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일부만 임의로 편집함)

신군부가 1980년 10월27일 대한불교조계종(조계종)의 스님과 불교 관련 인사 등 153명을 강제연행하고 전국의 사찰.암자 5천731곳을 일제 수색했던 이른바 '10.27 법난' 사건의 진상이 규명됐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는 25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10.27 법난 사건의 전후과정을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높고, 법난 사건이 신군부세력에 비우호적인 조계종 월주 총무원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서 비롯됐다는 사실들을 밝혀냈다.

◇ 월주 총무원장, 신군부와 문화공보부에 밉보여 = 과거사위는 10.27 법난사건이 신군부세력에 비우호적인 조계종 월주 총무원장에 대한 신군부와 문공부의 부정적인 평가에서 시작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월주 스님을 중심으로 한 개운사측에 대해 이념적 측면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문공부는 승려들이 사회민주화세력과 연합해 고질적인 저항세력으로 성장할 우려가 크다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 합수단, 1980년 9월부터 불교계 수사준비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1980년 6월께 '3단계 사회정화계획'을 추진했으며 종교계는 3단계인 10월부터 숙정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국보위의 수사지시를 받은 합동수사단은 9월부터 조계종단을 정화수사 대상으로 결정하고 수사준비에 착수했다.

10월27일 새벽부터 연행대상 69명 가운데 45명이 체포돼 서울 보안사 서빙고분실과 각 지역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으며 혐의 인정을 강요받았다. 이어 당시 맡고있던 직책의 사직도 종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 "군홧발 무자비한 법당 난입" = 당시 연행됐던 활성 스님은 "10월 말께 문경 봉암사로 쳐들어온 군인들은 모든 스님들을 법당 앞으로 모이게 하고 줄을 세웠다. 이 때 조실 스님까지 줄에 세우라고 명령했다. 너무 황망하고 무례한 사건을 당한 후 모든 수좌승들은 분노했다"고 당시 회고를 했다.

수사기관에 연행된 스님들은 무릎을 꿇게 한 상태에서 각목을 집어넣고 무릎 누르기, 새끼 손가락에 볼펜을 끼워놓은 상태에서 조이기, 잠 안재우기, 코와 입에 고춧가루와 빙초산 섞은 물 붓기,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온갖 가혹행위가 자행됐다. 손에 납덩이를 올려놓고 전기를 통하게 하는 전기고문, 군홧발로 밟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기, 폭언 등도 비일비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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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선조 22년) 10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1천여명이 처형당하거나 고문받다가 또는 귀양 중에 숨지고 투옥당하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무오·갑자·기묘·을사 4대 사화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기축옥사는 당시 인구 500만이던 조선 전토를 참화 속에 몰아넣었다. 뒤이은 임진년 왜란조차 기축옥사의 황폐가 부른 재앙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사태는 참혹했다. 그 중심에 정6품 홍문관 수찬에 올랐던 당대의 귀재 정여립(1546~1589) 모반사건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다산초당)은 바로 정여립 모반사건의 시대적 배경과 연루된 인물들을 종횡으로 추적한다. “조선왕조는 정여립 사건 이후 300년을 더 버텼다. 하지만 영·정조 때 잠깐 불꽃을 피워올렸을 뿐 지리멸렬했다. 그때가 개국한 지 200년이었는데, 한 왕조의 수명은 200년 정도면 족하다는 얘기들이 많다. 그때 차라리 정여립이 반란에 성공했거나 다른 왕조가 시작됐더라면 이후 우리에겐 새 역사가 전개됐을 것이다.” 전주 황토현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서울에 사무실을 둔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대표도 맡고 있는 ‘문화사학자’ 신정일(53)씨. “1980년대 말부터 정여립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으니 20여년간 공부해온 셈이다.”

정여립은 정말 반란을 꾀했을까? 실은 이 기초적인 사실조차 규명돼 있지 않다. 사건조사기록 <기축옥안>은 임진란에 불탔고, 남아 있는 얘기들은 당파에 따라 극단으로 엇갈려 어느쪽이 진실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정여립은 행적이 모두 말살돼 남들이 전하는 얘기 외에 그가 쓴 문서 하나 남은 게 없다. 유혈낭자했던 그 ‘최대의 역모사건’은 애초부터 시비를 가릴 아무런 물증도 없었다. 동서 ‘붕당’의 파벌전쟁 속에 고변과 음해, 아비규환의 고문과 자백만으로 엮어낸 대숙청극이었다. 그래서 완전한 날조극이라는 주장이 예부터 있었다.

지은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정여립이 모반을 꿈꾸고 준비를 한 것은 사실이다. 50%가 날조된 옥사이고 50%가 정여립의 역모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시인 김지하씨는 정여립을 “(세상 뒤엎기를) 하다 만 사람”이라 평했다.

사건은 발생 초기 선조(1552~1608)마저 거의 뜬소문으로 여길만큼 첩보조차 구체성이 없었다. 조정은 정여립이 붙잡혀 와 자초지종을 고하기만 해도 해소될 별볼일 없는 무고사건 정도로 여겼으나 첫 비밀장계가 뜬 지 닷새 뒤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장계가 떴고 곧 다시 그가 자살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가 도망쳐서 자살했다는 것은 곧 실제 반역을 꾀했다는 얘기가 된다.” 지은이는 이를 당시 정권에서 소외돼 있던 서인들이 정권 재탈환을 위해 정여립 일당을 이용한 모략극으로 본다. “기축옥사 최고 지휘관이 정철이었다면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은 송익필이었다.” 토정 이지함이 율곡 이이, 성혼과 더불어 시대의 스승으로 꼽았던 서인 송익필은 조선중기 8대 문장가에 들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나 아버지 송사련이 기묘사화 때 사건을 날조해 좌의정 안당 가문에 멸문지화를 안긴 과거사 때문에 동인의 핵심 제거대상이 됐고 마침내 동인 이발 등이 나서 송익필의 조모가 원래 안씨 가문 노비였던 걸 들춰내 송씨 일가를 모두 노비신분으로 ‘환천’시켜버렸다. 

가문 몰락의 한을 품고 보복의 기회만 노리던 송익필은 낙향한 뒤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운 반왕조적 대동사상에 빠져 이상사회를 꿈꾸던 정여립의 대동계를 반격의 고리로 활용했다.

신씨는 <동소만록>에 나오는 “정여립이 진안 죽도로 단풍놀이 삼아 놀러 갔는데 선전관과 진안현감이 죽인 후 자결한 것으로 했다”는 기록을 믿는다. 정여립이 고변으로 역모가 들통나자 도망친 것이 아니라 서인 쪽이 미리 심어놓은 진안현감 민인백 등이 단풍놀이 가자며 정여립을 죽도로 유인한 뒤 죽여버리고는 도망치다 자살했다고 보고함으로써 역모사건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건조사 총책임자가 된 서인의 행동대장 정철은 보고가 올라오기도 전에 정여립이 도망갔을 것이라 발설했다. 사전에 다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신씨는 단재 신채호도 “동양의 위인”이라 칭송한 “당대의 인물” 정여립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기록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얘기가 세월 갈수록 그에겐 더욱 깊게 와 닿는다. 하지만 ‘정여립이 억울하게 당했다’며 그의 누명 벗기기에 골몰하는 역모사건 날조설엔 부정적 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해서는 영국의 크롬웰보다 50년이나 더 앞선 공화주의자였던 정여립의 진보적 개혁사상을 재조명할 수도 없고, 역사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축기사>에는 정여립이 남겼다는 몇 마디 말이 기록돼 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유비의 촉한이 아니라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직필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유하혜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는데….” 가히 혁명적이다.

신씨는 “정여립의 대동사상이 허균의 호민론으로, 그리고 다산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으며 근대의 동학사상과 강증산의 화엄적 후천개벽사상, 미륵신앙도 그 줄기로 엮여져 있다”고 본다. 민중은 새 세상을 염원했다.

<한국사의 변혁을 꿈꾼 사람들>, <섬진강 따라걷기>, <다시 쓰는 택리지>, 그리고 이번 책까지 33권의 책을 써낸 신씨는 그 자신이 학위날조로 얼룩진 요즘 세태에 대한 하나의 ‘모반’이요 ‘풍자’처럼 보인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그는 진안 백운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 중·고교 모두 검정고시로 넘었고 대학은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옛문서들을 웬만큼 읽어낼 수 있게 된 것도 오직 독학한 덕”이다. “학벌 없어 당한 설움은 말도 못할 정도였다. 이젠 그게 오히려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야말로 학맥 학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통합적으로 쓸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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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2008년 사극의 시계는 앞으로 당겨질까? 193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전설적인 마피아 보스 제이슨 리(이장손·사진) 일대기를 담은 <자이언트>, 가수 이난영(사진)을 그린 <목포의 눈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를 다룬 <비운의 이방자 여사> 등 20세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이 줄줄이 제작을 앞두고 있다.

이는 사극 열풍이 우리 시대 가까운 역사로까지 확대됐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전 같으면 20세기를 그린 시대물은 대부분 시대 배경만 빌어 쓰는 허구적인 드라마로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사극과 구분됐다. 그런데 2008년 예정작 가운데 <단군> <일지매> <홍길동>은 고대와 중세를 배경으로 허구와 상상력을 강조하는 반면에 20세기 실존 인물을 다룬 드라마들은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한 역사극에 가깝다.

<다모> <주몽>의 정형수 작가가 집필하는 <자이언트>는 100여년 전 미국 뒷골목을 실감나게 재현하기 위해 미국 쪽 작가진이 합류할 예정이다. 가수 이난영의 굴곡진 인생사와 주변 음악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목포의 눈물>은 이선희 작가가 여러 해 동안 연대기와 관련 자료들을 취재해온 결과물이다. 이 작가는 해방 전후 가요사와 문화적 분위기를 꼼꼼히 고증한 데다가 이난영씨의 유족들을 통해 인간 이난영의 캐릭터를 되살리는 작업을 거쳤다.

작가들이 ‘20세기 역사극’에 도전하는 이유는 압제와 전쟁의 시대 자체가 어떤 작가의 상상력보다 극적이기 때문이다. 또 채 잊혀지지 않은 20세기 초반 인물들의 영화와 부침은 실감나는 역사극의 재료라는 것이다. 이선희 작가는 “일제시대와 전쟁, 만주·일본·한반도를 활동 무대로 했던 한 스타의 사랑과 욕망의 과정을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동경과 공감을 얻기에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이방자 여사 일대기를 준비하는 정하연 작가는 “격렬하고 자극적인 사극이 유행하는 경향이지만, 가까운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인물의 이야기는 굳이 허구적인 재구성이나 자극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며 “극화를 배격하고 사실에 충실한 사극의 원형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20세기 역사극’은 퓨전, 판타지 사극이 방치했던 사료와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돌리고, 퇴행하는 사극을 견인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지만 그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에스비에스 구본근 드라마 국장은 “요즘 사극은 영웅과 승리를 지향하는 경향인데 암울한 시기를 재현한 역사물이 과연 대중성이 있을지를 심각하게 고민중”이라고 말했다. 제작과 편성에서부터 난관에 부딪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또 드라마 <서울 1945>를 둘러싼 논란처럼 근현대사에 따르는 이념 시비와 유족들의 이의제기는 제작진들의 사전검열을 부추긴다. 현실과의 긴장관계는 ‘20세기 역사극’의 자산이자 걸림돌이 될 것이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사진한국방송,목포문화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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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KISTI 과학칼럼 발췌)

〈별순검〉을 부활시킨 건 결국 팬들이었다. 팬들의 이어진 요구에 문화방송 계열의 엠비시드라마넷이 자체제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년 전부터 기획에 들어가 드디어 첫 작품을 내놓았다. 류승룡·박효주·온주완·안내상·김무열 등 출연배우는 이전과 달라졌지만, 연출자와 작가 등 제작진은 대부분 그대로다. 팬들 사이에선 배우 교체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그러나 이날 시사회는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시사회에서 공개된 1화는 기존의 〈별순검〉이 가졌던 매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지금 봐도 무릎을 칠 법한 개화기 과학수사대의 체계적인 수사기법이 곳곳에서 빛난다. 또 시청자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를 만끽하도록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극 전개는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다. 매 화마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마무리짓는 형식 또한 무게와 부담을 줄인다.

그렇다고 드라마가 가볍기만 한 건 아니다. 〈별순검〉의 진짜 주인공은 수사대원들이 아니라 사건에 얽힌 민초들이다. 사건의 비밀과 함께 하나하나 드러나는 민초들의 드라마틱한 삶은 그 자체로 커다란 재미와 감동을 준다. 신분 해방을 외치며 길에서 담배 시위를 벌였던 백정들, 지금의 연예계처럼 계약금에 따라 기방을 옮겼다는 기생, 갑오개혁 이후 극심한 격변의 중심에 있었던 중인, 보부상 등 다양한 계층의 애환 섞인 얘기들이 에피소드마다 녹아들어 적잖은 무게감을 더한다.

반응이 좋으면 시즌 2, 시즌 3 등 시즌제로 이어갈 거라 한다. 문화방송 지상파에 정규편성하는 방안도 타진중이다. 일반적으로 지상파에 방송된 뒤 케이블방송을 타는 일반적인 드라마 공식을 〈별순검〉이 뒤집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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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판 CSI - 영화 '혈의누'의 과학수사관 
 
고립된 외딴 섬 ‘동화도’에서 일어난 참혹한 연쇄살인사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조선시대 수사관 원규(차승원), 과연 그는 살인사건의 전모를 밝혀낼 수 있을까? 이는 영화 ‘혈의 누’의 예고편의 한 장면.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과학적인 수사 모습은 현대 범죄 수사 못지않았다. 또한 외화 시리즈인 ‘CSI(Crime Scene Investigation)’가 인기를 끄는 것도 꼼꼼한 증거수집 및 추리 과정이 첨단 과학기술과 어우러진 덕분이다.

그렇다면 과연 옛날에 과학수사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을까? 영화 ‘혈의누’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만 해도 상당히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를 둔 수사 기법들이 활용되었으며 법의학서에도 나와 있었다.  

조선시대에 법의학서로 유용하게 읽힌 것은 ‘무원록(無寃綠)’이라는 책으로서 원래는 중국 원나라 때 왕여(王與)라는 사람이 지은 것인데, 15세기 초 세종이 우리 실정에 맞게 다듬고 주석을 달게 해서 새롭게 신주무원록(新註無寃綠)으로 고쳐서 냈다. 그리고 18세기 말에는 영조가 이를 또 보완하여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으로 내놓은 바 있다. 원제인 ‘무원록’이란 ‘원이 없도록 한다’, 즉 죽은 자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도록 한다는 뜻이다.

당시의 검시 제도는 오늘날처럼 부검은 아니었다. 유교적 윤리의식 때문에 시신에 칼을 대어 해부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던 것이다. 그 대신 최소한 두 번, 또는 세 번까지도 각각 다른 사람이 검시를 반복하도록 해서 가능한 한 공정성을 기하도록 했다. 일반적인 검시 방법은 이랬다. 부검을 하지 않는 대신 시신의 상태나 주변 정황을 꼼꼼히 살핀다. 예를 들어 얼굴색도 진한 붉음, 검붉음, 누렇게 붉음, 시퍼렇게 붉음, 창백하게 붉음, 연하게 붉음 등 여러 가지 경우로 나누어 기록했는데, 만약 목이 졸려 죽은 자라면 정맥만 막히므로 피가 머리 쪽으로 몰려 얼굴색이 검붉게 된다. 이 경우 설령 목을 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타살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목을 매달았다면 정맥과 동맥이 모두 막혀서 얼굴에 검붉은 울혈이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검시 기술이 색깔에 의존하고 있다 보니 범인들이 살해 흔적을 위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가령 흉기로 구타해 살해한 뒤 푸르거나 붉은 색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범인들은 꼭두서니 풀을 식초에 담갔다가 상처에 발라 상흔을 제거했다. 이에 대해 조선의 법의학서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흔이 의심스러우면 사또는 반드시 감초즙으로 해당 부위를 닦도록 하라. 진짜 상처가 있었다면 즉시 나타날 것이다.’ 이는 경험으로 알게 된 산과 알칼리의 중화 반응을 활용한 것이다.

독극물 검사법도 있었다. 유황이나 비소 등은 은과 반응하여 검은 막을 형성하는데, 바로 이런 원리를 이용하여 은비녀를 죽은 자의 구강과 식도에 밀어 넣은 뒤 색이 변하는지 관찰하여 독살인지 아닌지를 밝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도 잘 판단이 안 될 때에는 밥 한 숟가락을 죽은 자의 입이나 식도에 넣어 두고 종이로 봉해두기도 했다. 나중에 밥을 꺼내어 닭에게 먹여봐서 죽으면 이 역시 독사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물에서 발견된 시신이 정말 익사한 것인지 알아보는 방법도 있었다. 만일 입과 코에서 하얀 물거품이 나오지 않는다면 물에 빠지기 전에 이미 죽은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익사한 사람은 급하게 호흡을 하려다가 물을 들이마시게 되는데 이때 기관지에 남아있던 공기와 점액이 물과 섞여 자잘한 흰 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남자가 익사하면 엎드린 자세가 되고 여자는 드러눕는 모양이 된다고도 했지만,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다. 남자의 양기는 얼굴에 모이고 여자의 음기는 등에 모인다고 본 것인데, 실제로는 남녀 모두 엎드린 상태가 된다고 한다. 머리와 사지 부분이 몸통보다 비중이 커서 아래쪽으로 늘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불에 탄 시신의 경우 현대 법의학과 마찬가지로 입과 코 안에 재나 그을음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만약 재가 있다면 불에 타 죽은 것이고, 없다면 그 전에 죽은 것이다. 불이 났을 당시에 살아 있었다면 숨을 쉬면서 재도 들이마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잘 살피면 시신이 불에 타 죽었는지, 아니면 이미 살해당한 상태에서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위장되었는지도 판별해 낼 수 있었다.

그밖에도 조선시대의 법의학 지식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내용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정확한 지식들도 적지 않았다. 친자감별법이나 처녀성의 판단법 등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 경우도 있으며, 사람이 이빨로 물면 독이 스며든다고 본 것도 2차 감염 현상과 혼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원록의 내용들엔 당시의 과학을 총동원해서 엄정하게 범죄를 수사하겠다는 의지가 집약되어 있다. 비록 현대의 과학수사 기법보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뒤떨어졌을지 몰라도 그 정신만은 지금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은 것이다. (글: 박상준 -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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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매년 국군의 날이 가까워올 때마다 “올해도 그냥 넘어가는구나” 하고 가슴이 메어진다. 친일 앞잡이들 일색의 이승만 정부 국무회의에서 “38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국군의 날을 10월1일로 간단히 결정해 버렸다.

친일 마수의 괴력이 지금까지 뻗어 있어서일까? 국회의원들과 시민사회가 그렇게 줄기차게 날짜 변경을 주장해 왔건만 무슨 영문인지 묵묵부답이다. 국군 통수권자께서 “군도 역사를 바로 세워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도록 하라”고 했는데도 군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핵심 고리인 이 문제에 대해선 우이독경이다.

일본군 출신들과 독재 권력 아래 철저히 세뇌되고 극우화된 재향군인회와 성우회 등 직업군인 출신들에 압도되어서인지 역대 정부 모두 나몰라라 손을 놓고 있다. 심지어 그동안에는 전혀 사실이 아닌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군의 날 축소설”을 예의 선동 신문과 당국이 주고받는 언론 플레이를 통해 청와대를 압박하며 국군의 날을 원래대로 되돌려 국민적 축제로 만들려는 시민적 요구를 일축하고 있다.

이렇게 국군의 날 하나도 제대로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군은 아직도 친일 앞잡이들의 망령에 잠식되어 있으며, 군사쿠데타 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현역 장병이나 제대 군인 누구에게나 물어보라. “국군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가?”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자부심이 매우 희박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부심 없는 군대는 사기가 없는 죽은 군대다. 자부심이 없으면 하급자를 못살게 군다. 전장에서 부녀자를 성폭행하고 민간인을 학살하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제주 4·3 학살, 여순 학살, 구례 학살, 임실 학살, 함평 학살, 그리고 5·18 광주 학살 …. 이 모두 민족적 자존심이 없는 상관의 지시에 따라 저지른 짓이었다. 민족적 자부심 없이 어떻게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친일 앞잡이들은 민족정기를 자르고 민족혼이 죽은 군대로 만들고자 절치부심해 왔다.

자부심은 국군의 역사를 통해 터득되고 함양된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 바로 국군의 날이다. 국군의 날을 어떤 날로 하고 있느냐는 장병 정신교육의 기본이 되며, 군대문화 및 의식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국군 창설의 목적과 의의를 되새겨 국군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자부심을 드높이는 뜻깊은 탄생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국군의 자랑스러운 항일 무장투쟁 역사를 도외시하고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에 의미를 부여한 날을 기념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의가 퇴색되었다. 오로지 ‘북진통일!’ ‘쳐부수자 공산당!’ 따위의 냉전의식 세뇌를 위한 근거로 활용하고자 급조된 날인 10월1일은 통일을 준비하는 시대정신에 역행한다.

우리나라 헌법에 명시된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법통은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체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기에 임시정부의 정식 군대였던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이 국군의 날이 되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국군의 날을 개정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해 온 자랑스러운 자주적 민족의 군대라는 국군의 정체성을 분명히해야 한다. 그리하여 바로잡은 국군의 날을 국민의 축제로 만들어 국군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을 획기적으로 드높이자. 이는 왜곡된 군 과거사 정리를 마무리하는 결정적 조처며, 통일을 준비하는 평화지향의 국방정책 구현에도 기여할 것이다. 참여정부에서 반드시 매듭짓기를 당부한다.

표명렬/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 예비역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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