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모름)

한국사 연구에서 임진왜란 만큼 성과가 축적되어 있는 연구 주제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주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편향적이었다. 즉, 온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국난을 극복'한 대표적인 사례로만 제시되면서, 그 이면의 다양한 실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의병의 봉기 원인은 새롭게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중략)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느닷없이 임진왜란을 당했던 데다가, 전쟁 중에 보였던 조정의 무책임한 행태로 인해 당시 조선왕조에 대한 민심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들이 오로지 임금에 충성하기 위해서 의병에 가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임금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논리로 가득한 한자투성이 격문의 내용을 백성들이 얼마나 읽고 이해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의병의 주축을 이룬 백성들의 참여 동기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의병들은 서로가 혈연 혹은 지연에 의해 연결된 사이였다. 따라서 그들은 지켜야 할 공동의 대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결속력도 높았다. (중략) 백성들이 관군에 들어가는 것을 기피하고 의병에 참여했던 까닭도, 조정의 명령에 따라 이리저리 이동해야 하는 관군과는 달리 의병은 비교적 지역 방위에만 충실하였던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일부 의병을 제외하고는 의병의 활동 범위가 고을 단위를 넘어서지 않았으며, 의병들 사이의 연합 작전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병장의 참여 동기도 단순히 '임금에 대한 충성'이라는 명분적인 측면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의병장들은 대체로 각 지역에서 사회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갖춘 인물들이었다. (중략) 조정에서는 의병장에게 관직을 부여함으로써 의병의 적극적인 봉기를 유도하기도 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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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일보)

나는 충청도 산골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 한 겨울 새벽이 되면 나는 일어날 시간이 되어서 잠에서 깨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의 냉기 때문에 잠에서 깨곤 했다.
그 새벽에 나는 지주가 아버지를 불러내어 왜 빚을 갚지 않느냐고 호통치는 것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신보다 나이 어린 지주에게 수모를 겪은 아버지는 수치심 때문에 자식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 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사회 생활 시간에 “우리의 역사에는 춘궁(春窮)에 굶주린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봄에 양식을 꿔주었다가 가을에갚는 훌륭한 환곡 제도가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소견에도 ‘그런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기억이 선연하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자금 압박을 받을 때 흔히 하는 말로 ‘과부 대동빚을 지더라도…’라는 속담이 있다. 그 본래의 의미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것은 우리에게 멍에와 같은 고리채(高利債)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고, 실제로 거기에는 사악한 뜻이 담겨 있다.

원래 대동법(大同法)이란 지방의 특산물로 세금을 바치던 것을 쌀로 일원화하여 바치는 제도를 의미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 토지 제도가 문란해졌다. 농지도 황폐하여 민생의 삶이 어려워지고, 화폐 제도도 무너져 국가 재정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세 제도를 일원화한다는 의미에서 그 당시로서는 가장확실한 재화(財貨)였던 쌀로 세금을 받았는데 이러한 제도는 나름대로 합리성을 띄고 있었다. 1608년(선조 41년)에 경기도 지방부터 시작된 대동법에 따르면, 시기별 지역별로 다소의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논 1결(結·약 3000평)당 미곡 13∼16말을 징수해 그 중에서 8∼10말은 중앙의 선혜청(宣惠廳)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지방 재정에 충당했다.

그런데 수리가 발달되지 않았던 전통적인 천수답의 농경 사회에는 소위보릿고개라고 하는 계절적 빈곤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다. 이제 대동미는 조세의 편의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 백성들의 짐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다가 환곡이라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환곡이란 보릿고개에 양곡을 빌려주고 추수기에되받는 제도로서 처음에는 좋은 뜻에서 출발했고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구휼(救恤) 제도는 매우 오래 전부터 실시되었다. 이미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16년(194년)부터 시행된 바 있고, 고려 시대와 조선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실시되어 오던 이 제도가 상설 제도로 정착된 것은 인조 4년(1626)이었다. 대동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임진 병자의 양란을 거치면서 국가 재정이 황폐해지고 농촌의 삶이 곤궁해진 데 그 실시 이유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상평창(常平倉) 또는 진휼청(賑恤廳)을 통해 환곡을 시행했다. 이 제도는 일제 시대인 1917년까지도 존속되었다.

당초 환곡의 이자는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 20%(연리로 치면 40%)였고, 조선조 후기에 들어오면 6개월에 10%(연리 20%)였으니까, 오늘의 제도에 비하면 다소 고리(高利)였다고는 하지만 가혹한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이를 흔히 장리(長利) 쌀이라고 불렀다. 이장리쌀이 대동법과 시기적으로 맞물리고 혼재되어 훗날에는 그 양자를 구별하지 않은 채 모두가 고리채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관리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농민들로서는 춘궁에 환곡을 얻는다는 것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농민들이 요구하는 환곡의 절대량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자 남이야 굶주리든 말든 이런 때에 재산을 불릴 수 있다고 착안한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지방의 토호 지주들이었다. 지주들은 처음에는 아름아름으로 쌀을 꾸어 주었고, 그 이자도 조정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쌀이 화폐의 대용이었던 시절, 쌀을 꾼다는 것은 단순히 식량의의미를 넘어서 그 자체가 상업 자본으로서 화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주들은 쌀을 매개로 한 축재를 시작했고, 이자는 날이 갈수록높아지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이러한 고리채에 대해 저항할 수 없었고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결국 장리 쌀의 이자는 높아만 갔다. 봄에 1섬을 빌려 6개월 후인 가을에 1섬 반으로 갚았으니 6개월 이자가 50%인 셈이며 연리로 치면 100%인 고리채가 되었다. 농민들은 당장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쌀을 꾸었지만 가을이 되면 빚을 갚기는커녕 빚을 갚기 위해 다시 장리 쌀을 꿔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농민들은 이 빚의 악순환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본래의 의미는 좋았지만 대동법이니 환곡이니 장리 쌀이니 하는 것은 결국 소작농을 영원히 소작농으로 묶어 놓는 굴레가 되었으며 지주들은 이러한 굴레를 통해 영원히 지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요즈음의 은행 대출 이자가 연리11%라는 사실과 은행 이자를 0.1%만 낮춰 주어도 기업의 형편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생산성이 낮았던 조선조 당시의 소작농에게 연리 100%라는 것이 얼마나 가혹했고 견디기 어려운 굴레였던가를 짐작할수 있다. 환곡은 그 당시로서 달러 빚과 같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악덕이자 놀이였지 결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소작농에 대한 환곡의 악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인권마저도유린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곧 초야권(初夜權)이었다. 초야권이라 함은 소작농의 딸이 시집가기 전 순결을 지주에게 먼저 바쳐야 하는 악습을 의미한다. 그러니 소작농에게 과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티끌만큼이라도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지금도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하는 대목이다.

대동법이나 환곡이 이토록 악법으로 변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것이 좋은 제도라고 속아 배워야 했을까?
그것은 이 시대의 역사가 가진 자들의 기록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의 국유화 시대’를 살았던 농민들로서는 그들의 아픔과 한을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들의 한은 대물림됐다.

이 환곡의 모순에 대해 최초로 항변한 것이 곧 갑오농민혁명 당시인 1894년 5월에 전주성(全州城)을 점령한 농민군이 정부군에게 제시한 폐정 개혁 14개조였다. 더욱 기 막힌 일은 해방을 맞이한 후에도 이 전근대적인 악습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농경 사회를 살아온 한국인에게 토지와 쌀은 영혼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 영혼을 가질 길이 없었다. 나는 여기에서 민중이, 또는 농민이 역사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식의 시각을 제시할 뜻은 없다. 다만 가난하고, 그래서 배우지 못한 민초들은 압제받고 산 것만도 한이 맺히는데 역사마저도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사실을 호도하고 왜곡하는 이면을 환곡이라는 이름으로 뒤집어 보여주고 싶을 따름이다.

신복룡(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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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한반도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그때까지의 조선과 이후의 조선은 달랐다. 그때 일본군이 개입하지 않고 전주에서 맺은 동학군과 조선정부의 화약이 이행돼, 녹두장군 전봉준이 말한 대로 전국에 집강소가 설치되고 유능한 ‘공화주의자들’이 정사를 맡았다면 우리 역사는 또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자체 제작한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죽창·농기구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의 화력 격차는 250 대 1 정도였다. 30~40만 농민들이 도륙당했다. 정부기록이나 증언들도 “시산혈해”니 “여러날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했다. 일제의 1937년 중국 난징대학살에는 전례가 있었던 것이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조선과 고종임금이 무능하고 뒤쳐져서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게 아니라 일제가 조선을 식민화했기 때문에 뒤쳐지고 무능하게 됐다고 했다. 일본은 조선을 근대화시키기는커녕 조선의 근대화를 사사건건 가로막고 지옥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녹두 전봉준 평전〉(시대의창 펴냄)에서 김삼웅(64) 독립기념관장도 “시골의 마흔 살 무명 접주가 수십만 농민을 종횡으로 엮어 혁명군으로 동원한” 기적 같은 일이 성공했다면 물론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메이지유신 체제와 경쟁하면서 동양의 정세도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 관장은 동학혁명이 비록 좌절하긴 했으나 “실패한 혁명은 아니다”고 했다. 그 뒤 을미개혁 등을 통해 동학군이 요구한 폐정개혁 내용들이 많이 수용됐다. 더 중요한 것은 “동학전쟁을 시발로 밑에 눌려 있던 민(民)이 밑으로부터 들고일어나 봉건적 신분철폐와 외세에 대한 주권·자주를 고창한 일”이다. 그것은 “지금에 이르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토대”가 됐다.

이 점은 한 번도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경험한 적 없는 일본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메이지유신조차 위로부터의 복고적 개혁이었고 그 결과는 제국주의 침략과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됐다. 그렇게 보면 동학 농민혁명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당시와 정세구조가 닮은 꼴인 지금 그 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비범한 범인 녹두장군이 역사에서 걸어나와 오늘날 전국 어디서나 살아 있는 현실”을 보라. 〈파랑새 노래〉의 파랑을 팔왕(八王), 즉 전(全), 곧 전봉준을 가리키는 것으로, 새타령의 ‘남원산성 이화문전’을 일본군이 점령하고 ‘남은’ 산성과 ‘이왕’(조선)문전으로, 여기저기 쑥쑥국 우는 새들을 곳곳에서 떨쳐일어선 의병으로 보는 설들도 재미있다.

하지만 지식인과 언론 등의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와 편견은 정도가 지나친 것 같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 에드워드 핼릿 카, 도전과 응전이라고 한 아널드 토인비 등 외국인들 얘기는 마치 주술처럼 섬기고 인용하면서도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본 단재 신채호는 알지도 못하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덩샤오핑 평전은 크게 쓰면서 제 나라의 운명을 바꾼 김구나 단재는 단 한 줄도 제대로 쓰지 않는다. 체 게바라 30돌에는 언론 출판사, 심지어 옷장사들까지 들썩이지 않았나.” 우리는 아직도 사대주의에 찌든 식민지적 상황 속에 살고 있다.

〈녹두 전봉준 평전〉은 김 관장이 지금까지 낸 평전들 중 여섯 번째다. 2004년 8월부터 거의 1년마다 백범 김구, 단재 신채호, 심산 김창숙, 만해 한용운 평전을 냈고 10여년 전에는 박열 평전을 다른 출판사에서 냈다. 모두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바로잡으려 삶을 던진 근대 조선사람들이다. “기회가 되고 능력이 닿으면 모두 20권으로 마무리할 생각”이다. 지금 약산 김원봉 평전을 준비하고 있다. 마지막은 안두희 평전으로 할 생각이다. “역설적이지만, 안두희를 알면 일제, 독재, 미국 등과 얽힌 우리 현대사 모순이 집약적으로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친일문제를 연구하다 보니, 친일파들은 오히려 기념관도 동상도 전기도 즐비한데 막상 항일 선구자들은 이렇다 할 전기나 평전이 드물었다. 있다고 해도 전문연구여서 대중에겐 멀었다.”

각별히 평전 형식을 취한 이유가 있다.  “젊은 시절 도스토예프스키를 공부해야겠다 생각하고 관련 책들을 많이 샀는데 그중에 에드워드 핼릿 카가 쓴 평전이 있었다. 방대한 자료를 녹여내는 걸 보고 평전의 가치를 새삼 느꼈다. 역사는 결국 인간의 역사인데, 평전은 바로 ‘글자로 쓴 인간 초상화’라 하지 않는가. 굴곡많고 고난에 찬 선구자들 얘기를 그냥 추상적으로 흘려버리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백범 김구를 그냥 “절세의 애국자로만 알고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실과 에피소드들을 찾아 그들의 내면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이 역사의 무게를 실감하고 교훈을 끌어낼 것이다.

자료수집을 위해 중국·일본 헌책방들을 기회 닿는 대로 돌았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신촌 일대 헌책방을 찾아나섰다. 김 관장은 5공 시절 금서 제1호의 저자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4·19혁명에서 5공 후반까지 재야·학생·노동자·지식인들의 각종 선언문들을 모아 〈민족민주민중선언〉(일월서각)이란 걸 냈는데, 그게 신군부 눈에 걸린 것이다. 1970년대 야당 운동하면서 〈민주전선〉 등을 만들었고 그 때문에 긴급조치로 여러번 끌려가 고문당하는 등 고초도 겪었다. 대한매일신문 주필로 있다가 성균관대 교수로 갔고, 다시 15 대 1의 공개경쟁을 뚫고 독립기념관 관장이 됐다. 3년 임기를 몇 달 남기고 있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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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한국 사회의 과도한 교육열은 일제 강점기의 경험과 전통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퍼진 차별과 비교의 문화에 의해 심화되고 있다.”
한국 부모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지극한 열기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도가 심해지면서 이제는 교육이 고통의 근원이 되고 있다. 자녀 영어 교육을 위해 ‘가족의 파괴’를 감수하고, 학원비 마련을 위해 엄마가 노래방 도우미로 나서는 사례도 있다.

대화문화아카데미는 30일 ‘한국 교육문제의 문화적 뿌리’를 주제로 대화모임을 열어 한국의 교육열과 교육문제에 대한 역사적, 사회심리적 접근을 시도했다. 정진웅 덕성여대 교수(문화인류학)는 발제문에서 “과도한 교육열은 일류대학을 향한 교육주체들의 과도한 열망에 기인하고 있다”고 전제했다.

이어 그는 여기에 맞닿아 있는 문화적 가치나 전통은 조선시대의 유교문화가 아니라 봉건적 신분관계의 해체와 함께 교육구조와 학력이 직업의 위계구조와 높은 상관성을 보이게 된 일제 강점기의 경험과 전통이 선별적으로 채택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일제 강점기에 현 교육의 특징인 도구적 성격이 한층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조선 후기에 향학은 비어 있고 성균관은 생원들을 모으기 급급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조선 시대에는 산발적인 교육열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 차원의 ‘교육문제’로 이어지는 일이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교육열은 시간과 함께 고조되어 왔지만, 조선시대 숭문주의 전통은 지속적으로 그 힘을 잃어왔다”며 따라서 현 교육적 상황을 한 세기 전의 유교적 전통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현 교육문제의 뿌리로 종종 무한경쟁 문화의 급격한 확산을 거론하지만 이는 경쟁에서 낙오한 결과가 생존에 더 위협적이었던 1960~1970년대에 비해 현재의 교육열과 교육문제가 더 심각하고 파행적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관점이다. 그는 우선 한국 사회의 차별과 비교의 문화에 주목했다. 1990년을 즈음해 다양한 영역에서 차별적 시선과 구별짓기가 더욱더 조밀하게 세분화된 영역으로 확산 강화되고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강남과 강북, 서울과 지방의 거주지역 또는 나이와 외모에 따른 차별이 단적인 예이다. 차별적이고 비하적인 시선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강성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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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 통치 국가의 근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미국이나 유럽의 제국주의와는 달랐다는 게 이른바 ‘일본 예외주의(exceptionalism)’이다. 이런 맥락에서 브루스 커밍스 교수 등은 일본이 식민지였던 한국에 대해 ‘개발과 저개발’을 병행한 통치를 해, 저개발 일변도 정책을 펼친 다른 제국주의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특히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한국과 대만이 1960년대 이후 다른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달리 고도성장을 구가하면서 이런 논리가 저변을 넓혀왔다.

이에 대해 영국 런던대 앤 부스 교수는 최근 온라인 아시아 태평양 문제 전문 매체인 〈재팬 포커스〉에 실린 논문에서 1910~1938년 사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각종 사회·경제 지표의 변화 추이 등을 분석한 결과 ‘일본 예외주의’를 입증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즉 한국과 대만이 이 시기에 다른 식민 통치 국가들에 비해 더 발전했다는 일관된 지표를 찾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부스 교수는 먼저 1인당 국민소득을 살펴봤다. 1913년엔 홍콩(영국 식민통치) 싱가포르(영국) 필리핀(미국) 인도네시아(네덜란드) 타이(독립국) 한국 대만 버마(현 미얀마, 영국) 순이었다. 16년이 지난 1929년 한국과 대만은 고작 타이만을 앞섰다. 1930년대엔 한국과 대만이 필리핀 다음의 위치로 올라섰다. 부스 교수는 한국이 1930년대에 들어서야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를 따라잡았는 데, 이는 당시 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가 동남아 국가에 상대적으로 크게 미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고용현황 역시 일본 식민지배의 우위를 말해주지 않는다. 1938년 인도네시아에서 농업 분야가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3분의 1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41%에 달했다.
예산 비교에서도 일본 예외주의에 대한 확증은 잡히지 않았다. 필리핀이나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반도 식민지 국가들은 1910~1938년 사이 교육이나 보건·농업 등 민생과 관련된 분야에 한국보다 더 높은 40% 이상의 예산을 할애했다. 대만은 이 시기 예산의 약 60%를 이 분야에 썼다.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치안과 행정력 유지에 들어간 예산이 더 많았다. 특히 1930년대 후반엔 기형적으로, ‘운송’ 분야 예산이 30%에 달했다. 당시 주민들의 생활 수준 비교에서도 일본 예외주의를 입증할 수 없었다. 1930년대 후반 일반사망률(주민등록 기재 인구 대비 당해 연도 사망자수 비율) 지표를 보면 한국은 23%로 말레이시아(21)나 타이(22)보다 높았다.
취학률에서 한국은 필리핀과 타이에 비해 현격히 떨어졌다. 1930년대 후반 전체 인구 가운데 학교에 재학중인 비율은 필리핀 11.5%, 대만 11.4%, 타이 10.7%였으나 한국은 5.8%에 불과했다. 1937~1939년 1인당 구입 가능한 미곡량에서도, 한국은 91㎏으로 타이(181), 인도차이나 지역(140), 필리핀(97)에 비해 적었다.
신장 증감률 지표 역시 교육과 마찬가지로 한국과 대만이 대조적인 양상을 보였다. 한국은 1920년대생부터 키가 줄다가 1950년대 초반 이 추세가 반전됐다. 하지만 대만은 1910년과 1940년 사이 오히려 키가 늘었다.

부스 교수는 “인구학적이나 경제적 통계를 사용해 당시 식민 피지배 국가들을 대상으로 종합지수를 매긴다면 1위는 필리핀, 2위는 대만이었을 것”이라며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나 다른 인구학적 측면에서는 상위권이었으나 교육 분야에서는 처졌다”고 결론내렸다. 적어도 1930년대 후반까지는 한국과 대만의 근대화 우위를 뒷받침할 만한 지표상의 변화를 관찰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허수열 충남대 교수(경제사)는 “20세기 초반의 통계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여러 항목의 국제 통계를 비교했기에 여기서 추출된 ‘경향성’에 대해선 의미를 부여해도 좋을 듯하다”고 밝혔다. 그는 “일제시대 한국이 근대화됐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차별과 불평등 속에 이뤄졌으며, 해방 이후 15년 동안의 혼란기까지 감안할 때 일제 때문에 경제 성장을 이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밝혔다. 그는 “300~400년 전만 해도 유럽보다 앞선 사회였던 동아시아 사회의 잠재력, 즉 충분한 문화 사회적 역량이 계기가 되어 발현하면서 발전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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