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엘리아데의 ‘성(聖)과 속(俗)’
“비종교적인 현대인, 행동은 여전히 종교적으로”

종교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1907~1986)는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 초반에 인도에 가서 산스크리트를 공부하고 요가 수행을 하기도 했고 결국 요가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0년 이후에는 영국과 포르투갈의 루마니아 공사관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1945년 이후 파리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적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1956년에 미국 시카고로 건너가기 전까지 엘리아데의 중요한 학문적 저작은 대부분 파리 시절에 집필된 것이다.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에 이르는 이 시절에 엘리아데는 ‘종교형태론’ ‘영원회귀의 신화’ ‘샤머니즘’ ‘이미지와 상징’ ‘요가’ ‘대장장이와 연금술사’에 이르기까지 일관성과 포괄성을 겸비한 일련의 저술작업을 수행했다.

초기의 이러한 엄청난 성과에 비하면 미국에 건너간 이후에 그가 보여준 학문적 내용은 오히려 왜소해 보인다고도 말할 수 있다. 미국적인 학문 풍토가 엘리아데의 창조력을 감퇴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살펴볼 ‘성(聖)과 속(俗)(The Sacred and The Profane)’은 1957년에 독일에서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갖는다. 책이 출간된 배경은 이렇다. 1955년에 로마에서 열린 국제종교학회에서 엘리아데는 ‘로볼트 독일 백과사전’ 시리즈를 편집하고 있던 엔리코 그라를 만났다. 그리고 엘리아데는 1956년 1월까지 160쪽 분량의 ‘성과 속’을 쓰도록 요청받았다.

그러므로 ‘성과 속’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엘리아데가 독일 출판사를 통해 그의 파리 시절 학문을 요약ㆍ정리한 소책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과 속’은 주로 ‘종교형태론’ ‘영원회귀의 신화’ ‘이미지와 상징’의 세 권이 결합해 응축된 책에 가깝다.

그러나 이 책이 기존 저술의 단순 요약본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을 통해서 엘리아데는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힘들던 다소 난해한 자신의 중심 사상을 매우 자상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성(the sacred)과 속(the profane)은 ‘세계 안에서의 두 가지 존재 방식’이다. 그리고 성은 속의 정반대다. 성은 종교적인 인간 삶의 방식이고, 속은 비종교적 인간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곧장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과연 성스럽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대한 엘리아데의 답변은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을 설명하는 이 책의 맨 처음 두 장에 제시되어 있다.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공간은 그저 아득히 펼쳐져 있는 균질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인간은 ‘공간의 단절’을 경험한다. 종교적인 인간은 위(하늘)와 아래(지하)를 향해 열려 있는 공간, 즉 저 너머의 세계로 이행하는 통로가 되는 성스러운 장소를 창조한다.

바로 이 장소가 ‘세계의 중심’이다. 중심을 통해 인간은 다른 세계와 소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흡수한 성스러운 힘을 다른 모든 장소에 전달할 수도 있다. 중심이 잡혔을 때 세계는 비로소 ‘인간적인 세계’로 변형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과 만나는 신전이나 사원만이 중심인 것은 아니다.

이창익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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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집단은 왜 이기적이 되는가” 파헤쳐
 
한번 만들어진 조직은 어지간해서는 없애기 어렵다. 조직은 그 생리상 끊임없이 예산과 사람을 끌어들여 몸집을 키운다. 할 일이 없어지면 명칭과 역할을 바꿔서라도 가늘고 모질게 살아남는다.

예를 들어 보자.
‘작은 정부’는 언제나 있던 요구사항이지만 공무원의 수는 자꾸만 늘어간다. 부처간 이기주의로 예산이 낭비되기 일쑤고 이권을 놓고 중앙과 지방정부 간 다툼이 벌어지는 일도 예사다.

조직끼리 벌이는 한심한 다툼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지도자를 욕하곤 한다. 큰 틀에서 바라보고 무엇이 진정 정의인지를 아는 경영자라면 이 꼴로 일이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터다. 썩어빠진 조직윤리도 문제다. 제대로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꾸준한 의식개혁으로 공정과 정의를 다잡아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도자의 인품이 훌륭하고 조직원들이 정직ㆍ근면하다면 조직 사이의 다툼은 사라질까. 이 물음에 대해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최고로 좋은 사람이 모인 집단도 가장 영악하게 비뚤어질 수 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1932)’는 제목만으로도 니버의 입장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는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왜 니버는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 그는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엘리트 목사였다. 성직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니버도 처음에는 ‘세상을 구원하는 힘은 반듯하고도 깨끗한 마음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노동자 편에 서서 포드(Ford) 공장과 싸운 후에, 나아가 1차 세계대전의 잔인함을 겪은 다음에 그는 도덕윤리만으로는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을 예로 든다. 전쟁터의 병사 대부분은 애국심에 불타는 젊은이였다. 그네들은 희생과 용기라는 면에서도 최고의 용사들이었다. 지휘관 역시 그랬다. 국가 지도자들 역시 자기네 나라가 ‘문명의 미래와 가치를 지키는 수호자’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애국심과 인류애(人類愛)가 뒤얽힌 이 전쟁은 강대국 사이의 잇속다툼이었을 따름이다. 설사 국가 지도자 중에 누군가는 전쟁이 수치스럽고 더러운 목적 때문에 일어났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니버는 그 이유를 조지 워싱턴의 말을 빌려 담담하게 일러준다.

“지금까지 그 어떤 나라도 자국의 이익과 상관없이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고지식한 도덕심 때문에 전쟁을 벌인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목매달아 죽여야 마땅한 매국노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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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조직은 규모가 커지면 반인간적으로 변해”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는 ‘인간사고의 방향을 바꾼 극소수의 창조적 인물’로 칭송될 만큼 20세기의 지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세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첫 번째 저서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1973)’에선 전통 경제학의 주류와 테크놀러지에 대해 거센 비판을 하고, 두 번째 저서인 ‘혼돈으로부터의 도피(A Guide for the Perplexed)’에선 첫 번째 저서의 내용에 철학적·도덕적 바탕을 제공함으로써 보다 건전하고 바람직한 삶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세 번째 저서 ‘좋은 작업(Good Work)’에선 오늘날의 테크놀러지가 정치·경제·사회적 측면에서 초래하는 악영향을 파헤치고 있다. 독일 태생인 그는 1930년에 장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옥스퍼드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그 후에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그는 1950년부터 1970년까지 영국 정부의 경제정책자문위원을 역임했고, 1977년 사망할 때까지 학술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슈마허가 그의 저작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이다. 그가 주장하는 진정한 발전의 길은 ‘근대적 성장’과 ‘전통적 정체’ 중의 택일이라기보다는 그 사이의 중용이다. 슈마허의 정치·경제학의 특징은 한마디로 반근대적이다.
 
그것은 소규모·분산 지향적이며 반경제과학적(antieconomic science)이다. 1776년 애덤 스미드의 ‘국부론’ 이래 경제학자들은 모든 분야의 사회과학자 중에서 가장 엄밀하고 성공적인 과학자들로 자부해 왔다. 과학자이고자 하는 열망과 자부는 어느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것이었다.

리카르도와 시니어의 경제학을 ‘음울한 학문’이라 부르며 비난하고 거부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자신들의 사회주의를 과학적이라 주장하며 생물학에 있어 다윈의 진화론과 견줄 만한 것이라 자랑했다. 그러나 슈마허의 경제학은 그런 유의 과학적 경제학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오늘날 주류 경제과학의 모든 가정과 전제에 뿌리부터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고 도전했다. 슈마허의 정치경제학은 무정부주의자의 견해와 흡사하다.

이를테면 크로포트킨, 톨스토이, 간디 등이 그들이다. 다른 무정부주의자와 달리 이들은 ‘조직의 규모’가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소규모 지향적인 무정부주의 경제학은 사회주의적 가치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지만 사적 소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유기업의 규모가 너무 거대하여 구성원 개개인을 소외시키지 않는 한 다양한 형태의 사유기업이나 사적 소유는 환영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가 적이며 죄악이다. 규모의 거대함은 비인격성의 모체일 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필요나 요구에 둔감하게 되고 권력의 독점이나 남용을 낳기 때문이다. 슈마허가 그의 주저를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명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임효선 성균관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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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갤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
“공동체 의식이 현대의 불확실성 덜어줘”

‘사회를 보는 거울을 가지고 있던 경제학자(Economist held a Mirror to Society).’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가 97세로 사망했다는 기사(2006년 4월 30일자)를 쓰면서 뽑은 제목이다. 아울러 뉴욕타임스는 갤브레이스를 ‘전통과 인습을 타파하고자 했던 경제학자’ ‘자신의 주장을 굽힐 줄 모르는 자유주의자’로 표현하고 있다.

왜 갤브레이스가 이 같은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사회적 통념이라고 믿고 있는 부분에 대해 현실적·비판적 시각을 들이댔고 이를 현실 경제에서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로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생산에 대해서는 다르게 접근하고 있다. 케인스의 주장처럼 수요가 공급(생산)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자(생산자)의 광고와 판매 기술이 수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비자의 필요에 따라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공급자가 소비자의 욕구를 충동시키고 그 충동을 만족시키는 상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류 경제학자들이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것과는 달리 ‘공공(公共)’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정부의 개입과 역할을 주장한 케인스보다 한 걸음 더 나간다. ‘선한 의도를 가진 큰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삶을 잘 돌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1958년에 쓴 ‘풍요한 사회(The Affluent Society)’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제목이 풍기는 느낌과는 달리 풍요한 사회가 가져오는 어두운 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케네디 대통령의 ‘가난과의 전쟁’,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의 기본철학을 제공했다. 
 
갤브레이스가 자신의 거울을 통해 지난 200여년 동안의 세계 경제와 경제학자를 들여다본 것이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1977년)’이다. 서문에 나오는 것처럼 하버드대에서 어떻게 하면 학생들을 잘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 영국의 BBC가 TV 경제 프로그램을 맡아줄 것을 의뢰하자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방송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방송 당시의 제목도 ‘불확실성의 시대’였는데 지난 시대의 경제사상이나 현상 속에 있었던 확고한 확실성을 현대의 온갖 문제가 직면하고 있는 엄청난 불확실성과 대비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제목이었다. 이후 ‘불확실성의 시대’는 ‘풍요한 사회’와 함께 갤브레이스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됐을 뿐 아니라 30여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도 직면하고 있는 살아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책에서 갤브레이스는 현대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토머스 멜서스와 같은 고전학파 경제학자와 그들이 경험했던 영국과 유럽 경제, 칼 마르크스와 레닌의 혁명, 화폐의 발명과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탄생, 대공황과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을 다루고 있다. 왜 당시의 경제상황에서 그 같은 경제학과 경제학자가 태어났으며, 새로 태어난 경제학이 불확실성을 어떻게 제거하거나 줄여나갔는지를 짚어주고 있다.

최성환 대한생명 경제연구소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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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수컷이 사회에서 취하고 있는 형태는 생리적, 심리적, 경제적 숙명에 의해서가 아니다. 문명 전체가 수컷과 거세체와의 중간 산물을 만들어내어, 그것에다 ‘여성’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만약 여자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또 때로는 아주 어린 유년기부터 이미 성적으로 우리 눈에 별개의 것으로 비쳐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본능이 여자 아이를 태어날 때부터 수동성, 교태, 모성애에 어울리게 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의 생활에 타인의 개입이 거의 당초부터 존재하며, 아이는 처음부터 강제적으로 그 인생의 직분을 떠맡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1908~1986)가 1949년에 내놓은 책, ‘제2의 성(Le Deuxi♥me Sexe)’의 제2부 ‘체험’의 첫 부분에 나오는 글이다. 특히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사실상 ‘제2의 성’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 의해 회자된다. 이 말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문화적, 사회적 영향 때문에 생겨난 결과라는 걸 뜻한다. 요컨대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자로 길러진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문화도 여성에 대해 여성다움을 요구한다. 보부아르가 말했듯이 그 여성다움이란 수줍어하면서 좀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수동성일 수도 있고, 남성에게 교태와 아양을 떠는 것일 수도 있으며, 지극한 모성애일 수도 있다. 흔히 부모가 여자 아이에게 인형 장난감을 쥐어주고 남자 아이에게는 트럭 장난감을 쥐어주는 것도, 보부아르 식으로 말하면 여자 아이에게 여성다움을 강요하는 것, 다시 말해서 여성으로 만들어버리려는 행동이며, ‘여성다움’이라는 것 자체가 남성들이 여성에게 덧씌운 굴레, 만들어진 굴레에 불과하다.

그런 굴레의 사례는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다. 여성 운전자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남성 운전자가 있다. “집에서 밥이나 하고 아이나 돌보지 왜 차를 끌고 나와 가지고 도로를 혼잡하게 만들어!” 이런 말 한마디에서 우리는 여성의 구실에 대한 고정관념, 이를테면 자동차라는 기계를 다루는 건 본래 남성의 일이라는 것, 여성의 본질적인 구실은 양육과 가사라는 것 등의 고정관념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고정관념이 오늘날에도 깨지지 않고 있는데 ‘제2의 성’이 처음 출간된 20세기 중반에는 얼마나 강했을까. ‘제2의 성’은 출간되고 나서 몇 주 만에 2만2000부가 팔리며 큰 화제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남성을 조롱했다”며 이 책을 비난했으며, 로마 교황청은 위험한 책으로 지목하기까지 했다. ‘제2의 성’으로 인해 생물학적인 성(sex)과 사회적 성인 젠더(gender)가 구분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20세기 후반 여성주의 사조, 즉 페미니즘의 사실상의 출발이었다.

어떤 남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여성도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열려 있다. 그런데도 여성은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성공하기 힘들다고 핑계를 댄다.’ 그런데 보부아르가 ‘제2의 성’을 출간할 당시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남자가 많았나 보다. 보부아르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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