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출처: 한겨레)

소설가 신경숙(44)씨가 <바이올렛>(2001) 이후 6년 만의 새 장편소설 <리진>(전2권, 문학동네)을 내놓았다.

<리진>은 조선 말 고종 왕실의 궁중무희 출신으로 초대 조선 주재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와 결혼해서 프랑스까지 건너갔다가 다시 귀국해서는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 ‘리진’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다. 리진에 관한 기록은 콜랭에 이어 제2대 프랑스 공사를 역임한 이폴리트 프랑댕이 쓴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태학사, 2002)에 ‘궁중의 기생들과 한 한국 여인의 비극’이라는 제목으로 간략하게 남아 있다. 작가는 불과 네 쪽 미만인 이 기록에 살을 입히고 피를 돌게 해 원고지 2200장 분량의 장편으로 재탄생시켰다. (* 이래서, 나는 역사소설이 좋다. 소설이 태어나는 과정도 그러려니와, 시간은 다르지만 무게는 같은 고민을 안은 그(녀)들이 애틋하다.)

“리진은 역사에서 거의 완벽하게 잊혀진 존재입니다. 봉건 질서에서 탈출할 기회를 얻었으나 근대의 문 앞에서 커다란 폭력 때문에 좌절하고 만,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자로서 리진을 그려 보려 했습니다.” 28일 낮 기자들과 만난 작가 신경숙씨는 “작품을 쓰는 동안 주인공 리진을 사랑하게 되었다”면서 “근대를 온몸으로 감당해 보려 했던 리진은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했다.

신씨는 1980년을 전후한 무렵 구로공단에서 산업체근로자로 일하면서 공부를 병행했던 체험을 소재로 한 <외딴방>, 그리고 동시대 젊은이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기차는 7시에 떠나네>와 <바이올렛>과 같은 장편을 냈지만, 역사물을 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지만 그는 <리진>이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현대소설로 읽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리진>을 쓰는 동안 문장과 문체에서부터 역사소설의 느낌을 배제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100년 전의 이야기지만 요즘 독자들이 읽더라도 현재의 이야기로 느낄 수 있도록 말이지요. 리진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극히 적기 때문에 오히려 작가로서는 자유로운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는 “소설 속 이야기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시대인데다 그동안 시대물을 쓴 적이 없기 때문에 다른 작품을 쓸 때보다 공력과 시간이 서너 배는 더 들었다”면서 “그래도 막상 탈고하고 나니 앞으로 다른 작업도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가 생긴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리진>을 쓰기 전에 먼저 손을 댔다가 이 소설 때문에 중단했던 장편을 곧 이어서 쓸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신경숙씨가 <리진>을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할 때, 소설가 김탁환씨 역시 동일한 주인공을 다룬 소설 <리심>을 계간지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김씨의 소설은 지난해 9월 세 권짜리 단행본으로 먼저 나온 바 있다. 신씨는 “<리심>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면서 “그(=김탁환씨)는 그대로 잘 썼을 거라 생각한다”고 짧게 말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당파싸움이 조선 망국의 주요 요인이었다는 오랜 통설은 식민사관에 찌든 사실오인의 전형일 수 있다는 주장들이 힘을 얻고 있다. 개중에는 당파싸움을 정책 중심의 정파들간 정권경쟁 차원으로 파악함으로써 근대 서구 정당제도 발전에 비견될 만한 선구적 정치행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세계사적으로 예가 드문 조선왕조의 500년 장수를 ‘아시아적 정체’ 따위의 부정적 시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당파경쟁이 알려진 것만큼 저급하진 않았으며, 그것이야말로 장수의 비결이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일제가 한국사를 조직적으로 깎아내렸고 그 영향이 지금까지도 짙게 이어지고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조선조 최대 재난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권신들의 과도한 붕당적 처신들은 그런 수정주의적 시각에 일말의 회의를 품게 한다. 전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조사과정에서 가담자들이 의병장들 이름을 발설했다. 항전의 영웅 김덕령도 연루됐다. 전란 발발 이듬해부터 7년에 걸쳐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겸직한 남인의 거두 서애 유성룡은 졸지에 서울로 압송된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서인 거두 판중추부사 윤두수 등은 신속한 처리를 주장했다.

한국사 관련 저술로서는 드물게 숱한 베스트셀러를 내며 역사 대중화를 선도하고 있는 이덕일의 <유성룡>(역사의아침)은 그때 선조의 처신을 이렇게 전한다.

“그러나 선조가 알고 싶은 것은 김덕령의 유·무죄 여부가 아니었다. 그는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전쟁영웅들을 질시했다. 그는 이런 전쟁영웅들이 올무에 걸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올무에 걸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덕령은 ‘수백번의 형장신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졌다’고 <선조수정실록>이 전한 것처럼 숱한 형장을 받았다. 그는 ‘다만 신이 모집한 용사 최담령 등이 죄없이 옥에 갇혀 있으니 원컨대 죽이지 말고 쓰도록 하소서’라고 주청했으나 그 자신은 물론 그의 별장 최담령도 고문을 받다가 죽고 말았다. 민심은 극도로 분개했다.”
 
이순신 천거하고 죽음앞 목숨 구해

전란 중 당파싸움의 절정은 ‘이순신 죽이기’였다. 파죽지세의 왜군을 연전연파한 이순신을 두고 서인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아뢰었다. “임진년에 수전한 장수들 중에서 공이 있는 자는 손꼽아 셀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 원균이 가장 우직하여 제 몸을 잊고 용맹을 떨치며 죽음을 피하지 않아 공적이 매우 뚜렷합니다.” 원균의 공을 빼앗은 이순신을 죽여라는 얘기다. 선조는 원균을 통제사 자리에 앉히고 의금부 도사한테 이순신을 잡아올리도록 지시했으며, 서인 쪽 성균관 사성 남이신에겐 현지조사를 해 보고토록 했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들어가니 군사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이순신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섬에 7일간이나 머물러 있었으나 우리 군사가 만약 출전했으면 그를 잡아올 수 있었을 텐데, 이순신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그만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하고 보고했다.”

가토를 죽이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문당해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순신을 살려낸 건 애초 그를 발탁 천거했던 유성룡이었다. 바로 뒤 200척에 이르던 원균의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전멸했다. 다급해진 선조는 죽이려던 이순신을 복직시켰지만 재기불능이라 본 조선수군을 없애버리라고 했다. “신에겐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이순신의 다급한 장계가 올라간 건 그때였으며, 그의 기적같은 명량해전 승리가 정유재란의 물줄기를 바꿨다. 하지만 나중의 논공행상 때까지도 선조는 이순신을 원망하고 원균을 충신이라 치켜세우면서 신하들 의견을 깔아뭉개며 원균을 1등공신에 책봉했다. “선조가 이순신을 증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은 백성들의 조롱을 받는데 이순신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은 것이다.” 저자의 이런 시각은 <유성룡> 전편을 줄기차게 관통하고 있다.

선조가 쳐 놓은 올무에 걸려든 또 한 사람의 최대급 희생자는 바로 유성룡이었다. 이순신이란 영웅을 등장시킨 장본인이라는 점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7년 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최고수훈자 유성룡은 바로 그 때문에 전쟁이 승리로 끝나는 순간 제거대상이 됐다. 유성룡은 개전 초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야반도주하듯 피난갈 때부터 무책임한 선조를 나무랐고, 광해군 세자책봉 등을 주장함으로써 선조 눈밖에 나기 시작했다. 대신할 인재를 구할 수 없는 유능함 덕에 전란기간에 살아남은 그는 또 속오군을 창설해 양반도 군역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했고, 대동법의 전신이라 할 작미법으로 조세제도를 혁신했으며, 노비 등 천출들을 과감하게 기용했다. 이순신 등용과 더불어 승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이런 혁신조처들은 전란수습과 조선조 재건의 토대가 됐으나 선조에겐 오히려 유성룡을 질시하고 제거해야 할 재료가 됐을 뿐이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 기록한 명나라의 <대명회전> 내용을 고쳐달라는 요청이 ‘종계변무’인데, 유성룡 반대파들은 혼란스런 전란 중에 몸을 뺄 수 없었던 유성룡을 두고 황당하게도 종계변무를 위한 중국행을 기피하는 등 불충을 저질렀다며 그를 탄핵했고 그것은 선조가 기다리던 바였다. 이 말 안되는 탄핵사유에도 그를 옹호하는 사대부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절대자 왕의 뜻이기도 했으려니와, 그것보다는 속오군, 작미법, 신분타파 등의 혁신조처들이 바로 그들 자신의 존립기반을 허무는 ‘독약’임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양반 기득권세력의 담합·작당 쪽에 더 혐의를 둬야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공교롭게도 그가 파직당한 선조 31년(1598) 11월19일, 바로 그날 이순신은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끌고 최후를 맞았다. 그 전에 이미 유성룡이 실각으로 내몰리던 상황에서 이순신은 그것이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걸로 받아들였고 전장에서 죽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보면 <유성룡>의 주인공은 유성룡이 아니라 그 자신이 ‘전쟁수행에 최대 걸림돌’이었던 선조다. 유성룡이라는 재상의 일생을 매개로, 난해한 심리구조를 지닌 한 조선왕의 유별난 처신과 비극적이었던 그의 시대를 다시 읽는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네이버 지식인, 일부 편집함)

[ 박인로 ] : 본관 밀양. 자 덕옹. 호 노계. 영천(永川) 출생.

어려서부터 시재에 뛰어났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세아의 막하에서 별시위가 되어 무공을 세우고, 수군절도사 성윤문의 발탁으로 종군.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조라포수군만호로 군비를 증강하는 한편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퇴관 후 고향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짓기 전념하여 많은 걸작을 남기고, 1630년(인조 8) 노령으로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정철을 계승하여 독특한 시풍을 이룩하고 가사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작품에 《태평사(太平詞)》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 등이 있다.

[ 이항복 ] : 본관 경주. 자 자상. 호 백사.

권율의 사위이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오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를 하였다. 이후 저작·박사·정언·수찬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로 갔으며,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9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 등이 주도한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 이덕형 ] : 본관 한산. 자 원백. 호 죽천.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봉교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보고하고 능양군에게 어보를 내리게 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주문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형조판서·의금부판사·돈령부지사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저서에 《죽창한화(竹窓閑話)》 《송도기이(松都記異)》 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영국에서 노예무역이 금지된 지 25일(현지시각)로 200년이 됐다. 하지만 ‘과거’는 청산되지 않고 있다.
15세기부터 400년간, 서구 열강은 아프리카인들을 붙잡아 아메리카 등에 노예로 팔았다. 1804년 잔혹한 대우를 받던 아이티의 노예들이 혁명을 일으켜 독립에 성공하면서, 노예무역 폐지가 가속화됐다. 1792년 덴마크는 가장 먼저 노예무역금지법을 제정했고, 영국도 1807년 3월25일 노예무역금지법을 제정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25일 아프리카 가나에서 열린 노예무역 폐지 기념식의 비디오 연설을 통해 노예무역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으나 이번에도 공식 사죄는 하지 않았다고 <에이피> 통신이 보도했다. 영국이 1672년 설립한 왕립 아프리카회사는 노예무역을 독점해 많은 이득을 취했다. 앞서 영국 최초 흑인 성공회 대주교인 존 센타무 요크는 <비비시>와의 인터뷰에서 정부의 공식 사죄를 촉구했다. 성공회는 지난해 노예무역에 가담한 잘못을 공식 사죄했다. 미국 노예제의 역사를 열었던 버지니아주 의회도 2월 공식 사죄했으나, 미국 정부 차원의 공식 사죄는 없었다.

<로이터> 통신은 노예무역에 책임이 있는 많은 나라들이 사죄를 하지 않는 것은 대규모 보상 요구를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유엔은 26일 세계화로 인해 증가되고 있는 현대판 노예무역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막는 데 쓰일 기금조성을 제안했다고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이 보도했다. 안토니오 마리아 코스타 유엔마약범죄국 사무국장은 “국경을 넘어 인신매매되는 노예무역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며 “인신매매 시장은 300억~400억달러에 이른다”고 말했다. 유엔은 250만명이 인신매매되거나 노예취급을 받는다고 추산하지만, 실제 피해자는 더 많다고 신문은 전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강요된 노동을 하는 이들이 1230만명에 이른다고 추산한 바 있다. 2003년 발효된 ‘인신매매 방지에 관한 유엔의정서’에는 인신매매를 범죄로 규정하지만, 각국에서의 처벌은 미약하다고 유엔은 지적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 사건 피해자들의 사법적 명예 회복을 위한 국가기관 차원의 대책이 마련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의 김갑배 상임위원은 27일 “과거 긴급조치 사건에 대해 위원회 차원에서 직권조사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며 “당시 수사기관의 고문이나 불법 감금 등 절차상 명백한 하자가 있어 재심 사유에 해당하는 10여건을 추려 지난 2월 초부터 사전조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사전조사 결과 재심을 끌어낼 수 있다고 판단되는 사건들을 전원위원회에 상정해 직권조사를 의결할 계획이다. 직권조사를 통해 해당 사건의 수사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위원회가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리면, 피해자는 이를 근거로 법원에 재심을 신청할 수 있다.

지난 1월 긴급조치 판결 전체 589건의 사건내용과 판사 실명 등을 공개한 위원회가 일부 건에 대해서만 직권조사를 하려는 데는 나름의 전략이 깔려 있다. 10여건 가운데 일부만 재심이 받아들여지기만 해도, 헌법재판소에 긴급조치 자체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 사법체계에 반해 국민의 자유권과 평등권을 심각하게 제약한 긴급조치의 내용으로 미뤄볼 때 위헌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위원회는 보고 있다. 위헌 판결이 내려지면 전체 판결 589건 모두가 무효화된다.

김 위원은 “판결이 무효화되면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청구소송도 제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법적 명예회복과 더불어 물질적 보상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위원회는 30여년 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는 피해자들의 적극적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고, 활발히 접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진실화해위는 28일 오전 서울 충무로 진실화해위 대회의실에서 ‘긴급조치의 위헌성과 피해자 명예회복 방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여론 수렴에 나선다. 김선택 고려대 교수(헌법학)가 ‘유신헌법, 긴급조치의 불법성과 그에 근거한 불법판결의 청산’을 내용으로 한 주제발표를 하고 임종인 의원(무소속)과 한인섭 서울대 교수(형법학), 김종철 연세대 교수(헌법학), 이국운 한동대 교수(헌법학), 이유정 변호사가 토론을 벌인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