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우연 - 제1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3
김수빈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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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방학이었으면 좋겠다.”


3월의 첫날 저녁을 먹으면서 아이들이 말했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날을 하루 앞두고 벌써 방학 타령이라니. 고등학생인 둘째는 그렇다 쳐도 대학생인 첫째까지? 아이들에게 학교는 그렇게나 가기 싫은 장소였던가. 잔뜩 침울해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만, 대학 졸업한 그해의 3월이 제일 슬펐어.”

왜요?”

더이상 학생이 아니란 걸 알았거든. 엄만 지금도 학교에 가고 싶어. 정 그렇게 싫으면 엄마가 대리출석이라도 해줄까? 고딩은 몰라도 대학 강의실은 가능할 것 같은데?”

에엑? 엄마! 농담도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학교 보내려고 별소릴 다 하셔.”

사차원 엄마가 학교에 와서 무슨 엉뚱한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좀전까지 학교 가기 싫다고 투덜거리던 녀석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난 살짝 아쉬웠다.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나?

 


청소년 소설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아주 오래전에 지나온, 당시엔 두 아들처럼 하루하루가 지겹고 힘들기만 했던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기에 설레기까지 하다.

 


온통 짙은 초록의 숲이 그려진 <고요한 우연>. 표지만 언뜻 보고 숲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가 했다. 그러다 표지 아래쪽, 계단에 앉은 소녀가 고양이 두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네가 궁금해졌어. 아주 많이.”라는 부제처럼. ‘가 누굴까? 혹시 고양이?


 

이쪽으로 와서 앉을래?”

괜찮아.”

긴장할 것 하나도 없어.”


책장을 넘기자마자 마주하는 것은 심상찮은 분위기.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 아니, ‘누구에게 심각한 일이 발생했다. 즉각 해당 학생과 같은 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는 담임 선생님, 학생부장 선생님의 호출을 받고 상담실로 향한다. 음료수를 내어주며 선생님은 그 아이와의 관계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던 그 아이가 마치 증발이라도 해 버린 것처럼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극도로 말을 조심해서 건네는 선생님들의 의중은 단 하나. 넌 뭔가 아는 게 없냐는 것.

 


는 머리가 새하얘진다. 외모도, 성적도, 성격도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평범하다 못해 스스로도 심심하다고 여기는 자신에게 선생님들의 관심이 쏠리니 어느 때보다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 아이가 사건 사고에 휘말렸을 가능성도 있다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가운데 순간 떠오른 것. 그 아이가 새벽에 자신이 보낸 SNS 메시지를 확인했다는 사실.

 


단 두 장에 불과한 초입 부분을 읽으며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대체 누굴까. 왜 사라졌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이가 사라진 지 나흘이나 지났다고? 그 아이는 무사한 걸까?


 

사라진 아이의 행방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 소설은 (이수현)’의 서술로 진행된다. 같은 반 아이들에 대해서, 교실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그런 가운데 왠지 자꾸만 시선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끌리는 아이들을 알기 위해 는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한 아이의 SNS 계정을 통해 그들과 조금씩 가까워지는데...

 


책은 한 번 잡으면 바로 끝으로 내달릴 만큼 몰입감이 높은 작품이다. 교실 바로 앞뒤로 앉아 있으면서도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나 전화통화 보다 SNS가 친숙한 아이들. 그렇기에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첨엔 고요한 우연이란 제목이 무슨 의미일까. 의문을 품었다. 무엇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고요함일까. ‘우연일까. 궁금증은 본문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오늘 일을 장난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이건 명백한 괴롭힘이었다. 아이들은 고요가 먼저 미움받을 행동을 했다고 말한다. 미움받을 행동을 하면 괴롭혀도 괜찮은 걸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면 상대를 괴롭힐 권리가 주어지는 걸까.- 59


 

열일곱, 내 인생에 주어진 가장 큰 행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지아, 내 친구 서지아. - 178


 

스스로 빛을 내지 않아도 밝게 빛나는 별이 있다고 말해 주던 다정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신은 스물세 번째 피규어라고 했던 이우연의 말도 떠올랐다. 나 또한 그 어디쯤 서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엄마의 특별 한정판은 아니지만 엄마에게 꼭 필요했던 피규어다. 그걸로 됐다. 그러면 충분했다. - 188~189쪽


 

사람들은 달을 올려다본다고만 생각하지, 달이 지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달인데 말이야. -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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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1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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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보기 시작한 미드가 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로 인해 사람들은 목숨을 잃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그들끼리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간신히 평온을 되찾은 이들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세력이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이제 좀비는 물론 사람들과도 목숨을 건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만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존립을 위해 좀비가 아닌 사람들을 죽이게 되는 지경에 이르자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고 서로 갈등을 빚는다. 그럴 때 해결책을 제시하고 앞장서서 달려가는 것은 언제나 집단의 리더였는데 그 장면에서 떠오른 생각은 리더란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이런걸 드라마를 보고 느끼다니 놀랍다고 해야 할까 의외라고 해야 할까.



미드와 유사한 상황이 소설 속에서 펼쳐졌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명>은 전염병과 테러,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지구가 배경이 된 작품이다. 첨단과학의 힘을 빌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던 인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한 쥐떼의 공격을 받고 문명 그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그때 짠 하고 등장한 생명체가 있으니 바로 고양이였다. 쥐떼의 공격을 물리치고 지구에 자신들 고양이의 문명을 건설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가진 고양이 바스테트의 모험이 펼쳐진다.


그 뒷이야기가 최근에 출간된 <행성>에서 이어진다. 쥐떼와 전염병으로 아수라장이 된 파리에서 암코양이 바스테트는 무리와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한다. ‘마지막 희망’호를 타고 바다 건너 닿는 곳은 살기 좋으리란 희망을 품고서.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뉴욕의 풍경에 그는 충격을 받고 만다. 뉴욕 역시 파리처럼 쥐떼가 점령하고 있었던 것. 사방이 온통 갈색 쥐 투성이였다. 바스테트를 비롯한 일행은 할 말을 잃고.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각자 다른 의견을 내놓는 가운데 갑판에서 비상 사이렌이 올려퍼진다. 쥐들의 공격이 시작됐다고. 닻줄을 타고 벌써 갑판으로 올라왔다고.


고양이-인간 엽합군은 돼지와 개까지 힘을 합쳐 맞서지만 한국전에서 중국의 인해전술처럼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미국 쥐떼의 공격에 치병타를 입고 만다. 처음 배에 올랐던 이백여 명이 겨우 일곱으로 줄어들었다. 목숨을 잃은 동료와 친구들을 위해 제대로 애도를 가질 여력도 없는 상황, 그때 해안의 한 고층 빌딩 꼭대기에서 반짝 하고 섬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길고 짧은 신호는 바로 모스부호였고 'C.O.M.E'이라는 의미였다. 흐밍호에 계속 머물자니 자신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쥐떼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고 그렇다고 바다 위에서 해안가의 고층건물까지 어떻게 갈것인가.


소설 <행성>은 이전에 출간된 <고양이>와 <문명>에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앞선 작품을 읽지 않아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본문에 지난 이야기가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어서 스토리를 짚어가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베르베르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의 상상력이 풀어내는 세계와 이야기에 놀라게 된다. 인간이 아닌 동물, 고양이의 시선으로 풀어가는 소설, 2권에선 바스테트 일행에게 어떤 모험이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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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마지막 질문 - 나를 깨닫는다는 것 다산의 마지막 시리즈
조윤제 지음 / 청림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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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자왈) 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하고 三十而立(삼십이립)하고 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하고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하고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하고 七十而從心所欲(칠십이종심소욕)호되 不踰矩(불유구)호라. 15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이 되어 스스로 바로 세울 수 있었으니 마흔이 되어서는 결코 흔들림이 없었고 쉰이 되어서는 하늘의 뜻을 알았다. 예순이 되어서는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노라.


 


공자는 공자였다. 나의 삶은 그의 말대로 되지 않았다, 마흔이 되어 유달리 흔들림이 많았고 쉰이 넘었지만 아직도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노라고 포기하는 것도 해결책은 아닐 듯 하니 어찌해야 좋을까. 생의 절반을 훌쩍 넘어서 내리막길에 접어들어서 다시 고민에 빠졌다.



 

<다산의 마지막 질문>은 저자의 다산의 마지막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 최종 완결편이다. <다산의 마지막 공부>에 이어 <다산의 마지막 습관>을 읽었기에 <다산의 마지막 질문>을 읽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의문이 들었다. ‘다산의 마지막시리즈의 처음이 아니라 완결편인데도 제목이 질문이라니. 왜일까.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최고의 학자인 정약용은 그야말로 극과극의 삶을 살았다. 그의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높이 산 정조의 총애를 받아 마흔도 안된 나이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다산이었지만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18년 유배도 모자라 그의 집안은 멸문지경에 이르고 만다. 중심에서 단번에 구석으로 내쳐진 상황이었지만 다산은 민초들의 참상에 눈을 돌리고 본격적으로 책을 써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귀양지에서 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아들은 굴복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지만 다산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내가 살아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천명이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 또한 천명이다. 그러나 사람의 도리를 닦지 않고 천명만 기다린다면 이 또한 이치에 합당치 않다. 나는 사람의 도리를 이미 다했다. 그럼에도 끝내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 또한 천명일 따름이다. - 19~20

 



다산은 늘 [논어]를 가까이 두고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 [논어]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주석을 모으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더해 <논어고금주>를 썼다. <다산의 마지막 질문>은 다산의 [논어]에 대한 생각과 관점을 담은 책인데 구성은 단순하다. [논어]의 한 대목을 원문과 의미를 담고 그에 대한 다산의 생각을 저자가 풀어놓았는데 익숙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가장 먼저 소개된 문장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로 시작하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의미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문구다. 때문에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이미 알면서도 다산의 글은 울림이 있었다.



 

학이란 알기 위한 것이며 습이란 행하기 위한 것이니, ‘학이시습은 지와 행이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후세의 은 그저 배우기만 하고 익히지 않기 때문에 기쁠 수가 없다 36.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속임을 당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위정)편의 글에서 다산은 배움과 생각의 균형을 강조했다. 배움과 생각이 적절하게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중년의 나이에 돌아보니 아쉬움이 많았다. 특히 다산의 초서독서법은 나의 책읽기를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일러주는 것 같았다. 그런가하면 子謂仲弓曰 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자위중궁왈 리우지자 성차각 수욕물용 산천 기사제)’ (옹야)편의 글에서는 호되게 일갈하는 듯했다. 아비가 착하지 않다고 해서 그의 아들을 매도하는 것은 군자로선 절대 해선 안된다는 것인데 이 말은 반대로도 해석된다는 것. 아버지가 아무리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부당하게 대물림하거나 자식의 삶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경제력이, 부모의 학벌이, 곧 자식의 직업과 학벌이 되는 요즘 세태에 누구나 꼭 새겨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훌륭한 목수는 서툰 목수를 위해 먹줄을 고치거나 없애지 않고, 羿는 서툰 사수를 위해 활을 당기는 기준을 고치지 않는다. 군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 활쏘기를 가르치는 것처럼 활을 끝까지 당길 뿐 시위를 놓지 않음으로써 화살이 튀어나가고 싶게 만든다. - 213

 



책으로 만났던 수많은 이들 중에서 한 명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두어 달 전 독서모임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다. 발제자가 토론 말미에 던진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지금까지 책으로 만난 위대한 저자가 한둘이 아닌데 그중에 딱 한 명만 고르자니 난감했지만 멤버들은 바로 지금만나고 사람을 꼽기 시작했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의 호메로스부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계 최고의 극작가 셰익스피어,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를 왜 선택했는지 이유도 함께 털어놓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역사 속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한 명 고른다면 누굴 꼽을 것인가. 만약 세종대왕과 정조가 장수를 누렸다면 지금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혹은 과거 역사 속 인물이 되어 하루 동안 살 수 있다면 누구를 택할 것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결정하지 못하고 말았지만 지금 다시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삶을 바꿀 것인가, 아니면 계속 지금처럼 살 것인가?”라고 마지막 질문을 던진 다산의 생각과 마음자리를 알고 싶기 때문에 그가 되어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보고 싶다고.



 

내 나이 예순, 돌아보니 한 갑자를 다시 만난 시간을 견뎠다. 나의 삶은 모두 가르침에 대한 뉘우침으로 보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어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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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마지막 서점
매들린 마틴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서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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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책. 이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을까. 무자비하고 참혹한 전투가 이어지는 전쟁과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몰입하는 독서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결코 한데 묶을 수 없다고 여겨지지만 예측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오래전 황석영 작가의 강연회에서 들었던 얘기가 생각난다. 작가는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난 갔었는데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도 어머니께선 <걸리버 여행기><소공자>를 사다주셨다고. 총성과 폭격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책을 인쇄하고 출판하고 또 그것을 읽는 것이 가능한가 싶었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다.


 

전쟁과 책. 어쩌면 이 둘이야말로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터로 간 책들>에서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 나치 독일에 대항하고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책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전시 도서 진중문고를 보급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군인들이 배낭이나 주머니에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도록 제작된 페이퍼북은 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에서는 내전이 끊이지 않는 시리아에서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과 학살로 공포 속에서 살아가던 다라야 시민들이 폐허 속에서 찾아낸 책을 모아 만든 비밀 지하 도서관을 포탄을 피해 드나들면서 희망을 발견해나가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것은 바로 책이었다.

 

 


그레이스는 늘 런던에서 사는 날을 꿈꿨다. 그리고 그 꿈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낡은 여행가방을 들고 친구 비브와 함께 런던에 도착한 그녀는 곧장 브리튼가로 향한다. 그녀의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삼촌네에서도 쫓겨나는 지경에 이르자 엄마의 친구인 웨더포드 아주머니에게 방을 빌려서 지내기로 한 것이다. 거기다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에번스 씨의 가게에 일하게 되는데, 그곳이 하필 서점이었다. 책에 대한 지식도 책을 읽어본 적도 없었던 그레이스는 실망감을 안고 서점 [프림로즈 힐]을 찾아간다. 하지만 우중충한 외관, 음울한 실내 분위기, 책장 가득한 먼지. 그리고 일하고 싶다는 그레이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에번스씨. [프림로즈 힐]과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삐걱거렸다. 런던에서 살기 위해 일자리가 절실했던 그레이스는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보조 점원으로 일하게 된다.

 



책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서점에서 일하게 된 그레이스. 그녀의 서점 근무는 첫날부터 우왕좌왕이었다. 에반스씨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있으라고 했지만 책장의 먼지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레이스는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하지만 이내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그런 가운데 서점을 찾은 손님이 그녀에게 책의 위치를 묻는다. 서가의 위치를 몰라 당황하던 그녀는 다른 손님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프림로즈 힐]에 자주 왔었다는 그는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는 그레이스에게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추천한다. 먼지를 흠뻑 뒤집어쓰고 집으로 돌아온 그레이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불길한 예감, 바로 전쟁다.

 



피난을 가고 징집이 이루어지고 등화관제와 공습....전쟁 중에 책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럴수록 더욱 책은 필요했다. 사람들에겐 즐길 거리가 필요했다. 그레이스는 삼촌네 가게에서의 경험을 되살려서 서점에 손님을 더 끌어모으기 위해 노력하는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금방 끝날 거라 예상했던 전쟁은 몇 년이고 계속됐다. 평범한 일상은 전쟁으로 인해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참혹한 전쟁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친구 그리고 이웃을 떠나보냈고 삶의 터전마저 잃었지만 절망 속에서도 실낱처럼 가느다란 희망을 찾기 위해 그들은 서로 위로했다. 그레이스가 낭독하는 것을 듣기 위해 사람들은 서점으로 모여들었고 끊임없이 책을 읽어나가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책이 지닌 무한한 이야기의 힘이란 게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첫 두 문장을 읽을 때에는 혀가 꼬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을까 불편한 마음을 의식했다. 그리고 저 멀리 어딘가에서 폭탄이 터져 굉음이 그레이스의 마음을 마구 어지럽힐 때에는 어디까지 읽었는지 잊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군중들의 얼굴이 사라지고 오로지 이야기만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녀의 세상은 도로샤의 세상속으로 휘감겨 들어갔다. - 269

 


 

제인 에어가 그녀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이는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전쟁과 위험에 맞서 그들을 통합하는 상징이었다. 제인 에어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자신과 맞닥뜨린 그 모든 것에 대처할 수 있는 엄청난 용기가. 그리고 그레이스도 그 순간 책 속의 주인공으로부터 많은 용기를 끌어내고자 했다. -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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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가 들려주는 물리학 이야기 - 45인의 물리학자가 주제별로 들려주는 과학지식
다나가 미유키 외 지음, 김지예 옮김, 후지시마 아키라 감수 / 동아엠앤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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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알람 소리에 잠을 깨서 깊은 밤 전등을 끄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우리의 일상은 온통 과학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물리학의 눈부신 업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야 할까.


 

매일 아침 단잠에 빠진 우리를 깨우는 건 휴대폰 알람이나 자명종 시계의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휴대폰과 자명종 시계에서 퍼져나온 파동에 의한 것이거나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려고 채널을 돌릴 때 들리는 지지직...하는 잡음에는 먼 우주에서 폭발한 성운이 내는 소리가 섞여 있다는 것. 가장 놀라운 것은 사람이 모두 외출해서 조용한 상태의 집도 알고 보면 그 속에 소란스러운 움직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간혹 창문이 모두 닫힌 상태인데도 벽에 걸린 액자가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다거나 건조대의 그릇이 달그락 소리를 내서 깜짝 놀라곤 하는데 어찌보면 소름이 돋는 그런 상황까지도 모두 과학 현상으로 설명이 된다. 하지만 인간의 눈에 띄지 않을 뿐이어서 우린 그저 정적이라고 말할 뿐.


 

<물리학자가 들려주는 물리학 이야기>는 물리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13가지 주제(역학·, 대기압과 진공, 온도, 열역학, ·, 소리, 전류, 전자파, 방사선, 양자 역학, 원자, 자기와 전기, 소립자)를 선정하여 각각의 주제마다 공로를 세운 물리학자와 그들이 거둔 성과, 영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학창시절 과학시간에 배운 부분도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았다.


 

이를테면 [1장 역학(운동)]편에서 아리스토텔레스, 갈릴레이, 데카르트를 소개하면서 역학의 큰 흐름을 간단하게 짚은 다음 세 명의 인물이 무엇을 연구했는지 설명하는데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면서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의심했던 철학자 데카르트가 물리학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데카르트가 물리학을 폭넓게 연구했지만 실험과 검증을 거쳐 증명한 것이 아닌 사색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어서 엄밀히 따지자면 근대 과학자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2장 대기압과 진동]편에 소개된 파스칼은 완전히 다르다. 그도 역시 데카르트처럼 철학자였으나 수학과 과학에 있어 확실한 업적을 남겼다. 17세기 당시 종교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직접 실험을 통해 진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역시 파스칼의 원리를 활용한 것이고 타이어의 공기압을 측정하는 단위도 파스칼을 사용하고 있다니 역시 파스칼은 천재란 생각이 든다.


 

13개의 주제를 15개의 장으로 나누어 각 장마다 세 명씩, 모두 45(뉴턴이 중복되어 44)의 과학자와 그들의 연구성과를 만날 수 있는데 사진과 그림이 곁들여져 있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고대부터 21세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물리학의 역사를 280여쪽의 책으로 모두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책은 간단한 흐름을 파악하는 정도로 접근하면 좋을 것 같다. 저자가 소개한 과학자들 중에서 특별히 관심이 가거나 호기심이 생기는 부분은 본문 뒤에 수록해놓은 색인과 참고문헌을 참고해서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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