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컬과 시큰둥, 둘 다 차갑고 부정적인 거 아니냐. 아니다. 다르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다. 시니컬, 이건 기본적으로 방어기제다. 상처받기 싫은 거다. 해서 항상 세상만사로부터 자신을 일정 거리 이상 떨어뜨려 놓는다. 그 복사에너지가 제 몸에 닿지 않도록. 그렇게 의도적으로 확보한 간격 덕에 비로소 매사를 차갑게 대면할 수가 있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시니컬한 자들, 냉정한 게 아니고 실은 무서운 거다. 흥분과 기대가 실패와 좌절로 마무리된 경험을 반복하기 두려운 나머지, 아예 긍정적 전망을 스스로 절개해내는 정신적 외과수술로, 그로 인한 통증을 미리 소거하는 자기보호 수단이라고.

그렇게 시니컬이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거라면, 시큰둥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거다. 자신이라고 그 어떤 운명으로부터도 특별히 더 예외적일 수는 없다는 걸 묵묵히 수용하는 거다. 그 어떤 신에게, 제아무리 기도해도, 자기 하나를 위해 우주의 질서가 역행하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거라고. 그래서 통증이 없어진단 소리가 아니다. 당연히 그래도 아프다.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슬프지 않은 거다. 제 운명이. 거기서 좌절과 차이가 난다.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간격을 만들어 스스로를 시큰둥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자기객관화에 도달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지성은 출발하는 거다.

(한겨레/ 김어준의 '그까이거 아나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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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어느 지회에서 열린 인문학 강좌에 가서 ‘인문학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지속하는 것이며 그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인문정신은 적어도 ‘그래도 현실이..’ 따위 말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할 바엔 적어도 당장 책읽기를 중단하라’ 따위 이야기를 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한 교사가 “10년 전 학교에서 강연을 들었다. 그때 질문을 하고 B급좌파를 선물 받았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본 듯한 얼굴이라 어디에서였냐고 불었더니 고대였단다. 10년 전 고대라.. 질문의 요지는 이랬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길을 가고 있다. 그땐 좀 무섭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오늘 보니 그때보다 오히려 더 편안해 보인다. 비결이 뭔가.’ 동료 교사들이 자글자글 웃고 나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편하게 사니까 편해 보이는 거겠죠. 나는 옳은 삶을 선택한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삶을 선택하고 있어요. 물론 불편한 점도 있긴 하죠. 하지만 자기존중을 유지할 수 있고, 내 아이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 하지 않고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만나지 않고 사니 마음 편하고. 삶에서 그런 걸 포기할 만큼 가치 있는 게 따로 있는지 난 모르겠어요.’ (출처: 규항넷/ 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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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으로 꼽히는 나라들 가운데 성적표에 석차(등수)를 표기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성적표에 표기되는 내신석차는 사실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것이다. 나머지 선진국들은 평점(A, B, C…) 또는 점수만 표기한다. 왜 그럴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석차는 이사(전학) 가면 바뀌게 되어 있다. 분당에 사는 학생이 대치동으로 이사하면 석차가 내려갈 것이고, 수원으로 이사하면 석차가 올라갈 것이다. 즉 내신석차는 객관적인 성취도를 보여주지 못한다. 게다가 내신석차는 학교에서 이뤄지는 교육의 질을 반영하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 학교교육의 질과 효율이 높아지든 낮아지든 어차피 똑같이 일등에서 꼴찌까지 매겨질 것이 아닌가?

둘째, 내신석차는 교사들의 수업을 획일화시킨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성적표에는 ‘학년 석차’가 매겨지는데, 이로 인해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갑 선생님이 1, 2반을 가르치고 을 선생님이 3, 4반을 가르친다면, 당연히 갑 선생님은 1, 2반만 평가하고 을 선생님은 3, 4반만 평가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학년 단위로 석차를 매겨야 하기 때문에, 1반에서 4반까지 똑같은 시험문제를 내야 하고, 똑같은 수행평가를 해야 하며, 성적에 반영되는 과제물은 똑같이 내줘야 한다. 결국 갑과 을 선생님은 ‘똑같이 가르치자’고 합의할 수밖에 없다! 교사 개개인의 노하우나 특성이 반영될 여지가 거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붕어빵 교육’의 원인은 획일적인 대학입시나 교육과정의 경직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년별 석차야말로 붕어빵 교육을 떠받치는 가장 기초적인 요인이다.

셋째, 내신석차는 동료들을 협력자가 아니라 경쟁자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최악의 상황은 이과반이 1개밖에 없는 여고들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내신 1등급(석차백분율 4%)을 받을 수 있는 학생은 단 한 명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서술형·논술형 평가가 정착되기란 매우 어렵다. 석차에 민감해진 학생들이 ‘왜 쟤는 10등이고 나는 11등이냐’는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교사는 결국 기계적인 채점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무늬만 서술형’ 문제를 출제할 수밖에 없다. 특히 협동학습이나 프로젝트수업과 같은 진보적인 수업모델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진다. 개인별로 매겨지는 석차를 높이려면 동료를 제쳐야지, 동료를 도와줘선 안 될 일이다. 그러니 무슨 놈의 협동이고 프로젝트인가.

진보진영은 내신성적을 선호한다. ‘교육희망네트워크’에서 정리한 ‘10대 의제’를 보면, 수능과 일제고사를 폐지하자는 항목이 나온다. 이것은 석차에 기반한 내신성적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진보진영의 무신경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구습’일 뿐이다. 내신석차를 내버려두고 수능을 폐지하면, 고등학교는 일본 영화 <배틀 로얄>처럼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살벌한 전쟁터가 될 것 아닌가? 참여정부의 내신위주 대입제도를 경험한 2008학번들에게 물어보라. 고1 1학기 중간고사를 보고 자살한 학생이 여럿 있었다.

대학에서 내신성적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나라들이 있기는 하다. 스웨덴과 캐나다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나라들은 학벌 문제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미약하기 때문에 내신성적으로 선발해도 큰 무리가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나라들의 내신은 상대평가가 아니다. 게다가 스웨덴에서는 내신성적이 나쁜 학생들에게 별도의 대입 국가고시를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일종의 패자부활전인 것이다. 수능과 일제고사로 전국적으로 줄 세우는 것이 비인간적이라고? 학교별로 학생들을 가둬놓고 이들 사이에서 줄 세우는 것이 더 비인간적이다! (한겨레/ 이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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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벌리힐스 고등학교 케네스 교장은 오늘, 다음주 목요일 새크라멘토에서 열리는 전 교직원이 참석하는 워크숍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훌륭한 기자라면 이 소식을 어떻게 학생들에게 전할까? 경영컨설턴트인 칩 히스와 댄 히스는 기사의 글머리인 리드(lead)를 이렇게 뽑으라고 충고한다. “목요일 학교 수업 없음.”

텁텁한 내용도 포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맛깔스럽게 바뀔 수 있다. 설득이 기술인 수사학(rhetoric)은 스티커처럼 두뇌에 내가 전하려는 바를 딱 달라붙게 만드는 기술이다.

자신이 뜻한 바를 분명하게 전달하려면 내용이 단순해야 한다. 법정에서 들이댄 근거 열 개가 모두 훌륭하다면, 이유를 하나만 들었을 때보다 설득력이 되레 떨어지기 쉽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전쟁은 언제나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군대는 전투가 일어나면 10분 안에 쓸모없어질 계획을 세우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군대에서는 계획보다 ‘지휘관의 의도’(Commander’s Intent)를 분명히 하는 데 힘을 쏟는단다. “오늘 밤까지 이 지역을 지켜낸다.”라는 명령은 “몇 시 몇 분까지 어디로 이동해서 무슨 일을 해라.”라는 지시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계획이 엉클어져도 목적이 무엇인지를 놓치지 않으면 작전의 맥은 끊기지 않는다. 모든 논리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다음은 사람들이 내 의견에 귀 기울이도록 만들어야 할 차례다. 관심을 끄는 데 있어 “상식은 적이다.” 호기심을 일깨우려면 사람들의 두뇌를 헛헛하게 만들어야 한다. 미국 50개 주의 수도 가운데 17개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다른 이는 50개 가운데 47개 주의 수도를 안다. 둘 가운데 누가 더 수도를 알아가는 데 관심이 있을까? 당연히 47개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낱말 십자풀이 게임도 마찬가지다. 알고 있는 지식에 ‘공백’이 있음을 느낄 때, 호기심은 불같이 일어난다. 마치 등 가운데가 가려운데도 긁지 못할 때처럼 말이다.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 나의 주장을 받아들이게끔 설득할 차례다. 먼저, 상대가 화를 내지 않도록 신경써야 한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자기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어 버린다.

상대가 차분한 마음 상태에 있다면, 본격적으로 논리를 펼쳐 보자. 루브르궁에서 루이 15세를 지키던 스위스 용병들은 전원 용감하게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남의 나라 왕을 위해 생명을 바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왕을 위해 싸우면 엄청난 황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정작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던졌다. 그들은 ‘스위스 용병은 용맹한 진짜 군인’이라는 명예에 상처를 입는 일이 죽음보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대방에게 뭐가 이익이 될지 내세우기보다는 ‘정체성의 욕구’에 호소하는 쪽이 낫다.

돈과 이익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어렵다. 잇속이 달라지면 언제든 나를 차버리고 가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너는 그런 사람 아니잖아!”라며 나의 기대를 절절하게 심어 놓은 사람은 절대 나를 배신하지 못한다. 나를 버리기에 앞서 자기 스스로를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내 주장에 고개를 주억거린다면, 마지막으로 바라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게 할 차례다. 이때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은 상대의 결심을 확실하게 만든다. 우리 두뇌는 상상과 실제를 잘 가려내지 못한다. 눈을 감고 에펠탑을 떠올려 보라. 눈동자는 어느새 탑의 높이를 좇아 위를 향하고 있다.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감각은 마치 현실을 느끼는 양 생생하게 살아난다.

상대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로 그려주도록 하라. ‘정의’, ‘평등’ 같은 추상적인 소리들은 오해를 사기 쉽다. 듣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 제각각인 탓이다. 반면, 구체적인 이미지로 꾸려진 이야기에서는 딴소리가 나올 여지가 없다. 이솝 우화의 신포도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신맛 나는 포도와 여우, 높은 덩굴 등등 하나하나의 이미지가 눈에 그려지듯 생생하다.

상대를 설득하는 수사학은 오래된 기술이다. 수사학은 민주주의와 궁합이 잘 맞는다. 힘센 왕에게는 수사학이 소용이 없다. 힘으로 누르면 되는데 설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절대강자가 없다. 그러니 끊임없이 상대를 구슬리며 마음을 사야 한다.

황제가 다스리기 전 로마에서 키케로는 최고의 수사학자였다. 그는 영향력 있는 원로원 의원이기도 했다. 로마의 원로원에서 제대로 행세하려면 최고의 수사학 실력도 필요했다. 그렇지 못하다면 숱한 의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했을 테다.

이런 키케로도 마지막에는 목과 손이 잘려 로마에 전시되는 끔찍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수사학은 항상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시기에 꽃을 피운다. 그리스가 몰락하기 직전, 소피스트들은 말장난의 달인들이었다. 당파끼리 논리 싸움이 치열했던 조선 말기의 현실은 어떤가? 수사학자들이 이끌어 가던 세상은 과연 아름다웠던가?

인간의 영혼은 말재주가 정신보다 화려해질 때 썩어가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논쟁가들의 화려한 혀놀림이 두렵게 다가오는 이유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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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점심

지난 주말, 트위터를 통해 반가운 메시지 하나가 날아들었다. “어제 뚝섬에서 청사과분들과 함께 나눔장터 참여했어요. 수익도 냈답니다. ^^” 지난해 한겨레경제연구소가 연 ‘사회적기업가학교 청년사회혁신가과정’ 교육에 참여했던 청년이다. 스스로 ‘청사과’라고 부르며 진로를 찾던 수강생들은 이렇게 좋은 일과 자립을 동시에 추구하는 일을 고민하고 있다. 아예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사회적 기업으로 옮긴 청년도 있다.

이 메시지를 받자마자 엉뚱하게도 지난 3월16일치 <중앙일보>에 문창극 대기자가 무상급식 정책을 비판하며 쓴 칼럼 ‘공짜 점심은 싫다’가 떠올랐다. 이 글은 “내 아이의 점심을 내가 책임지는 것은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개인의 독립이며 자존”이라며 무상급식을 비판한다. 또 이런 식으로 국가의 역할을 늘리고 개인의 책임을 줄이면 “독립적인 개인은 사라지고 의타적인 인간만이 넘치게 된다”고 전망했다. 내가 만난 미래 세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전망이다.

이 글은 한국 사회의 주류가 갖고 있는 사회 운영 원리에 대한 의식이 근본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매우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 열쇳말은 ‘개인의 책임’이다. 무상급식이 개인의 책임을 줄이는 방향으로 사회를 바꿀 것이므로 도입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사실 한국 사회는 이미 자기 책임만을 강조하는 사회다. 내가 공부 못하면 내 탓이다. 내가 해고당해도 내 탓이다. 내 사업이 망하면 그것도 내 탓이다. 내 자식이 점심을 굶어도 그것은 내 탓이다. 이웃과 사회는 동정하고 조금 도와줄 수 있을지언정, 책임의식은 전혀 갖지 않는다.

이는 미국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과거에 내세웠던 ‘오너십 사회’와 비슷하다. 개인의 책임, 경제적 자유, 재산권 보호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각자 경쟁해서 경제력을 확보하고, 그것을 자신과 가족을 위해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라는 의식이다.

한국의 옛 세대가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들은 자식에게 세 끼 밥을 챙겨주는 것이 너무나 힘겨운 시절을 지냈다. 국가로부터의 복지가 사실상 없던 시대였다. 심지어 개인이 근면히 일하고 저축해서 국가의 부를 늘리는 데 기여하기까지 했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맨주먹으로 자식들의 점심을 해결했다. 그게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과거의 논리다. 개인의 자존이 내 자식만의 점심으로부터 오는 시대는 지났다. 미래 세대는 이웃의 점심까지 함께 챙겨야 자부심이 생기는 세대다. 최소한의 인권과 복지는 사회가 지켜주는, 품격 있는 국가로부터 자존을 느끼는 세대다. ‘청사과’의 청년들을 보면 안다. 그들은 안락한 대기업에서 자기 점심을 책임지는 데서 만족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뛰쳐나와 남들의 점심을 함께 생각하는 삶을 살겠다고 나섰다. 기업을 하더라도, 사회적 의미가 있는 사업을 벌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공짜 점심을 제공하면 누군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설교할 필요도 없다. 미래 세대는 국가가 제공하는 것이 공짜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지 않다. 국가에 의존해 살아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사회에 대해 자신이 지분을 가진 이해관계자라고 생각하며 당당히 권리를 주장한다. 독립을 추구하며 동시에 이웃에 대해 기꺼이 사회적 책임을 지려 한다.
미래 사회는 더 이상 정글이 아닐 것이다. 개인도 조직도 ‘사회적 책임’이라는 원리 아래 공동체의 일원으로 지분을 갖고 존재하는 게 미래 사회의 모습이다. 미래 세대의 자존심은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나온다. ‘나만의 도시락’이 아니라 ‘함께하는 식탁’이 미래의 점심이다.

(한겨레/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timela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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