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으로서의 ‘포퓰리즘’

나는 영어의 포퓰리즘(populism)을 ‘인민주의’로 번역한다. 인민주의는 반엘리트적 의미로서 민중주의, 그리고 정치적 방식으로서 대중영합주의 또는 포퓰리즘으로 사용한다. 인민주의는 북한의 용어와 유사하기 때문에 기피되었지만 나는 ‘인민주의’가 ‘포퓰리즘’의 본질을 가장 잘 상징하는 용어라고 생각한다. 결국 민중주의나 인민주의는 포퓰리즘을 ‘이념’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대중영합주의나 포퓰리즘은 정치의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인민주의는 이데올로기인가? 민주주의의 하위범주인가? 일단의 책략인가? 하나의 담론인가? 한 수사의 유형인가? 정치의 한 방식인가? 초기의 분석은 사회경제적 바탕에서 인민주의의 본질을 추구했으나, 최근의 연구는 인민주의자들의 담론, ‘인민’에 대한 호소의 수사(修辭)에 집중되는 경향이다. 인민주의는 정치 혹은 경제적 철학, 수사적 형식, 원리, 정신성, 심지어는 병리현상 등 여러 가지로 언급된다. 환경에 따라 색깔을 채택하는 카멜레온, 심지어는 허풍의 정치로 불린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정당에 의한 대의정치의 사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인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인민주의가 대중의 감정에 영합하며, 대중에게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약속을 하고, 정치 엘리트에 대해 적대감정과 불신의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선동적 관행에 모아진다. 이 비판의 본질은 인민주의를 선동(demagogy)으로 보는 관점이다.

인민주의는 현대의 입헌적 대의정치에서 환영받지 못하면서, 단순히 인기에 영합하려는 전략이나 수사로까지 천대받지만, 전통적으로 선한 인간에 의한 직접적인 자기결정을 이상으로 하는 숭고한 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인민주의 사상은 이미 입헌주의와 경쟁관계를 지속해 왔다. 인민주의와 민주주의는 모두 인민의 최고 주권적 지배와 관계가 있지만 둘 사이에는 상반된 견해가 있다. 이런 상반된 견해는 바로 민주주의 개념의 모호성에서 비롯된다. 인민주의의 주창자들은 민주주의를 인민의 직접지배로 개념화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인민주의를 동일화하는 경향이다. 인민주의의 반대자들은 대표, 개인적 권리 권력과 이익의 균형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의 입헌적 개념을 강조한다.

인민주의는 정치가 인민의 일반의사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념이다. 즉 정치는 인민의 일반의사의 직접적인 표현을 기초로 해야 하며, 정부나 정당 그리고 미디어로부터 체계적으로 무시되는 인민의 불만과 여론을 제기하여 권력을 인민에게 되돌려주고 인민의 지배를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처럼, 동일한 수준의 지적인 정교함과 일관성을 갖지 못한 ‘빈약한 이념’으로 평가된다. 인민이 일관성이 부족하고 조직화하거나 통제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인민주의도 정교한 이념이나 실천계획을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민주의가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다른 형태로 표출되고 정의나 개념이 다양한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러나 일반의 여타 이념들이 자유, 평등, 정의 등을 핵심 가치로 하는 것처럼, 인민주의도 그런 핵심 가치를 표면화하지는 않지만 역시 인민의 자유와 평등, 정의를 담고 있다. 또한 인민주의가 다른 이념과 쉽게 결합한다는 것은 바로 인민주의가 모든 이념의 근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념의 핵심은 바로 ‘인민’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자유주의나 보수주의 등 모든 주요 이념이 표방하는 근본은 ‘인민’을 위한 것이다.

나는 인민주의는 루소가 우려하는 인민의 노예화를 막고 인민이 선거 후나 선거 전에 항상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체계라고 본다. 만약 선거 후의 노예상태를 막을 적절한 장치가 없다면 선거에 의한 지배를 최소화하고 인민의 직접참여를 확대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규범적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이념으로서 민주주의의 본질인 것이다.

(한겨레/ 최한수 건국대 교수·정치학)

‘진보는 대중민주주의’ ‘보수는 포퓰리즘’ 이분법적 구분 깨야

한국의 보수진영은 그동안 진보파에 대한 효과적 무기였던 포퓰리즘이란 낙인을 여전히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광우병이나 세종시 이슈 등에서 자주 ‘국민의 입장’을 거론해온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나 무상급식에 대한 여권 일각의 동조 움직임에 불편해한다. 이에 대해 <한겨레>의 3월18일자 기사가 포퓰리즘은 단순한 민주주의의 병리현상이 아니라 정치 현상 내부에 항존하는 구성요소라는 관점을 제기한 바 있다.

이번엔 이 기사가 포퓰리즘을 보수의 병리적 현상으로만 규정하고 자신을 민주주의자로 규정하는 진보진영 일각을 불편하게 한 것일까.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적’ ‘가짜 민주주의’로 규정하는 신진욱 교수의 글은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생산적 문제제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진보가 간직해온 포퓰리즘에 대한 과거의 감수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글로 보인다. 그의 논지대로라면 오바마나 노무현은 민주주의자이고, 매케인과 박근혜는 인민을 기만적으로 동원하는 민주주의의 적, 포퓰리스트이다.

신 교수는 ‘인민’(라틴어 populus)을 정치공동체의 주권자로 삼는 대중민주주의가 변질되면,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을 기만·동원하는 포퓰리즘이란 가짜 민주주의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예로 거론하는 것이 파시즘과 영국의 대처다. 하지만 대중민주주의 심성이 진보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변질되는 경우는 없을까? 현실에서 인민주권 사상은 다양한 정치 운동으로 나타난다.

과거 소비에트는 노동자계급 주도의 민주주의가 인민주권이라고 선언했다. 오늘날 자유주의 일각은 엘리트가 주도하는 엘리트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선언한다. 또 진보 정치의 많은 경우에도 자신들이 국민 일반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다양성의 원인은 ‘인민주권’의 의미는 그 자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구성되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세력이 특정 계급이 아니라 국민(인민)을 대표한다는 포퓰리스트 담론을 구사할 때도 보수적 포퓰리즘에서처럼 정치적 동원과 배제는 당연히 발생한다. 왜냐하면 시민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국민(인민)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이나 계급·계층들의 관계망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포퓰리즘이든지 인민 속의 다양함을 최대한 존중하고, 법치·견제·균형 같은 공화주의 논리와 잘 융합되도록 숙성시키는 것이다. 내가 미국 오바마의 진보적 포퓰리즘보다 공화당 매케인의 보수적 포퓰리즘을 더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도 매케인의 포퓰리즘이 다양성의 존중이나 공화주의적 원리와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오바마가 진짜 민주주의고 매케인은 ‘가짜=포퓰리즘’이라서가 아니다.

신 교수는 진보의 ‘참된 민주정치’와 보수의 ‘가짜 민주주의=포퓰리즘’이라는 절대적 이분법을 통해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적들과 너무 많은 것을 공유”하지 않도록 경계선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하지만 진보는 민주적이고 보수는 병리적이라는 테제는 그 의도와 달리 보수가 대중적 욕망과 결합하는 깊이와 정도를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아울러 이 이분법은 신 교수의 의도와 달리, 진보의 “자기성찰의 거울을 흐리게 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과 융합된 진보 정치 내부의 배제 메커니즘을 예리하게 인식하기보다 신비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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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계에서 ‘죽음의 상업화’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장례식을 거부한 법정 스님의 죽음이 장례의식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 데 이어 최근 가톨릭 평신도 신학연구단체인 우리신학연구소가 펴내는 연간지 <우리신학>이 ‘죽음, 그 영성과 상업화 문제’라는 특집을 통해 ‘죽음의 상업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법정 스님은 ‘장례’를 ‘검은 의식’이라고 지칭했다.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라’는 게 그의 유언이었다. 
 
법정 스님의 유언은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었다. 법정 스님은 자신의 저서와 법문을 통해 남악현태를 비롯한 선사들의 죽음을 소개하곤 했다.
그가 2003년 길상사 개원 6돌 법회 등에서 언급한 9세기 당나라 때의 남악현태 스님은 외떨어진 암자에서 홀로 맑게 살았다. 예순다섯 살 되던 어느날 그는 산 아래로 내려가서 길가던 한 스님을 청해 화장을 당부한다. 미리 나무를 암자 앞에 쌓아둔 그는 가사를 입고 장작 위에 앉은 채 ‘불을 당겨달라’고 청한다. 그가 이때 남긴 임종게(죽을 때 남긴 시)의 내용은 이렇다.

‘내 나이 올해 예순다섯, 사대(지·수·화·풍)가 주인을 떠나려 한다. 도는 스스로 아득해서 그곳에는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다. 머리 깎을 필요도 없고 목욕을 할 필요도 없다. 한 무더기 타오르는 불덩이로 천 가지만 가지가 넉넉하다.’

법정 스님은 또 ‘내 몸 본래 없었고 마음 또한 머문 곳 없으니 태워서 흩어버리고 시주의 땅을 차지하지 말라’던 고려말 백운 스님의 유언을 들며 국화 꽃송이를 5만개 이상이나 장식해 호화의 극치를 보이는 큰스님들의 장례 모습을 꼬집었다.

법정 스님은 “순간순간 한 생애를 어떻게 살아왔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 죽을 때 야단스러운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내 삶이 유언이다’라고 했던 간디의 말과도 같은 맥락이다. 화려한 장례의식이 그의 삶을 아름답게 꾸며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와의 이별의 시간을 갖기보다는 어떻게 많은 사람을 모아 돈을 걷고, 이후 사리를 수습해서 사리친견법회 등을 통해 계속 이벤트를 연출하는 행태를 수없이 보며 고개를 저었던 법정 스님은 자신의 죽음에 즈음에 장례식도, 상여도 없이 입은 옷 그대로 장작더미 위에서 태워짐으로써 ‘검은 의식의 윤회’를 끊고자 했다.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 박승옥 대표는 <우리신학>에 기고한 ‘죽음이 상품이 되고 폐품이 된 사막사회’란 글에서 “사람의 죽음은 이제 무엇보다 돈으로 계산되고 장례 비용과 묘지 비용 등 시체 처리 비용부터 걱정한다”며 “우리는 누가 죽었다고 하면 부주돈 액수부터 계산하고, 장례식장에 가면 부주돈을 내고 이름을 적고 일회용 음식을 먹고 끝”이라고 상업화한 장례의식을 꼬집었다. 그는 “망자에 대한 예란 그저 형식만 있을 뿐”이라며 “너무도 많은 죽음을 그저 일회용 컵 버리듯 쓰레기처럼 버리고 있는 중”이라고 개탄했다. 박 대표는 “농촌공동체가 살아 있을 때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어떤 이웃은 쌀을, 어떤 이는 호박을, 가난한 이웃은 그냥 맨몸으로 와서 일을 도우며 망자에게 최대한의 예를 다 갖추어 한 인간의 삶을 존엄하게 보내는 산 자들의 의식이었다”고 말했다.

죽음의 상업화에 대한 문제제기는 곧 죽음을 사랑과 자비를 펼치는 장으로 만들자는 제언으로 이어진다. 법정 스님의 5촌 조카인 현장 스님(보성 대원사 주지)에 따르면 법정 스님 자신도 부모님과 할머니 기일이 되면 남모르게 꼭 양로원을 찾아 어려운 노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정토회 법륜 스님도 부친의 장례식 대신 마을 경로잔치를 하고, 기일 때도 경로잔치를 이어왔다.

3년 전 사망한 부친의 장례비용 전액을 히말라야 오지에 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내놓고 매년 기일 때마다 캄보디아에 우물을 하나씩 파주고 있는 산악인 정명숙씨(50)는 “어떤 화려한 장례식이나 제사보다도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좋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출처: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4134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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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심장 지식인’들은 대부분 강한 이념적·당파적 색깔을 드러내기 때문에 각자 막강한 지지세력을 거느리고 있다.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면 우군의 지지가 더 뜨거워진다. 아무리 험한 꼴을 당하더라도 그런 ‘패거리 싸움’의 원리상 속된 말로 밑질 게 없는 것이다. ‘강심장’과 자기성찰은 원초적으로 궁합이 맞질 않는다. 적을 매섭게 공격할 때에 지지자들의 피가 끓는 것이지, 자기성찰은 오히려 지지자들을 내쫓는 결과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강한 당파성을 갖고 있을 때엔 ‘강심장’에 속했지만, 당파성의 한계와 추한 면을 본 뒤로 자기성찰을 부르짖으면서 ‘심약파’로 변했다. 중간적 입장을 뜨겁게 지지해줄 사람들도 없으니 욕먹어 가면서까지 소신을 피력할 동기부여도 안 된다. 그래서 가슴속 깊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는다. 어느덧 “38선 혼자 막느냐”는 우스갯소리가 내 좌우명이 되고 말았다. 모두 다 미쳐 돌아갈 때엔 침묵하는 게 최상이라고 믿게 되었다.

지금 한국의 공공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이 함정에 빠져 있다. 시장원리상 자기성찰이 가능하지 않게끔 돼 있는 것이다. 신문들도 마찬가지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모두 다 ‘강심장 신문’들이다. 상대편을 공격하는 데에만 모든 정열을 쏟고 있을 뿐이다. 아니 지금 이명박 정권과 그 패거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데, 그런 양비론을 펴는가? 분노할 독자들이 적지 않으리라.

그런데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길 해보면 영 딴판이다. 지금 이런 식으로 가선 답이 나오질 않는다는 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왜 개혁·진보세력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했는가? 그것도 이명박과 그 패거리들 때문인가? 이 물음은 아예 제기되지도 않는다.

자기성찰을 좀 하는가 싶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모든 게 뒤집어져 버렸다. 이명박과 그 패거리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만이 유일한 대안이자 비전이 되고 만 것 같은 느낌이다. 서거 직전까지 노 전 대통령과 친노세력이 져야 할 책임과 관련해 날카로운 비판을 퍼붓던 진보신문들마저 아무런 설명이나 해명도 없이 돌변해 노 전 대통령을 미화하면서 그의 정신을 계승하자고 외치는 전위대가 되고 말았다.

이명박 정권의 ‘표현의 자유’ 탄압만 무서운 게 아니다. 내가 보기에 지금 개혁·진보세력은 스스로 건 최면과 자기기만에 의해 더 큰 탄압을 받고 있다. 공기업들을 망친 게 이명박 정권인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인가? 언론·학계에 있다가 정·관계로 진출한 개혁·진보 인사 가운데 무엇이 문제였으며 자신의 과오는 무엇이라고 밝히는 사람은 왜 한 명도 없는가? 개혁·진보적인 시민운동이 탄압을 받는다고 외쳐대기 전에 그간 정부와 대기업의 도움으로 편하게 살아온 과거를 반성하면 안 되는가? 나는 <한겨레> 지면에서 이명박 비판과 더불어 이런 의제들을 많이 다루는 걸 보고 싶다.
 
(한겨레 10-01-19, 강준만 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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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가디언>은 2005년 베를리너판으로 전환하면서 사람 얘기와 인터뷰 기사 등을 크게 늘렸다. 심지어 죽은 사람의 인생을 정리해주는 부음기사를 매일 두 면에 걸쳐 싣는 모험을 했다. 얼마나 끌고 나갈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국내외 인물을 가리지 않고 <워낭소리>의 노부부처럼 평범한 사람의 인생도 의미를 부각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었던 이종욱씨를 비롯한 한국인도 여럿 부음기사로 다뤄졌다.

우리나라와 판이한 점은 죽은 사람의 공적은 물론이고 과오까지 가차없이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가디언> 부음기사의 객관성은 정평이 나 있어 ‘관 뚜껑을 <가디언>이 닫는다’는 얘기까지 있다. 누구나 죽음을 앞둔 처지이고 보면, <가디언>이 부음기사를 쓸 만한 공인이라면 살아생전에 언행을 경건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죽은 이에 대해 좋게만 보도하는 우리 언론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두 대통령 서거 당시 <한겨레> 보도 태도에도 ‘역사적 기록’이라는 차원에서 치우침은 없었는지 뒤돌아볼 일이다.

우리나라 신문에서 사람 소식을 전하는 면은 부음란을 빼고는 모두 경사스런 소식으로 채워진다. 연말에는 거의 미담기사와 희소식 일색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의 얘기나 출세를 해 ‘자랑스런 동문’으로 선정된 이를 비롯한 각종 수상자들이 ‘사람’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룹마다 대규모 임원 승진 인사가 발표되는 시기도 이때다.

합격자 뒤에는 사교육을 받지 못해 쓰라림을 맛본 불합격자가 더 많고, 승진 인사 뒤에는 평생을 바친 직장을 떠나야 하는 해고의 비애가 서려 있지만, 거기에 주목하는 언론은 거의 없다. 대기업은 사기업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자산이 된 지 오래건만 재벌 총수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능력 불문하고 초고속 승진을 해도 그저 ‘추인’하는 게 오늘의 한국 언론이다. 젊은 2, 3세 승계로 이어지면서 선대의 공신들은 한창 경륜을 펼칠 나이에 밀려나는 이들도 많다. 나이를 잣대로 능력과 의욕을 폄하하는 풍토는 나이든 사람들을 더 무능하고 의존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이른바 ‘사회쇠약증후군’을 만연하게 한다.

(한겨레, 이봉수 「‘잘나가는’ 신문에는 ‘사람 이야기’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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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10-01-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개를 물어야' 보도해주는 것이 언론의 생리라고, 너무 체념했었나.
 

- 한국은 근대화의 후발주자로서 ‘일극 집중도’와 ‘해외의존도’가 매우 높은 조건에서 치열한 내부경쟁으로 경제적 성공을 이룬 나라다. 살인적인 ‘입시전쟁’과 ‘영어전쟁’이 그 어떤 처방을 해도 약화되지 않는 건 그것들이 한국 사회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극렬한 경쟁에 치를 떨면서도 경쟁만이 한국의 살 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정치적으로 정당한 몫을 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경쟁에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이기 때문이다. 경쟁을 넘어서려는 진보 이념은 아름답긴 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나아갈 길은 아니라고 보는 게 다수 민심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고 번영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더라도 안에선 다른 행동양식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부분은 전체와 비슷한 구조로 되풀이되는 구조를 갖는다”는 ‘프랙털 법칙’ 때문이다. 지방이 서울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도 각 지역에선 가장 큰 도시가 서울과 똑같은 패권주의를 행사하는 것도 바로 그런 법칙 때문이 아니겠는가.

- 경쟁과 통합은 양립하기 어렵다. 경쟁이 연고주의나 패거리주의 같은 전근대적 관행을 근거로 삼을 때 통합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패거리를 중심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투쟁을 곧잘 이념투쟁이나 지역투쟁으로 착각하지만, 그 실체는 이익투쟁이다.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선 안 된다. 원인은 ‘이익’이고 ‘이념·지역’은 결과일 뿐이다.

정권이 바뀌면 기존 이익·이권 구도가 뒤집어진다. 모든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각종 공적기관에서도 우두머리의 교체에 따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한국인들이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도 늘 정치에 목숨을 거는 삶을 사는 이유다. 그 누구도 자신이 이익투쟁을 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이익은 늘 이념과 명분으로 포장된다. 그 포장을 중심으로 해법을 찾아봐야 답이 나올 리 없다.

- 결국 이익 배분의 공정화·투명화가 해법인 셈인데, 이걸 가로막는 게 껍데기일 뿐인 이념과 명분이다.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일을 해야 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같은 패거리의 ‘승자독식주의’가 당당하게 저질러진다. 권력을 가진 자와 같은 학교를 나왔거나 같은 교회에 다니거나 같은 모임에서 몇번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이들이 탐을 내는 공직을 하나씩 꿰차는 일이 벌어진다. 그래 놓고선 ‘통합’을 하자고 외침으로써 그런 ‘뜯어먹기 잔치판’에서 소외된 이들의 분노에 불을 지른다.

(한겨레, 강준만 「사회통합이 불가능한 이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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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10-01-0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리와 이념을 내세울 때, 성찰해보자. 나 자신의 이익은 무엇인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