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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에 대중이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혁명의 가장 명확한 특징이다.

수십 년동안 진행되는 반체제 세력의 비판은 대중의 불만을 배출시키는 안전밸브에 불과하다.

대중은 사회재구성에 관한 준비된 계획을 가지고 혁명에 돌입하지 않는다. 다만, 구 체제를 더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격렬한 감정으로 혁명에 돌입할 뿐이다. 계급대중의 지도적 부위만이 정치강령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혁명의 시험과 대중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혁명의 근본적 정치과정은 대중이 사회위기로부터 도출되는 문제들을 서서히 이해하는 데에 있다.

혁명의 각 단계들은 지도적 정당들의 변화에 의해서 확인되는데, 정당 내의 더 과격한 분파가 항상 덜 과격한 분파를 밀치고 등장한다.

지도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혁명에너지는 피스톤 실린더 안에 들어가지 않은 증기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뿐이다. 그러나, 역시 원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고 증기에게 있듯이 혁명의 원동력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관념주의자들과 절충주의자들이 제아무리 법석을 떨어도 의식은 객관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푸가초프 반란은 귀족계급의 이익을 지켜주는 관료적 절대주의체제의 강화를 가져왔다.

전반적으로 러시아의 경제발전은 수공업 길드와 공장제 수공업 시기를 건너뛰었다.

러시아사회의 일반적 발전과정에 조응하여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생산지는 공예-길드가 아니라 농업이었으며,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었다. 여러 시대를 거쳐 형성된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과거의 짐을 고스란히 지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환경, 유대, 관계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과거와 날카로운 단절을 겪으면서 도약하였다. 바로 이 점이 짜르체제의 집중적인 억압과 함께 러시아 노동자들을 혁명사상의 가장 대담한 결론들에 쉽게 동화되도록 만든 요인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정치적 파산과 함께 발발한 전쟁은 정치적으로 노동자들을 엄청난 혼란에 빠뜨렸다.

케렌스키도 이렇게 한탄했다. "그렇다, 자유러시아는 그렇게도 많이 말하고 그렇게도 많이 준비했던 위로부터의 쿠데타를 제때에 성사시키기에는 너무도 행동이 굼떴다. 러시아는 자생적인 폭발 즉, 혁명을 저지하기에는 행동이 너무 느렸다.

전제적 반봉건적 체제에 저항하는, 따라서 귀족계급에 저항하는 혁명은 그 첫 단계에서 일반귀족들 뿐 아니라 왕실 사람들을 포함하여 최고 특권상층부의 비체계적이고 일관되지 못하나마 진정한 협력을 얻는다.

장교가 지도적 병사를 살해하기 위해 권총 방아쇠를 당기려는 결정적인 순간, 카유로프와 추구린 같은 지도자를 가진 군중 가운데 누가 총을 쏴 장교가 쓰러진다. 바로 이 순간이 시가전의 운명 뿐 아니라 그날 전체 또는 봉기 전체의 운명을 결정한다.

혁명의 주요한 현장은 나라의 수도이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최근 지도자 므스티슬라프스키는 2월 봉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당 사람들이 마치 성경에 낭는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졸고 있을 때, 혁명은 갑자기 찾아왔다."

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고, 병사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섰다. 대게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결국 '자연발생적으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자연발생성 사상으 자연과학보다 사회과학에서 더 부적절하다.

혁명은 아직 자기에게 걸맞는 의례를 갖추지 못한다. 거리는 연기가 자욱하고, 대중은 아직 새 혁명가요를 배울 생각이 없다. 회의는 마치 홍수가 난 강물처럼 원칙도 없이 무질서하게 진행된다. 소비에트는 자신에 대한 열정으로 목이 멘다. 혁명은 막강했으나 아직은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다.

혁명과 반혁명 모두는 독재체제 수립을 강력히 요구하는데, 이는 이중권력의 참을 수 없는 모순에서 나온다.

소비에트도 모든 대의기구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결점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조직체계상에서 연유하는 불가피한 측면을 반영한다. 다만, 이러한 결점들을 최소화하는 데에 소비에트의 강점이 있다.

군대는 언제나 자기가 모시는 사회를 그대로 모방한다. 다만, 사회관계를 응축된 형태로 표현하여 이 관계의 긍정적 부정적 특징 모두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사회와 차이를 보인다.

사회는 그리 이성적이지 않아서 사회주의를 위해 경제적 문화적 조건이 성숙한 바로 그 순간에 맞추어 노동계급독재를 수립하지는 않는다. 인류가 그렇게 이성적으로 진화했다면, 일반적으로 독재나 혁명은 필요없었을 것이다.

레닌은 운동의 내적 논리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수립했다. 바로 이것이 레닌의 최대 장점이었다. 그는 자기 계획은 대중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대중이 스스로의 계획이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이것을 실현하도록 도왔을 뿐이다.

공장과 연대의 적극적 대중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장점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는 여전히 대의기관이며, 따라서 의회주의의 한계와 왜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대의기관은 대중투쟁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쉽게 대중투쟁에 대한 보수적 장애물이 되어버린다. 바로 이것이 소비에트 형태를 포함한 대의제도의 고유한 모순이다. 대표들을 계속 물갈이하는 것이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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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해악은 자본가계급의 사치가 아니다.

공급과 수요의 법칙은 상당한 기간 동안 필요한 물질적 기초로 남아 있을 것이며 경제정책의 오류를 교정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될 것이다.

개별 농민기업에 대한 우유부단, 거대 계획에 대한 불신, 최소 경제개발 속도의 옹호, 국제문제에 대한 방기 등이 전부 모여서 "일국 사회주의" 이론의 핵심을 구성하였다.

집단화의 진정한 가능성은 농촌의 위기의 깊이나 정부의 행정적 열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생산자원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 즉, 대규모 농업에 필요한 기계를 제공해주는 공업의 능력에 달린 문제이다.

이미 달성된 노동생산성과 무관하게 소유형태만 가지고는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이다.

소련이 생산과 분배의 안정을 확보한 사회주의의 첫 단계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는 중요한 사실 때문에 소련의 발전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기 보다는 모순에 가득찬 것일 수 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를 이어주는 교량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 체제는 일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욕구를 가장 잘 만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여 계획 생산을 도모하는 체제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주의라는 이름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암소가 사회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암소의 수가 너무 적거나 암소의 유방이 너무 왜소할 경우는 불충분한 우유 공급으로 인하여 분쟁이 일어난다.

도급제의 비밀을 발명한 것은 소련 관료들이 아니었다. 이 제도는 외부적인 강제가 가해지지 않으면서 노동자를 옥죄는 제도인데, 이것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 가장 적합한 제도" 라고 생각했다.

루블화를 더 많이 손에 넣기 위해 노동할 경우 사람들은 "능력에 따라" 즉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신경과 근육의 상태에 맞추어 노동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의 몸을 망치면서 일하게 된다. 도급제 방식은 조건적으로 그리고 엄혹한 필요 상황에서만 정당화 될 수 있을 뿐이다.

노동자국가에서 대중에 의해서 행사되는 강제력의 강도는 착취의 경향 즉 자본주의로의 복귀 위험과 정비례한다. 그리고 사회적 연대와 새로운 체제에 대한 대중의 충성심의 정도에 반비례한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지 않다. 개개인에 의한 비리난 권력남용의 가능성과 불가피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남용들을 억압해야 할 필요성 역시 마찬가지로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조치를 취하는데 있어서 특별한 억압기구는 필요치 않다. 이것은 무장한 인민들 스스로가 알아서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문명화된 인민이 싸움하는 사람들을 뜯어말리고 여성을 폭행하는 행위를 그치게 하는 것과 같이 아주 단순하고 쉽게 인민들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10월 혁명에 의해서 확립된 혼인법과 가족법은 당당한 긍지의 대상이었는데, 이제 부르주아 국가들의 법률창고로부터 대대적인 차용을 하면서 고쳐지고 찢겨졌다.

사회주의는 금욕주의가 아니다. 정반대로 기독교의 금욕주의와는 아주 적대적이다. 사회주의는 번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러한 관심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체제는 미래의 문화가 아니라 과거의 야만상태를 반영할 뿐이다.

소련 정부가 제국주의 정부와 상업적 외교적 군사적 협상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이것이 해당 자본주의 국가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제한하거나 약화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볼셰비키당의 원칙이었다.

평화주의 구호, 자본주의 하에서의 국제적 군비축소, 중재재판소 등은 반동적인 유토피아일 뿐만 아니라, 근로인민에 대한 노골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인 합의를 통해 군비축소가 실현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명백히 화상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새로운 전쟁을 피할 수는 없다. 무기가 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전쟁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검열은 군사기밀을 방어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일에 대해서도 간섭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계급이 아니라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엔지니어와 의사들을 계급이 없다. 그러나 사회는 이들을 필요한 위치에 배속시키는 수단을 찾아낸다.

어떤 군대로 군대를 양성하는 사회체제보다 더 민주적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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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6일 사건의 영향 - 1934년 프랑스 우익의 쿠데타에 붙여」

공동전선은 다양한 가능성들을 열어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공동전선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오직 대중의 투쟁만이 결정할 뿐이다.

위대한 전쟁이론가 클라우제비츠의 멋진 말을 그대로 옮기면, 전쟁은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치행위이다. 이 정의는 내전에도 완벽하게 적용된다. 물리적 투쟁은 정치투쟁의 다른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군사기계 뒤에는 기술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사냥감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소총에 총알을 장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너무 신중한 사냥꾼이 말한다. 그러나 사냥감이 나타났을 때 장전하면 너무 늦는다.

'만약에' 라고 생각하는 것은 투쟁형태가 부르주아계급의 선의에 따르며 계급이해의 비타협성에 따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다시 한번, 프랑스는 어디로?>

경기의 요동은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하기에 좀 더 쉽거나 좀 더 어려운 상황을 조성할 뿐이다.

자동적으로 모든 것이 상승했기 때문에 과거의 방식대로 선전, 선거활동, 조직 등에만 치중하면 승리가 저절로 성취될 것이라는 개량주의적 환상이 조금씩 생겨났다.

맑스주의자와 레닌주의자에게 선동은 언제나 대중과 나누는 대화이다.

혁명적 위기가 다가오면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많은 지도자들이 대중의 보수적 경향 뒤로 숨어버린다.

지방자치선거와 의회선거는 계급역관계를 파악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상은 아니다.

노동계급 지도자들은 대중 앞에 혁명적 군력장악의 임무를 계속 제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총파업의 정치적 의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총파업에 대해서 감히 입도 뻥끗하면 안된다. 총파업을 투쟁수단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곧 혁명투쟁을 부인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노동계급을 파시즘 세력에게 팔아넘기는 범죄행위가 된다.

기회주의와 모험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현대적 기술로 무장한 군대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주장만큼 공허하고 진부한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군대의 핵심부를 획득하거나 최소한 중립화시키지 않고는 혁명은 승리할 수 없다.

결정적인 것은 단결 자체가 아니라 단결의 실제적 내용이다.

독재의 기초는 노동자 민주주의다.

<결정적 단계>

대중은 행동을 통해서만 배운다. 이들에게는 이론적인 연구를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스탈린은 러시아의 인민전선을 제압했던 10월혁명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인민전선을 지원했다.

<결정적인 순간>

원하든 원치 않든 지구가 계속 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일 확인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의 법칙들은 우리가 인식하든 않든 독립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혁명계급의 혁명적 공세가 제때에 객관적 요인을 돕지 않는다면 혁명적 상황은 반혁명적으로 변한다.

투쟁전선에 제일 먼저나서고 제일 나중에 물러서는 혁명정당의 도리

<프랑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논조는 정치적 내용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내용인 것입니다.

<중도주의와 제4인터내셔널>

중도주의의 치명적인 질병은 자신의 일반적인 원칙으로부터 전술적 조직적 결론들을 용기있게 도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혁명운동의 역사 전체는 중도주의자들이 이렇게 사실들과 사상들을 가지고 숨바꼭질하는 행태를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혁명가는 정치적 거처를 두 곳에 둘 수 없습니다. 영혼을 위해 부르주아 거처에 있다가 현실정치를 위해 노동자 거처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중성은 노동자 혁명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공동전선"은 대중조직들간의 문제일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트로츠키주의와 노동자농민사회당>

분파가 무엇인가? 가능하면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자신들의 올바름을 당에 설득시키려는 목적으로 당내에 생각이 가장 가까운 자들이 일시적으로 규약없이 자발적으로 모인 그룹이다.

정치인의 견해가 애매모호하면 할 수록 그리고 그가 남의 비판을 참는 능력이 적으면 적을 수록 그에게는 날카로운 논쟁이 비하하는 발언인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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