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최근까지 고 이어령 교수의 저작을 두루 탐독했다. 그중 먼저 하늘로 떠난 딸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글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두 딸을 키우는 나에게 공감이 될만한 부분이 많아 여러 부분에서 실제적인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 딸을 향한 그리움을 표출하는 감성도 좋았지만 딸에게 보내는 편지지에 넘실거리는 아버지의 거대한 지성이 인상적이었다. 니체, 사르트르, 보부아르, 데카르트, 볼테르 등 여러 인문학적 토막을 인용해 고인 자신의 철학을 딸에게 질문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하나의 지적(知的) 로망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 인생 최고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딸과 함께 읽고 토론해 보는 것이다. 안나의 선택을 진정한 사랑의 용기로 볼 것인지 순간 욕망에 빠진 불륜의 비극으로 볼 것인지. 톨스토이의 작품 속 분신인 레빈의 삶과 사랑을 현시대에서 어떻게 리뷰할 것인지. 삶과 죽음을 동일선상에서 천착한 톨스토이의 사상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먼저 쓰인 또 다른 걸작 『전쟁과 평화』와 비교했을 때 어떤 소설이 더 뛰어난 작품인지 등. 나눠보고 싶은 얘기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내 로망을 교육적 욕심이나 지적 허례의식의 발로로 보지 않기 바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을 함께 읽고 서로 간 견해의 차이를 나눠보기 위함, 그 자체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딸과 함께 스키를 타거나 여행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빠가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고전문학을 딸이 함께 읽기를 바라는 동시에 읽은 후 자기만의 사유 속에서 아빠와는 분명히 다를 딸만의 감상을 경청해 보기 위함이다. 삶과 사랑, 연애와 결혼, 정치와 예술, 노동과 경제 등 소설 『안나 카레니나』가 다루는 모든 영역에서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작년 초 나에게 영향을 준 양서만 모아놓은 책장 하나를 큰딸 방으로 옮겼다. 본래 거실에 있던 것을 아내의 피아노 레슨을 이유로 마땅히 옮길 데가 없어 딸 방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그 책장에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찬연한 작품들, 알베르 카뮈 전집, 빅토르 위고의 소설들, 폴 존슨의 인문학 저작들, 이근식 교수의 자유주의 사상총서 5권,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시리즈 등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찬탄스러운 책들로 가득 차 있다. 내 딸이 그 책장에 꽂힌 책만 읽을 수 있다면, 그래서 나와 토론하고 서로 간의 다른 생각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아빠일까, 생각했다. 

가끔 훗날 딸에게 물려줄 유산이 무엇일지 생각한다. 얼마 안 되는 돈.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 형성된 성격과 기질.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가풍 정도가 있겠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내가 수십 년에 걸쳐 읽은 거대한 책 더미를 딸에게 물려주고 싶다. 톨스토이와 헤밍웨이, 카뮈와 위고의 세계를 유산으로 남기고 싶다. 서울 도심의 어느 대형서점 입구에 쓰인 글귀처럼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비전이 내 가슴을 웅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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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23-02-2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붉은돼지입니다. 자칭 전집선집특별판한정판 수집가입니다.ㅎㅎㅎ
서가에 꽂힌 1~7권 전집이 무엇인가? 처음보는 것 같아서 찾아보니
위에 말씀하신대로 까뮈 전집이네요...전집수집가로서 부끄럽게도 처음 보는 물건이라..
제가 뭐 까뮈를 좋아하지 않지만 아니 사실 별 관심이 없지만...저 전집은 탐나는군요
일단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한권 한권씩 구입해야겠습니다. 혹시 그사이에 절판되지는 않겠죻ㅎㅎ

다윗 2023-02-21 11:01   좋아요 0 | URL
붉은돼지님 반갑습니다. 전집 수집가라 하시니 멋집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카뮈 전집(특별판)이 맞습니다. 당시 마누라 눈치 보면서 질렀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관련 블로그 포스팅 참고 바랍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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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23-02-21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더.. ‘거대한 책더미를 딸에게 물려주고 싶다‘ 고 하셨는데 저하고 똑 같은 생각이십니다요. ㅋㅋㅋ 하지만 제 딸은 책에는 전현 관심이 없다는 것이 함정 ㅜㅜ 제가 나름 괜찮은 귀한 책들 많이 모아 놓았거든요..몇 번 이야기했는데 전혀 관심무...ㅜㅜ 안타깝습니다......
 

자식을 키우며 놀랄 때가 많다. 자녀를 양육한다는 건 청년 때에는 경험하거나 상상하기 힘든 지혜와 역량을 공급받는다는 것과 동의어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부모도 성장한다. 아니 성장해야만 한다. 아이의 성장에서 배우지 못하는 부모는 못난 부모다. 아이가 커갈수록 부모의 배움의 깊이도 커진다. 자녀 양육을 통해 얻는 지혜는 감미롭다. 지난 주말 우리 가족에게 흥미롭고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 이를 소개하면서 자식 키우는 보람과 감동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나에게는 초등학생 두 딸이 있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둘째 딸은 몇 가지 버릇이 있는데 그중 가장 고약한 게 샤워할 때 멍 때리며 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해 샤워기로 자기 몸 적시는 것에 중독이 됐다. 우리나라가 UN이 정한 물 부족 국가이고 물과 가스와 같은 자원은 아껴 써야 한다는 걸 거듭 알려주어도 좀처럼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다. 고집과 자존감도 제법 센 편이라 혼날 때는 개선하는 듯하다가 다시 제자리다. 아주 골치 아픈 버릇이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의 일이다. 이 녀석이 또 샤워기로 물을 몸에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내가 물 잠그고 얼른 나오라고 아우성이다. 몇 차례 경고를 주었는데도 함흥차사다. 아내의 목소리가 커지자 거실에 있던 내가 나섰다.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녀석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다. 나는 매섭게 훈계했다. "왜 계속 물을 틀어놓니. 엄마 말은 왜 안 듣냐"며 나무랐다. 그랬더니 "이제 곧 나가려고 하잖아."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눈을 부릅뜨고 말대답하는 모양새가 거슬려 아이 이마에 딱밤을 한 대 때려주었다. 녀석은 아팠는지 울면서 화장실 밖으로 휑 나가버린다. 상황은 일단락된 듯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역시 말 안 들을 때는 혼나야 해"라며 나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초등학교 6학년인 첫째 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의를 제기한다. "아빠! 근데 서윤이(둘째 딸) 왜 때린 거야?" 어이가 없어 바로 답변한다. "서윤이가 물 낭비하는 게 어제오늘 일이니. 엄마 말도 안 듣고 말이지. 잘못했으면 혼나야지." 그랬더니 첫째 아이가 대응한다. "서윤이가 물 낭비하는 건 잘못했어. 하지만 엄마가 화장실에서 나오라고 해서 손 씻고 수건 준비하는데 아빠가 다짜고짜 와서 꿀밤을 때렸잖아. 서윤이 얘기 들어보지도 않고. 그렇지 않아도 엄마한테 한소리 들어서 속상한데 막 나가려고 하는 서윤이를 때린 건 아빠가 잘못했다고 봐." 순간 멈칫했다. 아이 말이 맞기도 맞았거니와 살짝 떤 채로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분히 방금 전 상황을 복기했다. 그랬다. 둘째 아이는 이미 엄마에게 혼이 난 상황이었고 엄마 지시대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중간에 끼어들어 정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이마에 꿀밤을 갈긴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첫째 아이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용기를 내 아빠를 찾아와 항의한 것이다. 첫째 딸이 눈앞에서 목격한 장면은 정당하지 않았고 납득되지 않았다. 동생이 억울해 보였다. 이런 억울한 일이 집에서 일어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략 상황이 정리됐다. 순간! 나의 첫째 딸 다인이가 너무 멋있고 자랑스러웠다.

논리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답변을 주어야 했다. 아이에게 변명하지 않았다. 내 잘못을 바로 인정했다. 방안에 토라져 있던 둘째 아이를 불러 정중히 사과했다. 아빠가 오해했고 방금 전 자초지종도 물어보지 않은 채 이마에 딱밤을 때린 건 아빠의 과오였음을 인정했다. 둘째 아이는 그제야 억울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며 함지박 같은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첫째도 덩달아 울었다. 나는 두 딸을 안아주면서 아빠가 잘못했음을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리고 잠시 후 첫째 아이를 따로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방금 전 그 용기 너무 멋졌어. 앞으로 집에서뿐 아니라 학교와 학원에서,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억울한 사람을 만나거나 정의롭지 못한 장면을 본다면 지금처럼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지? 첫째는 답변했다. "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감동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갑자기 첫째 아이가 나에게 귓속말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아빠. 잘못을 바로 인정하고 사과한 아빠가 너무 멋있어." 나는 그 순간 일시 정지되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끌어 오르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속으로 속삭였다. 녀석은 다 알고 있구나. 첫째 아이를 다시 한번 꼬옥 안아주었다. "고맙다. 내 딸." 내면에서 솟아오른 작은 눈물이 내 눈에 고여있음을 발견했다. 첫째가 대견했고 나도 멋져 보였다.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다. 주말 오전 우리 가족이 만들어낸 감동의 한 장면이 며칠 동안 내 가슴을 휘어잡았다. 이게 자식을 키우는 보람이자 묘미구나, 생각했다.

올해 열세 살이 된 첫째 딸은 이제 더 이상 심통과 어리광을 부리던 과거의 그 녀석이 아니다.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지만 동시에 가장 무섭다고 말해온 아이였다. 엄청난 독서량으로 중무장한 파워블로거이자 회사에서는 영업팀 최고 선임인 사십 대 중반의 아빠에게 공정과 정의(正義)를 질문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아이의 날카로운 논리에 진땀을 빼야 할 것이고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 수고해야 할 것이다. 부모의 힘과 권위만으로 자식을 제압하던 시대는 종말했다. 두 아이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여기고 그 어떤 핸디캡 없이 평등하게 소통하고 토론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다. 그래야 아이는 부모 너머의 세계로 안정감 있게 나아갈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소통해서는 곤란하다. 얼마나 많은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절대 권력에 짓눌리는 것 같지만 커서도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될 것 같은가. 부모는 자식이 세상에 나가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잠시 맡아서 기르는 존재다. 부모도 완전하지 않아 실수하고 넘어진다. 오류도 있다. 모순적이기도 하다. 자식에게 잘못한 게 있다면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자식이 나중에 부모가 되었을 때에 동일한 모습을 자식에게 발현할 수 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필히 부모도 자라야 하는 이유다.

전술한 대로 두 딸은 점점 더 커갈 것이다. 몸이 자라는 만큼 마음의 크기도 자랄 것이다. 논리와 실력으로 부모에게 대항할 때도 많아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부모 권력을 동원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동일한 운동장에서 서로 간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두 딸이 나를 넘어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세상 못난 부모들이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결국 자식은 부모라는 존재를 관통하면서 세상과 조우한다. 나와 내 아내가 두 딸의 상처가 되지 않기를, 진심 두 아이의 용기와 자신감의 영감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지난 주말의 한 토막 일화가 생일날의 내 가슴을 웅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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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5대 제국 - 통通박사 조병호의
조병호 지음 / 통독원(땅에쓰신글씨)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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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저녁이다. 두 딸에게 성경을 가르치는데 녀석들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큰딸이 질문한다. "아빠! 성경은 진짜 있었던 이야기야?" 아니 이게 웬일인가. 3대에 걸친 기독교 가정에서 성경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가 있다니. 하긴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이라 그런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신화 같은 에덴동산 이야기, 이집트의 10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모세,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병거 타고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등 기독교는 온갖 신비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아이는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이 진짜 있었던 실제 역사임이 궁금했던 것이다. 아빠(나)의 답변은 뭐였겠는가. 당연히 "그렇지"였다.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주변 지인에게 기독교 신앙과는 별개로 성경은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는 편이다. 전도에 어느 정도 목적이 있다는 걸 부인하지 않지만 성경만큼 완성도 높고 배울 게 많은 책도 많지 않다. 특히 구약성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데 당시 중동 지역의 역사와 포개지면서 흥미롭고 박진감 넘친다. 성경에 나온 인명과 지명이 모두 세계사의 실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 차원을 넘어 역사적 맥락에서 탐구하면 과히 놀라움과 스펙터클함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일독을 권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총 다섯 제국이 나온다. 실제 역사 순서대로 아수르(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알렉산더), 로마 제국 순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각 제국은 당시 근동에서 가장 잘나가는 나라였고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섯 제국의 역사는 비단 성경이 아니더라도 세계사라는 대양 위에서 다양한 기록과 문헌을 통해 사람들에게 소개되어 왔다. 조병호 교수의 『성경과 5대 제국』은 기독교의 역사가 다섯 제국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성경적·역사적 관점에서 기술했다. 명저다.

이 책의 강점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를 아우르는 포용력에 있다. 신자든 불신자든 불편하지 않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성경적이지만 세계사적이고 역사적이지만 신앙적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거대 제국을 당신의 구속사를 위해 어떻게 들어 쓰셨는지를 은혜롭게 읽어낸다. 비기독교인은 마냥 신화와 같았던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실제 있었던 세계 제국의 역사에 포개며 학습한다. 신자에게는 은혜롭고 비신자에게는 교훈적이다. 내용이 어렵지 않고 쉽게 읽히는 점도 훌륭하다.

무엇보다 한 권의 책이라는 분량에서 핵심만을 짚어낸 점이 탁월하다. 저자는 목사이자 교수로서 평소 성경 통독의 중요성을 우리 사회에 꾸준히 강조해왔다. 저자가 그간 집필한 책들의 대부분이 성경 읽기와 관련이 있고 공개석상의 강연과 유튜브 영상도 온라인상에 적잖이 올라와 있다. 성경은 세밀하게도 읽어야 하지만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맥을 잡고 큰 틀에서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정독과 깊이 있는 묵상이 가능하다. 맥을 잡지 못한 채 성경의 어느 한 부분에만 함몰되면 오독하거나 이단에 빠질 염려가 있다. 이런 면에서 성경 읽기의 통독적·조망적 관점을 명료하게 제시한 저자의 수고는 아름답다. 

사실 그렇다. 성경은 개신교를 비롯한 범 아브라함 태생 종교(유대교/이슬람교/가톨릭/성공회 등)가 공유하는 신(神)의 선물이다. 기독교 중심적으로 말하자면 구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에 대한 말씀이다. 간혹 구약을 그저 옛이야기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성경의 완결성에 대한 무지한 도전이다. 창세기 12장부터 펼쳐지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 민족의 역사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당대 세계를 제패한 여러 제국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이집트, 앗수르, 바빌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에 이르는 고대 근동의 패권은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어디에 있는가를 새삼 일깨운다. 모든 제국은 한결같이 다 망했다. 영원한 제국은 없었다.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 누구인지, 세계의 왕이 누구인지를 성경은 일관된 흐름으로 설파한다.

최근 교회의 젊은 후배 집사와 차를 한잔할 일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함께 자란 사이인데 나를 좋아하고 잘 따르는 친구다. 최근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어 아내와 함께 새벽 기도를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제법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힘 있고 건강한 신앙생활의 선결조건은 '성경을 아는 것'임을 도전 주었다. 그저 문장을 읽는 게 아니라 골격을 갖춰 조망해야 함을 강조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시간과 공간 위에 올려놓고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훈수했다. 그리고 몇 권의 책을 추천해 주었다. 이 책은 그날 추천의 최전선에 있다. 그 후배뿐 아니라 성경을 세계사적 실제 사건으로 읽기 원하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조병호 교수의 『성경과 5대 제국』은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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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파친코 1~2 - 전2권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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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톨스토이를 읽을 때 러시아인이 되고 디킨스를 읽을 때 영국인이 되며 헤밍웨이를 읽을 때 약간 미친 남성 미국인이 되는 것처럼,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모든 독자들을 한국인으로 만들고 싶다” - 작가 이민진

장편소설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이 모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소위 뻑 갔다. 작가의 말이 내가 소설을 읽을 때 받는 감동의 본질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그랬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러시아 귀족이 되었고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시골 소년이 되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은 나를 일본 전국시대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고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참혹한 내전에 번민하는 스페인 민중이 되게 했다. 바로 이것이 소설의 힘이자 문학의 기능이다. 그리고 베스트셀러 『파친코』가 쓰인 이유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소설 『파친코』는 1910년 한일합방부터 1989년 일본 버블경제 붕괴까지 약 80년의 현대사를 4대에 걸친 재일교포 가족의 삶을 통해 관통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선자 가족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인 동시에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나가사키 원폭 투하, 한국전쟁, 80년 버블경제 붕괴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족적이기도 하다. 참혹한 시대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선배 세대의 대를 잇는 고군분투가 감동적으로 읽힌다. 전쟁과 가난, 차별과 혐오에 맞서 싸운 선자 가족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든다.

스포일러 때문에 구체적인 줄거리는 다루지 않겠다. 부산 영도에서 가난하게 살던 한 여성(선자)이 두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해서 어떤 계기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차별과 혐오에 맞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스토리다. 2권으로 구성된 소설은 1권에 선자의 삶과 사랑에 집중한 반면 2권은 보다 다양한 인물들을 여러 각도에 훑는 방식을 취한다. 1권의 묘사가 구체적이고 느린 시간 흐름을 택했다면 2권은 대략적이고 중반부터 빠른 시간 흐름이 특색이다.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점점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건 이 소설이 가진 독특한 개성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데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선자의 손자 솔로몬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소설의 초고 『모국(motherland)』은 자이니치(재일교포) 3세를 주인공으로 했지만 결국 한 챕터만 남기고 모두 버려야 했다. 작가의 고백대로라면 "큰 이야기를 담을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견 공감한다. 하지만 솔로몬의 시대가 할머니 선자의 시대보다 크기와 무게가 부족했다고 보지 않는다. 한 시대가 갖는 의미와 가치란 각기 동등하고 평등하다. 그런 차원에서 뒷부분에도 더 많은 할애를 하여 소설을 3권 이상으로 출간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분량과 감동이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역사를 다룬 소설에는 경우에 따라 거대 서사 자체가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나 『레미제라블』처럼 말이다.

『파친코』는 묵직한 여러 테마가 겹쳐져 읽히는 소설이다. 여성의 위대함, 역사의 도도함, 민족의 긍지와 투혼, 가족의 찬란함 등 굵직한 여러 읽기 코드가 작동한다. 이 소설이 감동적인 이유는 이러한 거대 테마를 다루면서도 그것에 짓눌리지 않는 단단한 개인의 이야기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소설을 읽을 때면 시대에 짓눌린 인물이 나오기 마련인데 선자를 위시한 『파친코』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각자의 캐릭터성이 완전히 살아있다. 명징하고 생생하다. 선자의 인생을 뒤흔든 악역 같은 캐릭터 고한수도 자기 내면에 치열하고 남루한 번민을 가진 복잡한 인물로서 작품 속에서 그만의 개성이 완전히 살아 있다. 인물이 시대의 산물로서가 아닌 각 개인으로서 살아 숨 쉬는 이야기. 그게 바로 소설 『파친코』의 힘이다.

제목 '파친코'는 탁월한 작명이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파친코'가 어떤 의미를 상징하는지 알게 되면 무언가 묵직한 불편함이 엄습해온다. 파친코는 당시 일본에서 차별받고 멸시받던 재일조선인의 삶의 터전이다. 천한 직업이란 인식 탓으로 정작 일본인은 기피했던 것을 일제 패망 뒤 먹고사는 걸 해결하기 위해 재일교포들이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었다. 파친코는 재일한인들의 삶이자 반전이자 돌파구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냉대와 멸시를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통해 응수했고 극복했다. 요컨대 제목 '파친코'는 이국땅에서 김치 냄새난다는 놀림을 당하면서 식당 일로 생계를 꾸리며 자식을 키워낸 선자와 파친코 사업을 통해 부와 권력을 쟁취해낸 모자수·솔로몬 부자의 치열한 역동성을 오롯이 담아내는 명제목이다.

애플tv에서 제작한 동명의 드라마는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좋은 느낌을 굳이 망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원작 소설과 대결하면 백전백패한다. 나는 지금까지 원작을 능가한 영상 장르의 예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한 데 비해 인간의 감각 유한하기 그지없다. 이 무한성과 유한성 사이의 거대한 공간이 문학이 가진 힘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 『파친코』를 읽고 밀려든 묵직한 감동이 내 전신을 적신다. 잘 팔리는 소설은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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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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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선각자의 말대로 삶과 죽음은 매한가지일까. 삶과 죽음이 매한가지라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이 죽는 것인데 무얼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인간은 대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주변 지인들의 모습과 책에서 만난 수많은 인간상의 양태는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죽음을 적극적으로 즐거워 한 이는 없다. 인간에게 죽음은 쿨하지 않다. 죽음은 공포다. 두려움 자체이며 본질이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이 매한가지라는 얘기는 어불성설이다. 내 생각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어느 경제학자는 인간의 본성은 자유와 이기심이라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은 자기 위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자연스러운 종족이다. 반면 어떤 철학자는 인간의 본성을 평등과 이타심으로 규정했다. 아무래도 앞선 경제학자의 말보다는 멋져 보인다. 이타적 인간이란 얼마나 세련되었나. 인간 종족의 품격이 느껴진다. 20세기 지구는 이를 실험하는 실험장이었다. 많은 직업정치인들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제도를 만들었고 집단을 창설했다. 천국과 신세계를 주장했다. 혁명에 가담했고 사람을 선동했다. 결국 수많은 인간이 죽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점점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종족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인간 활동의 많은 부분이 기계로 대체되는 중이다. 인간의 기계 필요 욕구는 점차 의존성으로 바뀌고 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편리함을 누리지만 정신적으로는 소외되는 중이다. 가끔 섬뜩함을 느낄 때가 있다. 스마트폰이란 작은 기계를 만지작거릴 때면 스마트폰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건지 내가 스마트폰을 위해 존재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이러다 의식마저 가늘어진 조악하고 비루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김영하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왔다. 신간 『작별인사』는 김영하가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로봇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주인공 철이는 유명한 IT 기업의 로봇 연구원인 아버지와 함께 인간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외출한 어느 날 등록되지 않은 휴머노이드로 지명되어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수용소에서 여럿 로봇과 뒤엉켜 지내면서 자신이 인간인지 로봇인지를 고민하고 의심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깊은 사색에까지 도달한다.

수용소에서 만난 '민이'와 '선이'는 철이에게 소중한 친구가 되어준다. 민이는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하는 로봇이고 선이는 진지한 복제인간이다. 두 친구의 도움으로 철이는 낯설고 위험한 수용소 생활을 적응하고 견디어간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는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동요가 생기고 그 틈을 타 셋은 수용소를 탈출한다. 자신을 인간으로 굳게 믿고 있는 철이는 아빠를 찾아 그걸 증명(확인)하기를 원한다. 아빠와 만나 집에 돌아온 철이는 자신이 몰랐던 거대한 진실과 마주한다. 독자는 철이의 여정을 통해 '인간'과 '인간답다'는 것 사이의 웅숭깊은 여백의 의미를 탐구하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 철이의 시선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쉽고 흥미로운 SF 동화와 같은 느낌으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의 질문은 묵직하다. 로봇공학, 종교, 의식, 감정, 죽음 등과 같은 여러 철학적 주제를 조명하고 부각시킨다. 결국 소설은 거대한 하나의 명제로 나아간다.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진짜 인간, 복제인간, 휴머노이드, AI 로봇 등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형태의 종족들(?)은 끊임없이 이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한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지구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인간이라는 통찰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 안에서 충돌하는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사유가 이 소설의 포인트다.

인간성의 탐구야말로 인류의 오랜 학문 대상이다. 문학의 목적도 인간에 대한 성찰이 아니던가.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인간성을 천착하고 탐구하는 데 있다. 이 대목에는 나만의 사색이 있다. 사십 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다양한 책을 읽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점점 더 명징하게 깨닫는 게 있다. 인간은 부족하고 미천하지만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종족이라는 것이다. 인간만큼 증오스럽되 사랑스러운 종족은 없다. 인간의 과학은 위대하되 절름발이이고 이성은 탁월하되 모순적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은 본인의 유한함과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오직 겸손함으로써 타자와 우주를 공부(관계)하는 데 있지 않을까.

소설은 끝내 '작별'로 종결된다. 이야기의 말미는 인류의 절멸이다. 종국 기계 의식 시스템의 생존만이 남는다. 이 지점에서 소설의 제목 '작별인사'는 탁월한 작명이다. 작가가 2년 전 초고를 쓸 때의 가제가 '기계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개작을 거치며 소설 제목이 바뀌었다. 어떻게 보면 무섭고 소름 돋는 작별이다. 하지만 나는 소설의 전개처럼 인류가 작별될 것으로 예상치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 유일한 '단 하나의 나'로서 과학과 철학으로 복제되지 않는 신성한 개별성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차피 아주 먼 과거와 먼 미래는 과학이 아닌 믿음의 영역이다. 어쩌면 소설과 영화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휴머노이드와 복제인간이란 소재는 현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식적이나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게 아닐까.

진부한 소재를 명료한 이야기 속에서 촉촉한 철학 담론으로 뽑아낸 역량은 순전히 작가 김영하의 내공이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문장은 활력을 띠고 빠른 호흡 가운데서도 소설은 서사적 흡입력을 잃지 않았다. 김영하라는 이야기꾼이기에 가능하다. 역시 김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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