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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시대의 불꽃 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 책을 집어들며

80년 광주에서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윤상원 열사의 평전을 집어들었습니다.

사실, 평전 내지는 위인전은 한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기를 얻어왔는데,
적어도 투쟁을 하다 돌아가신 열사들의 평전은 개인의 삶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열사의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는 늘상 '투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투쟁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적 결과물이라는 점 때문이죠.

뭐 여튼 저 역시 열사의 평전을 통해서,
80년 광주가 광주 시민을, 그리고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 였던 열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옅보고 싶었습니다.

일전에도 한번 쓴 적이 있지만,
일반적인 수준에서 80년 광주는, 군부의 독재,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 시민들의 민주화 항쟁,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같아요.
 
오늘날 광주를 이렇게 기념행사 수준으로 전락시켜버린건,
흔히 비판받듯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떠나버린 사람들이 아니에요. 한정지은 광주의 의미 자체죠.
그래서, 기존에 부여해놓은 공식적인 멘트를 뛰어넘는 것, 광주를 단지 '죽어있는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교훈'으로 배우는 것이 제 출발점이 됩니다.

# 봉기

가장 먼저 주목했던 점은, 광주의 봉기적 성격이에요.
아시겠지만, 광주 항쟁의 불길을 당긴건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의 시위였죠.

'서울의 봄' 이라고 해서, 10ㆍ26 이후부터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시키기 전까지의 평화시기를 뜻하는데,
물론 평화적 분위기는 표면적이었을 뿐이고, 실제 정계에서는 전두환의 암투가 시작되고 있었죠.
이 시기에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학도호국단을 없애고, 민주적 학생회 건설을 시작하면서 차츰차츰 시위가 격화되기 시작합니다.

여튼, 처음에 시민들은 학생들의 시위를 지켜보는 입장이었는데,
나중에 이들은 광주 항쟁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는거죠.
소수의 학생들과는 다른 시민들의 압도적 숫자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거에요. 실제, 이후 도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시민들이었으니까요.

이건 굉장히 재밌는 구도입니다.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가 시민들에 의해 본격화된다는 사실이 말이죠.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은 혁명의 구성요소를 들어 '의식성'과 '자생성'을 얘기했는데,
광주를 두고 혁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의 어려운 경제 정치적 상황 - 당시 광주는 두가지 모두에서 고통받고 있었죠 - 에서,
학생들은 의식성을, 시민들은 자생성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의식성과 자생성이 결합될 경우에만, 봉기는 가능해지는거죠.

결정적인 시기, 이를테면 87년 노동자대투쟁이나 97년 노동법개악저지투쟁과 같은 시기가 아니라면,
운동은 소위 활동가라 불리우는 이들, 이를테면 노동조합 상근자나 노동운동가, 학생운동가, 정당활동가, 등등의 몫인 것 처럼 보여져요.

그런데, 이들의 운동은 자생성과 결합되지 못할 경우에는 분명히 한계를 가질거에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처럼 운동이 숨죽이고 있는 때에도, 참을성있게 활동을 해나가며, 극단적인 오류 - 고립된 소수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보려는 - 로부터 벗어나야겠죠.

# 지도부 그리고 <투사회보>

두번째는, 시민들이 모두 일어난 이후의 문제인데요,
윤상원 열사가 광주 항쟁 당시에 발간했던 <투사회보>는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거에요.

윤상원 열사는 광주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민들의 봉기와 도청으로의 진격이 무질서하게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고민합니다. 힘이 한곳으로 모아지지 않는다는 점을요.
<투사회보>는 이런 고민에서 만들어 진 것인데, 공수들과 물리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그 혼란스럽던 정국에서, 많게는 40,000부 적게는 5,000~6,000부 가량 찍어내어 시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하게됩니다.
<투사회보>는 공수의 진압이 시작된 19일부터 열사가 산화한 26일까지 10차례 발행되었고, <투사회보>를 통해서 시민들은 소식을 공유하고, 조금씩 집중된 힘을 발휘하게 되는거죠.

공수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쏜 후, 투사회보 작업실에서 벌어진 후배 서대식과의 대화가 열사의 심정을 여실히 드러내줍니다.

"형님, 공수놈들이 총을 쏴대는 데 이까짓 종이쪼가리난 만들어서 뭐합니까. 시민들이 총을 쏘고 있다구요!"
"야, 이 자식아. 유인물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총칼 들고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게 흥분해 가지고 총든 시민들 통제할 수 있겠어? 감정만 앞서 가지고 계엄군을 이길 수 있겠냐구. 우리가 할 일이 없어서 이 짓을 하고 있는 줄 알아? 시민군을 통제할 수 있는 지도부가 없는 현실에서 선전선동은 생명과 같은 거야. 투쟁열기를 높이고 투쟁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할 일임을 명심해! (중략) 전두환이는 총칼보다 투사회보 한 장을 더 무서워해. 알았어?"

저는 광주와 같은 봉기에서 지도적 역할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지도적 역할' 이 자체만으로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실제 봉기의 주체, 운동의 주체를 잘 이끌어 줄 수도 있고, 반대로 억압할 수도 있죠.

# 지도적 역할의 양면성과 수습위원회

정말, 지도적 역할의 양면성이란, 광주 항쟁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데,
사실 알만한 사람만 아는 것 같아요.

광주에 대해서 안다 하는 사람들도,
도청 장악 이후에 장열히 산화했다는 사실만을 기억할 뿐, 장악 이후의 시민들 내의 갈등이나 문제점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아요.
역사는 교훈을 얻지 못하면, 또 다시 반복될 수 있는데 말이죠.

아시겠지만, 공수들은 도청을 스스로 비우고 시 외곽으로 퇴각하죠.
일종의 권력의 공백기. 도청으로 밀려든건 시민이지만, 공백상태에 있는 권력을 잡은건 시민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광주시 부시장을 비롯한 광주지역 명망가 - 교수, 변호사, 등등 - 들이었죠.
이들은 수습위원회를 꾸려 지도부의 역할을 자처하는데, 광주의 상황실을 차지하고는 계엄사와의 협상에 들어가더니, 곧 이어 무기를 반납하자는 선무방송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사진으로 한번즈음 봤을 법한 도청 앞 시민궐기대회 역시도, 시민들을 흥분시킨다는 이유로 열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수습위원회의 협상에 귀기울여 줄 것을 당부합니다.

윤상원 열사는 이런 수습위원회의 태도에 반대했죠.
그는 계업사와의 협상을 할 수 있는 힘은 수습위원회가 아니라 시민들의 결집된 힘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장을 유지 혹은 강화한 상태에서 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시민들의 힘을 더욱 모아나가야 한다는 것이 열사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시 시민군의 상황실장으로 수습위원회와 갈등하던 박남선을 만나게되고, 결국 새로 지도부를 구성하게 됩니다.

당시 수습위원회와의 갈등은, 도청 장악 이후에 협상이 한참이던 23일, 박남선의 수기에서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시간이 갈수록 수습위에 대한 나의 불만은 더해가고 있었다. 구속된 몇 사람을 빼와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자기들이 했단 말인가? 지금까지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은 왜 신경을 써 주지 않고 엉뚱한 일만 하는가? 왜 총을 회수해 가 계엄당국에 바치는가? 왜? 지금도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에 죽어가고 있는데 무기회수가 웬 말인가?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이런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무기를 절대 넘겨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 권총을 빼들고 가서 무기고를 지키고 있는 시민군에게 '만일 내 허락이 없이 무기를 내주었다간 죽여버리겠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 '들불야학'과 <투사회보>

시민들이 도청을 장악한 22일을 전후로 한 상황은,
실제 봉기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 것 같아요.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열사의 삶은, 단지 도청을 지키다 죽어간 민주열사 이상으로 열사가 이러한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나갔는지를 - <투사회보>제작, 수습위원회 장악, 무기반납 반대, 도청 사수 - 보여주는 것 같구요.

덧붙여, 제 개인적인 관심사 덕분에 거의 언급하지 못했지만,
광주 이전에 열사의 삶은 '들불야학'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전대 정외과를 졸업했고, 부모님의 기대 때문에 주택은행 행원으로 입사했던 그는, 1년 남짓한 은행원 생활을 접고 광주로 내려와 '들불야학'과 함께 현장의 노동자들을 만나게 되고, 이 '들불야학'은 이후 <투사회보>를 제작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게되죠.

실제, 평전에는 열사의 대학생활 이후에는, '들불야학'과 <투사회보> 두가지를 주로 다루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저와 달리 '들불야학'에 초점을 두고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 마치며

마음 같아선, 좀 넉넉하게 잡아 한국의 근현대사를 둘러보고 싶은데,
사정이 별로 여의치가 않아요.

광주와 관련해서는 익히 읽혀왔던 황석영 선생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는 것으로 마무리지을까 합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제가 알고있는 광주 관련 서적 중에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가장 뛰어난 것 같군요. 윤상원 열사의 평전이나 박남선씨의 수기의 경우는, 지도부 내부의 갈등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지만, 시민들의 분위기를 옅보기는 쉽지 않거든요. 황석영 선생의 책이 기록형식으로 되어있으니, 그 부분의 부족함을 메워주리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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