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꿈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 딸을 키우고 있다. 큰 딸의 사춘기 진입이 예사롭지 않다. 과거에 비해 말수가 줄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짜증을 많이 낸다는 걸 느낀다. 예전 같았으면 꿀밤을 한대 갈겨주었을 텐데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흔히 여자아이의 사춘기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라고 한다. 어떤 의미인지 알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고민과 공부 없이 지나치기에는 아빠로서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책 몇 권을 골랐다. 우리 시대 가장 잘나가는 젊은 작가 손보미의 신작 『사랑의 꿈』은 그렇게 해서 내 손에 들어왔다.

『사랑의 꿈』은 단편 「불장난」으로 작년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손보미 작가의 연작소설이다. 6개의 단편이 미세한 연결로 이어져 있고 동시에 완전히 독립된 이야기로 배치되었다. 표제작 「사랑의 꿈」을 제외하고는 전부 10대 초중반 여자아이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 그래서인지 각각의 화자들은 십 대 소녀의 기분과 감정을 잘 대변한다. 그 나이대의 관찰과 생각으로 타자와 세계를 파악하는 모습이 흥미롭게 읽힌다.

여섯 편의 단편이 공유하는 미세한 연결고리는 '정우맨션'이라는 아파트다. 사실 이 소설이 왜 '연작소설'로 분류될까 의문했다. 사건 연관성이 있는 단편을 모아 하나의 총체적인 이야기를 완성하면서 장편의 분량을 구축한 소설을 통상 연작소설로 부르는데 이 소설은 각 단편마다의 연결고리가 극히 희박하다. 그나마 연결고리가 있다면 정우맨션이다. 어렸을 때 각인된 특정 장소에 대한 기억은 유달리 오래간다. 나도 35년 전 초등학교 친구들과 토요일마다 가재를 잡았던 안양유원지를 생생히 기억한다. 또 평일 방과 후 '더블 드래곤'이라는 게임을 했던 관악역 앞 오락실을 결코 잊지 못한다. 유년 시절의 장소는 당시의 추억을 고스란히 정지 화면으로 이미지화하여 뇌에 아로새긴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소설에서 정우맨션이 갖는 독특한 위치다.

『사랑의 꿈』에 등장하는 10대 소녀 중 일부는 가정의 파괴를 겪는다. 부모가 이혼(「불장난」)했거나 삼촌 집에서 길러지거나(「밤이 지나면」)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으려 하거나(「사랑의 꿈」) 등 상처가 있는 가정들이 배치된다. 가족의 분열이야말로 어린 시절에 겪을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존재론적 균열이다. 아이는 그 균열을 통해 망가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의 극복을 통해 슈퍼맨이 되기도 한다. 친구를 향한 동경과 첫사랑의 발견 등 그 시절 여성으로서 외부 세계를 날 선 시선으로 바라보고 경험하게 하는 동인도 소설은 다룬다다. 아프기도 하고 눈부시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한 유년 시절의 불가해함을 작가는 노련한 필치로 그려냈다.

개인적으로 수록작 중 「불장난」에 유독 많은 감정이 이입되었다. 이상문학상 수상이라는 외연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니다. 나도 어렸을 때 아파트 옥상에서 불장난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기억을 절대 잊지 못한다. 다만 소설과 다른 점은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의 차이다. 소설에서 아이는 아버지의 라이터로 옥상에 올라가 종이를 태운다. 훗날 중학생이 되어 과거의 그 경험을 바탕으로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는다. 작가의 경험이 투영된 장면이라 한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하지도 않은 남의 이불을 태웠다는 오해와 모략을 받아 소위 개 패듯이 맞았던 기억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상처로 남아 있다. 소설 속 아이는 불장난을 통해 자신을 괴롭힌 수치심과 굴욕감, 외로움을 연소시켰을지 몰라도 과거의 나는 단순한 불장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른들로부터 확증편향을 당해 이웃의 이불을 태워버린 방화범이 되었다. 「불장난」을 읽는 내내 그때의 억울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첫사랑」과 「이사」는 과외 선생과의 관계를 통해 겪게 되는 주인공의 성장통을 담았다. 「첫사랑」은 군 입대를 앞둔 대학생 오빠가, 「이사」는 주인공과 한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중학생 언니가 과외 선생으로 등장한다. 부모 외에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처음 겪은 타인을 향한 신비로운 감정은 결국 비루한 진실 앞에서 폭파되고 해체되어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양태된다. 세상 모든 아이가 겪는 고통,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것을 극복해 내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참 나'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다양한 성장통의 모습이 1인칭 시점의 발군의 묘사로 그려졌다.

소설의 막장을 덮고 많은 생각을 했다. "연약하지만 다채롭고 위태롭지만 맹렬한 세계 속에 포함되어"(192쪽)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작가의 표현대로 사춘기는 위태롭지만 맹렬한 세계다. 기성세대로서 십 대 시기의 특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오직 위태로움에 대한 방어기제로 그 시절을 재단하려 하지 않았는지 자문했다. 서두에 언급한 대로 이 소설은 딸아이의 사춘기 입성에 맞춰 아빠로서 그 시절 여자아이들의 심리와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집어 든 책이다. 최근 부쩍 말수가 줄고 가끔 내뱉는 말조차도 엄마와의 신경전에 대부분 소비하는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연약하면서도 다채롭고 위태로우면서도 맹렬한 세계에 진입되고 있는 내 딸의 여정이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기를 기대한다. 엄청난 성장과 함께.

서평을 정리하자. 반추해 보니 너무 감상적인 서평이 되었다. 앞서 고백한 내 진지한 현실이 반영된 탓일 게다. 픽션이 논픽션보다 진실되다는 평소의 내 독서 철학을 거뜬히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손보미의 소설 『사랑의 꿈』은 압도적이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퇴근 후 오랜만에 아이들과 책장 정리를 했습니다. 추가되는 책은 많아지는데 순서에 맞게 꼽아놓지 않아 체계 없는 중구난방의 책장이었지요. 차일피일하다가 아이들이 도와준다고 하여 잽싸게 작업했습니다. 제 책장은 양면으로 되어 있는데 침대가 있는 전면은 문학으로 채웠고 장롱이 있는 후면은 비문학으로 채웠습니다. 이마저도 공간이 부족하여 첫째 딸 방에 별도 책장을 설치해 제가 가장 아끼고 영향을 준 명저들, 즉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카뮈, 위고, 폴 존슨의 저작들을 따로 구분해두었지요.

문제가 되는 건 안방 책장의 한국문학이었습니다. 가나다순의 작가명 배열이 완전히 파손되어 공선옥부터 현기영까지 순서대로 맞췄고 제가 좋아하는 공지영, 신경숙, 오소희, 김훈 작가는 별도 구획으로 모아놨습니다. 그리고 문학 내에서도 소설과 비소설을 나누어 일반적인 에세이, 즉 여행후기와 산문집 같은 책은 작가명과 무관하게 별도로 묶었습니다. 아이들이 도와주어 금방 끝날 수 있었지요. 이제 남은 건 후면의 비문학 도서―주로 인문학 서적―를 손보는 일입니다. 워낙 책이 많고 먼지도 많아 하루 반나절을 소요해야 할 듯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즐겁게 도와주겠지요.

한국문학을 정리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내가 참 많은 한국 작가들을 만났구나. 결혼 전 가장 많이 읽은 게 한국소설이었습니다. 비 오는 금요일 밤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누워 김훈의 『남한산성』을 벌벌 떨며 한달음에 읽은 기억은 아직도 선연합니다. 박민규는 한국소설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려준 작가이고, 공지영은 내가 관심 갖지 않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민낯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김별아의 에세이는 내가 가장 아끼는 '힐링'이었고 『달의 제단』을 위시한 몇 권 안 되는 심윤경의 소설은 나에게 하나의 독특한 '브랜드'로 심어졌지요. 신경숙의 문체와 이문열의 무게는 여전히 저를 압도하지요. 한국소설은 여전히 찬란합니다.

고전과 인문학으로 이탈했던 제 독서를 응시하면서 이제 한 달에 한두 권씩은 꼭 한국문학을 만나보렵니다.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 - 흔들리고 지친 이들에게 산티아고가 보내는 응원
손미나 지음 / 코알라컴퍼니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 파울류 코엘류를 참 많이 좋아했다. 오래전 정치와 인문도서를 즐겨 읽다가 문학으로 기호를 옮길 시점이 있었다. 그때 나를 강렬히 끌어들인 게 바로 코엘류의 연금술적 문장이었다. 당시 몇 달 만에 코엘류의 모든 소설을 읽었을 정도로 그의 글과 이야기를 좋아했다. 15년 전 신(神)의 여성성을 탐구한 『포르토벨로의 마녀』에 처음 매료된 후 코엘류의 소설들을 거꾸로ㅡ현재에서 과거 순으로ㅡ읽기 시작했다. 『연금술사』 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등 그의 유명작들을 두루 훑었다. 그중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 내 마음속을 가장 강렬하게 붙들고 있는 작품은 그의 처녀작 『순례자』다. 이 소설을 읽은 후 스페인 산티아고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혼이 났던 기억이 선연하다.

소설 『순례자』 탓인지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에게 로망이 되었다. 이후 내 나이 서른이 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산티아고의 존재를 잊었다. 그러다 아이돌 그룹 GOD가 재결성되어 산티아고 길을 함께 걸은 TV 예능을 본 후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열망이 다시 샘솟았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고 산티아고는 완전히 잊힌 듯 보였다. 내면의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산티아고에 대한 내 무의식을 다시 일깨운 건 여행작가 손미나의 신간이다. 그녀의 신간 에세이는 오랜 시간 잠재적으로 봉인되어 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내 갈망의 불꽃을 다시 태우기 시작했다.

신간 『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는 작가 손미나가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후 약 40일 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완주한 여정을 담았다. 이 책은 기존 여행기와는 달리 오직 '산티아고'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의 스페인 사랑을 생각하면 더 먼저 떠났어야 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떠났어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산티아고 길을 언제 걸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고 때가 되면 그 길이 부른다"는 말처럼 지난해 봄, 작가는 가슴속에서 드디어 산티아고 길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지독한 전염병이 3년간 전 세계를 뒤집어 놓고 사라지려 시작하려던 시점이다. 작가는 산티아고 길로부터 '계시'를 받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스페인행 비행기 표를 끊는다.

책 속에는 인생 2막으로 넘어가는 한 중년 작가의 도전과 용기, 열정과 사랑, 위로와 사유가 포근하게 담겨 있다.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 피레네산맥 24.2km 구간을 거쳐 총 800km에 이르는 대장정 가운데 작가는 여러 유의미한 주제를 포착하고 가치 있는 사유를 추출한다. 아름다운 경치와 거쳐가는 마을마다의 고유성을 관찰하는 재미는 현상적인 것일 뿐 본질적이지는 않다. 긴 여로에서의 본질은 결국 '나 자신'이란 걸 깨닫는다. 죽도록 힘든 피레네산맥 코스가 끝나면 앞으로 쭈욱 펼쳐진, 마치 자기 인생길을 은유하는 듯한 길고 긴 도보길이 펼쳐진다. 걸으면 걸을수록 작가는 산티아고의 울림을 더 깊이 발견하고 음미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코스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한 작가는 종국적인 깨달음 앞에 고개를 숙인다. 결국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내면의 질문과 그것에 대한 해답, 그리고 자신이 받아야 할 위로와 사랑, 더 나아가 인생 2막에도 더 무겁게 짊어져야 할 타자와 세계의 무게 등. 작가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여러 의미는 결국 자기 마음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걸 알기 위해 걸어야 했고, 그 길을 걸었기에 그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고백은 깊은 울림을 준다.

여행 에세이로서 이 책의 강점은 적확한 사진의 배치에 있다. 글과 사진의 불일치성과 외연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잃게 된 글의 무게는 조악한 여행수기가 갖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불편함이 없다. 책 속 빼곡히 들어선 다양한 산티아고 사진들은 나란히 기술된 작가의 글을 잘 수식하고 보완한다. 사진 한 장 한 장마다 책 속에서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이 소중하게 펼쳐져 있다. 특히 앞으로 길게 늘어선 산티아고 길을 향해 홀로 걷는 작가의 뒷모습을 풍경과 함께 찍은 책 표지 사진은 탁월하다. 표지만 보고도 책을 사고 싶게 만드는 기술이다.

책장을 덮은 후 생각했다. 서두에 언급한 대로 나는 왜 산티아고 길을 가고 싶어 했는지. 모호했다. 구체적 이유 없이 그저 일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애매한 일탈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결국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발견하기 위해 걷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는 내 현실의 비루함을 부인할 수 없겠다. 언젠가 꼭 떠날 것이다. 혼자도 좋고 아내와도 좋다. 때에 따라서는 큰 딸과 함께도 좋다. 산티아고 길의 로망을 다시 한번 내 가슴속에 밀어 넣으며 기분 좋은 감상을 갈무리한다. 손미나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일독할 만하다.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끝장이자 극한'으로 평가받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작년에 완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희영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10년간의 혼신의 번역이 출판사 민음사를 통해 결실을 맺었다는 뉴스를 통해서다. 프루스트 서거 100주년에 딱 맞춰 완간했으니 무덤에 있을 작가가 손뼉을 칠만한 절묘한 타이밍이다. 잘 알다시피 이 소설은 끊임없이 확장되는 긴 문장으로 유명하다. 한 문장이 페이지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흔하고, 한 페이지를 꽉 채우기도 한다. 가장 긴 문장은 931단어나 된다. 김 교수는 한글과 어순이 다른 프랑스어를 원문의 흐름 그대로 옮겼다고 한다. 10년 동안 매일 같이 6시간씩 번역 작업에 매진했다고 하니 과히 노학자(老學者)의 열정에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일반 독자보다 작가와 평단에게 더 박수를 받는 작품이다. 모두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7편의 연작 소설로 이루어진 이 긴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서 한 소년이 사랑을 알게 되고 예술을 향유하면서 한 시대를 살아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T.S. 엘리엇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20세기 2대 걸작으로 꼽으며 "이들을 잃지 않고 문학을 논할 수 없다"라고 했다. '타임스'와 '르몽드'는 이 소설을 20세기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다. 모루아, 발레리, 베케트, 보부아르 같은 거장들뿐만 아니라 들뢰즈, 리비에르, 베냐민 등의 비평가, 철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 이 소설은 읽기가 정말 쉽지 않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이 소설을 완독한 자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나는 완독주의자(完讀主義者)다. 웬만해선 완독하는 편이다. 도중에 그만둔 책은 많지 않다. 지루하고 난잡하기 그지없는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도 완독한 나였다. 읽었던 소설 중 가장 긴 분량이었던 32권의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짧은 시간에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껌이었다. 그러나 정말 끝까지 읽기 힘든 책이 있다. 읽다가 중도 포기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루함'이고 다른 하나는 '난해함'이다. 물론 둘을 동시에 갖춘 텍스트는 정말이지 한 장조차 넘기기 힘들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기 위해 수차례 도전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긴 호흡을 좋아하는 장편소설 마니아인 나에게 프루스트의 대작은 과히 넘사벽이었다. 나와 잘 맞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 소설을 스킵 없이 완독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물음은 매번 실패할 때마다 드는 나만의 정신승리였다. 앙드레 모르아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라고 말했다. 모르아의 말대로라면 나는 프루스트를 읽지 않은, 아니 못한 사람이다. 

이 소설에 대해 할 얘기는 많지만 지금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이걸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왜냐면 매번 실패하면서도 재차 도전하고 싶은 욕망이 들 정도로 이 기묘하고 거대한 텍스트는 매력적인 완역본으로 내 앞에 우뚝 서 있다. 최근 내 독서는 방향을 잃었다. 기준과 박력, 도전과 일관이 필요하다. 23년에 반드시 읽어내고야 말 것이다. 이 다부진 도전의 가슴 뛰는 부담감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 푸슈킨에서 체호프까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이현우 지음, 조성민 그림 / 현암사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1년째를 맞고 있다. 당초 예상을 깨고 장기전에 들어간지 오래다. 출구도, 끝도 보이지 않는다. 애꿎은 젊은이와 민간인만 희생되고 있다. 인명피해는 물론 곡류와 가스 값이 폭등하여 세계 경제 침체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반도체 공급망 대란과 함께 작년 한 해 가장 큰 국제 뉴스가 됐다. 그래서인지 러시아에 대한 세계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 같다. 국내에서도 북한, 중국,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비호감 국가가 됐다. 러시아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러시아에 대한 내 인상은 복잡하고 입체적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푸틴이 지도하는 러시아'에 대한 호감은 매우 부정적이다. 개인적으로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全體主義, totalitarianism)를 혐오한다. 현재 지구상에서 북한, 중국과 함께 가장 전체주의적인 나라가 러시아다. 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러시아 문학만큼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푸시킨(푸슈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19세기 러시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인(文人)을 여럿 배출한 곳이다. 환언하자면 나에게 러시아는 스탈린과 푸틴에 의해 혐오스러운 나라이면서 동시에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로 인해 사랑스러운 나라이다. 이 아이로니컬한 이질감이 최근 나를 더 러시아 문학에 빠져들게 했다.

저자 이현우의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는 제목 그대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강의한 책이다. 저자가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한 것인데 러시아문학 전공자답게 깊이 있는 분석이 백미다. 19세기 초 푸시킨부터 19세기 말 체호프까지 총 7명의 작가를 훑는다. 저자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푸시킨으로 시작해 체호프로 끝맺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체호프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20세기를 여는 작가가 고리키라고 안내한다. 7명의 작가를 소개한 뒤 작가의 대표 작품을 한 개씩 리뷰한다. 도스토옙스키만 특별히 두 작품을 실었다. 작가의 필명 '로쟈'에서 알 수 있듯이 도스토옙스키를 친애하는 작가의 사심이 담긴 듯 보인다.

저자에게 러시아는 매력의 아이콘이다. 동시대에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를 한꺼번에 배출한 나라가 어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으랴. 러시아가 태동적·역사적으로 왜 서구식 개인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설명한다. 19세기 모든 작가가 관통하는 서구 유럽주의와 러시아주의 사이의 긴장과 간극을 알기 쉽게 풀이한다. 톨스토이가 러시아적이며 전 세계적인 가치를 대변한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오직 러시아적인 작가로 남았다고 분석한 대목은 흥미롭다. 거대한 러시아 문학에 진입하려는 독자에게 입문서 역할을 하는데 적확한 책이다.

내가 오래전 출간된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앞서 언급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준 당혹감 위에서 다시 한번 제대로 러시아 문학을 톺아보기 위함이다. 러시아 문학은 나라의 땅덩어리 못지않게 방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작품은 세르반테스 이후 올곧게 이어져온 소설이란 장르의 규격을 초과하는 거대함으로 세계 문학사에 웅장함을 선물했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분량이지만 막상 읽고 난 후에는 깊은 감동에 빠져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기념비적인 소설인 것이다. 

최근 나는 '거대함'이란 주제에 깊이 천착해 있다. 일터에서 사람과 부딪히면서, 가정에서 머리가 커지는 아이들을 대하면서, 교회에서 신앙의 일에 헌신하면서 '인간의 크기'에 대해 숙고하는 중이다. 생뚱맞겠지만 나이가 드니 이 숙고가 더욱 간절해짐을 느낀다. 마음의 크기가 넓다는 건 무엇일까. 한 인간의 내적 스케일과 그 사람의 언어는 존재론적으로 어떤 함수관계에 놓인 걸까. 나이가 든다는 것과 내면의 그릇이 커진다는 건 항상 비례하는 걸까. 하루하루 고단하고 남루한 일상을 버티어가면서 나 자신의 '존재의 크기'에 대해 사유하는 건 고통스럽지만 절실하다. 그리고 흥미롭다.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는 나에게 청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가장 큰 지적·정서적 영감이었다. 최근 머리가 나빠진 탓인지 스토리 라인도 헷갈리고 있지만 말이다. 두 작품 외에도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의 대작을 얹어볼 생각이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로 시작해 볼 요량이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OTT 영상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목도한다. 이 직시(直視)를 한탄하며 다시 책으로, 고전 속으로, 러시아 문학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항시 그랬듯이 고전은 성경과 함께 내 지성과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 절대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그 심연으로 여행하려 한다. 러시아 문학의 다부진 찬란함 속으로.

로쟈 이현우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는 이런 나에게 좋은 애피타이저다. 러시아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