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사랑하는 아이


 글을 쓰는 아빠 곁에는 글을 쓰는 아이가 있습니다. 좋은 책을 알아보며 읽으려 하는 아빠 곁에는 좋은 책을 알아보며 읽으려는 아이가 있습니다. 셈틀을 켜 놓은 책상맡에서 자판을 또각거리는 아빠 곁에는 나란히 셈틀 앞에 앉아 자판을 또각거리고파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얌전히 앉아 밥을 먹는 아빠 곁에는 얌전히 앉아 밥을 먹으려는 아이가 있을까요. 글쎄, 아이는 밥 먹을 때만큼은 참으로 말을 안 듣지만, 배고픈 때에 맞추어 알맞게 밥을 해서 차려 놓으면, 배가 찰 때까지 얌전히 잘 받아 먹어 줍니다.

 사진을 찍는 아빠 곁에는 함께 사진찍기 놀이를 하고픈 아이가 있습니다. 골목을 거니는 아빠 곁에는 함께 손잡고 골목마실을 하고픈 아이가 있어요.

 아이는 아빠 곁에서 삶을 배웁니다. 아이는 손재주나 말재주나 몸재주를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는 오로지 삶을 배웁니다. 제 아빠가 미운 삶을 일군다면 미운 삶을 배우고야 맙니다. 제 아빠가 고운 말을 사랑한다면 고운 말을 알알이 받아들입니다. 제 아빠가 착한 나날을 보낸다면 아이 또한 시나브로 착한 나날을 보낼 테지요.

 그러나 아이 곁에는 아빠만 있지 않습니다. 아이 곁에는 엄마랑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이웃이랑 동무가 있습니다. 아이는 아빠 곁에서만 놀지 않습니다. 더 눈길을 끌거나 더 눈길을 사로잡는 데로 쏠리거나 휘둘리거나 휩쓸립니다. 우리 집에서는 텔레비전을 안 보지만, 어느 집에 가거나 어느 밥집에 들어가거나 텔레비전 없는 데가 없습니다. 아이는 텔레비전 켜진 데에서 발길을 떼지 못할 뿐더러,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서는 아빠가 열 번을 부르건 백 번을 부르건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좋은 책을 알아보는 사람은 좋은 넋으로 살아가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좋은 넋으로 일구는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알쏭달쏭합니다. 좋은 넋으로 좋은 살림을 일구지 않을 때에는 좋은 책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느끼지만, 좋은 넋이란 또 무엇이고 좋은 살림이란 또 무엇이며 좋은 책이란 참말 무엇인지 아리송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 방방 뛰며 눈을 못 떼는 아이 곁에 선 아빠는 눈을 지긋이 감습니다. 텔레비전 없는 우리 멧골집으로 돌아가기 앞서까지는 어찌하는 수 없습니다. 서울에 볼일을 보러 와서 전철을 타고 움직일 때에도 가야 하는 데까지 그예 가야지, 사이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밀고 밟으며 치는 사람들한테 시달리면서, 아이 또한 시달려야 합니다. 매캐한 바람을 아이도 마셔야 합니다. 복닥거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아이도 들어야 합니다.

 서울이라고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사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서울이든 대전이든 제주이든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사람은 늘 있어요.

 그러나 이대로 좋으려나요. 이대로 이 나라 이 터전 이 나날이 괜찮으려나요. 서울 홍제동에 자리한 헌책방 〈대양서점〉에서 《한국인의 정서》(우석,1981)라는 묵은 책 하나를 이천 원쯤 주고 장만했습니다. 글을 쓴 하종갑 님은 경남일보라는 지역신문 기자입니다. 서울에서 살며 서울 이야기를 쓰는 기자가 낸 책이었을 때에도 《한국인의 정서》 같은 책이 잊히거나 묻히거나 안 읽혔을까 궁금하지만, 서울에서 살며 서울 이야기를 쓰는 기자는 《한국인의 정서》 같은 책을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쓸 수조차 없으리라 봅니다. 아니, 이런 책이 나왔어도 읽어서 기쁘게 삭이며 즐거이 느낌글 하나 기사로 쓰지 못했겠지요.

 우리 아이가 글을 사랑하는 아이로 무럭무럭 자라 주면 좋겠습니다. 아빠부터 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지요. 우리 아이가 착한 마음씨를 보듬는 아이로 예쁘게 크면 고맙겠습니다. 아빠부터 착한 마음씨를 아끼는 사람으로 살아야겠지요. 오늘 하루도 아빠는 손에 물이 마를 겨를 없이 신나게 빨래를 합니다. (4344.1.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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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엄마·글쟁이


 애 아빠인 나는 늘 생각한다.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집에서 아이랑 어머니랑 둘이 어울려 놀라 한 다음 혼자서 볼일을 보러 다닐 수 있다고. 그러나,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더더욱 어머니가 집에서 조용히 쉬면서 둘째가 무럭무럭 제자리를 잡으며 차분히 설 수 있게끔 돕고, 아버지 되는 사람이 아이랑 마실을 다니며 볼일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내가 애 엄마이면서 글쓰는 사람이라면, 내가 시골집을 떠나 서울로 볼일을 보러 다닌다 할 때에 마땅히 아이를 데리고 다니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한다. 언제나 아이를 곁에 두어야 하고, 늘 아이를 보살펴야 하며, 노상 아이가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도록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거의 모든 남자들과 아빠들은 아이가 갓난쟁이일 때부터 도맡아 돌본다거나 아이를 데리고 다닌다거나 살림을 꾸린다거나 하지를 못하거나 않는다고 느낀다. 아이랑 함께 살아가는 고단함과 즐거움에다가 힘겨움과 아름다움을 마음으로도 살피지 못할 뿐 아니라, 몸으로도 느끼지 못하는구나 싶다.

 모든 애 아빠는 애 엄마와 같은 마음이요 삶이며 이야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애 엄마는 애 아빠와 같은 마음이나 삶이나 이야기일 까닭은 없다고 본다. 서울마실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날, 새벽에 조용히 먼저 일어난다. 아이는 고요히 잠잔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켜 본다. 영화 〈푸른 산호초〉가 흐른다. 꽤 여러 번 흘깃 보았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은 없다. 언제였나, 옆지기랑 이 영화를 보다가, ‘바닷물 속에서 벌거벗고 헤엄치는 두 젊은이’가 나오는 대목에서 자지랑 보지를 뿌옇게 해 놓은 모습을 보며 짜증스럽다고 말했던 일이 떠오른다. 왜 가려야 하지? 왜 부끄럽다 여기지? 열아홉 살부터 볼 수 있다는 영화라고 한다면, 자지랑 보지를 가릴 까닭이 있나? 이 영화 〈푸른 산호초〉는 너그러우며 너른 자연 품에 안긴 채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들 삶을 보여주는데, 왜 자지랑 보지를 가리나? 이네들한테는 젖꼭지이든 자지이든 보지이든 머리털이든 복숭아뼈이든 똑같다. 이처럼 억지스레 뿌옇게 가리면서 외려 아름다운 삶과 사람과 삶터와 자연을 놓친다.‘뿌연 자리’에 엉뚱하게 더 눈길이 가고야 만다. 자지털이나 보지털이나 겨드랑이털이나 콧털이나 머리털이나 다를 구석이 없다.

 한창 글쓰기를 할 생각이었으나, 그만 영화 〈푸른 산호초〉에 빠져들고 만다. 영화 〈푸른 산호초〉에 나오는 젊은 남자는 섬에서 떠나고 싶어 안달을 한다. 젊은 여자는 애써 섬에서 떠날 마음이 없다. 젊은 남자는 여자한테 골을 부릴 뿐 아니라 뺨을 때리기까지 한다. 여자는 뺨을 맞았는데에도 손찌검을 하지 않는다. 가만히 기다리고 지켜본다. 이윽고 둘은 사랑놀이 열매로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배어 낳는 줄 하나도 모르던 두 사람, 아이한테 젖을 물려야 하는 줄조차 모르던 두 사람, 차츰차츰 아이하고 살아가는 나날이 길어지면서 비로소 젊은 여자가 왜 섬을 떠나려 하지 않는가를 젊은 남자도 깨닫는다. 큰 배가 섬 둘레로 다가오며 이 둘을 밖으로 나가도록 도와주려 하지만, 일부러 섬 안쪽 깊이 들어가며 숨는다.

 텔레비전도 예방접종도 라면도 자가용도 비행기도 여행도 연속극도 책도 사진기도 일기장도 볼펜도 침대도 옷가지도 옷장도 신발도 모자도 돈도 은행계좌도 …… 아무것 하나 없다 할 만한 외로운 섬인데, 둘을 넘어 셋은 섬에서 즐겁다. 섬에서 아름답다. 섬에는 바로 바다가 있고 나무와 풀이 있으며 먹을거리가 있는데다가 파란하늘과 맞닿은 파란바다에 물고기랑 뭇목숨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서로서로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사람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으며 ‘살결이 누렇게 익은 흰둥이’로서 예쁘게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애 아빠로서 생각한다. 여느 남자들은 글을 쓰고 싶다면 애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남자들은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고프다면, 집살림을 도맡거나 거의 다 하면서 아이를 보살피거나 가르치면서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해야 한다고. 남자들은 젊거나 늙거나 어리거나 하나같이 어리석고 어리숙하며 어리벙벙하다. 아이를 낳고 뼈와 살을 바쳐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그예 바보일 뿐이다. (4343.12.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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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엄마 배속에 설 때


 저녁나절 세 식구 일찍 잠자리에 든다. 여덟 시가 채 안 되었으나 잠자리에 든다. 서울과 인천으로 볼일 보러 다녀온 애 아빠는 애 아빠대로 허리와 다리가 쑤신다. 시골집에서 아이랑 복닥이던 애 엄마는 애 엄마대로 온몸이 쑤신다. 아이는 아이대로 혼자 놀다 힘들었을 테니 일찌감치 잠들었다.

 막 자리에 누워 잠들 무렵 전화기가 울린다. 일산 옆지기네 어머님이 전화를 거셨다. 둘째를 밴 딸아이를 걱정하신다. 이야기결에 한 마디가 마음에 녹아든다. 당신이 젊을 적 아이를 밸 무렵, ‘배속에 아이가 설 때’ 몸이 참 힘들고 무거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고 말씀한다. 그때에는 왜 몸이 힘들거나 무거웠는지 모르셨단다.

 할머니가 곁에 있으면 애 엄마나 애 아빠는 얼마나 많으며 깊고 너른 삶을 받아들이거나 바라보며 배울 수 있을까. 할머니하고 함께 살아가지 못하거나 같이 안 사는 사람들이 딱하다. 그렇지만 막상 할머니랑 함께 살아가면서 할머니한테서 고운 삶을 웃음과 눈물로 맞아들이거나 껴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이키우기랑 살림하기만 배우거나 익히지 않는다. 아이키우기랑 살림하기란 곁다리이다. 할머니한테서 삶을 배우고 삶을 나누며 삶을 함께하니 즐겁다. 할머니 한 분 걸어온 길은 고스란히 ‘사람책’이다. 애 엄마 외할머님이 배속에서 자라는 둘째 아이를 생각하며 비손해 주신단다. (4343.11.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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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11-12 08:30   좋아요 0 | URL
아, 작은아이가 생겼다는 걸 제가 이제 처음 아는 걸까요? 요새 제 속의 시끌거림으로 님의 글을 찬찬히 못 읽었던 듯. 정말 어설프게 축하 드립니다. ^^

숲노래 2010-11-12 22:5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 이듬해 오월 무렵에 곱게 태어나리라 생각해요~
 


 거울


 아빠가 힘든 몸을 가까스로 버티며 글 한 조각 끄적인다. 아이는 옆에서 같이 놀아 달라며 무릎을 밟고 타며 갖은 칭얼칭얼을 다 부린다. 이러다가 아빠가 쓰는 글을 망가뜨린다. 아빠는 버럭 성을 부린다.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논다. 그러다가 거울을 집어 놀며 아빠도 보라며 비추어 준다. 너무 가까이 대었기에 좀 떨어뜨려야 보이지요 하니까 살살 떨어뜨려 준다. 아빠 얼굴을 비춰 주다가는 이제 제 얼굴도 보이는지 제 얼굴만 들여다본다. 이때 아빠 얼굴이 살짝 스치는데, 아이한테 성을 내며 찌푸른 이맛살 골이 그대로 파여 있다. 그래, 힘들면 그냥 쉬자. 아이도 쉬고 아빠도 쉬자. 함께 그림책 보며 잠자리에 벌렁 드러눕자. (4343.10.2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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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살림


 집살림이란 티가 나지 않는 일. 그런데 티나지 않는 이 일을 하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어머니들은 다리 쉬며 방바닥에 드러누울 겨를은커녕 살짝 쪼그려앉을 틈이 없네. (4343.10.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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