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보면 희곡, 멀리서 보면 연극

No. 1

 







* 연극저항집단 백치들 - 2023 연출 연극 프로젝트

이번 생은 참기 힘들어

히라타 오리자 지음

성기웅 옮김

이상명 번안 · 연출

11월 30일 관람






일본의 극작가 히라타 오리자(平田オリザ)의 희곡집은 현재 총 세 권이 번역 출간되었다. 제목은 도쿄 노트, 과학하는 마음, 서울 시민이다. 세 권 모두 2015년에 나왔는데, <혁명 일기>라는 제목의 희곡집은 출간되지 않은 상태다.



















* 히라타 오리자, 성기웅 옮김 도쿄 노트(현암사, 2013)

* [절판] 히라타 오리자, 성기웅 옮김 과학하는 마음(현암사, 2013)

* 히라타 오리자, 성기웅 옮김 서울 시민(현암사, 2013)





과학하는 마음과학자를 주제로 한 네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과학하는 마음, 북방한계선의 원숭이, 발칸 동물원과학 3부작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나머지 한 편은 공연작 이번 생은 참기 힘들어(약칭 이번 생’).


대명공연거리에 활동하는 극단 연극저항집단 백치들의 이번 생낭독극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배우들은 무대 위에 앉아서 대사를 읽는다. 때론 몇몇 인물은 연출된 동선에 따라 움직이면서 연기하기도 한다.


이번 생은 시골에서 기생충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일상적인 대화 장면이 주를 이룬다. 기생충학자 영민(남우희 분)은 기생충 연구를 위해 시골로 이사한다. 서울 토박이 유정(김강원 분)은 남편의 선택을 존중해서 시골로 왔지만, 여전히 이곳 생활이 낯설고 불편해한다. 그래도 그녀는 남편을 만나러 매일 기생충 연구소를 찾아온다. 영민과 같이 일하는 동료 학자들은 유정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주려고 친근하게 대한다. 동료들은 유정에게 자신들이 하는 일과 기생충 관련 지식을 알려준다. 그들과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유정은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또 다른 삶의 방식을 확인한다. 하나는 어떻게든 숙주를 만나야만 살 수 있는 기생충의 삶이라면, 또 하나는 연구실 안에서 생활하는 기생충학자들의 삶이다.


이번 생작품의 전체적 분위기와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가 등장한다. 주영(강민주 분)은 화이트보드에 기생충을 그리다가 말없이 서 있는 수수께끼의 존재를 만난다. 문제의 인물은 여우 가면을 쓰고 있다. 주영은 여우 가면 사나이가 영민일 거로 생각하고 말을 걸어보지만, 여우 가면 사나이는 묵묵부답이다이번 생을 번역한 극작가 겸 공연 연출가 성기웅은 작품 해설에서 여우 가면 사나이를 관객과 또 다른 연출가들의 상상력을 채울 수 있는 여백이라고 말한다. 여우 가면 사나이의 침묵은 그저 단순히 무의미한 행위일까? 아니면 작품 속 인물들과 관객들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픈 무언의 메시지일까?

















* 마이클 셔머, 김성훈 옮김 천국의 발명: 사후 세계, 영생, 유토피아에 대한 과학적 접근(arte, 2019)




나는 여우 가면 사나이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신 또는 영혼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신기한 현상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천국의 발명에서 불가사의한 현상의 원인이 과학적으로 규명되기 전까지는 즐기자고 말한다. 그 대신에 영혼의 힘과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들먹이지 말아야 하며 잘 모르겠어라고 반응하면 된단다. 이럴 때 모르는 게 약이다. 견강부회한 해석들을 가져와서 설전을 벌이면 정신 건강에 해롭다. 연극에 저런 장면이 나올 수 있구나하고 재미로 받아들이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들미산 2023-12-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연출을 맡은 이상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공연 관람 후에 글을 적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cyrus 2023-12-18 06:4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인스타그램에도 공연 감상문을 올리려고 했는데, 쓰고 싶은 글이 많아서 미루고만 있었어요. 이런 조용한 곳에 직접 찾아와서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 - 문학적 우정을 찾아서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4점  ★★★★  A-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서는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 패티 김 그대 없이는 못 살아(1974) 노랫말 -



금속이 단단해지려면 단련 작업을 거쳐야 한다. 불에 달구고 나서 세게 두드리면 된다. 엄청 뜨거운 색을 띤 금속을 차가운 물에 담근다. 이 과정을 담금질이라고 한다. 한 편의 글이 제대로 완성되려면 글의 구성 재료인 글쓴이의 생각이 단련되어야 한다. 생각을 단련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박힌 편견이나 거짓 정보를 세게 두드리면서 빼야 하기 때문이다. 이걸 빼지 못하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글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다 끝난 건 아니다. 글을 담금질해야 한다. 글쓴이의 주관적 감정이 너무 많이 들어간 글은 매우 뜨겁다. 글이 지나치게 뜨거우면 문장이 녹아내려서 엉성한 비문(非文)으로 변질되거나 논리적 구멍이 생긴다. 이런 글은 물렁물렁하다. 매우 연약해서 잊히기 쉽다. 반면에 완성도가 단단한 글은 독자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정확하고 냉철한 지성을 가진 독자는 글 속의 열기를 식혀줄 뿐만 아니라 비문과 논리적 구멍을 잘 찾는다.


글 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글을 쓰면 뜨거워지는 여자와 뜨거운 글을 담금질하는 친구들의 우정을 주목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쓰기와 읽기가 교직 되면서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여성들의 우정 문학적 우정이라고 부른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뜨거운 글은 자신보다 여섯 살 어린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가 담금질했다. 울프는 맨스필드의 세심한 논평에 감탄하면서도 그녀가 글을 발표하면 자신은 더 뛰어난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도 상대방이 쓴 글을 담금질하는 관계를 이어왔다. 울프와 맨스필드, 미드와 베네딕트, 이 네 사람은 글 쓰는 뜨거운 친구를 위해 믿을 만한 독자가 되어주었다. 잘 썼으면 칭찬해 주었고, 물렁물렁해진 글을 두드리는 비판도 아끼지 않았다.


살아있는 인간끼리 만나야만 우정이 맺어지는 건 아니다. 이미 글을 뜨겁게 쓰면서 살다 간 사람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오직 기록으로만 남은 친구를 직접 만나면서 말을 걸 수 없다. 하지만 살아 있지 않은 사람을 깊이 알아가면서 느끼는 친밀감은 어느 한쪽만 치우치는 일방적인 관계로 변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형태의 우정은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대면하는 경험이 있어야 우정과 친밀감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익숙한 생각을 뒤집는다. 아렌트는 자신보다 몇 세대 먼저 태어나고 살다 간 라헬 파른하겐(Rahel Varnhagen)을 절친한 친구라고 소개한다. 아렌트는 자신처럼 유대인 여성으로 살아온 라헬에 친밀감을 느꼈다. 라헬을 만나면서 뜨거워진 아렌트는 친구를 위한 전기(傳記)를 썼다. 이때부터 그녀는 유대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발견했고, 유대인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쏟는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관계가 포근하면 두 사람이 함께 덮은 공감대 이불은 점점 두꺼워진다. 하지만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관계의 적당한 온기를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관계의 절대 온도는 없다. 상대방의 단점과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면 공감대 이불은 얇아지고 관계의 온도는 차가워진다. 자신과 반대되는 온도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시리거나 얼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을 진정으로 믿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생기는 정신적 아픔은 성장통이 될 수 있다. 진실한 우정은 나보다 더 잘 되길 바라는 상대방의 단점이 멋진 장점이 될 수 있도록 계속 두드린다. 이런 좋은 친구를 곁에 두지 못하면 창작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러면 글을 쓸 수 없다. 담금질을 거친 문학적 우정은 두 사람의 능력을 더욱 빛나게 해 준다. 끈끈하게 엮인 우정을 먹고 자란 글은 튼튼하다.





cyrus의 주석



* 130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와 프랑스아 드 페늘롱의 텔레마코스의 모험에 등장하는 멘토르는 남성이다. 오뒷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나가며 자신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친구 멘토르에게 부탁했고, 멘토르는 기꺼이 텔레마코스의 스승이자 친구가 되었다.

오뒷세이아의 멘토르가 성숙하고 덕망 높은 남성을 상징하는 데 반해, 텔레마코스의 모험에서 멘토르는 다른 존재로 등장한다.[]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텔레마코스를 돕기 위해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멘토르로 변신해 텔레마코스와 함께했다는 프랑수아 드 페늘롱의 설정은 흥미롭다. 자연스럽게 스승과 친구의 자리를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남성들이 차지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가까이에서 아테네가 다가왔는데, 체격과 음성이 멘토르와 흡사한 여신은 그에게 날개 돋친 말을 쏘았다


- 김기영 옮김, 오뒷세이아》 (민음사, 2022년), 

2267~269행, 44쪽 -



[오뒷세이아에 묘사된 멘토르도 미네르바(그리스 신화의 아테네)가 변신한 인물이다.




* 245





제임스 조임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3-12-05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저 ˝조임스˝에서 빵 터짐요~~]

조이긴 조이는 작가네요 증맬루.

cyrus 2023-12-07 06:29   좋아요 0 | URL
문학동네에서 <율리시스> 나왔던데 어제 바로 주문했어요.. ㅎㅎㅎㅎ

stella.K 2023-12-05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글은 혼자선 못 쓰지. 내가 여기에 낙서 같은 글이라도 올리는 건 봐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글치않아도 찜한 책이야. 나중에 혹시 중고샵에 나오면 그때나 사 볼ᆢㅋ

cyrus 2023-12-07 06:30   좋아요 1 | URL
누님과 한 지역에 살았으면 제가 책 빌려주고 싶어요. ^^

그레이스 2023-12-07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오뒷세이아>에서도 아테네가 멘토르로 변신해서 텔레마코스의 여행을 돕는데,,, 프랑스와 드 페늘롱의 특별한 설정이라고 말할만한 변주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cyrus 2023-12-07 07:05   좋아요 1 | URL
<텔레마코스의 모험>이 두 권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오뒷세이아>의 멘토르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요. ^^

얄라알라 2024-01-07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제 고민에 대한 답이 담겨 있어서 그럴까요?
작년말부터 요즘, 최근 읽은 글 중에 가장 쏘옥 쏘옥 마음에 와서 박혔어요.
고맙습니다 cyrus님!!

cyrus 2024-01-08 06:36   좋아요 1 | URL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많아요. 그런데 상대방의 글을 꼼꼼하게 읽는 사람은 많이 없어요. 사실 저 또한 글을 쓰고 싶은 사람에 속해 있어서 상대방의 글을 내 글을 보는 만큼 읽진 않아요. 그리고 글쓴이에게 글에 대해서 의견을 내는 것도 조심스러워요. ^^;;
 
소피의 세계 (합본) - 소설로 읽는 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2.5점  ★★☆  B-




[대구 서점 <일글책> ‘하루 10분 벽돌 책 함께 읽기’ 프로젝트 

네 번째 책(2022년 11~12월)]


[대구 인문학 책방 <읽다익다> 명상과 낭독선정 도서]





소피의 세계읽기 쉬운 철학책을 주제로 꾸민 도서 큐레이션의 단골 책이다. 이 책은 1991년 노르웨이에서 처음 발표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국역본은 199412월에 첫선을 보였다. 청소년을 위한 철학책 소피의 세계는 성인도 접근하기 어려운 철학책 출간이 주를 이루던 당시 90년대 초중반 출판 시장에서 단언 돋보이는 책이었다.

 

소피 아문센(Sophie Amundsen)은 노르웨이의 어느 마을에 살고 있는 소녀다. 소피는 이름이 없는 발신인이 보낸 의문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에 알쏭달쏭한 질문만 적혀 있다.너는 누구니?’ 편지를 보낸 사람은 자신을 철학자라고 소개한 알베르토 녹스(Alberto Knox). 철학자는 소피를 위해 철학사의 주요 인물과 개념들을 편지에 담아서 알려준다. 소피의 철학 수업은 가장 오래된 철학적 질문이 적힌 편지 한 통에서 시작된다. 철학을 풀어낸 소설에 등장인물들의 정체를 추리하게 만드는 추리물 요소까지 잘 섞여 있어서 이야기를 끝까지 보게 만든다.

 

2015년에 출간 20주년을 맞아 합본으로 된 소피의 세계전면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노르웨이 인명과 지명을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고쳤으며 일부 문장과 단어를 새로 수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도, 책도 시간이 지나면 늙는다.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가치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녹이 슨다. 가치관이 형성하는 데 유용한 영양분이 되어준 책 속의 지식은 점차 텁텁한 맛으로 변한다.

 

녹스는 소피와 소설 밖 독자들에게 한 가지 슬픈 사실을 상기한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중력의 법칙에만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동시에 이 세계 자체에 길들고 있다는 사실을. 책 소개하는 도서 큐레이터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독자에게 소피의 세계를 추천했다면, 그 사람은 오래돼서 녹슨 소피의 세계에 완전히 길들어진 상태일 수 있다. 그리고 소피의 세계에 여전히 고쳐야 할 내용들이 있다는 사실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늙어버린 책을 읽으면 머릿속 생각과 지식도 같이 늙는다. 지적 노화는 의심하고 질문하는 습관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책 속 인물은 영원히 늙지 않는다. 그들은 얼굴에 늘어나는 주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들이 옳다고 믿는 지식으로 꾸민 생각은 노화를 피할 수 없다. 녹스의 정신은 녹슬어 늙었다. 그가 소피 아문센에게 가르쳐준 것들 일부는 낡고 편협하다.

 

녹스는 이성의 중요성을 틈틈이 강조한다. 그는 소크라테스(Socrates) 이성을 강하게 믿은 명백한 합리주의자로 평가한다. 그런 다음에 소피스트(Sophist)를 소크라테스와 정반대되는 () 철학적 노선을 따른 학파로 분류한다. 오랫동안 소피스트는 철학적이지 않은 불한당으로 취급받았다. 녹스는 이성과 합리주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주류 철학사에 길들어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소피스트 역시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말(logos)과 덕(arete)의 정의와 역할에 관심이 많았다[주1]. 소피스트에게 말은 그저 돈벌이를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대화법인 산파술의 창시자로 알려졌지만, 가장 유명한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도 질의응답으로 철학을 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녹스는 실제보다 과장된 신화로 알려진 뉴턴의 사과일화를 언급한다(308). 뉴턴은 사과나무 아래에서 중력의 심오한 실체를 단 몇 분 만에 알아차리지 않았다. 과학은 우연한 순간에 의해 발전하지 않는다. 과학 역시 철학과 마찬가지로 어떤 현상을 의심하고 검증하는 행위들이 차곡차곡 모여져서 만들어진 학문이다.

 

녹스는 제대로 된 과학 수업을 받아야 한다. 특히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을 다시 배워야 한다. 그는 다윈이 인간을 비열한 생존 경쟁의 결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598). 녹스는 다윈이 자신의 책 종의 기원에서 밝힌 진화론다윈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인 관점이 들어간 다른 형태의 진화론을 명백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후자는 자신을 진정한 다윈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실은 우생학자에 가깝다. 다윈의 진화론과 다윈주의자의 진화론은 같지 않다[주2].

 

녹스는 프랑스 혁명의 구호자유, 평등, 박애라고 표현했다(458). 박애는 원래 의미와 동떨어진 표현이다. 서양 학문을 접한 우리나라 근대 개화기 지식인들이 동시대 일본 지식인들의 번역을 그대로 따라 쓴 게 박애.박애로 잘못 알려진 프랑스어 ‘fraternité’형제애연대감을 뜻한다. 그런데 형제애로 번역하면 혁명에 참여한 여성을 차별하는 기준이 된다. 실제로 세상을 바꾸려고 거리에 나선 여성들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자유평등을 보장받지 못했다.

 

녹스는 소피 아문센에게 비판적인 사유를 가르치려고 했다. 부모 세대의 가치 체계뿐만 아니라 방대한 철학사를 압축한 이 책 또한 비판 대상이다. 녹스 선생! 똑바로 앉아 있어요? 불멸의 존재인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적 노화를 스스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답니다.[주3]





[1] 참고 문헌: 강철웅 옮김 소피스트 단편 선집》 

(아카넷, 2023), 2

 

[2] 참고 문헌: 양자오, 류방승 옮김 종의 기원을 읽다》 

(유유, 2013)


[3] 녹스가 소피에게 한 말을 패러디한 문장이다.

 

 소피야! 똑바로 앉아 있니? 네가 남은 철학 수업에서 철학자와 소피스트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단다. (11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3-12-04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별점이 넘 짠데? ㅋ 이 책이 첨 나왔을 때 인기 대단했지. 나도 그 틈바구니에서 읽었고. 맞아. 어떤 책은 시대를 거스르지만 지금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어떨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 책은 그저 철학에 좀 더 가까이 가게하는 안내서 정도로만 생각하지 대단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적어도 나는. 오히려 그 이후 내가 철학을 좀 가까이 하게될까 싶었는데 역시 그건 아니더군. 재미있게 읽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나와 비슷한 철학 문외한에게 적극 권하지는 못 할 것 같다. 이후로 비슷한 책이 많이 나왔겠지만 어느 책이 좋은지 난 잘 모르니. 잘 읽었어.^^

cyrus 2023-12-04 21:19   좋아요 0 | URL
뒤에 가면 갈수록 3부의 현대철학 내용이 빈약했어요. 하이데거는 철학 전공자도 공부하기 어려운 철학자예요. 저자가 그걸 염두에 두면서 쓴 건지 모르겠는데 녹스 선생은 하이데거를 거르고 실존주의에 관해 설명했어요. 참고문헌이 없는 것도 아쉬웠어요. 그래서 평점을 깎았어요. ^^
 
위대한 파리
에리카 맥앨리스터 지음, 이동훈 옮김 / 마리앤미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4.5점  ★★★★☆  A





 

 안 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아니요, 아직까진‥….” 그가 말했다. 김 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날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날 수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내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날 수 있는 것으로서 손안에 잡아 본 적이 있으세요?”

 “가만 계셔 보세요.” 그는 안경 속에서 나를 멀거니 바라보며 잠시 동안 표정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없어요, 파리밖에는‥….”

 

-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중에서

무진기행(민음사, 2007), 43-



2024년이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겨울을 대구에서 지내는 나. 서른다섯 살짜리 대구 출신인 나는 위대한 파리라는 책을 다 읽었을 때 갑자기 할 말이 생겼다. 마음속으로 파리에게 감사하고 나서 하고 싶은 얘기를 시작한다.[주1]

 

여러분은 파리를 사랑하세요?”

 

내 질문을 마주친 여러분은 너무 황당해서 퍼뜩 대답하지 못한다. 말문이 막힌 여러분의 머리 주변에 물음표들이 ? ?’ 거리며 날아다닌다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김 형이 선술집에서 군참새 안주를 집으면서 말했던 파리. 조만간 2024년을 대구에서 만나게 되는 내가 방금 말한 파리. 이 파리는 모두 곤충이다2024년은 파리의 해다. ! 방금 말한 파리는 곤충은 아니고 프랑스의 수도다. 내년 올림픽 개최지는 파리(Paris). 전 세계 사람들이 축제의 도시로 몰려 들어오면, 날아다니는 파리도 파리행 인간의 몸을 타고 건너온다말장난 같이 들린다고? 웃자고 한 말이 아니다. 파리는 지구상에서 적응력이 뛰어난 생명체다. 파리는 어디에나 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건 물론이고, 미국의 도시 파리(Paris)[2]에도 있다.


여러분 중 누군가가 안 형이 되어 내게 최 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파리는 어디든지 살 수 있으니까. 놀랍게도 파리는 바다에서도 산다. 바다에 서식하는 파리는 단 네 종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사는 파리의 생존력은 인간 입장에서 바라보면 달갑지 않다. 파리가 우리만 보면 졸졸 따라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나면 반드시 피해야 할 파리도 있다. 얼굴파리는 인간 눈과 코에 나오는 분비물을 먹는다. 눈치코치 없는 얼굴파리가 인간의 눈과 코를 접시로 삼아서 식사에 열중하면 자신의 몸속에 있는 병균을 흘린다채식 파리목에 속한 과실파리와 혹파리 유충은 식물 뿌리를 먹으면서 자란다. 유충으로 인해 뿌리가 많이 손상되면 식물의 수명은 짧아진다.


무시무시한 몇몇 녀석이 날아다닌다고 해서 파리를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곤충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파리가 없으면 자연은 엉망진창이 되고, 지구가 살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파리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꿀벌처럼 꽃가루를 먹으면서 살아가는 파리가 있다. 꽃 찾으러 부지런하게 날아다니는 이들 덕분에 꽃들의 수분이 원활히 이루어지고, 열매가 맺어진다.


부식성 파리목에 속한 파리는 작은 청소부. 부식성(腐食性)은 사체나 썩은 고기를 먹는 생물의 식성을 뜻한다. 하지만 부식성 파리목은 말라 죽은 식물과 썩은 낙엽도 좋아한다. 부식성 파리목이 없으면 썩지 못해서 완전히 분해되지 않은 사체와 죽은 식물이 즐비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구는 거대한 쓰레기장이 된다.


위대한 파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파리의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파리의 매력에 푹 빠진, 파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책에 파리뿐만 아니라 파리의 친척 모기도 등장한다. 모기는 밤이 되면 피를 훔쳐 먹고, 잠을 깨우게 만드는 성가신 녀석이다. 그런데 모든 모기가 피만 먹으면서 사는 건 아니다. 수컷 모기는 꽃가루를 먹는 채식주의자다. 암컷 모기도 꽃가루를 좋아하는데, 산란하기 전에 피를 섭취한다. 핏속에 있는 단백질은 모기알을 발달시키는 영양분이다. 우리의 소중한 피를 먹을 수밖에 없는 모기의 사정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기도 사랑하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다.

 

알면 사랑한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가 자주 강조하는 말이다. 이 단순한 말을 반대로 생각해 보자. 알지 못하면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 없는 감정으로 나와 다른 존재를 대하면 그 관계 속엔 편견과 증오만이 남아 있다. 사랑까지 바라지 않는다. 일단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잘 알지 못하면서 다른 존재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 등을 왈가왈부하면 안 된다. 파리를 사랑하는 위대한 파리의 저자는 지금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파리들이 많다면서 행복한 불만을 드러낸다. 파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 사랑한다.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도움을 주는 파리가 있다는 사실만은 꼭 알아 두자.






[주1] 서평 첫 두 문장은 서울 1964년 겨울』 속 문장 일부를 빌려서 섞어 쓴 것이다모든 인용문의 출처는 무진기행(민음사).

 


*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중략)

 

* 그는 내가 스물다섯 살짜리 시골 출신, 고등학교를 나오고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다가 실패하고 나서 군대에 갔다가 임질에 한 번 걸려 본 적이 있고 (중략)

 

* 나는 새카맣게 구워진 군참새를 집을 때 할 말이 생겼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군참새에게 감사하고 나서 얘기를 시작했다.

 


[2] 미국 아칸소주 로건 카운티(Logan County)에 있는 도시.






<cyrus의 주석>



   

* 166, 173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검정파리과의 검정파리 중 일부 종은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사체도 탐지할 수 있다. 무려 16킬로미터 떨어진 사체를 찾아온 일도 있다.

 하와이에서 일하는 법의곤충학자인 매디슨 리 고프(M. Lee Goff) 박사[3]는 파리들의 이동 속도 또한 매우 빠르다는 것도 알아냈다. 불과 10분 만에 온 사례도 있다. 파리는 그만큼 신속하며 또 그래야 한다. 부패하는 사체는 그 속성상 상태가 계속 변하는 식량 자원일뿐더러 다양한 성장 과정의 다양한 곤충 종이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식량 자원이기 때문이다. (중략)

 당시 고프는 의약품, 특히 코카인이 구더기의 성장에 주는 영향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 기소하는 파리(A fly for the Prosecution)[3]에서, 실험용 토끼에서 코카인을 부여하기 투여하기 위해 동물보호 및 사용위원회에 출원했던 얘기, 그리고 합법적으로 코카인을 구매하기 위해 겪었던 일들을 매우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3] M. 리 고프의 책 기소하는 파리파리가 잡은 범인(황적준 옮김, 해바라기, 2002)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으나 절판되었다.





* 363~364

 

 영국의 연구자 데이브 굴슨(Dave Goulson)[주4]과 동료들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2080년이 되면 기후 변화로 인해 집파리 개체수가 2005년의 244퍼센트로 늘어날 거라고 한다. 파리를 좋아하는 나에게도 너무 많은 수다. 기후 변화의 구체적 양상과 그것이 인간과 환경에 줄 영향을 완벽히 점칠 수는 없다. 그러나 파리의 삶에도 영향을 줄 것은 확실하다.



[4] 데이브 굴슨은 기후 변화로 인해 곤충이 멸종되는 현상을 우려하는 곤충학자다. 그는 자신의 책 침묵의 지구: 당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장 작은 종말들(이한음 옮김, 까치, 2022)에서 곤충 멸종이 지구의 풍요로운 환경을 파괴하는 지름길임을 경고한다. 굴슨은 벌 연구 권위자로 유명한데, 사라진 뒤영벌을 찾아서(이준균 옮김, 자연과생태, 2016년, 절판)도 번역 출간되었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3-11-21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프랑스 파리에 관한 도서로 생각하고 그냥 패스했는데.ㅠㅠ 소개글 감사하게 읽었어요.

페넬로페 2023-11-2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면 사랑하게 된다지만
그래도 어쩐지 곤충 파리를 사랑하기에는~~
음, 흠흠 ㅎㅎ

새파랑 2023-11-21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날아다니는 파리군요. 저는 프랑스 파리를 생각했습니다 ㅋㅋ

파리를 사랑할 수 있다니 좀 신기하긴 합니다~!!

초란공 2023-11-22 18:05   좋아요 0 | URL
우연히 <달과 6펜스>를 들춰보다가 이런 대목이 나와서 새파랑님 생각이 났습니다. 소설의 화자가 부인과 아들을 버리고 떠난 스트릭랜드를 만나러 갔다가 스트릭랜드를 만나서 “파리를 잘 아십니까?” 이렇게 묻더라고요. ㅋㅋㅋ cyrus님은 “그럼요!”라고 대답하셨을듯 ㅋ

짜라투스트라 2023-11-2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다양한 파리도 있군요^^

서니데이 2023-11-22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태계에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파리랑 모기 싫어요.
이제 추워졌으니 내년까지는 자주 보지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인데.^^;
cyrus님,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은빛 2023-11-22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는 아무래도 사랑까지 하기는 어렵죠. 날파리류라고 흔히 부르는 작은 날붙이들은 그래도 크게 귀찮지는 않은데, 파리는 그 날개짓 소리와 크기가 있어서 아무래도 거슬리는 건 사실입니다.

저는 거미는 좋아하는 편입니다. 거미가 모기를 비롯해 작은 벌레들을 해결해주니 좋아할 수 밖에 없죠. 저는 집안 구석 구석 거미집을 발견해도 잘 제거하지 않고 놔둡니다. 거미를 직접 잡는 일도 없구요.

예전에 생태전문 잡지사에 일할 때 들었는데, 우리나라에 곤충 연구자가 많지 않은데, 특히 파리 연구자는 거의 없다고 하더라구요.

순수한 생물학으로서 파리 연구보다도 범죄 수사를 위한 파리 연구가 더 활발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눈부신 심연 - 깊은 바다에 숨겨진 생물들, 지구, 인간에 관하여
헬렌 스케일스 지음, 조은영 옮김 / 시공사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4.5점  ★★★★☆  A





 바다의 표면이 고요하다고 해서 깊은 곳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요슈타인 가아더, 소피의 세계: 소설로 읽는 철학(합본, 장영은 옮김, 현암사, 2015) 중에서, 448쪽 - 



인명사전을 펼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은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이다. 가가린은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한 구 소련의 우주인이다. 1961412일 가가린이 탄 우주선 보스토크 11시간 29분 만에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가가린은 눈동자 속으로 들어온 지구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는 평생 단 한 번으로 남게 될 지구와의 눈맞춤을 이렇게 술회했다.



 “우주는 매우 어두웠지만 지구는 푸르렀습니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거대한 지구는 가가린의 기억 속에 푹 박혔다1990년 미국이 쏘아 올린 우주선 보이저 1가 우주 한가운데서 유유히 움직이는 지구를 촬영했다. 그 사진을 본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은 검은색 종이에 살짝 찍어놓은 점처럼 보이는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불렀다.


우주는 지구 밖에만 있는 건 아니다. 지구는 아주 오래된 우주를 품고 있다. 지구가 품고 있는 이 우주는 보는 사람에 따라 푸르게 보일 수 있고, 어둡게 보일 수도 있다지구에 있는 검푸른 우주의 정체는 바로 심해다대부분 사람은 우주에 외계 생명체가 있다고 믿는다. 거대하면서도 텅 빈 우주에 인간 이외에 생명체가 살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바다 깊숙한 곳에 있는 우주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 특히 심해어의 생김새는 마치 외계 생명체를 연상케 할 정도로 독특하다. 간혹 심해어가 바다의 표면에 나타나서 인간의 손에 포획되거나 이미 죽은 상태로 해변에 발견되면 정체불명의 괴물로 오해하기 쉽다.


미국의 소설가 H. P.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공포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라고 말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을 보면 두려움을 느낀다. 우주와 심해는 우리에게 호기심과 공포라는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그렇지만 호기심이 공포를 억누르고 관심 어린 눈길을 천천히 넓히면 거대하고도 어두운 미지의 세계 속에 있는 눈부신 빛 한 줄기를 볼 수 있다눈부신 심연》은 검푸른색에 가려진 심해 속의 밝은 빛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심해 탐사선과 같은 책이다심해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지만,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심해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 책에 탑승하면 된다. 종이로 만든 심해 탐사선으로 심해를 탐험하면 심해의 엄청난 수압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의의 사고를 피할 수 있다. 


심해는 아주 고요한 검푸른색으로만 채워진 깊숙한 우주가 아니다. 눈부실 정도로 알록달록한 우주다. 심해 생물들은 발광 기관을 가지고 있다. 빛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 적응한 심해 생물은 반딧불이처럼 스스로 빛을 낸다. 그들의 몸에서 나는 빛은 청색과 녹색이 섞여 있다. 알록달록 빛나는 심해 생물들로 가득한 심해는 어둡지 않다. 그곳에 각양각색 빛나는 생명이 명확하게 보인다


심해는 최초의 생명체가 태어나고 자랐던 아주 오래된 요람이기도 하다. 세포는 모든 생명체의 시작점이다. 원시 세포는 엄청 뜨거운 물을 마구 뿜어대는 열수구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지금도 열수구 주변에 진귀한 심해 생물들이 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학명이 없는 미지의 생물들도 있다.


호기심이 공포심보다 많으면 심해는 더 이상 낯설고 두려운 우주로 보이지 않는다. 심해의 수심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심해에 처치 곤란한 쓰레기와 핵폐기물을 버리자고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구가 소중히 품고 있는 우주이자 지구 최초의 생명체가 태어난 뜨거운 요람에 쓰레기를 버리자고? 인간은 공룡과 곤충보다 늦게 나타난 동물인데도 이기적이다. 심해를 검푸른 광산으로 여기는 국가와 기업들은 철, , 아연, 코발트 같은 광물을 채굴하는 사업을 계획한다. 인간의 탐욕스러운 손길이 우주뿐만 아니라 심해까지 뻗을 기세다. 심해가 자원이 풍부한 광산으로 알려지면 심해 생물의 보금자리는 파괴된다. 집을 잃은 심해 생물은 살기 위해 해수면 위로 올라가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알록달록한 생명 다양성의 보고인 심해가 쓰레기장 혹은 광산이 되면 그곳은 빛나는 생명 한 점조차 볼 수 없는 침묵의 우주가 될 것이다.


생명을 키우는 요람이 된 심해는 느릿느릿 흔들거린다. 바닷속 뜨거운 요람을 빠르게 흔들고 싶은 인간의 손은 필요 없다. 심해는 자신의 속도에 맞춰 움직였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날 수 있었다. 지금도 심해는 뜨겁고, 살아있는 존재들을 위해 천천히 요동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