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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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국제선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의 일이다. 이륙하고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 비행기는 순식간에 구름 위에 닿았다. 지면은 한참 멀어졌고 건물은 조그맣게 보였다.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지상 모든 것이 작게 변한 것 같았다. 아니 세상 자체가 소인국이 된 듯했다. 문득 생각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저렇게 작은 존재들인데 뭐 그리 급하다고 발버둥 치며 살고 왜 그리 서로 미워하며 살아가는지를. 누가 더 많이 갖고 덜 갖고 하는 것에 우쭐대며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비행기 창밖을 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중국 장가계나 미국 그랜드캐니언을 거론하며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었음을 회자하는 경우가 있다. 해외 관광명소는 정말 크다. 국내에서는 보기 어려운 거대한 스케일을 감상하고 있으면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소소한지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세계와 비교하면 장가계나 그랜드캐니언도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 기준을 우주로 확대해보는 것이다. 지구적 관점에서는 클지 몰라도 우주적 관점에서는 작다. 규모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지구 밖으로 나가면 압도적으로 큰 세계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작은 행성이다. 태양계의 한 식구인 목성은 지구보다 1,300배가 크다. 태양을 제외하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 '알파센타우리'는 지구에서 4.4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지구에 있는 모래알보다 5~10배가 넘는 별들이 우주에 있다. 우주의 지름은 대략 950억 광년 거리로 추정된다. 그것도 관찰 가능한 우주에 한해서 그렇다. 지구가 속한 은하와 가장 가깝다는 안드로메다은하만 해도 250만 광년 떨어져 있다.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우주 공간 전역에 수백억에서 수조 개의 태양을 거느린 은하계가 2조 개가량이나 있다. 어디 감히 스케일을 말하는가. 지구와 인간은 작아도 너무 작다.

20세기의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딸 사샤 세이건이 처음으로 쓴 책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는 삶과 사랑과 우주를 다룬 에세이다. 유명한 과학자를 아버지로 둔 딸의 이야기이면서도 인간 세계를 면밀히 탐구한 인문학 산문집이다. 칼 세이건과 작가 앤 드루얀의 딸인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우주적 시각과 과학적 통찰로 삶과 인간을 들여다보는 법을 체득했다. 과학자의 딸답게 증명되지 않는 것을 거부하고 의심하는 회의론자가 되었다. 저자에게 사실이란 과학적으로 발견되고 입증된 것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저자는 유대인이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이자 불가지론자이다. 책 곳곳에 회의론자이자 불가지론자인 저자의 입장과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저자는 많은 주제를 다룬다. 딸을 출산했을 때를 회고하며 '태어남'에 관한 폭넓은 천착을 시도한다. 신을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종교적 의식이 주는 유용함을 긍정한다. 우주의 탄생과 외계인의 존재 등의 흥미로운 과학적 담론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종교적 시각을 벗어난 과학자의 입장에서 죄와 오류의 문제를 다룬다. 성장과 어른의 철학적 의미를 탐색하고 결혼 제도와 섹스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설파한다. 역사와 신화의 흥미로운 토막들을 소개하고 이를 과학적 접근으로 재해석한다. 인간의 가장 큰 화두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통찰하기도 한다. 저자는 해박한 지식으로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깊이 있는 탐색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과학적 사고와 국문학 전공의 유려한 글발이 돋보인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저자의 자기 주관이 굉장히 강력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가령 결혼 제도, 여성 인권, 성소수자, 섹스 관념 등 여러 민감한 이슈에 관한 개인적 소신과 철학이 뚜렷하게 서 있다. 글의 논조가 흔들림 없이 일관적이다. 평소 자기만의 기준과 가치관을 명확히 세워놓은 듯하다. 이는 오롯한 자존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부모로부터 받은 것인지 오랜 공부의 힘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작가로서는 훌륭한 장점이라는 점이다. 가끔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저자(작가)가 자신감 없이 마치 독자의 눈치를 살피며 써 내려가는 듯한 글귀를 만날 때면 적지 않은 짜증이 밀려온다. 명확하고 단정적으로 자신의 견해와 철학을 전달하는 작가적 자신감이 멋지다.

저자는 책 서두에 부모님으로부터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가르침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인간과 세계를 과학적·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되 삶 자체만은 따뜻한 시선으로 살펴야 한다는 것을 부모로부터 배우며 자란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시선은 의외로 우주가 아닌 자기 주변에 머물러 있다. 저자의 부모들이 지구의 바깥 우주를 바라보며 깊이 있는 사고를 펼쳤다면 저자는 그 시선을 가족과 삶으로 돌린다. 일상 속 작은 의식들이 얼마나 삶의 순수한 기쁨을 일깨우는지를 담담하고 미려한 문체로 들려준다.

책 전체에 흐르는 고요한 기저가 있다. 바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다. 거의 모든 장마다 아버지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저자가 얼마나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에게 아버지는 끊임없이 그리운 대상이다. 아버지의 언어, 지성, 가르침, 인격, 태도 등 그 모든 것이 저자에게 흘러내렸다. 저자는 아버지를 많이 사랑했다. 주변 다른 사람들처럼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욱이 저자의 아버지는 위대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었다. 『코스모스』를 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란 존재에 구속되지 않았다. 짓눌리지 않았다. 완전히 독립된 자아로 만개했다. 그것이 읽는 독자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낸다.

책을 읽으며 두 가지 도전이 생겼다. 하나는 칼 세이건의 명저 『코스모스』를 제대로 읽고 싶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도 딸에게 '코스모스'와 같은 거대한 지적·정신적 유산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전자는 쉽다. 이미 두꺼운 개정판을 질렀다. 올여름에 천천히 탐독할 계획이다. 후자가 문제다. 아버지로서 거대한 영혼의 자산을 딸에게 물려준다는 건 과히 기적 같은 일이다. 쉽지 않다. 노력하겠다.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겠다.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 훗날 이 블로그도 딸에게 물려줄 위대한 유산의 목록 중 하나일 것이다. 말과 행동, 성실과 정직, 도덕과 신앙 등 딸아이에게 흘러내릴 모든 것들을 살피고 가다듬겠다. 그래서 칼 세이건처럼 딸이 그리워하는 아빠의 표본이 되겠다. 이 비전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서평을 정리하자. 책 제목은 진실이다. 우리는 정말 작은 존재들이다. 위대하면서도 한낱 작은 존재다. 이 책은 이 명제에 관한 과학적·개인적·인문학적 통찰이다. 칼 세이건의 유일한 소설 『콘택트』의 명언을 소개로 서평을 끝맺음 한다. "우리와 같이 자그마한 생명체는 오로지 사랑을 통해서만 우주의 광대함을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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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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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재미있을 수도 있고, 뭔가를 가르치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느낌을 나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야기가 국경과 여러 차이를 넘어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것에 호소한다는 사실입니다." - 가즈오 이시구로,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중

이것이 노벨상 작가의 포스인가. 그렇다. '이야기'는 독자와 느낌을 나누어야 한다. 공감할 수 없는 소설은 죽은 소설이다. 소설은 공감을 통해 언어와 국경을 넘고 성별과 문화를 넘는다. 그럼으로써 이야기는 작가의 것이 아닌 진정한 독자의 것으로 전이되고 확장된다. 이 위대한 소유권의 이전은 사르트르가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e)'라는 멋들어진 말로 포장한 이래 문학에 대한 현대 비평의 정설이 되었다. 서두에 인용한 이시구로의 노벨상 연설 한 토막은 소설이란 문학 장르에 존재하는 '작가'와 '독자'와 '허구' 사이의 복잡다단한 함수성을 적확하고 시원하게 포괄하는 명문장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국경과 여러 차이를 넘어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것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학의 두 가지 기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문학의 기능이 교훈과 재미라는 양대 축에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대중성의 최전선에 위치한 소설이란 장르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한국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궁핍했다. 문학은 무언가 젠 척해야 하고 무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한국의 지난한 현대사와 맞물려 고리타분한 이야기만을 양산해왔던 게 사실이다. 물론 최근 다양한 주제와 기법으로 한국소설의 폭과 박력이 넓어지고 확장된 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 그런 차원에서 다양한 우주의 폭을 보여주는 해외소설의 역동은 참고할 만하다. 여하튼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교훈과 감동은 그다음이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간 『클라라와 태양』은 쉽고 재미있고 무게 있는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쉽고 간결하며 군더더기 없다. 감동적이고 묵직하다. 소설의 주인공 클라라는 인간이 아닌 로봇이다. 실제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갖춘 '인공지능 친구(Artificial Friend · AF)'라는 형태의 로봇인데 클라라는 그 구형 버전이다. 로봇 매장 쇼윈도에 진열된 클라라는 비록 최신형은 아니지만 다른 AF와 달리 인간의 감정에 관심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하다. 어느 날 야위고 걸음걸이가 불편한 조시라는 소녀가 나타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둘은 서로에 끌린다. 조시는 꼭 클라라를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한다. 클라라는 다른 아이의 간택까지 거부하며 조시를 기다린다. 오랜 기다림 끝에 조시는 약속대로 다시 나타나 클라라를 선택해 집으로 데려온다.

소설 속 1인칭 화자 클라라는 인간이 아닌 소설 주인공으로는 문학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매력을 가진 존재다. 앞서 언급한 대로 클라라는 구형 로봇이다. 최신형에 비해 기계적인 기능이 떨어지고 부족한 것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클라라의 불완전한 인식 구조와 감정 상태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 교차된다. 하지만 자신을 선택해 준 조시에 대한 마음만은 일편단심이다. 클라라의 불완전한 기작도 조시와 진심 어린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발전해가고 안정되어 간다. 긍정적인 미래를 의심하지 않고 조시에 대한 희생과 헌신에 자신의 전 존재를 투영하는 클라라의 열정이 웅숭깊다. 클라라와 조시가 서로 간의 관계를 발전시키며 우정과 신뢰를 쌓아가는 모습은 참으로 정갈하고 아름답다.

소설의 제목을 생각한다. '태양'은 클라라에게 신적인 존재로 은유된다. 상식적으로 '로봇-신(神)' 사이의 관계 설정이 어색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태양은 에너지의 근원과 신앙을 동시에 대변(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태양은 클라라의 기계적 힘을 작동시키는 동력의 원천이자 자양분이다. 클라라는 조시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는 힘이 태양에 있다고 믿고 강력한 태양빛을 조시에게 비출 것을 갈망하고 계획한다. 과학의 산물인 AF가 태양빛에 의한 치유라는 비과학적 기제에 경도된 아이로니컬한 설정이지만 클라라의 '믿음'은 한없이 순수하고 한결같아 마치 영혼의 숨결이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클라라의 열심과 수고는 소설의 마지막 이야기의 극적 반전을 만들어내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소설의 탁월함은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 점에 있다. 작가는 과학 발전과 윤리 사이의 긴장, 즉 빅데이터, 유전공학, 인공지능 그리고 이들이 불러올 윤리·도덕적 문제를 나열하지 않는다. 그저 클라라의 시선에 비친 인간 세계의 일상성과 남루함을 사색할 뿐이다. 인간 로봇이라는 타자(他者)적 관점이 관찰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현실보다 더 실재와 같아 불편하기까지 하다. 인간이란 종족은 먹이사슬의 최상단에 위치해 있지만 동시에 오류와 한계로 가득 찬 불완전한 존재다. 특별하지만 완벽하지 않고 가능성이 넘치지만 자주 실수하는 종족이다. 이런 인간의 양면성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탐색하는 로봇 클라라의 시선이 농밀하다. 지적하거나 꾸짖지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더 와닿는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오랫동안 묘한 기분에 정지해 있었다. 로봇 클라라의 매력은 많은 사유의 실타래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인간은 특별한가. 인간성의 미래에 희망이 있을까. 인간 됨의 본질은 무엇일까. 여러 질문이 샘솟는다. 인간성, 과학, 사랑, 상실, 종교, 죽음, 망각(기억) 등 다양한 주제를 관통하며 여러 생각을 갖게 하는 소설이다. 쉽고 아름다운 우화이면서 행간은 넓고 질문은 깊다. 가끔 어떤 책들은 아이와 함께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싶은 충동을 주곤 한다. 『클라라와 태양』은 딱 그런 소설이다. 초등 4학년인 첫째 딸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여운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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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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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신경숙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한국 소설가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 표절 사태에 휘말리게 되어 종국적으로 어느 정도 사실로 정리되는 과정을 본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외딴 방』을 쓴 작가가 표절이라. 당시의 멘붕은 대단했다. 더욱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태도로 슬그머니 넘어가려는 신경숙의 비겁한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그래서 당시 별도의 칼럼을 통해 "진실은 신경숙 안에 있다. 지금은 엄마를 부탁할 때가 아니다. 부디, 진실을 부탁해!"라고 일갈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신경숙의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표절 파문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소설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를 주제로 삼았다. 어머니의 입원 때문에 홀로 남은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고향을 찾은 딸이 아버지의 인생을 되짚는 내용의 소설이다. 250만 부 넘게 팔렸고 전 세계 수십여 개 나라에 번역 수출된 초대형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에서 어머니를 이야기했던 작가가 이제는 아버지의 삶을 조명한다. 소설 속 화자인 딸의 고백과 관찰, 회상과 사유가 아버지의 오래고 지난한 삶을 훑고 천착한다. 몰랐던 사실을 알아가고 과거 무의미하게 넘어갔던 것의 의미를 곱씹는 딸의 독백이 잔잔하다.

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몇 해 전 자식을 사고로 잃었다. 그 상실의 아픔에 먼지가 묻을까봐 가족들은 딸에게 연락하는 걸 주저하고 피한다. 딸 자신도 가족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류가 없다가 어머니의 입원을 계기로 소설 속 배경 'J시'에 혼자 남은 아버지를 돌보러 가는 장면이 바로 소설의 도입부다. 빈 우사에 갔다가 아버지가 중동으로 파견 나간 큰 오빠와 주고받은 편지를 읽기도 하고, 아버지와 관계된 여러 사람들을 통해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또 다른 내면과 객관을 발견하기도 한다. 특히 아버지에게도 은밀한 첫사랑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참혹한 전쟁(6.25)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준 자책을 극복하며 재회한 친구 박무릉과의 이야기는 큰 상실에 빠진 딸에게 위안을 준다.

소설 곳곳에 아버지의 일생과 함께 흘러간 파란만장한 대한민국의 현대사의 주요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한국전쟁의 참혹함부터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혁명,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피땀 흘려 농사짓고 소를 키운 그 시대 농촌 가장의 힘겨운 역경 등이 그려졌다. 195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가 오롯이 담겼다. 하지만 화자는 그 시대ㅡ산업화 시대ㅡ의 아버지를 대변하는 거대 담론에 묻히지 않는다. 개별자로서의 아버지를 인식한다. 자식을 잃은 깊은 상실감을 아버지에 관한 재해석을 통해 극복해나간다. 개별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란 존재를 발견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간다. 그 과정이 애잔하고 감동적이다.

세상에서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나에게 이 소설은 특별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소설 속 아버지의 모습과 나의 아버지의 자화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1947년생이신 내 아버지는 한국전쟁 직전에 태어나서 두 살에 아버지(나의 할아버지)를 잃고 남의 집 머슴을 하며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랐다. 가끔 듣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은 눈물겹다. 그 시대 모든 아버지들이 공유한 보편적 훈장이라고 말하기에는 한없이 고단하고 찬연하다. 지독한 가난과 전염병, 참혹한 전쟁과 서슬 퍼런 독재 정권의 유린을 관통하며 자기 삶을 뒤로 미룬 채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위대한 헌신자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찬양받아 마땅하다. 가끔 젊은 세대들이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선배 세대의 노고와 희생을 가볍게 여기고 조롱할 때마다 분노가 치민다.

우리는 아버지란 존재를 평가할 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아버지는 신(神)이 되어야 본전이다. 각 시대가 갖는 시대의 특질이란 게 있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타락하지 않은 것만으로 위대했다. 순결하고 완벽하기에는 시대의 곡절이 너무 고약했고 지난했다. 바람피우지 않고 놀음하지 않으며 끝까지 가족을 부양해낸 것만으로 숭고하다. 에세이 작가 오소희의 말대로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쉬운 것을 못한 게 아니라 어려운 것을 못한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우리의 위대한 아버지들에게 신이 되지 못했다고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말라. 이 소설은 그 사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웅숭깊다. "살아냈어야,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냈어야,라고." 그렇다. 아버지도 헌신자 이전에 인간이며 개별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삶이란 '산다'가 아니라 '살아낸다'로 사는 것임을 일깨운 것이다. 그래서 위로하고 격려하겠다. 과거 어느 시절에, 그리고 지금 어디선가 "살아냈어야"라고 독백하면서 비루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위대한 아버지들을.

표절 파문과 별개로 신경숙은 신경숙이다. 이런 소설을 써내는 작가의 "과거의 허물과 불찰을 무겁게 등에 지고 새 작품을 써 가겠다"라는 말이 부디 진심이자 진실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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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도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댄 윌리엄스 그림, 명혜권 옮김 / 스푼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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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을 맞이해 첫째 딸 다인이에게 몇 권의 책을 선물했다. 그중 할레드 호세이니의 신간 『바다의 기도』는 단연 눈에 띈다. 호세이니가 동화를 냈다고 해서 딸과 함께 읽어보고 싶었다.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서점을 찾았다. 작가의 인기 때문인지 방문한 서점 대부분에서 대여섯 권 이상을 비치해두고 있었다. 신간 동화(그림책)라는 특징 때문인지 견본 없이 비닐로 둘러놓기도 했다. 국내 최대 온라인 서점의 '오늘의 책' 코너에 당당하게 오른 걸 보면 호세이니의 이름값은 여전하다 싶었다. 출판사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듯했다.

 

할레드 호세이니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 작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미권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명성만큼 많지는 않다. 『연을 쫓는 아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 『그리고 산이 울렸다』 단 세 편의 소설로 단숨에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슬프면서 감동적인 서사로 전 세계 5500만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 그의 첫 소설 『연을 쫓는 아이』는 영화로 개봉돼 수많은 영화팬들의 가슴을 적시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읽기 쉬운 문장과 복잡하지 않은 서사 구조에 조국 아프가니스탄의 굴곡진 현대사를 감동적으로 그려낸 것이 특징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인간성의 숭고함과 여성성의 위대함을 묵묵한 문체로 그려낸 아름다운 이야기다. 『연을 쫓는 아이』는 한 남자의 성장통이라는 테마를 조국 아프가니스탄의 처절한 현실에 녹여낸 거대한 서사시다. 『그리고 산이 울렸다』는 1인칭과 3인칭 시점, 편지글, 잡지 인터뷰 등의 다양한 형식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의 반세기를 훑는 숨 막힌 이야기다. 세 편의 소설은 각기 다른 주인공과 서로 다른 이야기로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적 민낯을 웅대하게 전달한다. 나는 세 편의 소설을 통해 할레드 호세이니에게 완전히 매료되었고 주변 지인에게 끊임없이 추천해왔다.

 

신간 『바다의 기도』는 동화이다. 얇은 두께의 그림책이다. 대략 10분이면 읽을 수 있다.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그림을 감상하는 게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정도다. 책 두께는 얇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두껍고 무겁다. 호세이니의 간결한 문장을 댄 윌리엄스의 유려한 그림이 적확하게 수식했다. 2015년 9월 터키 해변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크루디(Aylan Kurdi)'의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 소설은 아들 마르완을 위한 아버지의 독백과 기도로 이루어졌다. 죽음의 고비에서 아들을 보다 안전한 세상으로 구출하기 위한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가 처연하고 숭고하다. 감사와 기도, 사랑과 희생, 역사와 현실 등을 폭넓게 생각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동화다.

 

난민 문제로 지구촌이 여전히 시끄럽다. 시리아의 꼬마 난민 크루디가 바닷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사진이 공개되면서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의 비극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후 국가마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난민의 유입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도와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문제일까,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난민 문제의 디테일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인종적인 문제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어른의 문제다. 어른들의 탐욕과 불관용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만 죽어나가고 있다.

 

내가 이 짧은 그림책을 통해 딸 다인이와 나누고 싶었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인간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 어른들도 실수를 많이 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는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 이것들을 딸아이가 알고 느끼기를 원했다. 이해하고 공감하길 원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자격이란 '감사'와 '겸손'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기를 원했다. 인간은 분명 뛰어난 종족이되 완전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현실적 조건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지를 알고 그것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걸 일깨우고 싶었다. 흠이 많고 불완전하지만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도전해 주고 싶었다. 과연 다인이는 어떻게 읽었을까.

 

완독한 다인이가 감상평을 남겼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아빠 손을 꼭 잡고 있으면 잘 될 거라는 믿음을 얻었어."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지 못한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어른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는 걸 새삼 인식했다. 그렇다. 자식에게 부모는 신(神)과 같은 존재다. 자식이 커가면서 아빠-엄마의 힘(권력/권위)은 점점 약해지지 마련이지만 아래로 흘러내리는 영향력은 과히 압도적이다. 그렇기에 자식이 나를 믿는다면, 바라본다면, 의지한다면, 사랑한다면, 나는 어떤 마음과 책임으로 인생을 살아야 할까, 생각했다. 묵직한 사유가 내 현존을 억누른다. 마음이 거룩해진다. 예배당으로 달려가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싶어진다. 책 한 권이 주는 기쁨에 흐뭇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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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 여행자 오소희 산문집
오소희 지음 / 북라이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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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품에 세월이 입혀지는 걸 매 책에서 확인하는 것이 리뷰어에게 기쁨이라면, 리뷰어의 작품에 세월이 입혀지는 걸 매 리뷰에서 확인하는 것 또한 작가에겐 큰 기쁨이다."

 

그렇다. 작가 오소희는 알고 있다. 한 사람의 독자이자 북리뷰어로서 내가 얼마나 자신의 글과 생각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사실 그랬다. 14년 전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떠난 그녀의 터키 여행기(『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는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획으로나 내용으로나 여행 에세이 분야에 한 획을 그은 그녀의 첫 에세이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사랑을 받았다. 당시 정치·사상 관련 서적에 함몰되어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던 나에게 오소희의 산문은 촉촉한 밀크티와 같은 것이었다. 내 리뷰를 보고 인상적이라며 만남을 요청한 그녀의 제안으로 광화문의 큰 서점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이후 차곡히 쌓인 서로 간의 '평가와 우정의 양립'은 지난 십수 년 동안 변질되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위 전작주의(全作主義)를 통해 한 작가를 오랫동안 관찰하다 보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작가의 변모 혹은 성장과 같은 발전 단계의 흐름을 포착할 때가 있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작가로 한정하면 소설가 공지영은 '산문성의 축소에 따른 소설력의 강화'라는 측면으로, 하루키는 '개별 사랑을 우주적 관점으로 확대해가는 시각'이란 측면에서 작가적 세계관을 확대해갔다. 반면 작가 오소희는 '떠남'이란 소재를 '보편 인간성의 찬란함과 비루함'이라는 코드로 풀어내면서 그 장르와 문체를 끊임없이 변화시켜갔다는 점이 독특하다. 에세이로, 소설로, 동화로, 육아서로, 페미니즘으로. 다양한 형태(외연) 속에서 생명력 있게 뽑아내는 작가의 사유와 텍스트는 그 특유의 울림과 진폭을 통해 독자의 가슴을 적셔왔다.

 

오소희의 신간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은 '여행'에 관한 사색을 그 대척점인 '집'의 재발견으로 아름답게 연결한 산문집이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떠나지 못할 것을 명령했지만 역설적으로 새삼 집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떠남에 익숙한 작가에게 코로나19는 느닷없는 불청객이었을 게다. 그러나 작가는 여행작가로서의 자신의 실존 성찰을 멈추지 않는다. 작가에게는 떠나지 않고도 보이고 사유할 것들이 있었다. '떠남'을 보충하고 완성하는 것들이었다. 바로 '머묾'이었다. 작가는 이번 신간을 통해 '떠남'과 '머묾'이라는 서로 배치된 개념을 대구적(對句的)으로 양립시키며 여행의 의미를 탐색한다.

 

은 여행과 집에 관한 사유와 통찰이 대구를 이루는 구조로 쓰였다. 작가는 수시로 우붓(발리)과 부암동(서울)을 오가며 서로 다른 시공간의 차이와 조화를 꾀한다. 가령 부암동 집 옥탑방에서 동쪽 창밖을 내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어느덧 파리 시내에서 종일 신문을 돌리다 옥탑방으로 돌아온 신문팔이 소년에게로, 가로등 하나 없는 필리핀 팔라완의 바닷가 마을로, 콜롬비아 보고타의 산기슭 빈민가의 미로로 옮겨간다. 옮겨진 시선은 자못 진지하고 차분한 사색을 거쳐 여행자의 내면 속으로 잠입한다. 세상 모든 여행자의 '운명적 형벌'에까지 다다른다. 그리고 작가는 선언한다. "맘대로 떠났다 돌아온 자, 너는 연옥에 머물라." 독자는 작가의 해석을 통해 여행자의 본질적 외로움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지면은 작가가 책 곳곳에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을 고백한 부분이다. 책은 크게 2개의 방(챕터)으로 나눠져 있는데 첫 번째 방이 여행과 집에 관한 작가 내면의 사색이 주를 이룬다면 두 번째 방은 작가 주변 사람들, 대부분 가족에 관한 작가적 고백이 다수를 차지한다. 남편, 아들, 아버지, 오빠의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특히 남편 이야기가 상당히 감동적이다. 작가의 부부관계도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무려 열아홉 장을 할애해 오랜 시간 동안 깎이고 다듬어진 부부애의 발전사를 아름답게 기록했다. 어느덧 안정 궤도에 오른 수십 년 차 중년 부부의 영혼의 아우라가 잘 담겼다. 각자 완전히 다르지만 서로 온전히 사랑한다는 걸 문장 곳곳에서 느낀다. 매일 손잡고 부암동 골목을 걷는 작가 부부의 현재상이 멋지다. 작가의 말대로 부딪힘도 간절한 소통이다. 연마되고 버려진다. 작가보다 한참 인생 후배지만 행복한 부부관계는 반드시 이 대목을 관통한다는 걸 알기에 흐뭇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또 하나 인상적인 감상은 집의 의미와 가치를 보다 깊이 있게 고찰해보게 된 것이다. 사상 초유의 세계적 전염병의 창궐로 우리 모두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과거에 비해 늘어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집의 의미를 지나치게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치환해왔다. 지역, 층, 평수, 가격, 인테리어 등 한국적 의미에서의 집은 크기와 가격이라는 수학적 가치에 함몰되었다. 나도 그랬다. 2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우리 부부가 우선적으로 고려한 건 멋진 전망과 인테리어 퀄리티였다. 좋은 집이란 외적인 미(美)의 화려함이 극한까지 확보된 공간으로 이해했다. 이사 심방을 온 목사님의 일갈이 있기 전까지. 진리는 전혀 달랐다. 좋은 집을 결정하는 건 집주인이었다. 좋은 집은 좋은 주인이 사는 곳이었다. 좋은 집에 대한 작가적 정의도 바로 여기에 맞닿아 있다. 작가가 직접 짓고 꾸민 부암동의 새 집은 나만의 공간이 아닌 타자와의 나눔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살롱이었다. 여성들의 문화 공간 '부암살롱'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곳을 통해 작가는 '엄마들을 옭아맨 역할억압을 하나씩 해체하는 처방들'을 공유했다. 그것은 '언니공동체'로까지 확장되어 '구덩이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고 싶어 한 여성들'의 영혼의 항구가 되어주었다. 좋은 집에 대한 가장 적확하고 아름다운 예라 할 수 있다.

 

작가의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신간 또한 감사와 행복의 테마를 진지하게 탐색한다. 작가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것이다." 즉 여행의 외재적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있던 자리를 떠나야 한다. 떠나지 않는 여행은 성립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하는 부분이다. 과거의 책들이 떠남으로써 머문 곳을 사색했다면 이 책은 머문 곳에서 떠남과 머묾을 동시에 천착한다. 그래서 둘은 단절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재조명하고 피드백하는 관계임을 알려준다. 작가는 독자에게 질문한다.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일깨운다. 결핍이든 풍요든 결국 행복의 문제는 해석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그리고 그 오래고 낡은 세상 모든 종교와 지혜의 키워드 '감사'가 항상 그 앞에 붙는다는 것을.

 

서평을 정리할 시점이 왔다. 내가 오소희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랑에 관한 입체적 천착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오소희는 사랑꾼이다. 그녀가 쌓아올린 십수 권의 책 더미는 한결같이 인간 사랑의 실재적 디테일을 주목하고 관통한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내 눈앞의 한 사람'을 향한 진짜 사랑말이다. 우리는 결코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세상 모든 사랑은 완전히 평등하고 고결하다. 그리고 연결되어 있다. 그녀가 떠남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내가 그녀의 글을 사랑하는 것까지. 이 숙연한 인식과 감동의 최전선에 신간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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