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사회적 정의나 역사적 사명을 위해 자기 몸에 불을 사르는 사람은 없다. 살아 있어야 정의도 의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사후세계의 절대적 자유와 정의를 약속하는 종교조차 자살을 권고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강요된 죽음만 있을 뿐, 자발적 죽음은 없다. 자살은 목숨이 아니라 관계를 끊는 것이며, 현실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성적비관이나 생계비관 자살이라는 말을 하지만, 성적이나 생계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유로 괴롭히는 사람이 타살한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나 사회가 배척한다고 모두가 죽지는 않는다. 억울해도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삶을 택한다. 말할 기회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소외된 상태에서 언어까지 빼앗긴 사람은 끝없이 저승사자와 싸워야 한다. 승리는 대부분 산자의 몫이지만, 그 대가는 작지 않다. 감금된 상태에서 말조차 빼앗긴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조차 멈춰야 한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삶은 계산되지 않는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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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 소크라테스는 문자가 기억력을 퇴화시키고, 상호작용을 배제하며, 독자를 선택할 수 없고, 말할 때와 같은 쌍방의 일체감을 갖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고민은 알파벳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대의 매체 변화가 몰고온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휴대전화 세계화시대의 자유 찾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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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의료체계의 근간인 일차의료를 담당한 개원의사들 역시 거대 할인매장 앞의 영세 상인처럼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실제로 영리화가 가속되면서 미국의 일차 개원의사들은 환자들 건강의 ‘문지기(gate keeper)’에서 대형병원의 이해를 위해 존재하는 ‘문 단속자(gate shutter)’로 그 구실이 축소되었다. 또한 미국 지엠의 사례와 같이 ‘불필요하게’ 증가한 의료비는 국가의 ‘성장 동력’이 아닌 노사 모두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의료서비스의 영리화가 가속화할수록, 가난한 환자의 쾌유를 위해 밤을 지새우고, 교과서적 진료의 원칙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우리 시대의 선한 히포크라테스들은 그저 돈 못 버는 무능한 의사로 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단지 특정 집단만의 손실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가진 소중한 상징 하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의료가 상품이 아니고 인술임을 믿는 사람들, 적어도 우리가 만들려는 세상이 아파도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천박한 정부의 영리화 정책에 분연히 저항해야 한다. 우리 시민사회의 이 저항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 많은 아픈 이들의 희망이었던 아스클레피오스는 또한번 제우스의 번개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신영전 한양대 교수·사회의학 「아스클레피오스의 죽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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