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척동의 밤 창비시선 71
유종순 지음 / 창비 / 198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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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3.12.21.

노래책시렁 384


《고척동의 밤》

 유종순

 창작과비평사

 1988.9.10.



  총칼을 휘두르면서 돈·이름·힘을 거머쥔 이들이 남긴 자취는 안 사라집니다. 이들이 벌인 모든 짓은 낱낱이 남아서 두고두고 돌아볼 수 있습니다. 총칼무리한테 맞서면서 새날을 그리던 사람들이 걸어온 길도 안 사라집니다. 이들이 한 모든 일도 오래오래 되새길 수 있습니다. 겉모습을 꾸민들 속낯이 안 바뀝니다. 입발린 말을 잔뜩 붙이면 오히려 민낯이 잘 드러납니다. 1988년에 나온 《고척동의 밤》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툭하면 “풍만한 여인”을 “안고 싶다”고 읊는 글자락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요? ‘저항문학’이 으레 쓰는 꾸밈말이라 여겨야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사슬살이를 하는 순이는 이렇게 빗대거나 꾸미는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돌이는 지난날 너나없이 으레 이렇게 글을 써왔습니다. 1970년에서 1980년을 지나고 1990년을 지나며 2000년을 지나는 사이에, 썩은 우두머리를 여럿 끌어내렸습니다. 그 뒤로도 고인물과 썩은물을 꾸준히 갈아치웁니다. 그런데 이제는 누가 고이거나 썩은 물인지 아리송합니다. 총칼질을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이 발자취에 남듯, 엉큼질도 고스란히 남게 마련입니다. “제임스 본드처럼 멋진 첩보원이 되어 마음에 안 드는 놈 총알 한 방 먹이기도 하”는 미움씨앗도 글일까요?


ㅅㄴㄹ


자유에 허기져 앓는 나도 꿈을 낳는다 / 거친 황토의 꿈을 낳고 / 미친 바람의 꿈을 낳고 / 풍만한 여인의 꿈을 낳고 / 탈옥수 정씨의 꿈을 낳고 (고척동의 밤/9쪽)


면회실 어머니의 주름진 미소 속에 지핀 / 젖은 눈망울에 미쳐 끝내 미쳐 / 밤이 새도록 울었읍니다 (독방에서/19쪽)


직녀여 / 그대를 안고 싶습니다 / 오작교 건너서 /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서 (獄中月令歌/28쪽)


제임스 본드처럼 멋진 첩보원이 되어 / 마음에 안 드는 놈 총알 한 방 먹이기도 하고 / 휴전선을 내 집 드나들듯 넘나들며 / 더러는 북쪽의 여인을 보듬어도 보고 / 그렇게 한바탕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한다 (獄中月令歌/30쪽)


누워서 밤을 파는 배고픔에 / 밤이면 자궁 깊숙이 가슴 깊숙이 박히는 / 불면의 못 / 첫사랑 아스라한 눈물은 / 한 평 반 양동의 밤을 적시고 / 사태기를 오르내리는 서울의 부처들이 / 이리저리 거덜난 몸뚱이를 헤아리며 / 깨달음을 꿈꾸고 있을 때 (양동 미스 서의 이야기 그것은/68쪽)


기름내 땀내투성이의 찌든 얼굴들을 쓰다듬기도 하고 / 청량리 오팔팔이나 서울역 건너 양동쯤에서 / 스무 해 전 잃어버린 순이를 만나 / 분노에 젖어 흠뻑 울기도 하면서 (비/72쪽)


《고척동의 밤》(유종순, 창작과비평사, 1988)


+


거친 황토의 꿈을 낳고 미친 바람의 꿈을 낳고 풍만한 여인의 꿈을 낳고

→ 거친 흙빛 꿈을 낳고 미친바람 꿈을 낳고 흐벅진 가시내 꿈을 낳고

9쪽


저 담벼락 속 기다림만 남은 지친 신음소리로부터 오지

→ 저 담벼락에 기다리다 지친 끙끙소리에서 오지

13쪽


100촉 백열전등 희뿌연 불면을 밀어내고

→ 100줄 노란불빛 희뿌연 뜬눈을 밀어내고

→ 100빛발 노란불 희뿌옇게 뒤척이다가

14쪽


집사람의 젖은 눈망울만 보면

→ 곁님 젖은 눈망울만 보면

→ 짝지 젖은 눈망울만 보면

16쪽


면회실 어머니의 주름진 미소 속에 지핀 젖은 눈망울

→ 만남뜰 어머니 주름진 웃음에 지핀 젖은 눈망울

→ 이야기칸 어머니 주름진 웃음에 지핀 젖은 눈망울

19쪽


쓰라린 형광등 불빛 아래

→ 쓰라린 하얀불빛에

→ 쓰라리고 흰 불빛에

2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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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 - 제3회 권태응문학상 수상작 문학동네 동시집 68
함민복 지음, 윤태규 그림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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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3.12.19.

노래책시렁 383


《노래는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

 함민복 글

 윤태규 그림

 문학동네

 2019.4.5.



  노래를 부르니 놀고 싶습니다. 놀이를 하니 노래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노을에 닿고, 노을이 지면서 퍼지는 밤빛이 우리 몸이며 마음으로 넉넉히 스밉니다. 힘껏 소리를 내려 하면 ‘악’을 쓰는 결로 기웁니다. 즐겁게 소리를 내기에 노래이고 가락입니다. 어린이는 온힘을 다해 자라지 않아요. 어린이는 언제나 하루하루 새롭고 즐겁게 자라고 싶습니다. 《노래는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를 읽고서 한숨이 나왔습니다. 안간힘을 쓰듯 글을 쥐어짤 수 있겠습니다만, 어린이하고 나눌 말과 글이란 언제나 어른으로서 스스로 기쁘게 일하고 즐겁게 살림을 짓는 숨결이어야지 싶어요. 어린이는 하나도 안 쥐어짜면서 놀거든요. 어린이가 먹을 밥에 아무것이나 넣는다면 어른이 아닙니다. 어린이한테 아무 옷이나 입혀도 어른이 아닙니다. 어린이한테 아무 말이나 쓰는 몸짓은 어른일 수 없습니다. ‘동시’나 ‘동시문학·어린이문학’이 아닌, 그저 ‘삶노래·살림노래·사랑노래·숲노래’를 어깨동무로 나누기에 어른입니다. 애써 꾸미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말을 좀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어린이한테 틀린말을 들려주거나 길들이면 도무지 어른일 수 없습니다. 바로 이곳 오늘 우리 보금자리에서 빙그레 웃는 말씨가 노래입니다.


+


뿌리를 내리며 살다가, 뿌리가 뽑힌 채 팔려가는 나무는 언제 어디에서나 아파서 눈물에 젖는다. 나무가 딸랑 몸만 옮겨가는 일이란 없다. 나무는 애써 뻗은 뿌리하고 줄기에 가지를 왕창 잘리고서야 땅에서 뽑힌다. 뿌리도 가지도 줄기까지도 잘려서 아픈 나무를 마음으로도 알아차리지 못 한 채, 그저 ‘딸랑 몸만 옮긴다’고 적는 글을 어린이한테 어떻게 읽히려 하는지 아찔하다.


+


ㅅㄴㄹ


나무가 차를 타고 이사를 간다 // 이삿짐 / 하나도 안 챙기고 / 딸랑 / 몸만 이사를 간다 (18쪽)


옷 갈아입기 참 힘들겠구나 / 옷 갈아입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 그래서 비늘 옷에는 / 단추도 지퍼도 없구나 // 움직이기만 해도 자동으로 옷이 빨리는 / 물속에 살아 참 다행이다 (잉어/70쪽)


+


《노래는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함민복, 문학동네, 2019)


감자는 궁금한 게 많습니다

→ 감자는 궁금합니다

→ 감자는 모두 궁금합니다

7쪽


질문을 던져 보고

→ 물어보고

8쪽


더 조심했어야 할 참새 마음의 무게가

→ 더 살펴야 할 참새 마음이

14쪽


푸른 하늘 쳐다보면 금방 눈가로 물이 샌다

→ 파란하늘 쳐다보면 곧 눈가로 물이 샌다

17쪽


몸만 이사를 간다

→ 몸만 옮긴다

→ 몸만 옮겨간다

18쪽


휜 허리는 곧게 펼쳐지고, 흰 머리카락은 푸르러지고

→ 휜 허리는 곧고, 흰 머리카락은 푸르고

→ 이제 허리는 펴고, 머리카락은 푸르고

20쪽


참새 귀를 연구해

→ 참새 귀를 살펴

→ 참새 귀를 헤아려

26쪽


노래들은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

→ 노래는 온힘을 다해 둥글다

32쪽


물의 고마움 새삼 느끼고 있는데

→ 고마운 물을 새삼 느끼는데

→ 물이 새삼스레 고마운데

41쪽


귀를 통해 내 몸속까지 달려

→ 귀를 거쳐 내 몸까지 달려

→ 귀를 지나 내 몸까지 달려

→ 귀로 내 몸까지 달려

41쪽


아니면 겁나 무서웠을까

→ 아니면 몹시 무서웠을까

→ 아니면 무서웠을까

47쪽


조금은 꽃과 같은 극이 되는지

→ 조금은 꽃과 같은 쪽인지

→ 조금은 꽃과 같은지

49쪽


낯선 이 글씨는 누구의 글씨체일까

→ 낯선데 누구 글씨일까

→ 낯선 이 글씨 누가 썼을까

52쪽


나무들은 흙냄새가 좋아

→ 나무는 흙냄새가 좋아

59쪽


나무들의 줄기인지도 모르지

→ 나무줄기인지도 모르지

59쪽


단추도 지퍼도 없구나

→ 단추 주륵이도 없구나

70쪽


나무의 나이테는 오늘을 어떻게 기록할까

→ 나무는 테에 오늘을 어떻게 새길까

→ 나이테에는 오늘을 어떻게 남길까

78쪽


길가의 가로수 친구들이

→ 길나무가

→ 길가에 선 나무가

78쪽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흔들리는 건 아닐까

→ 두리번거리며 흔들리지는 않을까

→ 둘레를 보며 흔들리지는 않을까

81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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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미안족 문학연대 시선 1
최영철 지음 / 문학연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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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3.12.15.

노래책시렁 381


《홀로 가는 맹인 악사》

 최영철

 푸른숲

 1994.2.14.



  우리한테는 혼자 가는 길이 없습니다. 발걸음을 내딛는 땅이 있고, 땅에 뿌리내린 나무하고 풀이 있습니다. 풀밭에 깃드는 풀벌레가 있고,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새가 있어요. 비를 뿌리는 구름에 볕을 베푸는 해가 있지요. 밤에 환한 별에, 싱그러이 감싸는 바람이 있습니다. 혼자 가는 사람은 있을 턱이 없습니다. 둘레를 안 보거나 못 볼 뿐입니다. 《홀로 가는 맹인 악사》를 읽었습니다. 서른 해쯤 앞서 나온 글을 오늘 눈빛으로 섣불리 읽으면 안 될까요? 또는 이 눈길이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뿌리라고 느낄 수 있을까요? 둘레를 보는 사람은 늘 함께 나아가는 이 별빛을 헤아리면서 나누고 품고 노래합니다. 둘레를 안 보는 사람은 스스로 가두고 누르면서 억지로 짜내는 글을 내놓습니다. 글밭에 있는 사람들은 왜 ‘글’이라 안 하고 ‘문학’을 붙들려 할까요? 글밭이라는 울타리에서는 왜 ‘노래’라 안 하고 ‘시’를 붙잡으려 할까요? 술 한 모금을 하더라도, 빗방울이 노래하는 곁에서 비내음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응큼하게 엿보거나 흥건하게 들이켜기보다는, 그저 풀씨를 보고 푸른들을 보면서, 이 푸른별에 어떤 이웃이 어떻게 어우러지기에 날마다 사랑으로 피어날 수 있는지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ㅅㄴㄹ


김해에서 성포까지 안내양을 / 50여 분 동안 사랑하였다 /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 혼자 상상하리라 / 사랑은 대개 그런 것이므로 / 방심한 여자의 빈틈을 이용 / 강제로 어떻게 /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 눈짐작으로 하나씩 벗겨버리는 … 졸음을 쫓기 위해 흥얼거리는 유행가 한자락 / 김해에서 성포까지 50여 분 동안 / 정신없이 그녀를 사랑하였다 / 만원버스 속을 능란하게 움직이는 / 훅, 하고 달려오는 비린 땀냄새. (몰래한 사랑 2/18, 19쪽)


우리 동네 이발소의 한쪽 나무평상에 앉아 / 흘러간 주간지를 넘기고 있으면 / 머리를 감는 세면대에서 내가 보는 / 여배우 팔등신 머리 위로 점점이 비눗물이 튕겨온다 (그 이발소/22쪽)


평양소주 한 병을 숨어서 마십니다 / 백화점의 북한생활전에 갔다가 / 떳떳하게 돈 주고 산 것인데도 / 보안법에 저촉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합니다 (평양소주/52쪽)


+


《홀로 가는 맹인 악사》(최영철, 푸른숲, 1994)


정신없이 그녀를 사랑하였다

→ 헬렐레 그이를 사랑하였다

→ 허둥지둥 사랑하였다

19쪽


팔등신 머리 위로 점점이 비눗물이 튕겨온다

→ 매끈한 머리로 방울방울 비눗물이 튕겨온다

→ 잘빠진 머리로 띄엄띄엄 비눗물이 튕겨온다

22쪽


저촉되지 않을까

→ 어긋나지 않을까

→ 엇나가지 않을까

→ 틀리지 않을까

→ 걸리지 않을까

52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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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가스의 불빛은 아직도 어둡다
배상환 지음 / 책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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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3.12.15.

노래책시렁 380


《학교는 오늘도 안녕하다》

 배상환

 나남

 1988.3.5.



  요즈음은 예전보다 아이를 덜 다그치거나 나무라거나 때리지만, 아직 ‘어른 아닌 꼰대’는 많고, ‘새로 꼰대 자리로 들어서는 아이’도 많습니다. 다만, 예전에도 ‘꼰대 아닌 어른’은 드문드문 있었고, 이제 ‘꼰대 아닌 어른으로 나아가는 아이’도 곧잘 만납니다. 《학교는 오늘도 안녕하다》를 처음 읽던 1994년이나 되읽는 2023년이나 영 거북합니다. 그때에도 〈B선생〉 같은 글을 버젓이 내놓고서 ‘시·문학’이라 여겼고, 요즈음에도 이 비슷한 글은 으레 튀어나옵니다. 어렵게 ‘자기반성’이란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습니다. 힘도 나이도 이름도 적거나 낮다고 여겨 함부로 말하고 때리던 버릇을 뉘우치거나 무릎꿇는 글을 쓴 ‘꼰대 아닌 어른’은 몇이나 있을까요? 아무리 1970∼80년대나 1990년대였다 하더라도, 그무렵에 모든 이들이 ‘어른 아닌 꼰대’이지 않았습니다. 서슬퍼렇던 때에도 주먹이나 매를 안 든 ‘꼰대 아닌 어른’이 있었고, ‘꼰대 아닌 어른’이 쓴 글을 ‘시·문학’이라 여긴 눈길은 드물더군요. 이즈막에 나도는 글은 참말로 ‘시·문학’일까요? ‘시인 척’이나 ‘문학인 척’이지는 않나요? 노래를 쓰고 싶다면, 노래를 읽고 싶다면, 노래를 나누려 한다면, 부디 아이를 낳아 똥기저귀를 손빨래 합시다.


ㅅㄴㄹ


난 나의 가족을 위하여 / 문교부 지시에 충실할 수밖에 없어 / 넌 선생님 말씀을 안 듣는 나쁜 놈! / 너의 부모님은 매달 발송되는 / 과외 금지 가정통신도 안 읽어 보시냐? / 너의 아빠는 이제 많은 세금을 내셔야 돼 / 개새씨야! / x잡고 반성해 (B선생·1/24쪽)


퇴근 후 /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생맥주를 먹고 / 새벽이 되어서야 모두 토해낼 수 있었다 / 노가리, 뻔데기, 골뱅이 / 뻔데기 주름 하나하나에 / 미운 자식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 날이 밝으면 모두 죽여 버리기로 결심했다 (B선생·2/26쪽)


한 학생이 손을 든다 / 선생님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 어떤 도움을 줍니까 / 야 이 새끼야 지랄말고 외워 놔 / 연합고사에 다 나온단 말이야 (B선생·3/28쪽)


+


《학교는 오늘도 안녕하다》(배상환, 나남, 1988)


벗어 놓고 부끄럽다고 말하려는 것은 타고난 뻔뻔스러움인가

→ 벗어 놓고 부끄럽다고 말하려면 타고나기를 뻔뻔스러운가

9쪽


학생들에게 벌을 주고 있는 저 황색인간은 백인의 편인가 흑인의 편인가

→ 아이들을 굴리는 저 누렁이는 하양이 쪽인가 까망이 쪽인가

→ 아이들을 다그치는 저 누런이는 흰 쪽인가 검은 쪽인가

17쪽


난 나의 가족을 위하여

→ 난 우리 집을 돌보려

→ 난 우리 집안 때문에

24쪽


옆 사나이에 비해 몹시 작아 보이는 내 성기가 창피할 때보다

→ 옆 사나이보다 몹시 작아 보이는 내 고추가 창피할 때보다

→ 옆 사나이보다 몹시 작아 보이는 내 잠지가 창피할 때보다

46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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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칠천 원 사십편시선 17
조영옥 지음 / 작은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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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3.12.15.

노래책시렁 379


《일만칠천 원》

 조영옥

 작은숲

 2015.6.1.



  비는 서둘러 내리지 않습니다. 구름은 서둘러 흐르지 않습니다. 바람도 해도 서둘러 움직이지 않습니다. 와락 쏟아지는 비가 있고, 드센바람을 타고서 빠르게 달리는 듯한 구름이 있지만, 해바람비는 언제나 철빛을 살리면서 찾아듭니다. 아기는 빨리 자라야 할 까닭이 없고, 어린이는 빨리 배워야 하지 않으며, 어른은 빨리 죽어야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여러 고장을 잇는 빠른길을 놓을 수 있되, 마을하고 마을 사이는 느슨하면서 넉넉히 오갈 길을 놓아야 아름답고 즐겁습니다. 《일만칠천 원》을 읽다가 자꾸 갸웃했습니다. 꼭 ‘시’를 써내야 하지 않습니다. 꼭 뭔가 새롭다고 여길 하루를 맛보거나 겪어야 하지 않습니다. 더 느슨히 하루를 살피면서, 더 천천히 삶빛을 그대로 삶말로 담으면 됩니다. 굳이 멀리 가야 해를 볼 수 있지 않아요. 마을에서도, 골목에서도, 나무 곁에서도 해를 봅니다. 밤에 불빛으로 따가우면 별을 못 보겠지요. 그런데 서울 한복판조차 눈을 가만히 감고서 마음을 고요히 다스리면 ‘감은 눈’으로도 별을 만납니다. 노래란, 대단해야 하지 않되, 언제나 삶을 사랑하는 말씨입니다. 그저 오늘을 기쁘게 바라보고 맞이하면서 말씨앗을 얹으면 노래로 피어납니다. 이곳에서 노래씨앗을 찾아보기를 바라요.


ㅅㄴㄹ


해 지는 와온바다 본다며 / 서쪽으로 서쪽으로 차를 달려 / 와온바다에 왔다 / 먼 수평선 위 / 해는 구름에 감싸인 채 잦아들고 (와온바다/21쪽)


땅콩을 심었다 / 퇴비 뿌리고 / 흙 한번 뒤집어 주고 / 한 알 한 알 꼭꼭 / 숨겼더니 / 앙증맞게 옹기종기 모인 / 푸른 잎 / 진노랑꽃까지 피우더니 / 가을이 채 오기 전 / 주렁주렁 땅콩이 열렸다 (땅콩 캐는 날/28쪽)


+


《일만칠천 원》(조영옥, 작은숲, 2015)


먼 수평선 위 해는 구름에 감싸인 채

→ 먼 물금 위 해는 구름에 감싸인 채

→ 먼 바다금 위 해는 구름에 감싸인 채

21쪽


진노랑꽃까지 피우더니

→ 짙노랑꽃까지 피우더니

28쪽


퇴비 뿌리고 흙 한번 뒤집고

→ 거름 뿌리고 흙 한벌 뒤집고

28쪽


하얀 종이 위에 파란색 글씨를 쓴다

→ 하얀 종이에 파란 글씨를 쓴다

45쪽


江은 나의 몸으로 스며든다

→ 냇물은 내 몸으로 스며든다

56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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