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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 자연과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윤구병의 생태 에세이
윤구병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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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을 닮고 자연스럽게 꾸리는 삶이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0] 윤구병,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자연을 버린 도시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간다고 하면 거짓말이 아니랴 싶습니다. 자연을 닮거나 자연과 가깝게 나아간다고는 하지만 자연이 있다거나 자연스럽다고는 할 수 없는 도시 터전이라고 느낍니다.

 요즈ㅊㅍ음은 아파트를 짓는 사람들마저 ‘푸른 아파트’임을 내세웁니다. 아파트라고 하는 공동주택은 산을 깎거나 갯벌을 메우거나 논밭을 뒤집어서 세우고 있는 데에도 ‘푸른’ 아파트라고 스스로 밝힙니다. 자연을 닮은 집이라 할 때에는 자연을 더럽히지 않고 지어야 하며, 나중에 낡아서 허물어야 할 때에 자연에 피해를 입히지 않아야 하는데, 아파트라고 하는 공동주택 가운데 처음 지을 때에나 나중에 허물 때에나 자연을 걱정하는 집짓기란 없다고 느낍니다. 더구나 아파트에서는 물과 전기와 가스와 기름을 ‘고지서’로 헤아릴 뿐, 우리 삶터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돌아보기 어렵습니다.

 요사이 널리 퍼지는 말마디로 ‘환경친화’와 ‘생태’와 ‘웰빙’이 있습니다. 이 말마디는 우리들이 누리는 물질문명이나 자본주의 사회로는 앞날이 시커멓다고 깨달으면서 하나둘 불거집니다. 그런데 ‘환경을 생각한다’거나 ‘환경과 사람이 하나로 된다’는 테두리까지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환경을 생각한다는 공산품이란 얼마나 환경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환경을 생각한다는 공산품이란 목숨이 얼마나 되며, 나중에 이 공산품이 쓸모를 다해 쓰레기로 버려야 할 때에 어느 만큼 자연으로 조용히 녹아들 수 있을까요. 자동차가, 자동차 바퀴가, 자동차 오가는 아스팔트길이란 ‘환경친화’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물질문명이 될 수 있을까요. 거름으로 써야 마땅한 똥오줌이지만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똥오줌을 거름으로 쓰기 힘들어진 터전에서, 우리들은 어떤 길을 걸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일을 하면서 무슨 돈을 벌고 내 삶을 어느 쪽으로 나아가도록 이끌고 있을는지요.

 나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꾸리는 하루하루일는지 궁금합니다. 나와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들 누구나 아름다운 삶을 사랑하고 즐기도록 가꾸는 하루하루일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들이 먹는 밥이란 모두 자연에서 얻는데, 밥이 되는 푸성귀이든 고기이든 어떻게 얻는지를 도시사람으로서 어느 만큼 깊고 넓게 살피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날푸성귀를 먹는달지라도 손수 길러서 먹는지, 사다가 먹는지, 또 이 날푸성귀를 제대로 가리고 골라서 먹더라도 우리 스스로 하는 일과 품는 넋과 주고받는 말이란 얼마나 ‘환경과 자연과 생태를 사랑하거나 생각하거나 걱정하거나 마음을 쓰면서’ 하는 일이요 품는 넋이요 주고받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 어느 날 새 기술이 개발되면 이제까지 유용하던 기술이 그 기술을 지닌 전문가까지도 포함해서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까? … 입으로 ‘반미’ 외치면 무얼 하나. 쌀만 겨우 90퍼센트쯤 자급이 되고 밀과 보리, 콩 같은 그밖의 주곡 자급률은 5퍼센트 남짓밖에 안 되는걸 … 근대화도 경제개발도 살자고 하는 짓이다. 그러나 그 동기가 이윤에 있으면 이윤을 얻는 한 사람이 잘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못살게 된다 ..  (26, 33, 69쪽)


 전라도 변산에서 농사짓는 두레마을을 이루고 있는 윤구병 님이 쓴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을 올바르게 적는다면 “자연이라는 밥상에 둘러앉다”이거나 “자연스러운 밥상에 둘러앉다”이거나 “자연을 사랑하는 밥상에 둘러앉다”가 아니랴 생각합니다. 아무튼, 자연을 내버리는 이 나라에서 자연을 보듬고자 하는 마음을 품으려는 농사짓는 두레마을이요, 자연하고 등돌리는 이 겨레 사람들한테 자연을 얼싸안는 넋을 나누며 농사짓는 두레마을이고, 자연을 짓밟는 이 누리에서 자연을 쓰다듬는 매무새를 기르며 농사짓는 두레마을에서 보내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책입니다.


.. 비가 내리고 난 뒤 쌀쌀한 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물에 불은 콩을 주웠다. 떨면서 한나절 동안 허리 한 번 제대로 펴 보지 못하면서 주운 콩이 한 됫박이나 될까. 돈으로 바꾸자면 누가 2000원도 주지 않으리라. 그 시간에 대기업 사보 같은 데에서 온 청탁을 거절하지 않고 원고를 썼으면 100배쯤 높은 고료를 받아 챙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실없는 생각도 뒤늦게 떠올랐지만 콩을 줍는 순간에는 밭에 널린 흰콩밖에 보이지 않았다 … 모든 살아 있는 것은 흙을 딛고 서 있다 … 자연이란 그저 아름다운 경치가 아니라 생명체들이 자라고 열매 맺고 뛰노는 커다란 삶터이고, 사람도 생명계의 한 구성원인 만큼 이 커다란 생명 공동체에서 그야말로 ‘한살림’을 하지 못하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31, 83, 134쪽)


 머리를 굴려 적바림한 글이 아니라, 스스로 농사짓는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적바림한 글이 깃든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입니다. 그러나 농사짓기 열 몇 해라 하더라도 옹근 농사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책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또한 옹근 책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는 글쓴이 윤구병 님이 스스로 밝힙니다. 당신이 제아무리 시골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또한 농사짓는 두레마을을 이루어 농사짓기 열 몇 해를 보냈다고 하더라도 아직 모르는 풀이름 꽃이름 나무이름이 수두룩합니다. 아직 들나물 멧나물을 손질해서 나물하기를 다 모르며, 책 곳곳에 나오듯 윤구병 님 당신이나 농사짓는 두레마을 일꾼들이나 ‘불량식품 몰래 맛나게 먹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책을 덮으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농사짓는 삶으로 거듭난 지 열 해가 되었어도 이렇게 ‘도시에서 살던 버릇’을 떨치기 힘들다면 농사짓는 삶으로 거듭난 스무 해가 되어도 힘들지 않으랴 하고. 서른 해가 된다 한들 얼마나 나아지겠으며, 마흔 해가 된다 한들 어느 만큼 알차거나 알뜰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열 해가 되어도 도시 티를 못 벗을 수 있으나 한 해 만에 도시 티를 벗는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더 모질게 먹거나 단단히 품으면서 도시 내음을 걷어치운다든지 도시 빛깔을 접을 수 있으면, 한 해가 아닌 한 달 만에도 아름다운 농사꾼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겠지요. 윤구병 님은 ‘대기업 사보 원고 청탁’을 거절했다고 글에서 밝히지만, 대기업 사보를 들추면 ‘자주’는 아니나 ‘틈틈이’ 당신 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출판사 일로 달마다 여러 차례 서울마실을 하느라, 시골에 살면서도 시골사람으로 시골살림을 꾸리는 삶이란 반토막이라고 할까요.

 윤구병 님이 좀더 옹근 농사꾼으로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비내린 뒤 쌀쌀한 날씨에 콩을 주으면서 대기업 사보를 떠올리며 품값을 셀 노릇이 아니라, 비내린 뒤 쌀쌀한 날씨에 콩을 줍는 괴로움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적바림하면서, 비내린 뒤 달라진 콩밭 모습과 시골 논밭 모양새를 써 내려 갈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우리 삶에서는 놀라운 주의주장이나 철학 또한 어느 만큼 값이 있을지라도, 이보다는 삶에서 묻어나오거나 우러나온 이야기만큼 사람들한테 애틋하거나 사랑스럽지는 않으니까요. 짜릿한 뒤집기 한판이 펼쳐지는 운동경기를 볼 때에도 즐겁다 할 만하지만, 동무들하고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금긋기놀이를 하거나 돌치기놀이를 하면서 웃음꽃을 터뜨릴 때에도 즐겁습니다. 어느 쪽이 더 크고 신나는 즐거움이라고는 잘라말할 수 없습니다만, 윤구병 님이 도시에서 얻은 ‘교수님’이라는 이름을 벗어던지고 시골에서 얻으려는 ‘농사꾼’이라는 이름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운동경기 이야기가 아닌 고무줄놀이 이야기 쪽으로, 대기업 사보 글삯 이야기가 아니라 농사짓는 삶으로 열 해를 보내며 얻거나 깨달은 거룩하고 놀라운 즐거움 이야기로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를 차곡차곡 채웠어야 하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 도시에서 사람을 뺀 다른 생명체들이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는 까닭은 도시인들의 위생 관념 때문이기도 하지만,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의 불빛 때문인지도 모른다 … 나는 한때 거시경제학이나 정치경제학 같은 것에 빠지고 《자본론》을 줄을 그어 가며 열심히 읽은 적도 있다. 그리고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대한 이론을 흔들리지 않는 지혜로 받아들인 적도 있다. 그런데 10년 남짓 농사지으면서 그걸 재검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189, 198쪽)


 다시금 책을 펼쳐 읽습니다. 윤구병 님은 시골을 버리고 도시에서 살다가, 홀로 도시를 버리고 시골로 와서 살아갑니다. 시골살이 열 몇 해 삶자락을 책 여러 권으로 한꺼번에 내놓습니다. 바쁘고 힘겹다 하는 시골살이라 하지만 열 몇 해에 걸쳐 적바림한 글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시골사람이었고 예순 해 일흔 해에 걸쳐 시골사람인 농사꾼들은 책을 써내지 못합니다. 또는 책을 써내지 않습니다. 굳이 책으로 써내지 않더라도 스스로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고, 농사꾼 삶을 책으로 펴내려고 하는 출판사가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이었다가 농사꾼이 된 사람들 귀농일기는 곧잘 책으로 내놓는 책마을이지만, 처음부터 농사꾼이었던 사람들 농사일기는 한 번도 책으로 내놓지 않은 책마을이거든요.

 이는 나라안이나 나라밖이나 매한가지입니다. 농사꾼 스스로 농사꾼 삶을 글로 남겨 책으로 내는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아마, 구멍가게 장사꾼 또한 당신 삶을 글로 남겨 책으로 내는 일이란 거의 없겠지요. 저잣거리 장사꾼들은 어떠할까요. 장돌뱅이와 배무이와 목수들 삶은 어떠할까요. 큰회사 씨이오라는 분들은 당신 자서전을 끝없이 내놓습니다만, 신집 할배나 나물장수 할매 삶을 당신들 스스로 글로 남기라고 이끌거나 가르칠 만한 초중고등학교 교사나 대학교 교수는 몇 사람이 있을까요. 집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 삶을 고이 여기거나 살가이 눈여겨보면서 꾸밈없이 글로 써내거나 사진으로 담아내거나 그림으로 그려내는 분은 얼마나 되나요.


.. 또 부자들이나 밥상에 올리는 비싼 ‘유기농 식품’으로 수지를 맞출 생각을 말고도 가용을 쓸 마련이 있어야 하는데, 어찌하면 좋을꼬 ..  (18쪽)


 유기농 먹을거리란 ‘똥오줌을 삭여 거름을 내어 지은 곡식’을 가리킵니다. 몇몇 부자들이 적잖은 돈을 들여 ‘몸에 좀더 좋다는 먹을거리’를 즐기기도 한다지만, 유기농 먹을거리란 부자들만 즐기는 먹을거리가 아닙니다. 착하고 참된 농사꾼이라면 누구나 즐기는 먹을거리이고, 도시에서는 생활협동조합을 이루면서 도시에서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건사하며 아이들과 맑고 맑은 나날을 꿈꾸는 사람들이 조그맣게 모두는 따순 손길이기도 합니다. 거름을 내어 지은 곡식이 ‘조금 더 비싼’ 까닭은 풀약을 치고 항생제를 먹여 좀더 손쉽게 더 많이 거두는 곡식이 아니라, 곡식부터 맑고 밝게 키우고자 땀을 들이고 힘을 들이기 때문에 땀값이 ‘마땅한 일삯’으로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변산 농사짓는 두레마을에서 일군 먹을거리 또한 ‘여느 먹을거리’와 견주면 값이 셉니다. 설마 변산 농사짓는 두레마을에서 부자들 밥상에 비싼값으로 내다 팔 농사를 짓지는 않을 테지요. 그리고,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농약에 찌든’ 먹을거리가 아닌 ‘깨끗하고 더 나은’ 먹을거리를 먹어야 하며,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삶을 옳게 바라보고 자연을 꾸밈없이 껴안으면서 맑고 밝은 사람으로 거듭나며 아름다운 길을 걸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끼리만 잘살면 되는 온누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잘살아야 할 온누리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든 머리 나쁜 사람이든 잘생긴 사람이든 못생긴 사람이든 잘못을 안 저지르는 사람이든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이든 누구나 고르게 권리를 누리며 착하고 곱게 살아가야 할 온누리입니다.

 물과 불과 땅과 바람이 뭇목숨을 살리는 힘이라지만, 물과 불과 땅과 바람만으로는 뭇목숨을 살리는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너른 믿음과 따뜻한 사랑과 넉넉한 손길과 착한 매무새가 함께해야 합니다.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라는 책에서 윤구병 님은 물과 불과 땅과 바람이 어우러지는 시골마을 논밭 일구는 농사꾼 땀방울이 얼마나 값있는가를 날카롭게 짚어내어 차근차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날카로움에 한결 보드랍고 더욱 싱그러운 믿음과 사랑과 손길과 몸짓을 어우러 놓는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4343.4.9.쇠.ㅎㄲㅅㄱ)


 ┌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휴머니스트,2010)
 ├ 글 : 윤구병
 └ 책값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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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이 바라본 세상 이야기
은종복 지음 / 이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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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45 ― 맑고 밝게 일하며 살고픈 풀벌레 한 마리
 : 은종복,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책이름 :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글 : 은종복
- 펴낸곳 : 이후 (2010.4.1.)
- 책값 : 12000원



 (1) 아이와 살아가며 아이를 생각하기란


 날이 포근하기에 아이를 데리고 골목마실을 나왔습니다. 아이는 조금 걷다가 자꾸 넘어집니다. 걸음이 차츰 더디어집니다. 아이가 졸립다는 뜻이로군요. 아이를 품에 안습니다. 아이가 앞쪽을 보도록 안고 걷습니다.

 아이를 안고 걸어가면 참 힘듭니다. 팔과 등허리가 몹시 저립니다. 그러나 아이로서는 뒤쪽이 아닌 앞쪽을 보면서 안기고 싶겠지요. 아기수레를 안 쓰는 우리 식구는 아이를 걸리거나 안고 다녀야 합니다. 둘레에서 아기수레를 선물해 주거나 물려주겠다는 분이 여럿 있었으나 우리는 안 받았습니다. 아기수레를 밀며 다닐 때에는 아이가 더 다니고 싶지 않아도 어른 마음대로 다니려는 뜻이 있고, 아이가 다리힘을 기르기보다 쉽게 가기를 더 좋아해 버릴 수 있으며, 무엇보다 아이를 안고 다니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터전 길은 고르지 않아 아기수레를 밀면 아이 몸에 더없이 나쁩니다. 아이는 제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야 하며, 아이 다리힘으로는 아직 힘들 때에는 엄마나 아빠 품에 안겨 따순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가 잠들 무렵 옆지기가 아이를 업습니다. 일찍 돌아가야겠다 싶어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건널목에서 푸른불을 기다리는 동안 어린아이 하나를 아기수레에 태우고 어린 두 아이를 걸리고 있는 엄마를 마주 바라봅니다. “진짜 힘들겠네.” 옆지기 입에서 절로 터져나오는 목소리입니다. 아이 셋을 데리고 움직인다면 얼마나 힘이 들까요. 천기저귀를 쓰고자 하여도 쓰기 아주 힘들겠지요. 한 번 쓰고 버리는 종이기저귀를 쓸 때에도 만만하지 않을 테고요. 조금 큰 두 아이가 쫑알거리다가 저희 가고픈 대로 엇갈려 달리면 애 엄마로서는 죽을 노릇입니다. 아이 하나가 저 가고픈 대로 신나게 내달릴 때에도 붙잡기 얼마나 힘든데요.

 아이를 업고 안고 하며 집에 닿을 무렵 아이가 갑자기 깹니다. 낮잠을 잘 때이기에 두어 시간은 자야 하는데 어떻게 깨어납니다. 집으로 오니 말똥말똥 뛰어다니며 놉니다. 얼마 뒤 똥 한 번 푸지게 누고는 다시 신나게 놉니다. 엄마가 아이 똥을 치우는 동안 아빠는 아이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마실을 마치고 금방 돌아온 탓인지 손빨래 비빔질을 하는데 팔뚝이 저려 힘겹습니다. 애벌 두벌 세벌 헹구며 물을 짜는데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늘 따라 빨래를 그만두고 싶으나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 빨래를 이 자리에서 마치지 않으면 저녁나절 아이가 잠들 무렵까지 나올 빨래거리는 더 늘어날 테고 이튿날에는 또 생길 테니까요.

 구부정한 허리를 툭툭 두들기며 빨래를 하고 있자니, 다 마친 빨래를 옆지기가 들고 가서 빨래대에 널어 놓습니다. 모처럼 옆지기 몸이 괜찮아져서 집일을 도와주는구나 싶어 고맙습니다. 힘든 가운데 조금이나마 기운이 납니다. 양말과 아기 웃도리 둘을 마저 빨고 씻는방에서 나옵니다.

 아이는 아침에 치우고 낮에 치운 방을 새삼스레 어지르며 놉니다. 엄마도 아빠도 어질러진 방을 치울 겨를을 내지 못합니다. 그냥 그대로 둡니다. 모르는 누군가 본다면 참 게으른 사람들이라 여길 만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일 때부터 아이키우기를 해 보지 않은 분들이라면 집일이 얼마나 많고, 많디많은 집일은 그칠 틈이 없는 가운데, 날마다 끝없이 되풀이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헤아리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그나마 우리 아이는 아직 어려서 그렇지, 조금 더 크면 종알종알 재잘재잘 말을 신나게 해대며 아빠나 엄마가 혼자 책을 읽는다든지 글을 쓴다든지 뜨개질을 한다든지 하면 이런저런 일 하지 말고 저랑 놀자며 팔뚝을 잡고 허리춤을 끌어안으리라 봅니다.

 다가오는 4월 1일,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에 나들이를 갈 생각입니다. 저랑 옆지기랑 아이랑 셋이 나란히 나들이를 갑니다. 이날 책방 〈풀무질〉에서는 책방 일꾼 은종복 님이 써낸 책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를 놓고 기림잔치를 벌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기림잔치에 함께한다면 다른 사람한테 번거로울 수밖에 없는데, 여태껏 책방 〈풀무질〉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어 아이를 데리고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잔치마당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굴 때에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싫어한다면 싫어하는 그대로 아이를 바라보아 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른들은 모두 이 아이처럼 어린 나날을 보냈고, 어린 나날을 보낼 때에 ‘풀무질 책방 기림잔치’ 같은 잔치마당에 어버이와 함께 찾아가서 또래 아이들을 보거나 다른 어른들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누리를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배우면서 무럭무럭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 님은 당신 아이를 대안 초등학교에 보냈고 대안 중학교에 넣었습니다. 은종복 님은 아이가 학교를 안 다니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지만 아이는 또래 동무들하고 놀고 싶다고 했답니다. 아무래도, 은종복 님이나 옆지기 님이나 집에서 하루 내내 아이하고 어울리면서 즐겁게 놀아 줄 수 있는 터전이었다면 아이로서는 따로 (대안)학교에 가서 동무들과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안 품을 수 있습니다. 높은 뜻이든 낮은 뜻이든 진보 넋이든 보수 넋이든, 모두들 어른들 생각과 삶에 따라 꾸리는 하루하루이다 보니, 아이들한테 ‘우리 어른들이 저희들 나름대로 좋다고 여기는 삶’을 아이한테 곧바로 물려주거나 함께하기보다는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맡기어 아이들이 보내는 여느 나날과 고운 삶을 따사로이 껴안지 못한다고 할까요. 제아무리 환경운동을 하고 무슨무슨 진보운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가용을 못 버리듯, 아이를 옳고 바르게 키우는 자리에서도 돈을 더 벌지 않고서는 뜻있는 배움마당을 열지 못한다는 어려움 때문에 그만 아이들을 우리 어버이가 스스로 내 손으로 키우지 못하고 맙니다.

 ‘손그림 찍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주민등록증을 거스르는 넋을 지키고 ‘총’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사람 죽이는 재주를 배워야 하는 군인이 되지 않겠다는 얼을 가꾸는 우리 삶일 때에, 비로소 경부운하이니 4대강이니 하는 끝장 막개발을 비롯하여 국가보안법이나 한미자유무역협정이나 주한미군 들을 거스를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2) 맑고 밝은 이야기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서울 명륜동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이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되도록 책으로 내지 않고 쪽글로만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으나, 당신이 품으려는 맑고 밝은 넋을 더 너른 이웃하고 나누려는 뜻으로 책을 하나 여미기로 했다고 합니다.

 “책방 일을 하느라 돈에 눈먼 어른들이 벌이는 싸움을 막을 수 없었다(4쪽).”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돈에 눈먼 어른들한테 돈이 아닌 사랑에 흠뻑 빠져들자는 이야기를 건네고자 바지런히 쪽글을 쓴 〈풀무질〉 은종복 님입니다.

 은종복 님은 당신이 몸담은 환경지킴 모임에서 ‘풀벌레’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흔하디흔한 풀벌레이지만, 오늘날 도시에서는 모조리 자취를 감추어 버린 풀벌레입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풀 한 포기 느긋하게 자랄 땅이 없거든요. 시멘트땅이요 아스팔트땅이니 풀이 자라지 못하고, 풀이 조그맣게라도 풀숲을 이루어야 풀벌레가 깃들 수 있는데, 풀벌레 하나 깃들 땅뙈기는 내버려 두지 않거든요. 건물을 세우고 가게를 들여 돈을 벌든지 아스팔트를 죽 깔아서 자동차 씽씽 달리도록 해야 한다는 도시이거든요.

 “아름다운 우리 말을 살려 쓰면 내 마음도 아름다워지고 세상도 아름다워진다(6쪽).”는 생각을 품으며 쪽글을 꾸준히 가다듬기도 하는 풀벌레 은종복 님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름다운 우리 말’이 아니라 ‘쉬운 우리 말’이요, 동네 할머니들 누구나 알아들을 만한 ‘수수한 우리 말’이며, 초등학교를 다니든 어린이집을 다니든 어린이들 누구나 알아차릴 만한 ‘가장 낮고 가장 가난하며 가장 부드러운 말’입니다.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 말입니다. 책 좀 읽었다고 잘난 척하는 말이 아닙니다. 학교 좀 오래 다녀 가방끈 길다고 으스대지 않는 말입니다. 나라밖으로 다녀 본 티를 내겠다는 어설픈 겉치레 말이 아닙니다. 바로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따스하고 넉넉하고 어깨동무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작은 책방 〈풀무질〉이라는 곳부터 ‘잘난’ 책방이 아닙니다. 〈풀무질〉은 참으로 못난 책방입니다. 〈풀무질〉은 더없이 모자란 책방입니다. 〈풀무질〉은 그지없이 어설픈 책방입니다. 〈풀무질〉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책방입니다. 공안경찰이 〈풀무질〉 일꾼을 붙잡았을 때에 당신한테 들려준 말 “처벌받고 여기서 나가면 그런 돈도 안 되는 사회과학 서점은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해 봐요. 좀 건전한 거 있잖아요. 요즘 학생들 술 많이 마시던데 술집 하면 좋겠네요(42쪽).”처럼, 인문사회과학 책방 일이란 ‘돈 안 되는’ 일이니 몹시 바보스러운 책방 일입니다. 따로 인터넷으로 책을 살 수 있지 않으니 번거롭기까지 한 책방입니다. 무슨 경품이나 마일리지를 잔뜩 내붙이고 있지도 않으니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한 책방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못나고 모자라고 어설프고 어리석고 바보스럽고 번거롭고 멍청한 작은 책방 〈풀무질〉이기에 사랑스럽습니다. 못나기 때문에 따뜻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넉넉하며, 어설프기 때문에 착합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푸근하고, 바보스럽기 때문에 믿음직하며, 번거롭기 때문에 싱그러운데다가, 멍청하기 때문에 꿋꿋합니다.

 책방 일꾼과 책손 사이에 높고 낮은 자리가 없습니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으로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같은 목숨과 또다른 목숨으로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랑과 고운 믿음으로 손을 맞잡을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건전한 일”이라고 하는 “장사 잘될 술집” 아닌 “장사 힘든 책방”을 동네 한켠에서 자그맣게 하는 〈풀무질〉 일꾼들은, 다름아닌 작고 가난하고 모자라고 어설픈 가운데 착하고 살갑고 넉넉하고 따사로운 마음을 땀흘려 일구자고 하는 뜻을 나눕니다.

 수험서를 사 가든 교재를 장만하든 잡지 하나 챙기든, 모두 어여쁜 빛줄기를 가슴속에 묻어 두고 있는 젊은 넋임을 돌아보면서 쪽글 하나 건네어 우리 삶터를 아름답게 비추며 즐거이 살자는 뜻을 키우고픈 〈풀무질〉 일꾼들입니다. 무엇입네 뭐입네 하고 외치는 분들 목소리마냥 〈풀무질〉 일꾼 목소리는 신문 1쪽을 채우는 일이 없습니다. 풀벌레 한 마리가 우짖는 소리는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에도 파묻히니까요. 아니,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에도 스러집니다. 그러나 풀벌레는 꾸준하게 노래를 합니다. 풀벌레 한 마리는 어마어마한 도시 한복판에서 자그마한 풀숲을 보듬으면서 햇살 한 줌 받아안는 마음결을 다부지게 일굽니다.
 















 (3) 되새겨 읽으며 아쉬운 글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라는 책은 〈풀무질〉 일꾼 은종복 님이 쓴 쪽글들을 갈래에 따라 새로 엮어서 나왔습니다. 은종복 님은 사람들이 손쉽게 읽을 수 있게끔 짤막한 글을 써 왔지만, 책에서는 두어 꼭지를 하나로 묶으며 제법 길어진 글이 많습니다. 이에 따라 쪽글로 사람들하고 나눌 때에는 단출하면서 옹글던 글이 여러모로 헝클어지곤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은종복 님이 쪽글을 쓸 때에 마음을 깊이 쓰던 ‘우리 말 바르게 쓰기’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 가운데 ‘것’이라는 말투는 346쪽짜리 책에서 자그마치 1000번이 넘게 나오고, ‘하지만’이라는 말투 또한 100번 가까이 나옵니다(‘하지만’은 ‘그렇지만’이나 ‘그러하지만’이라 적어야 할 말을 잘못 적는 말투입니다). ‘고통, 불안, 시작, 필요, 원망, 후회, 전체, 강제, 만족, 고민, 열심, 생활, 방향, 결국, 진정한, 통하다, 별, 단, 전혀, 대부분’ 같은 말투도 지나치게 자주 나옵니다.

 ┌ 내가 붙잡혀 간 것은 → 내가 붙잡혀 간 데에는
 ├ 거기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 이에 따르지 않을 생각이다
 ├ 군대를 보내는 것을 보고 → 군대를 보내는 모습을 보고
 └ 정작 팔리는 것은 → 정작 팔리는 책은


 다만, 은종복 님이 아무리 우리 말과 글을 바르게 쓰고자 애쓴다 하여도, 쪽글마다 몇 군데씩 아쉬운 대목이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책 한 권에 만 군데가 넘도록 얄궂은 말투가 깃들도록 흐트러지거나 엉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풀무질〉을 기리는 글을 써서 출판사에 보냈을 때에도 ‘쉽게 쓴 낱말을 굳이 어려운 한자말로 고쳐 놓아’서 어이없다고 느꼈습니다.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이든 이곳 일꾼 은종복 님이든 ‘그냥저냥 흔한 책을 팔’거나 ‘이냥저냥 흔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 이런 ‘흔하지 않은 넋’을 출판사 일꾼이 제대로 안 읽었다고 해야 할까요. 왜 일부러 더 힘들게 글을 가다듬고 짤막한 쪽글을 써 왔는지, 왜 이 짤막한 쪽글을 쓸 때마다 은종복 님은 더더욱 뼈를 깎듯 애쓰면서 글다듬기를 하고 새롭게 말을 배우려고 했는지를 못 읽었다고 해야 할까요.

 좀 어줍잖은 글이라 할지라도 좋은 넋과 훌륭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풀벌레 은종복 님이 굳이 더 마음써서 곱고 맑은 글을 쓰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빛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은종복 님 스스로 또이름을 ‘풀벌레’라고 붙이는 마음처럼, 쪽글 하나마다 풀벌레다운 얼과 기운을 실어서 이웃하고 함께하려는 사랑이 있습니다. 책을 엮는 일꾼들은, 또 풀벌레 은종복 님 글을 다루며 싣는 매체 일꾼들은, 글 하나가 그냥 나오는 글이 아니요 글 하나에 머리로만 굴린 이야기가 아닌 몸으로 부대끼며 삭여낸 이야기가 담기는 흐름을 짚어 줄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라는 책을 반갑고 기쁘게 집어들어서 널리 나누는 참뜻을 깨달으면서 지식쌓기 책이 아닌 삶 다스리기 길동무로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4343.3.30.불.ㅎㄲㅅㄱ)


[8, 53쪽]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돈에 눈먼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자연을 더럽히고, 아이들 목숨줄을 조이고 있다. 전쟁을 일으키고, 강을 파헤치고, 핵무기를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낭떠러지로 내몰고 있다. 이럴수록 가난하지만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작은 동네 책방을 살려야 한다. 스스로 마음밭을 맑고 밝게 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 “큰 기업에서 일억 원을 내는 것보다 나같이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 만 사람이 만 원씩 내는 게 훨씬 나아요. 큰 기업에서는 한꺼번에 돈을 내지만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품삯을 조금 올려 달라고 하면 들어주지 않지요. 그런 기업들이 돈을 내는 것은 이름값을 높여서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생각도 들어 있지요.”

[17, 19, 41∼42쪽] 헌법에 쓰여 있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 땅에서 인문사회과학 책방도 다른 많은 진보 모임과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이 휘두르는 칼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큰 책방이나 인터넷서점은 단지 돈을 받고 파는 사이로 머물지만, 인문사회과학 책방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만나 서로 얘기를 나누며 세상을 맑고 밝게 바꾸려는 진보 공동체다 … 그때 나를 조사하던 수사관에게 내가 물었다. “이런 책들은 일반 큰 책방에도 모두 팔고 있던는데, 그곳 대표는 왜 조사하지 않는 거죠?” “그들은 단지 돈을 벌려고 책을 파는 것이고, 당신들은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고 북한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러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거칠었고, 억지로 높임말을 썼다. “내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또 학생들한테 그 내용을 전할지 안 전할지 어떻게 압니까?” “당신은 학교 다닐 때 시위 전력도 있고 지금도 학교 앞에서 사회과학 서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처벌받고 여기서 나가면 그런 돈도 안 되는 사회과학 서점은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해 봐요. 좀 건전한 거 있잖아요. 요즘 학생들 술 많이 마시던데 술집 하면 좋겠네요.”

[24, 54쪽] 햇살 한 줌, 빗물 한 방울, 눈송이 하나 볼 수 없는 땅속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책방 한 귀퉁이에 앉아 늦가을, 책방 밖으로 눈발 날리듯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많이 슬펐다 … 나는 사람이 사람을 못살게 하지 않고 사람이 자연을 더럽히지 않는 사회를 바란다.

[27, 44, 68쪽] 자본가들은 자기가 만든 물건을 팔려고 약한 나라를 끊임없이 쳐들어간다. 미국은 동북아시아 패권을 누리거나, 새로운 자본주의 시장을 만들려고 한반도 북녘을 쳐들어가려고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 나 같은 책방 일꾼이 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가. 아니다. 대운하를 만들어 자연과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하고, 백성들이 먹고 죽을병에 걸릴지도 모르는 미국 소를 자기들 마음대로 들여오는 이명박 정권이 이 나라를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다 … 어느 날 열한 살 난 내 아이가 신문을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물었다. “아빠, 강남에 있는 땅들은 강북에 있는 땅보다 비싸? 맨날 땅값이 올랐다는 글만 나와?”

[37, 39, 66, 128쪽] 아이가 몹쓸 병에 걸린 것은 모두 어른들 때문이다. 나 같은 어른들이 좀더 편하게 살려고 자동차를 수없이 만들어 공기를 더럽히고, 온갖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물을 썩게 하고 땅을 더럽혀서 그렇다 … 나는 돈에 눈먼 사람들이 배고프고 헐벗은 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모습을 볼 때까지 이렇게 해마다 하나씩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끊으려 한다. 이것이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 삶이 되기를 바라며 … 아이들이 학교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살 수는 없나. 학교가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배우는 놀이터가 될 수는 없나 … 일반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다. 학교 공부가 끝나고 이곳저곳 다른 배움터를 다니다가 밤 아홉 시 넘어 들어오고 밤 열두 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든다.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는 또 좋은 직장을 찾으러 공부해야 하고, 일자리를 얻은 뒤에는 또 쫓겨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이 행복할 것인가. 끝없이 행복을 뒤로 미루며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고 내 아이에게 강요하기는 싫었다.

[51, 55, 71쪽] 내 아이를 살리자고 가난한 나라 아이들을 죽이러 군대를 보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 … 권정생 할아버지는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니라 마음이 맑고 밝은 부자였지요. 다시 태어나면 몸이 튼튼한 젊은이로 나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아이를 낳고 작은 텃밭을 일구며 오순도순 살고 싶다고 했어요. 진짜 부자는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가난하게 살아야 세상이 맑고 밝아진다. 가난한 사람들만이 살맛나는 마을을 만들 수 있다.

[58, 93, 106, 112쪽]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랑 걸으면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종복아, 엄마는 종복이랑 이렇게 걸어가면 참 기쁘다. 이렇게 멋지고 듬직한 아이가 정말 내 배속에서 나온 건지 믿어지지 않아. 그냥 종복이란 이렇게 손을 잡고 걸으면 엄마는 너무나 행복해.” … “또 어디 갈 데 없냐?” 숨돌릴 틈도 없이 다음 갈 곳을 미리 물어 오신다. 아버지는 책방에 도움이 되려고 당신 몸을 아끼지 않는다. 당신 몸 아끼지 않고 아들이 잘사는 것을 바라며 평생을 살아오셨다 … “내 머리엔 10원도 안 들어갔다.” 학교교육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을 할 때 어머니는 꼭 이런 표현을 쓴다 … 어릴 때 가정통신문에 어머니 학력 쓰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 ‘무학’이라고 쓰면서 참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하며 배웠다.

[114, 125, 131, 132, 134, 136쪽] 조금 배고프게 살더라도 사람답게 사는 길을 아이에게 찾아 주고 싶었다 … 내 아이가 6학년이었을 때도 구구단이 입에서 술술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별 걱정하지 않았다. 구구단은 잘 못 외우지만 생각이 참 깊다 … 아이들을 공부 잘하는 기계로 만들려 하니, 지금 일반 학교는 수용소가 되고 선생은 수용소장이 되고 있다 … 공부만 잘하는 아이들을 떠받드는 세상에선 아이들이 미칠 수밖에 없다 … 어른들이 돈에 눈먼 삶을 사니,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 아이들이 올곧게 잘 배우려면 아름답고 살맛나는 마을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140, 144, 162쪽] 모두들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는데, 정말 살려야 할 것은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마을이다 …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자연에서 마음껏 놀 수 있을까. 어른들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바깥에서 놀아야 한다. 함께 공차기를 하고 연을 날리고 썰매를 타고 구슬치기를 하자 … 아이들이 좋은 생각을 하기 바란다면 어른들이 좋은 생각을 해야 하고, 아이들이 좋은 책을 읽기 바란다면 어른들이 먼저 좋은 책을 손에 들어야 한다.

[200, 206, 214쪽] 군비 증강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줄까. 군비 증강은 결국 전쟁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 우리 나라도 이것을 본떠 우리보다 더 작은 나라들을 괴롭힌다. 이주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린다. 꼬마 제국주의 나라가 되고 있다 … 더 무서운 것은 살인무기는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사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평화는 무기를 버리고, 없애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 지난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자기 나라를 응원하는 사람들 마음이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지 의문이 들면서 총을 들고 싸우는 군인들을 떠올렸다.

[266, 270쪽] “파리야! 네가 내 밥에 앉아 밥을 먹으니 내가 싫구나. 여기에 네 밥이 있으니 내 것 말고 네 것을 먹으면 좋겠다.” … 어떤 사회주의자들은 소로우의 생각을 싫어했다. 사람 하나하나가 나라가 하는 일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소로우의 생각은 노동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세상을 바꾸려면 내 자신을 먼저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

[276, 310, 323쪽] 지율 스님은 이 세상에 난 모든 목숨붙이를 아끼고 보듬고 섬기는 마음을 지녔다 … 황우석을 떠받들고 지율을 내치려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오로지 1등을 하려는 마음, 내 주머니에 돈이 들어가면 남이야 어떻든 생각하지 않는 마음,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하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마음, 돈을 많이 버는 일이라면 자연을 파괴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마음은 아닐까 …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어른들 싸움으로 맑고 밝게 자라야 할 아이들이 아파하고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민중의 세계사》를 꺼내 읽는다 … 미국도 인디언을 총칼로 죽인 뒤에야 자신의 나라를, 야만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또다른 자본을 수출하기 위해 자기보다 더 힘이 없거나 임금이 싼 사람들을 고용하여 착취하고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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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 - 느낌이 있는 국립공원 속살 탐방기
박경화 지음 / 양철북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생각하고 느끼는 여행’을 꿈꾸겠다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9] 박경화,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



 세상으로 나와서 스무 달째 살아가고 있는 아이는 이제 밤에 두 번이나 세 번, 때로는 한 번만 칭얼거립니다. 깊은 밤에 두세 번씩 깨어나 아이 기저귀를 갈기란 만만하지 않은 노릇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만, 달리 생각하면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에서 조용히 불을 켜고 책을 읽는다든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한창 갓난아기일 때에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어김없이 기저귀갈이를 해야 했고 백일 때까지는 한 시간이 아닌 삼십 분마다 깨어나야 했습니다. 그무렵은 잠을 잔다기보다 졸면서 아기를 본다고 해야 맞았고, 밤 사이에 똥기저귀 빨래를 여러 차례 하는 날이 잦았습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스스로 잘 걷고 달리기까지 하는 만큼, 이제는 아이를 품에 안거나 등에 업고 걷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자동차가 골목을 휘저을 때에는 어김없이 아이를 안아야 하고, 고단해 하거나 힘들어 하면 그때그때 안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 걷는다 하더라도 아이 몸으로는 한 시간 넘게 걷기란 몹시 어려운 노릇입니다. 집에서는 쉬잖고 뛰논달지라도 밖에서는 삼십 분을 거닐어도 몹시 힘든 노릇이구나 싶습니다.

 하루에 한 번이나 두 번 바깥바람을 쏘이며 아이를 걸릴 때면, 아이가 마주하거나 바라보는 동네 모습이 아이 눈에 어떻게 비칠까 퍽 걱정스럽습니다. 어른 눈으로 보자면 고즈넉한 골목동네랄 수 있으나, 조금만 걸어나가면 곧장 시내이고 유흥거리가 나옵니다. 몇 분 걷지 않아도 자동차 우글거리는 큰길이 나오고, 큰길에는 시끄러운 노래 흘러나오고 번쩍이는 불빛 가득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서울이 아닌 여느 도시이든 시골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익히 보고 길들고 젖어드는 삶자락이란 온통 소비주의 물질문명입니다.


.. 그럼, 곰은 무엇을 먹고 살까? 그 옛날 곰은 육식동물이었다. 그러나 환경에 적응하면서 잡식으로 바뀌었고, 초식으로 변해 가는 단계라고 알려져 있다. 봄에는 부드러운 나뭇잎과 꽃, 나물류를 맛있게 먹는다. 열매가 맺는 여름에는 덜 익은 열매를 먹는데, 달콤한 산딸기와 뽕나무 열매인 오디, 벚나무 열매, 머루, 다래처럼 사람들이 먹는 모든 열매를 좋아한다 … 이 땅에 산양이 산다는 것은 천연기념물 한 종이 살아 있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 땅의 생태계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이다 ..  (16, 43쪽)


 그제 아침 민방위훈련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민방위훈련 통지서는 참 질기게 온다고 느끼면서, 왜 이런 훈련을 받아야 하고 이런 훈련을 시키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를 한동안 곱씹습니다. 누가 무엇을 지키라는 민방위요, 우리가 지킬 만한 아름답거나 빛나는 터전이란 어디일까요. 고향이요 삶터임을 떠나, 내가 깃든 이 도시가, 많은 사람들 복닥이는 이 도시가, 얼마나 지킬 만한 값이 있거나 뜻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끼리도 서로 사랑하기 어려운 이 도시가, 사람 아닌 뭇목숨은 도무지 살아남을 수 없는 이 터전이, 사람이든 뭇목숨이든 개성과 다양성을 건사할 수 없는 이 자리가, 어느 만큼 지킬 값이나 뜻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제 낮 목에 사진기를 걸고 한손으로는 우산을 받고 눈길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빗길이었는데 삼십 분쯤 걷다 보니 눈길로 바뀌었습니다. 한동안은 싸락눈이더니 이내 굵은 눈송이로 바뀌었고, 얼음눈이 우산에 철벅철벅 들러붙어 무겁습니다. 눈과 바람과 얼음길을 걸으면서 온몸이 얼어붙습니다. 눈으로 덮이는 동네를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으며 ‘눈으로 하얗게 덮이는 곳은 도시이든 시골이든 곱고 맑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그러나 도시에 내린 눈은 그때그때 걷어내거나 치우며, 시골에 내린 눈이 아니고는 햇볕에 녹거나 마르기란 어렵습니다. 아주 잠깐 하얗게 덮어 줄 뿐이요, 요사이는 눈이 내리는 동안에도 쌓이지 않도록 바지런히 쓸고 치웁니다.


..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국립공원을 제안한 사람은 놀랍게도 일본인이었다. 1933년 일본인 다무라(田村剛)는 금강산을 답사한 뒤 국립공원 지정 구상을 발표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 사람들은 지리산 천왕봉과 설악산 대청봉까지 하이힐을 신고 간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에는 실제로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이나 슬리퍼를 신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 산이 낮고 완만해서가 아니다. 향적봉은 1614미터나 되는 높은 산이지만, 곤돌라를 타고 단숨에 봉우리까지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  (29, 210쪽)


 국립공원 나들이를 생각하는 이들한테 좋은 길잡이가 될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라는 책을 읽는 새벽나절, 시계는 세 시 삼 분을 가리키는데, 우리 윗집에 사는 분이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 무겁게 내며 계단을 딛고 올라갑니다. 윗집 이웃은 무슨 일로 이 깊은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갈까요. 택시를 몰기 때문에 이제야 일이 끝나서? 그러고 보면, 퍽 자주 이 깊은 새벽에 발걸음 소리를 듣습니다. 지난해 여름과 가을에는 아이가 새벽나절 발걸음 소리에 놀라 깨곤 해서 퍽 애를 먹었습니다. 기찻길 옆 골목집에 살 때에는 새벽 다섯 시부터 울리는 기차소리에도 깨지 않더니.

 “여행이 더 즐거우려면 여행지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필요하다(80쪽)”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힘주어 말하는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입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버리고 떠나는 쓰레기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국립공원 둘레 마을’ 사람들 목소리를 빌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국립공원을 찾는 사람뿐 아니라 여느 관광지를 찾는 사람들 누구나 쓰레기를 손쉽게 만들어 냅니다. 아니, 우리 나라 얼거리는 쓰레기를 끝없이 새로 만들도록 짜여 있습니다. 도시 삶터란 새 물건을 만들어 사고팔면서 일자리를 마련하고 돈을 벌도록 맞추어져 있습니다. 물건 하나를 알뜰히 건사하거나 돌보면서 우리 터전을 맑고 곱게 지키도록 하는 틀로 맞추어 놓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다시쓰기나 되살려쓰기 얼거리를 이루어 놓지 않습니다.

 국립공원을 찾아가든 여느 관광지를 찾아가든, 우리는 우리 삶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찾아가서 지냅니다. 우리 삶자리에서 우리 동네를 맑고 곱게 건사하는 매무새를 지키고 있다면, 어느 곳에 간들 그곳 삶자리를 다치게 하거나 흐트려 놓거나 헤살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삶자리부터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얼개여야 비로소 관광지에서도 관광지를 꾸밈없이 바라보고 살피고 껴안는 삶얼개를 이을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라는 책에서든 《희망을 여행하라》라는 책에서든 《이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이라는 책에서든,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타령을 제아무리 줄줄줄 늘어놓는다 한들 달라질 낌새가 없습니다. 나아질 구석이 없습니다. 오늘날 뜻있고 생각있다는 진보 지식인마저 1회용품을 버젓이 쓰고 있거든요. 오늘날 뜻있고 생각있다는 보수 우익 인사조차 헌 물건 고쳐쓰기와 재활용품 살리기와 생협 매장 다니기와 텃밭농사 같은 일을 안 하고 있거든요.


.. 여행지에서 여행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지역 경제를 살릴 반가운 손님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쓰레기만 남기고 지역문화를 훼손하는 불청객이라는 것이다 … 최고봉이라는 상징성 때문일까? 산에 올라 보면 유독 정상에만 사람들이 북적댄다. 근처에 있는 너른 공간과 시원한 숲그늘을 마다 하고, 굳이 햇볕이 내리쬐고 강한 바람이 부는 정상에만 몰려 있다. 덕분에 전국에 있는 유명한 산봉우리에는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한 채 바위만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다. 사람들이 정상을 향해서만 오르는 바람에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흙이 쓸려내린 것이다. 그리고 정상을 밟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람들은 정상 표지석을 끌어안고 기념촬영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 ..  (45, 177쪽)


 말이 좋아 ‘여행’이요 ‘탐방’이요 ‘트레킹’입니다. 예부터 써 온 우리 말로 하자면 ‘나들이’이거나 ‘마실’입니다. 나들이나 마실이란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이웃 마을로 찾아가는 일”입니다. 국립공원이든 관광지이든 ‘함부로 먹고 마시고 쓰고 버려도 되는’ 곳이 아니라, ‘내 이웃이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든 뭐를 하든 순례를 하든 트레킹을 하든 ‘누군가 살아가는 마을’을 찾아가서 돌아보고 즐기고 받아들이는 셈입니다. 우리가 찾아간 마을에 사람들이 있든 들짐승이나 멧짐승이 있든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과 다름없이 곱고 어여쁘고 알뜰한 마을이나 보금자리나 삶자리’를 찾아가서 마주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우리 살림새를 추스르듯 우리가 찾아가는 곳에서 우리 살림새와 모양새를 번듯하고 야무지고 싱그럽고 따스하고 넉넉하게 보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내 보금자리 동네에서 내 보금자리 동네가 얼마나 곱고 알차고 사랑스러우며 좋은가를 느낄 노릇이요, 내가 찾아가는 이웃사람 보금자리 동네에서는 이웃사람 보금자리 동네가 얼마나 곱고 알차고 사랑스러우며 좋은가를 헤아릴 노릇입니다.


.. 국립공원은 우리 나라 생태계에서 가장 보전가치가 있는 곳이자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할 만큼 소중한 자연자원과 문화유적이 많은 곳이다 ..  (7쪽)


 그 숲에 가는 우리들은 이 숲 또는 이 도시 또는 이 아파트 또는 이 골목동네에서 아름다운 우리들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 섬에 찾아가는 우리들은 이 동네 또는 이 빌라 또는 이 도심지에서 살가운 우리들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를 사랑하듯 내 아이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요, 내 어버이를 아끼듯 내 이웃을 아끼는 한 사람이며, 내 동무를 살피듯 낯선 손님을 살피는 한 사람입니다.

 국립공원이란 나라에서 좀더 마음을 써서 건사하는 자연 터전이라 하는데, 국립공원만 건사해서 되는 나라살림이 아닙니다. 국립공원에 좀더 마음을 써야 한달 뿐이요, 우리 터전 어느 곳이든 마음을 샅샅이 쏟아야 합니다. 국립공원만 깨끗이 지켜서 될 일이 아니라, 우리 살아가는 도시이든 시골이든 맑은 물과 시원한 바람을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라 할지라도 맛보고 껴안을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다스려야 합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여행’이 되자면, 무엇보다도 ‘생각하고 느끼는 삶’이어야 합니다. ‘천천히 기다리는 여행’이 되자면, 맨 먼저 ‘천천히 기다리는 삶’을 내 삶으로 곰삭여 놓아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새로운 국립공원을 일구어 내지 못하고 있는 한편, 국립공원 아닌 곳은 손쉽게 허물어뜨리고 있으며, 국립공원마저도 차근차근 잡아먹으며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4343.3.23.불.ㅎㄲㅅㄱ)


 ┌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양철북 펴냄,2010)
 ├ 글ㆍ사진 : 박경화
 └ 책값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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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의 사상
나카노 고지 / 자유문학사 / 199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34 ― 좋은 삶, 좋은 사람, 좋은 말
 : 나카노 고지, 《청빈의 사상》



- 책이름 : 청빈의 사상
- 글 : 나카노 고지
- 옮긴이 : 서석연
- 펴낸곳 : 자유문학사 (1993.5.15.)
- 판이 끊어짐

 





 (1) 좋은 삶을 찾는 길


 엊저녁 날씨가 차츰 쌀쌀해지더니 그예 얼음비가 내렸고, 밤에는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개나리며 봄꽃이며 가득가득 피어나겠구나 하고 생각할 즈음 온 동네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지난날을 떠올리면 사월에도 눈이 내렸고, 강원도 양구에서 군대살이를 할 적에는 부처님오신날까지 눈이 내렸습니다. 남녘땅에서는 삼월에 찾아오는 눈이란 드물지 않은 손님이요, 북녘땅에서는 더 늦게까지 눈손님이 찾아올 테지요.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를 집에만 둘 수 없기에 바깥마실을 나왔으나 얼음비나 눈이 내리기 때문에 걸리지는 못합니다. 우산을 받고 아이를 안으며 걷습니다. 아이는 비나 눈이 올 때에는 걸리지 않는 줄 아는지 찰싹 안긴 채 우산대를 한손으로 잡으면서 놉니다. 어스름이 깔리는 골목을 함께 거닐며 사진 몇 장 찍어 보고자 하는데, 날도 저물고 한손에는 아이를 안고 있으니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볍지 않은 사진기를 들고 숨을 참으며 아이가 가만히 있는 때를 살펴 찍기란 참 팔 떨어질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어스름 골목은 어스름 골목대로 멋이 있고, 눈발 흩날리는 어스름 골목은 눈발 흩날리는 어스름 골목대로 삶이 있습니다. 누구나 달콤한 삶과 함께 쓰디쓴 삶이 찾아올 터이며, 고단한 삶과 맞물려 홀가분한 삶을 마주할 터이고, 얄궂은 삶에 뒤잇는 반가운 삶을 즐길 테지요.

 골목마실을 하노라면 골목동네에서도 온갖 갈래 집을 만납니다. 넓은 마당이나 뜰을 마련한 부잣집을 만납니다. 손바닥만 하지만 아기자기하게 꽃밭이나 텃밭을 일구고 감나무나 대추나무나 고욤나무나 포도나무나 오동나무 들을 심은 조금은 넉넉한 살림집을 만납니다. 옛 기와를 고스란히 살린 살림집이나 개량 기와를 얹은 살림집을 만납니다. 골목 담벼락을 따라 꽃그릇을 주욱 마련한 집을 만나고, 담벼락 한켠에 시멘트를 섞어 삼십 센티미터나 오십 센티미터 너비로 죽 만들어 놓은 텃밭이나 꽃밭이 딸린 집을 만납니다. 꽃그릇 하나 놓을 수 없도록 비좁은 샛골목으로 이어진 데에서 다닥다닥 붙은 채 살아가는 한칸집을 만납니다.

 그런데 제아무리 한칸집이라 할지라도 그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골목을 따라 빨랫줄을 드리우기 마련입니다. 전봇대와 전봇대를 잇고, 옥상 작은 틈에 어떻게든 빨랫대를 세워 서로 조금씩 자리를 나누어 해바라기 빨래를 넣어 놓습니다. 겨우 한 사람 올라갈 만한 구멍을 뚫고 사다리를 놓아 옥상으로 올라가고, 지붕 한 끝과 다른 끝에 장대를 박아 놓습니다. 더욱이 이런 좁은 옥상에 꽃그릇 한둘쯤은 으레 올려놓습니다.

 하루이틀 사흘나흘 동네를 돌고 다시 돌고 거듭 도는 동안, 지난번에 보거나 마주한 모습을 새삼스레 느낍니다. 지난번에는 보지 못한 새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하며 뭉클함을 느낍니다. 해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모습에 반가움을 느낍니다. 동네마다 고추말리기를 하느라 빠알갛게 물들던 2008년 팔월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창 찍을 모습이 많을 때에 아이와 옆지기 곁에 붙어 지내느라 사진찍기 좋은 때를 가슴으로 삭이며 보냈습니다. 이듬해에도 아이 돌보는 데에 바빠 고추말리기 사진을 제대로 담지 못했습니다. 아마 올해 여름에도 고추말리기 사진을 담기란 퍽 어려운 노릇이 아니랴 싶습니다. 나 혼자 좋다고 나 혼자 좋을 일을 할 수 없으니까요. 내 일을 챙긴다면서 식구들 일을 뒷전으로 미룰 수 없으니까요. 함께 살아가는 살붙이라 한다면 함께 웃고 울 만한 일거리와 놀거리를 찾아야 알맞고, 함께 느끼고 함께 보고 함께 헤아리며 함께 부대끼는 삶이어야 조촐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곰곰이 돌아봅니다. 혼인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았을 때에는 혼자서 신나게 골목마실을 하고 책방마실을 했겠지요. 사진은 더 많이 찍고 책은 훨씬 많이 읽으며 살아가겠지요. 훌륭하다 싶은 사진을 대단히 많이 일구어 놓았을 테고, 아름답다 싶은 책을 꽤나 많이 머리속에 담고 있었을 테지요. 틀림없이 이와 같이 꾸리는 삶은 이와 같이 꾸리는 삶대로 뜻이 있고 값이 있습니다. 내 꿈을 한껏 펼치면서 내 마음을 그지없이 드높일 수 있으니 알차고 빛나는 삶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알차고 빛나는 삶은 누구와 함께 알차거나 빛날 삶이 될는지요. 내 이웃과 동무 앞에서 어떻게 알차거나 빛날 삶으로 아로새길 수 있을는지요.

 아름다운 사진은 참말로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멋진 사진은 더없이 멋진 사진입니다. 훌륭한 사진은 그지없이 훌륭한 사진입니다. 그러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고 멋이란 무엇이며 훌륭함이란 무엇인가요. 한 사람이 사랑할 삶에서 우리가 곱다시 껴안으면서 즐기고 나눌 아름다움과 멋과 훌륭함이란 무엇인가요.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우리 바깥에 있을는지요. 멋이란 노상 머나먼 곳에 닿아 있을는지요. 훌륭함이란 홀로 거룩하게 이루어 내는 일인지요.

 요사이 우리 옆지기가 뜨개질을 익히고 있습니다. 얼마 앞서는 바느질로 아이 인형을 셋이나 만들더니, 이제는 뜨개질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옆지기가 바느질을 하든 뜨개질을 하든, 한 번 손에 붙잡으면 아침부터 밤까지 이 일에 꼬박 매달립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이 밥때이든 무엇이든 하나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지 않더라도 밥차림이나 다른 집살림은 아빠 몫이었지만, 아주 깊이 빠져들며 바느질을 하고 뜨개질을 합니다. 처음에는 엄마한테 막 달라붙던 아이도 이제는 어느새 받아들였는지, 엄마가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면 옆에서 꽤 오랫동안 혼자서 책을 보고 쌓기놀이 들을 합니다. 어제는 새벽 세 시 반까지 뜨개질을 하던데, 한창 뜨개질 맛을 들이고 익힐 때이니 늦도록 마음이 끌리는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 또한 글쓰기에 폭 빠지는 때라면 새벽 세 시이든 네 시이든 오래오래 글 하나를 붙잡으며 갈고 다듬고 깎고 여미곤 합니다. 누가 읽어 주건 말건 저 스스로 마음에 들 때까지 손질하고 손보고 고쳐씁니다. 한 사람이 읽어 주든 백 사람이 읽어 주든 그다지 마음 기울이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흐뭇할 만한 글이어야 하고, 저 스스로 열 해 뒤에도 스스럼없이 사람들 앞에 내보일 만한 글일 뿐 아니라, 제가 읽어서 참 좋다고 느낄 글이 될 때까지 내처 붙잡습니다.

 지난 1998년부터 사진을 찍어 오면서, 제 사진감 몇 가지를 놓고 새로 찍고 거듭 찍고 또다시 찍고를 되풀이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사진책 몇 권을 묶을 만큼 꽤 대단하거나 멋진 사진은 수두룩하게 있으리라고. 그러나 저로서는 사진책 몇 권을 묶을 만한 대단하거나 멋진 사진을 찍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돈이 철철 흘러넘쳐서 마구잡이로 찍지는 않습니다. 제가 찾아다니는 헌책방이 좋고, 제가 살고 있는 골목길이 좋으며, 제가 타고다니는 자전거가 좋은 한편, 옆지기와 함께 키우는 아이가 좋으니까 사진을 찍습니다. 그저 또 찍고 거듭 찍고 새로 찍습니다. 좋기 때문입니다. 늘 마주하면서 좋은 느낌이기에 ‘오늘은 이런 좋은 느낌이 있네’ 하면서 새삼 찍습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언제나 곁에 있는 이웃인 헌책방이고 골목길이고 자전거인 까닭에 ‘이날은 이날대로 이런 느낌이 반갑네’ 하면서 신나게 찍습니다. 웃는 아이이든 자는 아이이든 땡깡 부리는 아이이든 밥 먹는 아이이든 조용히 책읽는 아이이든, 어느 모습이든 좋은 우리 아이 삶이기에 줄기차게 사진을 찍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도 참으로 좋은 책이라고 느끼니까 오래오래 읽습니다. 나와 옆지기한테 좋고, 나중에는 아이한테도 좋으리라는 느낌을 받으니 차곡차곡 갈무리를 해 놓습니다. 서른여섯 해 삶에서 열여덟 해 삶을 책사랑으로 걸어온 길이었기에 저한테 참 좋은 이 책을 혼자 간직하기에 아쉬워 동네 도서관을 열어 놓습니다.

 좋은 느낌을 담아 좋은 말을 나누고, 좋은 말을 나누며 좋은 뜻을 북돋웁니다. 좋은 뜻은 좋은 길로 이어지며, 좋은 길은 좋은 삶으로 마무리됩니다.


 (2) 좋은 책 하나란


 《청빈의 사상》이라는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판이 끊어진 지 꽤 오래된 책이라 헌책방에서 만났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 해 만에 겨우 다시 한 권 만났을 때에 기쁘게 장만한 다음 이웃집에 선물해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헌책방마실에서 이 책이 다시 눈에 뜨이면 기쁜 마음으로 장만해서 제 둘레 고운 이웃한테 선물해 줄 생각입니다.

 이웃이나 동무한테 선물해 주는 책이란, 저 스스로 대단히 좋은 책이라고 느끼는 책이어야 합니다. 아니, 저 스스로 대단히 좋은 책이라고 느끼지 않고서는 책 선물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먼저 맛을 보거나 맛을 어느 만큼 알지 않고서는 술이든 떡이든 밥이든 선물할 수 없습니다. 제가 먼저 기쁘게 읽거나 줄거리를 어느 만큼 알지 않고서는 책을 선물할 수 없습니다.

 《청빈의 사상》은 일본사람 나카노 코지 님이 쓴 책입니다. 일본 문화와 역사와 철학에 눈길을 두는 외국사람한테 ‘일본이라는 나라는 예부터 이러한 넋과 얼을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레 지키고 보듬으면서 이어왔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마련했던 강연을 갈무리해서 엮은 책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하면서 맑고 아름다운 일본사람 넋’을 다루는 책 《청빈의 사상》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일본이라는 나라는 없는 역사를 억지로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는 자그마한 아름다움 하나를 고맙게 건사하면서 알뜰히 빛내는 나라’라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일본과 이웃한 한국이라는 나라는 ‘싸움을 벌여 땅뺏기를 해 온 발자취가 역사인 줄 잘못 알고 가르치며 이야기하는’ 어설픈 나라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적을 돌아보면, 또 이 나라 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쓰는 교재를 살피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임금님 이름이나 무슨무슨 굵직한 사건사고를 가르칠 뿐입니다. 궁중음식 역사는 있어도 서민음식 역사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궁궐 안쪽에서 오가던 이야기를 놓고는 숱한 연속극을 찍지만, 궁궐 바깥쪽에서 살아가던 이야기를 놓고는 아무런 연속극이 없습니다. 지난날 이 나라에 농사꾼이 95%가 넘었고 고작 5%가 안 되는 이들이 양반이요 신하요 뭐요 하고 했다지만, 우리들은 95%가 넘는 여느 사람들 발자취란 아예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95%가 넘는 농사꾼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고려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를 아우르는 역사책 가운데 임금과 신하와 궁궐 둘레 이야기 아닌 이야기를 몇 가지나 적바림해 놓았습니까. 아무런 기록이 없으니 아무런 역사가 없다 여기고, 아무런 역사가 없다 여기니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무 배울거리가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음고리는 2010년에 돌아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문이며 방송이며 책이며 온통 ‘있는 사람’ 이야기일 뿐입니다. ‘없는 사람’이나 ‘앗긴 사람’이나 ‘눌린 사람’이나 ‘밀린 사람’들, 그러니까, 이 나라를 맨 밑바닥에서 받치면서 꾸려 나가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는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끝없는 경쟁과 싸움과 순위와 등수와 서열과 연고와 학연과 씨줄과 학벌과 재산과 주식과 아파트와 자가용과 정치와 경제와 스포츠만 있는 듯 시끄럽습니다. 여느 사람 여느 살림과 여느 골목동네 여느 웃음꽃 눈물꽃에는 아예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청빈의 사상》을 쓴 나카노 고지 님은 일본 옛사람 입을 빌어 이야기합니다. “죽은 뒤에 누구에게 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살아 생전에 주는 것이 좋다(33쪽).” 누구보다도 당신 스스로 일본사람들이 너무 바보스레 살아가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한국사람이 아닌 일본사람들한테 일본 옛사람 손을 빌어 글을 적바림합니다. “저축하고 착취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나누어 갖는 것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린다(204쪽).”

 자가용을 몰지 않는 사람들만이 서민은 아닙니다. 그러나 큰차가 아닌 작은차를 몰고 있다 해서 서민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서민, 곧 ‘낮은자리에 있는 가난한 사람’은 자가용이 아닌 두 다리를 믿습니다. 기계가 아닌 두 손을 믿습니다. 컴퓨터나 책이나 신문 같은 매체가 아닌 내 머리를 믿습니다. 문학이나 예술이나 종교나 체육이 아닌 내 가슴을 믿습니다.

 일본 옛사람들만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나누어 오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한국 옛사람들 또한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나누어 왔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 옛사람 가운데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 무슨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나누어 오고 있었는지를 읽어낼 만한 눈길과 눈썰미와 눈결과 눈매와 눈높이를 추스르는 오늘날 한국사람은 몹시 드물지 않느냐 싶습니다.

 똑똑하고 엄청난 생각이라고 나쁘지 않습니다. 잘나고 멋스러운 생각이라고 못마땅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로서는 똑똑한 생각보다는 티없는 생각이 반갑습니다. 잘난 생각보다는 어여쁜 생각이 반갑습니다. 돈 잘 버는 생각보다는 착한 생각이 반갑습니다. 잘 알려진 이름값 높은 생각보다는 수수한 생각이 반갑습니다. 진보와 개혁과 보수라는 금을 긋는 생각보다는 맑은 생각이 반갑습니다. 부자 생각보다는 가난한 생각이 반갑습니다. 반갑고 고마운 가난한 생각을 고이 섬기며 내 삶으로 삭이면서 즐기고자, 우리 집 살림은 늘 가난뱅이 살림입니다.


 (3) 책상맡에 놓고 늘 들추는 책이란


 책상맡에 놓고 늘 들추는 책이라 한다면 《청빈의 사상》쯤은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마음이 흔들리거나 어수선할 때에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벗님으로 삼을 만한 책이라 한다면 《청빈의 사상》 눈높이는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 책이 목숨을 얼마 잇지 못하고 판이 끊어진 대목이 몹시 안타깝습니다만, 찬찬히 헤아리면 우리 나라에서 이 같은 맑고 아름다운 책이 널리 잘 팔리기란 아주 힘들구나 싶습니다. 한국땅에서 이 책은 아주 마땅하게도 판이 끊어질 만한 책입니다. 한국땅에서 이 책은 매우 마땅하게도 쉽게 잊혀지고 제대로 안 읽히며 깊이 돌아보고자 하는 사람조차 나오기 어려운 책입니다.

 그래도 《즐거운 불편》이나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같은 책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기도 하는 한국땅입니다. 아쉽게도 한국사람 손으로는 아직 《청빈의 사상》이나 《즐거운 불편》이나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같은 책을 써내지 못합니다. 우리한테는 아직까지 맑고 아름다운 생각이란 멀디먼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눈물을 삼키고 콧물을 훌쩍이면서 《청빈의 사상》을 되읽고 곱씹습니다. (4343.3.10.물.ㅎㄲㅅㄱ)


[25, 26, 32, 33쪽] 묘슈는 간탐하여 부귀한 자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다. 간탐을 미워한 나머지, 그녀는 부귀한 자는 반드시 어딘가 간탐한 점이 있지 않는가를 의심하고, 가난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바귀하다는 그 자체를 죄가 많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 묘슈는 빈곤 때문에 생기는 불행보다도 부귀가 사람의 마음에 끼치는 해독을 중시하고, 사이비 인간이 되어 부귀한 것보다는 가난하지만 인간다운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 듯하다 … 마음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저택을 지니면 그 유지ㆍ관리에 많은 사람을 쓰게 되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종일 마음을 괴롭혀야 한다 … 사람은 소유가 많을수록 마음을 빼앗기고, 그리하여 그 마음은 재물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37, 42, 43, 84쪽] 중요한 것은 돈벌이가 아니다. 칼의 감정에 관한 한 자기들이야말로 으뜸가는 권위자라는 긍지와 자부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겼으며, 돈에 눈이 멀어서 그 긍지와 자부를 손상시키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내재하는 규율이다 … 일본인은 이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전에는 그들도 남들 앞에서 금전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주 멸시하고, 무엇보다도 명예를 존중하며, 고결하게 행동하는 것을 존중했다 … 일본이 세계에 자랑해야 할 것은, 이 나라가 경제 대국이 되었다거나 수출 대국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한 것, 즉 ‘무형의 인격’에 관한 사항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 료칸은 남들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지 마음쓰지 않았다. 바로 그 안에 삶의 충족이 있었으므로, 그것이 선경이었는지도 모른다.

[59, 176쪽] 먹을 것을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포식의 시대에는 먹을 게 있다는 그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굶어죽기 직전의 상태, 즉 끼니를 거르기 일쑤일 때 쌀 석 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 그저 가난한 생활을 했다는 것뿐이라면 아무도 그 사람에게 마음이 쏠리지는 않는다 … 일단 소유욕에 빠지게 되면 사람은 소유의 증대에만 관심을 빼앗기고 금전의 노예가 되어, 그밖의 인간의 중요한 일들에 마음이 미치지 못한다.

[75, 83, 88∼89쪽] 고독하지만 자기 뜻대로 살며,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자기 혼자만의 삶을 보낸 것이다 … 료칸에게는 시와 와카를 짓고 좌선을 하고 불경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 역시 속세를 떠난 세계에서 노는 방도였다 … 말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줄 뿐이며, 오직 그것만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그(료칸)는, 지나치게 자신을 책망하는 이에게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입을 다물며, 알려고 하는 이에게는 ‘공을 쳐 보려 무나’라고 다정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 료칸은 결코 설교 따위를 하지 않고, ‘오로지 도의로 중생을 감화시키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92, 102, 105, 108쪽] 요즘 쏟아져나오는 하찮은 소설을 읽기보다는 옛날의 그러한 일화집을 읽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 문인화는 정신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교가 제아무리 능한 자일지라도 속된 마음이 있으면 그림에 그것이 나타났다 … 예술에 정진하는 자에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마음이 있는 한, 참된 예술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 결국 시기, 즉 장삿속을 떨쳐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다다른 높은 경지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스스로 미(美)라고 믿는 바를 추구해서 그것을 행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요즘 그림은 옛것에 미치지 못한다 … 옛 학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고, 요즘 학자는 남을 위해서 한다.

[119, 132, 145쪽] 단순히 글귀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마음가짐에 이어지는 것이다 … 아케미는 이러한 참된 즐거움은 벼슬살이하면서는 이루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아무도 의지하지 않는 가난한 독립독보 생활에만 있음을 익히 터득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풍아는 그런 곳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 진실의 인식에는 시대가 없다.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닌 것이야말로 문화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이다 … 그러나 좌절한 체험이 없는 자는 평생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137, 139, 142, 224쪽] 죽음을 미워한다면 그 기쁨을 하루하루 확인하고 살아 있음을 즐겨야만 한다 … 사람이 모두 이와 같이 살아 있는 지금이 즐겁지 않은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세상일에 바삐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일에 마음을 빼앗겨 가장 솢우한 것을 망각한 점에서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 평균 수명이 얼마라는 식으로 자랑스럽게 늘어놓고는 하는데, 그것이 다만 육체적 생명의 연장만을 의미한다면 도대체 거기에 어떤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 사이교도, 바쇼도, 뛰어난 시인으로서의 언어를 통해 생에 대한 감각을 잘 표현하였지만, 단순히 언어를 구사하는 기술에 능숙했던 것만은 아니다. 언어 이전에 이 세상에는 자기 및 타인, 다른 생물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평소부터 가슴깊이 느끼고 있었던 사람들로, 그 깨달음의 깊이가 우리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147, 148, 152, 156쪽]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그 길을 걸어다닐 때 느낀 그의 행복감은, 이것이 마지막 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참다운 문예 작품은 대부분 생애의 마지막을 보는 눈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고 있다 … 자못 바쇼다운 말이며, 그는 평상시 한 작품 한 작품에 모든 힘을 기울여서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만을 지어 왔다는 사실의 표명이었으리라 … 마음의 빛깔이 아름답지 않으므로 표현으로 잔재주를 부리려 한다 … 나중에 반복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ㄷ르을 때와 단 한 번뿐이라는 각오로 들을 때는 듣는 사람의 주의력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163, 189, 215, 226쪽]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새로 돋은 푸른 잎 어린 잎 등은 모든 사람이 감탄하며 바라보는 바이지만, 그것을 ‘고귀하게 느꼈다’는 말로 표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시가를 읊조리기 위해 여기저기 명승을 찾아다니는 어설픈 풍류인의 마음가짐으로는 도저히 이런 식으로 순수하게 조화된 마음을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 이제는 오히려 ‘자연 보호’라든가 ‘환경 보존’이라는 것을 부르짖게 되었는데, 자연을 친구로 대해 왔던 선인들이 보기에 이것은 애당초 근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 이 이야기는 작은 새들에게의 설교라고 하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성 프란체스코가 평소에도 언제나 그와 같은 느낌으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 아마추어는 노래나 시구가 ‘말을 꾸며 내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데, 시가란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풍류를 간직하고 있는’ 그 마음 상태야말로 시가의 전부이다, 라고 사이교나 바쇼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236, 238∼239쪽] 지금도 서민이 모여 사는 도쿄의 어느 지역에 가 보면 뜰이 없는 집에도 화분이나 재배판에 작은 나무와 꽃을 심어 처마 끝에 놓아 두고 조석으로 물을 주는 광경을 볼 수 있다 … 환경보호라든가 사회 생태학 운동마저도 어머니들에게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누가 말하지 않아도 솔선하여 그것을 실천해 왔던 것이다. 청빈이란 단순히 가난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생명을 같이하고 만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240, 249, 256, 264쪽]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하늘의 은혜’라고 생각하며 단순히 금전으로 살 수 있는 상품으로만 간주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야말로 문화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이 아닐까 … 그렇게 터무니없이 쓰다 버리는 낭비 사회가 출현하고 있어도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풍요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라는 실감이 거의 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 지금 일본은 웬일인지 도처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규정이 만들어져 있어 생활, 교제, 복장, 행동에 틀이 형성되어 있는 것같이 보인다. 결혼식에서 사회자가 재촉하는 대로 손뼉도 치고 일어섰다 앉았다 하고, 사진찍는 것이 법으로 정해진 것도 명령하는 것도 아닌데, 그에 따르지 않으면 소외당한다는 규정이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다 … 자동차 따위를 제아무리 많이 수출한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조금도 일본의 자랑이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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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돼지 생명의 숲에서 길을 묻다 1
조슬린 포르셰 & 크리스틴 트리봉도 지음, 배영란 옮김 / 숲속여우비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41 ― 갇힌 삶, 갇힌 사람, 갇힌 밥
 : 조슬린 포르셰,크리스틴 트리봉도, 《우리 안에 돼지》



- 책이름 : 우리 안에 돼지
- 글 : 조슬린 포르셰,크리스틴 트리봉도
- 옮긴이 : 배영란
- 펴낸곳 : 숲속여우비 (2010.2.5.)
- 책값 : 7000원


 (1) 밥, 고기, 책, 삶


 스물한 달째를 맞이하는 우리 집 아이는 밥을 참 안 먹습니다. 왜 이렇게 밥을 안 먹을까 하고 곰곰이 헤아려 보면, 아이 젖떼기를 억지로 하지 않아서일 수 있고, 아이가 밥을 그닥 안 좋아할 수 있습니다. 젖을 먹으면 밥을 도무지 안 먹으려 합니다. 엄마가 젖을 안 주고 한참 굶겨야 비로소 밥을 날름날름 먹습니다. 아이 스스로 밥 있는 데로 쪼르르 달려가 손으로 조금씩 떠먹곤 하고요.

 아이는 저 스스로 몹시 배고플 때에는 밥이나 다른 먹을거리를 거의 가리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그리 배고프지 않으면 이도저도 받아먹을 생각이 없이 고개를 홱 돌리거나 아예 밥상 쪽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뒷걸음이나 옆걸음으로 슬금슬금 물러나서 옆이나 뒤를 보며 실쭉샐쭉 웃습니다. 이러면서 물만 잔뜩 마십니다. 날 때부터 이런 몸이었는지, 엄마와 아빠한테서 이런 모습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집은 하루에 두 끼니만 먹기는 하지만 그렇게 물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데.

 그제 저녁 세 식구가 오랜만에 전철을 타고 부평으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두 아이를 기르며 육아휴직을 하는 분 댁에 놀러갔습니다. 이분은 올 삼월에 학교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다시 한답니다. 이러면서 이분 옆지기가 육아휴직을 받아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로 했다는군요. 그런데 늘 바깥일이 많아 집에 늦게 들어와 버릇하는 아저씨가 하루 내내 집에서 아이하고 씨름하고 복닥이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얼마나 견디실는지 걱정입니다. 여자라고 아이키우기를 잘하도록 타고나지 않았고, 남자라고 아이키우기는 여자한테 떠맡기며 돈만 잘 벌어오면 되는 노릇이 아닐 터인데, 육아휴직을 받는다고 하루아침에 사뭇 달라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아파하고 힘들어하면서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눈여겨볼 수 있다면, 아이키우기란 밖에서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벌 때와 견줄 수 없이 보람이 있고 아름다우며 거룩한 줄을 살갗으로 느끼시리라 믿습니다. 세상 모든 목숨은 몸을 살찌우는 밥으로 숨을 잇는 한편, 마음을 북돋우는 사랑으로 넋을 가꾸기 때문입니다.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늘 가까이 어울리며 껴안거나 보듬는 따순 손길이 있어야 씩씩하고 튼튼하게 큽니다. 어른이 된 몸이라면 더 자라지 않으나, 더 자라지는 않더라도 살결과 몸뚱이가 싱그러우려면 좋은 먹을거리뿐 아니라 좋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어제 저녁 서울에서 우리 집으로 나들이를 오신 분이 있습니다. 손님맞이를 하려고 집에서 걸어 오 분쯤 되는 곳에 있는 가톨릭생협에 찾아가서 불고기 한 근과 남새만두 한 봉지를 장만합니다. 고기 장만은 무척 오랜만입니다. 지난해 여름쯤 한 번 장만해 집에서 해먹은 뒤 거의 열 달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식구는 가톨릭생협에서 푸성귀하고 곡식하고 두부하고 국수만 사먹지, 다른 먹을거리는 사먹지 않습니다. 동네 저잣거리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고기가 당기는 일은 드물고, 굳이 고기를 먹을 생각을 안 합니다. 나물 반찬에 누런쌀로 지은 밥을 파는 곳이 있으면 더없이 좋겠으나, 이러한 밥집을 찾기란 퍽 힘듭니다. 혼자 살 때에도 고기 반찬은 아주 가끔 해먹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술자리에서 고기 안주가 너무 자주 차려지니, 여느 밥자리에서는 고기 없는 밥상을 바라지 않느냐 싶습니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 어울리다 보면 으레 ‘고기집 가자’는 소리가 나오며, 길가 밥집들은 하나같이 고기집투성이입니다.

 얼은 고기를 물에 담가 녹인 다음 당근과 양파와 고구마를 썰어 스탠냄비에 물 조금 붓고 익힙니다. 살짝 익을 무렵 다 녹은 고기를 넣고 소금과 설탕을 골고루 뿌린 뒤 버섯을 뜯어서 얹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마련해 주신 불고기는 양파에 당근 조금 넣고 국물을 조금 많이 내어 밥을 비비거나 말아 먹을 수 있게끔 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하는 불고기 또한 국물로 밥을 비비거나 말 수 있는데, 지난날과 대어 보면 양파며 당근이며 다른 남새를 꽤 많이 넣습니다. 풀밭에 고기 한 점 있는 투로. 이렇게 불고기를 마련해 먹으면서도 고기 한 점에 반드시 밥을 한 숟가락 퍼서 함께 먹습니다. 사람들과 고기집에서 어울려야 할 때에는 노상 밥 한 그릇을 먼저 시키어 밥과 함께 먹거나 집에서 싸 들고 온 밥을 꺼내어 같이 먹습니다. 고기만 먹으면 욕지기가 나오고 이빨이 아프기 일쑤입니다. 고기를 먹은 뒤에는 으레 속이 더부룩합니다. 그런데, 이런 제 배속은 고기 탓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고기보다 풀과 곡식이 제 몸에 한결 어울린다고 여길 수 있는 한편, 풀과 곡식이라 하여도 농약과 비료로 키운 풀과 곡식이 아닌 거름과 땀으로 일군 풀과 곡식일 때가 몸에 잘 받고 즐겁습니다. 시골 농사꾼이 손수 기르던 닭과 염소를 먹어 본 적이 있는데, 이러한 닭고기와 염소고기는 매우 부드러우면서 입맛을 돋우고 몸에 잘 받았습니다. 공장에서 사료와 항생제로 한꺼번에 잔뜩 키워서 내보내는 닭고기는 양념을 아무리 맛깔나게 하더라도 제 입에는 맛있지 않으며 여러 날 속이 메쓰껍습니다.

 아이한테 능금을 사서 먹일 때이든 다른 과일을 장만해서 먹일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여느 저잣거리에서는 좀더 값싸고 굵직한 과일이 있으나, 이와 견주어 조금 더 비싸고 못생긴 과일을 생협에서 사다 먹입니다. 작고 못생겼다 할지라도 비료와 농약 아닌 거름과 땀으로 일군 과일이 몸에 즐겁게 받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도시에서 살아가며 내 몸을 살찌우는 먹을거리를 장만하려 할 때에는 나한테 먹을거리를 대어 주는 사람들이 제 보람을 누릴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책방마실을 하며 책을 장만할 때에 출판사에서 매긴 책값을 고스란히 치르며 장만하고자 하는 마음이니, 먹을거리를 장만할 때에도 알맞게 값을 치러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더 값싸게 파는 책방을 뒤적거리기보다 내 넋을 살찌우는 책장을 넘기고 껴안는 데에 품을 들이고 싶습니다. 더 에누리를 해 주는 인터넷을 알아내기보다 내 얼을 북돋우는 책을 살피는 데에 시간을 바치고 싶습니다.

 손님하고 마주앉은 자리에서 옆지기가 이야기합니다. 요즈음 좋은 커피를 갈거나 내려받아 마시는 사람이 많은데, 커피알만 좋은 녀석으로 갖추고 물은 제대로 걸러서 마시지 못한다고. 제아무리 유기농 커피라 할지라도 수도물에 타서 먹을 때하고 ‘맑은 물’에 타서 먹을 때는 맛이 크게 다르다고.

 그러고 보면 맑고 시원한 물은 두 손으로 떠서 맹물로 마셔도 참 맛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늘 시원하고 맑은 물은 다른 아무것을 안 타더라도 온몸에 새숨을 불어넣어 줍니다.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를 넘기면 물 이야기가 사이사이 나옵니다. 제아무리 밥을 맛있게 지어서 초밥으로 빚는다 하여도 ‘밥을 짓는 물’이 어떤 물인가에 따라 밥맛이 다르다고. 한 걸음 나아가 ‘처음 농사를 짓던 곳에 흐르는 물이 나락에 어떻게 스며들었는가’에 따라 깊은 밥맛이 다르다고. 마땅한 노릇이지만, 맑은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를 잡아 저밀 때하고 지저분해진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를 잡아 저밀 때에는 맛이 다릅니다. 맛뿐 아니라 우리 몸에 스며드는 숨 또한 다를 테지요.

 어쩔 수 없다지만 우리 삶터는 물다운 물을 언제 어디에서나 시원하고 맑게 마실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쩔 길 없다지만 우리 터전은 밥다운 밥을 언제 어디에서나 즐겁고 배불리 먹을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 탓만이 아닙니다. 국가보안법 탓만이 아닙니다. 새마을운동 탓만이 아닙니다. 고속철도와 뉴타운과 아파트 탓만이 아닙니다. 독재정권 탓만이 아니며, 무엇보다 이명박 대통령 탓만이 아닙니다.


 (2) 작은 책에 담은 큰 이야기


 《우리 안에 돼지》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책을 읽습니다. 1인출판사 ‘숲속여우비’에서 나온 세 번째 책입니다. 숲속여우비 출판사는 지난해에 《엄마가 사랑해》하고 《라니아가 떠나던 날》 두 권을 펴냈고, 올해에 《우리 안에 돼지》를 펴냈습니다. 《엄마가 사랑해》는 나라밖으로 입양된 한국 어린이 삶을 담은 책이요, 《라니아가 떠나던 날》은 노동착취로 푸른 삶을 잃는 어린이 발자취를 담은 책이며, 《우리 안에 돼지》는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으며 사람 먹을거리 또한 엉터리가 되는 슬픔을 담은 책입니다. 세 가지 책 모두 어린이 눈높이에 걸맞아, 아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읽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세상을 속깊이 들여다보도록 이끌어 주는 줄거리요, 어른들이 우리 세상을 차분히 돌아보도록 돕는 짜임새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터에서 어린이는 어린이다움을 건사하면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이 나라 기득권 사람들은 초등학교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며 다시 들썩이거든요. 한자 하나만으로 아이들 삶이 팍팍하지는 않습니다. 숱한 짐덩이를 아이들 어깨에 얹은 어른들은 한자라는 또다른 짐덩이를 아이들 어깨에 얹으려 하니 더더욱 팍팍해집니다.

 정작 아이들한테 베풀거나 나눌 손길이란 지식조각이 아닌 사랑이지만, 이 나라 기득권 사람들은 아이들한테 사랑 한 줌 쥐어 주려 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마다 억대가 넘는 돈을 들여 영어교실을 짓고 영어강사를 부르고 영어교재를 만들어 팔며 장사속 키우는 일로도 모자라 또다른 장사속을 불러들이려 합니다. 배움다운 배움하고 동떨어지는 학교입니다. 배움다운 배움을 생각하지 않는 교사이고 부모입니다.

 더 많은 교과서가 아닌 더 열린 운동장이어야 합니다. 더 많은 시험이 아닌 더 싱그러운 학교 둘레 자연이어야 합니다. 더 많은 지식조각이 아닌 더 열린 가슴이어야 합니다. 더 높거나 이름난 학교가 아닌 더 따순 손길이어야 합니다.

 시늉이 아닌 참다운 얼거리로 ‘비장애 어린이와 장애 어린이가 함께 배우는 터전’을 어린이집일 때부터 마련하여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두루 이어지는 틀을 짜야 합니다. 지식산업과 예체능산업만 키우는 교육 시설과 제도가 아닌, 저마다 착한 마음을 다스리며 아름다운 넋으로 어우러지는 세상을 이루는 튼튼한 한 사람으로 이끄는 한마당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 비좁은 우리에 갇혀 있는 암퇘지들의 사진이 그렇게 예쁘게 나올 것 같진 않네요. 하지만 우리 돼지들도 쥘리앙네 염소들처럼 그렇게 바깥에서 키운다면, 틀림없이 염소들 못지않게 예쁜 모습으로 사진이 찍힐 거예요(21쪽).”라는 대목을 여러 차례 곱씹어 봅니다. 돼지우리에서 냄새가 나서 싫다고 하는 사람이 많으나, 돼지우리에서 냄새가 나도록 하는 이란 바로 우리들입니다. 더 값싸고 더 많은 고기를 바라는 우리들이 돼지들 스스로 싫어하는 냄새 나는 돼지우리를 만들고 맙니다. 더 값싸고 더 많은 고기를 바라는 우리들인 까닭에 스물하루를 거쳐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가 무럭무럭 자라 중병아리가 되었다가 어른 닭이 되도록 하지 못하게 가로막은 다음, 너덧새만에 부화기에서 알을 깨도록 하고 갖은 항생제와 사료를 먹여 고작 한 달이 안 되는 때에 ‘어른 닭으로 만들어’서 닭고기로 팔아치우도록 만듭니다.

 병아리에서 닭이 되는 삶고리가 아닌, 한 달이 안 되는 나날에 고기닭이 되어 버리는 공장입니다. 풀밭을 뒹굴며 땅을 파고 놀면서 통통하고 예쁘장하게 자라는 돼지로 보내는 삶자락이 아닌, 좁은 시멘트바닥에 가두어 하루빨리 살을 디룩디룩 찌워 얼른 팔아치우는 돈셈을 하도록 내모는 공장입니다. 곱고 튼튼하고 착하고 씩씩하게 자랄 수 있는 어린이가 아닌, 어릴 때부터 더 빨리 더 많은 지식을 쌓아 더 애늙은이가 되어 버리게 한 다음, 더 이른 나이에 더 연봉 많은 큰회사에 사무직으로 일해야 하는 성과급 기계가 되도록 내모는 한국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모든 풀과 고기에 우리와 같은 목숨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이웃과 동무가 나와 같이 고운 목숨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살피지 않습니다. 나날이 더 갈라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입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한국 노동자와 이주노동자입니다. 계급이 있는 우리 사회이며, 신분이 뿌리깊은 우리 나라입니다. 너무 바쁘고, 참으로 바쁘며, 더없이 바쁜 우리 겨레입니다. 고요한 아침나라라는 말은 벌써 옛말일 뿐 아니라, 이러한 말을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시끄러이 밤을 새는 나라인 한국이요, 서로서로 더 빨리 많이 크게 누리려고만 하는 한국입니다. 나눔을 잊거나 잃고, 어깨동무를 모르거나 모르쇠이며, 두레를 버리거나 내치는 삶입니다.

 《우리 안에 돼지》라는 작은 책은 우리 안에 갇힌 돼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책을 덮으면서 가만히 헤아려 보면, 정작 우리 안에 갇힌 짐승이란 돼지가 아닌 사람입니다. 스스로 우리에 갇히려 하는 사람이고, 서로서로 우리에 가두려 하는 사람입니다. 나 스스로 갇히고 내 이웃과 동무를 가두고 있습니다. 너른 들판이 아닌 쇠우리에 갇히고 가둡니다. 푸른 하늘이 아닌 시멘트우리에 갇히고 가둡니다. 깊고 맑은 바다가 아닌 돈우리에 갇히고 가둡니다.


 (3) 작은 책 작게 읽기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은 대목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되읽으면서 생각을 가누어 봅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으나 누구도 쉽게 알고자 하지 않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새삼 느낍니다. 누구라도 꼼꼼히 알고 느끼며 우리 삶을 바꿀 수 있으나 누구라도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슬픔이 담겨 있다고 거듭 느낍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책에 갇힌 지식이 아닌 몸에 배는 슬기로 가다듬는 사람이 하루에 한 사람씩 늘어날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이러한 줄거리를 책에 머무는 지식이 아닌 삶에 녹아드는 넋으로 되새기는 사람이 한 해에 한 사람이라도 새로 태어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4343.2.26.쇠.ㅎㄲㅅㄱ)


[14, 15, 30, 55쪽] 축사 안에는 먼지가 많습니다. 구석의 작은 창문으로 햇살이 미끄러져 들어올 때면 날아다니는 먼지가 다 보입니다 … 돼지의 몸은 창살 안에 갇혀 있으며, 십여 개의 칸막이로 줄지어 늘어선 공간에는 암퇘지 십여 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돼지들이 벌을 받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마치 감옥처럼 보였거든요 … 쥘리앙 말이 돼지가 움직이지 못해야 몸집이 빨리 불어나고, 그럴수록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거라고 하더군요 … 사실 돼지 축사 건물 전체가 자연과 차단된 구조랍니다. 마치 이 세상에 자연이 없는 것처럼, 공기도 식물도 해도 없는 상태에서 동물을 사육합니다. 그런 것들이 동물에게 해롭기라도 한 양 말이죠.

[16, 23쪽] 아저씨는 돼지들을 보고 나온 뒤에는 으레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돼지들 때문에 짜증을 내는 것이냐고 물으니 아저씨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어요. “돼지는 그저 돼지일 뿐이야. 네 발 달린 햄이라고 생각하면 돼. 햄 좋아하니? 그럼 멀리 가서 찾을 것 없다.” … 축사 사무실에는 돼지들에 관한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는 컴퓨터가 한 대 있습니다. 컴퓨터에는 암퇘지들이 무엇을 먹는지, 언제 새끼를 가지는지, 어떻게 가지는지 따위의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 그런데 컴퓨터는 암퇘지들을 알지도 못하고, 구별하지도 못합니다. 컴퓨터는 다만 수치만을 알고 있을 뿐이죠.

[17, 33∼34, 36쪽] 돼지의 분만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은 ‘산파’가 아니라 ‘사육자’입니다 … 그날 이 돼지는 새끼를 낳을 때의 고통 때문에 온몸을 묶어 놓은 거였습니다. 아프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자칫 새끼들을 깔아뭉갤 수도 있거든요. 여기에서 중요한 건 암퇘지가 아니라 새끼들입니다. 사실 암퇘지는 죽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 암퇘지를 얼러 주고 다독여 줄 수도 있을 텐데, 그러기는커녕 입을 꽉 다물고는 마치 고장난 기계 다루듯 했습니다 … 두 사람은 어미 돼지의 몸에서 새끼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직접 만든 갈고리 같은 것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게 말을 잘 듣지 않자, 둘은 배를 갈래 새끼들을 빼낸 다음 암쾌지에게 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돼지는 죽었습니다.

[31, 40∼41, 66쪽] 내가 볼 때 어른들은 너무 바쁘기 때문에 ‘깊은 생각’이란 걸 할 겨를이 없어요 … 어른들은 텔레비전 앞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가만히 있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요 … 요즘에는 간호사들도 돼지 축사의 분만용 우리 같은 ‘아기 공장’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을 빨리 처리해야 돈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 끝도 없이 달리기만 하는 건 노동자들이지만, 정작 돈을 많이 버는 건 대규모 축산 공장의 업자들과 상인들이에요.

[59, 61쪽] 칸막이 우리는 썩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여기에 들어오면 돼지를 좋아하게끔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돼지 탓이 아닙니다. 온통 암흑천지에다 먼지투성이고 악취가 풍기는 칸막이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돼지들에게 무얼 바라겠어요 … 비좁은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돼지들은 너무 외로워 보였고 심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듯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돼지들과 잘 지낼 수 없는 걸까요?

[79, 81∼83쪽] 암퇘지들은 움직이고 싶어 하고, 다른 동물들과 함께 있어 싶어 합니다 … 암퇘지들은 미리 수퇘지에게서 채취한 정액으로 수정을 할 뿐, 수퇘지와 직접 교미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훨씬 더 빠르기 때문이죠 … “임신을 못하면 암퇘지로서는 끝인 거야. 실수란 용납이 안 돼. 먹이를 축내면서도 새끼를 못 낳는다면 그건 문제지 … 젊은 암퇘지가 한 번쯤 임신을 못할 수는 있어. 그런 건 괜찮단다. 그런데 늙은 암퇘지가 임신을 못한다면 그건 바로 도살장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손해가 얼마인지 아니? 온통 난리가 나는 거야. 우리에겐 판에 박힌 일이란다. 암퇘지는 새끼를 낳아야 해. 새끼를 낳지 못하는 암퇘지는 정상이 아니야.”

[89쪽] 나는 돼지들이 우리가 변화하기를, 우리가 조금 더 친절해지기를, 우리가 돌덩이같이 딱딱한 사람이 아니라 ‘가소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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