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움직이는 생활세계를 다루는 정치가 고정된 도덕의 영역이 될 수 없다는 것, 또 정치가 진리를 추구할 때마다 파시즘으로 급전직하했던 역사를 이미 잘 안다. 좋은 삶에 필요한 정의의 규범을 만들기 위해 정치에 도덕적, 종교적 이상이 필요하다는 샌델의 주장에 따르려면, 낙태와 동성애를 둘러싼 문화전쟁은 물론이고 여러 종교들 간의 종교전쟁마저 우리는 납득해야 한다. (한겨레/ 장정일의 '책 속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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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을 국가에 넘기는 계약이 유지되기 위해선 공포가 계속돼야 한다.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공포는 국가 권력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기에 국가는 공포를 조장하기 마련이다.

- 미디어는 체제 자체를 지키는 성격이 있다. 돈과 영향력을 누릴 수 있는 판 자체를 지키려한단 말이다. 결국, 미디어는 공포를 이슈화해 돈과 영향력을 얻고, 국가는 공포에 폭력을 행사해 자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 와중에 보안, 보험 뭐 그런 회사들은 공포로 장사를 한다.

- 우리는 흉악범을 잡고 가두며 공포를 정복했다는 광기어린 희열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범죄와 재해를 야기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왜 그러한 상황에 빠지게 됐는지 고민하기 전에 범인만 제거하면 된다는 생각, 이런 생각만 존재한다면 아무리 감시와 처벌을 강화해도 공포는 만연할 수 밖에 없다. (출처: 대학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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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전엔 비제도 미디어가 금지되었지만 오늘 우리는 스스로 그걸 금지한다. 여전히 관심은 제도 미디어의 내부에만 있으며 제도 미디어의 상한선(비제도 미디어에선 매우 평범한 이야기에 불과한)에 놀라울 만큼 섬세하게 반응하며 비장한 얼굴로 ‘언론 자유’를 외친다. 이미 확보된 언론 자유를 스스로 금지하며 제도 미디어에만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은 도무지 쳇바퀴를 내려올 줄 모르는 다람쥐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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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늘 똑같은 소리만 반복한다고(신자유주의 반대!) 툴툴 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일제반대!”는 30년 넘게 반복했으며 “독재반대!”도 30년 넘게 반복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일제도 독재도 물러난 지 오래인 오늘 개나 소나 그 시절에 “일제반대!” “독재반대!” 외쳤던 것처럼 말하지만, “일제반대!” “독재반대!”를 내내 외친 사람들은 극소수였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비현실적’이며 ‘근본주의적’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역사를 보면 언제나 그렇다. 우리는 ‘현실적인 변화’와 ‘실현가능한 변화’를 말하기 전에, 일제시대와 극우독재 시절에 ‘현실적인 변화’와 ‘실현가능한 변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런 사람들이 일제와 독재가 물러나는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의식’ 없이면 '현실'도 없다. (출처: 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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