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개인의 취향도 이렇게 '무슨무슨 연구'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니, 학문의 범위는 꽤 넓군요. 출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메모를 옮긴 것이라, 내용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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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미시사는 과거에 실재했던 평범한 작은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체계화시킨 연구 경향을 말한다.

 

 

 

 


[기원] 1976년 발간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라는 책은 미시사의 새로운 연구 방향을 결정하였다. 16세기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역의 방앗간 주인이었던 메노키오에 대한 이단 심문 기록에 근거하여 씌어진 이 책은, 개인의 일대기를 넘어 16세기 당시의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 사이의 갈등을 논하고 있다.

[의미] 미시사는 실제 존재했던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다루며, 그 삶의 역사적인 의미를 복합적인 사회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어려움] 가장 큰 난관은, 사료가 별로 없고 그것들마저도 질적으로 왜곡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의미] 그렌디는 미시사를 이례적 정상이라는 개념으로 대답한다. 미시사에서 사용되는 사료는 지배 계층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이례적인 것이지만, 민중 계층의 시작으로 보면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중략) 미시사는 그들의 삶을 통하여 상층 비재 문화와 하층 민중 문화 사이의 간극을 밝히고, 그 사이의 갈등과 절충의 관계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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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종수 한성대 교수)는 1일 △불법 선거개입 의혹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 △용공조작 의혹 등 3개 분야의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이미 알려진 내용을 다시 정리하는 수준의 결과를 내놓아 부실한 조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조사 결과=1987년 강원도에서 경찰서장을 지낸 이아무개씨는 과거사위 조사에서 “87년 13대 대통령선거 때 정부·여당에서 도지사를 통해 정보형사의 통상 활동비 이외에 다른 활동비를 줬다”며 “상부로부터의 이런 선거활동비가 하달되는 것은 전국적 상황이었다”고 진술했다.

또 이승만 정부 때는 경찰이 새벽에 투표함에 미리 여당표를 넣는 ‘올빼미’나, 열 손가락을 모두 사용해 투표인명부에 대리 지장을 찍는 ‘피아노’ 등의 방법으로 부정선거에 개입했고, 1992년까지도 시장과 지방경찰국장이 대책회의를 여는 등 경찰이 불법적으로 선거에 개입했다고 과거사위는 밝혔다.

전남 동부경찰서 정보과에 근무했던 배아무개씨가 “광주 조선대 학원사찰 지휘통제소(cp)는 학교를 바라볼 수 있는 학교 입구 맨션 503호에 있었다”고 과거사위에서 진술하는 등 경찰이 90년대 중반까지 대학 근처 시설물을 빌려 학원사찰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사위는 경찰이 미성년자에게까지 금품을 주거나 범죄를 묵인해주는 대가로 학원정보 수집을 시키기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과거사위의 이번 발표는 대부분 과거 언론보도로 알려진 사실들을 자료 조사나 관계자 진술을 통해 다시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종수 위원장은 “이번 발표는 알고는 있지만 한번 더 확인하는 차원에서 중요한 것”이라며 “경찰한테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한계=오는 11월 활동을 마무리하는 과거사위는 출범 초기부터 한계가 지적돼 왔다.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은 “과거사위를 담당하는 경찰이 보안국인데, 극복해야 할 대상이 주체가 돼 처음부터 문제점이 지적됐다”며 “출범 당시에는 대통령 의지에 기댈 수 있었지만 갈수록 힘이 빠졌다”고 말했다.

애초 과거사위는 조사 대상 사건에 대해 외부기관으로부터 강제로 자료를 받을 수 있는 권한도 없었다. 김기설씨 유서 대필 사건의 경우 검찰이 관련 자료 제출을 거부해 과거사위 발표는 ‘짜맞추기 수사의 정황과 의혹이 있다’는 수준의 반쪽 결론에 그쳤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위원은 “과거 자료가 거의 없어 사람들의 증언이나 진술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상임위원들도 자주 바뀌어 일관성이 떨어졌다. 이 위원장은 “교수의 안식년이나 개인 사정 등으로 사퇴한 경우도 있다”며 “조사가 일관성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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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팔봉 김기진, 김유정, 채만식, 그리고 유석 조병옥. 얼핏 하나로 연결되지 않을듯한 이 네사람들에게는 뜻밖에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일확천금의 꿈’을 찾아 금광으로 떠났던 사람들이란 점이다. 물론 누런 노다지는 그들을 외면했고, 이들의 꿈은 한낱 백일몽으로 끝나버렸다. 훗날 김유정이 남긴 소설 <금따는 콩밭>과 <노다지>, 채만식의 <금의 정열>에 지은이들을 사로잡았던 그 열병의 자취가 그대로 담겨 지금에 전하고 있다.

1930년대, 조선땅은 일대 광기에 휩싸였다. 일자무식의 무지렁이부터 대학교수까지, 배운이 못배운이 가릴 것 없이, 가난한 이는 가난해서, 부자는 더 부자가 되겠다며 광기에 동참했다. 그 광기의 정체는 바로 ‘금광 투기’였다. 국문학자 권보드래씨가 1920년대 조선을 ‘연애’라는 새로운 감정에 사로잡혔던 ‘연애의 시대’로 명명했다면, 그 뒤를 이은 1930년대는 가히 ‘투기의 시대’라 이름붙일만한 시기였다. 노다지를 잡아 조선 최고 재벌이 된 최창학이나 <조선일보>의 사주가 된 방응모 같은 이들이 나오자 사람들은 더더욱 불나방처럼 금광으로 몰려들었다.

국문학자인 전봉관(34)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이러했던 1930년대에 ‘황금광시대’란 이름을 붙였다. 전 교수가 최근 펴낸 <황금광시대>는 저 멀리 150년전 지구 반대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만 ‘골드 러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70년전 이 땅에도 한바탕 골드 러시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이다.

역사학자도 아닌 국문학자가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진 금광열풍을 탐구하게 된 것은 우연같은 필연이었다. 1930년대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시기에 금광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이 많은 점에 주목하게 됐고, 그 배경에 ‘금광 투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뜻밖에도 1930년대 이 열풍이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전 교수는 동시에 황금광시대에 대해서도 연구하기 시작했다. 책은 그렇게 5년을 투자한 결과물로, 전 교수의 첫 대중적 저서다.

“처음에 가장 놀라웠던 것은 속물이나 무지렁이들보다 오히려 지식인들이 가장 금광투기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골드러시가 있었던 것을 알게된 그때가 마침 온나라가 코스닥 열풍에 빠져들었던 시기였어요. 이른바 배운 이들이 더 투기에 앞장서는 모습이나 맥락이 같은 것을 보면서 투기의 문화적, 사회적 측면을 들여다볼 필요를 느끼게 됐습니다.

전 교수는 책에서 근대화나 경제개발같은 경제적 성과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눈물이 녹아있는지, 그리고 투기란 것이 사람들의 꿈속에 얼마나 교묘하게 파고들어 그 꿈을 왜곡시켜버리는지 역사적 사실을 통해 보여준다. 모두가 최창학이나 방응모가 될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하고 간단한 진리를 사람들은 애써 무시하며 투기에 나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970년대 개발 성과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당시 아파트 투기, 땅투기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금세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근대화, 그 속에 숨은 투기의 뒤에 가려진 서민들의 피눈물을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보물선’ 해프닝이나 이용호게이트 같은 사건을 보면 지금 우리는 여전히 황금광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이용호게이트: 2001년 7월, G&G구조조정(주) 회장 이용호()의 주가조작 사건 때 검찰이 이용호를 불입건하면서 불거진 일련의 로비 의혹사건.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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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출처는 http://blog.naver.com/annemyungg/40030964298 / http://blog.naver.com/smphillips/80020365978 입니다. 두 개의 원문을 바탕으로 임의 편집합니다.)

# 들어가며

일제하 자료를 찾아보면 비행사는 여덟 명이고 그중 여류는 세 명이었다. 안창남이 처음이었고 그 뒤를 이어 박경원이 있다. 그리고 이정희, 김복남 등 여류비행사와 장덕창, 강세기, 윤창현, 윤공흠 등이 뒤를 계속 잇고 있다.  


▲ 박경원의 고려신사 참배. 최린, 이등비행사 박경원, 그 옆에 체신대신 고이즈미 마타지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박경원에 대한 관심은 1993년 ‘고려신사'에 갔을 때 그 신사의 방명록에서 그녀의 이름을 보고 난 후부터였다. 1928년 방명록에는 이름이 쟁쟁한 권력자와 함께 2등 비행사 박경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이름은 최린(崔麟, 1878-?), 일본 체신대신 고이스미 마타지로우(小泉又次郞, 1865-1951)와 나란히 있었다. 최린은 33인 중의 하나 아니었던가. 또 하나 의혹의 인물은 체신대신 고이스미인데, 그는 박경원을 돕기도 했지만 그녀를 괴롭힌 자이기도 했다. 턱없는 루머가 떠돌아 다녔기 때문이다.

# 박경원의 생애 

 

박경원은 1897년 대구부 덕산정(德山町) 63번지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덕산로이다. 탄생 100여 년이 지났다. 1912년 대구에 있는 미국 장로회 계 명신여학교에 들어가 1916년 졸업했다. 이어 고등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중퇴한다. 당시 보통 여자가 이만큼 공부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1917년에는 일본을 향해 떠나간다. 9월 13일 아침 대구 역을 떠난다. 1903년 이래 대구에 와 제사기술을 지도하고 있던 미와(三輪如鐵)의 후원에 의해 일본으로 보내진 것이다.  

그녀는 비행사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일본에 건너 간 그녀는 곧 요코하마(橫浜) 미나미 요시다 죠(南吉田町)에 있는 가사하라(笠原) 공예강습소에 입학했다. 그곳은 견직, 마직물 등을 짜는 기술을 가르치는 직공양성소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2년 반을 지낸다. 어려움 속에 돈을 모으려 했으나 돈은 모아지지 않았다. 1919년부터는 재일 대한 요코하마 교회에 나가 크리스천이 된다. 이듬해 1920년 2월 일단 귀국한다. 같은 해 10월 그녀는 대구의 자혜(慈惠)의원 조산부 간호부과에 입학한다. 간호부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 비행사 교육을 받을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22년 12월 10일 1등 비행사 안창남은 동아일보 주최로 고국 방문 비행을 한다. 여의도 상공을 나는 그의 자랑스런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 왔다. 그는 서울에 오기 직전인 11월 제국비행협회 주최의 도쿄-오사카 간 우편비행에 참가해 입상,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안창남은 1921년 도쿄 수자키(洲崎)에 있는 오구리(小栗)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웠고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1등 비행사 자격을 얻었다. 

박경원은 도쿄 가마다(蒲田)에 있는 일본비행학교 본교에 들어갔다. 1925년 1월이었다. 그녀는 원래 안창남이 교관으로 있는 오구리 비행학교로 가고 싶어했으나 오구리 비행학교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불타고 없어졌다. 안창남도 가고시마에서 혼다(本田稻作)가 경영하는 수륙(水陸)비행장으로 옮겼고 그 뒷소식은 끊겨 있었다. 1925년 2월 경 중국 상하이에 가 있다는 뉴스뿐이었다. 안창남은 박경원보다 4살 아래였다. 

그녀가 입학할 즈음 이미 일본 여류 비행사 두 명이 탄생하고 있었다. 3등 비행사였다. 당시 비행사 급수는 1, 2, 3등 비행사로 나눠지고 있었다. 20시간 비행 경력이면 3등, 50시간은 2등, 100시간이면 1등 비행사 시험 자격이 주어졌다. 순서는 3등부터 시작한다. 
3등 비행사는 자가용 비행기로 운동장 주변만 비행하고, 2등 비행사가 되면 비행은 자유였지만, 조종은 자가용 비행기뿐이었다. 1등 비행사가 되면 영업용 비행기도 조종할 수 있었다. 그런데 1등 조종사는 남자에 한하여 자격이 생긴다. ‘여자는 엉덩이가 커서 조종은 무리'라는 성차별의 조롱도 있던 시대였다. 

그녀는 이곳에서는 먼저 지상 교육을 받았다. 아직 자격과 경제력이 허락지 않아 조종과에는 들어 갈 수 없었다. 그 지상 교육이 자동차 운전이었다. 이것이 비행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했기 때문이다. 안창남도 먼저 자동차 운전을 배웠고 많은 비행사들도 그 코스를 밟았다.

그녀에게 후원자는 동아일보였다. 1925년 7월 9일자를 시작으로 9월 4일자, 12월 12일자에 연속으로 그녀에 관한 기사가 나갔다.
‘여 용사 박경원 양 비행학교에 입학, 부모의 거절과 많은 청혼도 버리고 단연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가 지원'(동아일보 1925년 7월 9일자) 
‘녀자가 비행긔 공부를 한다고 그리 장할 것야 무엇이겟슴닛가마는 일본에서는 아즉 이에 뜻을 두는 녀자가 드물 뿐 아니라 조선 녀자로는 나 한사람뿐임으로 때로는 남달은 곤난을 격근 일이 만앗슴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선생들의 호의로 그 학교 조교수로 잠간 잇게 되엿섰슴니다. 그런데 작란 조화하는 일본 학생들이 하도 놀리고 못살게 굴어서 할 수 업시 남복(男服)을 하고 다닌 일까지 잇섯슴니다마는 역시 그들의 성화로 결국 그것을 그만두게 된일도 잇슴니다.' (동아일보, 1925년 12월 12일)



▲ 동아일보 기사(1925년 9월 4일자)

그녀는 순회 간호부와 자동차 운전수를 하며 모은 돈으로 비행 훈련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번 탈 때마다 돈이 들었는데, 1시간에 15원이었다고 한다. 기름이 귀할 때였다. 면허증을 따려면 2천원이 든다고 했다. 당시 대학 초임이 40원일 때이고 500원이면 웬만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때였다. 

조종과에 정식으로 입학한 것은 1926년 2월 1일이었다. 이은 왕세자는 구한국 정부 학부대신을 지낸 이용직(李容稙, 1852-1932)을 통해 거금을 기부했다. 박경원은 1926년 2월 이른 봄, 일본비행학교인 다치가와 분교에서 비행기 조종 연습을 위해 시모 다치가와 정(下立川町)으로 이사왔다. 이곳 주변은 뽕나무 밭이 많았고 붉은 바람이 유난히도 심하게 부는 곳이었다. 다치가와 역에서 북쪽으로 5분, 비행학교에서 남쪽으로 10분 거리였다. 스즈키(鈴木) 집이었다. 집은 단층 목조로 방 두 칸에 부엌, 현관, 목욕탕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지금 다마(多摩)지구에 속하는 이곳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었다. 비행장 터였다는 것 외에는 당시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비행장 터 일부인 니시 다치가와(西立川) 역 주변에는 ‘국영 소화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는데 히비야 공원의 11배 면적을 자랑하고 있다. 부근에는 히토쓰바시 대학(一橋大學)이 들어서 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다.

1927년 초까지 그녀는 194회 째 비행 기록을 세웠고 25시간 44분, 이상을 탔다. 1회 비행은 보통 3분에서 5분이므로 25시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1927년 1월 25일 그녀는 3등비행사 시험에 합격했다. 일본에 온지 3년 만이었다. 28일 면허증을 받았다.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월 29일 가마다 본교에서 졸업식이 열렸다.(동경 朝日新聞, 1927년 1월 30일자) 

그녀는 이어 2등 비행사에 도전했다. 일본 최초의 2등 여류 비행사도 탄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 7월 12일 관동비행구락부 주최로 도쿄 시부야 구(澁谷區)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제 4회 비행경기대회가 열렸다. 이때 일본비행학교에서는 박경원을 포함 네 사람이 참가했다. 그중 여류 비행사는 박경원과 같은 한국 여인 이정희(李貞喜, 1910-?), 그리고 일본 여자 1명이었다. 박경원은 고도상승 경기에서 3등으로 입상했다. 30분간 요요기 연병장 상공을 나는 것이었다. 2회, 3회 때는 입상하지 못했으나 이 때는 입상한 것이었다. 삼궁교(參宮橋)에서 시상식이 행해졌다.

박경원은 같은 해 7월 30일 2등 비행사가 됐다. 면허증 번호는 81번이었다. 여성으로는 일본인 두 명에 이어 세 번째였고 우리 나라 여자로는 모두 처음이었다. 물론 한국 최초는 안창남이었다. 그녀가 2등 비행사가 됐을 때 일본인 교장과 교관들은 “박 양은 일본 비행학교의 꽃으로서, 머리가 좋은 미인이다"고 칭찬하고 있었다.

이정희도 2등 비행사 면허를 받았다. 이정희는 박경원보다 1년 늦게 비행학교에 들어 왔다. 1927년 2월 13살 어린 나이였다. 서울의 숙명 여학교를 나온 그녀는 박경원보다 출신이 좋았다. 그녀는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와 동기동창이었다. 박경원이 동승해서 직접 조종 지도를 해주었다. 그녀는 박경원의 뒤를 이어 1927년 11월에 3등, 1929년 7월에 2등 비행사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최승희의 영향으로 무용가의 길로 진로를 바꾸고 박경원을 떠나갔다. 그녀는 1930년대 초 서울 누상동에 살다가 1933년 8월 14일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그들보다 조금 뒤에 또 한사람의 여류 비행사가 탄생한다. 그녀는 김복남(金福男)이다. 1939년 3월 2등 비행사가 되었다.

남자 비행사로는 당시 오사카의 일본항공수송연구소에 근무하는 장덕창(張德昌)이란 1등 비행사가 있었다. 박경원과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또한 강세기(姜世基)란 이름도 보인다. 그는 충청남도 출신으로 이정희와 입학 동기였다. 그는 어렵게 공부하여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땄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1929년 4월 18일 도코로자와 비행장에서 비행 연습을 하다가 추락사했다. 기체는 1미터 흙 속에 처박혀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시신도 마찬가지였다. 23세의 꿈 많은 젊은이였다. 이정희, 강세기 모두 꿈을 접고 있었다. 

다치가와 일대도 변모하고 있었다. 1929년 4월 이곳에 도쿄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민간 정기편을 운영하는 일본항공수송회사가 이 일을 맡았다. 일본과 조선 그리고 만주를 연결하는 비행장이었다. 8인승 네덜란드제 비행기와 6인승 미국제 비행기가 투입되었다. 9월 10일부터 후쿠오카-울산-경성-평양을 지나 만주 대련에 이어지는 여객 수송이 시작되었다.

시간표를 보면 아침 8시 다치가와 출항, 오사카 10시 30분 도착, 후쿠오카 밤 12시 57분 도착, 새벽 2시 50분 후쿠오카 출항, 울산에는 4시 46분 도착했다. 후쿠오카 울산은 240km구간이었다. 아침 7시 울산 출항, 서울 여의도의 일본 육군 이착륙장에는 9시 32분 도착이다. 다치가와에서 서울까지는 비행거리 1,500km였다. 물론 운임이 비싸 처음 승객은 호기심 많은 사람, 돈 많은 사람, 고관대작 등이었다.

당시 일본 비행사들은 면허를 따면 자신의 고향까지 비행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굳어져 왔다. 그들에게는 금의환향이었다. 선전 도구로도 이용되었다. 안창남의 경우도 그런 것이고, 박경원도 고향 방문을 계획하고 있었다. 1930년 현재 일본에서 2, 3등 비행사는 12명이었는데 그중 직접 비행을 하는 여류 비행사는 박경원 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여류 비행사를 꿈꾸고 있었다. 

1931년 4월 3일 그녀는 도쿄 제국호텔에서 고이스미 체신대신과 처음 만난다. 그 대신이 몇몇 여류 비행사를 점심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그녀는 고국 방문 비행기를 불하 받기를 원했다.

1931년 8월 29일에는 하네다(羽田) 공항이 개장했다. 1929년부터 하네다 앞 바다를 메워 만든 공항이었다. 다치가와의 동경국제비행장 시대는 이제 끝났다. 1967년 나리다(成田) 공항에 국제공항 지위를 물려줄 때까지만 해도 하네다는 일본의 현관이었다. 지금은 국내선 위주로 운항되고 있다.

그녀는 도코로자와 육군비행학교로부터 비행기 ‘살무손'을 불하 받았다. 무척 다행스런 일이었다. 체신대신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오해도 생겨났다. 함께 고려신사를 간다든가 개인적인 만남이 신문 가십란에 오르내렸다. 

그녀는 비행기 이름을 ‘파란 제비 호'라 붙였다. 이제 이 비행기는 그녀의 소유였다.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1931년 10월 23일)은 이를 보도하고 있다. 
“드디어 11월 20일경 정비가 완료될 전망이다. 이 조선 비행의 출발에 직접 관계가 있는 다치가와 시 및 민간 비행관계자들은 대대적으로 전송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 연락비행'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비행을 해야 했다. 제국비행협회에서 지어낸 명칭으로, 군국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녀의 고국 비행은 비행사에 뜻을 둔지 13년, 일본비행학교에 들어가서 9년, 2등 비행사가 되는데 5년이 걸린 후였다.

이즈음 그녀의 후배로 윤창현(尹昌鉉)과 윤공흠(尹公欽)이 입학한다. 윤창현은 1931년 7월 일본비행학교에 입학, 11월 2등 비행사가 되고 1932년 5월 15일 다치가와 시를 날아 서울로 갔다. 윤공흠은 윤창현보다 한달 뒤 입학하여 1932년 6월 초순 2등 면허를 땄다. 그는 조선으로 비행 중 히로시마에 불시착했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미뤄지고 있었다. 

1933년 8월 7일 오전 10시 35분 ‘파란 제비호'는 하네다 국제 비행장을 이륙했다. 그런데 이날 날씨는 아주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으나 일정 상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 1933년 8월 7일, 이륙하기 직전의 박경원, 오른 손에 일장기가 쥐어져 있다

기수는 도쿄를 벗어나 가와사키 공장지대 상공을 지났다. 멀리 잿빛 구름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도카이도선(東海道線)의 선로를 건너 에노시마(江ノ島)를 지났다. 이제 별장, 해수욕장이 즐비한 오다하라(小田原) 상공을 지나고 있다. 고도 400-500이었다. 이어 아타미를 지나 하코네 산을 넘는다. 비행 40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빽빽한 구름과 난기류가 그녀의 비행기를 둘러쌓다.  

그녀의 비행기는 11시 17분 하코네의 남쪽에서 폭음을 울린 후 사라져 버렸다. 하코네 항공 무선소에 폭음이 들려 왔다. 얼마 후 시스오카 현 전방군(田方郡) 다하촌(多賀村) 상다하(上多賀) 현악치(玄岳峙)에 기수를 거꾸로 밖은 채 그녀의 비행기가 발견되었다. 시계는 11시 25분 30초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가슴을 강타 당한 채 조종석 핸들을 잡고 죽어 있었다.  모든 꿈은 사라졌다. 33세의 생애는 마감됐다.



▲ 산중에 추락한 박경원의 비행기

서울에서 그를 기다리던 많은 군중들은 그 충격적인 뉴스에 어쩔 줄 몰라했다. 4일 후인 8월 11일 제국비행협회 강당에서 장례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일본 육군대신, 체신대신, 척무대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동군 참모장 등이 조화를 보내왔다. 그녀의 유골은 14일 오전 10시 47분 대구 역에 도착해 불교 포교원에 안치되었다.

조난 당한 그 자리에는 ‘1933년 박경원양 조난위비'라고 새긴 돌기둥이 세워졌다. 1983년 8월 7일 아타미의 의왕사(扇王寺)에서 ‘박경원 추락사 50년제’가 열렸다.

# 배경1_일본의 비행기 개발

일본의 비행기 연구 개발은 1895년 청일전쟁에 투입된 일본군의 한 병사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애원현(愛媛縣) 우화도(宇和島) 출신 이궁충팔(二宮忠八)이란 병졸이었다. 그는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제 5혼성여단의 한 병사로서 조선 땅에 들어 왔다. 그는 당시 경성 마포(麻浦)의 공덕리(孔德里)에 주둔했다. 그는 새를 자세히 관찰해 비행의 원리를 발견하고 모형비행기 실험비행에 성공했다. 그는 자기가 고안해 낸 비행기를 제작하자고 군 당국에 건의했다. 공덕리에서 그는 상관을 통해 비행기의 군사적 가치를 설파, 자신이 고안한 비행기를 군에서 채택하여 구체화하도록 건의했다. 그러나 여단장이었던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1850-1926) 소장은 이를 각하시켰다.  

일본인 최초 비행은 1910년 12월 14일에 이뤄진다. 이에 따라 일본 육군은 1911년 4월 사이타마 현 도코로자와(所澤)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수, 일본 최초의 비행장을 개설하게 된다. 본격적인 비행기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1919년에는 이곳에 육군비행학교를 개설한다. 프랑스에서 온 폴 대령이 교관으로서 항공장교를 양성한다. 도코로자와-경성간 육군대비행도 이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 배경2_다치가와 비행장

육군 다치가와 비행장은 도쿄에서 1시간 거리로 1922년 육군이 41만 5천 250평의 대지를 매입해 만든 것이다. 제5 비행연대의 비행장이었다. 제국도시 도쿄를 방위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하여 이 다치가와는 ‘하늘의 성지'라고도 했다. 비행장 공사는 히로시마의 모리타 구미(森田組)가 맡았다. 이때 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이 공사판에 투입되었다. 우리 동포들의 땀과 피가 섞여 있는 곳이다. 조선인 인부들은 삼태기로 흙을 나르고 바닥을 다듬었다. 격납고도 세우고 수리 조립공장, 막사 등도 세웠다. 1922년 3월 준공되었다. 1923년 12월 무렵에 이곳은 시골에서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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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7-15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경원..영화 '청연' 정말 감동깊게 봤어요. 실제 사진과 기사를 보니 다시 영화가 보고싶어 지네요..^^

sb 2007-07-1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식민지 조선의 시각과 여성의 시각이 결합되어 있는 영화로 봤어요. 특징적인 점은, 주인공인 박경원이 당 시대의 주된 역사적 이슈(식민지배)에서 한발자국 물러나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극 고유의 분위기를 해치기는 커녕 더욱 자연스러운 빛을 낸다는 것이에요. 약간 부족하게 느껴지는 CG와 시나리오가 아쉽지만, 꼭 박수를 보내주고 싶은 역사영화였습니다. Jade 님은 어떤 부분이 감동깊으셨어요? 역사영화를 주제로 테마카페도 개설해봤는데, 알라디너들의 관심을 한참 벗어났나봐요.

비로그인 2007-07-15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연>, 인상깊은 영화였어요. 배우들도 다 괜찮고... 친일적인 영화가 아니냐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그런 영화로 봐지진 않았어요. "조선이 네게 해 준 게 뭔데?" 였던가.. 비슷한 대사가 인상깊었어요. 한 개인의 소망이 식민지배와 같은 큰 역사흐름 속에서 어떤 질곡을 겪을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글을 읽으니 다시 보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sb 2007-07-16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일이냐 아니냐'라는 질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사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대답은 '그렇다'가 될거에요. 스무살 이후로 계속 일본에 살았고, 일본의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박경원이 친하고 싶었던 일본은, 비행학교가 있는 나라였을 뿐, 식민통치를 하는 나라는 아니었거든요. 2등 비행사 자격을 딴 이후, 그토록 열망했던 조선으로의 고국비행이 식민통치에 신음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저 푸른 제비가 많은 고향이었던 것 처럼요.
그런 점에서는 '조선 최초의 여류비행사'라는 칭찬이든 '친일파'라는 비판이든, 그녀를 이해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아요.

sb 2007-07-16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서울1945> 후기에도 댓글 달아주셨었죠? 저하고 취향이 비슷해 반가워요. ^^
 
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 제가 얼마 전부터 마이리스트를 만들어 한국 역사영화를 갈무리하고 있는데요, 오늘도 <도마 안중근>과 <박하사탕>을 새로 추가했습니다. 기억에 있는 만큼은 모두 담았는데, 역시 빠진 작품들이 많이 있네요.

- 영화에서는 사극이나 시대극이 TV 드라마에서 만큼의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역사영화로 한국 역사의 지도를 대략 그려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겁니다. 나중에 누군가에게 쓸모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구요.

- 단순히 영화를 모으는 것도 좋구요, 영화에 대한 짤막한 감상, 기획과 제작 상영과 관련한 기사와 평론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야기꽃을 피워봤으면 좋겠네요.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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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재밌는 역사 이야기
    from 2007-07-26 14:48 
    국사교과서에선 볼 수 없었던 볼거리들이 제공되어서 좋았다. 꿈이라... 처음에는 신빙성이 없는 듯 생각되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 빠져들며 거듭 감탄사를 날리게 되었다. 누구나 꾸는 꿈... 때론 미신처럼 여겨지기도 한... 그러나 이토록 많은 역사서에 다양한 꿈들이 남아 있으며, 그 꿈으로 국난이나 자신의 운명을 예지한 기록들이 있다. 역사에서 조금은 소외되었던 이야기들이지만, 읽는 재미는 만만치 않고, 부수적인 역사 이야기를 보며 읽으
  2. 화려한 휴가
    from jade's room 2007-07-27 08:08 
    화려한 휴가. 그날의 광주를 전면으로 다루는 영상물에 대한 기대였을까. 얼마전에 망월동을 다녀온 후라 손꼽으며 개봉을 기다려 왔었다. 책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어떻게 그려졌을까 떠올리며..두시간짜리 영상물에 담기는 광주의 진실이 너무도 벅찼던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서 기분이 영 좋지 않다. 광주가 - 현대사를 수놓은 여러 다른 비극적인 사건들과 비교해서 - 민주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건, 폭력성의 정도가 짙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단 며칠뿐이었지만 광
  3. 우리 것을 바로 알아야지
    from 2007-07-27 17:40 
    우리 것을 잘 알아야지. 내가 배웠던 역사와는 많이 달라진 것들이 너무 많다. 역사도 시대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나 보다.
  4. ddddd
    from 2007-08-03 12:08 
    ddddddddddddddddddddddddddweeedddddddde
 
 
sb 2007-08-23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처음으로 테마 카페를 만들었는데, 첫 댓글이군요. 거의 한 달이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 엊그제 관객 1,000만을 넘길 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어요. 3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 이렇게 이슈파이팅 한다는게,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기도 하죠. 소설이나 연구자료는 소수자들의 영역이니 그렇다 쳐도, 대중매체인 TV에서 <모래시계>나 <제5공화국> 같은 드라마가 518을 다루었는데 이렇게까지 이슈파이팅 할 줄이야.

- 이제 대중매체들도 슬픔이나 비극 이상으로 좀 더 본질적이고 깊은 얘기들을 다뤘으면 해요. 영화까지 제작되었으니, 그 정도 역량을 갖추었다는걸 보여줬다고 생각하거든요. <윤상원 평전>에서 다루고 있는 수습위원회와 <투사회보>와의 갈등이라던지, 공선옥 소설가가 다루고 있는 518 이후에 살아남아 폐인이 되거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광주의 이야기들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졌으면 해요. 모든 광주 시민이 도청과 망월동에 묻힌 것은 아니고, 우리가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건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