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샹보거리>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데샹보 거리
가브리엘 루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이상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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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동딸인 나는 항상 북적거리는 가족을 부러워했다. 친척집을 제 집 드나들듯이 드나들었던 것도, 다섯 명의 형제가 있는 그 관계가 무척 좋았기 때문에 친형제는 아니더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이런저런 추억을 쌓으려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친척집을 방문하지 못하는 평일에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웃 친구들과 친분을 쌓았는데, 친척과 이웃, 그들과 관련된 추억을 빼면 과연 내 어린 시절이 어느 정도 온전히 존재할 지 모르겠다.  

 가브리엘 루아의 소설 <데샹보 거리>를 읽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부럽다,는 것이었다. 북적이는 가족 속에서 막내로 살아가는 '크리스틴'의 이야기는 딱 내가 원했던 가족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딱히 친척이나 이웃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것이, 가족 자체로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고나 할까. 거기다 이웃들과 친척들의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따뜻하고 어여쁜 느낌을 주었다. 가브리엘 루아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뿍 담긴 소설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로 처음 접한 작가지만 왠지 부러웠다. 이런 거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에 대한 부러움과 어른이 되어 이렇게 빛나는 글을 쓰는 그녀에 대한 부러움,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어린시절에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만 잔뜩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자세히보면 슬픈 이야기- 특히 이별과 관련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집에서 잠시 동안 살았던 세입자 흑인 아저씨, 옆집에 아내를 위해 아름다운 집을 지었던 이탈리아 아저씨, 수녀가 되어 집을 떠난 오데트 언니, 열병으로 정신을 놓은 알리시아 언니, 자신의 평생 직업을 떠나고 기력을 잃은 아버지, 전화로 긴 음악 한 곡을 전부 연주해주던 첫사랑 빌헬름 등 모두, 알고보면 '크리스틴'의 곁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어린시절의 추억을 이루는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슬프지만은 않은 것이, 당시의 시점에서 서술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인 듯 하다. 예를 들어, 오데트 언니와의 이별을 그린 '노란 리본 자락'에서 크리스틴은 오데트 언니가 떠난다는 슬픔을 느끼지만, 그보다 더 언니가 가진 물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줄 것이라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커서 슬픔을 완화시킨다.  

 일정한 틀 없이 나열되어 있는 듯한 열여덟 편의 소설들은, 읽어갈 수록 비밀의 문이 열리는 열쇠를 얻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처음에는 가족이 몇 명인지,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가족을 이루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명의 이름이 언급되어도, 단지 '글자'에 불과했을 뿐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했는데, 글 한 편 한 편을 읽어갈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글 한 편이 한 사람의 인생이나 생각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라고 느껴졌다. 지나치게 자세하지 않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할 수 있게 쓰여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지나버린 이야기를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로 만들어낸 작가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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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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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터 빅셀이라는 이름은 낯설지만,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소설로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다. 그도 그럴것이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있는 작품이라 지겨울 정도로 많이 접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 소설은 언어의 성질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기 위해 쓰여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내가 그런 목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산문집에 대한 내 긍정적인 감상이 작가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제목부터 어딘지 모르게 내 마음을 끌었던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는, 스위스에서 살고 있는 일흔 한 살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보여주는 작은 것에 대한 애정,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련한 향수, 다른 사람과 공존하고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에서 오는 기쁨 등이 짧은 글에 담뿍 담겨 있어서 읽는 내내 미소를 짓게 했다.  

 이를테면, 기차를 타기 위한 공간으로만 생각했던 역이라든가, 내가 타는 버스를 운전해주는 사람일 뿐이었던 버스 운전사, 정확한 날씨를 맞출 때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다가 정확하게 맞지 않는 날에는 있는 욕 없는 욕 다하게 되는 일기 예보 등과 같은 것에 대한 정을 보여준다.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먼지 속의 역, 인사를 나눔으로써 기뻐지는 버스운전사, 놀라울 정도로 날씨를 알아맞춰서 신기한 일기예보.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작고 소박한 것에 대한 애정이 한껏 드러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인사를 하고, 버스를 타고, 길을 걷고, 이름을 부르는 그의 하루들은 당연하게 생각하며 지나치던 나의 이웃과 나의 하루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그가 자기 손을 가슴에 얹고 몸을 약간 굽히며 인사를 하면 나는 항상 기분이 좋다. 예전에 그가 인사에 대답하지 않을 때, 나는 거의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이제 드디어 같은 버스를 타는 셈이다. 나는 사실 그를 모른다. 그의 이름도, 그가 간직한 이야기들도. 그도 나를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본다. 그는 이제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다. 우리는 이 버스를 탄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지만 이제 정말 같은 소속감을 느낀다. 이 버스에 함께 탔다는 소속감. 작은, 아주 작은 소속감. 하지만 차가운 12월의 이런 밤에는 이렇게 작은 감정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지 않은가. ( p127-128)

 그저 작동시켜 보기 위해 물건을 사거나, '처음'이라는 그 소소한 즐거움에 함빡 웃는 그의 순수함에 감탄하고(TV와 관련된 일화는 70년대 우리나라의 모습과 거의 똑같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별반 다를 것이 없나보다), 자신의 것을 좋아하고 아끼지만 자신과 다른 다양함을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에 흐뭇함을 느꼈다. 이런 것이 산문집을 읽는 매력이려나. 남의 생활과 생각을 알아감으로써 내 삶을 되돌아보고 소중함을 깨닫는 것? 산문집이라는 것을 좋아한 적이 없는데, 이 책을 읽고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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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의 나라>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아사의 나라
유홍종 지음 / 문예출판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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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극히 주관적이게도, 나는 역사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팩션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장르로 급부상한 역사 소설은 어느 하나도 마음에 든 작품이 없었다(아직 만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대중적인 소설 <다빈치 코드>도 난 재미가 없었다). '역사'는 역사다운 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한 사람의 개인적인 시선으로 없애고 붙이고 자른 이야기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물론 '역사'라는 것 역시 기록한 사람의 주관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선택'과 '가치비중'의 몫일 뿐, '허구'는 아니다. 역사 소설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이기 때문에 작가의 감정이 지나치게 많이 반영되어 읽는 내내 작가의 감정에 경도되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 감정이란 한 명의 인물(대부분은 주인공)이나 특정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찬탄이다.    

 이렇게 서론을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아사의 나라> 역시 내 취향을 바꾸어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 소설이라면 어느 책을 읽든지 간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 산재해 있다. 주인공인 아사나 그녀의 딸 사비는 지적이고 지혜롭고, 아름다우며 강인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이야기의 중간에 아사에서 사비로 주인공이 바뀌지만 캐릭터에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눈이 멀었고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사비'라는 딸은 아사와 완전히 똑같다. 아사가 사랑하는 설오유 장군은 남자답고, 총명하고, 다정다감하기도 한 남자주인공의 전형적인 인물이고, 아사를 짝사랑하는 대상인 진술래는 늠름한 남자에 해바라기같은 사랑을 보여주지만 설오유보다는 부족한 인물. 사극이든, 영화든, 책이든 어디에서나 소비되는 캐릭터들이다.  

 인물을 제외하면 역사 소설을 이끌어 가는 것은 이야기와 역사의 긴밀성, 있을 법하다는 개연성, 그리고 흡입력이라 볼 수 있다. <아사의 나라>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소설이 시작되는 전반, 끝나는 후반에서는 국사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는 데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 멸망기'라는 시대의 큰 흐름을 제외하면 인물들의 인생과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됐든 시대의 흐름, 나라의 운명에 의해 개인의 삶이 파괴되고 변화되어 간다는 큰 줄기는 이야기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다. 내내 슬픈 <아사의 나라>를 읽으면서 허무함을 느낀 것은 내가 비관적인 사람이라서일까. 아침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사'라는 이름도, '사비'라는 이름도 작가가 의도한대로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는 '희망'이라 읽히기 보다는, 시대에 파묻혀버린 힘없는 개인들의 피지 못한 희망이라 읽혀서 아쉬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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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에 책이 있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시냇물에 책이 있다 - 사물, 여행, 예술의 경계를 거니는 산문
안치운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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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집은 참 오랜만이다. 산문집을 선택하는 경우 대부분은 글쓴이를 따지게 되는데, 난 연극에 문외한인지라 <시냇물에 책이 있다>를 쓴 연극평론가 안치운에 대래 전혀 모른다. 그래서 좀더 중립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 책을 읽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크게 '살며, 여행하며, 공부하고'라는 세 가지 주제로 엮어진 글들은 글쓴이의 인생관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살며'라는 주제 안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 자전거 예찬론이라든지, 음악의 아름다움이라든지, 자신의 동네에 새로 생긴 '살아있던' 술집 이야기도 있지만, 특히 자연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었다. '산'을 좋아하는 그가 보는 산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산에서 야영을 하게 되면 산과 하늘이 구별되는 하늘금이 순간 사라질 때를 보게 된다. 이 순간 우리 자신은 자연 속에 물들어 간다. 추위와 침묵과 산의 높이가 하나가 된다. (p.40)

 '여행하며'는 말 그대로 글쓴이가 이집트, 멕시코, 이탈리아, 프랑스 등 여러 곳을 다니며 느낀 감정을 담고 있다. 특히, 삶과 죽음 사이에 난 길, 중세 순례자의 길 등 여행하며 다닌 아름다운 길에 대한 생각, 예찬, 비유로 가득하다.  

 '공부하고'에서는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연극, 음악, 춤, 사진 등)와 관련된 책을 소개해주는 차원을 넘어 깊이있는 해석까지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공부하고'에 실린 글 뿐만 아니라 다른 주제에 실린 글에서도 (아마 글쓴이의 의도겠지만) 책 한 권씩이 등장한다. 물론 '공부하고'라는 주제에서처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고 제목이나 내용의 일부를 언급하는데 그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덕분에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왠지 안치운이라는 사람의 '독서일기'를 읽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더구나 세 가지의 주제에 대한 글쓴이의 해석은 그럴 듯 하나 크게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하나의 제목을 가진 짧은 글 안에 또다시 소제목을 붙였기 때문에 '파리 산문'과 같은 글은 한 편의 글이 70페이지를 넘는다. 왠만한 단편소설 못지 않은 분량이다. '파리'에 있을 당시를 떠올리며 쓴 글이므로 사색의 흐름대로 글이 전개되고 있어 '여행하며'라는 주제와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인다.   

<시냇물에 책이 있다>는 여행기라고 하기엔 부족하고, 단순한 산문집이라고 하기엔 이야기가 꽤 다양하다. 나같은 편식주의자인 독자에게는 하나의 주제를 가진 글로 묶은 책이었다면 더 좋았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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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지날 때까지>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피안 지날 때까지
나쓰메 소세키 지음, 심정명 옮김 / 예옥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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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쓰메 소세키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으나 작품을 읽기는 처음이다.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자라고는 하나, 한국의 독자인 내가(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광수의 작품도 제대로 읽지 않는 내가) 소세키의 작품을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10년대 작품을 찾아 읽기엔 새로이 출간되는 따끈따끈한 책이 너무 많았다. 또 한가지, 고정관념 때문이기도 했다. 이광수의 책이 그러하듯,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들을 새로운 듯이 서술해나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약간은 식상하고, 뻔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내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수십번 패러디되고 있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도련님>과 같은 이름으로 기억될 뿐이었고, 혹은 영화 <미래를 걷는 소녀>의 남자주인공이 동경하는 대상 정도로 생각될 뿐이었다. 때문에 이번 작품 <피안, 지날 때까지>는 국내에 처음 번역되는 작품이라고는 하나, 내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 작품의 좋았던 점은, 식상하지 않았다는 것과 옛스러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식상하지 않았다는 것은-문화적 차이를 감안해야겠지만- 고스란히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진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의 100년 전의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진부함이 많이 없었다(물론 그 시대에 소세키가 처음 사용했다는 단어 "고등유민"이 가리키는 지식인은 현대에 그리 놀랄 것도 없지만 말이다). 그것은 <피안, 지날 때까지>가 탐정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게이타로는 친구인 스나가의 소개로 그의 이모부 다구치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의뢰한 일이라는 것이 '이마에 점이 있는 중절모를 쓴 남자를 미행해 달라'는 것에서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된다. 게이타로 역시 탐정이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고 있던 터라 수락을 하게 되는데, 남자는 게이타로의 관심을 끌고 있던 여자와 만나서 저녁을 함께 보낸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나 정체, 다구치는 이런 일을 의뢰한 이유, 스나가와 여자의 관계, 집안의 분위기 등 조금씩 밝혀지는 스나가 집안의 이야기는 읽는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뒷부분으로 가면서 이야기 구성 형식도 조금씩 변화를 주어, 스나가가 1인칭 서술자가 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마쓰모토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의 이야기도 있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작품이 100여년 전에 쓰여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옛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1900년대 초의 일본의 분위기가 잘 살아있다는 점 때문이다.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말투나 그들의 생각이나 가치관, 손님을 접대하는 모습과 같은 것들이 상당히 격식을 차린 듯하고 문어체로 표현되어 있어 옛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많이 주었다. 많은 분량의 소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도가 나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서문에 의하면 제목에서의 '피안'이 의미하는 바는 절기(춘분 또는 추분 절기의 전후 7일간)라지만-그래서 솔직히 '피안'의 다른 의미를 생각하고 있던 내게 조금 실망스러운 시작이었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절기를 의미하는 '피안'만은 아닌 듯하다. 옮긴이의 말대로, 게이타로가 그냥 관찰할 수 밖에 없고 개입하지는 못했던, 스나가 집안 자체가 피안, 그 너머가 아닐까. 그래서 게이타로 조차 보지 못한 그 이후, 스나가 집안이 어떻게 되었는지, 책을 다 덮은 지금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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