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시대의 노동조합> : 트로츠키 사후에 발견된 문서로서, 제국주의시대의 노동조합은 독자성을 잃고 노동관료들에 의해 우경화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노동조합의 독자성과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를 사수하며 혁명적 노동조합을 건설하기 위해서 분투해야한다.

현대 전 세계 노동조합의 발전,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퇴보에 있어서 하나의 공통된 특징적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조합이 국가권력과 유착하거나 함께 성장하는 현상이다.

노동조합관료들의 눈에 노동조합의 주요한 임무는 다음과 같다: 국가를 자본과의 포옹관계에서 떼어내고 독점트러스트들에 대한 국가의 종속성을 약화시키고 국가를 자기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은 민족자본이 아니라 제국주의자본에 좌지우지된다.

개량주의 노동조합의 지도부인 노동귀족과 노동관료 특권층은 노동자들을 부르주아국가의 이익을 위해 통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에서만 국가는 이 특권층의 사회적 지위를 보호한다.

노동조합의 정치적 중립성은 자유부르주아 민주주의시대와 함께 완전히 복구할 수 없는 과거지사가 되었다.

민족자본가 계급의 미약한 힘, 자치 전통의 결여, 외국자본의 압력, 상대적으로 급격한 노동계급의 성장 등은 안정적 민주주의체제의 기반을 침식한다.

<노동조합단결의 문제> : 노동조합과 정당에 관해, ‘언제 어떤 조건에서 인접한 정치조직과 분립하거나 통합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 공동전선에 대한 원칙도 언급되어 있는데, 단결이란 형식적인 조직의 통합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대중의 정서와 요구를 바탕으로 한 단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량주의 노동조합 내부에 공산당 분파를 수립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임무이다.

“우리가 배신자로 보고 있는 개량주의 지도자들을 여러분들은 여전히 신뢰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견해를 여러분들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또 그럴 의사도 없다. 그렇다면 함께 투쟁한 후 이 투쟁의 방식과 결과를 평가하자”

개량주의자들에게 형식적으로 공동전선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가능한 정도까지 상황에 맞는 조건들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공동전선정책은 노동자들을 개량주의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다.

구체적인 공동투쟁의 문제에 대해 지역 또는 중앙차원에서 개량주의자들과 합의하는 것은 투쟁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 아니다. 개량주의자들이 아니라 객관적 상황, 그리고 대중의 정서에 기초하여 전술을 세워야 한다.

협소하고 고립된 노동조합에서 다수가 되기를 원하는 태도는 노동계급 혁명가가 아니라 종파주의자나 관료에게나 어울린다.

우리는 언제든지 노동조합단결을 위해 투쟁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엉터리 약장수의 처방을 가지고 자본의 하수인들을 교정시키기 위해서 투쟁하지는 않는다.

노동조합 내의 소수파는 노동조합의 규율을 당연히 준수하는 조건 하에 무엇보다도 비판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 이외에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더 약속하지 않는다.

<영국의 노동조합> : 코민테른의 잘못된 노동조합 전술을 비판하고 있다. 노동조합이 반동적이라고 해서 노동조합 내의 활동을 거부하거나, 소수만의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는 것, 혹은 성급하게 소비에트와 같은 대중조직의 형태를 주창하는 것은 모두 오류이며, 노동조합은 혁명적으로 기능할 수 없지만 혁명정당이 공동전선을 조직하는 대중적 활동공간으로서 여전히 기능하며, 결정적 시기에는 보수적 노동조합은 대중기구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 가입할 조직의 주소가 아니다. 대중이 있는 곳에서 이들을 혁명으로 지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격동의 순간에 보수적 노동조합기구를 대체할 직장위원회와 노동자 소비에트를 수립해야 한다.

<네덜란드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편지> : 소수의 독자적 노조를 유지하려는 종파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네덜란드 전국노동서기국에 대한 비판

혁명정당은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할 경우에만 그 가치가 있습니다. 독자적으로 조직을 유지하는 것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산업노동조합회의 소속 관료와의 대화> : 대중의 후진성을 핑계대는 노동조합 관료의 변명을 비판하며, 진정한 문제는 대중이 아니라 대중의 행동으로 전적으로 받아안고 투쟁해야하는 지도자에게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자본의 지도자들은 노동계급의 지도자들보다 훨씬 더 확고하고 일관되고 대담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은 회의적이고 사고가 판에 박힌 관료들로서 대주의 투쟁의지를 질식시키고 있다. 바로 이것이 아주 짧은 기간에 파시즘이 승리할 위험성을 증대시키고 있다.

외교문서로 기병대의 공격을 막을 수 없듯이 민주적인 법, 결의문, 선언문 등으로 파시즘을 막을 수 없다. 자본이 고용한 파시스트 깡패와 도적들에 대항해 손에 무기를 들고 자신의 목숨과 미래를 방어하도록 노동자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공산당 문제에 대해 프랑스 조합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 노동조합과 당의 관계에 대해서

노동조합이 없이 총파업이 발생한 경우도 있습니다. 1905년 러시아의 10월 파업이 그랬습니다. 반면 1919년 7월과 1920년 5월 프랑스 노동조합들은 총파업을 조직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프랑스에 혁명을 지도하는 조직 즉, 공산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대에 침투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연대에 긴밀히 결합된 혁명적 병사그룹이 조직되어 격전의 순간에 인민의 편으로 넘어갈 준비와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조합주의동지들과의 필요한 논의> : 단일노동총동맹을 지도했던 혁명적 조합주의자 로베르 루종에게 보내는 편지. 로베르 루종은 노동조합이 당에 대해 무조건적인 독자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마르크스의 권위를 인용하였다. 트로츠키는 마르크스가 당과 노동조합의 선후관계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으며, 마르크스주의란 혁명적 전위의 결집체인 당을 통해서 노동조합이 포괄하는 노동대중에게 지속적으로 과학적 사회주의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가 창립한 인터내셔널은 정당이었다. 그는 노동조합으로부터 노동계급의 국제정당이 탄생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다만, 최선을 다해 노동조합 내에 과학적 사회주의사상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려고 애썼을 뿐이었다.

마르크스는 정당과 노동조합의 관계에 대해 최종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다시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가 머리를 쳐들고 있다!> : 위에서 언급한 로베르 루종의 「노동조합과 정당」에 대한 답변으로서, 노동조합을 선진적 소수의 결집체 정도로 한정시킨다면, 이 조직은 당이 되기에는 너무 느슨하고, 노동조합이 되기에는 너무나 협소할 것이다. 이것은 노동조합의 대중적 공간으로서의 장점을 스스로 차단하는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이다.

<공산주의와 조합주의> : 공산당의 지도력은 노동조합의 진정한 독자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 당의 활동방식에 대해서 원칙적이고 구체적으로 서술.

노동조합의 독자성 즉, 자치의 원칙을 정확히 준수하며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의 주요기구에서 다수파가 되려는 투쟁을 전개한다.

노동조합의 주요 직책을 차지하고 있는 공산당원의 수는 당의 영향력을 측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노동조합 전체에서 차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비율이다. (중략) 이것은 공산당신문의 발행부수, 당이 주관하는 회의참석자 수, 선거에서공산당원이 획득하는 득표수, 그리고 특히 중요하게 당의 투쟁 촉구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노동자들의 숫자 등에 의해서 측정되어진다.

평화시에 노동조합의 전투적 투쟁은 고립된 경제파업의 형태를 띤다. 이때 노동조합 내에서 당의 직접적 역할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파업을 지휘하는 쪽은 노동조합이지 당이 아니다. 그러나, 운동이 총파업에 돌입하거나 국가권력에 직접 도전할 때에는 상화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이런 조건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은 완벽할 정도로 직접성, 공개성, 시급성을 띠게 된다.

어떤 조건에서도 노동조합은 진정한 독자성을 가지며 당에 조직적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당은 여러 상황에 맞추어 노동조합에 대해 일반적 지도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노동조합의 독자성사상은 노동계급의 사상 및 정서와 공통점이 없다.

혁명의 미래는 두 노동조합조직의 통합이 아니라 혁명적 구호와 투쟁방식으로 노동계급 다수를 결집시키는 것에 달려있다.

혁명경향이 노동운동 내의 극소수로 남아있는 시기가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소규모 그룹들이 서로의 죄를 덮어주면서 협잡을 부리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올바른 전망을 수립하고 중핵들을 교육시키는 두배나 비타협적인 투쟁을 요구한다.

<조합주의 원칙의 오류들 - 모나트 및 그의 동료들과 진행 중인 토론에 일조하기 위하여> : 삐에르 모나트가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그를 둘러싼 여러 개량주의자들을 비판하고, 모나트를 설득하기 위한 글로서, 자본가국가 노동자국가 모두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에 대한 비판

프랑스사회당이 당명을 공산당으로 바꾸었을 때, 공산당 지도자들의 의심스러운 전력에 대해 나는 레닌과 자주 논의하였다. 이들은 코미테른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짐이었다. 까쉥, 프로싸르 등은 인권동맹, 프리메이슨, 의회주의자, 출세주의자, 허풍장이 등의 영웅이었다.

부르주아국가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자국가의 위험성을 계속 외치는 것은 순전히 반동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대부르주아 계급이 국가군력을 장악하면 이들은 소부르주아 계급을 목조이고 파산시킨다. 따라서 이들은 권력을 둘워 한다.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해도 이 계급은 무서워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노동자권력이 파괴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독재의 권력이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국가적 위험은 권력이 다시 자본가계급으로 넘어가는 데에 있을 뿐이다.

<모나트가 루비콘강을 건너다> : 모나트가 노동총연맹(CGT)의 관료인 조르쥬 뒤물렝과 공동으로 선언문을 발표한데 대한 트로츠키의 논평

<노동조합문제에 관한 공산주의동맹 우파의 오류 - 논의 촉발을 위한 나의 견해> : 좌익반대파의 프랑스 지부인 공산주의동맹 지도부가 세운 단일반대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에 대해서

스탈린주의 분파는 당 대오 내로 행정적으로 노동계급 전체를 포괄하려고 시도한다. 당은 더 이상 전위 즉, 가장 선진적이며 가장 의식적이며 가장 헌식적이며 가장 적극적인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결사체가 아니다.

소련의 노동조합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파업파괴자 집단인 영국노총과 동맹을 유지하려 했다.

공산당은 노동조합 내에서조차 완벽한 독자성을 유지해야 한다 ; 모든 원칙적 문제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행동해야 한다 ; 필요할 때마다 좌파 동맹자들을 비난해야 한다; 이것을 통해 서서히 대중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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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와의 이행기강령 토론> :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과 트로츠키와의 토론으로서, 이행기강령이 대중적 정서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질문에 대해 강령에 대한 일반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강령이란 객관적 상황과 주관적 정서를 일치시키기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끈기있는 노력이다.


대중의 의식, 혁명정당의 성장 등 주관적 조건이 혁명의 기본적 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있다. 이것은 객관적 상황에 종속된다. 결국, 주관적 요인 자체는 객관적 조건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 의존관계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대단히 복잡한 과정이다.


우리의 전략적 임무는 무엇인가? 대중의 정치적 심리적 정서를 객관적 현실에 조응시키고 이들의 편견을 불식시켜, 이들의 정서가 사회위기라는 객관적 상황에 일치되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주의적 요구와 혁명적 요구의 양 극단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강령은 후진성을 극복하고 제압하는 도구이다.


우리가 강령을 가지고 노동자계급 앞에 나설 때, 이들이 우리의 강령을 받아들이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이 요구를 실현시키는 것보다,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것이 더 쉽다.


강령은 한 사람의 발명품이 아니라 볼셰비키들, 혁명가들의 오랜 집단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오랜 원칙들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시킨 것이다.


올바른 인식에서 나오는 규율은 개성의 표현이다. 그렇지 않다면 속박에 불과하다.


인구의 대다수는 맹목적이고 후진적이고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사례를 통해서만 각성된다.


새로운 사회의 첫 번째 요건은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여 더 높은 수준의 사회를 탄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두 번째 요건은 자신의 의지를 사회에 강제할 수 있을 정도로 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향력이 충분한 진보적 계급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세 번째 요건은 주관적 요인이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식하고 자신의 조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체제는 가장 귀족적인 통치방식이다.


농민은 계급이 아니라 반노동자 분자에서 착취자인 대농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압수는 보상을 배제하지만, 몰수는 보상을 포함한다.


우리가 복수심에 가득찬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야 한다. 미국에서 진정한 문제는 구체적인 발전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자본가계급을 개인적으로 파괴시키지 않을 것이다.


<이행기강령 -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 물가임금연동제, 공장위원회, 기업비밀의 철폐, 개별기업집단의 몰수, 민간은행의 몰수와 신용체제의 국가관리, 노동자계급의 무장, 노동자 농민의 동맹, 가격위원회, 노동자에 의한 군수산업의 통제와 이윤몰수, 비밀외교의 철폐, 상비군을 민병대로 대체, 등사회주의사상이 대중과 결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요구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지금 당장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설득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인류의 생산력은 현재 정체하고 있다. 새로운 발명과 개선 조치들도 물질적 수준을 더이상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다.


준혁명이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는 가장 주요한 장애물은 노동자계급 지도부의 기회주의이다.


일상적 투쟁에서 대중이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가교를 놓는 것이 필요하다.


스스로 만들어낸 재앙으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요구들을 만족시킬 능력이 자본주의에게 없다면 이 체제는 멸망해야 한다. 실현가능성이나 실현불가능성은 계급역관계의 문제이다.


노동조합은 완성된 혁명강령을 제공하지 않는다. 아무리 강력한 노동조합 전국조직도 노동자계급의 20%에서 25%이상을 포괄할 수 없다. 더욱이 숙력된, 그리고 봉급 수준이 높은 부위만을 압도적으로 포괄한다. 더욱 착취당하는 열악한 조건의 대다수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의 예외적인 상승기에 간헐적으로만 투쟁에 이끌린다. 이러한 순간에 투쟁하는 대중 전체를 포괄하는 파업위원회, 공장위원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비에트 등 특별조직들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노동조합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노동계급혁명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공장위원회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공장에는 실질적으로 이중권력이 성립한다. 공장위원회 수립을 위한 운동을 제때에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준비도 되어있지않은 상황에서 투쟁의 폭발에 의해 놀라자빠지는 꼴을 당할 것이다.


기업비밀의 철폐는 산업을 실제로 통제하는 첫걸음이다.


개별기업들을 대표하는 위원회들이 회의에 모여 트러스트, 산업 전체, 경제지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민경제 전체 등을 다룰 해당위원회들을 선임하여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동자에 의한 통제는 계획경제의 학교가 된다.


반파산자들의 장부에는 관심이 없으며 대신 착취자계급 전체의 장부에만 관심이 있다고 답변한다.


몰수 요구와 흐리멍텅한 개량주의자들의 국유화 구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몰수재산에 대한 배상을 거부한다.


모든 은행들을 단 하나의 전국적 기관으로 합병하는 것이 필요하다.


농민은 독립 소생산자로 남아있는 한 신용대부, 농업기계, 비료 등을 적절한 가격으로 제공받을 필요가 있다.


착취지배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는 것은 수공업자들과 상점주인들의 재산을 강제적으로 몰수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와 반대로 노동자에 의한 은행과 트러스트의 통제, 그리고 이러한 기업들의 국유화는 신용대부, 상품구매, 상품판매 등에 있어서 독점자본이 멋대로 지배하는 경우보다 비교할 수 없이 도시의 소자본가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노동자에 의한 군수산업의 통제는 전쟁을 제조하는 자들에 대한 투쟁의 첫걸음이다. 군수산업 이윤에 대한 세금징수라는 개량주의자들의 구호에 대해서 우리는 군수산업의 이윤 몰수와 무기상들의 재산 몰수를 구호로 내세운다.


제국주의조국 정부의 패배는 다른 많은 악들 중에서 그나마 봐줄만한 악이다.


소비에트 건설 구호는 이행기 요구강령의 최정점을 이룬다.


식민지 및 반식민지 나라들의 중심적인 과제는 봉건적 유산들을 일소하는 농업혁명과 제국주의의 멍에를 벗어던지는 민족독립의 성취에 있다. 이 두 과제는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종류의 얼간이들과 기적을 기다리는 인간들이 그렇듯이 종파주의자들은 매순간마다 현실에 의해서 패배당한다. 따라서 이들은 언제나 안달하며 정권이나 방법들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는다.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으며 찾지 못하는 자는 투사가 아니라 당에게 짐이 될 뿐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개별기업의 미시경제적 생산력을 자극하는 일에는 대단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거시경제적 의미의 생산력을 질적으로 발전시킬 능력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새로운 세계대전을 통해 생산수단에 구현된 죽은 노동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는 방법을 피할 경우, 이 위기를 완화시킬 수 있는 자본가 계급의 유일한 처방은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과 노동조합의 권리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것이다.


대중이 이행기 요구들을 중심으로 매일같이 투쟁에 나설 수는 없다. 그러나 계급투쟁이 상대적으로 덜 첨예한 시기에도 이 요구들을 노동자계급대중 속에 전파하는 것이 혁명가의 임무이다. 올바른 혁명전술의 씨앗을 평소에 뿌리지 않으면 혁명상황에 대처하기는 그만큼 어려울 뿐이다.


강령이 노동자들의 정서에 부함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강령을 제시할 수 없다는 모든 주장들이 틀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객관적 현실 앞에서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프랑스 행동강령> 주40시간 노동과 임금인상, 진정한 의미의 사회보장, 동일노동 동일임금, 여성노동자, 청소년 노동자에게도 남성노동자와 같은 임금 지급,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특별법 폐지 / 농촌노동자에게 도시노동자와 같은 권리 보장, 대규모 토지 장원 모범농장을 몰수, 노예적인 소작제 철폐, 저당조건 수정, 공공서비스 확충, 경찰의 해체와 병사위원회 구성, 판사의 선출, 배심원 제도 확대, 등 국제공산주의자동맹의 프랑스지부의 기관지에 실린 일국강령.


대의원은 성별이나 민족에 대한 차별없이 18세 이상의 보편적 참정궈느로 선출되어 2년 임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지역기관에 의해 선출되어야 하며,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숙련노동자와 같은 봉급을 받아야 한다.


<이행기 요구들: 코민테른에서 제4인터내셔널까지>


<국제항만창고노동조합 제10지부의 노동자들이 계급투쟁강령을 내건 후보를 지지하다> : 1960년대 국제스파르타쿠스동맹의 미국지부의 기관지에 실린 글.


부르주아 국가기구가 노동조합 내부문제에 개입하면 결국, 노동조합만이 손해를 보기 때문이었다.


정직성과 좋은 의도만으로는 노동조합을 강화시킬 수 없다.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결국 어떤 강령을 가지고 투쟁하는가 이다.


강령을 숨기면 노동조합 내에서 사회주의 그룹을 건설할 수 없다. 강령을 숨기는 것은 언제나 대중의 후진성에 영합하는 징후이다.


절대적으로 갖추어야 할 강령적 최소조건은 부르주아국가로부터 노동자운동, 특히 노동조합의 독자성을 옹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적 지지의 중요한 측면은 개량주의 강령의 부적절성과 모순들을 실제 상황에서 폭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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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대신, 과거 전체를 거부하거나 과거와는 뭔가 다른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자 애쓴다.

혁명운동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및 비판능력의 저하는 이들을 필연적으로 체제내화시키고, 보수화 경향으로 인도한다.

노동계급 지도부의 계속된 배신행위와 혁명적 지도력의 위기가 결합된 반동과 부패의 시기에는 사기꾼들과 돌팔이 약장수들이 도처에서 준동하여 암약하기 마련이다.

제국주의국가들에서 국가권력 장악의 주요한 장애물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취약성에 부수하는 조직된 노동운동 지도부의 점증하는 보수적 경향이다.

상대적으로 후진군에 고립된 혁명은 제국주의 세계시장의 점증하는 압력을 견뎌낼 수 없었다. 단지 군사적인 압력 뿐만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압력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노동관료들은 새로운 계급이 아니며, 자신을 재생산할 능력도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자신의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어느정도까지는 자립성을 갖춘 역사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승리를 거머쥐지 않는다면 사회와 인류문명 전체가 파멸할 것이라는 역사적 의미에서의 불가피함.

<오늘날의 공산당선언> : 선언이 발표 90주년을 기념하면서, 선언에서 아직도 유효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정리해내고 있다. 트로츠키는 선언이 계속해서 수정 보완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오직 선언이 서술된 기초인 ‘과학적 유물론의 사고’를 바탕으로 해야한다고 하였다.

우리시대에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거부한다면, 혁명투사는 물론이고 단순한 정치평론가도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할 수 있다.

조국은 선진자본주의국가들에게는 가장 귀찮은 역사적 방해요소지만, 여전히 해방투쟁을 벌여야만 하는 후진국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요소인 것이다.

이론이란 보편화된 현실 그 자체이다.

<10월 혁명의 교훈> : 10월 혁명 자체에 대한 기록이나 논문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10월 혁명의 교훈을 도출해야 하는 이유를 강변하고 있고,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독재에 대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간의 논쟁, 4월 테제를 둘러싼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 7월 봉기를 둘러싼 소비에트에 대한 태도, 10월 봉기에 대한 결정, 등 혁명의 각 시기에 지속되었던 당내의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1917년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 “급격한 전환기에 봉착하면 진보적 정당들도 당분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다. 이 결과, 과거에는 옳았으나 이제는 모든 의미를 상실한 구호들을 외치는 경우가 너무 자주 있었다. 과거의 구호들은 이 경우에 역사의 급격한 전환이 갑자기 닥친 만큼이나 빨리 그 의미들을 갑자기 상실했다. ” 따라서 이러한 전환이 너무 갑자기 일어날 경우, 그리고 지난 시기의 관성과 보수적 활동방식이 당 주요 기구들을 지배할 경우,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준비해왔던 결정적인 혁명의 순간에 당은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당은 위기에 의해 파괴되고, 혁명운동은 당을 제치고 멀리 앞으로 나아가 패배로 줄달음치게 된다.

전략은 전술을 폐기하지 않느다. 노동조합운동, 의회활동 등의 문제들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장악을 위한 결집된 투쟁에 종속되는 하위수단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전술은 전략에 종속된다.

효과적인 수영법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물에 뛰어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혁명이론을 검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제 혁명이 전개될 당시 드러난 온갖 견해들이 실제로 어떻게 현실의 시험을 거쳤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역사의 무대에 완성되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 공산당이 그 내부에 사회민주주의 경향과 볼세비키 경향을 동시에 갖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리고 이 두 경향들은 정치권력 장악문제가 즉각 제기되는 혁명시기에 가장 명확하고 공개적이며 가식없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레닌의 일시적인 전술적 후퇴는 정치노선의 전환이 아니었다. (4월 테제와 5월의 크로슈타트 수병에 대한 레닌의 상이한 태도를 평가하면서)

4월당 협의회의 결정은 원칙적으로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 내의 이견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이와 반대로 사태가 지행되면서 이견들은 좀더 구체적 형태를 띄었다. 그리고 혁명의 가장 결정적 순간인 7월에 가장 날카롭게 표현되었다.

부르주아혁명과 노동자혁명 사이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의회주의 학교가 권력장악의 유일한 또는 필수적인 훈련소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권력으로 향한 길은 반드시 부르주아민주주의의 길로 통한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앙상한 추상에 지나지 않으며 교조적 공식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 추상은 노동자 전위의 손발을 묶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기구라는 이름 하에 노동자전위를 사회민주주의 명찰을 단 부르주아 계급의 허깨비 야당으로 만들고 있다. 노동자의 정책은 초등학생들의 수학 공식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살아있는 운동에 의해 도출되어야 한다.

저돌적으로 투쟁하는 대신 대중이 시기를 기다리면서 단호하고 능력있는 전투적 지도력을 요구할 정도로 성숙했을 때 봉기는 일반적으로 가장 확실하게 성공할 수 있다.

레닌은 7월 시기의 사건들을 겪은 후, 소비에트를 절대시하는 경향에 대해 투쟁했다.

부르주아의회가 노동계급에게 어느 정도 정치훈련을 시켜준 바면, 부르주아계급 역시 의회를 통해 반혁명 전략을 훨씬 더 많이 고안했다. 이제 부르주아 계급은 의회를 통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사적 소유의 주요한 지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가장 혁명적인 정당도 조직보존주의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의 활동에 필요한 안정성을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적으로 정도의 문제이다. 조직 보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보수주의는 노선의 혁신과 행동의 대담함을 통해 일상의 틀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운신의 자유와 결합되어야 한다.

당의 거대한 도약기에 장애물로 등장하는 지도자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그 하나는 주로 혁명의 난관과 장애물만을 보는 지도자이다. (중략) 두 번째 유형의 지도자는 피상적이고 선동적 방식을 뚜렷이 드러낸다. 그는 난관과 장애물에 정면 출돌하고 나서야 이것들을 인정한다. (중략)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 이 두 유형은 손을 맞잡고 함께 행진한다.

<러시아혁명에 관한 세가지 사상> : 1905년 혁명을 거치며 드러난 농민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의 레닌과 트로츠키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레닌과 트로츠키는 독재의 사회적 성격과 임무라는 문제에서 차이를 보였지만, 멘셰비키의 자유주의적 전망과 화해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농민을 비사회주의적 계급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그런 규정이 결코 절대적이며 고정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래전에 마르크스는 농민이 조급하게 판단하지만 동시 이성적으로 판단할 능력도 있다고 말했다. 정세가 바뀜에 따라 농민의 성격도 그만큼 바뀐다. 노동계급독재는 농민을 감화시키고 재교육시킬 수 있는 거대한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10월혁명을 옹호하며> : <러시아혁명사>의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10월 혁명의 간략한 개략과 역사적 의의, 혁명의 의의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어떤 지배계급도 자발적이고 평화적으로 자신의 지배력을 포기한 적이 없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이성에 기초한 주장이 무력에 기초한 주장을 대체한 경우는 없다.

이미 수명이 다한 사회질서를 쓸어버리기 위해 진보적 계급은 자신의 시간이 왔음을 이해하고, 권력장악 임무를 스스로 설정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의식적인 혁명투쟁의 장이 열린다.

세계자본주의의 사슬은 언제나 가장 약한 고리에서 끊어진다.

보수정치와 달리 혁명정치는 은폐와 기만을 배격한다. 이것을 나는 그동안 믿어왔으며, 지금도 믿고 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노동자국가의 최고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비 오듯 쏟아지는 불행은 얼마나 처참한가! 혁명의 결과는 그로 인해 야기된 희생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결과를 낳지 않는 허망한 질문이며 철저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마치 역사과정이 대차대조표로 계산될 수 있는 모양이다!

자유는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인간은 인생 대부분을 육체노동에 바치도록 더 이상 강요되지 않는다. 둘째, 인간은 자신의 등뒤에서 작동하는 맹목적이고 알 수 없는 시장법칙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다. 이간은 계획의 범위 내에서 자신의 경제를 자유롭게 운영한다. 사회구조를 X선으로 철저히 찌고, 그것의 모든 비밀을 파헤치고, 그것의 모든 기능을 인간의 이성과 집단적 의지에 복종시키는 것이 이제 경제운영의 목표가 된다.

통제되지 않는 시장법칙을 합리적인 계획으로 대체하고, 생산력을 인류의 필요에 조화롭고 충실하게 기여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이 시대의 역사적 과업이다.

<스탈린주의와 볼셰비키주의> 스탈린주의의 죄악을 볼셰비키주의로부터 도출하려는 무정부주의자들을 비롯한 일부 세력에 대한 비판. 스탈린주의와 볼셰비키주의의 본원적 차이점 서술.

전위는 최소한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진지만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 진지는 막대한 희생을 대가로 치른 과거의 투쟁경험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이 방침을 종파적인 것으로 여길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역사의 물결과 함께 새롭고 거대한 파도를 준비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소비에트국가의 타락을 순수 볼셰비키주의의 진화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은 여러 구성요소 중에서 순수논리에 따라 분리해낸 오직 한 가지 요소만을 내세워 사회현실을 무시하려는 것이다.

레닌은 “달콤한 공산주의적 헛소리” 보다 적들의 냉소적인 말을 더 유익하게 여겼다.

불리한 역사적 조건에서는 볼셰비키당도 볼셰비키주의를 상실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한 지류인 사회민주주의는 권력을 장악한 뒤 자본주의의 공공연한 대리인이 되었다.

국가, 심지어 노동자국가조차도, 계급적 야만의 소산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최종 목표 즉, 국가의 폐지에 관해서 무정부주의자들과 완전히 일치한다.단순히 무시해버림으로써 국가를 폐지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에서만 마르크스주의자는 국가주의자이다.

무정부주의사상은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의 포로이다.

위험의 근원은 정책이나 전술이 아니라 노동계급독재의 물질적 취약성에 있었다.

단일정당의 지배는 스탈린 전체주의정권의 법률적 출발점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주의는 전쟁과 혁명의 시대인 제국주의시대를 분석했다. 즉, 쇠퇴하고 있는 자본주의시대의 부르주아민주주의를 분석했다. 즉, 쇠퇴하고 있는 자본주의시대의 부르주아민주주의를 분석했다. 총파업과 봉기의 상호관계 및 노동계급혁명시대의 당, 소비에트, 노동조합의 역할을 분석했다. 또한 소비에트국가론, 이행기경제론, 자본주의쇠퇴기의 파시즘과 보나파르티즘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마지막으로 볼셰비키당 자체와 소비에트국가의 타락을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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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계급들 사이의 합의나 교제가 불가능해지면 민주적 기관들의 토대는 사라진다.


볼셰비키당은 부르주아국가가 소수민족에게 의무적인 시민권이나 국어를 강요하는 것도 단호히 거부했다. 반면에, 자발적인 계급적 규율로 여러 민족의 노동자들을 가능한 긴밀하게 결속시키는 것을 진정 성스러운 임무라고 생각했다.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받는 대중이 승리할 위험성이 커지는 것에 비례하여 그루지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 화해주의자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그루지야 내의 반동세력과 유대를 더 긴밀히 했다. 그리고, 소비에트가 승리하자마자 러시아의 단결을 주창했던 이들은 분리 독립의 나팔수가 되었다.


화해주의자들에 의해 기가 꺾인 소비에트가 아니라 공장위원회를 토대로 삼아야 한다. 혁명승리 후 소비에트는 권력기관으로 새로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 군사작전을 수립할 때, 나보다 더 겁많은 인간은 없을 것이다. 나는 모든 위험드과 불행을 겪을만한 일들을 다 과장한다. 그러나, 일단 결정하면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것만 빼고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볼셰비키당이 고도로 단련되었다는 증거는 이견, 동요, 심지어 공포의 전율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때에 내적 위기를 통해 당을 정비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건에 결정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에 있다.


구 권력을 타도하는 것과 권력을 스스로 장악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대장장이가 빨갛게 달아오른 쇠를 맨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은 곧바로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이 임무에 적합한 조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음모를 통해 대중봉기를 조정하고, 음모를 봉기에 복종시키고, 음모를 통해 봉기를 조직하는 것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봉기의 기예”라고 불렀다.


소비에트 자체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소비에트는 강령과 지도부에 따라 다른 목적에 봉사할 수 있다.


노동계급정당이 단호하게 인민대중의 희망과 기대를 제때에 혁명적 행동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면, 혁명의 밀물은 급격하게 썰물로 바뀌게 된다. 이때 중간계층은 혁명 진영에서 눈을 돌려 반혁명 진영에서 구세주를 찾는다.


자본주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우선, 국가권력을 필요로 하는 계급관계의 살아 움직이는 체제이다.


결과를 미리 예측하기가 가장 어려우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봉기의 임무는 군대를 자기편으로 획득하는 것이다.


철도역, 발전소, 탄약고, 식품점, 급수시설, 드보르초비 교량, 전화교환소, 국영은행, 대형 인쇄소 등을 점령했다. 전신국과 우체국은 완전 장악되었다. 모든 곳에 믿을만한 경계병들이 배치되었다.


혁명의 일반적 조건이 주어진 경우에 봉기는 실제적인 기예의 문제이다.


시야를 마지막 봉기의 순간에 한정시키지 않을 경우에만 10월 혁명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정치적 체포는 복수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이 문제가 결정된다. 무엇보다도 코르닐로프와의 명백한 유착행위에 대해 정부는 기소되어 재판을 받아야 한다. 사회주의 장관들은 가택연금에만 처해질 것이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하층 인민의 결의문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인민대중의 창조적 능력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핵심적으로 중요한 일은 농민으로 하여금 이 나라에 더 이상 지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농민 스스로가 모든 문제들을 결정하고 자신의 삶을 설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기회주의인가? 아니다, 이것은 혁명적 현실주의이다.


혁명이 시작된 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가 보편적 복지의 왕국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혁명의 적들은 매우 만족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맹목적인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면 사회주의가 펼칠 마술에 대한 지나친 숭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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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것은 혁명대중이 혁명의 법칙들을 인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대중의 의식은 우연히 변화하지 않으며, 이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객관적 필연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의 의식은 예측 가능하며 지도가 가능하다.

궁핍만으로 봉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 만약 이 설명이 옳다면, 대중은 언제나 봉기를 일으킬 것이다. 사회체제가 파산했음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대중은 더 이상 궁핍을 참아내지 않는다.

유물론은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서술자의 임무이다.

주관적 의지와 객관적 현실의 불일치는 삶과 예술에서 비극은 물론이고 희극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특히 정치분야는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과 정당은 오직 자신이 처한 상황과 관련해서만 영웅적이거나 희극적일 수 있다. 혁명을 나무토막으로 막으려 했던 혁명가들을 비꼬지 않고 묘사하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고, 현학자들을 위해 객관성을 배신하는 것과 같다.

혁명상황에서 가장 해로운 정책이 바로 애매함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병자의 몸에 과감히 칼을 댄 외과의사와 마찬가지로 혁명정당은 절대로 동요하면 안된다.

권력을 잡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권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혁명정책을 수립함에 있어서 결정적 요인은 대중의 의식상태이다.

대중의 환상을 일체 공유하지 않으면서 가능한 한 최소한의 손실 속에 필요한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대중을 도와야 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대중정당인 볼세비키당은 대중과 같은 입장에 서야 했다.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유산계급은 혁명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 계급은 더 이상의 혁명 진전을 막기 위해 반동세력의 신뢰를 얻고자 한다. 혁명으로 타도당한 계급들의 호의를 사려는 조치를 취하는 순간, 이 혁명적 자본가계급은 인민대중의 분노를 촉발시킨다.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은 계급적 차이를 간과하고 판에 박힌 뻔한 말들로 간단히 판단해버린다. 또한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모두가 다 잘되기를 바란다. 따라서 이들은 혁명의 초기 단계에서는 유일하게 다수의 지도자가 된다.

기존 질서를 변화시켜야 할 때에는 폭력을 거부하다가 이것을 방어할 때에는 가장 무자비한 폭력을 서슴지 않는 것이 정치폭력을 반대하는 자들의 일반적인 도덕이다.

자유주의의 원칙은 경찰체제를 동반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무정부주의는 자유주의에서 경찰을 제거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순수한 산소를 흡입할 수 없는 것과 꼭 같이 경찰이 없는 자유주의는 사회의 붕괴를 가져올 뿐이다. 자유주의의 그림자인 무정부주의는 대체로 자유주의와 운명을 같이 해왔다. 계급모순이 첨예화되면서 자유주와 함께 무정부주의도 사망했다.

대중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들에서 소비에트는 점점 더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에 대당할 수 없었다.

볼세비키당은 언제나 소비에트 보다는 대중 사이에서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반면에, 화해주의자들은 여전히 대중들보다는 소비에트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은 세력이 약했을 때에도 미래가 있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에게는 과거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 과거에 대해서도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돌팔이가 아니다. 우리는 대중의 의식에 기초해서만 활동해야 한다. 소수로 머무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소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대중을 지배계급의 속임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는 비판을 수행할 것이다. 우리 노선은 올바른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모든 피억압대중은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들에게는 다른 탈출구가 없다.

신중함은 제동장치이지 원동력이 아니다. 제동장치를 밟은 채 앞으로 나아간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신중함만으로 무엇을 이룬 사람 역시 하나도 없다. 그러나 투쟁은 역관계에 대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 대담해지려면 우선 신중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에게 권력이 넘어간 후에야 조국을 방어할 것이다. 리가가 함락되든 페테르부르크가 함락되든 우리는 부르주아조국을 방어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노동계급혁명을 주장한다. 우리는 전쟁에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방어주의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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