도 볼 수 없다. 오르간과 성가대도 없고, 화음에 맞추어 부르는 찬송가도 들리지 않는다. 헌금을 하지 않고 성경 공부를 위한 별도의 모임도 없다. 전도를 하지 않고 선교 활동도 지원하지 않기에 그들의 공동체에는 전도사도 없고 선교사도 없다.

[28, 56, 86쪽]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 살인과 폭력 그리고 마약, 가정 파괴, 낙태와 동성애, 퇴폐 행락 등의 비도덕적 행각이 범람하는 바깥세상은 여전히 그들의 종교적 순수함을 해치는 사악한 사람들의 세상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공동체 밖 이교도들을 경계하며 바깥세상을 향해 둘러친 울타리를 더욱 높이고 튼튼히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그들은 그 어떠한 공격을 받더라도 폭력을 휘두르거나 무력에 의존하지 않으며 보복도 하지 않는다. 군 징집에 응하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법적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로 ‘용서’를 일깨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 … 나는 지금까지 아미쉬 사람들을 접하면서 그들로부터 ‘내 종교가 무엇인지? 교회에 나가는지?’ 등의 질문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교회에 나가 구원을 받으라는 권유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메리 아줌마와 다니엘을 비롯한 아미쉬 사람들로부터 감응을 받고 있다.

[35, 76, 106∼108쪽] 그들은 온당한 주의 주장을 믿고 따를 뿐, 그 어떤 사람의 명예를 드높여 영웅으로 만들거나 신격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비쳤다 …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자녀들에게 아미쉬 교도로서의 삶의 가치와 율법을 보여주고 일깨울 뿐, 이를 평생의 삶의 길로 택하여 교회의 일원이 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본인(아이)들의 의사에 맡긴다 …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은 교회의 리더와 연장자를 존경하고 예우를 해 주고, 또한 교회 리더와 연장자는 평신도와 젊은이들을 존중하고 배려한다. 이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기구나 전문성을 가진 전담 조직 없이도 아미쉬 공동체가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는 결정적 이유임이 분명하다 … 통일된 복장의 엄격한 규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에 관해 명문화된 규정집이 없고, 옷을 짓는 요령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한 지침서 하나가 없었다. 그들은 옷을 지으면서 어린 딸아이들이 옆에 앉아 지켜보게 하고 말로 일러 주면서 격식에 맞추어 옷을 만드는 방법을 하나하나 터득게 하는 방식으로 전수해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43∼45쪽] 그런 데다 인디언과의 전쟁,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 신대륙에서도 전쟁은 어김없이 이어져서 무저항 평화주의를 고집하며 참전을 거부하던 아미쉬 사람들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 … 1930년대 시행된 고등학교 과정의 의무교육에 아미쉬 사람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공동체 삶을 영위하는 데 중학교 과정을 넘어선 고등교육은 해가 된다고 판단한 아미쉬 사람들은 자체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학교 운영을 주장했다. 그들은 1971년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법적 권리를 얻어내기까지 주 정부로부터 피소를 당하고 벌금, 징역 등의 처벌을 감수했다 … 그들은 정부로부터 사회보장 혜택을 받지 않을 것임을 밝히며 세금 납부를 거부했고, 이로써 연방정부로부터 농지와 주택을 가압류당하고 밭을 갈고 있던 말과 농기구를 강제 경매 처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23, 154∼156, 164∼165, 166쪽] 아미쉬 사람들은 부부 간에, 또는 부모와 자녀가 긴 시간 떨어져 있는 것은 아미쉬의 전통적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아미쉬 학교는 ‘지적인 삶보다는 미덕의 삶’, ‘전문적 지식보다는 필수적인 기본 지식’, ‘개별적 경쟁보다는 공동체의 번영’, ‘외부 속세와의 융합보다는 분리’를 추구하는 공동체 삶에 필요한 교육을 구현하는 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 전날보다 향상하는 것을 학습의 목표로 하되 학생들 간에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우열을 가리는 방법으로 학습 효과를 꾀하지 않는다 … 아미쉬 학교의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숙제를 많이 내주지 않는다. 이는 방과 후에 집에 돌아가 갖가지 집안일을 해야 하는 학생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 관계 당국이나 외부에서 교사로서의 능력을 겸비할 수 있게 대학교 과정을 이수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하지만, 그들은 아미쉬 학교에서 8학년까지 마치고 올바른 삶을 살며 바르게 전수할 수 있으면 족하다고 판단하여 외부의 교사 양성 과정 이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148쪽] 검소하게 사는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의 농가나 달리는 마차에 강탈할 만한 값진 물건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좀도둑의 목표가 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의 집에는 담이나 울타리가 없고 대문도 없다. 문을 걸어 잠그지도 않는다. 나아가 감시카메라나 경보 장치는 생각할 수도 없다.

[216쪽] 자동차는 개인주의, 자율, 속도, 자유, 이동성을 불러왔으며, 이에 더하여 사회적 신분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전통적 삶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위해 요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자동차를 허용할 경우 손쉽게 공동체를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고, 빨리 움직이는 기동성의 매력에 빠져 생활의 속도가 빨라지고, 개인주의와 자기 과시욕에 들뜨는 등 교도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나아가 분명 공동체의 겸손, 평등, 결속의 전통적 가치가 훼손될 것이었다.

[257쪽] 가족이 모두 모여 세 끼 식사를 함께하는 것을 가정생활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아미쉬 가정에서 가장이 도시락을 들고 나가 하루 종일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농사일을 하면서 어린 자녀를 데리고 다니고, 텃밭을 일구는 어린 딸아이에게 호미를 쥐어 주어야 할 아빠와 엄마를 아미쉬 가정의 어린 자녀들로부터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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