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설득에 필요한 심리 원칙 밝혀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관련 자료들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전체 자료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 하나만을 사용하여 필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곤 한다.” -본문 중에서

미국에서 1985년 출간된 ‘설득의 심리학’(Influence: Science and Practice)의 저자 로버트 치알디니(Robert B. Cialdini)는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학교 심리학과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치알디니는 인성과 사회심리학 학회의 회장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가 설득 현상에 꾸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는 그의 삶 자체가 설득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독일계 미국인이 주로 살고 있던 밀워키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혈통은 순수한 이탈리안 계보를 갖고 있었다. 또 그가 살고 있던 동네에는 대부분 폴란드계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치알디니는 비교적 남에게 잘 속는 어리숙한 사람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그는 수많은 잡상인과 기부금 모집인, 그 외 다양한 장사꾼의 손쉬운 표적이 되어 원하지도 않던 잡지를 정기구독하거나 자선 행사의 티켓을 엉겁결에 받아들곤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오랫동안 속칭 ‘봉’으로 살아온 자신의 경험 때문에 더더욱 설득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설득(說得)이라는 한자 단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말씀 설, 얻을 득, 즉 ‘말씀을 통해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얻는다는 것일까? 상대방의 마음(전공 용어로는 ‘태도’라고 한다)과 행동을 얻는 것이 설득의 목적이다. 우리 사회에 설득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다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모두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사회에서는 설득이 필요 없다. 설득은 오히려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다른 환경에서 더 유용성을 발휘한다.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언어라고 한다. 서로간의 다름은 언어의 설득 파워를 테스트하는 훌륭한 무대가 되고 있다. 사람의 심리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을 바탕으로 언어를 구사하면 우리는 상대방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설득 전문가 치알디니 교수는 다음의 여섯 가지 원칙이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현우 한양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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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합리적인 관료제의 운영원칙 제시
막스 베버의 ‘경제와 사회’
 
“공식적인 조직은 가부장적인 방식보다는 관료적인 방식에 의해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진다.” -막스 베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는 경제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사후에 발간된 대표적인 저서 ‘경제와 사회’(Wirtschaft und Gesellshaft·1922)에서 그는 경제와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힘의 원천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사회적 질서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경제행위를 화폐, 기술, 노동자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해석하고 있는 이 저서는 너무나 방대하여 전체를 압축해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베버가 제기한 다양한 논의 중에서 현대 조직의 운영원리에 적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조직체제에 대한 논의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베버는 관료제를 가장 이상적인 조직 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성공적인 관료제의 운영을 위해서 조직은 전통적인 권위에 의해 운영되거나, 특정한 카리스마에 의해 운영되어서는 곤란하다. 관료제는 합리적이고, 법적 권한에 의해 조직이 운영되는 제도이다.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권한관계가 명확해야 한다. 권한은 정통성을 가져야 하며,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일에 걸쳐 타인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합리성과 합법성을 획득해야 한다. 베버는 권한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첫째, 합리적·법적 권한이다. 합리적·법적 권한은 법규화된 질서나 조직의 규칙에 의해 만들어지는 권한이다. 이러한 합리적·법적 권한은 관료제의 근간으로 공식적인 조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권한이다. 

둘째, 전통적 권한이다. 이는 전통과 관습에 의해 만들어진 권한으로, 오랜 역사적 전통에 대한 신뢰에 의해 합법성이 부여된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존속해온 것에 대해서는 의심 없이 무의식적으로 권한을 인정하게 된다. 예컨대 가부장적인 권한이 대표적인 전통적 권한이다. 전통적 권한은 가정이나 비공식적인 조직의 운영에는 필수적이나 공식적인 조직에는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공식적인 조직은 전통적인 권한에만 의존해서는 질서를 유지하기 어렵다.

셋째, 카리스마적 권한이다. 이는 특정한 시기 특별한 방식으로 창조된 질서로, 권한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열렬한 신뢰에 의해 만들어지는 권한이다. 이러한 권한은 이성적 판단을 초월한 것이지만, 현대와 같은 합리적 시대에도 여전히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탁월한 지도자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가 카리스마적 권한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카리스마에 근거한 권한은 지속성이 약하다. 카리스마는 혁명적 힘을 지니고 기존의 안정된 제도적 질서를 뒤집어 버릴 수는 있지만, 카리스마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합리적·법적 또는 전통적 권한으로 변화해야 한다.

결국 공식적인 조직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권한은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고 카리스마에 근거한 권한은 일시적일 뿐이다. 공식적인 조직은 합리적·법적 권한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   

이상적인 관료제는 합리적인 운영원칙에 의해 유지되어야 한다. 관료제의 전형적인 운영원칙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분업의 원칙이다. 조직은 부분의 합이다. 각각의 부분들이 분업의 원리에 따라 특정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효율적인 전체를 구성하게 된다.

둘째, 명령 체계 및 계층의 원칙이다. 분업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조직 전체의 목적을 위해 역할이 조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역할 조정을 위해서는 합리적·법적 권한에 의한 명령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이러한 명령을 통해 계층적인 조직이 구성된다.

셋째, 공개 채용의 원칙이다. 공식적 조직이 지속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인력이 유입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규인력의 유입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공개적인 채용절차를 거쳐야 한다. 전통적인 권한관계에 의한 정실인사나 카리스마적인 권한에 의한 무작위 채용이 이루어지면 합법성을 유지할 수 없다.

넷째, 경력에 따른 고정급 원칙이다. 안정적인 조직의 운영은 계층적인 질서를 근간으로 한다. 이러한 계층적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위계에 의해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력이 많은 상급자가 하급자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보상은 고정급으로 지급되어야 구성원간의 안정적인 관계가 유지된다.

다섯째, 통합제도에 의한 통제의 원칙이다. 분업의 원칙에 의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부분은 조직 전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통합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계층적인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통합을 위한 통제는 관료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베버의 관료제는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운영방식이지만, 관료제만으로 현대조직을 운영해서는 곤란하다. 현대에 있어 관료제는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예컨대 경력에 따른 고정급은 구성원을 나태하게 만들고 변화를 거부하게 한다. 공무원 조직의 경직성은 바로 이러한 안정적인 급여체제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통합을 위한 통제는 구성원들의 창의성을 저해한다. 모든 조직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창의적으로 바꾸어 나가야 하는데,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베버의 관료제는 변화를 거부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과연 관료제는 타파되어야만 할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베버는 관료제를 통해서 권한과 원칙을 강조했다. 가부장적인 권한으로 합리적·법적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 변화는 아니다. 카리스마에 의해 혁명적 변화를 이루는 것도 일시적으로는 통쾌하지만 부작용도 많다. 합리적·법적 권한에 의한 관료제는 원리와 원칙에 근거한 조직운영을 강조한다. 역사상 수많은 형태의 조직이 생성, 소멸되었으나 가장 생명력이 강한 조직형태는 피라미드 구조의 관료적 조직이다. 조직은 개인의 합이고 대중은 근원적으로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이 변화하고 이에 따라 개인의 성향이 바뀌어 가는 현대 조직은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관료제를 벗어나 보다 혁신적인 조직을 생성시키고 있다.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비체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관료제는 너무 체계적이라 경직된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경직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제도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적인 제도 변화도 원리, 원칙에 위배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합리적·법적 권한에 의한 관료제는 원리와 원칙에 근거한 조직운영을 강조한다. 역사상 수많은 형태의 조직이 생성, 소멸되었으나 가장 생명력이 강한 조직형태는 피라미드 구조의 관료적 조직이다. 조직은 개인의 합이고 대중은 근원적으로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윤철 한국항공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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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소유보다 존재에 충실할 것을 주장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나는 나를 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 … 소유가 나의 목표일진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의 존재가 커지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 나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나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 본문 중에서 
 
현대사회는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은 결코 더 행복하지 않다.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 그리고 피로는 가중된다. 그들은 물질적 가치에 집착하고 과도한 경쟁에 휩싸이며 과다소비에 빠진다. 이러한 과다소비는 현대사회의 다른 문제인 환경오염을 악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소유를 과시하기 위해 명품에 집착하는, 소위 명품족도 이러한 현상의 하나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이러한 현대 산업사회 문제의 근본에는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산업사회는 사람들을 ‘그가 갖고 있는 것’에 의해 평가한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나 집은 물론이고 그의 직업, 위치, 경력이 그를 규정짓는다. 이런 소유적 모드의 세계에서는 더 많이 갖는 것이 더 나은 인간으로 평가받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렇게 소유적 모드에 집착하는 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프롬은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오히려 ‘소유(Haben)’가 아닌 자신의 ‘존재(Sein)’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롬은 ‘존재’적 모드가 지배하는 사회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째, 새로운 사회는 무한성장보다는 필요에 의한 선택적 성장을 지향한다. 둘째, 물질적 이익보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한다. 쾌락이나 다른 사람의 인정(認定)이 아닌 진정한 내면적 깨달음에 삶의 중심이 있다. 셋째, 사람들은 기본적인 삶의 안정을 보장받으며 관료제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인 결단에 의한 삶을 살아간다.

에리히 프롬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대학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공부하고 1933년 나치스의 발흥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이주해 예일대, 뉴욕대 등 여러 곳에서 강의를 했다. 1950년에서 1965년 사이에는 멕시코 국립대학의 의학부에서 가르쳤으며 198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에리히 프롬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사회문제 해결에까지 적용한 후기 프로이트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청년기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으며 현대인의 불안과 자유의 의미에 천착했다. 특히 대중이 파시즘의 선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근대인에게서의 자유의 의미’를 탐구했다. 현대의 정신적 불안은 개인적인 정신분석요법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사회구조변혁과 인간의 심리적 해방을 동시에 추구했다. 이러한 노력은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인간의 자유’(1947) ‘건전한 사회’(1955) ‘선(禪)과 정신분석’(1960) ‘사랑의 기술’(1971) ‘소유냐 존재냐’(1976)와 같은 저작으로 결실을 맺었다.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는 ‘사랑의 기술’과 더불어 프롬의 후기저술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저작이다. 산업사회가 절정에 있던 1976년에 발표된 이 책에서 프롬은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소유를 추구함으로써 무력감과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불행히도 소유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으며 이러한 추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10억원을 가진 사람은 100억원을, 100억원을 가진 사람은 1000억원을 갖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그는 인류가 산업화가 가져온 불행과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유모드’에서 ‘존재모드’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두 가지 판이한 삶의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프롬이 든 예(알프레드 테니슨의 시와 일본의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는 너무나 적절하다. ‘갈라진 벽 틈새에 핀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새에서 뽑아내어/ 지금 뿌리째로 손안에 들고 있다….’ ‘눈여겨 살펴보니/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있는 것이 보이누나!’

‘꽃을 본 테니슨은 그 꽃을 뿌리째 뽑아 들고 소유한다. 그래서 꽃에 대한 그의 관심은 꽃의 생명을 단절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바쇼는 다만 바라보기만을 원한다. 또한 꽃을 그냥 관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꽃과 일체가 되기를, 꽃과 결합하기를 원한다.’(본문 중에서)

여기서 프롬은 바쇼의 태도가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기 위해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세계와 하나가 되는 실존양식이라 설명한다. 지식을 주워 담고 필기하고 단순 암기하는 데 골몰하는 공부습성을 가진 학생과 지식을 내면화해서 자기화하는 학생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시대의 도래는 이러한 두 모드의 차이를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터넷에 거의 모든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고 검색만을 즐기고 오려 붙이기를 하는 학생과 꾸준한 독서로 지식을 내면화하고 인터넷의 정보검색을 통해 그것을 더 강화하는 학생의 진짜 실력 차이는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동양문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했던 프롬은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서 동양의 존재 모드적 사고방식의 장점을 받아들이려 한 것 같다. 소유와 정복을 추구하는 다이내믹한 서양문명은 동양문명의 정체성에 충격을 가했지만 이제 동양문명은 서양문명의 한계를 일정 부분 치유할 수 있는 지혜를 주는 것은 아닐까. 산을 보면 정복하려 하는 서양의 진취적 태도와 산을 관조하며 산과의 일체화를 즐기는 동양문화의 차이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는 현대사회의 병리를 치유하려는 프롬의 노력이 집약된 저작이다. 그가 주장한 내용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적실성을 잃지 않고 있고,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고 있다. 여러 분야에서 분출하는 벌거벗은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는 프롬의 경고를 심각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 책이 열악한 한국 출판시장에서 현재도 스테디셀러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강규형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주임교수·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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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금욕적 절약 생활이 자본 축적을 가능케 해

근대 자본주의는 왜 서양에서만 탄생할 수 있었을까?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는 학술지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에 1904년과 1905년에 걸쳐 이 질문에 답하는 논문을 기고했다. 그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이다. 베버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말한다. ‘보편적인 의의와 가치를 지닌 발전선상에 놓여 있는 듯한 문화적 현상이 오직 서구 문명에서만 나타난 사실은 어떤 일련의 환경에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일정한 종교적 관념이 경제적 정신 혹은 경제체제의 에토스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의 문제’이며 ‘근대적 경제생활의 정신과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의 합리적 윤리 간의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소명(召命) 관념과 칼뱅주의를 비롯한 청교도 신학의 예정설(豫定設)에 주목한다. 하느님에게 부름을 받았다는 소명 관념과 소수의 사람만이 하느님이 내리는 영원한 은총을 받도록 선택되었다는 예정설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임하는 노동 윤리와 금욕적인 자세로 이어진다.

소수의 사람만이 하느님이 내리는 영원한 은총을 받도록 선택되었다면 도대체 누가 그렇게 선택 받았는지, 과연 나는 선택 받은 인간인지 궁금하고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바로 선택 받은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한다. 만일 선택 받았다는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 자체가 영원한 은총을 받을 수 없게 되는 불경(不敬)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세속적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신이 내린 소명으로서 직업에 충실한 것이 구원에 대한 의심을 없애는 방법인 것이다.

‘금욕은 더 이상 과외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요구되는 행위였다. 자연적 생활과 구별되고 종교적으로 요구된 성도의 특별한 생활은 더 이상 세속 밖의 수도원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그 질서 안에서 행해졌다. 내세를 바라보면서 세상 안에서 생활방식을 합리화한 것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사상이 낳은 결과였다.’

결국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하여 얻는 이윤을 철저히 절약하고 축적하는 금욕주의 윤리가 바로 자본의 축적을 가능케 했다. 베버 자신의 말을 빌리면 ‘근대적 문화에 구성적인 요소 중 하나인 직업 사상에 입각한 생활방식은 기독교적 금욕의 정신에서 탄생한 것’이다. 베버는 그런 정신의 예로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인용한다. 이를테면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돈임을 잊지 말라. 매일 노동을 위해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반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는 오락을 위해 6펜스만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 외에도 5실링을 더 지출한 것이다. 아니 갖다 버린 것이다.’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가 도덕이나 종교와는 무관한 개인적 이윤 추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가 종교적 의무로서의 직업에 대한 엄격한 책임 의식과 금욕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본 것이다. 베버는 이렇게 말한다. ‘금욕주의는 수도원의 닫힌 벽을 걸어 나와 일상생활의 직업으로 옮겨왔고 현세의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금욕주의는 기계제 생산의 기술적·경제적 조건으로 자리잡으면서 근대적 경제 질서라는 강력한 우주를 형성하는 데 그 역할을 수행했다.’

한 사람의 상인, 청교도 금욕주의에 충실한 한 상인을 떠올려보자. 그 사람은 상인으로서의 직분이 하느님이 자신에게 내린 소명이라 여긴다. 그는 결코 사치하거나 낭비하는 일 없이 최선을 다해 번 돈을 계속 축적한다. 그는 자신이 영원한 은총을 받도록 선택 받은 자라 굳게 믿으면서, 상인으로서 생활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꾸려나간다. 베버가 보기에 바로 그런 사람, 정확히 말하면 그런 사람이 지닌 종교적 관념이 근대 자본주의 탄생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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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자유로운 토론 막는 전체주의 비판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합리주의는 비판적 논증에 귀 기울이고 경험에서 배우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태도를 말한다. ‘내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노력하면 우리는 진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논증과 관찰 같은 수단을 통해 많은 중요한 문제에 관해 사람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이다. - 본문 중에서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1902~1994)는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경제적 불평등을 비롯한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여 사회주의 운동에도 참여했다. 빈대학에서 26세 때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1937년에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뉴질랜드로 망명했으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과학철학과 사회철학 분야에서 20세기 거장의 반열에 든다는 평가를 받는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은 그가 뉴질랜드 망명 시절인 1938년에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침공 소식을 듣고 집필하기 시작하여 1943년에 완성했으며 1945년에 출간되었다. 전체주의가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시기에 집필됐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제목대로 포퍼가 ‘열린 사회의 적’이라고 판단한 사상가들, 이를테면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같은 이들을 비판하는 내용인데 포퍼의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과학철학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점쟁이가 당신에게 “올해 운수 대통할 것”이라 예언했다. 그런데 당신은 큰 사고를 당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점쟁이를 찾아가 따졌다. 점쟁이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은 운수가 대통해서 큰 사고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거다.” 점쟁이의 예언은 반증(反證)할 수 있는 가능성, 그러니까 그것이 거짓으로 밝혀질 가능성이 없다. 따라서 점쟁이의 말은 과학이 아니다.

칼 포퍼가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을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기 위한 ‘반증가능성 이론’이라고 부른다. 포퍼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은 과학을 자처하지만 과학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반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고, 마르크스가 역사발전의 법칙으로 내세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과학적인 법칙이 아니라 점쟁이의 예언에 가깝다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은 기존 이론의 오류를 수정하여 더 나은 이론을 세우고 그 이론의 오류를 다시 수정하여 좀더 나은 이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요컨대 반증을 통해 오류를 점진적으로 수정하면서 과학은 발전한다. 포퍼의 이러한 과학철학은 사회철학에서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것이 지금의 불평등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데 나은 방법인지 토론한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도출한 합의에 따라 기존의 제도나 법률을 수정한다. 그렇게 수정한 제도나 법률에 다시 문제점이 있다면 역시 토론을 통해 새로운 합의를 도출한다. 이런한 과정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 한마디로 점진적이고 합리적인 개혁 노선인 것이다.

소수의 지배층이 권력을 장악하고 시민의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이 허용되지 않는 ‘닫힌 사회’에서는 문제를 개선해 나갈 수 없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국가는 포퍼가 보기에는 ‘철저하게 닫힌 사회’에 불과하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지닌 철학자가 통치하는 플라톤의 이상(理想)국가는 가능하지도 않고 가당치도 않은 꿈에 불과하다.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자(者)가 통치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결국 독재에 대한 옹호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국가는 비판과 토론을 통한 문제 해결이 아니라 혁명에 의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닫힌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또한 역사의 일정한 법칙을 상정하고 그 법칙의 절대성을 강조함으로써, 반증될 수 없는 사이비 과학을 주장했다. 더구나 그가 꿈꾸는 공산국가는 혁명을 통해 달성된다는데, 이것은 결국 사회 전체를 단번에 변화시켜 어떤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릇된 기대일 뿐이다. 
 
포퍼가 이 책에서 특히 강조한 것은 ‘완전한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완전한 사회를 혁명과 같은 수단을 동원해서 단번에 이룩할 수 있다는 꿈을 버리고, 이 세상을 좀더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선 점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을 그는 ‘점진적 사회공학’(piecemeal social-engineering)이라 부른다. 마치 결함 있는 기계를 기술자가 고치고 개선해서 좀더 나은 기계를 만들어 내듯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을 통해 조금씩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내세운 포퍼가 폭력과 유혈을 수반하는 혁명에 반대한 것은 당연하다. 폭력과 혁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 더구나 불필요한 고통을 초래하고 더 많은 폭력을 불러오며 자유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그가 폭력, 혁명, 독재 등을 적극적으로 비판했던 것은 나치즘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가져온 비극을 목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포퍼가 말하는 ‘열린 사회’와 ‘점진적 사회공학’이 지닌 문제점은 없을까? 첫째, 혁명이나 폭력을 통하지 않으면 도저히 개선할 길이 보이지 않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에서 점진적 사회공학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둘째, 열린 사회의 핵심적인 조건인 시민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은 긴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한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비판과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면 정말로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철저한 비판이자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옹호인 것만은 틀림없다. 포퍼가 꿈꾸었던 ‘열린 사회’는 사회 구성원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회를 개선하려는 노력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런 사회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때문에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펼친 주장에 계속해서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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