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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나는 서울의 버스운전사"

어제 배달된 북매거진 <텍스트>(8월호)에서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보리, 2006)의 저자 안건모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제목이 노골적으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패러디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곧바로 홍세화의 책을 떠올리게 한다. 홍세화 한겨레 시민편집위원의 추천사도 달고 있긴 하지만).

 

 

 

 

월간 <작은책>을 본 적이 없어서 현재 <작은책> 편집장을 맡고 이는 저자의 이름을 기사에서 처음 보았다. 현직은 편집장이지만 본래 '서울의 버스기사'이며 책은 그가 1996년부터 써왔던 것들을 묶어냈다고 한다. 초판 3000부를 찍었는데, 조금 있으면 2쇄를 찍을 거 같다고 하니까 '기본' 이상은 하는 듯하다(알라딘의 세일즈 포인트도 어지간한 책들보다는 높다). 인터뷰 중 몇 대목을 옮겨본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글을 쓴다고 하는 게 매우 좋게 들리긴 하지만, 사실 대부분 노동자들의 생ㄱ가이나 의식은 크게 진보적이지 않다. 노동자의 글쓰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는 학교 다닐 때, 글이란 짓는 것이라고 배웠다.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짓는 것. 지금은 다들 '글쓰기 학원'이라고 하지만, 이오덕 선생님이 생활글의 중요성을 주장하기 전에는 다 '글짓기 학원'이었다. 어릴 때부터 제도교육 속에서 '글은 짓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작은책>을 보면서 '아, 나도 내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 든 거다. 그래서 내가 일하고 있는 것을 생생하게 그대로 글로 나타낸다. 예를 들면 지하철 노동자들의 지하철 이야기, 자신의 일터 이야기를 쓰는 거다.(...)

-제도교육에서 배운 게, 글이라는 것이 고상하다 아름답게 써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갖게 한다. 나도 그렇게 배워왔고. 그런데 지식인들이 쓰는 수필 같은 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같다. 어려운 말로 관념적이라고 하는데... '청춘예찬' 같은 것만 봐도 그건 우리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게 고상하게 쓰지 않으면 글을 못 쓰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다. 텔레비전 연속을 보면 다 2층집이고 다 잘사는 집이다. 그게 우리들 사는 모습의 전형처럼 나온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글에서도 그런 생각이 커졌던 것 같다.

-우리가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이야기를 남한테 알려서 퍼뜨리는 것이다(*이 '글치기'의 목적도 그렇다). 이해하고 공감하고 끌어낼 수 있게. 시내버스 이야기를 <작은책>에 연재할 때 만큼은 독자들이 시내버스 기사한테 화를 못냈다고 한다. 기사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유를 아니까. 그렇게 난폭하게 운전하고 불친절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아니까. 그러니가 글쓰기에서는 내 생각에 끌어들이고,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그게 전부 다 필요한 거 같다.

=진보적인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나 교수들, 정당에서도 글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서는 법에 서투르다.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너무 못쓴다는 평가들이 많다. 어려운 말보다 글 자체가 어렵다. 그 중에는 단락 나누기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단락이 중요한데... 주어와 서술어가 안 맞는 것도 많다. <작은책> 작업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뭔지 아나? 철학사상연구회에서 항상 글을 연재하는데, 원고를 받아서 쉽게 고치는 게 제일 어렵다. 엄청 어렵게 쓰니까, 무식한 노동자들도 그냥 술술 읽을 수 있게 애를 쓰는데 힘들다(*그 어려운 '진보철학'들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지식인들의 분석적인 글들이 필요하다. 홍세화 같은 분들, 그리고 FTA 같은 정세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하고 쓸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서도 내가 봤던 사람들 중에서는 강준만 교수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는 글을 엄청 쉽게 쓴다. 예전에 손호철 교수와 강준만 교수가 논쟁하는데 서로 반박하고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손호철 교수 생각이 아무리 옳더라도 따라갈 수가 없다. 이해가 안되니까. 그런데 강준만 교수책은 아주 쉽게 되어 있다. 덧붙여서 실명 비판이 필요하다고 본다. 교수들 보면 다 실명 비판 안한다(*이게 우리 교수사회의 미덕이다). 그런데 그걸 안 하면 자기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명 비판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

=<작은책> 편집장이 된 게 정확히 언제였나?

-8월이다. 작년에 1월에 와서 일하다가 정식으로 편집장이 된 건 8월이다. 굉장히 고민 많이 했다. 두세 달 고민했다. 책 마지막에 보면 다 나온다(웃음). <작은책> 대표가 경영문제로 고민하면서 제안을 한 거였다. 그리고 독자들이 거의 다 나를 알고 있고 관계가 깊었다. 처음에 일을 할 때는 100만원 받고 일했다. 버스운전하면 한 달에 250만원은 받는데(*강사-노동자의 수입보다 훨 낫군), 그때 많이 힘들었다. 어쨌든 <작은책>이 없어지면 일하는 사람들이 글 쓰는 매체가 별로 없다. 한군데도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삶이 보이는 창>이 비슷하긴 한데, 나는 문학을 별로 안 좋아한다. 한가롭다는 생각이 들고, 고상하다는 느낌이 들고(*물론 모든 문학 한가롭거나 고상한 건 아닐 테다. 우리 주변의 문학이 혹 그렇다는 혐의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좋은 생각> 같은 잡지도 있는데, 그건 전혀 아니다. 그 잡지는, 내가 '조선일보하고 비슷하다'고 욕을 할 정도다. 그 책에 따뜻한 글들이 많지만, 거기에는 현실이 없다. 내가 양보하면 세상이 다 따뜻해진다는 게 결론이다. 그렇게 사람 생각을 마비시키는 글이다. 그런 잡지는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많이 나오고 잘 팔린다(*실제로 잘 팔린다!). 그런데 그 책들은 결론이 없고 현실이 없다. 아빠가 택시기사인데, 아빠가 어렵고 힘들고 고생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왜 힘들고 고생하는지는 안 나온다. 비정규직 엄마가 일하는데, 비정규직이 만들어지는 그 구조가 있지 않나. 그런 건 안 나온다. 열심히 일하고 그리고 행복했다, 그런 내용이다. 저런 책이 널리 퍼지면 안된다고 본다. <좋은 생각>의 아류잡지도 굉장히 많다. 계속 나오는데 금방 망하는 거 같다. 나왔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 같더라.

=책의 제목이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다. 버스운전기사들의 상황이 거꾸로 간다는 말인가? 아니면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가 거꾸로 간다는 말인가?

-<거꾸로 보는 세계사>니 <거꾸로 보는 현대사>니 하는 책들이 있지 않나(*<뒤로 가는 남과 여>란 영화도 있었다). 제목은 '백미러로 보는 세상', '나는 서울의 버스운전사' 등 몇 개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서울의 버스운전사'는 너무 패러디같다고 하더라. 책을 본 사람들은 딱 맞다고 하는데 워낙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서 안됐다. 제목을 그렇게 붙인 건 '뒤집어보자'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버스를, 버스의 내막을 뒤집어보자, 그리고 서울시의 버스 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 그런 생각에서 썼다...

06. 08. 11.

P.S. '안건모가 살아온 이야기'란 글을 옮겨놓는다('안건모'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것인데, '하종강의 노동과 꿈' 게시판에 올려져 있다). '시내버스를 정년까지'란 제목으로 아마도 책에 포함돼 있을 듯하다. 분량이 다소 길지만 내가 부리는 건 알라딘의 공간이지 나의 공간이 아니다. 해서 인심 아닌 인심을 쓰도록 한다. 한 가족사이지만 실상 우리 현대사이기도 하다(더불어, 지적하자면 자전적인 1인칭 (실화)소설이기도 하다).  

시내버스를 정년까지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나.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 번 써 보자고 마음을 먹은건 월간 <작은책>을 보고나서부터였다. 언젠가 오전반 일을 끝내고 집에서 한겨레 신문을 훑어보다가 작지만 눈에 띄는 조그만 광고를 보았다. 작은책이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똑 중학생들 버스표 한장을 잘라 위 아래로 붙여 놓은 크기 만한 광고였다. '일하는 사람들의 글모음'이라고 써 있었고 '1년 구독료 만 원'이라고 되어 있었다. 솔직히 '일하는 사람들의 글모음'이라는 말보다 '1년 구독료 만 원'이라는 말에 '햐, 이렇게 싼 책이 있어?' 하고 몇 달 지나간 창간호 부터 신청을 했다.

-정말 노동하는 사람들이 쓴 책인가 긴가민가했던 그 책은 진짜로 우리들 노동자가 쓴 글이 실려 있었고 우리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있었다. 특히 박영숙씨가 '살아온 이야기'는 너무 힘들게 살아온 것 같아 안타까웠고,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이재관씨가 연재한 '노동자 글쓰기 어떻게 할까'는 뭔가 할 말은 많은데 쓰는 것이 엄두가 않나 그냥 읽기만 하던 나에게 '쓰고 싶다'는 용기를 갖게 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만 가지고도 글쓰기는 시작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것보다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못하게 만드는 건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아닐까. 거기다 그놈의 '원고지' 소리만 나오면 주눅이 든다..

-원고지는 왜 만들었을까. 띄어쓰기를 확실히 하고 글자가 몇 개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게 만든 건 아닌가. 띄어쓰기가 조금 틀리면 어떻나. 우리가 무슨 논문 쓰는 것도 아니고 일기나 편지, 생활글쓰기 정도인데 띄어쓰기 조금 틀리다고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글자 수 같은 거야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편집하기 쉽게 하거나 만들 책 쪽수를 재기 위한 것은 아닌가. 단순히 그런 까닭 밖에 없다면 앞으로는 노동자들 글을 모은다고 할 때 200자 원고지 몇 장이니 하는 소리는 없었으면 좋겠다. '200자 원고지' 소리만 나오면 아, 기 죽어.

-얘기가 옆길로 샜지만 어쨌든 나도 '살아온 이야기'를 원고지는 아니고 아무 데나 한번 써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며칠간 옛날을 돌이켜 보았지만 뚜렷하게 내세울 게 없었고 자랑할 만한 것도 없었다. 조금 생활이 어려웠지만 지금 내 나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그만큼 어렵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이 글을 쓰면서도 혹시 신세 타령이나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된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말이 없었고 웃지도 않았고 굉장히 무서웠다. 성격이 불 같아 한 번 말해서 안되면 두번째는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매를 잘 들지는 않았지만 한 번 들기만 하면 발가벗기고 혁대로 때렸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은 무척 궁금했지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커서 몇 번 물어 봤지만 전혀 말을 안 했다. 특히 6.25때는 어디서 보냈는지 제일 궁금했다.  

-아버지는 황해도 연백이라는 곳에서 나셨다 한다. 키가 무척 작았지만 젊었을 적엔 단단한 몸매를 가졌다. 처음 결혼한 부인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고 부인은 죽고 어떻게 하다 충남으로 내려와서 지금 살아계신 우리 어머니를 만났다 한다. 어머니 말씀은 그때 아버지는 염전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하고 중매를 선 사촌언니가 총각이라고 속여서 그런 줄만 알고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뒤 고모부가 교감으로 있는 마포에 있는 동도고등학교 수위로 왔고 집도 학교 안에 있어서 거기서 살았다. 고모부는 학교 안에 대원군 별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아버지는 그때가 가장 편하게 지내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 뒤로는 내 기억으로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으니까. 고모부는 교감으로 있으면서 그 때 서울에서 몇 안되는 부자 축에 끼어 있었나 보다. 학교 안에 큰 양계장이 있었고 만리동에도 굉장히 큰 인쇄소를 가지고 작은 아버지에게 경영을 맡기고 있었다. 또한 그때만 해도 흔치 않았던 짚차를 가지고 다니셨다고 하니 괜찮게 살긴 살았나 보다.  

-그런 고모부가 5. 16쿠테타를 일으킨 박정희에게 학교를 뺏겼다고 지금도 말씀하시는데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른다. 5. 16쿠테타가 1961년에 일어났으니 난 그때 서너살 쯤 되었겠지. 빈털털이가 되어 고모부는 강원도 주문진으로 내려가고 우리 식구들은 지금 서대문 구청 옆, 철거민인가 피난민인가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살던 양철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 마을은 지붕이 전부 양철로 되어 있어서 양철동네라고 부른 것 같다.

-내 기억은 여기서부터 조금씩 나는데 야맹증이 심해서 밤만 되면 하나도 보이지 않아 밖에 나오면서 마루를 더듬거리던 생각이 나고 오줌소태라고 하던가? 왜 그렇게 오줌이 자주 마렵고 누려고 해도 나오지는 않는지. 거기서 지금 유진상가가 있는 홍제국민…, 아니 홍제초등학교를 처음엔 걸어다녔는데 애들 걸음으로 한 30분 걸렸을까?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행길(한길의 사투리)이라고 불렀던 그 길은 누런 흙먼지가 바람에 날렸고, 또 비만 오면 이번엔 진흙탕으로 변해 걷기가 힘들었다.

-집에서 학교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은 전부 산이었고 오른쪽은 집 뒤에 있는 개천이 홍제초등학교 앞으로 해서 저 멀리 세검정 너머 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초등학교 조금 못 가서는 길 양쪽에 돌산이 있었는데 하얀 돌들을 깎아내느라 언제나 멀리 보이는 산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이 조그맣게 보였고 가끔 산 허리 쯤에서 큰돌을 무너뜨리느라 난포(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릴 때는 돌들이 길까지 날라올까봐 양쪽에서 길을 막았다.

-나중에 백련사 밑 산중턱으로 이사하고 3, 4학년쯤 되어서 길이 포장되고 버스가 다녔나보다. 그때 버스삯이 3원? 5원이었나 그정도 됐는데 버스에 올라탈 때 내는 것이 아니라 내릴 때 돈을 내었다. 그 덕분에 공짜를 많이 탄 기억이 난다. 그 때는 차장(안내양)이 앞문에 하나 뒷문에 하나, 둘이었는데 앞으로 타선 뒷문으로 내리면서 앞에서 냈다고 우기고 도망치듯 내리곤 했다. 워낙 손님이 많아 뒷문에 있는 차장은 앞문에 있는 차장에게 물어볼래야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봐도 그걸 어떻게 낱낱이 기억하나.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는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끼니를 때우기가 어려웠나보다. 어머니는 고개도 가누지 못하는 내 밑에 작은 여동생을 등에 업고 녹번동 좁은 산길을 넘어 은평초등학교 까지 '뽑기' 장사를 하러 걸어 다녔다. 설탕을 녹여 물처럼 만들어 붕어 모양도 만들고 동물 모양도 만들어 그 모양을 따라 옴푹 자국을 만들면 아이들이 그 모양대로 옆엣 걸 떼어내면 '보너스'로 하나 더 주는 '뽑기'. 하지만 그 모양 대로 다 떼어 내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돈들이 없는 아이들은 점심 급식으로 나온 옥수수빵을 주고 뽑기를 했다. 쌀이 떨어져 밥을 지을 수 없을 때 어머니는 그걸로 우리들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고 한다.  

-양철동네에서 마을이름이 간댓말이라는, 이대감 집이라는 곳으로 방을 얻어 살다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사춘기 시절을 보냈던 백년사 밑 산 중턱에 루핑으로 지은 천막집으로 이사를 갔다. 천막을 지으려면 각꾸목(각목)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그 돈이 없어 어머니가 쉐타를 맡기고 천원을 빌렸다고 한다. 아스팔트 같은 기름을 먹인 루핑집은 지금의 텐트처럼 생겼고 바닥은 가마때기(가마니) 두어 장을 깔아 놓고 한 쪽 귀퉁이에는 솥이니 그릇이니 어지럽게 쌓아 놓았지만 그 집은 남의 집은 아니었다. 산 중턱을 깎아 처음으로 지은 아니, 만든 집(?)이었지만 그런대로 살 만 했다. 아버지는 거기다 터를 잡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버지는 언제부턴지 양은 그릇도 때우러 다녔고 우산도 고치러 다녔다. 아버지가 없을 때 산지기라는 사람이 와서 남의 산에다 집을 지었다고 그 천막집을 부셨다. 어머니는 한 낮에 뜨거운 해를 피할 데가 없어 우산을 쓰고 있기도 했다. 가끔은 팔 다리가 없는 상이군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둘 셋이 몰려다니며 허가 없이 집을 지었다고 돈은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며 천막을 들어 올려 뒤집어 버리곤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버티면서 그 옆에 집을 지었다. 부로크를 지어 나르고 세멘(시멘트)을 바르고 스레트를 올렸다. 우물도 팠고 뒷간도 지었고 축대도 쌓았다. 불을 때는 아궁이를 만들어 놓아 형과 나는 갈쿠리로 솔가지를 긁어모아 땔감을 해와야 했고 큰 오리나무를 둘이서 번갈아 도끼로 잘라 끌고 내려오기도 했다. 산지기한테 걸리면 죽는다고 겁을 주어 산지기가 쫓아오면 냅다 도망가곤 했는데 한번도 붙잡힌 적은 없다.

-우리 집 뒷 쪽으로 올라가면서 대장간이 생겼고 집들도 몇 채 더 생겼다. 그 위 골짜기에도 집이 한 채 있었다. 우리 집 밑에는 신씨네라고 기와집이 한 채 있었고 그 집에는 포도 나무도 있었다. 포도가 탐스럽게 열릴 때는 몰래 내려가 따 먹기도 했다. 뒷산으로 올라가면 백련사라는 절이 있었고 언제나 목탁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는 곳이었다. 하늘은 언제나 파랬다. 어머니가 장사를 하러 가서 아무도 없을 때 멀리 모래내에서 들리는 기적소리와 아스라이 들리는 비행기 소리는 가슴을 싸아하게 만들었다.  

-집 앞으로는 양철동네에서 내려오는 맑은 시냇물이 모래내 기찻길 밑으로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개천 건너편에는 집이 없던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살아 천막천(촌)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었다. 천막천 아이들과 냇가를 사이에 두고 돌팔매질도 가끔 했다. 또 천막천에는 만화가게가 있었고 돈받고 보여주는 텔레비전도 한 대 있었다. 황금박쥐와 아톰인가 하는 만화를 보려고 어머니한테 돈을 달라고 졸라 가보면 2층에 있는 골방은 꾀죄죄한 아이들이 오글오글 대고 있었고 발 꼬랑내가 코를 찔렀다.  

-앞 냇가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이 흐르지 않는 모래밭 귀퉁이에서는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놀았다. 양철동네 쪽에 개천 다리 밑에도 움막집이 한두 채 있었다. 장마가 지어 큰물이 내려갈 때는 나무, 그릇 같은 것들이 떠내려 왔고 어른들은 긴 막대기를 들고 개천 옆에 서서 그것들을 건져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겹도록 꽁보리밥에 고추장을 비벼 먹었지만 굶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가끔 수박을 사와 우리 4남매는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 형과 나는 아카시아 그늘에서 장기로 시간을 보냈고 마당에서 팽이도 돌리고 구슬치기를 하였다.

-개고기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집에서 개를 키웠고 가끔 키우던 개를 잡아먹었다. 아버지 성격은 차가워 나와 정든 개건 뭐건 필요하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잡아먹었다. 성질 급한 아버지는 잡는 방법도 조금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도끼로 머리통을 치거나 나이롱 줄을 목에 걸고 마당에 만들어 놓은 마루 밑으로 집어넣어 삼각형으로 되어 있는 다리 받침대 사이로 잡아 다녀 죽여 버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이 차이가 많아서인지 의처증이 심해 어머니를 심하게 때렸다. 밥을 먹을 때 밥상을 뒤집어엎거나 어머니 머리 끄댕이를 잡고 팽개치고 발길질을 했다. 우리들을 때릴 때는 발가벗겨 놓고 가죽 혁대로 때렸다. 나는 형보다는 덜 맞고 자란 것 같다. 본디 겁이 많기도 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밤에 가위 눌리는 병이 있어, 낮에 피곤하거나 무슨 놀라는 일이 있거나 하면 밤에 잠잘 때 꼭 가위 눌려 놀랐기 때문에 나를 덜 때린 것 같다.  

-성격이 온순했던 나는 아버지를 닮아갔다. 공부도 못했고 몸이 약했던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맞기도 했다. 아버지는 매일 맞고만 다닌다고 너는 손이 없냐고 하면서 힘이 없으면 돌멩이라도 들어서 찍어버리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 며칠후 난 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로 학교에서 나한테 집적거리는 놈을 돌멩이 대신 연필로 찍어버렸다.

-학교를 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육성회비를 못 내 구박을 받았고 4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외우지 못 해 선생한테 맞기 일쑤였다. 5학년 때 겨우 외었지만 두 자리수 곱셈을 못 해 숙제를 할 때면 징징 울기도 했다. 숙제를 못 해 가면 선생한테 맞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무섭던 아버지가 숙제를 하면서 훌쩍훌쩍 대는 나를 앉혀놓고 두 자리수 곱셈을 꼼꼼히 가르쳐 주었다.

-몸이 약해 학교를 빠질 때가 많았다. 한번은 무단결석이라고 선생한테 종아리를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맞았다. 육성회비도 못 내고 부모가 학교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아 선생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커서 깨달았지만 선생이 부모를 오라고 하는 건 돈 따위를 바치라는 뜻이었다.

-정이 많은 어머님은 내 종아리를 보더니 돈 없는 게 죄라고 울먹였다. 저녁에 아버지가 들어와 내 종아리를 보았다. 그렇게 자식한테 관심 없어 보이던 아버지가 아무 말이 없더니 그 다음날 학교로 찾아왔다. 아이들이 보거나 말거나 선생한테 막 대들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냐고, 나를 부르더니 종아리를 걷어보이며 아이를 이렇게 때릴 수가 있냐고 눈을 부라리며 따지고 들었다. 그러면서 애 삼촌이 신문사 기자인데 신문에 내야 되겠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사과를 하라고 했다. 처음엔 대꾸를 꼬박꼬박하던 선생이 삼촌이 기자라는 말에 쏙 들어갔다. 삼촌은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런 거짓말에 쩔쩔매는 선생을 보니 야, 기자가 굉장한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공부를 너무 못했고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에 갈 것 같지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을 들어갔다. 아버지에게 공장을 들어간다고 했더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걸상다리가 그믐달 처럼 휘어, 앉아서 몸을 앞 뒤로 흔들거리면 흔들흔들하는 '개동이 의자' 공장이었다. 걸상다리를 락카칠을 하는 공장이었는데 처음 들어가선 손가락 지문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빠(사포)질만 했다. 공돌이가 될 소질은 있었는지 붓으로 락카 칠하는 것을 3개월만에 배웠다. 그 때 월급은 6,000원 안팎으로 기억하는데 오야지는 내가 칠하는 것을 금방 배우니 나에게만 일을 맡기고 농땡이만 깠다. 전부 6개월인가 다녔다. 처음 3개월 정도는 월급을 받았는데 도급을 맡은 오야지가 나중 3개월 월급을 떼어먹고 도망을 가 그만두게 되었다.

-공장을 다니면서 교복입은 아이들을 보면 부러워 다시 학교에 가고 싶었다. 길게 가지는 못했지만 동아일보에서 신문을 받아다 길에서 다방으로 신문을 팔러다녔다. 하루는 독립문에서 그날 하루종일 신문을 팔아 번 돈 몇 백원을 잃어버리고 길가에 앉아 한참동안 서럽게 울었던 생각이 난다.  

-다음 해, 형이 2학년 다니다 그만 둔 범산고등공민학교를 들어갔다. 초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를 못했던 나는 그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1등을 했다. 그 학교는 연희동 고개에 있었는데 '인가'난 학교는 아니었다. 1학년 쯤 다니다가 학교가 망해 홍제동 화장터 옆에 있던 대성고등공민학교를 들어갔다. 그 옛날 지나가기가 무서웠던 화장터는 지금 고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대성고등공민학교에선 장학금을 받기도 하면서 다녔다. 하지만 생활이 쪼들려 힘들게 졸업하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시험을 보았다. 고등공민학교는 정식 중학교와는 달리 검정고시를 붙어야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볼 자격이 생긴다.

-용산 어딘가에 있는 선린상고에서 발표를 했다. 발표날,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나 또한 기대도 않고 혼자 발표를 보러 갔다. 합격자 명단에 내 번호가 있었다. 3713!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난 왜 그리 눈물이 많은지. 기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돈이 없어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 같아 서울역까지 걸어오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 보았다.

-형은 그 때 범산고등공민학교를 2학년까지 다니다가 박스공장을 다녔다. 나보고 입학금을 대준다고 고등학교에 들어 가라고 해서 연합고사를 봤다. 그 때는 실업계 시험을 먼저 봐서 떨어지면 인문계를 갈 수 있는 실업계가 '전기'였고 인문계가 '후기'였다. 공업을 육성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만들었나싶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집안 사정으로 그렇게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축구를 좋아해서 혹시나 축구라도 할 수 있을까해서 한양공고 기계과를 쳤는데 기계과는 안 되고 금속과에 합격을 했다. 처음에 들어가서 1등을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대학을 못 간다는 실망과 금속과에 취미가 없어 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두게 되었다.

-학교를 다닐 때는 날마다 아침이면 백년사를 오르내리며 운동을 했고 맑은 공기를 마셨다. 여전히 몸은 빼빼 말랐지만 100미터를 13초까지 뛸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다. 자전거를 빌려 임진각까지 4시간에 갔다오기도 했다. 형 공장 사람들하고 자전거를 타고 경기도 마석을 갔을 때는 다른 사람들은 고개 마루에서 전부 포기를 했는데 나는 마석고개를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갈 수가 있었다. 막내 여동생과 나만 학교를 다니면서 편안하게 생활하는 게 공장을 다니는 큰여동생과 형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것만 아니라면 세상 아무 걱정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집은 뒤에다 방 두개를 들여놓고 전세를 주었다. 뒷집에 있는 동갑네 여자애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름이 정정란이었다. 키가 무척 작았지만 귀여운 얼굴에 언제나 명랑했다. 그 집 아버지는 딴따라 출신이었다. 집에는 전자기타까지 있어 기타를 배운다는 핑계로 그 집을 들락거렸다. 그 애는 낮에 공장을 다니고 밤에는 간호보조사 학원을 다녔다. 첫사랑이었을까. 나는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그 애가 올 때쯤이면 양철동네 버스정류장까지 마중나가 집까지 둘이서 걸어오면서 얘기를 나누는 게 좋았다.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았는데 무허가라고 정부에서 철거 계고장이 날라왔다. 아파트 입주권으로 '딱지'라고 하는 것이 한 집에 한 개씩 나왔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파트 들어갈 처지가 안 되었다. 투기하는 돈많은 사람들은 딱지를 있는대로 사 들였다. 15만원인가 받고 그 사람들에게 팔았는데 그 돈으론 뒷방 전세 빼어주기도 모자랐다. 우린 또 빈털터리가 되어 양철지붕과 얇은 널빤지로 지은 다 허물어져 가는 응암동 판잣집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박스공장을 들어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긴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니까 기술을 배우지도 못하고 일하는 재미도 없었다. 형은 힘든 노동으로 위염과 어깨결림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변덕이 심한 나는, 또 한번 대학 검정고시를 치른다고 공장을 그만두고 시험공부를 했는데 시험 3개월전에 그만두고는 다시는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집에서 빈둥빈둥대니 용돈이나 벌어 쓰라고 아버지가 일하는 데를 따라 다니라고 해서 내키지 않았지만 가끔 따라 다녔다. 아버지는 시멘트를 바르는 미장일과 벽돌 쌓는 쓰미 일도 잘 했지만 주로 하는 일은 아궁이 고치고 보일러 놓는 일이었다. 난 아버지와 서먹서먹해서 말도 잘 안했지만 일은 열심히 했다. 어떤 집에서 일을 맡으면 한 3, 4일 가는 것도 있었는데 그 집에선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지도 모를 때도 있었다. 서로 말을 안 했기 때문이었다. 난 시키기 전에 연장을 갖다 주었고 사모래(세멘과 모래를 섞은 것)를 개었고 벽돌을 날라다 주었다.

-군대를 앞둔 나는 또 구로공단을 헤매며 공원 모집 광고들을 훑어 봤지만 내가 들어갈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번은 모집광고를 보고 집을 나와 기아 자전거를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다. 하루종일 프레스로 찍는 단순히 반복하는 일이었는데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똑같이 되풀이하는 일은 시간이 무척 더디게 갔고 지루했다. 난 성격이 급했고 참을성이 없었다. 그것보다 더 나를 못 견디게 만든 건 일이 끝나고 기숙사에서 잠잘 때 무섭게 덤벼드는 모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모기장을 치고 잤는데 모기장 살 돈도 없었지만 모기장을 칠 만한 자리도 없었고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영장이 떨어졌다. 79년 7월 19일 입대를 했다. 머리를 깎고 광운공대에 모였는데 아버지가 따라왔다. 떠날 무렵 아버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처음으로 보는 아버지 눈물이었다. '아, 아버지도 감정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군대를 들어갈 걱정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25연대에서 훈련을 받고 610(운전)병과를 받고 진해육군수송학교를 갔다. 운전 면허증도 없는데 어떻게 운전 병과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육군수송학교에서 정비교육을 받을 때 연병장에 모여있는데 비상이 걸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았다는 소식이었다. 10.26이었다.

-후반기 교육을 받고 보안대로 빠져 자대 배치를 받기 위해 보안사령부에 대기하고 있다가 장위동에 있는 통신 보안대로 갔다. 궁금했던 건 보안대는 빽있고 돈있는 사람들만 간다는 곳이었는데 어떻게 그리로 빠졌는지 모르겠다. 짐작에 내 앞 번호와 내 뒷 번호도 보안대로 빠졌는데 나는 거기 묻혀 갔는가싶다. 빽고 없고 돈도 없이 어떻게 묻혀간 사람들은 부대에서 조금 근무하다 일반부대로 쫓겨나는 수도 있다. 사돈의 팔촌까지 조사한다는 신원조회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보안사령관은 전두환이었다. 자대 들어간 지 얼마 안돼 또 비상이 걸렸다. 총알을 지급받고 야전 잠바도 못 입고 뛰어나갔다. 우리 부대 앞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공수부대가 있었는데 그 공수부대를 향하고 개골창에 엎드려 거기서 넘어오면 무조건 쏘라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나중에 알았지만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우리 부대로 끌고 들어왔다고 했다. 12. 12였고 전두환이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 이었다. 밤새도록 떨면서 휴전선 철조망이 아닌 공수부대 철조망을 바라보았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80년 봄, 광주에 폭도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했다. 운전병들 몇 사람이 파견도 나갔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부대 안에 있었다. 갔다온 부대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얘기는 살벌한 얘기들 뿐이었다. 광주항쟁이었고 광주학살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다른 부대와 달리 외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일요일 외출을 나가면 시내에는 공수부대들이 보였다.

-일병에서 상병으로 진급할 때 쯤인가 부대에서 별로 하는 일이 없이 어영부영 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차출되었다. 불량배 소탕작전인가 뭔가해서 경찰, 형사, 부대원이 한 조가 되어 경찰차를 타고 어떤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불량배, 기소중지자, 껄렁껄렁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일이었다. 전부 사복을 입고 근무했다. 나는 태능경찰서 소속이었는데 한 번은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시끄러워지더니 손님중에 한 사람이 걸상을 들어 D.J 박스 유리창을 향해 던져 와장창 깨는 것이었다. 그들 일행은 4명이었는데 우리 셋이 일어나니 낌새가 이상했던지 슬금슬금 일어나더니 후다닥 도망을 간다. 내가 얼른 문앞에 가서 막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나를 밀치더니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 냅다 튀는 것이었다. 100미터를 못가 나한테 잡혀서 경찰서로 넘어갔다. 그 밖에 미장원에서 돈 통을 들고 나오다가 잡힌 여자도 있었고 영산강 근처까지 내려가서 장롱 속에 숨어 있었던 기소중지자를 잡았던 일, 그 밖에는 다방과 당구장과 밤 12시 넘어 여관 임검을 나가기도 했으나 다른 건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삼청교육대를 보내는 일이 아니었나싶다.

-그 때는 나라에 충성한다는 생각도 없고, 어떤 의무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아침에 기상나팔이 울리면 일어나고, 때 되면 밥 먹고, 기합주면 기합받듯이 목적의식없이 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변명한들 무엇하나. 어떤 집을 강도질 한다고 할 때 그 집에 들어가서 사람을 죽이고 훔친 놈이나 아무 것도 모르고 망 본 놈이나 똑같은 죄인인 걸.

-휴가 때였다. 그 때 우리 집은 홍제동 74번 종점 옆에 살고 있었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고 있었다. 머리끄댕이를 휘어 잡고 발길로 개 패듯 하는데 도저히 두고 불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막내동생 미정이가 자기 딸이 아니라고 하면서 쫓아냈다. 난 막내동생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난 어릴 적부터 알게 모르게 아버지의 난폭한 성격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었다. 군대가서는 그런 성질이 더욱 굳어져 버렸다. 아버지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아버지 팔을 잡아 어머니를 못 때리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우리한테, 또 어머니한테 뭘 해준게 있느냐고 악을 바락바락 쓰고 아버지를 밀어버렸다. 어머니가 울면서 말려 나는 장롱 쪽을 돌아보면서 씩씩대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기 요강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내 뒷 머리를 향해 던지는 게 언뜻 장롱 거울에 비쳤다. 뒷 머리가 서늘했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잽싸게 앞으로 숙이며 몸을 움추렸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사기요강은 장롱거울을 깨면서 산산히 부서졌다. 맞았으면 죽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를 죽여야겠다고 부엌으로 나가 칼을 찾았다. 어머니가 뛰쳐나와 울면서 말렸다. 난 울면서 집을 나와버렸다.
  
-지긋지긋하게 생각되던 군대 생활이 끝났다. 큰여동생은 공수부대 중사하고 결혼을 했고 작은여동생은 서울여상 야간에 다니고 있었다. 생활은 형이 박스공장을 다니고 있어 그럭저럭 생활하고 있었다. 아버지하곤 휴가 때 그렇게 싸운 뒤로 어색해서 말도 안했다. 제대하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배운 것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우선 마음을 가다듬고 세상물정도 알 겸 돈 없이 전국일주를 해보자고 텐트와 쌀 조금하고 돈 천원을 갖고 여행을 떠났다. 처음에 들른 곳이 성남에 있는 조그만 공장이었다.

-군대에서 사귀어 휴가 때 일주일을 같이 살았던 혜미를 만났다. 혜미는 나와 지낼 때, 제대하면 결혼을 하자고 했으나 배에 수술한 자국을 보여주며 자기와 살면 아기도 못 낳고 나중에 틀림없이 불행해 질 거라고 거절한 적이 있었다. 혜미는 전에 다른 남자와 살면서 애를 뱄지만 낳지를 못 하고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다. 아이는 죽었고 혜미는 다신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아이는 입양해서 키우면 되니 그까짓 게 무슨 상관이 있냐고 했지만 도저히 결혼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난 그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마지막으로 달래 보았지만 혜미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이천을 갔다. 이천은 동료부대원 고향이었고 휴가 때 간 적이 있었다. 그 동료는 나보다 먼저 제대해 서울에서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만 있었다. 거기서 산에다 텐트를 치고 농사일 하는데 모도 날라주고 하다가 그 근처에 무덤 만드는데 필요한 뗏장을 지게로 나르는 일을 7천원씩을 받고 일하기도 했다. 한 사나흘 일했을까. 다시 송탄쪽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베낭을 짐을 올려놓는 곳에 올려놓고 어떤 아가씨 옆에 앉아 비포장 길을 덜컹거리며 한참 가고 있는데 머리 위에 있던 베낭에서 쌀이 쫘르륵 쏟아지는게 아닌가. 손님들이 막 웃었고 내 옆에 아가씨도 웃었다.

-난 운전기사한테 미안해서 허둥지둥 베낭을 추스리고 쌀을 대충 손으로 쓸어담고 다시 자리에 엉거주춤하고 앉는데 옆의 아가씨가 그때까지 웃음을 머금고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다. 그때서야 그 아가씨를 자세히 보니 옷차림이 수수했지만 맑은 눈동자에 예쁜 얼굴이었다. 수줍어했지만 몇 정류장을 가면서 얘기를 나눠보니 마음이 소박하고 시골사람다운 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서로 주소를 적어주고 여행 끝나면 꼭 편지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나중에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세 번째 답장은 다른 글씨였다. 그 때는 속았다는 생각뿐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가씨와 편지가 끊어진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곤 후회를 했다. 편지를 남에게 부탁하면서 까지 나에게 편지했던 건 내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고, 더구나 직접 써서 보낸 편지에는 진실한 내용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난 언제부턴지 외곬수에다 고집불통에다 싫으면 칼 같이 짤라버리는 성격으로 변해있었다.

-송탄에서 노가다를 했다. 일주일쯤 일을 했는데 천정에 붙어있는 반네루(판넬)를 떼는 일을 하다가 반네루를 뚫고 나온 못을 밟아 일을 못하고 끙끙 앓다가 그 다음날 서울로 돌아왔다. 결국 전국일주를 해 보겠다는 꿈은 깨지고 말았다. 내 의지가 약한 때문이 아니라 발을 다쳤기 때문이라고 속으로 핑계를 댔지만 내 의지가 약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내가 대학 검정고시를 못본 것도 돈도 돈이었고 형편도 중요했지만 사실은 내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저것 해 보았지만 오래가질 못했다. 전기 기술자를 따라 다닌다고 한 달에 7, 8만원을 받고 일을 했다. 그것도 기술을 배운다는 핑계로 월급은 작았고 일은 완전히 중노동이었다. 여의도에 있는 아파트에서 형광등을 매달고 드라이버로 조이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데 목과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또 아파트 벽과 바닥을 따라 관을 묻고,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강철로 된 철사를 배관 안에 집어넣는 일도 했다. 그 끝에는 전기선 몇가닥을 묶어 반대 쪽에서 철사를 잡아당기면 전기 배선이 딸려 나온다. 콘크리트 속에 묻힌 관은 곧게 뻗은 것이 아니라 꺾어져 있고 상당히 긴 것도 있기 때문에 강철선을 집어넣는 것부터 해서 거기에 묶인 몇 가닥씩 되는 전기선을 반대 쪽에서 잡아당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사람, 혹은 세 사람이 장갑 두 켤레씩을 끼고 강철선을 손에 감기도 하여 잡아 당기면서 "어지기 어자"하면서 잡아 당긴다. 그게 솔솔 따라 나오면 재미있지만 어딘가에 걸려 나오지 않을 때는 진땀이 난다. 요즘에야 알았지만 그때는 왜 구호가 '어지기 어잘'까 하고 궁금했는데 건축 용어가 거의 일본말로 되어 있어 구호까지도 일본식이란 걸 알았다. 우리 구호 같으면 영치기 영차 일텐데.

-그 일을 하면서 운전 면허 시험을 봤으나 자꾸만 떨어졌다. 군대 가기 전 부터 박스공장에 있던 차를 운전할 줄 알았고 군대가서는 면허증도 없이 부대장 차 '브리샤'부터 '다찌차' '제무시' 별별 차를 해 보았다. 그런데 한 번 떨어지니 시험보러 가면 공연히 떨려서 자꾸만 떨어지는 것이었다. 일곱번 째 가서야 겨우 붙었다. 면허증 하나 믿고 전기 기술자를 따라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제 딴 면허증을 누가 써 줄 것인가. 남대문에 있는 기사들 직업소개서에 5만원을 내고 팔리기만 기다렸다. 거기는 나 같은 초보자들이 많았지만 시내버스를 하다 나이도 먹고 힘이들어 다른 거나 해 보자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고 영업용 택시를 하다가 사고가 많아 온 사람들도 있었다. 좁은 대기실은 언제나 사람들과 담배연기로 꽉 차 있었다. 예전에 일하던 곳은 어떻다느니 하는 얘기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고 아니면 구석에서 때에 절은 바둑판으로 바둑을 두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사람을 구하는 전화가 오면 소개서에서 어느정도 조건이 맞는 사람을 보낸다. 사업주 쪽에서 요구하는 나이가 맞아야 되고 경력이나 지리를 어느 정도 아는가 이런 따위가 채용기준이 된다.

-돈 많은 사업주들은 돈 한푼 안들고 사람을 구하고 싼 맛에 초보자도 가끔 쓰기도 한다. 기사들은 처음에 생활에 쪼들려 앞 뒤 재지 않고 들어가지만 막상 일을 해 보면 운전 밖의 일이 너무 많거나 너무 늦게 까지 일을 해서 못 견디거나해서 그만두게 된다. 그런 다음엔 또 여기 와서 돈을 내고 더 좋은 자리가 없을까 하고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냥 기다리고 있을 때 그나마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하던 형이 사고를 내고 만다. 술을 먹고 공장 화물차를 몰래 끌고 운전하다 영동대교를 건너오면서 깜빡 잠이 들었다고 한다. 멀쩡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그라나다 승용차를 냅다 받아 그 차가 밀려 또 그 앞 차를 받는 사고였다. 넋놓고 가다 얼마나 세게 앞차를 받았는지 형이 끌던 화물차는 못 쓸 지경이 됐고, 받는 순간에 몸이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배에 부딪쳐 핸들이 부러졌다고 했다. 만약 핸들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형은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었다. 코는 앞 유리창을 박살내면서 찢어졌다.  

-난 취직할 생각도 못하고 거기에 매달려야 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영동병원을 갔더니 조그만 병실에 형이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모로 누워 있었다. 나를 보더니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다시는 운전을 안 한다고 했다. 쓴웃음과 한숨이 섞여 나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코에 난 상처 뿐이 없어 말짱한 것 같았다. 병원에서도 엑스레이를 찍어 봤으나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허리를 펴질 못하고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큰 병원으로 옮기려고 응암동 서부병원으로 갔으나 받아주질 않았다. 더 큰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다시 신촌 세브란스 병원을 갔다. 의사와 인턴들이 달라붙어 진찰을 해 보더니 장이 터진 것 같아 수술을 빨리 해야 되니 수술비를 내라는 것이었다. 돈? 돈이 어디 있나. 사람이 죽어가는데 돈부터 내라니.

-아버지는 포기한 것 같았다. 돈 구할 데가 없었다. 오로지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만 신경을 썼지 어디 돈을 모아 놓을 여유가 있었겠나. 여기저기 다니다 아, 박스공장! 그래 일하다 사고난 것은 아니지만 박스공장에도 어느 정도는 책임이 있을 거야. 하지만 사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차 열쇠를 몰래 갖고 나가 차를 끌고 나가서 사고가 났으니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난 법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하지만 돈 구할 데라곤 여기 밖에 없었다. 사정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회사 사장한테 형 죽으면 이 공장 다 해먹을 줄 알라고 반 협박으로 30만원을 받아냈다. 난 그때 다 떨어진 청바지에 신발은 군대에서 신고 나온 군화를 신고 다녔고 입은 거칠었다. 누가 봐도 개차반 같은 성격으로 볼 만했다.

-모자란 대로 입원비를 내서 겨우 수술에 들어갔다. 하지만 수술은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형은 갈비뼈만 이상이 없었고 장과 쓸개가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핸들이 부러질 정도였으니 그럴 만했다. 형은 세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원무과 에서 올라오는 치료비는 감당할 수 없어 내지 못하고 미루기만 하니 거의 다 나을 무렵에 4개월동안 밀린 치료비는 1,300만원이나 되었다. 의료보험도 없었다.

-형을 살게 해 준 것만은 말할 수 없이 고마운 일이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아예 포기하여 상관도 안 하고 난 250만원 짜리 전세방을 빼서 200만원을 내고 퇴원시켜 달라고 사정을 했다. 사정? 순 배짱이었겠지. 그나마 50만원 정도는 우리 식구가 비라도 피할 수 있어야겠기에 줄 수 없었다. 전세를 들었던 계약서도 보여주었다. 병원에서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병원 원무과에서 직원이 우리 집도 와보고 사정을 알았지만 막무가내로 자꾸 돈을 더 내야 퇴원 시켜 준다고 했다. 사실은 막무가내는 나였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진 게 없으니 배짱이 생겼다. "없는 걸 어떡하란 말이요?"

-그새 몸이 많이 좋아진 형은 퇴원을 하고 싶어 안절부절했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살면서 애가 둘이나 있었던 형은 빨리 나와 돈을 벌어야 했다. 불안해하던 형은 나 없는 사이에 병원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도망을 나와 강원도 고모집으로 갔다. 며칠 뒤 조선일보였나? 우연히 어떤 신문을 보니 세브란스 원무과 직원 한 사람이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나한테 돈을 더 받으려고 우리 집도 와보고 했던 그 원무과 직원이었다. 우리형이 도망을 나오고 난 뒤 같은 병실에 있던 환자 하나가 또 돈을 못 내고 도망을 갔다고 했다. 그 원무과 직원은 과장으로 승진하던 참이었는데 그 책임이 돌아가 '좌천' 되었다고 해서 잠실 어느 높은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했다는 기사였다. 난 잠깐동안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지만 이내 차갑게 돌아왔고 동정이 가지 않았다. 우리 같은 사람도 살려고 하는데 그런 아파트까지 갖고 있는 사람이 자살해?  

-우리 식구는 50만원으로 경기도 가라뫼에 있는 게딱지만한 방 한칸 짜리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 어머니, 형수, 조카 둘 여동생하고 나까지 일곱 사람이 한 방에서 살았다. 난 형이 나을 무렵 직업소개서에서 팔려 충정로에 있는 우아미가구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면 처음엔 내가 누울 자리를 만들어 놓고 자지만 잠이 들면 엎치락 뒤치락 하여 잘 자리가 없어져 난 다시 집에서 나와 모래내 잔디밭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처음 취직한 우아미 가구점은 운전하면서 가구를 날라야 했다. 운전이야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톱밥으로 만들었다는 우아미 가구는 무거워 그걸 나르기가 힘이 들었다. 둘이서 장롱을 옮기는 데는 힘과 기술이 필요했다. 어떤 연립주택은 3, 4층을 들고 올라가야 했는데 1층에서 2층, 2층에서 3층으로 구부러진 계단에서 장롱을 돌리는 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롱 수평을 맞추는데도 기술이 필요했다. 장롱 수평이 맞지 않으면 나중에 뒤틀려서 문이 잘 여닫기지 않는다. 장롱을 사간 집의 방이 수평이 잘 되어 있으면 수평을 맞추기가 쉬운데 그렇지 않은 집은 꽤나 힘들었다. 모든 하찮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모든 게 그 나름대로 요령이 있었다.

-그 때 월급이 20만원이었는데 생활하기가 벅찼다. 노동일을 하던 아버지는 당뇨병이 생겨 기운이 떨어져 거의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군대에서 갖고 나온 군화를 신고 다녔다. 형수 때문에 옷을 벗지 못하고 잠을 자거나 밖에서 잤기 때문에 청바지는 내 일복 겸 잠옷이었다. 또 200원 짜리 청자를 피웠고 점심은 라면으로 때웠다.

-우아미 가구점 바로 옆에는 페인트 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에는 경리를 보던 아가씨가 창으로 보였는데 꼬시고 싶었다. 하지만 말 한번 걸어보지 못했다. 지금 내 처지에 어떤 여자가 따를까 하고. 그 아가씨는 짧은 생머리에 이마에는 여드름이 있었지만 생기가 있었다. 언제나 명랑한 얼굴에 촐랑촐랑 까불었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출퇴근할 때는 손에 007가방처럼 생겼지만 그것보단 작은 자주색 가방을 갖고 다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클래식 음악 테이프가 들어 있는 가방이었다.

-하루는 어디 배달을 나갔다가 밤 11시가 넘어 가구점 쪽으로 들어가는데 그날 따라 그 아가씨가 늦게 퇴근을 하는 중이었다. 어김없이 그 가방을 들고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서로 얼굴은 아는 정도 였는데 난 문득 아, 기회는 이때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대뜸 말을 걸었다. 시간 좀 내줄 수 없냐고 하니 그 아가씨가 머뭇머뭇 거리기에 거절하는 말이 나올까봐 조마조마했다. "밑져 봐야 본전 아니오?"하고 다시 한 번 말을 툭 내던지니 고개를 까닥까닥거린다. '어렵쇼, 이 아가씨 보기보단 다르네.' 하고 생각하고 속으로 좋아서 신이 났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서대문 쪽에 있는 다방을 가리켰다. 지금은 동아일보가 들어서있다.

-"저 밑에 있는 다방에서 차나 한 잔 합시다"했는데 아차,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는 게 생각나서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 터벅터벅 내려가는 걸 보고 얼른 우아미 가구점으로 들어가 같이 일하는 사람한테 돈 천원을 빌렸다. 그때 커피값이 500원 이었다. 다방으로 서둘러 가면서 '다방에 들어가 있을까, 간 것은 아닐까? 비싼 거 먹으면 어떡하지? 내라 그러지 뭐, 까짓거 안되면 말지.' 별 생각을 다했다. 다행히 그 아가씨는 커피를 시켰다. 그 여자의 이름은 '은자'였다. 강원도 간성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언니하고 올라와 있었다. 그 뒤로 몇개월 동안 은자와 연애를 하다 결혼식도 안하고 가라뫼에 가서 같이 살게 되었다.

-한참 연애를 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우아미가 팔려 그만두게 되었다. 다시 직업소개소에 가서 한 달을 기다려 팔려 유한킴벌리 대리점을 들어갔다. 말이 대리점이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화장지 뽀삐나 여자들 생리대 '후리덤' 따위를 쌓아 놓은 창고였다. 내가 하는 일은 그것을 약방이나 슈퍼마켓 같은 데로 팔러 다니는 판매사원을 태우고 차를 운전하는 일이었다. 낮에 고스톱을 치면서 농땡이를 까던 판매사원들 땜에 늦게 끝나는 일이 너무 잦아 사장에게 항의하다 1년을 못 채우고 해고 아닌 해고를 당하게 되었다. 그 때는 해고 인지도 몰랐다.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아버지는 나이도 더 들고 당뇨병까지 심해져 의처증이 더욱 심해졌다. 형은 방을 얻어 나가 자기 식구 먹여 살리기에 바빴다. 다시는 운전을 안 한다고 했지만 시내버스 회사를 들어가 아예 직업 운전사가 되었다. 막내동생 미정이는 태권도장 겸 속셈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그 관장하고 결혼을 했다.

-우리 아기가 달 수를 못 채우고 9개월만에 태어났다. 몸무게가 2.25kg이었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는데 포기하고 싶었다. 하루에 6만원이라는 큰 돈이었다. 큰 여동생이 도와줘 일주일동안을 인큐베이터에서 키우다 돈을 감당 못 해 죽으면 죽고, 살면 다행이라고 그냥 키우겠다고 퇴원을 시켰다. 난 아기가 태어난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지 못했다. 모든 게 짜증스러웠고 세상이 살기 싫었다. 다행히 아기는 건강하게 자라 지금은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다시 운전기사 직업소개서에 가서 죽쳤다. '부림환경'이라는 회사에 운전사로 들어갔다. 조그만 사무실 하나 얻어 놓고 소독하는 일을 하는 회사였는데 운전 뿐만 아니라 소독도 해야 했다. 아파트 집집마다 바퀴벌레 약을 놓고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벌레먹은 나무들을, 긴 막대기를 단 분무기로 약을 뿌리고 기관단총 마냥 어깨에 걸고 "부드드드" 하는 소리가 나는 기구로 약을 뿌리는 일도 했다. 가로수에 뿌리는 약이 무척 독했던 것 같다. 성 기능에 장애가 생겼고, 세 사람이 합작해서 만든 회사였는데 돈벌이가 시원찮아 갈갈이 찢어졌다. 난 겸사겸사 또 그만 두어야 했다.

-마누라는 두번째 아기를 뱄다. 벌써 5개월이 되었다고 했는데 난 두말없이 지우라고 했다. 키울 자신도 없었고 애기가 좋은 줄도 몰랐다. 병원에 갔더니 나중에 후회한다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 마누라는 애처롭게 나를 쳐다 보았다. 뭐 생각할 거 있냐고 하여 아기를 지웠다. 병원에서 표현한 대로 '아기를 죽여서' 돌려 낳고 병원을 나왔다. 마누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많이 아팠다고 나를 원망했다. 그동안 형은 시내버스를 하고 있었고 형이 '대형'이라도 따 놓으라고 해서 틈틈이 대형 시험을 봤지만 번번히 떨어졌다. 네 번이나 보고 나서야 붙었다.

-나는 이번에 성북동으로 팔려갔다. 그 집으로 가기 전에 조건이 까다로워 많이 망설였다. 늙은 부부가 둘이서만 살았고 그 집 자가용을 운전하는 일이었는데 늦게 까지 운행할 때가 많으니 출 퇴근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방은 준다고 해서 가 보았더니 지하 차고 옆에 조그맣게 들여놓은 방이었다. 연탄도 땔 수 없고 보일러도 안 되는 방이었다. 그건 둘째 문제고 그것도 방이라고, 방을 주는 대신에 자기들 빨래를 해 달라는 조건이 있었다. 말이 빨래나 하는 거지 마누라 보고 식모살이를 하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내가 힘든 건 참을 수 있어도 마누라 식모살이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를 갔다와서 마누라보고 그런 말은 안 하고 도저히 조건이 맞지 않아서 못하겠다고 하니 어떤 조건이냐고 꼬치꼬치 묻는다. 얘길 안 하다가 그런말을 했더니 마누라는 가겠다고 했다. 그까짓 것 빨래 못 해주냐고.

-몇 달쯤 일을 했을까. 일은 힘들지 않았지만 마누라가 안돼 보였다. 행복한 신혼의 단 꿈은 커녕 남의 집 식모살이라니. 하루는 운행 갔다 일찍 들어 왔는데 마누라는 빨래를 해 주러 갔는지 보이지 않고, 이불 위에서 혼자 잠자던 아기는 잠에서 깨어나 그 차가운 방안을 울면서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형이 자꾸만 시내버스를 해보라고 권하는 걸 대형 경력이 없는데 누가 써 주냐고 하면서 미루고 있었는데 도저히 그 꼴 보곤 못 살겠다싶어 되든 안되든 시내버스 한번 해 보자고 주인집에 얘기하고 며칠 뒤에 거길 나왔다. 대형면허 딴 지 5개월 쯤 되던 때 였다.

-다시 가라뫼에 짐을 옮기고 우이동에 있던 삼화교통 333번을 들어갔다. 333번은 우이동에서 봉천동까지 왕복 운행하는 꽤 긴 노선이었다. 들어갈 때 운전경력이 짧아 성북동 자가용 경력을 2년으로 가짜로 만들었다. 3일짼가 노선 견습을 받다가 형이 자기 차를(운행 차) 타고 나가자고 해 그 차를 탔다. '노선 견습'이란 그냥 차를 타고 다니며 정류장을 익히는 것이었다. 한참을 가다 서울역 광장을 지나 정류장에 멈춰 서더니 형은 나보고 운전대에 앉으라고 하며 일어선다. 어떻게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갑자기 버스를 할 수 있냐고 못 하겠다고 하니 날 때부터 버스 한 사람이 있냐고 신경질을 부리며 손님들이 보고 있으니 빨리 운전대에 앉으라고 한다.

-에라 모르겠다. 뭐 버스가 별거겠냐 하고 운전대에 앉아서 차를 끌어보니 이건 무슨 집채가 움직이는 것 같다. 자가용하곤 감각이 달랐고 차 폭이 달랐다. 정류장을 들어서 문을 여니 손님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탄다. 아, 저 사람들은 내가 버스 초보자인줄 모르지. 신기했다. 손님이 다 내리면 뒷 문에 있는 안내양이 올라 오면서 "탕탕" 치면 다시 한 번 백미러 보고 앞문 닫고 부웅. 나는 이제야 내 직업을 찾았나보다고 생각했다. 일 하는 게 재미가 있었다. 처음으로 돈을 떠나서 일 자체가 재미있는 걸 찾았다.

-333번은 난장판이었다. 우이동 종점에서부터 손님들이 꾸역꾸역 타기 시작해서 정류장 네 다섯개만 지나면 더 태울 수가 없었다. 손님들은 그차를 놓치면 죽기라도 한다는 듯이 차에 매달렸고 차를 부릉부릉 조금씩 움직여야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서울역 까지 오면 그 다음 부터는 내릴 손님이 없으면 무조건 정류장 통과를 했고 한 두 사람이 있으면 정류장 맨 앞에다 찔러 박고 내려주고 튀어야 했다. 휴일도 없이 달 수를 넘어 따블을 타 33개, 35개를 하면 40만원정도 였는데 누런 월급봉투는 알아보지도 못하게 대충대충 적혀있고 떼는 건 왜 그렇게 많은지.  

-앞에 엔진이 있어 숨이 콱콱 막혔고 더위에 땀띠, 똥구멍에 치질 따위가 괴롭혔고 운전복이라고 나온 건 완전히 나이롱이라 몸에 척척 휘감겼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얼른 돈을 벌어 방을 구해야 했고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그러다 87년, 노동자 데모가 날마다 일어났다. 사회현실에 어두웠던 나는 막연히 데모하는 건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까닭은 몰랐다. 버스는 그래도 굴러다녔다. 최류탄 연기가 자욱하고 돌멩이들이 버스 지붕위로 날라다녔다. 최류탄 때문에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운전을 했다. 신기하게도 돌멩이들은 버스 유리창으로는 날라오지 않았다. 서울역 광장에서 대모대들이 몰려 다니다 전경들에게 쫓겨 내 차로 몰려 왔을 때는 문을 열어 주었고 뒤이어 쫓아온 전경들이 올라올까봐 얼른 문을 닫아 버리면 전경들은 문만 발로 차고 욕지거리를 해댔다. 대모하는 대학생들은 꼬박꼬박 버스표를 내고 올라왔다간 전경들이 가버리면 또 다시 우르르 내려갔다.

-시내버스도 파업을 했다. 333번도 잠깐이나마 운행을 정지했다. 노조가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하여튼 파업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신이 났다. 기사들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데 나도 몇마디 떠드니까 형이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질렀다. 데모가 끝났고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333번이 한성으로 넘어가 사표를 쓰고 홍제동 161번으로 왔다. 그 동안 악착같이 살았던 마누라 덕분에 200만원 갖고 홍제동에 방을 구하려 했으나 복덕방에서 보여주는 개천옆 방은 너무 허름해 응암동에 주인집과 부엌을 같이 쓰는 방을 하나 구해 살았다.

-다시 2년이 지나 회사 가까운 곳에 방을 구한다고 마누라가 400만원을 겨우 맞춰 갖고 홍제동을 갔다. 복덕방에서 400만원 짜리 방이 있다기에 같이 가 봤는데 2년 전에 봤던 개천가에 있는 그 집이었다. 조금씩 우리 월급이 올라 저축하고 해도 전세값을 못 따라가고 있었다. 누구한테 속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홍제동 산동네에다 방 하나를 구해서 살았다. 다시 2년을 열심히 일만 했다. 노조 선거가 한 번 있었지만 그게 우리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몰랐다. 산 밑으로 이사오고 싶어 돌아다녀 봤지만 지하실방 밖에 없었다. 낮에도 불을 켜 놓아야 보이는 집이었지만 그래도 조금 나아 보이기에 이사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일흔 셋이었다. 10년 동안 당뇨병으로, 반평생 의처증으로 몸고생, 마음고생 하다 방학동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쓸쓸히 돌아가셨다. 어릴 때는 나에게 그래도 제일 잘 해 주었지만 커서는 나와 제일 많이 싸웠다. 벽제 용미리에 묻힐 때 형이나 동생들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를 묻는 일꾼들은 저승갈 때 노자돈이 필요하다고 자꾸만 돈을 달라고 했다. 그만해! 씨팔. 돈이 없어서 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는데 저승 가서 무슨 노자돈이 필요해? 난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하고 싸운 걸 뉘우쳤다. 그렇게 안 싸우고도 될 문제였는데.  

-홍제동 지하실방에서 살 때는 방에 곰팡내가 나는 것만 빼고는 그런 대로 살 만했다. 뒷 산에 올라가 축구도 했고 아들 태희도 무럭무럭 자랐다. 바둑 책도 사보고 기원에도 가끔 들러 바둑을 두기도 했다. 집에 오는 골목길에는 주민독서실이라는 곳이 있었다. 한 권 빌려 보는 게 3백원이었나? 하도 싸기에 집에 올 때는 한 권씩 빌려 버스 운전을 하면서 보기도 했다. 그 주민 독서실은 나를 어둠속에서 끌어내 준 곳이었다.

-전에도 책을 많이 봤지만 그것들은 우리들과 동떨어진 삶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아니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혹시나 어떤 책들을 보아 왔는지는 모르지만 초등학교 교과서 부터 동화 책, 그 밖에 또 위인전 같은 책들, 내가 볼 수 있었던, 볼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책들은 우리들이 사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였고 나를 어느 한 쪽으로만 끌고 갔다.

-내가 초등학교 때 책에서만 생각나는 건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하고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밖에 없다. 조금 높은 학년이 되어서는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고 외치고 그말을 들은 무장공비가 입을 찢어버리고 죽여 버렸다는 것과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우리 대한민국을 집어 삼키기 위해 쳐들어 왔다는 것과 우리의 원수 공산당은 이 세상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무찔러야 한다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하는 노래가 생각난다.

-또 있다. 선생님한테 맞을까봐 외우려고 안달을 했던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도 생각난다.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나는 어떤 무리들에게 알게 모르게 한 쪽으로만 생각하기를 강요 받아왔던 것 같다. 내 곁에 있던 모든 것들은 내 생각, 내 의식을 캄캄한 굴 속에다 쳐박아 두게 만들었다. 지금 '나라사랑겨레주민회'로 바뀐 그 때 그 주민독서실은 조그맣고 허름한 집에 전세를 내 바닥에 장판을 깔고 벽 쪽으로 책꽃이를 만들어 책들을 진열해서 동네 주민에게 싼 값에 책을 빌려주고 있었다.

-책을 좋아했고 값이 싸 자연히 들르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가 봐 왔던 책들, 흔한 사랑 타령하는 책들을 보았다. 이제 볼 만한 것이 없어 뭘 볼까 하면서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거기서 태백산맥을 읽어보라고 한다. 태백산맥? 제목만 봐도 신물나게 생각되는 공산당 무찌르는 전쟁소설 제목 같고 너무 길어 엄두가 안났다. 구석진 곳에 '쿠바혁명과 카스트로'라는 책이 보였다. 혁명? 혁명이라는 소리만 나면 괜히 거부감이 생겨 무슨 책인가 훑어보니 만화책이었다. 첫 장에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서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쿠바의 민중들에게 뜨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바친다.'고 나와 있는데 쿠바? '쿠바' 하면 공산주의 국가 아닌가. '승리'라니 누가 승리했다는 말인가. '카스트로' 하면 김일성 만큼이나 무서운 독재자라고만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책은 나를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끌어낸 책이었고 세상의 다른 한 편을 볼 수 있게 만든 책이었다. 내가 속고 살았나? 알고 싶은게 너무 많았다. 태백산맥을 보았고,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 찢겨진 산하, 거꾸로 읽는 세계사, 노동의 새벽, 새는 좌우의 날개로 산다, 이제는 거부감이 드는 제목들만 골라 밤을 새워 책들을 읽고 버스 운전을 하면서 책을 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감쪽같이 속고 살았다니.

-박정희가 독립군 때려잡던 일본군의 관동군 소좌였다니. 5. 16혁명이 아니라 쿠테타였다니. 건국의 아버지인줄 굳게 믿어왔던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에 업고 단독정부를 세운 '망국의 아버지'인줄 꿈엔들 알았으랴. 내가 근무했던 보안부대 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쿠바의 바티스타 같은 독재자였다는 것도 그때야 알았다. 이제 생각해 보니 내가 밤새 공수부대 철조망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일이 쿠테타의 한 부스러기였다. 어릴때부터 의심 한 번 안 해본 우리의 우방이니 '혈맹'이니 하며 불러온 미국은 자유대한을 공짜로 지켜주고 이 세계 자유를 지키는 수호신인 줄 굳게 믿었는데.

-중세유럽 때 마녀사냥이나 미국의 상원의원 이름에서 나온 매카시즘이나 선거때마다 빨갱이가 나타나는 건 기득권자들이 언제나 쓰는 방식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왜 3월 1일 근로자의 날과 5월 1일 노동자의 날이 따로 있는가 했는데 1886년 미국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5월투쟁과 1946년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든 '조선 노동 조합 전국 평의회'(전평)에 대항해 1946년 3월 10일에 이승만이 '…노자(노동자와자본가)간의 친선을 기한다'며 만든 '대한 독립 촉성 노동 총연맹'이라는 거짓 연맹인 '대한노총'의 역사를 보고야 '아하!' 하고 무릎을 쳤다.

-관념론과 유물론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세상은 모든 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노조 선거할 때 "그게 밥 먹여줘? 우린 열심히 일만 하면 돼"했는데 현실은 외면하고 죽어라 일만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책을 보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내가 받는 임금을 계산해 보려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계산이 되질 않았다. 뭐 이렇게 월급 계산이 복잡해? 조합 사무실을 가서 계산법을 알려고 했으나 그런 건 알아서 뭘 해? 하고 구박 맞았다. 노동운동단체를 찾아 헤맸다. 버스에 대해서 잘 안다는 보문동을 갔다. 서울버스 노동자 협의회? 야, 이런 곳이 있었네.  

-근로기준법, 단체협약을 알아야 했다.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전에 우이동에 있을 때 연장근로 수당을 찾는다고 기사들이 떠들어 월급봉투에 몇 푼 더 나왔던 것을. 그 때는 또 전국에서 통상임금 때문에 말이 많았다. 통상임금은 기본급에다 정기로 지급되는 근속수당, 승무수당, 식대와 교통비를 합친 임금인데 월차수당이니 야간근로수당이니 하는 모든 수당을 계산하는 임금이다. 그런데 시내버스 사업조합과 기사들에게 어용단체라고 욕을 먹는 서울버스지부가 '기본급(통상임금)'이라고 요상하게 맺어놓고 기본급은 곧 통상임금이라고 우기며 모든 통상임금으로 주어야 할 수당을 기본급으로 지급하여 왔다. 그것을 내가 계산해 보니까 3년동안(임금시효 3년) 2백만원이 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만 시내버스 기사가 2만이 되니 그게 얼마나 큰 돈인가. 나는 그때서야 사업주들의 본색을 알았다.

-그걸 노조에 얘길하니 먹혀드나. 내 밥그릇 누가 찾아주냐고 해서 3년동안 받았던 임금을 계산해 사업주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그 때 한겨레신문을 보면 6개 도시에서 60명이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 1심에서 지고 항소를 했는데 소송이 거의 끝날 무렵 나와 같이 소송을 걸었던 사람들이 졌다. 분명히 우리가 옳았고 또 택시들은 통상임금으로 받고 있는데 왜 같은 나라에서 법이 다른지. 난 실망하여 그 뒤로 법원에 가지 않았다. 판결문은 집으로 날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흐지부지 끝났다. 난 그때 변호사도 없이 법원에 들락거리면서 누가 우리편이고 누가 적인 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렇다. 난 분명히 알았다. '회사를 내 집처럼 근로자를 가족처럼' 이라는 번지르한 말 뒤에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 임금을, 권리를 떼어먹고 있다는 것을…. 또한 법이란 건 우리처럼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 게 아니란 것도 알았다.

-회사에 말없이 일하던 사람이 근로기준법을 찾고 권리를 찾으려고 하면 금방 예전과는 다르게 압박이 온다. 우선 해고 시키려고 온갖 트집을 잡는다. 차도 똥차를 준다. 그러나 난 그까짓 억압은 상관이 없었다. 나는 회사에 종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회사 대표와 계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나도 이제부터 당당하게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굳은 신념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일에 너무 신경을 쓰니 몸이 많이 약해졌다. 내가 밤잠 안 자고 그런데 신경을 너무 쓰니 마누라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나 보다. 더구나 어용조합인 조합장은 나를 쫓아내려고 말다툼한 걸 가지고 형사고소를 해 경찰서까지 드나들었다. 그 때문인지 마누라가 한 번은 쓰러지더니 3일동안 일어나지 못 해 약국에서 소개해 주는 무슨 링겔 주사를 맞고 겨우 일어났다.

-그럭저럭 삼화교통을 들어간 지 7년이 넘었을 때 회사가 삼화상운으로 넘어갔다. 돈 많다는 삼화교통이 돈이 없어서가 판 게 아니라 시내버스가 시시해서였겠지. 삼화상운이 삼화교통을 살 때 조건이 기사들에게 먼저 사표를 받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다시 입사를 받아 준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회사가 넘어가면 기사들까지 같이 넘어가는 '고용승계'를 원칙으로 해야 하는데 근속수당을 없애고 햇수 차는 기사들 퇴직금 떼어 먹자는 수작이었다. 겉으로는 회사는 관여를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어용조합이 뭘 받아 먹었는지 조합장이 사표를 받았다. 난 사표를 안 쓰고 버텼다. 인쇄물을 만들어 뿌리고 몇 사람을 모아 절대 사표를 쓰지 말자고 약속했다. 고용승계를 시켜달라고 요구했다. 회사에서는 한 사람씩 불러 꼬드겼다. 한 사람씩 떨어져 나가고 나머지 다섯 사람이 남자 나에게 해고 통보서를 보냈다. 그걸 보더니 나머지 사람들도 사표를 써 주고 말았다. 우리 기사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우리 식구는 일산에 17평 짜리 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비록 내 집은 아니지만 지하실 곰팡내를 맞지 않는 것만 생각해도 살 것 같았다. 누가 받아 줄 것 같지도 않아 취직할 생각도 않고 고민만 하고 있다가 147번 동해운수를 갔다. 과장이 대뜸 하는 말이 조합일에 관여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시내버스 채용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 같았다. 사업주한테 배운 '오리발'을 내밀었다. "아니요, 우리 그런 거 몰라요." 전화로 '조회'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하라고 했다. '까짓거 안되면 말지 뭐.' 나가 있으라고 해서 사무실을 나왔다. 한 30분을 밖에서 기다렸다. 안되면 말지 하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취직이 되지 않으면 다른 곳도 분명히 안 될 건 뻔했다. '안되면 말지' 하고 생각했지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틀렸구나.

-그 때까지도 삼화교통 본사에 사표를 안 써주고 해고무효소송을 건다고 했기 때문인지 말을 좋게 해 주었을까. 내가 취직이 되면 삼화교통으로 소송이 안 들어 올까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틀렸나보다 생각했는데 과장이 들어오라고 하더니 내일부터 노선 견습을 하라고 하면서 지정병원에서 하는 건강진단을 받으라고 했다. 야, 됐구나. 와서 일을 해보니 여긴 더 '개판'이었다. 숙소는 쥐가 돌아 다녔고 월차적치도 안 해주고 수당으로 주었고 쉬는 시간 없이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단체협약은 있으나마나였고 기사들을 종처럼 부려먹었다. 그래도 여기 와선 조금 참아보려고 했다. 마누라가 너무 고생하는 게 안타까웠다. 참고 살자. 참고 조용히 일만 하자.

-하지만 그냥 일만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들어갈 무렵 새로 당선된 조합장이 보문동 출신이었다. 보문동은 아까 말한 '서울운수노동자협의회'를 말한다. 나는 보문동에서 배운 대로 동해운수 노보를 창간했다. 시내버스에서 두 번째로 생긴 노보였다. 첫 번째는 삼양교통이었는데 그 때는 벌써 없어져버린 뒤였고 우리 동해운수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조합에서 교육 선전부원이 됐다. 노보를 만드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기사들은 회사에서 찍힐까봐 도와주지 않았고 우선 돈이 없었다. 노보는 겨우 두 번 나오고 말았다. 여러 곳에서 들어오는 방해도 있었고 제일 큰 까닭은 조합장이 변한 것이다. 혼자서는 노보를 만들 수가 없었다.

-원당영업소로 발령이 나서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 기사들이 속된 말로 '가다 브레이크가 들었다'고 하는, 브레이크가 한 쪽이 밀리는 바람에 앞 승용차를 받는 접촉 사고가 났다. 차 뒤 범퍼만 상처가 난 조그만 사고였는 데 대번에 배차를 빼버려 일을 주지 않았다. 과장에게 왜 일을 주지 않냐고 항의를 했다. 과장 눈이 놀란 토끼눈처럼 동그래졌다. 뭐, 이런 놈이 있냐는 거겠지. 며칠 뒤 다시 화전 147번으로 가서 일을 하라고 한다. 이번엔 내가 눈이 동그래졌다. 이리로 발령 받은 지가 언제라고 금방 또 화전으로 가서 일을 하라고 하느냐고 또 항의를 했다.

-회사에서 내 이름표를 화전에다 걸어놓고 무단결근이라고 하는 걸 무시하고 원당으로 출근을 했다. '운전사가 무슨 시계불알이야? 꺼떡하면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게?' 동해운수는 영업소가 몇군데 있어서 회사 마음대로 기사들 일하는 곳을 이리저리 옮기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일부러 집하고 먼 곳으로 보내는 걸로 압박을 해 기사들을 휘어 잡는 것이다. 한 동료 기사가 나를 말렸다. 싸우더라도 '링위에서 싸워야 된다.'고. 그래. 여기서 해고 되면 오랫동안 일을 못하겠지. 마누라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화전으로 쫓겨났다.  

-월차를 적치하는 것부터 싸움을 시작했다. 안 된다고 버티던 회사에서 월차는 적치 시켜주더니 연차가 발생했을 때는 돈으로 나왔다. 여기선 월차는 돼도 연차는 안 된다고 했다. 은행에서 연차수당을 찾아다 과장 책상위에다 올려놓고 나는 연차도 적치해서 휴가로 쓸테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안 된다고 버티던 회사가 그럼 법으로 하자고 회사에서 나오니 다음달부터 해 주겠다고 했다. 대신에 앞으로는 휴일에는 일할 생각을 말라고 했다. 기사들은 휴일에 당연히 쉬어야 되지만 월급이 작아 생활이 안되기 때문에 휴일에도 일을 해야만 했다. 난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날 쫓아낼 무슨 건수가 없나 꼬투리를 잡으려고 회사에서 무진 애썼다. 살얼음판을 걷듯이 그렇게 조심했는데 지각을 해서 10일 정지도 먹었다. 마누라는 여기와서도 그런다고 좀 조용히 살자고 애원했다. 난 그럴 수는 없었다. 마누라에게는 미안했지만 알고 있는 한 조용히 일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조용히 일만 하면 할 수록 사업주는 더욱 더 뒷구멍으로 우리들 권리를 후려갈 것이다. 결국 난 조합에서 제명을 당했다. 끈 떨어진 가방이라고 하나? 겉으로 드러난 까닭은 분회장을 몰아내려고 했던 사람의 증인을 서 주었기 때문이라지만 내가 아무래도 껄끄러우니 회사와 분회장과 짜고 나를 제명시켰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월차적치 한다고 3년 동안 휴일근무를 주지 않아 한 번도 휴일날 일을 하지 못했다. 생활이 어렵다고 마누라는 보험회사를 나갔다. 식모살이를 시켰는데 이젠 보험회사까지 나가게 만들었으니 할 말이 없다.  

-시내버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자의 잉여노동을 착취한다는 논리는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시내버스 사업주들이 하는 꼴을 보면 금방 '아, 그런 거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다.
기사들의 쥐꼬리만한 임금을 떼어먹는 방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87년에 연장근로를 오랫동안 떼어먹은 것이 들통나 기사들이 들고 일어나니 못 이기는 척 하면서 떡값 이름으로 얼마씩 주지를 않나 통상임금은 곧 기본급이라고 정해 놓고 임금 계산을 하는 것이나 월차 적치를 시켜주지 않고 수당으로 곧바로 주어 휴가권을 없애 버리는 것도 있다.    

-우리 기사들은 하루에 아홉 시간 일을 한다. 여덟 시간은 기본 근로, 한 시간은 연장 근로인 데 이른바 '따블'이라는 이름으로 하루종일 일을 하면 열 여덟 시간을 일을 하게 된다. 여덟 시간은 기본급으로 주고 나머지 열 시간은 연장근로로 계산해 주어야 하는 데도 열 여섯 시간을 기본급으로, 나머지 두시간을 연장근로로 계산해 주는 방법으로 기사들 임금을 착취해 왔다. 그 모든 것들을 어떤 기사가 소송을 걸어 이기면 그 때 부터 할 수 없이 주는 것이다.

-그 중 대표가 되는 게 근속수당이라는 것이 있다. 근속수당은 회사에 들어온 날부터 해마다 올라야 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87년까지 그 근속수당을 주지 않은 게 들통이 나 그 때부터 주기 시작했는 데 아무리 오래 된 기사들도 그때부터 입사 날짜로 계산을 해 준 것이다. 하지만 임금 협상에서 다른 수당을 없애버리는 수단으로 사업주는 그 손해를 봉창 해 왔다. 난 그 때만 해도 관심이 없어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승무수당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그것도 언제인지 슬그머니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 기사들 월급을 보자. 시내버스 뒷 유리창에 '시내버스 기사 모집' 이라고 선전을 해 놓은 것을 보면 월급 150만원에 여러 가지 혜택이 있고 상여금이니 뭐니 해서 무척 많아 보이는 것처럼 눈속임을 해 놓았지만 파고 들어가면 우습지도 않다. 우선 우리 기사들 기본급은 64만8천5백76원 밖에 되지 않는다.(97년 2월 현재) 거기다 교통비니 근속수당이니 무사고 수당, 연장근로수당, 여러 가지 수당을 합쳐야 월 100만원이 조금 넘는다. 그러니 회사에서 선전하는 대로 150만원이 되려면 휴일에도 일을 해서 휴일근무수당에다 상여금에다 또 퇴직하고 받을 퇴직금까지 다 합쳐야 되지 않을까? 하긴 상여금도 퇴직금도 임금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 하지만 빠진 게 있다. 우리기사들은 빡빡한 운행 시간 때문에 사고가 나거나 딱지를 떼 1년에 한두 번 정지를 먹을 때가 있는 데 그런 '손실임금'은 아예 계산에 넣지도 않는다. 게다가 월급 봉투를 받아 보면 세금이니 고용보험이니 떼는 건 또 왜 그렇게 많은지.

-해마다 임금 협상 때면 어용노조와 사업주가 짜고 '파업'이라는 연극을 한다. 결국은 '극적타결'이라는 '타령'으로 끝을 맺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시내버스에서는 애초에 조합원들이 파업을 할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감히 회사의 허락(?)없이 차를 세워? 그런 연극을 하고 타결을 한 것을 보면 기본급은 쥐꼬리만큼 올려놓고 무사고수당 같은 걸 만들어 '임금 총액' 몇 프로 올렸다고 생색만 낸다. 그 무사고 수당은 이를테면 어떤 기사가, 피해가 한 3,4만원 짜리 사고가 났다고 했을 때 회사에 알리지 않고 자기 돈을 물어내게 하는 효과가 있다. 괜히 회사에 찍히기 싫고 그걸 물어내도 일이 만 원은 남는다는 얕은 계산을 하기 때문이고 또 그런 조그만 사고라도 회사에서는 그 사고 처리를 한다는 핑계로 일을 며칠 주지 않아 '만근'을 안 시켜주기 때문이다. 만근이라는 것은 한 달 30일에서 휴일을 뺀 26일을 채우는 것이다. 그 만근을 못하면 무사고수당, 월차수당, 주휴수당 따위를 받지 못 해 한 달에 20만원 남짓 차이가 나버리니 얼마나 손해인가. 그래서 어떤 기사는 몇 십만원짜리 사고가 나도 자기가 물어내는 사람도 허다하다.

-기사들이 회사에서 먹는 밥도 문제가 있다. 흔히들 기사들은 개밥이나 짬밥이라고 말들을 하는 데 그럴 수밖에 없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밥 값은 천 원 짜리였다. 지금은 올라 천 2백 원 이지만 여전히 짜장면 값의 반도 안되는 천 2백원이니 그게 개밥이지 사람이 먹는 밥일 수가 있나. 그나마 월급봉투에는 찍혀 나오지 않는 회사가 많다. 그게 찍혀 나오면 퇴직금 계산할 때 아무래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복지에 대해서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한 가지만 더 말한다면 노사간에 맺은 단체협약에 기숙사, 휴게실, 양호실 따위 여덟 가지 복지시설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 회사를 비롯한 많은 시내버스 회사들이 그런 복지시설이 단 한 가지도 없다. 한 가지도!  

-시내버스 기사들은 해고당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정식으로 해고 통보서를 보내 자르는 것도 있지만 대개 회사에 찍혀 어떤 건수가 있으면 일을 주지 않아 못 버티고 스스로 나가게 된다. 우선 먹고 살기 힘들고, 법으로 싸우려면 이삼 년 노동일이라도 하면서 버텨야 하는 데 그게 보통 쉬운 일인가. 또 법으로 건 사람들은 다른 곳에 취직하기가 힘들다. 옛날 노비 문서보다 더 무서운 현대 정보망으로 그 기사의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기사들은 법정까지 갈 생각을 아예 하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또 버스표가 아닌 '돈'을 내는 좌석버스에서 아직도 이른바 '삥땅'이라고 하는 걸 치는 곳도 있는데 그런 회사는 이 삥땅을 무기 삼아 조합원을 휘어 잡고 이익을 챙긴다. 기사들이 회사 돈을 삥땅을 쳐 돈을 훔쳐(?) 가져가는데 어떻게 회사가 이익을 볼까? 간단하다. 회사에 협조하는 기사가 삥땅치다 걸리면 슬쩍슬쩍 봐준다. 협조하는 기사란 근로기준법 따지지 않고 나 죽었소 하면서 일만 하는 기사를 말한다. 그런 기사가 삥땅을 쳐서 돈을 가져가봤자 새발의 피다. 봐주면서 대신 '삥땅을 쳤다'하는 진술서를 받아둔다. 그러나 그런 기사가 회사에 밉게 보이거나, 배차 시간이 없다고 불평 불만을 하거나 월차 적치를 하는 따위 무슨 권리를 찾으려고 하거나 하면 그 때는 사정없이 자를 수 있다. 이때 전에 받아 둔 진술서가 무기가 된다. "야, 임마, 도둑놈이 무슨 권리를 찾아?"

-또 조합 선거가 있거나 할 때 조합과 회사는 짜고 그런 사람을 선거 운동원으로 내세운다. 아주 열심히 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그렇게 봐주던 기사도 쫓겨나는 경우가 많다. 언제인가 하면 그 사람이 1년이나 2년이나 햇수가 차기 바로 직전에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꼬투리를 잡아 쫓아내는 것이다. 일이 년 쌔빠지게 삥땅 쳐봐야 퇴직금 못 받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회사는 기사들 휘어잡아 좋고 돈 벌어 좋고. 그걸 보고 꿩 먹고 알 먹고 라고 하던가?

-더 심한 경우는 2, 3년 넘은 사람들 운행하는 차 뒤를 따라 다니다가 삥땅치는 현장을 잡는다. 처음에는 그냥 진술서나 하나 써주고 일 하라고 꼬신다. 기사가 거기 넘어가 진술서를 써주면 "됐어, 내일부터 그만 둬."하고 아예 퇴직금을 한 푼도 안 주고 쫓아낸다. 기사가 그런 법이 있냐고 항의할 수가 없다. 항의하면 "너, 경찰서 갈래?" 한마디만 하면 되니까. 그러니 기사들 삥땅 암만 쳐봐야 회사에서는 이익을 볼 수밖에. 이 밖에도 많지만 그런 거 저런 거 다 쓰자면 한이 없다.

-운전기사들이 모자란다고 한다. 다 헛소리다. 10년전 단체협약이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나빠졌고 10년 전 운행횟수가 그대로 바뀌지 않았다. 근무시간은 늘어났고 월급은 적어 생활하기가 어렵다. 운행시간이 빡빡해 쉴 시간이 없다. 손님들은 버스기사들이 원래 성질이 나빠 '난폭운전'을 한다고 한다. '원래'는 아니지만 '난폭'은 사실이다. 그렇게 안 하면 살벌한 시내버스에서 버틸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버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기사가 딸릴 수밖에. 기사들은 버스회사에서 일하다가 자기가 있던 회사가 나쁜 점이 있으면 고치려고 해 볼 생각은 않고 '더러워서 나간다.'고 한다. 아니면 '치사해서' 나가고.

-그러나 일하던 회사는 그런 기사가 나가면 '아, 우리 회사가 뭐가 나쁘니까 저 기사가 나가는구나' 하고 그걸 절대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사는 더 좋은 버스회사를 찾아 기웃거리지만 좋은 회사가 어디있나. 노동자들이 요구하지 않는 이상 스스로 알아서 해주는 그런 사업주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그렇게 철새처럼 옮겨다니는 기사들과 '나 몰라라'하는 사람, '내 일만 잘하면 되지' 하는 사람들 땜에 시내버스 사정은 점점 나빠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서울버스지부와 사업조합 사이에 '임금협상중'이라고 들었다. 그렇다. 임금협상중인데 조합원들은 돌아가는 사정을 모른다. 그냥 '임금협상중'인줄만 알지 더 이상은 모른다. 사업주들은 협상하는 자리에 나오지도 않는다고 한다. 너 멋대로 하라 이거지. 스스로 무덤 판 꼴이다. 기사들에게 어용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버스지부는 해마다 파업을 무기로 쇼를 해왔다. 그러다가 똑같이 '극적타결'로 끝을 맺고. 그 파업은 지들이 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하는 건데 우리 기사들한테는 교육 한번 없고 홍보 한 번 없다. 사업장마다 노보를 만들어 의식은 깨우쳐 주지는 않고 오히려 방해만 했다.

-지난번 시내버스 사업주들 착복사건 때도 파업한다고 거창하게 벌려서 투표까지 해 놓고 파업한다는 전날까지 아뭇소리 없기에 전화를 해 "파업하는 거요, 안 하는 거요"하고 물으니 남 얘기하듯 기사들이 파업하는 걸로 다 알고 있지 않냐고 오히려 나한테 묻는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 어떤 행동지침도 없고 조합에선 아무런 연락도 없는데 언론에 "시내버스 내일부터 파업!" 하면 기사들이 '어, 내일부터 파업이구나'하고 일을 안 나오나? 이제 사업주들도 배짱 튀길 만 하다. "파업? 어디 한 번 해봐."하고. 

-난 시내버스 13년 째 일해왔다. 변덕이 죽 끓듯해 이것저것 해 봤지만 시내버스에 들어온 뒤에는 내 체질에 맞아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오로지 버스만 했다. 여느 기사처럼 손님들하고 다투기도 하고 옆 차들과 싸움도 하면서 시내버스를 하고 있지만 해고를 당하지 않는 이상 나 혼자라도 사업주와 싸워가면서 정년까지 시내버스를 할 생각이다. 혹시 알아? 내 아들, 내 조카가 나처럼 시내버스를 할지. 내 아들, 내 조카가 시내버스에 들어와 일을 할 때 "야, 그래도 아버지 때문에 시내버스 일하기 좋아졌어." 하는 말을 들어야 되지 않을까?(1997.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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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프라이즈)



어느 소설가가 웃기는 놈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줘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를 두고 한 말이었는데, 난 그 말의 뜻이 궁금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말하자면 그건 아마도 유머와 상식을 아는 녀석이라면 그렇게 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담긴 말일 것이다.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를 둘러싼 이러저러한 소문들이 많았고, 거기에 대한 얘기들이 듣고 싶었다. 다음은 김어준 총수와의 일문일답이다.

하고 싶으면 해야 한다

지승호(이하 지) - 성인용품 판매나 쇼핑몰 운영, 카드 사업 등 딴지의 상업적인 운영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많은 것 같은데요. 그분들에게 해주실 말씀은 있으신가요?
김어준(이하 김) = 딴지는 팩트보다는 팩트를 둘러싼 오피니언이 훨씬 더 중요한 매체입니다. 일반적으로 매체들이 팩트도 전달하지만, 팩트를 둘러싼 오피니언도 사설의 형태로 기사 말미 또는 기사 논조에 집어넣어서 전달하잖아요. 저희는 팩트 자체의 전달은 무시하는 편이에요. 저희의 주요 기능은 팩트를 둘러싼 오피니언에 있고, 팩트보다는 팩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는 태도에 집중해 있는 건데,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도대체 어디다 선을 그어서 전선을 만들어서 전선을 둘러싼 긴장과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를 어떻게 취할 것이냐, 어디에 전선을 두느냐가 저희한테는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과거에는 예를 들어 레드콤플렉스의 극복, 문화의 다양성 이런 걸 주장했었죠. B급문화 이런 것을 주장하면서.
그러나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것도 그래요. "문화의 다양성을 획득하자" 이렇게 말을 하면 뭐해. 그말은 딴지 이전에도 무수히 했었고, 그런 말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사실은. 실질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는 말이죠. 실질적인 변화는 사람들이 변화해야 일어나는 거 아닙니까?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받을만한 힘을 얻으려면 예를 들어 엽기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고, 엽기라는 단어를 퍼뜨려요. 그리고 엽기라는 단어가 상정하는 상황들이 인기를 끌게 만들고, 사람들이 따라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죠. 근데 그 상황이라는 것이 사실은 문화적 다양성이 인정된 상황, 문화적으로 풍성한 현상이나 또는 액션 이런 걸 권장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엽기라는 말이 인기를 끌어서 엽기가 지칭하는 또는 표현하는 상황이 권장을 받아서 자꾸 자꾸 인기를 끌게 되면 뭔가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기는 거죠. 신바람 이박사가 인기를 끄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거죠. 그런 식으로 퍼져나가서 결과적으로 문화적으로 B급 문화까지 포용하고, 하위 문화가 인정받게 되는 거죠. 소위 문화의 다양성을 획득하자는 말은 선언에서 끝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힘을 발휘하고, 사회를 변혁하려면 구체화하려는 전략이나 전술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 - 얼마 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새롭게 똥침 놓을 적을 찾고 있다. 일단 성에 대한 이중의식을 다룰 생각이다. 이름하여 핑크 콤플렉스 극복, 작전명 '난봉'이다"고 하셨는데, 그런 맥락에서 얘기하신 겁니까?
김 = 섹스도 마찬가지예요. 성과 관련된 이데올로기는 우리나라에서는 불구거든요. 유럽만 하더라도 지금 알고 있는 성인식이라든지 성적 자유도, 성과 관련된 자기 결정권의 확고함 이런 것들이 굉장히 오래된 역사를 가진 것 같지만, 불과 20~30년의 역사밖에 안된 거거든요. 그들의 50년대, 60년대의 성의식이 우리와 차이가 없었어요. 68세대가 그 변화의 꼭지점에 있는데, 68세대를 기점으로 사회 변화가 일어나요. 독일 같은 경우에도 60년대에 길거리에서 키스하면 손가락질하고 그랬어요. 물론 잡아가는 건 아니었지만, 소위 말해서 사회변혁을 68혁명 세대들이 이야기하면서 개인의 권리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다뤘거든요. 성에 관한 것, 예를 들어 피임에 관한 것도 정치적인 권리라고 말했단 말이에요. 그런 인식들이 우리가 만약에 80년대에 장정일, 마광수 또는 몇몇 사람들 어깨에 떠맡겨서 그 사람들 개개인들이 희생했던 부분들을 걔네들은 세대 전체가 떠맡았어요. 68세대 전체가 사회에 진출하고, 포르노, 성과 관련된 인식 전반을 뒤집었다는 말입니다. 걔네들이 갈등이 있었어요. 사회적 논란도 일어나고, 기성세대와의 마찰도 있었고요. 분명히 우리와 큰 차이가 없는 갈등을 겪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걔네는 한 세대 전체가 떠맡아서 사회변혁을 이룬 거거든요. 우리도 80년대 비슷한 계기가 있었는데, 사실은 사회변혁, 정치적인 변혁의 담론의 크기에 압도되어서 그런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아니 모양이 안난다고 생각을 했다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결국은 따로 왔죠.
이념의 진보, 생활의 보수라는 것도 큰 맥락에서는 그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개인의 권리도 마찬가지겠지만, 성과 관련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전혀 건드려지지 않고, 70년대, 80년대 그냥 지나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80년대의 결과가 2000년대 정치적 상황이라든가 인터넷 정치 등등의 이데올로기적인 지형을 그리는데 밑그림이 되었는데, 성과 관련된 것들은 붕 떠서 뿌리가 없이 지나갔어요.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게, 성과 관련된 핑크콤플렉스는 레드콤플렉스보다 극복하기 힘들어요. 왜냐하면 레드콤플렉스는 이론적인 바탕도 튼튼하고, 사회 전반적인 공통의 경험도 있고, 도덕적 우위도 이 쪽에 있고, 동지적 연대도 이 쪽이 더 커요. 물리력, 정치력을 실질적으로 누가 장악했느냐, 흔히 말하는 기득권 세력이 오래 쥐고 있었기 때문에 싸움이 치열했던 것이지, 단순한 숫자로만 말하자거나, 보편적인 인식으로 말하자면 승부는 이미 결정지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핑크컴플렉스 같은 경우는 도덕적 우위가 이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하고 싸워요. 개인의 문제로 치환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서구에서 60년대 이후 사회적 권리의 문제, 젠더의 문제가 된 것과는 달리 여전히 개인의 품성 문제로 치부되고 있어요. 밝히는 놈, 아닌 놈, 헤픈 년, 헤픈 놈 차원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논리를 개인이 개발해야 되고, 변호도 개인이 해야 되요. 동지적 연대 같은 것은 당연히 생각할 수도 없고요. 결코 더 작지 않은 문제고 연관이 없지 않은 정치적인 문제인데, 따로 떨어져 있잖아요. 이 과정은 훨씬 길고, 어려울 거라고 봐요. 하지만 변곡점만 넘어서면 사회가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주류 방송국이 방송에서 성인용품이라는 말을 쉽게 하거나, 성과 섹스에 대한 주제를 자유롭게 다루게 되는 순간 레드컴플렉스의 극복처럼 핑크 콤플렉스 극복의 한 징후가 될 거라고 봅니다. 한번에 갈 수도 있어요. 한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고 봐요. 워낙 그 밑에까지 대중들은 와 있기 때문에. 그걸 넘어서려면 오랫동안 축적된 '개인의 품성..' 이런 기타 등등의 편견을 한번에 뛰어넘기 위한 탄탄한 이론이 필요한 거죠. 탄탄한 이론과 동지적 연대가 필요하고, 소위 레드콤플렉스 극복과 같이 압축적으로 걸어가야 되요. 그런데 생각해 보자고요. 그걸 '성이라는 게 이런 거야' 라는 글들을 쓰는 것으로는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자'는 말로 문화의 다양성이 확보되지 않고, 액션이 안일어나는 것처럼 액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해요. 질적인 변화가 있으려면 성인용품이 합법적으로 팔리고, 그럴듯한 회사에서 합법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성인용품회사가 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근데 그게 세금을 내면서 제대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하는 것이 저희한테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거죠. 누구나 써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은 사람은 엄청난 죄의식이나 그런 것 없이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게 취향의 문제여야 한다는 겁니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로 바뀌려면 액션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걸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권장하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고, 혹은 동영상을 만들기도 하는 액션이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지 - 도덕의 문제가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만족시켜줄 자신이 없으면 다른 걸 이용해서라도 만족시켜줘야 하는 건 도덕의 문제도 될 것 같은데요.(웃음)
김 = 하하하. 그건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의 문제라고나 할까요? 일종의. 상호 예의의 문제라고 할까요?

정몽준은 삐졌다

지 - 자신의 성향을 굳이 정의하자면 어떤?
김 = 어떤 식으로?

지 - 좌파, 자유주의자 이런 것 있잖습니까?
김 =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것 같아요. 여러모로. 냉정하게 좌우를 나누자면 우에서도 매력적인 게 많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우파라고 할만큼 우파 특유의 비분강개라든지 하는 게 없기 때문에 우파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웃음)

지 - 비분강개는 좌파 특유의 것 아닙니까?(웃음)
김 = 우리나라는 우파들이 좌파 흉내를 많이 내요. 비분강개하는데 정말 미치겠다니까.(웃음)

지 - 대선 전날 정몽준이 지지철회를 했을 때 조갑제가 핏발 선 보수층이라는 글에서 노골적으로 이번 선거가 적화냐, 체제 유지냐를 가름하는 선거로 규정하면서 선동하기도 했는데요.
김 = 그런 사람들 멋지다고 생각해요.(웃음) 흔들림이 없잖아. 일관되고.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들 의견을 좋아합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화려한 논리를 만들어내는 걸 보면 시인의 상상력을 방불케하는 논리의 점프가 있잖아요.

지 - 확실히 시적인 상상력이 있어요. 대단하더라고요. 정몽준이 지지철회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김 = 그걸 학술적 용어로 얘기하자면 삐진거죠.(웃음)
 
지 - 아, 그건 전문용어 아닌가요?(웃음)
김 = 삐진 건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는 것 같아요.(웃음) 이런 것 같아요. 그릇이 크다, 작다의 문제가 아니라 저는 그런 생각을 들었어요. 미국 영화 보면 간혹 악당들이 심리치료사와 얘기하다가 '아빠가 강간했어요' '엄마가 때렸어요' 어린 시절의 이런 얘기들이 나오잖아요. 근데 정몽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쟤가 도저히 열등감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열등감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속에. 표면적으로 완전히 치료되어 보일지는 몰라도 마음속에 열등감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거죠.

지 - 정혜신씨의 '남자 대 남자'를 보면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엄청난 콤플렉스가 있는 것으로 나오잖아요. 그래서 일등주의,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거라는데, 공감이 가더라고요. 어려서부터 아버지 이병철 회장을 보면서 얼마나 중압감을 느꼈겠습니까?
김 = 자기 감정을 도저히 극복 못하는 거죠. 그것들이 규정해놓은 바운더리가 있을 텐데, 거기서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해야하는 중압감도 있을 것이고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런 결정들을 통해 사회적으로 커지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경력이나 배포나 이런 거와는 상관없는 품성적인 열등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순간적으로 소파 위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상상했어요. '저 자식 울음이 터졌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지 - 요즘 소위 살생부 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 코미디죠. 대중의 성장을 인정할 수도 없고, 근처에서 바라본 적도 없는 거죠. 대중은 이만큼 성장했는데, 의지만 있다면 인터넷 등을 통해 끊임없이 학습되고 있고요.

지 - 일부 정치인들은 철공소 애가 저런 걸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보고 웃고 있는지도 모르고, '철공소 직원이 그런 것 만들었다고 하는 걸  보고 국회의원들이 웃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웃음)
김 =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은 물론이거니와 그 외에도 엄청난 갭이 있는 것 같아요. 인터넷 혜택을 받고 20, 30대를 보낸 사람들이 성장한 정도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갭은 엄청난 것 같습니다.

지 - 지난번 수능 0점 파문 기사에 관해서 사과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지가 무슨 김어준인줄 아느냐는 비아냥도 있었는데요. 김 총수의 '우짜겠습니까? 니가 참아야지'라는 무대뽀식 사과(?)는 사실 상식을 바탕으로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귀엽게(?) 넘어갈 수 있었거든요.
김 = 제가 그때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몰라요. 저희 편집장님이 정확한 내용을 아는데, 가볍지 않은 수준에서는 기획인터뷰를 했는데, 우리 수습기잡니다. 수능시험에서 커닝을 했다는 얘기가 나오나봐요. 그래서 '그게 무슨 자랑이냐' 이런 반응이 나오게 된 것 같은데, 그 뒤부터의 대응이 나빴던 것 같아요. 삭제도 하고, 기왕 쓴 거 뭘 삭제를 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사과도 어설프고, 사과하려면 사과만 하든지, 튕길려면 튕기기만 하든지.

지 - 일부 네티즌들이 '총수의 글을 보고 싶다', '지금 수준 낮은 글들이 많은데, 총수는 그거 알고 있냐?', '기자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아 딴지의 앞날이 걱정된다' 이런 종류의 글들을 올리고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 전반적으로 하향평준화되었다기 보다는 수준이 안되는 글이 올라가는거죠. 예전에는 짤려서 안 올라갈 글이 올라가는 건데, 그건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곧 개선될 겁니다.

지 - 어떤 식으로?
김 = 아직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그렇고, 내부 개혁을 통해서 개선해나갈 겁니다.(웃음)

지 - 딴지 기자들 중에서 월급을 못 받고 나간 사람들이 많다던데요.
김 = 경영상황이 계속 안 좋았었어요. 체불자가 10명쯤 되는데, 지금도 계속 갚아나가고 있어요. 딴지 기자들은 거의 밀린게  없어요.   

지 - 항간에는 '딴지 초기에 좋은 글쟁이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왜 안보이냐? 총수의 인간성이 안 좋은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거든요.
김 = 흐흐흐.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자기 갈 길을 찾은 거죠. 소진되고, 글쟁이가 직업인 사람들이 아니었거든요. 전부다. 회사 다니다가 합류한 사람, 밴드 하다 합류한 사람, 다른 회사에 있다가 합류한 사람도 있는데, 다들 독립했죠. 몇 명은 자기 회사를 하는 사람도 있고, 몇 명은 방송국 같은 데로 나갔고.

지 -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화제가 되는 결정적 장면, 결정적 캐릭터를 쓰는 사람이 딴지 출신이라고 하던데.
김 = 그 친구는 원래 방송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고, 인기가 있으니까 계속 하는 것 같아요. 별의별 이야기가 있다는 건 알아요. 나도. 재미있는 얘기가 많더라고요.(웃음)

지 - 김 총수는 인터넷으로 성장한 새로운 형태의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지식인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의 지식인 비슷한 사람들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증이 '박정희 시대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요. 어릴 때 월남의 패망은 지식인 탓이다. 국론분열의 결과로 나라가 망하지 않았나라고 공포심을 심어준 부분이 있고, 그게 필요한 문제 제기를 막고, 고민을 못하게 하려는 우민화정책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 과거 지식인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디서 어디까지가 지식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식민을 겪었고, 아직도 우리가 탈식민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두 부류로 나눠서 어용이었거나 아니면 오로지 까기만 하는 겁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대중이 지식인들로부터 마음이 떠난 이유는 뭐냐하면, 그 글을 읽다보면 의기소침해지는 거예요. 비판이 중요한 기능이기는 하지만, 비판하는 것 투성이 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자부를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선동을 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는, 미국은, 프랑스는, 일본은, 근데 우리나라는' 그러는 거에요. 계속 듣고 있으면 좇같거든요.(웃음) 맞긴 맞는데, 열받는 거지. 사람들이 야단 맞는 국민학생처럼 느껴지는 거죠. 근데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지적 마조히스트라고 보는데,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맞다, 맞어 그러면서,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비판을 넘어서서 오로지 혼만 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결국 이룬 것은 뭐가 있느냐' 이렇게 연결되는 거죠. 한편에서는 앞서서 나가서 사람을 일깨우고 고생했다, 이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한쪽에서는 훈장선생에게 혼나듯이 혼만 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박노자 글을 계속 읽다보면 '야, 똑똑하다. 외국놈이 어떻게 우리나라를 이렇게 잘 아냐? 이 친구는 역사책을 도대체 얼마나 본 거야'하다가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그래 우리 좇같애. 어쩌라구' 이런 생각이 막 들거든요.(웃음) 그런 면이 있어요. 욕먹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대중들에게 가르쳐주려는 기본적인 태도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대중들과 괴리시킨 큰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방식은 여러 가지여야 하는데, 대중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은 거죠.

진보는 비즈니스다

지 - 딴지일보는 요즘 유행인(?) 자발적 유료화를 할 생각은 없습니까?
김 = 전 자살이라고 봅니다.(웃음) 고육지책이라고 보는데,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데 대한 이해는 100% 하는데, 그건 일종의 구걸이거든요. '자존심이 상한다' 이런 차원이 아니고, 그건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도 정 안되면 그렇게 할 것 같기는 한데, 지금도 먹고살기 힘들지만, 그게 모델이 될 수도 없고, 잠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 - 아까 진중권씨 얘기를 했었는데요.
김 = 진중권씨한테는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라고 권하고 싶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발표하는 식으로 했으면 해요. 그 분이 가진 재능이 대단한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많은 게시판에서 소진되서, 본인이 재밌어서 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지 - 지식인 중에 인터넷에서 끝장을 볼 정도로 글을 쓰는 유일한 분 아닙니까?
김 = 그렇죠. 인터넷으로 시작한 사람일지라도 지쳐서라도 그렇게 안하게 되죠. 전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어요. 인터넷 사이트 운영자가 정치를 하면 잘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요. 기본적으로 여러 사람들 의견을 조율해야 하고, 별의 별 요청이나 욕설 같은 것도 때로는 걸러 듣고, 때로는 반응해야하는 판단을 하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거든요. 사실 일일이 반응한다는 그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니까 안하는데, 진중권씨는 끝장을 보겠다고 하는 것 같아요. 전 그런 방식이 거의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놓는 방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행동을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할만큼 했으니까 개인 홈페이지 만들어서 운영하고 관리하고 하면서 그 안에서 차분하게 소통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웃음)

지 - 한국의 종교문화, 특히 기독교 문화에 대한 비판은 왜 하지 않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김 = 정치, 종교, 섹스 이 3대 주제가 유럽 사교계에서는 거론하지 말아야하는 주제랍니다. 근데 이게 빠지면 뭐가 재밌어요?(웃음)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거 세 개란 말입니다. 근데 딴지가 정치, 섹스만 얘기하고, 아직 종교는 얘기 안하는데, 종교는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종교를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차원이 아니라, 논리를 넘어서는 문제 아닙니까? 섹스나 정치는 논리로 얘기할 수 있어요. 만약에 유사종교와 사이비 종교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이비 종교가 사회적인 해악만 있냐고 하면 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추천하거나 권장하거나 할 문제는 아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거든요. 지극히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겠지만.(웃음) 기독교라는 걸 건드리기 시작하면, 기독교가 쌓아놓은 허구의 세계가 얼마나 어마어마합니까? 이거 장난 아니게 된다고 봅니다.(웃음) 하지만 다음 아젠다로는 한번 해보죠. 뭐. 우리가 기복신앙적인 성격이 강해서 종교라기보다는 주술적인, 기복적인 거라서요. 물 떠놓고 비는데서 한 발도 안나갔다고 보거든요. 기독교가 탄생했을 때 기독교와 우리가 토착화한 기독교는 모양이 다른 것 같아요.

지 - 노당선자가 한겨레 방문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 방문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 한겨레가 오히려 큰일 났다고 생각해요. 이제 어떻게 하나?(웃음) 저는 한겨레를 보면서 진보진영의 한계를 봅니다. 딴지의 한계를 보는 거죠. 오마이뉴스가 하고 있는 자발적 유료화의 한계 같은 것을 봅니다. 발상이 아마츄어적이거든요. 우리편끼리 돈 좀 보태달라는 건데, 사실은 기업이 할 짓이 아니라는 거예요. 냉정하게 말해서 기업의 논리대로 살아남은 조선일보 같은 곳에 부끄러운 일이거든요. 사실은 제가 조선일보 욕하고 그러지만, 나쁜 놈들인 건 맞는데, 기업의 논리로 따지자면, 조선일보의 반의반도 안되는 게 한겨레거든요. 조선일보의 근로자에 대한 복지, 급여를 보면 한겨레 열악합니다. 물론 한겨레는 아직 아니지만, 자발적 유료화 같은 발상은 아마츄어리즘입니다. 그게 우리 진보의 한계라고 봅니다. 솔직하게 비즈니스화하고 살아남고, 자기 생각을 퍼뜨릴 기반을 만들어내고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좌파 진영의 도덕적 올바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 같은 것하고 부딪히는 부분이 많아요. 저도 겪고 있고, 오마이뉴스도 겪고 있다고 보는데, 크게 부딪히지 않으면서 기업의 기본 룰들을 지켜내는 생존가능한 비즈니스 기업이 되느냐에 소위 말하는 진보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아마츄어리즘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 - 도올은 문화일보는 오지 말라는 사설을 썼는데요. 만약 노당선자가 딴지일보를 방문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김 = 오라고 하죠. 우리한데는 득이 되는 뉴스니까.(웃음) 노당선자의 방문은 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해요. 고마움에 대한 표시 같기도 하고, 한겨레 졸라 고생했잖아, 근데 돈 못 벌잖아.(웃음) 이직률이 제일 높아요. 이제는 소위 먹고사는 문제로 가야되는 시점이에요. '얼마나 진보적으로 먹고 사냐? 그게 진보적이기만 하면 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조선일보는 보수적으로 잘먹고 잘산다는 말이거든요. 거기에 비하면 저희나 오마이뉴스나 한겨레나 또이또이로 아마추어입니다.

지 - 그런게 매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지난번에 비판하기 위한 비판으로 상업성을 거론하면 이렇게 말한다고 하신 적도 있는데요. '니가 돈 안벌면서 해봐. 자식아'라고. 대중들이 진보진영의 열악함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는 소비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거든요. 실제 MP3가 아티스트 진영의 앨범을 안팔리게 하는 측면이 있어요. 신해철 말대로 오빠의 사진에 대한 열망이 있는 아이돌 진영의 앨범은 여전히 산다는 말입니다. MP3 다운 받는 건 좋은데, 그러고 나서 '홍보해주는데 왜 그러냐?'라고 오히려 욕하는 것과 '성인용품이나 팔아먹는 새끼들'이라고 욕하는 것이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김 = 이중적이죠. '나는 시민단체에 돈 한푼 안내지만, 니네는 고고하게 살아남아야 해' 하고 욕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오마이뉴스가 자발적 유료화라는 칼을 빼들었을 때 몰리고 몰려서 뽑은 거거든요. 쉽게 뽑을 수 없어요. 그래서 전 걱정했어요.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거든요. 돈을 왕창 투자를 받거나, 수익을 낼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야 되는데, 그 이외에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저는 그 길이 독자들을 위해서도 나쁜 길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가 전반적으로 돈 버는 것에 대해서 치사하게 보고, 옛날에 상행위 자체를 천박한 거라고 봤잖아요. 文을 중시하고. 건강하게 돈을 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우리가 정당하게 돈을 벌지 않고, 편법으로 벌어서 그런 거지. 정당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찬양 받아야 될 행위예요. 권장되어야 할 일이죠. 진보진영의 자기 강박을 빨리 벗어야 합니다. 룰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데, 모양을 만들려고 기를 쓸 필요는 없죠. 한겨레 같은 경우 '저러다 간다' 싶은 게 안타까워요. 정말. 조선일보가 돈을 잘 벌어서도 밉거든요. 진보는 배고파야 한다고 그딴 소리나 하고, 지가 배가 고프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방문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방문할 수 있고, 욕할 수도 있다고 봐요. 한겨레를 보다보면 걱정이 된다는 거죠. 걔네가 진보진영에서는 가장 돈도 많고, 덩어리도 크고, 역사도 오래 되고, 사람들도 많이 모여 있고, 힘도 가지고 있는데, 비실비실 대는 거 봐요. 못 벗어나잖아요. 거기서. 악순환이예요. 사장 뽑는 것도 보세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웃음) 나쁜 의미가 아니라 제대로 된 공산주의도 아니고, 사장을 2년에 한번씩 바꾸고 그러고 있으니.

지 - 예전에 드라마 겨울연가와 관련된 어떤 대담에서 사랑했던 사람을 10년동안 잊지 못하고 기다리는 것은 정신병 아니냐는 말을 했는데, 그런 순애보를 안 믿는 겁니까?(웃음)
김 = 그런 건 아니고, 10년 동안 몰두하면 정신병이죠.(웃음) 그냥 살다가 다른 사람 만나고 연애 하다가 10년만에 다시 만나 보니까 '잊을 수가 없더라' 라고 하면 이해를 해요. 10년 동안 그거만 생각하고 있으면 정신병이지. 그걸 잘했다고 그러니 정신병이지(웃음). 그건 사회 부적응이예요. 연애하고 결혼까지 해서 애 낳고 살다가 다시 만나보니 감정이 되살아나고, 내가 잘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모든 걸 포기하고 그럴 수는 있다고 봐요.(웃음)

지 - 살다가 마흔 넘어서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여자였다' 그런 경우도 있으니까요.(웃음) 노당선자의 광주 95% 득표의 의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전라도 독립해라, 전쟁하자' 이런 얘기들도 나오는데.(웃음)
김 = 사실 독립해야 할 것은 경상도죠.(웃음) 내가 경상도놈이긴 하지만, 이거는 흑인들 독립하라는 말과 같은 겁니다. 막말하자면 그 말속에서 변호해 준답시고 전라도에 대한 가시가 품어져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 흑인들 독립하라는 말과 같아요. 흑인들이 흑인들만 지지한다고. 역사를 봐야죠.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왜 그러는지. 그렇게 만든 가해자들이 독립해라고 한다면 좇까라고 할 수밖에 없죠.(웃음) 저는 어린애들이 그런 소리한다고 봐요. 이제까지 그런 데 관심도 없었거나.

지 - 월드컵에 관련된 책을 준비한다고 하던데, 무슨 내용인가요?
김 = 한마디로 월드컵 만세라니까.(웃음) 근대가 국민국가라는 걸 발명해냈는데, 월드컵이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국민국가라는 걸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축구든 뭐든 간에 그런 미증유의 에너지를 끄집어 내놓고 그것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는 작업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래서 그걸 그 의미를 한번 정리해 보려고요. 근데 만만치 않을 것 같긴 하네요.

# 필자후기

저는 김어준을 둘러싼 몇 가지 얘기들이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했기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랑 많이 다른 부분도 있지만, 김 총수에게 많은 동질감을 느끼는 편이기도 합니다. 그의 입장과 내 입장이 비슷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친한 사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어도 서로의 입장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인터뷰는 인터뷰니까 최대한 객관적인 모습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만약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김 총수의 다음 약속 시간 때문에 40분 남짓밖에 인터뷰를 하지 못했고, 제 인터뷰 자체가 원래 상대방을 호되게 몰아붙이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줬으면 합니다. 사적인 대화 같은 분위기가 강했고, 시간이 쫓겨 허겁지겁 진행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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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21)



한국전쟁 때 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면 다시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조금이라도 고향이 가까운 바닷가에 얼기설기 천막들을 치고 머물기 시작했다가 4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천막들이 그대로 판잣집으로 변하면서 동네를 이룬 곳이 인천의 한 바닷가에 있었다. 어깨를 옆으로 돌려야만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처음 그 동네에 들어선 사람은 대부분 길을 잃고 헤매게 마련이었는데, 그 좁은 길 옆에 나 있는 문을 열면 바로 안방이고 부엌이어서 방문을 열어놓고 사는 한여름에는 온 동네가 한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누구네 집에 밥숟가락이 몇개인지조차 훤히 알고 지냈다.

‘노동과건강연구회’ 해산총회의 눈물

1981년엔가 내 친구 하나가 빈민활동을 한다고 그 동네에 방을 얻어 들어갔는데 이사간 지 일주일이 되도록 그 동네 공중변소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 집집마다 변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로 자동 세척되는 커다란 공중변소가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곳까지 가는 길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어서 열심히 걷다보면 같은 길을 자꾸 맴돌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친구는 하는 수 없이, 세숫대야에 일을 본 뒤에 물을 붓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은 다음, 작은 수채 구멍을 통해 버리는 방법으로 급한 일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1983년 초, 토요일마다 그곳에 찾아와 주민과 노동자들에게 진료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서울대병원의 한 ‘아리따운’ 간호사가 후배들과 함께 나타났다. 김은희(44)씨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10년도 훨씬 더 넘는 세월 동안 나는 노동자들의 건강을 다루는 모든 현장에서 김은희씨를 볼 수 있었다.

1986년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자전문병원 ‘구로의원’이 설립되었을 때에도, 1988년 노동과건강연구회가 창립되었을 때에도, 15살의 나이 어린 소년 문송면군이 단 두달의 온도계 제조작업으로 수은에 중독되어 뼛속까지 시커멓게 썩어들어 사망했을 때에도,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황화탄소중독 때문임이 밝혀지기 시작했을 때에도, 회사 정문 앞 아스팔트 도로 위에 산재사망자의 시신이 든 관을 놓고 백수십일이 넘는 농성을 했을 때에도, 그 밖의 유기용제·카드뮴 중독을 비롯한 산재노동자사건의 모든 현장에서, 나는 유가족들을 붙들고 함께 오열하거나 사람들에게 사건의 내용에 대해 호소하거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노동자 건강의 적’인 권력과 자본을 규탄하고 있는 김은희씨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1998년 12월, 김은희씨가 젊음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노동과건강연구회’가 더 큰 조직으로 태어나기 위해 10년의 활동을 마감하고 해산총회를 하는 날, 사회를 맡았던 김은희씨는 회의장 바깥 길가에서 대성통곡했다. 총회 전까지는 오히려 “더욱 큰 발전을 위해 해산이 불가피하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던 그였지만, 정작 총회 당일에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총회 장소에 들어왔다가는 터지는 울음을 참을 수 없어 다시 뛰쳐나가기를 되풀이했다. 결국 그날 사회를 진행하지 못했다.

그날 밤 길모퉁이에서 오랜 시간 김은희씨를 달래던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 조태상(32)씨다. 두 사람의 나이 표시가 잘못된 줄 아는 이도 있겠으나 아니다. 남편 조태상씨는 아내 김은희씨보다 정확하게 12살이 젊다. 흔히 말하는 ‘띠동갑’(개띠)이다. 이들 부부는 “우리는 완전히 개판이지요. 뭐…”라고 곧잘 농담을 하곤 한다.

지금 민주노총의 산업안전보건차장으로 일하는 조태상씨는 또다른 의미로 우리나라 운동권의 ‘정통파’이다. 대학에서 관련학과(사회복지학)를 전공했고 노동운동단체가 신문에 낸 광고를 보고 찾아가 공개채용되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을 시작했다.

사건의 단초, 송광사의 저녁 예불

초등학교 6학년 때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으면서 “간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은 뒤, 자라는 동안 그 꿈이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가 결국 간호사가 된 김은희씨나, 고등학교 때 일찍이 한해에 중·고등학생이 500명씩이나 자살해야 하는 이 ‘썩을 놈의 제도권교육’에 문제를 제기하고 노동현장에서 일하다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한 조태상씨가 가지는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에 인생을 거는 ‘외곬’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지극히 세속적인 관심을 한번 풀어보자. 솔직히 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먼저 눈치챈 주변 인물들 중 한 사람이다. 몇해 전, 여럿이 아랫녘 남도지방으로 노동조합 교육을 간 일이 있었는데, 올라오는 길에 두 사람이 송광사의 저녁 예불을 보고 싶다고 일행에서 빠졌다. 그때는 몰랐으나 몇년 뒤에 나도 송광사의 장엄한 예불을 보고 그 칠흑처럼 깜깜한 길을 걸어내려오는 경험을 해본 뒤 깨달았다. 코앞이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어두움이 고체의 질감으로 주변을 감싼다”는 표현이 실감나는 숲길을 순전히 동물적 감각과 본능에만 의지한 채 걸어내려오는 경험을 하고나서 깨달았다. 김은희와 조태상 두 사람이 손을 마주잡은 채 이 길을 함께 걸어내려갔다면 이것은 분명히 ‘사건’의 단초가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만일 그날 저녁에 내려가지 않고 장엄한 예불을 목도한 뒤에 그 감격을 품고 산사에서 함께 잤다면 그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는 것을…. 하여, 둘이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깜짝 놀랐으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두 사람도 최근에 와서야 “그날 이후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형성된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한다. 그러니,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몸달아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어서 빨리 송광사의 저녁 예불을 찾아가볼 일이다.

대원칙, 매일 밤 만난다!

그러나 12년의 세월을 뛰어넘어야 하는 사랑이 어찌 쉬웠으랴. 조태상씨가 먼저 김은희씨에게 명확하게 심경을 밝힌 뒤, 두 사람은 “한강 주변을 걸으며 함께 많이 울었다”고 했다. 소설책 몇권은 됨직한 긴 얘기 중에 하나만 소개하자. 조태상씨가 ‘연애’ 당시 지켰던 원칙들 중에는 “매일 밤 김은희와 만난다”는 것이 있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김은희씨였지만 조태상씨는 어떻게 해서든 실제로 김은희씨를 매일 밤 만났다. 그런 지극한 사랑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김은희씨는 지금 ‘서울노인복지센터’의 기획홍보 일을 맡고 있다. 어찌 보면 인생의 대전환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딱히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노인들은 일제 말, 한국전쟁, 근대화 등 우리 역사상 중요한 시기의 모든 고생을 감당한 세대이다. 그들이 일흔살쯤 되었을 때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우리 세대가 당연히 해야 할 도리이고, 그것은 노동자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에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 자신의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루 5천명의 노인이 다녀가고 2천명에게 무료식사를 제공하는 그곳에서 김은희씨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노동자’와 ‘노인’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공통점은 모두 소외된 계층이라는 것이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두 사람의 관심은 일생 동안 지속될 것이다. 내가 볼 때에는 그것이야말로 12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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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겸손, 겸손, 겸손 이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요?"

 

 

 

 

아침에 전철을 타고 오면서 작년 11월말 한겨레 대담기사로 '송건호언론상에 강준만 교수를 선정한 이유'를 읽었다. 언젠가 프린트한 걸 가방에 계속 넣고만 다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사실은 바삐 전철에 오르느라 매점에서 조간신문을 살 시간이 없었다) 읽은 것인데, 거의 두달 전 기사이지만 '시사적인' 내용이므로 귀가하기 전에 인용/정리해두려 한다. 이런 기사도 저작권 보호를 받는 것이므로 전문을 퍼오진 않고 부분 인용/발췌를 하면서(사실 이런 '인용'을 가장 잘,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강준만 교수이다) 드문드문 몇 마디 덧붙이고 하겠다. 대담은 '강준만 입문'으로서 아주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16년 동안 122권의 책을 낸 '우리시대의 볼테르'에 대해서 이번에 처음 상이 주어졌다면 과소한 듯도 한데, 이 기회에 '강준만의 시대'를 잠시 돌이켜보고 싶다(나는 강준만을 지지하지 않을 때라도 그의 작업만은 적극 지지한다). 비록 내가 적격자는 아니더라도.

나는 단행본으로 나온 그의 책을 한두 권 정도밖에 갖고 있지 않으며 다만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인물과 사상>만은 여러 권 사서 읽은 적이 있다. 그 자신은 '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하지만, 내가 안티-조선에 동참하게 된 건 순전히 그의 '운동'  덕분이었다. 더불어, 아마도 그와 '인물과 사상'의 주도적인 문제제기에 따라 '문학권력'과 '주례사비평'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읽어보기도 했다. 여러 모로 도움을 받은 셈이다. 이건 겸손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제목으로 붙인 "겸손, 겸손, 겸손 이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요?"는 그의 수상소감문이며, 나는 과중한 겸손을 오히려 경계하는 사람이기에. 기사/대담의 중반으로 건너뛰겠다(기자와 강교수의 주거니받거니이다).

 

 

 

 

-언론학자로서도 훌륭하지만, 사회과학자, 정치평론가, 행동가로서도 폭넓게 활동했는데, 스스로를 언론인으로 생각하나?

=언론인까지야. 대중적 글쓰기하는 언론학자지. 나를 언론인라고 하면 과찬이고, 전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물론 언론인 역할 하면 좋겠지.(*언론학자 강준만의 대표작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10년쯤 전에 보던 책들은 <언론플레이>나 <대중문화의 겉과 속> 같은 책들이었다. 과조교 시절이었는데, 과방에는 언론고시생들이 읽던 책들이 나뒹굴고는 했고 '강준만'도 그런 책들에 속했다. 고시에 뜻이 없었던 나는 그냥 훑어보는 걸로 충분했다.)   

-안티조선의 주요 활동가였는데 최근 언론상황에 대해서는 별로 발언하지 않는 것 같다. 최근 한 글에서 조중동의 문제에 대해서는 성실함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조중동에 대한 생각은 같은데, 싸운 뒤에 이유를 생각해봤다. 내 생각은 국민이 호응을 안했는데, 그것은 강고한 ‘정치·경제 분리주의’ 때문이다(*나로선 적극 '호응'했지만, 원래 조선일보의 독자가 아니었으므로 실상 안티-조선일보 운동에 내가 보태준 건 별로 없다. 나는 주로 한겨레와 한국일보를 본다. 보다 정확하게는 김훈과 고종석의 독자였다. 두 지면의 사설들에 동의하는 건 아니므로. 강준만 교수는 요즘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언론학자 강준만은 한국사회에 조선일보의 해악을 폭로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맘때쯤 나는 강준만이란 이름과 다시 만났고, <인물과 사상>의 비주류 독자가 됐다. 매번 사읽은 건 아니었으니까).

 

 

 

 

유권자로서는 민주세력 찍지만, 신문은 안 바꾼다는 것이다. 어떤 민주 인사가 공직 들어서면 재산 공개했는데, 왜 돈이 그렇게 많은가(*다른 말로 하면, 좌파는 부유해도 되는가, 이다. 이건 일종의 '수행적 모순'이다. 기사가 달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는 일부 노조위원장들의 사례도 마찬가지이다. 네그리의 말대로, 혁명의 원천은 '가난'이고 '빈곤'이다. 결코 '의식'이 아니다. '부자 아빠'에의 유혹과 '자발적 가난' 사이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한다는 것을 감안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또 주류 영합주의가 강하다. 내 삶의 경쟁력에 대한 판단이 정치적 선택과 다르다. 주류 매체고 영향력 있다는 그 판단이 크다. 이것이 가장 세고 주류라는 것이 한국인 특유의 경쟁력주의를 부추긴다. 기러기 아빠가 일반 국민뿐 아니라, 개혁·진보 인사에서도 있다. 진정성 갖고 운동해도 신문 안 바꿨다.

이제 경제를 치고 들어가야 한다. 이재현씨가 어느 글에서 “진보적 진영에서 문화운동하고 그러면서 경제를 중시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정확한 말이다. 경제는 감시 대상일 뿐이고 스스로 ‘경제 플레이어’라고 생각지 않는다. <한겨레>같은 언론도 재벌들로부터 독립해 신문사를 꾸려가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에 치중한다. 한국 경제를 더 높은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 총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일탈·비리만 다루지 주도적 플레이 안 한다. 그러면 영원히 조중동에게 깨진다. 엉거주춤하지 말고 분명히 해야 한다. 다수 국민이 어리석은 게 아니라, 경제적으로 보수적이다(*때문에, 아직도 국민의 '어리석음'이나 탓하는 이들을 나로선 신뢰할 수 없다).  

-최근의 신문법이 시행됐고,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신문발전위원회, 신문유통원이 활동에 들어갔다. 이런 기구들이 신문시장 정상화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여러 가지로 불만족스럽지만, 기대가 있다. 이런 기구들로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에는 의문이 있다. 왜냐면 한국 독자들이 가진 묘한 체질이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광신도 노무현 광신도가 <조선일보>를 본다. 그런데 한국적 상황에서 합리주의다. 왜? 노가 개혁한다고 나서도 주변 핵심 인사들의 재산 규모가 역대 정권 비해 적지 않았다. 경제적인 문제는 보수고 진보고 다르지 않았다. 중요한 문제다. 사람들은 경제가 중심이고 가외로 개혁을 이야기한다.

진보적 입장의 정통 좌파들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신자유주의라고 싸잡아 비판한다. 한편으로 노 정부 요직 인사들도 자기 재산 다 챙기고, 국민들은 신문에서 아이들 논술과외 서비스도 받아야 하고, 부동산·증권 투자 정보도 얻어야 하고, 각종 광고도 봐야 한다. 그런 신문이 유리하다. 경제는 이렇게 간다.(*그러니까 생각도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비판'론'이 아니라 '현실'에서부터.) 앞서 안티조선 운동 하면서 모멸을 가하는 공격도 해봤다. 소용없었다. 북·서유럽 복지 국가 모델? 나 죽을 때까지 안 된다고 본다. 자원 없고 수출로 사는 나라를 어떻게 북유럽 나라들에 비할 것인가?

 

 

 

 

우리 나라 사람 경제적 보수성을 낮은 곳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택시 타보면 운전기사들이 결코 무식하지 않다. 물론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도 많지만, 지혜를 갖고 있다. 장하준 교수 글에 대해 여러 말 많지만, 그 정도 글을 갖고 이야기해야 한다. <한겨레>가 장하준 정도의 시각을 받아들인 것만 해도 대단하다(*그런 식으로 대단한 건 창비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을 아는 체하는 인문·사회학도들이 경제를 모른다. 경제에 대해 뭘 알아야 국민들 마음 속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다.(*경제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건 대개 '실물경제'에 대한 무관심이고 갈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에서부터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에 이르기까지 읽느라고는 읽었다. 가정경제에 도움이 안 됐을 뿐이다.) 

-<한겨레>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아직 창간 정신을 잊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때 초심을 갖고 있는 게 문제다. 창간 당시는 기적이고 감동이었다. 독재정권에게 대항했던 이들이 자체 매체 가진 감격이었다. 지금은 민주적인 정권이 둘이나 나왔는데, <한겨레>가 비판을 넘어서서 의제를 스스로 만들고 끌어가지 못하고 있다. 과거 저항세력이 가졌던 견제·감시·비판 수준이다. 반면 조중동은 의제 설정을 멋대로 하지만 한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하고 독자들은 익숙해 있다.

국가보안법 처리 문제 때 경호권 발동 문제가 핵심이었다고 본다. 유시민 의원·리영희 선생도 경호권 발동 반대했고, 열린당 그것을 망설였다. 당시 <한겨레>는 때묻히지 않으려고 원론 수준으로만 얘기했는데, 너무 무책임한 것이다. <한겨레>가 경호권 발동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된다, 안 된다는 이야기 마당을 펼쳤어야 했다. 경호권 발동 안 된다는 리영희 선생 얘기도 싣고, 또 예외적으로 경호권 발동해서 보안법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다뤘어야 한다. 기사로 다룰 수 있고, 나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야 고민하는 사람들이 그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다. 유시민 의원은 다 끝나고 국회 사망선고하면 뭐하나? 한겨레가 썼으면 여야가 심각히 고려했을 것이다. <한겨레>는 고급지로서 어젠다에 대한 영향력이 있다. 전술·방식의 차이는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

 

 

 

 

국가보안법 말고 다른 것에도 적극성이 없다. 진보세력의 문제점 안 다룬다. 조중동 따라서만 조금 다룬다. 그러다 보니 어젠다를 다 넘겨준다. 정권 주류가 비주류적으로 일관하듯 <한겨레>도 그런다. 나는 그걸 아웃사이더 체질이라고 본다. 아웃사이더는 고귀하다. 권력·부에 욕심 없고, 옳은 소리하고 저항하고 감시·견제한다. 그러나 인사이더는 집단을 어디론가 끌고가면서 궂은일, 더러운일 하는 것이다. 아웃사이더는 욕할 것 많지만, 인사이더는 어렵고 욕먹을 일이 많다.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 인사이더는 책임져야 한다. 아웃사이더는 휘말리지 않고 옳고 아름다운 이야기만 한다. 메이저로서 아웃사이더 하면 좋겠지만, 조중동 70%가 인사이더 하는데, 마이너만 아웃사이더 한다? 결단이 필요하다.

정파성을 강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 비판도 더 하고, 개혁진보세력을 더 세게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의제를 만들어 가야 한다. 기사 쓸 때는 진보세력과의 유대도 끊어야 한다.(*2000년부터 격월로 간행되던 <아웃사이더>가 결국 폐간됐고, 나에겐 <다시 아웃사이더를 위하여>란 인터뷰집 두 권만이 남았다. 갖고 있는 책인 줄도 모르고 2,000원 떨이판매 하길래 또 산 것. 어쨌거나 '고귀한 아웃사이더'들이 많아지면 좋겠지만, 정의상 '아웃사이더'는 '소수'이며, 세상을 바꾸기엔 역부족이다. 해서, 보다 더 많아져야 할 것은 '인사이드 아웃사이더'가 아닐까 싶다. 자신도 이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의식 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건 기만이다.)     

-최근 칼럼에서 신문산업이 지식산업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신문시장은 지금 조중동이 문제가 아니다. 조선·동아는 그래봐야 거대자본의 소유는 아니다. 그런데 앞으로 인터넷 언론 기업 성장하고 통신업체 중심으로 매체 융합 나타나면 엄청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이를테면 한나라 집권하면 케이비에스2·엠비시 민영화 안 할 것 같나? 신문이 살아야 민주주의가 산다. 루퍼트 머독 식의 거대한 미디어그룹이 나오면 현재의 조중동보다 민주주의에 더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아무리 당파적이니 편파적이니 해도 신문이 살아남아야 한다. 살 방법은 지식인 전통을 살리는 것이다. 아직 기자에 대한 신화가 있다. 그것을 살려서 지식 산업쪽으로 힘을 펼쳐야 한다. 거대 기업들속에 편입되면 절대 안 된다. 비교 우위는 지식 산업인데, 신문업계 선두주자인 조중동은 정권 죽이기에 몰두하고 있으니 큰 일이다. 제 무덤을 파고 있다.

 

 

 

 

-엑스파일 사건으로 이건희·홍석현에 대한 수사가 진행중이다. 최근 책 <이건희 시대>에서 삼성의 문제에 대해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벼락공부하지 않으려면?

=한국 사회에 ‘홍수민주주의’가 있다. 지난 민주당 분당에 민주당의 책임만 있나? 삼성에 대해서도 그렇다. 문제가 있으면 평소에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평소에 잘못된 것을 잘 눈감아 주다가 건수 생기면 국민 모두 짱돌 하나씩 들고 나선다.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처리하는 홍수식이 화끈한 맛은 있다. 그런데 홍수 났을 때 사람들이 신중하게 하겠나. 우격다짐식이다. 아무리 우리 체질이어도 이제 와서 삼성만 죽일 놈이라고 하지 말고 우리도 공부해야 한다. 평소에 대학 총장들도 삼성 포함한 재벌 돈을 끌어와야 한다. 재벌 은전 받는 것이다. 삼성의 문제를 평소에 이야기하면 문제가 덜 할 텐데, 이벤트성이 강하다. 한 번 걸리면 홍수 맛좀 봐야 한다는 쏠림이 강하다.(*이 '홍수민주주의'에 대한 지적은 예리하며 유익하다. '한국의 민주주의' 교과서에 들어갈 만한 항목이다.) 

-이번 사건에서 보면 <중앙일보>는 또다른 삼성이자, 언론계의 실력자다.

=<중앙일보>가 조·동에 비해 개혁세력으로부터 덜 얻어맞는다. 유시민도 조·동은 독극물, <중앙>은 불량식품이라고 했던가? 남북문제에서 비교적 자본의 합리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조·동은 자본의 합리성도 없이 생래적 거부감으로 접근했다. 한국사회에서 민족문제 다루면서 자본의 위험이 가려졌는데, 사실은 운동권도 그렇지만 민족문제와 자본문제가 쌍벽이다. 중앙의 잘못이 제대로 부각이 안 되고 있다. 조·동이 중앙을 키운 셈이다. 아마 조동이 남북문제 시각 바꾸면 중앙 입지가 위축될 수 있겠다.

-인물과 사상의 중단과 인터넷 시대와 무슨 관계가 있나? 휴대전화도 쓰지 않는데?

=최근 <한겨레21>에 휴대전화 관련 글을 썼는데, 일종의 균형잡기 지적이었다. 휴대전화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본에 친화적이다. 새 기술에 대한 거부감은 자본주의를 보는 시각과 관련 있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고 대중문화 자체를 좋아한다. 딴따라 끼도 있다. 영화도 엄청 좋아한다.

 

 

 

 

-전북 전주에 살고 전북대 교수를 하고 있다. 지방이라는 것은 언론사도 그렇고 한국 사회의 또다른 문제라고 했는데?

=내부 식민지이론을 믿는다. 여기는 식민지 체제인데, 열이 나지 않는가? 서울서 국회의원하는 지방의 엘리트 계층이 여기 사람인가? 여기를 대변하는가? 여기 사는가? 아이들이 여기 있나? 다만 여기 근거로 제 입신양명하는 것이다. 이 신문 제목 좀 봐라. 지역 언론이 정말 이러면 안 된다. (전북 지역의 신문 두 개를 보이며) “노대통령 전북홀대 심각” “전북 홀대론 확산 분노” 언론은 이런 보도 좀 하지 말고, 중앙정부는 지역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이 지역 엘리트들이 이런 문제 생각하나? 인구가 계속 줄어든다. 60년대 250만명이 넘었는데, 최근 190만명선이 무너졌다. 내가 처음에 전북대 와서 지역 문제 갖고 혈압 좀 올렸다. 그런데 나만 성격 이상한 놈으로 찍혔다. 가만 보니 이 곳 사람들에게는 체념의 지혜가 있었다. 괜한 소리 했다가는 “억울하면 출세해라” “서울 못 가서 배 아파서 그러냐” 그런다. 최근에 지역 신문 발전기금 나눠주는 것도 그렇다. 지방 언론사 사주가 토호라고 해서 매우 엄격한 기준 적용해 특정 지역 언론이 집중 지원받았다. 그런데 토호와 재벌이 다른가? 재벌은 선진적이라서 좋고, 토호는 비리 복마전이라서 나쁜가? 재벌처럼 토호도 장단점이 있다. 그런데 지역기업이 잘 되면 악질로 본다. 그 시각의 이중성을 지적하고 싶다.

좋은 지역 신문은 경제력에 달렸다. 어느 지역에는 <한겨레>만한 매출을 올리는 신문사가 있고, 대부분 다른 지역에는 그런 신문사가 없다. 기업의 건전성은 경제력에 달렸다. 이렇게 기준 만들다 보니 지원이 일부 지역에 몰렸다. 사람도 같다. 빈곤층을 볼 때 게으르고 못난 사람이라고 봐야 하나. 구조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양면을 봐야 한다. 지방을 썩어빠진 것으로만 보는데, 그렇지 않다. 이런 얘기하면 지방에 오래 있어 물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지방대 교수들도 지방언론사를 욕한다. 그리고 지방대에서 좋은 학생은 다 서울로 편입가고 교수도 서울로 떠난다. 지금은 무조건 서울에 있는 것이 경쟁력이다. 안면 몰수하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 지역안배는 안 된다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지역 안배가 지역 균형발전 정책이다.

-지역을 살리기 위해 균형발전 정책, 행정도시, 기업도시, 공기업 이전 추진중이다.

=노 정부가 요만큼 지역 균형발전 하는 기미 보이더니 수도권을 풀었다. 지방에 공기업 이전 계획 발표하고 수도권에 공장 신·증설 허용한 것은 지방에 어음주고 수도권에 현찰준 꼴이다. 균형발전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나?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지역 균형발전 정책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데 서울쪽은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신도시, 공장 신·증설 풀어줬다. 갑갑하다. 인구가 아무리 수도권에 몰려도 아직 지방이 다수다. 전북 국회의원들은 서울서 아이들 교육시키고 또 본국(?)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 지방은 묘한 이중 식민지 구조가 돼 있다. 이런 이야기하면 그러면 당신 애는 공부 잘 해도 지방대 보내겠냐고 말한다.

-서울대 문제 책도 쓰고 해법 제시했는데, 잘 바뀌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국공립대 통합안을 제시했는데?

=국공립대 통합은 정말 좋은 안인데, 민주노동당 집권해야 된다. 손호철 교수가 민주노동당 쓴소리 강연 갔다가 이래서는 집권 못한다고 호통쳤다고 한다. 진보진영 쓴소리 경청 했는데, 손 교수가 2010년대에 집권 못한다고 그랬다. <한겨레 21>하고 서울대 문제 갖고 토론도 했는데, 서울대 개혁 얘기하는 사람도 학벌에 대한 의견이 달랐다. 나는 정운찬 총장처럼 서울대와 연·고대 비중 축소해서 가자는 것이다. 명문 일류대도 경쟁의 필요성이 있다. 주요 권력기관 출신대를 봤더니 3개 대학이 50%를 먹어버리는데, 이것은 안 된다. 적어도 수십개 대학이 경쟁할 수 있는 체제는 돼야 한다. 그래야 대학에서 공부한다. 대학들이 공부하는 데 드는 돈 아끼려고 고교등급제를 하는 것이다. 또 고교 등급제보다 대학 등급제가 더 큰 문제다. 기업에서 원초적 차별 가하니 명문대 아닌 대학생들 공부할 맛이 안 난다. 노 대통령이 그런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사법고시 식으로 경쟁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시 덕에 노 대통령도 나온 것 아닌가?

 

 

 

 

-강 교수가 펴낸 책을 검색해보니 122권이었다. 왜 이렇게 많이 쓰는가?

=내가 창피해서 언제부터인가 권수를 세지 않는다. 나는 책을 작품으로 생각 안한다. 주위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역작을 내라고 하는데, 나는 아니다. 나는 책 내는 쪽으로는 디지털화돼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예전에 책이 귀할 때는 밟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책을 함부로 본다. 메모도 함부로 하고, 소모되는 것으로 본다. 물론 철학과 같은 분야는 다르다. 이론 분야는 작품이 나온다. 그렇지만 우리 신방과 쪽에서 작품이 나오겠나? 흐름이 빨리빨리 지나간다. 한 책을 오래 쓰다 보면 이미 낡은 것이 돼버린다. 내게 책 내는 데 불성실하다는 비판도 있다. 물론 공을 들일 수 있지만, 이 정도면 된다는 생각이다(*나는 다른 고종석, 김훈, 홍세화 등과 달리 강준만에게는 '문체'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 '문체없음'은 사실 그의 전략이기도 한 것. 더불어 '소모되는 것'을 자임하는 그의 미덕이기도 하다. 적어도 문체적으론 그는 나르시시즘으로부터 자유롭다.)   

내게 책 쓰는 것은 중독인 것 같고, 일종의 취미생활이다. 사명감 같은 게 없고, 누구는 내가 돈 때문에 많이 쓴다고 하지만, 오히려 거꾸로다. 자주 내는 것은 덜 팔려서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띄엄띄엄 내는 게 돈벌이로는 낫다. 나는 그냥 책 쓸 준비하고 책을 내는 게 취미다. 매우 재미있다. 요즘은 한국인의 특성을 범주화하는 책을 쓰고 있다. 이를테면 쏠림, 홍수민주주의, 소용돌이 현상, 빨리빨리. 냄비 근성 등 한국 상황을 보여주는 개념들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이 재미있다고 하는데, 내겐 책 쓰는 게 그 재미다.(*책을 읽고 쓰는 재미에 나도 공감한다. 책에 대한 구속 덕분에 나는 '온라인 게임'과 '드라마'로부터 자유롭다.) 

-그렇게 쓸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따로 있나?

=무작위로 책을 보다가 재미있는 내용이 나오면 입력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메모한다. 또 신문 보다가 사례가 나오면 오려놓는다. 그런 것들을 각 주제별로 파일에 입력한다. 지금도 이미 쓸 책들이 정리돼 있다. 자료 입력을 미리미리 했기 때문이다. 보통 10~20권씩 진행한다. 주제별로 입력해놓은 것이 20권 정도 분량이 된다.(*이런 류의 페이퍼도 아니고 단행본들을 20권씩 진행하다니! 그나저나 그런 식으로 책이 쏟아지면 우리는 '강준만의 시대'를 언제쯤 면하게 되나?)

06. 0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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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레시안 2003-03-14)  
 
  인권운동가 서준식씨가 인권운동을 주제로 15년간 진보주의자로서의 삶을 기록한 '서준식의 생각' 을 펴냈다. 저자가 겪은 17년의 감옥살이를 기록한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이 폭력으로부터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했던 한 청년의 기록이라면 이번에 펴낸 '서준식의 생각'은 한국을 대표하는 인권운동가 서준식이 여러 지면에 인권운동을 주제로 쓴 글들을 모은 책으로 세상에 나온 이후 진보주의자로서 신념을 몸으로 실천해 온 지난 15년간의 살아있는 기록이다.
 
  양심과 진실의 인간
 
  어린 시절 일본 땅에서 "나는 조센징"임을 스스로 고백했다는 서씨는 양심과 진실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고, 그런 순수함은 "누구도 인간의 내심을 간섭하고 재단할 수 없다"는 신념을 단련시켜 군사정권 시절에 집요한 사상전향에의 강요와 잔인한 고문을 견뎌내게 했다. '서준식의 생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비굴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떳떳하게 '사회주의자'임을 밝히는 그의 용기다.
 
  "이국에서 인종차별과 싸우며 스스로 '조센징'임을 고백했던 16살 소년의 행동이 그랬듯이, 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사상의 자유가 억압되는 이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밝히는 나의 행동 또한 병든 사회의 광기에 맛서는 자유로운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이라고 믿고 싶다. 누가 이렇게 묻는다. “너 사회주의자냐?” 나는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담담하게 그리고 어깨에 힘을 빼고 “그래, 나 사회주의자.” 이런 사회가 빨리 오기를 소망한다."(‘서준식의 생각’, 99쪽)
 
  몸으로 쓴 글
 
  감옥살이는 서씨의 마음속에 ‘글’에 대한 강렬한 욕구와 희망만큼이나 인간의 실제 삶을 개선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껍데기 글’에 대한 경멸을 심어주어 그로 하여금 글쓰기를 망설이게 한 듯 하다. 이 책에 담긴 서씨의 글들은 글을 쓰기 위해 쓴 글이 아니고 인권운동을 위한 방편으로 쓴 활동의 증거물들이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감각으로 쓴 글이 아니라 현장에서 부딪히고 몸으로 쓴 글인 것이다. 머리로만 글을 써대며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에 대한 저자의 경멸은 차갑고 냉소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기본적으로 폭력의 원리가 관철되어 있으며 이 사회는 아직 글로써 사회가 변할 만큼 신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땅 위에 그어놓은 금 안에서만 놀아라!’ 이것이 이 사회의 룰이며 그 금을 넘어가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잘나가는’ 글쟁이들의 글이란 ‘금 안에서만 노는’ 글이다. 이성이 폭력적 구조의 벽에 부딪치는 지점부터는 어쩔 수 없이 ‘입’이 아닌 ‘근육’이 현실의 어둠을 뚫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모든 글쓰기는 미망(迷妄)에 지나지 않는다."('서준식의 생각', 34~35쪽)
 
  ‘딸들에게’부분 압권
 
  1997년 제2회 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한 ‘레드헌트’를 검찰이 이적표현물로 규정하고 당시 집행위원장이었던 저자는 국가보안법위반을 비롯한 다섯 가지 죄명으로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된다. 당시 추운 겨울감방에서 사랑하는 두 딸에게 보낸 여덟 통의 편지는 작은 이야기들을 이루며 따뜻한 감동을 준다.
 
  "아빠가 힘센 아저씨들 여러 명에게 잡혀갔던 날, 수갑 차고 잡혀가는 자동차 안에서 뭘 생각했는지 아니? 너희들 생각이었다. ‘아차! 보슬이 자전거 바퀴에 바람 넣어 주어야 되는데……. 참, 혜수 자전거도 비를 맞지 않도록 자전거 주차장 안쪽으로 들여놓았어야 되는데…… 이렇게 잡혀가면 안 되는데…….’ ‘에이 참, 이렇게 잡혀 갈 줄 알았으면 보슬이랑 아침공부를 더 해 둘 걸. 혜수한테도 공부를 가르쳐 줄 걸. 에이 참, 동전 가지고 하는 마술도 가르쳐 주고 올 걸. 에이 참! 에이 참!’ 그리고 지금 차가운 마루방에서 혼자 앉아서 뭘 생각하는지 아니? ‘지금 여기서 나갈 수 있으면 맨 먼저 뭘 하지? 내 친구랑 술 마시러 갈까? 아니야! 맨 먼저 보슬이 자전거에 바람 넣어주고 혜수 자전거 들여놓고, 그런 다음에 내 친구를 만나야지!’"(‘서준식의 생각’, 323쪽)
 
  새로운 책을 펴낸 서준식씨를 13일 저녁 혜화동 그의 작업실에서 만나 새 책의 내용과 그의 근황을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서씨와의 인터뷰 전문.
 
  "서준식의 생각은 90년대 한국인권의 파노라마"
 
  프레시안 : 이번에 책을 낸 동기는?
  서준식 : 오래 전부터 책을 내자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운동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 운동의 필요로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예전에 글을 쓰는 일에 흥미를 느끼고 교도소에 있을 때는 ‘나가서 소설을 써 보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프레시안 : ‘서준식의 생각’은 어떤 책인가?
  서준식 : 90년대 한 인권운동가의 희망과 좌절을 담은 책이다. 90년대 한국인권의 파노라마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프레시안 : 그럼 ‘인간 서준식’이 지금 생각하는 바는 무엇인가?
  서준식 : 내가 처한 자리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생각을 집중하고 있다.
 
  프레시안 : 이젠 인권운동의 현장에선 약간 물러난 것으로 안다.
  서준식 : 인권운동가 중에서 내가 나이가 제일 많은데 내 덕이 부족했다. 내가 뭔가 자리를 탐낸다는 오해를 받기도 할 때는 정말 참담했다. 책에 그 이야기도 나온다. 또 인권운동사랑방의 후배들도 역량이 성장했다. 나는 이제 후배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주고 이론적인 부분을 공부시키고 연구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인권공부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 그동안 장기수, 양심수문제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
  서준식 : 1988년에 밖에 나오니 세상이 장기수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처음 나와서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소설을 쓸 계획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알리지 않으면 ‘배신’이라고 느껴 활동을 하다가 그것이 인권운동이 됐다. 민가협에서 2년간 활동을 하고 그 후 인권운동사랑방에서는 수인들의 인권이나 다양한 소수자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됐다.
 
  프레시안 : 책에 조카에게 설명하는 형식으로 된 고문장면은 그 설명만으로도 읽기가 끔찍할 정도다. 투옥 중 그런 일을 진짜 당했나?
  서준식 : 비녀 꽂기, 개밥, 곤봉 등 거의 대부분 직접 당했다. 이젠 잊으려고 노력한다.
 
  "제도적인 개혁이 따라야 한다"
 
  프레시안 : 국내 인권문제의 현안이나 이슈에 대한 견해는.
  서준식 : 인권이 어떤 이슈로 주목받기 보다는 빨리 전체적으로 신장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개혁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의문사, 전쟁 중의 여러 학살문제, 삼청교육대 등이 법적인 조사와 보상이 필요하다. 검찰도 지금 개혁, 개혁 하지만 구체적인 제도개혁이 필요하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해야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현안으로 가면 이전에는 자유권 문제가 중심이 이었다면 물론 그 문제도 아직 해결이 다 안됐지만 사회권 문제에 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실제로 가장 큰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문제와 여러 소수자에 대한 권리문제라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책에서 어린이의 인권문제와 자녀교육을 연결한 것도 인상적이다.
  서준식 : 내 딸이 고등학생이 되서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 정말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나라가 다 망했다’며 법석을 떨지는 말자.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실패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직은 ‘권리’만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부모들에게 권장하고 싶은 것은 1989년에 나온 유엔의 ‘어린이권리조약’이다.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학부모들이 정독해 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이것은 헌장이나 선언과 다른 ‘조약’이다. 우리나라도 국회에서 도장 찍고 약속한 것이다. 지금 한국은 ‘어린이권리조약’을 사보타지 중이다.
 
  프레시안 : 책에서 교육에 ‘인권’을 추가하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서준식 : 개인적으로 수직적인 질서를 가르치는 ‘도덕’보다는 수평적이 ‘인권’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으면 한다. 물론 여기에는 선생님의 권위주의와 입시지옥을 없애는 일을 함께 병행해야 한다.
 
  프레시안 : 책에는 ‘유서대필사건’의 진상에 대한 글도 많다. 현재 관련자들의 근황은 어떤가?
  서준식 : 강기훈씨 본지는 오래 됐다. 컴퓨터 회사를 다니며 조용히 지낸다고 들었다. 안타까운 것은 강기훈씨가 와일드한 사람이 아니고 조용한 사림이라 모든 것을 혼자 속을 삭이는 것 같다. 이런 문제는 본인이 막 화를 내고 다녀야 진상이 들어나는데……. 이 사건과 관련된 마지막 코미디는 그 사건을 지휘한 강신욱 검사가 대법관이 돼 있다는 점과 얼마 전 법무부장관으로 하마평까지 오른 것이다. 세상이 참…. 그렇다.
 
  프레사안 : 프랑스의 ‘드뢰피스’ 사건하고 닮은 것 같다.
  서준식 : 이상하게 많이 닮았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른다.(웃음) 한 마디로 표현이 힘든데…. 그 당시 사건배경은 이렇다. 강경대군이 경찰 쇠파이프에 살해를 당하고 모든 시위를 봉쇄하고 있는 상태에서 분신이 이어지자 청와대에서 대책회의 중에 ‘배후설’이 제기되고 다음 날 김기설이 자살을 하자 바로 거기에 억지로 연결을 시켰다. 내가 김기설을 몰랐으면 뛰어들지 않았을 텐데 같이 활동한 사람이라 그 문제에 끼어들어 싸우는 동안 나는 신문에서 완전히 ‘인권운동가’로 소개가 됐다.
 
  "그러나 누군가가 복수 할 것"
 
  프레시안 : 책을 보면 강신욱씨나 고문기술자들에 대한 ‘정당한 복수’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는 것 같다.
  서준식 : 자신이 교도소에 또 갈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복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인권운동가로 이런 말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우리는 ‘악행에 대한 보복’이 너무 없는 사회인 것 같다. 다른 나라는 집 앞에 폭탄을 던지는 등 개인적인 보복도 있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모두들 너무나 무기력하다. 내가 기개가 없음을 스스로 탓하곤 한다.
 
  강신욱 검사 같은 인간들을 내가 나서서 복수할 기개는 물론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복수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책에도 그래서 ‘안두희가 어떻게 죽었나를 기억하자’고 썼다.
 
  프레시안 : 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한 다큐멘터리 ‘레드헌트’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된 때의 심경은?
  서준식 : 그 사람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것은 총 다섯 가지 죄목이었는데 홍대에 상영허락을 안 받았다고 야간주거침입(도둑), 검열을 안 받았다고 음반·비디오법(주로 파렴치한 포르노업자에게 적용하는 법), 보호관찰법(괘씸죄!), 국가보안법 등이고 또 하나는 공연법인가를 어겼다고 나를 잡아갔다. 그런데 막상 잡혀서 장안동 대공분실에 갔더니 내가 대학생들에게 ‘한총련을 탈퇴하지 말라’고 쓴 글을 문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말’지에도 실린 그 글이 문제라고 하면 ‘필화’가 돼서 난감하니까 ‘불법영화제’로 나를 걸었다. 갔더니 그 사람들 영화에는 관심도 없었다.(웃음) 다른 논객들이 당시에 ‘나라에서 한총련을 반국가 단체로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한 것은 문제를 삼지 않다가 학생들에게 ‘탈퇴를 하지 말라’고 한 내 말에는 경악을 한 것 같았다. 조사받는 입장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프레시안 : 17년간이나 자신들이 잡고 괴롭힌 사람은 심하게 하진 않았을 것 같다.
  서준식 : 그들이 심하게 해 봐야 안 되니까 이젠 아예 고문을 안 한다. 맞을 때 마다 면역이 되면 맷집만 좋아져서 때리면 맞는 놈 성질만 나빠진다.(웃음) 감옥 안에서 최하의 위치까지 겪은 인물에게는 그들도 방법이 없다. 고문도 안 통하니까 그쪽도 다루기가 무척 곤란했을 것이다.
 
  프레시안 : 월드컵 때 박노자 교수와 함께 ‘민족의 역적’취급도 받았다.
  서준식 : ‘붉은악마’에 관한 글은 개인적으로 하나의 ‘커밍아웃’이다. 인권운동사랑방 소식지에 글이 오르고 대부분이 ‘어떤 놈이 이런 글을 썼냐!’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내가 쓴 글이다. 당시에 그런 것을 말하기 너무 힘든 분위기였다. 서글펐다. 우리가 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고도 느꼈다.
 
  개인적으로 재일동포였기에 나를 키운 것이 민족주의 사상이었고 자연스럽게 진보사상을 그 위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일종의 통합사상이라 거기서 벗어나는 아웃사이더들의 소외와 박해를 월드컵 때 생각하게 됐다.
  당시에 ‘대한민국’을 외치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겼다.
 
  민족주의 역사를 보면 국민을 한민족으로 통합하는 대가로 그 안에 소수자를 박해하고 제외시켰다. 민족주의에 취해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개인적으로 민족주의가 역사적으로 필요한 단계라고 본다. 강대국(미국)의 횡포에 맞서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반인권적인 함정’에서는 깨어 있자는 것이다. 그때는 분명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다.
 
  나도 ‘만능의 스포츠맨’으로 불릴 정도로 운동을 좋아하지만 프로스포츠의 ‘마취’같은 역기능 대한 우려도 그 글을 쓴 계기 중 하나였다.
 
  프레시안 : 지난 번 ‘피의자 사망’사건의 딜레마는 피해자가 조직폭력배라는 점도 있었다. 우리가 흉악범의 인권을 지켜야 하는 논리는 무엇인가?
  서준식 :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첫째로 못된 인간과 정상적인 인간의 한계가 사실 모호하다. 예를 들면 국정원 앞에서 ‘간첩이라도 고문은 하지 말라’는 데모는 아직도 않는다. 사람들도 이상하게 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문이 그러다가 어느 날 나를 찾아온다.
 
  두 번째로 더 근본적으로 ‘그놈들은 나쁜 놈’이라는 관점의 문제다. 우리사회의 어리석음과 잘못이 낳은 것이 범죄와 죄인들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만든 배설물은 우리의 책임이다. 그들의 나쁜 짓은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다. 넘치는 상업문명과 여성의 상품화를 만든 것은 바로 우리다. 우리의 책임이다.
 
  ‘활동가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버려야 한다
 
  프레시안 : 책 중에 활동가의 생활에 대한 글도 눈길을 끈다.
  서준식 : 좀 길게 이야기를 하겠다. 처음 인권운동사랑방을 시작한 후에 활동비를 끌어다가 지급하는 것이 내가 하는 역할이었는데 뭔가 문제가 있었다. 우리나라 시민운동이 돈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동가 급여지금이 현재 어느 단체나 예산의 3분의2 정도일 것이다. 90년대부터 월급을 받고 활동을 하는 분위기가 됐는데 우리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월급 받고 하지는 않았다.
 
  90년대에 운동의 내부가 한쪽은 ‘조직규모를 키우고 활동가 월급도 줄 수 있도록 여러 금전적 도움을 받자’는 것 이었고 다른 쪽은 나 같은 경우인데 ‘조직은 활동비정도만 지급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요즘 작은 단체들 중에는 후원회원을 모집하고 회지를 보내고 집세내고 자신들의 월급을 받고 하는 것이 ‘주 업무’인 단체들도 있다.
 
  참여연대는 비교적 건전하게 재정이 운영된다고 본다. 환경연대는 대기업 돈도 받는 데 그런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참여연대는 시민들이나 중소기업의 돈은 받는 것으로 안다. 문제는 일반시민들에게 후원금 받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꼭 싸워야 할 때 돈을 낸 회원들의 ‘눈치’를 볼 수도 있다.
 
  그럼 이제 운동가는 뭐로 먹고 사느냐가 문제다. 우리는 자기가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 반박에 일을 못한다. 그럼 두 사람이 나눠서 하면 된다. 좋은 의미에서 자원봉사자와 활동가 사이의 벽이 없어진다고 본다.
 
  또한 운동하는 사람들은 ‘활동가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버려야 한다.
 
  이런 결론을 내기까지 2년이 걸렸다. 달라진 것은 내부의 민주화다. 전에 내가 후원금을 끌어 올 때는 활동가들이 ‘물주’인 내 눈치를 봤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먹고 살며 좋아서 하는 일로 긍지가 생기자 조직 내의 적극적인 의사표현이 시작됐다.
 
  외국의 경우도 이런 식으로 활동하는 단체들이 있는데 국내에는 소개가 잘 되진 않고 있다. 우리의 시도가 성공을 하면 새로운 활동의 방법으로 자리매김 할 것으로 본다.
 
  "새로운 사회주의, 문제가 없는 사회주의를 만들자"
 
  프레시안 : 운동하는 사람들은 더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도 많이 나오고 있다.
  서준식 : 물론 포용력이 더 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위험한 생각일수 있다. 정체성과 포용력은 결국 반대방향인데 정체성도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상황에서 포용력을 키우다가 정체성을 잃을 수도 있다. 정체성을 확보한 후에 조금씩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제일 좋은 것은 정체성 확립 후 넓은 포용력을 갖는 것이다.
 
  프레시안 : 더 좋은 세상이 되기 위한 화두를 준다면?
  서준식 : 나는 사회주의자다. 자본주의 구조가 악의 구조라고 생각한다. 이 구조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이 불쌍하다고 생각을 한다. 자유와 평등의 참뜻이 사회주의적 발상에서 올바르게 구현 된다고 본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언제 어떤 형태로 사회주의가 구현될지 모르지만 ‘사회주의는 나쁘다’고만 말하지 말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제가 없는 사회주의를 만들자.
 
  프레시안 :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한 조언을 한다면?
  서준식 : 인권위를 만들기 위해 3년간 노력했었다. 검찰영향하에 두느냐 마느냐 즉, 독립된 국가기관으로 두는 것에 중심을 뒀고 결국 해냈다. 그러나 다양한 관료들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다. 인권위의 경우 다른 행정기관의 공격을 막아주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시민단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다. 도와줘야 하는 데. 인권위는 또 시민단체를 무시하고 의심하곤 한다. 나는 힘들다. 내 후배들은 그렇게 하길 빈다.
 
  '인권위원장의 착각'
 
  프레시안 : 인권위와 관계악화는 ‘인권위원장자리를 노린다’는 소문 때문인가?
  서준식 : 인권위를 만들 때 여러 단체가 참가 했으나 지향이나 정서의 차이로 힘이 들었다. 도식적인 구분은 힘들지만 이렇게 둘로 의견이 갈라졌다.
 
  민주당이 낸 독립적인 국가기구는 골격은 좋았다. 문제는 그 안이 구체적인 세부안은 (강제)조사권이 없는 안이었다. 나는 받아들이자는 쪽이었고 다른 쪽은 받지 말자는 쪽 이었다. 그런데 위원장이 도와달라며 은밀히 부른 인물들이 나중에 보니 앞에서는 ‘받지 말자’는 주장을 한 쪽 이었다.
 
  철저한 보안 속에서 자신들끼리 준비·기획을 했다. 그 와중에 나와 몇몇 인물들이 정보에서도 제외됐다. 받지 말자 던 쪽의 몇몇은 ‘단순한 준비단계에 잠시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공무원이 됐다.
 
  자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사실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나는 ‘간첩죄 17년’이라 그런 자리에 갈 수가 없다. 난 확고하다. 활동가들은 밖에서 견제·비판해야 한다고 봤다. 그런데도 나를 ‘너 자리욕심이 나서 그렇지’하고 지금도 의심을 한다.
 
  인권위원장이 ‘왜 자리 안 주느냐’고 우리가 요구하고 화를 냈다고 말 하는데 한 마디로 내 글 제목대로 ‘인권위원장의 착각’이다.
 
  프레시안 : 생활 중에 ‘일본인으로 귀화하고 싶다’거나 수감 중에 ‘전향을 할 걸’하는 식의 인간적인 후회는 없었는지?
  서준식 : 내 경우엔 어려서부터 조국에 살고 싶은 열망이 강했다. 나 같은 사건이 많았는데 고생하고 돌아가 버린 사람도 많다. 나는 ‘나가도 안 돌아 간다’고 굳게 결심했다. 일본생활의 고통은 ‘당신 고향이 어디에요’라는 질문에 대한 망설임의 축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본에 사는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고통의 큰 축적’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눈에 보이지 않아 고통이 적은 것 같으나 자신의 국적을 거리낌 없이 말하기 힘들고 일어로 이야기하면서 이상한 미안함과 답답함이 죽을 때까지 따른다.
 
  여기에 살며 17년 감옥에 가서 살고 또 두 번 감옥을 갔다 왔고 신체적으로 더 고통스럽지만 나는 주저 없이 ‘작은 고통이 쌓이는 큰 덩어리’가 더 괴롭다고 본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옳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나에겐 이쪽이 편한 것이다.
 
  프레시안 : 왜 그 서슬이 퍼런 시절에 ‘북한’을 갔다 왔느냐는 질문이 아직도 있다.
  서준식 : 재일동포 정서가 그렇다. 민단과 조총련이 결혼도 하고 친구로 지내고 한다. 상층부만 서로 이야기 않고 지낸다. 친구네 집에 가면 김일성 초상화가 있고 그런 식이다. 일본에 고등학교 다니던 단짝친구 5명중 3명이 ‘조선대학’을 갔다. 참 착하고 공부도 잘한 친구도 있었다.
 
  재일동포는 북한에 대한 이상한 혐오감이나 적개심이 없었다. 물론 여기서 몇 년을 살아서 법에 저촉이 되는 것은 알았으나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그 사건을 정권이 51명의 ‘간첩단’으로 불려서 71년도 대선 6일전에 터트렸다. 그 점은 지금도 묵은 상처다. 젊은 나이에 철없이 쓸 때 없는 짓을 해서 3선반대등 민주화 운동에 장애가 된 점이 있다. 하지만 도덕, 윤리적으로는 지금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재일동포 문제에 대해 따로 언급할 것은 없는지?
  서준식 : 난 그 문제에 대해 말을 할 위치가 아니다. 떠나온 지가 너무나 오래됐기에 대답하기 힘들다. 이야기를 하면 동포들이 웃을 것이다.
 
  "너도 나와 같은 인간이다. 나도 너와 같은 인간이다"
 
  프레시아 : 일상에서 우리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바로미터’ 같은 것을 제시해 준다면?
  서준식 : 미흡한 비유이긴 하지만 ‘너도 나와 같은 인간이다. 나도 너와 같은 인간이다’라고 할 수 있다. 내 인권이 소중 하듯이 남의 인권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늘 인식해야 한다.
 
  내가 타인으로부터 어떤 말과 행동을 당하는 것이 싫고 부당하다고 느끼면 나도 그렇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인권침해 여부도 ‘내가 그 일을 당 했다면’이라는 생각을 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회사가 신입사원의 ‘지나온 인생’을 적어 내라고 하듯이 회사 측에 ‘회사의 지나온 길’을 사원에게 제출하라고 한다면 사장 기분이 어떻겠는가.
 
  프레시안 : 한달이 안 된 노무현정부에 당부할 말이나 조언할 것이 있다면?
  서준식 : 그냥 잘 하기를 바라며 지켜보겠다.
 
  "변절하지 말자"
 
  프레시안 : 17년의 끔찍한 수감생활과 고문을 당하고도 정신이 멀쩡한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서준식 : 무너지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긴 침묵) 변절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말이 전향한 분들에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고통을 참고 전향을 거부한 사람들은 평생 표정이 밝다. 꼭 감옥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살며 핑계대고 변절하지 말자.

손봉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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