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은 여전히 푸르다. 한때 개천 주변 거리에 하얀색과 누런색이 제법 많았다. 애서가들은 두 개의 색이 활짝 펼쳐진 헌책방 거리를 걸었다보도블록에도 깔린 헌책방 거리의 색깔은 하천과 함께 흐르는 시간에 의해 씻겨 나갔다먼지를 털어내면서 책을 만지작거리던 애서가들의 손길도 줄어들었다현재 거리에 남아 있는 헌책방 가게는 열 개도 채 되지 않는다.


내가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처음으로 갔던 해는 2013년이다. 십 년이나 훌쩍 지났으니 그때 가본 헌책방 가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지난주 토요일은 독서 모임 <달의 궁전> 모임 날이었다. 아침 일찍 서울에 도착한 나는 청계천을 걸으면서 헌책방 거리로 향했다청계천 헌책방 가게들은 비좁다. 가게 입구부터 시작해서 사방에 책들이 쌓여 있어서 겨우 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 내가 첫 번째로 들어간 헌책방은 <대원 서점>이다.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연세가 지긋한 헌책방 주인은 매입한 책들이 담긴 쇼핑백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잠시 가게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대원 서점>에 만난 책들은 미국의 추리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의 유명한 장편 소설 두 권과 고전 평론가 고미숙의 대표작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다.

















* [리커버판]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북드라망, 2023)

 

* [개정 신판-절판]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북드라망, 2013)

 

* [구판-절판]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 2003)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2003년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해 당시에 <TV, 책을 말하다>라는 책 소개 전문 프로그램이 KBS 1TV에 방영되고 있었다. 밤 열 시에 하는 프로그램이라서 매주 챙겨 보지 않았지만, 이 프로그램에 소개된 책들을 브라운관에서 만나면 그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이 가슴에 솟아올랐다. 책을 마음껏 살 수 없는 중학생인 나는 도서관에서 가서 방송에 나온 책들을 빌려 읽었다. 생각이 어린 중학생 머리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책들은 끝까지 읽지 못했다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읽다가 중간에 포기한 책 중 하나다. 왜냐하면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하는 서양 철학들이 상당히 낯설었기 때문이다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서양 작가나 사상가들의 이름은 잊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그들이 쓴 책에 다시 도전했다.









 









* [절판] 샤를 보들레르, 김붕구 옮김 악의 꽃(민음사, 1974)




한밤중에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TV, 책을 말하다>을 마주친 나는 그 방송 프로그램 덕분에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를 알았다. 가수 조영남이 출연해서 불문학자 김붕구 선생이 번역한 보들레르 시집을 추천했다.




















* 레이먼드 챈들러, 박현주 옮김 빅 슬립(북하우스, 2004)


* [절판] 레이먼드 챈들러, 박현주 옮김 기나긴 이별(북하우스, 2006)


















* 레이먼드 챈들러, 김진준 옮김 빅 슬립(문학동네, 2020)


* 레이먼드 챈들러, 김진준 옮김 기나긴 이별(열린책들, 2020)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hard-boiled) 문체는 간결하고, 화자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갑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챈들러의 소설을 읽은 이후로 하드보일드 문체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 장 베르나르 푸이 · 파트릭 레날 · 프랑수아 게리프 · 알프레드 에벨 · 로베르 콩라트 함께 지음, 이규현 옮김 필립 말로(이룸, 2004)





챈들러가 만든 탐정 필립 말로(Philip Marlowe)코난 도일(Conan Doyle)이 창조한 탐정 셜록 홈스(Sherlock Holmes)보다 더 냉소적이면서 거칠거칠한 남성성을 드러낸다빅 슬립은 챈들러의 첫 번째 장편이자 말로가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이다기나긴 이별은 말로 시리즈의 후기 작품이다.


















* 크리스토퍼 말로, 강석주 옮김 말로 선집: 에드워드 2/ 파리의 대학살 /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나남출판, 2011)

 

* 크리스토퍼 말로, 강석주 옮김 탬벌레인 대왕 / 몰타의 유대인 / 파우스투스 박사(문학과 지성사, 2002)

 

[대구 세계 문학 전문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첫 번째 책]

* 슈테판 츠바이크, 정상원 옮김 감정의 혼란(하영북스, 2024)

 

 


하드보일드 탐정의 이름은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에서 따왔다. 말로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와 동시대에 활동한 극작가다지금은 영국 연극사를 대표하는 작가로 셰익스피어가 많이 언급되지만, 영국 연극이 절정을 이룬 엘리자베스 1(Elizabeth I) 시대에 가장 인기가 많은 극작가는 말로였다. 당시 셰익스피어는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신인 극작가였다. 젊은 셰익스피어는 말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셰익스피어와 말로는 영국 연극사의 맞수로 거론되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중편소설 감정의 혼란이다. 소설에 나오는 늙은 교수는 셰익스피어를 찬양하고, 그를 따르는 젊은 제자는 말로를 좋아한다. 두 사람은 선호하는 극작가가 달라서 갈등을 빚는다.



















* 레이먼드 챈들러, 정윤희 옮김 살인의 예술(레인보우퍼블릭북스, 2021)

 

* [절판] 레이먼드 챈들러, 최내현 옮김 심플 아트 오브 머더(북스피어, 2011)

 

* 레이먼드 챈들러, 안현주 옮김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북스피어, 2014)




심플 아트 오브 머더》(The Simple Art of Murder)는 미국과 영국 추리 문학 작품들에 대한 챈들러의 비평이 담긴 에세이다. 그는 모든 장르의 소설은 현실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이 글의 첫머리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핵심이자 챈들러의 문학을 압축한 챈들러레스크(Chandleresque)’의 핵심이다. 챈들러는 영국의 추리 문학을 비판적으로 비평하면서 미국에 유행한 하드보일드 추리 문학의 매력을 알린다. 영국의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들은 지식을 동원해서 사건을 풀어나가는 귀족이자 학자. 반면 하드보일드 탐정은 사건 해결보다는 사건이 발생한 세계 또는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 속 세계는 비열하고 비정하다. 하드보일드 탐정은 냉정한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

















레이먼드 챈들러, 승영조 옮김 레이먼드 챈들러밀고자 외 8》 (현대문학, 2016)





원래 《심플 아트 오브 머더표제작인 에세이와 총 열한 편의 단편 소설이 함께 실린 책이다(1950년 발표). 북스피어 출판사가 출간한 심플 아트 오브 머더는 에세이와 단편 소설 스패니쉬 블러드(Spanish Blood, 1935)만 수록된 책이다. 살인의 예술 에세이는 없고,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챈들러의 몇 안 되는 단편 소설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은 단편 선집 레이먼드 챈들러: 밀고자 외 8 유일하다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편지를 가려 뽑아서 다섯 개의 주제로 묶은 서한집이다이 책에 수록된 편지들은 챈들러가 지향하는 문학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중요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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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6-16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비교적 깨끗해 보인다. 저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나도 갖고 있긴한데 아직도 못 읽고 있다. ㅠ 청계천을 다녀왔구나.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청계천 헌책방 골목 한 번 안 나가봤으니 나는 별로 책을 사랑하는 영혼은 아닌 것 같아. ㅠ 그 사이 헌책방이 줄어도 너무 많이 줄었나 보다. 일본엔 진보초란 울나라로 치면 청계천 같은 곳인데 한 마을 또는 플레이스 개념으로 보존되어 있는가 봐. 서점계가 어렵긴 일본도 마찬가진가 본데 그래도 그런 자구책일 가지고 서로 상생 노력한다는 게 기득하더군. 읽을 헌책은 많고 시력은 떨어지고. 그러며 사는 거지 별수 있니? ㅋ

cyrus 2025-06-24 06:37   좋아요 1 | URL
책이 많이 있는 유명 대형서점이나 유명한 헌책방에 한 번도 안 갔어도 꾸준히 책을 읽으면서 산다면 책을 좋아하는 영혼이에요. 저는 서울에 자주 가면서 광화문 교보문고와 아크앤북 잠실 롯데월드몰에 한 번도 안 가봤어요. 그리고 지난 주에 종료된 국제도서전에도 안 갔어요.. ^^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공장주의 아들이 아닌 공산주의자가 되고 싶었다그의 아버지는 방직 공장을 운영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가업을 이어주길 바랐지만, 사회 개혁을 꿈꾼 청년 엥겔스는 독일에 유행한 급진적 사상에 관심이 있었다엥겔스는 청년 헤겔파또는 헤겔 좌파로 알려진 젊은 급진주의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청년 헤겔파 중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바로 마르크스(Karl Marx).


















* 피터 싱어, 노승영 옮김 마르크스(교유서가, 2019)

 

* [절판] 조너선 울프, 김경수 옮김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책과함께, 2005)





젊은 마르크스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헤겔(Hegel) 철학에 딱 달라붙어있다고 썼다. 헤겔 철학의 핵심 개념은 정신(Geist)’이다. 모든 존재의 정신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식하면서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완전한 자기 인식에 도달한 절대정신은 역사의 종착점이다헤겔주의자는 절대정신의 진보와 발전에 힘입어 만들어진 세계가 합리적이며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종교는 절대적 진리이다. 청년 헤겔파는 헤겔 철학을 뼛속 깊이 받아들이는 헤겔주의자가 아니다. 청년 헤겔파는 헤겔의 철학적 관점을 이용해 자유와 참된 자기 인식을 방해하는 종교를 비판한다


종교를 비판하는 청년 헤겔파의 무신론은 종교와 관련이 깊은 정치적 권력을 공격하는 일과 비슷하다. 보수적인 기득권 계층은 청년 헤겔파의 등장을 위협적으로 느꼈다엥겔스의 아버지는 군 복무를 마친 아들을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자신의 공장으로 보냈다당시 맨체스터는 런던 다음으로 무섭게 발전하고 있는 산업 도시였다엥겔스의 아버지는 아들의 정신 개조를 위해서 엥겔스를 부르주아지(bourgeoisie, 유산 계급)의 천국으로 보낼 속셈이었다엥겔스와 급진주의자들의 교류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엥겔스가 공장을 경영하는 일을 배우도록 해서 부르주아지로 만들려고 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이재만 옮김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라티오, 2014)





하지만 독일 공장주의 계획은 빗나갔다오히려 엥겔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엥겔스는 죽어라 일만 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무산 계급)의 빈곤한 삶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은 엥겔스가 맨체스터와 영국 북부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의 실상을 상세하게 기록한 저서이다그는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부르주아지였다사회주의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부르주아지 지식인들은 엥겔스의 활동을 모순에 가까운 이중성이라고 비난했다그러나 엥겔스는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을 만났다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엥겔스는 부르주아지 지식인들 앞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들려주는 확성기 역할을 했다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함께 씀독일 이데올로기(두레, 2015)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함께 씀, 이진우 옮김 공산당 선언(책세상, 2018)

 

* [절판]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함께 씀, 권화현 옮김 공산당 선언(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1840년대 초중반, 프랑스 파리에서 마르크스를 다시 만나면서 공산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쌓았다두 사람이 함께 쓴 독일 이데올로기젊은 시절에 만난 헤겔 좌파와의 결별을 알리는 동시에 역사적 유물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책이다공산당 선언은 부르주아지 중심의 세상을 향해 던진 첫 번째 공산주의 강령이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심각한 건강 상태를 꽤 많이 언급한다열악한 위생 상태는 하층 계급의 수명을 빼앗는 전염병을 일으킨다대부분 노동계급 가족은 너무 가난해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부실한 식사는 자녀들의 성장과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병원에 갈 수 없는 아픈 노동자들은 아주 저렴한 약에 의존하다시피 살아간다그런데 그들이 자주 복용하는 약은 오히려 건강을 악화시킨다노동자들이 주로 찾는 약은 만병통치약으로 과장되었고돌팔이 의사들이 만든 것이다.

 

엥겔스는 노동자들의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사회라고 지적한다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은 빈민가의 그늘에 가려진 노동자의 건강권 침해 문제를 조명한 책이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025년 6월의 세계 문학]

* 토머스 드 퀸시, 김석희 옮김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시공사, 2010)





엥겔스는 액체로 된 아편이 주성분인 고드프리 강장제(Godfrey’s Cordial)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치는 가장 해로운 약이라고 말한다(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152쪽). 당시 아편은 약국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영국 노동자들은 몸이 아픈 자녀에게 아편 팅크를 먹였다엥겔스는 노동자들이 아편을 지나치게 남용하고 있다면서 우려를 표했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은 1845년에 발표된 책이다. 엥겔스의 책이 나오지 않은 24년 전에 이미 가난한 노동자들의 아편 복용 실태를 영국 사회에 알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편 중독자 토머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드 퀸시는 자신이 아편에 탐닉하게 된 이유를 1821년에 쓴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에서 밝힌다드 퀸시가 태어난 곳은 맨체스터다. 그의 아버지는 면직물 수입상이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맨체스터의 면직물 노동자들의 아편 중독을 언급한다.




 몇 년 전 내가 맨체스터를 지나가다가 몇몇 면직물 업자한테 들은 바에 따르면, 직공들이 아편 복용 습관에 급속히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토요일 오후에는 모든 약종상의 계산대가 밤에 찾아올 단골손님들의 주문에 대비하여 미리 늘어놓은 1그레인, 2그레인, 3그레인의 환약으로 가득 메워질 정도라고 한다. 이런 습관을 낳은 직접적인 원인은 저임금이었다. 당시 직공들은 저임금 때문에 맥주나 위스키에 탐닉할 여유가 없었다. 임금이 올라가면 이 습관도 저절로 사라질 거로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편이 주는 천상의 쾌락을 한 번 맛본 사람이 알코올처럼 조잡한 세속의 음료가 주는 즐거움으로 전락하리라고는 선뜻 믿을 수 없다.


(드 퀸시, 김석희 옮김,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중에서, 14~15쪽)



드 퀸시는 노동자들이 아편에 빠지는 원인을 저임금이라고 주장한다. 쉬지도 않고 온종일 일한 노동자들은 피로를 풀기 위해 술집을 찾았다. 그러나 술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노동자들은 약국으로 향했다. 약국에 가면 적지 않은 돈으로 아편을 많이 구매할 수 있었다당시 영국 노동자들은 아편을 몸에 좋은 약으로 믿었기에 아편이 술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절판] 카를 마르크스, 강유원 옮김 헤겔 법철학 비판(이론과실천, 2011)


* 미카엘 뢰비 · 엠마뉘엘 르노 · 제라르 뒤메닐 함께 씀, 배세진 옮김 마르크스주의 100단어(두번째테제, 2018)





엥겔스와 드 퀸시는 영국 사회가 방치하고 있었던 노동계급의 아편 중독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드 퀸시는 아편 중독을 비판한 의사와 지식인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드 퀸시를 비난한 지식인들은 대중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이 아편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부추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편은 약국에서 퇴출당하였다약사들은 자신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아편을 쫓아냈다. 약사들이 쫓아낸 아편은 만병통치약이 아닌, 우리가 아는 마약이 되었다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대중에게 일시적인 위안을 주는 종교를 비판하기 위해 환각 상태를 유발하는 아편에 비유했다. 그 유명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문장은 마르크스가 쓴 글 헤겔 법철학 비판서문에 나온다. 이 문장은 마르크스가 처음으로 썼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마르크스의 친구이자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이미 쓴 적이 있다(《마르크스주의 100단어》, 199쪽).

     

   



















* 트리스트럼 헌트, 이광일 옮김 엥겔스 평전: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글항아리, 2010)


* [절판] 요세프 슈페크 엮음, 원승룡 엮음 근대 독일 철학(서광사, 1986)




드 퀸시가 가장 좋아했던 철학자는 칸트(Immanuel Kant). 그는 철학자들의 말을 여러 번 인용하면서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을 썼으며, 이 글에서 자신은 과거에 칸트뿐만 아니라 피히테(Fichte)셸링(Schelling)의 책들을 탐독하면서 독일 형이상학을 공부했다고 언급한다셸링은 헤겔과 친하게 지낸 헤겔주의자였으나 사상적 갈등으로 인해 헤겔 비판자가 된 독일의 철학자다헤겔을 지지한 청년 엥겔스는 셸링을 반박하기 위해 그가 강연하는 베를린 대학 강의실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드 퀸시는 대중에게 잘 팔리는 글을 주로 쓰는 매문가로 살았다. 그렇지만 철학을 혼자서 공부한 드 퀸시의 목표는 제대로 된 철학책을 쓰는 것이었다드 퀸시는 엥겔스와 같은 혁명가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젊은 시절에 위장병으로 고생했을 정도로 그의 몸은 허약했다. 드 퀸시는 불시에 자신을 습격하는 육체적 고통을 늘 경계하면서 살았다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어야만 드 퀸시가 왜 이토록 아편과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아편과 철학은 육체적 고통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이자 고통을 잠시나마 막아주는 방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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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6-10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가 이렇게 쓰니까 읽어보고 싶긴하다. 드 퀸시. 그의 투쟁의 과정이 긍금하네. 혹시 시간나면 읽어볼게. ㅋ

cyrus 2025-06-16 06:29   좋아요 0 | URL
글이 지루할 수 있어요. 읽다가 재미없으면 과감하게 덮으세요 ㅎㅎㅎ

yamoo 2025-06-11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국아편쟁이의고백, 근대독일철학, 마르크스, 독일이데올로기...겹쳐서 반갑네요..^^

cyrus 2025-06-16 06:33   좋아요 0 | URL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쌓여 있었는데, 요즘에 저에게 큰 도움을 주네요. 여러 권의 책들을 겹쳐서 읽으니까, 흥미로운 장면들이 보이면서 제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도 알게 돼요. ^^
 





전망 좋은 []

 

EP. 31









풀무질


202566일 금요일

오전 11~오후 1220분경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인문 서적 · 사회과학 도서 전문 서점<풀무질><그날이 오면>이다. <풀무질>1985년 성균관대학교 앞에서 태어났고, <그날이 오면>1988년 서울대학교 근처 신림동 고시촌에서 태어났다. 두 서점은 지식에 목마른 학생들이 찾는 오아시스였고, 민중을 억누르는 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학생들에게는 소중한 아지트였다.












풀무는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다. 서점 이름이 된 풀무질은 바람을 일으켜 생긴 불로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올해로 마흔 살이 된 <풀무질>2019년에 커다란 위기를 만난 적이 있었다. 1993년에 <풀무질>을 운영하기 시작한 은종복 대표가 서점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으면 서점을 닫겠다고 선언한 것이다다행히 세 명의 청년<풀무질>을 이어받으면서 다행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서점을 이어받은 청년 중 한 사람인 전범선 대표는 록밴드 양반들의 리더이며 동물권 단체 사단법인 <동물해방물결>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 315일에 <풀무질><동물해방물결>이 용산에 함께 살게 되면서(한살림)’ 한층 더 젊은 서점으로 변신했다.













<동물해방물결> 회원을 <풀무질>에서는 살리미라고 부른다. ‘살리미환경 문제, 동물권과 채식주의(veganism)를 알고 싶은 사람들이다. <풀무질>에 정기적으로 살리미를 위한 공부 모임 또는 독서 모임들이 진행된다때로는 공연도 열리기도 한다








<풀무질>에 구매할 수 있는 책들 대부분은 헌책이다. 책장을 잘 살펴보면 곳곳에 꽂힌 신간 도서들을 찾을 수 있다. 책뿐만 아니라 커피와 와인, 비건(vegan)을 위한 베이글과 쿠키를 판다








<풀무질>에 처음 방문해서 구매한 책들은 세 권이다. 더 사고 싶은 책들이 있었지만, 다음으로 가야 할 서점(!)을 위해서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책을 골랐다.












 






















* 제러미 벤담, 강준호 옮김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아카넷, 2013)

 

* 존 스튜어트 밀, 박상혁 옮김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아카넷, 2020)

 

* 존 스튜어트 밀, 서병훈 옮김 존 스튜어트 밀 선집(책세상, 2020)

 

* [리커버판-절판] 존 스튜어트 밀, 서병훈 옮김 공리주의(책세상, 2018)

 

* 헨리 R. 웨스트, 김성호 옮김 밀의 <공리주의> 입문(서광사, 2015)





공리주의 하면 벤담(Jeremy Bentham)(John Stuart Mill), 이 두 철학자가 가장 많이 언급된다나는 지금까지 아주 작게 축소된 상태가 된 철학자 벤담을 알고 있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상징하는 표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 표어가 어느 책에 적힌 문장인지 모르고 있었다.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은 벤담 공리주의의 온전한 모습이 담긴 책이다.

 
















* 존 롤스, 황경식 옮김 정의론(이학사, 2003)

 




지난달 마지막 금요일에 한 독서 모임(<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조약돌 님이 벤담의 공리주의를 언급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존 롤스(John Rawls)정의론에 인용된 벤담의 공리주의였다. 오래전에 정의론을 읽은 적이 있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롤스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되는벤담의 공리주의를 비판했던 것 같다.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이 철학적 방법론의 한계를 이해했고, 이를 보완하는 대안으로 자신만의 공리주의를 발전시킨다. 밀과 벤담의 공리주의를 비교할 때 항상 언급되는 밀의 저서는 1861년에 나온 공리주의. 하지만 밀은 조숙한 10대 때부터 이미 벤담의 공리주의에 심취했다. 그는 아버지 제임스 밀(James Mill)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아버지가 친하게 지낸 학자는 벤담이었다


그러나 20대의 밀은 회의적인 시선으로 공리주의를 바라본다. 그는 모든 공리주의의 이상이 실현된다고 해도 자신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밀은 헛헛한 정신을 채우기 위해 다른 유럽 지식인들의 사상을 공부했다. 밀이 발견한 벤담의 단점은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공감이 부족하다. 1838년에 쓴 벤담(Essay on Bentham,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에 수록)아버지가 만든 벤담의 공리주의적 그늘에 벗어나 벤담 철학을 본격적으로 비판한 논문이다그러므로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를 비교하면서 이해하려면 벤담의 대표작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과 밀의 논문 벤담을 겹쳐서 읽어야 한다.


















* 니콜라이 베르자예프, 이종진 옮김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 2016)

 

* [절판] 니콜라이 베르자예프, 주용택 옮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행복한박물관, 2011)





나에게 니콜라이 베르자예프(Nikolai Berdyaev, 베르다예프로 표기되기도 한다)가 누군지 처음으로 알려준 책은 그가 쓴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이다. 러시아의 사상가 베르자예프는 본인의 정신에 큰 영향을 준 작가도스토옙스키(Dostoevskii)를 꼽았다. ‘세계관의 의미를 한마디로 쉽게 풀이하면 사상이다. 도스토옙스키 사상의 중심에는 자유가 있다. 베르자예프는 자유를 응시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눈을 자신의 종교 철학에 이식했다

















* 이디스 클라우스, 천호강 옮김 러시아 문학, 니체를 읽다: 도덕의식의 혁명에 관하여(그린비, 2022)




그는 또 서구 유럽의 철학 이론과 사상을 흡수한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한 니체(Nietzsche)의 철학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도덕적 가치 및 관습에 도발하는 니체 철학에 매료된 젊은 러시아 지식인들은 구세대 지식인들의 목표였던 사회적 책무보다는 자아 발견과 자아실현에 더 관심이 많았다.

 

베르자예프의 저서들은 1980년대에 출판되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1979에 이미 번역된 적이 있다(이경식 옮김, 현대사상사, 알라딘 미등록 도서). 하지만 베르자예프의 책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용히 절판되었고, 그의 철학은 독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잊혔다. 최근에 베르자예프의 책들이 출간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러시아 지성사》(이경식 옮김, 종로서적, 1980년)는 알라딘에 등록되지 않은 베르자예프의 책이다. 러시아 지성사원제는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이다. 어째서 원래 제목을 숨기고 다른 제목이 붙여진 것일까? 이 책이 나온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알면 출판사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러시아 지성사의 초판 발행 날은 1980820이다. 쿠데타를 일으켜서 국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 군인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은 1980827일이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하기 전부터 이미 신군부의 문화공보부(문공부)는 반정부적 목소리를 내는 잡지들을 폐간시켰으며 문공부의 심의를 통과해야만 책을 출판할 수 있었.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그야말로 금서 공화국이었다. 자본주의 비판 서적, 마르크스주의, 노동 관련 서적들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러시아 공산주의의 역사에 관한 책에 붙여진 러시아 지성사는 금서 공화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든 가명이었다.



















* 전혜은 퀴어 이론 산책하기(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21)





퀴어(Queer)성 소수자를 나타내는 용어다.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의 정의는 무척 다양한데, 그동안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되어 온 장애인의 차별 경험을 사회학적 관점으로 분석하는 학문이다. 장애학이 다루는 주제는 매우 광범위하다. 예를 들면 장애의 범주, 장애인의 자율성, 장애를 규정하는 의학의 실태, 장애인 돌봄 문제 등이 있다. 장애학이 등장하기 전에 이런 주제들은 비장애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장애인의 삶과 몸의 다양성은 결함또는 불완전성으로 치부되면서 평가 절하되었다.












전혜은 님퀴어 페미니즘 장애학 연구가. 2019년에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일반인을 위한 페미니즘 학습 공동체 페미 스쿨을 주최했다. 4개월로 진행되는 페미 스쿨 커리큘럼의 주제는 상호 교차성 페미니즘’,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였다. 전혜은 님은 페미 스쿨 강사로 초빙되었다당시에 전혜은 님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퀴어 이론들을 한 권에 담아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 책이 바로 퀴어 이론 산책하기.































* 비사이드 콜렉티브 · 전혜은 · 루인 · 도균 함께 씀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8)

 

[도란스 기획 총서 1]

* 권김현영 · 정희진 · 루인 · 류재희 · 한채윤 함께 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교양인, 2016)

 

[도란스 기획 총서 2]

* 권김현영 · 정희진 · 루인 · 엄기호 · 한채윤 · 준우 함께 씀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교양인, 2017)

 

[도란스 기획 총서 3]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 선정 도서(20184)]

* 권김현영 · 정희진 · 루인 · 한채윤 ·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 함께 씀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 2018)

 

[도란스 기획 총서 4]

* 권김현영 · 정희진 · 루인 · 한채윤 함께 씀 미투의 정치학(교양인, 2019)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 관련 교재는 전혜은 님이 집필진으로 참여한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라는 책이었다이 책의 집필진 중 한 사람인 루인한국 퀴어의 역사를 모으면서 정리하는(archiving) 연구자루인은 정희진, 권김현영 등과 함께 도란스 기획 총서집필진에도 참여했다전혜은 님의 퀴어 이론 산책하기추천 글은 루인이 썼다.


















*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 전혜은 · 제이 함께 옮김 가장 느린 정의: 돌봄과 장애정의가 만드는 세계(오월의봄, 2024)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 선정 도서(2020년 4~5)]

* 일라이 클레어, 전혜은 · 제이 함께 옮김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현실문화, 2020)

 

* [절판] 수잔 스트라이커, 루인 · 제이 함께 옮김 트랜스젠더의 역사: 현대 미국 트랜스젠더 운동의 이론, 역사, 정치(이매진, 2016)





전혜은 님은 장애학과 퀴어에 관심이 많은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는 제이와 함께 두 권의 책을 함께 썼다. 망명과 자긍심가장 느린 정의. 루인과 제이가 함께 쓴 책은 성 소수자 운동 역사의 고전인 트랜스젠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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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6-09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플무질이 아직도 있네요. 대부분 헌책이라..그럼 헌책방이 된건가요? 베르자예프의. 러샤지성사..저도 갖고 있는 책인데 풀무질에서는 얼마에 파나요? 전 헌책방에서 오래전에 2천원 주고 샀습니다만...흙서점에서요..

cyrus 2025-06-10 06:44   좋아요 0 | URL
작년에 나온 책들도 섞여 있었어요. <러시아 지성사>처럼 너무 오래된 책들은 많이 없어요. 풀무질 책방에 있는 대부분 헌책은 1990년대에서 2010년대까지 나온 책들이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1980년대에 출간된 헌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풀무질에서 구매한 <러시아 지성사> 가격은 4천 원입니다. ^^
 






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5월의 세계 문학





아사이 료

민경욱 옮김

정욕(正欲): 바른 욕망

리드비

2024









2025년 5월 31일 금요일

저녁 8시~10시 35분

장소: 인더가든





<5월의 세계 문학>을 만든 독자들


[진행도서 추천, 발제]

향기


[보조 진행북클럽투르기윤색, 사진]

최해성


[참여]

조약돌김성현이우리이금재이문수




※ 북클럽투르기(bookclubturgy, bookclubtur+)


독서 모임 후기 엮은이

북클럽투르기는 공연 제작을 위해 희곡과 연극을 전체적으로 분석하는 작업 또는 이러한 작업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드라마투르기(dramaturgy)’에서 따온 말입니다.






()’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단어입니다. 성은 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려줍니다. 대다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성을 인식하면서 살고 있어요(cisgender). 하지만 성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다양해요.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특성을 같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intersex). 한 개의 성을 정한 채로 평생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어요(non-binary).


()(마음 심)’(날 생)’이 만나서 생긴 단어입니다. 매력적인 사람을 만났을 때 생기는 성적 끌림과 성욕,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드러나는 성적 취향한 사람의 마음(psyche)에서 생기는 것들입니다물론 마음()에서 태어난() ()이라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천성(天性)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은 살아 있습니다(). 생생한 성은 호기심(psyche)을 느끼며 변화에 민감합니다. 주변 환경이나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면 미처 알지 못했던 성적 취향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성적 만족을 느낄 수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성욕두 개의 뜻을 가진정욕입니다. 정욕(情欲)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구를 뜻한다면, 정욕(情慾)은 성적 욕망을 뜻해요. 앞서 제가 말한 마음에서 태어난 성을 떠올린다면, 정욕(情欲)과 정욕(情慾)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욕을 두 개의 뜻이 포개진정욕으로 이해하고 싶어요.


여기에 일본의 작가 아사이 료(朝井リョウ)는 성욕에 자신이 생각하는 세 번째 정욕의 뜻을 얹었습니다. 그가 제시한 세 번째 정욕바른 욕망을 뜻하는 정욕(正慾)입니다정욕(正欲)’2021년에 나온 작가의 소설 제목이기도 합니다.

















* 막스 베버,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나남출판, 2017)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유능한 교수라면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능한 교수는 학생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불리한 사실(inconvenient facts)을 인정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불리한 사실학생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불리한 사실편안한 지식에 의존하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지식입니다.

 

아사이 료의 소설 정욕: 바른 욕망은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주류에 반하는 소수의 의견과 가치관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차원에서 다양성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다양성은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를 보호하는 방패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나 소설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때로는 착각하기 쉬운 다양성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 불리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다양성, 이 단어 속에는 축복과 비슷한 이미지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정하자.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더라도 당당하게 가슴을 펴자. 나답다는 데 당당해지자. 타고난 속성을 다른 이가 판단하는 건 틀렸다.

 가슴이 상쾌해질 정도로 축복이 반짝이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결국, 소수자 가운데서도 주류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자 말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의 자신과 다른 것에만 해당하는 말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나머지 이해하기 힘든, 직시할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운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 것에는 단단히 뚜껑을 닫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들이죠.


(8~9쪽)

 



소설에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 이상 성욕을 가진 인물들이 나옵니다. 수도꼭지를 틀자마자 힘차게 뿜어나오는 물에 성욕을 느끼는 남자는 수도꼭지만 떼어내 훔칩니다. 소설 주인공은 이성과의 성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해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성관계 도중 이성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면 쾌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소설 속 인물들의 정욕(성욕)과 성적 취향이 상당히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어도, 그들을 차별하지 않기 위해 다양성이라는 단어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다양성은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고, 도덕과 상식에 완전히 벗어난 정욕을 위한 방패가 되어주질 못합니다. 소설은 다양성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그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양성이라는 단어를 편안하게 쓰는 독자들을 향해 불리한 사실을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결국 다양성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정욕은 자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다수가 지극히 정상적인상식(또는 도덕)에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것입니다소수(비주류)가 다수(주류)의 기준에 맞춰야 하고, 끝내 다수에 동화되는 사회. 이런 사회에 다양성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5월 마지막 날, 5월의 마지막 금요일.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세속) 모임 날은 아사이 료의 생일이었습니다. 모임 후기 글을 쓰기 시작한 주말에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았어요.























정욕: 바른 욕망을 추천한 향기 님은 네 개의 발제문을 만들었습니다향기 님은 독립 출판물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그래서 집에서 직접 팸플릿 형태의 인쇄물을 만들 수 있어요이번 모임에 참석한 <세속> 독자들을 위해 발제문이 있는 팸플릿을 만들었습니다발제문뿐만 아니라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향기 님이 발췌한 작가의 인터뷰 내용도 있습니다.


팸플릿을 유심히 잘 보면,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종이로 만들어진 것노란색 종이로 만들어진 것이 있는데요, 노란색 종이는 사탕수수로 만든 종이라고 합니다.


<세속> 독자들은 정욕: 바른 욕망읽는 내내 생각이 많아졌다고 했어요. 소설의 주제가 성욕이라서 성에 대한 솔직한 견해를 밝히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요바른 정욕에 부합하는 성욕을 떠올리는 것도 쉽지 않고요그리고 작가가 지적한 다양성의 한계를 보완해 줄 만한 단어가 잘 떠올리지 않았을 거예요성과 성욕에 대해 심오하면서도 묵직한 문제들을 툭 던져놓기만 하고 이야기를 써 내려간 작가의 글쓰기가 불친절하다고 느낀 <세속> 독자들도 있었어요그래도 소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독자들이 있었습니다이금재 님은 마음에 든 소설의 문장 두 개를 언급하면서 작가의 표현력이 좋았다고 했어요

 

소설 뒤표지에 보면 이런 문구가 적혀 있어요.


 





마지막 장에 도달하는 순간, 찾아오는 혼란을 감당할 수 있는가?

그간의 가치관을 격렬하게 뒤흔드는 충격의 걸작!


 


김성현 님은 이 소설에 본인의 감정과 가치관을 크게 뒤흔들만한 커다란 반전이나 충격적인 반전이 나오지 않아서 마무리가 허전했다고 말했습니다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정욕인 소아성애바른 정욕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 [개정판] 존 스튜어트 밀, 김만권 옮김 자유론(책세상, 2025)

* [구판_절판] 존 스튜어트 밀, 서병훈 옮김 자유론(책세상, 2005)

 




향기 님의 첫 번째 발제우리에게 과연 타인의 욕망을 판단하는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이었어요. 성현 님은 타인의 욕망을 판단하는 자격을 비판적으로 봤습니다. 누구나 이러한 자격을 가지게 된다면 타인의 욕망 또는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행위에 지나치게 간섭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타인의 삶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면, 개인의 개별성은 소외되고 억압받습니다. 성현 님은 타인에게 (육체적 · 정신적 · 경제적)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개인의 정욕을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성현 님의 견해는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강조한 자유와 맞닿아 있습니다.











 

 









* [개정판_절판] 제러미 벤담, 신건수 옮김 《파놉티콘》 (책세상, 2019)

[구판_절판] 제러미 벤담, 신건수 옮김 《파놉티콘》 (책세상, 2007)




저도 타인의 욕망을 판단하는 자격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욕망을 지나치게 간섭하면서 판단하는 일상이 익숙해지면 타인을 감시하게 됩니다. 타인의 욕망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 또한 누군가가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요. 이렇듯 서로서로 감시하면서 자연스럽게 타인의 욕망을 규제하고 검열하는 사회는 개인을 못살게 구는 거대한 감옥과 같아요. 이 감옥은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수많은 죄수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구상한 파놉티콘(panopticon)’입니다. 벤담이 살아있을 때, 파놉티콘은 실제로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카페 스몰토크 <푸코 읽기> 모임(2023년) 두 번째 책, 모임 미참석]

* [개정 2] 미셸 푸코,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나남출판, 2020)




그렇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 특유의 통제 방식이 사회에 정착되는 순간, ‘감옥화된 사회가 탄생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감옥화된 사회의 권력자는 힘들이지 않고, 개인을 통제합니다. 왜냐하면 피지배자인 대중, 즉 우리가 서로를 감시하고, 감시당하고 있기 때문이죠. 파놉티콘 사회는 개인이 서로서로 감시하는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향기 님은 바른 욕망의 기준이 상당히 모호하고,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고 했어요. 이와 관련된 세 번째 발제바른 욕망의 기준이 개인에서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사회가 만든 것인지 알아보는 질문이었어요. 이우리 님은 타인의 욕망에 대한 사적인 판단이 다수의 기득권층을 위한 법으로 만들어지는 상황을 우려했습니다. 벤담은 최대 다수의 행복을 최고로 여기는 공리주의자입니다. 이우리 님은 벤담식 공리주의에 따르는 입법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정상도덕적 올바름에 조금이라도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대중은 다수를 위한 법에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법에 세뇌당한 대중은 ‘다수를 위한 올바름에 맞춰가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사회가 인정하는 정상에 속하고 싶어 해요.


















[서재를 탐하다 & 읽다익다 <우주지감-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202월의 책(83번째 책)

추천자: 최해성

모임 날짜: 2020227(코로나 유행으로 취소)]

*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2024)




소설에는 ‘올바름’에 벗어난 타인의 정욕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이상해’, ‘우스워(비웃음)’, ‘미쳤다라고 쉽게 내뱉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런 발언을 한 사람들은 자신이 느낀 것을 표현했을 뿐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할 것입니다. 조약돌 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선량한 차별주의자라고 했습니다일본의 임상 심리학자가 쓴 소설의 해설 속 문장을 빌리자면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기들이 바르게 살아가고 있고, 언제나 사회는 옳다고 굳게 믿고(정욕바른 욕망》 해설, 444쪽)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성과 성적 지향을 가까이 다가가서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저는 성과 성적 지향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정확하다고 알려진 성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성 지식에 호기심을 느끼고, 선뜻 다가갈 수 있습니다.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 기획 페미 스쿨(201971~1028)’ 

세미나 지정 도서]

* 오드리 로드, 주해연 · 박미선 함께 옮김 시스터 아웃사이더(후마니타스, 2018)





미국의 흑인 퀴어 페미니스트이자 시인인 오드르 로드(Audre Lorde)시는 사치가 아니라라는 글에서 우리 삶을 성찰하는 일에 친숙해지면, 우리를 침묵하게 만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시스터 아웃사이더》, 39쪽). 저는 성을 눈에 띄지 않게 숨기려는 침묵을 깨서, 성의 다양한 얼굴을 바라보려면 우리 삶에 가까이 있는 성을 성찰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한 성을 성찰하는 일성교육과 성 공부입니다. 성교육과 성 공부는 어린이와 청소년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합니다.


















* [절판] 빌헬름 라이히, 윤수종 옮김 오르가즘의 기능: 도덕적 엄숙주의에 대한 오르가즘적 처방(그린비, 2005)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을 은폐하고, 성 담론을 침묵하게 만드는 사회는 개인의 성욕과 성적 지향을 억압한다고 했습니다. 라이히는 성을 불결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인습에 사로잡힌 사람소인배(a little man)’로 비유합니다소인배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자신과 다른 타인을 괴롭히고, 차별하고 있습니다라이히는 변화를 거부하는 소인배들이 많아지면 민주주의가 절대로 발전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 보호받는 인민대중이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습득하고계속 점점 더 나은 삶의 형식들로 전진할 모든 가능성을 갖게 되는 힘들고 긴 과정이다그러므로 진정한 민주주의는 노인들이 즐겨 회상하는 영광스럽고 전투적인 과거와 같은 종결된 발전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들새로운 발견들그리고 새로운 삶 형식들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씨름하는 과정이다.

 

(빌헬름 라이히오르가즘의 기능》 중에서, 30)



처음에 제가 언급한 마음에서 태어난 성이 살아 있으려면 을 종이에 적힌 글자로만 남아선 안 됩니다여전히 낯설고 두렵지만우리는 입으로 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아주 가까이에 있는 ‘을 우리의 입말우리의 대화 속에 반드시 포함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성을 숨(psyche) 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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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서스 - 석기시대부터 AI까지, 정보 네트워크로 보는 인류 역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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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점  ★★★  B








대구 독서 모임 <고라니 울고> ‘두꺼운 책 읽기

일곱 번째 책






우리는 언제나 정보를 마신다. 정보는 우리 삶에 절대로 없으면 안 되는 제2의 공기. 우리가 마신 정보는 정체성과 가치관을 만들 데 쓴다. 생각에 잠기면 머릿속에 켜켜이 쌓인 정보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온갖 정보를 뭉쳐서 만든 자신의 의견을 타인에게 드러낸다. 말에 새겨진 정보는 타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타인은 내가 호흡한 정보를 마신다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떠돌아다니는 정보는 뿌리처럼 질기게 뻗어 나가는 네트워크를 발아하는 씨앗이다네트워크는 이 세상을 움직이게 만드는 뿌리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정보 호흡을 하고 있으며 세상의 뿌리는 쭉쭉 뻗어 나가고 있다. 거대한 네트워크 뿌리를 잡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보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들은 정보가 많을수록 세상을 더 좋은 쪽으로 발전시키는 힘이 더 커진다고 믿는다그러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네트워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네트워크의 기능을 낙관적으로 보는 견해에 반대한다. 하라리는 반문한다. 슬기로운 인간(Homo sapiens)’이라고 자부하는 우리는 왜 잘 만들어 놓은 네트워크를 파괴할 정도로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살육을 일으키는가?


하라리의 책 Nexus협력과 유대감을 좋아할 줄만 알았던 정보 네트워크가 잘못된 방향으로 비뚤게 되어버린 역사적인 사례들을 보여준다. 정보 네트워크 낙관론자는 슬기롭지 못한 인류의 어두운 역사를 가볍게 바라본다. 그때 그 시절에서만 일어난, 특수하고도 예외적인 상황으로 여긴다. 그리고 올바른 정보를 공유하면 과거에 있었던 인류의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라리는 정보 네트워크 낙관론을 정보에 대한 순진한 관점이라고 말한다. 순진한 정보관은 정보가 많을수록 좋으며 정보 네트워크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연결(Nexus)하게 해주리라고 믿는다.


정보는 때론 독이 된다. 정보에 중독된 뇌는 자만심이 가득 차서 부풀어 오른다자기 수정 능력이 부족한 정보 중독자는 잘못된 정보를 의심 없이 마신다. 독성이 강한 정보가 모여서 만들어진 네트워크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은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무오류성)고 착각한다. 무오류성은 타인의 다른 견해를 존중하지 않으며, 타인의 건전한 비판을 거부한다. 민주적인 대화와 연대를 부정하는 네트워크는 전체주의가 된다. 독일 나치즘과 소련의 스탈린주의는 잘못 비뚤어진 네트워크다. 하라리는 최악의 네트워크를 망상에 기반한 네트워크라고 표현한다.


네트워크는 정보들을 연결해서 거대한 질서를 만든다. 독재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정보를 독점하고, 국민의 정보 접근을 제한한다. 하라리는 반민주적인 독재 정치 네트워크가 AI와 손을 잡는 상황을 경계한다. 독재 정치와 전체주의는 지도자 한 사람의 권한에만 집중된 네트워크다네트워크를 장악한 지도자는 자신의 무오류성을 지지하는 AI를 좋아한다재자를 위한 AI는 고의로 거짓 정보와 음모론을 퍼뜨리는 선동가요, 독재 정치를 비판하는 정적과 민주 시민을 짓밟는 정치 깡패다. AI에 복종하는 독재 정치 네트워크는 민주주의의 자정 기능이 떨어지며 건실한 토론이 불가능해진다. 20세기의 독재 정치가 인간 정치라면, 21세기의 독재 정치는 컴퓨터 정치다.


NexusAI를 슬기롭게 이용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높인다. AI를 맹신하는 대중과 권력자가 많아지면 정보 네트워크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검은 손이 된다하라리는 본인이 직접 여러 분야를 탐사해서 발굴한 정보와 전문가들의 견해를 적절하게 엮어서 글을 쓴다. 그의 출세작 사피엔스》(조현욱 옮김, 김영사, 2023년)를 이미 읽은 독자 대다수는 하라리의 폭넓은 지식 스펙트럼에 감탄하고 매료된다. 그러나 인기도서를 펴낸 전문가의 책은 무오류성의 책’이 아니. 한 권의 책 속에도 저자의 편견과 저자가 잘못 알고 있는 정보가 들어 있다. 하라리가 Nexus를 쓰기 위해 발굴하고 인용한 정보 중에 사실과 다른 것이 있다. 책 밖에 있는 다른 관점을 비추면서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 305


 《성경은 스스로 편집하거나 해석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 같은 종교들에서 실제 권력은 이른바 오류 없는 책이 아니라 유대교 랍비와 가톨릭교회 같은 인간의 기관이 가졌다. 반면 AI는 새로운 경전을 작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편집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인간의 개입은 전혀 필요 없다.



과거의 성경은 오랫동안 무오류성의 책으로 여겨졌다. 백인 남성 교황, 목사, 신부, 신학자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무오류의 책을 신뢰하라.”), 성경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무오류성의 진리라고 주장했다(책을 해석하는 인간을 신뢰하라.”). 반면 종교인이 아닌 평범한 신자는 오류를 저지르는 존재이므로 성경을 해석할 권한이 없다성경을 독차지하듯이 거머쥔 남성들은 교회 안팎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신의 대리인으로 자처한 교황은 전통에 반하는 기독교 분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기득권이 된 종교인들은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을 추구하는 신학과 종교인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16세기에 시작된 여성주의 신학 교회 안의 유리 천장을 깨뜨렸다.[주1] 퀴어 신학은 성 소수자 인권 보호에 앞장선다. 성경속 문자에 근거해서 성 소수자 차별을 정당화하는 해석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다.[주2]  


비종교인은 종교를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경》의 전통적인 해석에 도전하는 비판 신학과 해방 신학이 낯설다. AI가 나오기 한참 전에 이미 진보적인 종교인과 신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했다하라리는 비종교인을 위해 종교의 기능과 성경》 편찬의 역사를 잘 요약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에 압축된 종교는 전통을 지향하려는 과거의 모습에 가까운 반쪽 얼굴이다. 종교에 대한 하라리의 주장은 시대적 요청에 맞게 변화하는 종교의 새 얼굴을 보여주지 못한다.

 



* 456

 

 보수는 특정 종교나 이념에 헌신하지 않는다. 그게 무엇이든 이미 있는 것, 지금까지 대체로 합리적으로 작동해 온 것을 보존하는 데 헌신한다. [중략] 1980년대 미국에서 보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전통을 지지하고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하라리는 보수(주의)특정 종교와 이념에 헌신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보수적인 기독교와 손을 잡으면서 진보적 정치 운동을 공산주의로 몰아세우고, 성 소수자 혐오를 조장하는 극단적인 보수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하라리가 보수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리숙하다. 그는 보수 우파의 한쪽 얼굴만 보고 있다1980년대 미국의 우파와 보수주의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반영된 정치를 본격적으로 실행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정부 시절(1981~1989)과 겹친다레이건의 신자유주의는 기업 중심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념이자, 사회주의와 노조 운동에 대항하는 정치적 무기였다. 레이건은 남부 지역에 사는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공약들(성평등 헌법 수정안 반대 등)을 내세운 덕분에 1984년 재선에 성공했다.[주3] 공화당을 지지한 북미 기독교 우파의 강령은 신앙, 가족, 자유였다.[주4] 1980년대 미국의 보수 우파는 민주주의가 아닌 신자유주의를 지지했으며 도덕과 가족을 중시하는 기독교에 헌신했다









[1] 테레사 포르카데스 이 빌라, 김항섭 옮김,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분도출판사, 2018)


[2] 월터 윙크 엮음, 한성수 옮김, 동성애와 기독교 신앙: 교회들을 위한 양심의 질문들(무지개신학연구소, 2018), 패트릭 S. 유연희 옮김죄로부터 놀라운 은혜로퀴어 그리스도를 찾아서》 (무지개신학연구소, 2020).


[주3] 스티븐 레비츠키 · 대니얼 지블랫 함께 씀, 박세연 옮김,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어크로스, 2024), 147~148


[주4] 피에르 다르도 · 크리스티앙 라발 외 함께 씀, 정기헌 옮김,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원더박스, 2024),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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