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대니얼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
“복지국가ㆍ혼합경제 출현으로 사회주의 무력화”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책이 탄생한 시대적·지역적 배경, 그리고 저자가 사용한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저널리스트 대니얼 벨(Daniel Bell, 1919~)의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 1960)’은 ‘1950년대 정치사상의 고갈에 관하여’라는 부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대적으로는 1950년대를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지역에 관해서는 벨이 머리말에서 ‘이 책은 1950년대 미국의 사회 변동을 다루고 있다’고 밝혔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벨은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데올로기란 사상을 사회적인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정열이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탐구는 항상 정열을 배제시키고자 노력하며, 모든 사상을 합리화하려고 애쓴다.’ 벨은 이데올로기가 철학적 탐구나 사상과 달리, 정열에 바탕을 두어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전형적인 예를 벨은 사회주의에서 찾는다.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들, 특히 사회주의자들의 경우에 진리란 실천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들은 묵상(默想)이 아니라 행위 속에서 살고 있다. 사상의 단순화와 실천적 진리에 대한 헌신이 결합되면, 이데올로기는 민중을 봉기시킬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단지 사상만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까지도 개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950년대의 끝자락에서 미국 사회학자가 미국 사회의 지난 10년을 돌이켜 분석한 책이, 왜 지금까지 현대의 고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것일까? 그것은 벨 자신이 미국의 사회 변동을 다룬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 당시 세계 정세의 변화 전반을 다룬 것은 물론, 특히 사회주의 이념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학은 물론, 철학 사상이나 정치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사실 1950년대는 세계가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으로 양분되면서 동서 냉전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시기다. 우리가 1950년대 초에 겪어야 했던 한국전쟁은 그러한 냉전의 서막을 알리는 열전이기도 했다. 세계는 바야흐로 이데올로기에 따라 갈라져 서로 치열하게 다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로서는 이데올로기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벨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이야기했을까? 벨의 말을 들어보자.

‘이제 유토피아의 청사진을 믿을 사람도, 국가가 경제에 대해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도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이나 영국에서 복지 국가가 예속과 복종의 길이라고 믿는 보수주의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구 세계에서는 오늘날 정치적 쟁점에 대체적인 의견의 일치가 지식인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다. 즉 복지국가의 용인, 권력 분권화에 대한 희망, 혼합경제 체제의 정치적 국가 다원론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역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났다.’

여기에서 혼합경제 체제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게 아니라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여 시장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공공 부문 사업이나 경제 정책을 통해 국가 경제를 관리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사회주의의 평등 이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빈곤 계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국가가 보호하는 복지 국가 개념이 확산되었다. 정치적으로도 획일적인 이념이나 체제를 강요하지 않는 다원적인 정치 체제가 대두되었다. 결국 벨이 이 책을 쓸 무렵 미국 사회나 많은 다른 국가들이 더 이상 어떤 하나의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 본 것이다.

벨은 19세기에 탄생한 이데올로기가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설득력이나 적용 가능성을 잃고 있다고 보았다. 화이트칼라라 불리는 사무직 노동자의 급격한 증가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강조하는 전통적인 노동자 개념이나 계급 구조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회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점점 더 분명하게 양극화되고, 두 계급 사이의 갈등도 점점 더 커져야 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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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왓슨의 ‘이중나선’
DNA구조를 밝힌 과학자들의 희로애락 그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해서 근대 생물학의 길을 열었다고 한다면 그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 제임스 왓슨과 프란시스 크릭이라는 두 젊은 과학자는 DNA의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서 현대생물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다윈이 수백 쪽에 달하는 빡빡한 이론서로써 자신의 주장을 제시했던 데에 반해서 왓슨과 크릭은 ‘네이처(Nature)’라는 과학잡지에 겨우 900단어에 불과한, 단 두 쪽의 논문을 실어서 전 세계 과학계를 온통 흔들어 놓았다. 도대체 그 짧은 논문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

유전학과 유전자, DNA를 제외한다면 현대생물학은 아예 존립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오늘날의 생물학은 온통 이런 정보로 넘쳐난다. 유전학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유전물질과 그런 유전법칙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는 분야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런 유전물질의 존재인데 그것이 DNA라는 것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30년대였지만 1950년대에 이르러서도 많은 연구자는 DNA에 대해서 별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단백질은 종류가 수천 가지나 되는 데 반해서 그보다 훨씬 단순한 구조의 DNA는 모든 동식물에서 오직 한 가지 종류만 발견되는데 그것이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유전형질에 대한 정보를 모두 포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DNA가 유전물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자체가 갖는 구조의 단순함, 즉 오늘날 우리가 ‘이중나선’으로 부르는 그 꽈배기처럼 꼬인 사다리 구조에서 비롯된다. 사다리의 양쪽 기둥이 마치 지퍼가 열리듯 그렇게 풀어지고 그 풀어진 각각의 기둥이 자신과 똑같은 구조의 다른 기둥을 만들어냄으로 해서 한 세포가 두 세포로 증식할 때 똑같은 유전정보가 두 세포에 그대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이처럼 DNA에 의존해서 번식과 진화를 거듭해 왔다.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은 바로 이런 DNA를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인간에게 유용한 새로운 생물종을 만들고 또 인간에게 유해한 악성 유전병을 제어하는 등의 연구를 수행해서 21세기 과학의 총아로 각광받고 있다.

각각 25세와 36세의 풋내기 연구자에 불과했던 왓슨과 크릭은 그런 이중나선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서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점을 입증함과 동시에 유전물질로서 작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를 제시하는 데 성공하였다. 왓슨과 크릭은 DNA 구조 발견의 공로로 다른 한 사람의 조력자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1962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1968년 처음 발간된 ‘이중나선(The Double Helix)’은 제임스 왓슨이 1951년 자신이 처음 영국에 발을 들여놓았을 무렵부터 1953년 봄 ‘네이처’지에 논문을 실을 때까지 자신의 주변사를 소설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신출내기 생물학자 왓슨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그때까지 박사학위도 받지 못했던 무명에 가까운 물리학자 크릭을 처음 만나서 함께 DNA의 구조를 밝히는 연구에 뛰어들게 된다. 당시의 DNA 연구는 영국의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 등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 쟁쟁한 과학자들을 물리치고 신참인 왓슨과 크릭이 먼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

왓슨이 미국인 특유의 자유롭고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면 크릭은 천성적인 떠버리이기는 하지만 보다 신중하고 합리적이다. 왓슨이 생화학자로서 교육을 받은 데 반해서 크릭은 X선결정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모두 저명한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서 일찍부터 유전물질의 정체를 밝히고자 하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남들에 앞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필경 똑같은 목표에 주목해서 함께 나아갔다는 점, 학문적 배경이 달라서 서로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젊은 연구자로서 자신들에게 부족했던 지식을 주변 사람에게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 등이 기여하는 바가 컸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특별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젊은 연구자만이 가질 수 있는 탁월한 순발력과 신선한 아이디어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도 다른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DNA 구조가 이중나선인지 아니면 삼중나선인지, 염기쌍의 결합이 같은 염기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다른 염기들과 결합하는지 등에 대해서 이론을 확립하는 데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는 즉시 다른 대안을 찾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다른 연구자가 자신들의 업적과 경험에 매달려서 더 이상 진전이 없을 때 그들은 성큼성큼 새 길을 걸어나갔던 것이다.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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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슘페터의‘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원동력은 창조적 파괴다”

경제학에서 1883년은 매우 기념비적인 해라고 할 수 있다. 3월에 공산주의 경제학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가 사망했고, 같은 해 2월과 6월에는 20세기 자본주의 경제학을 대표할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1883~1950)와 존 메이나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1883~1946)가 각각 태어났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1930년대의 대공황과 대량실업을 극복하는 데 실질적이면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에 따라 케인스는 죽기 전에 이미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떠올랐다. 이후 케인지언(Keynesian)이라 불리는 케인스를 추종하는 경제학자들이 득세를 했을 뿐 아니라 아직도 경제학계의 다수를 점하고 있을 정도다.

슘페터도 경제발전, 경제변동, 경제체제, 경제사상 등에서 케인스 못지않게 훌륭한 연구 업적을 많이 남겼다. 하지만 당대에 케인스의 주장과 이론이 현실 경제에 많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큰 각광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수요 측면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케인스 경제학이 잘 작동하지 않으면서 슘페터의 견해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슘페터는 공급 측면에서 기업과 기업가의 역할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슘페터’ 하면 떠오르는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는 그가 29세 때인 1912년에 쓴 ‘경제발전론’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후 창조적 파괴는 국가와 기업가는 물론 개인의 역량 개발 등에서도 수없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슘페터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창조적 파괴라는 단어가 가지는 생명력 때문이다.

슘페터는 기업가들의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경제가 발전해 가는 과정을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라고 불렀다. 그는 창조적 파괴 또는 혁신을 위해 필요한 핵심적 요인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들었다.

① 새로운 제품의 발명 또는 개발
② 새로운 생산 방법의 도입 또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
③ 새로운 시장의 개척
④ 새로운 원료 또는 부품의 공급
⑤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조직의 형성

현재나 과거를 막론하고 기업가들이라면 이 중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성장의 엔진들이다. 이들 엔진을 여하히 개발하고 운영하느냐에 기업뿐만 아니라 한 나라 경제의 성장과 국민의 생활수준은 물론 인류 물질문명의 발전이 걸려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를 주름잡던 미국의 자동차회사 제너럴모터스(GM)와 일본의 소니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반면 일본의 도요타와 우리나라의 삼성전자가 세계 1위 그룹에 올라서고 있는 것도 창조적 파괴라고 부를 수 있는 엔진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달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을 기업가들의 창조적 파괴 과정에서 찾은 슘페터가 1942년에 내놓은 책이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쓴 맥락에서 보면 슘페터는 자본주의 예찬론자로서 사회주의는 없어지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꽃필 것이라는 주장을 할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정반대로 슘페터는 책에서 ‘자본주의는 붕괴될 것이고 그 뒤를 사회주의가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그렇다고 슘페터가 마르크스의 추종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스스로 자신을 비(非)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를 정도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슘페터는 대중궁핍화나 산업예비군에 이은 대공황과 같은 경제적 실패에 의해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틀렸다고 공격한다. 대신 자본주의의 경제적 성공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붕괴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최성환 대한생명 경제연구소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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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
“강대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잘 조화시켜”

“경제대국조차 힘에 부치는 군사력을 시도하기 때문에 국력이 쇠퇴하고, 적정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나라가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다.”  - 본문 중에서

역사를 관찰하면 어떤 국가들은 강력해진 반면 어떤 국가들은 쇠퇴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흥밋거리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역사학자인 폴 케네디(Paul M. Kennedy·1945~) 예일대 교수는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에서 지난 5세기 동안의 세계적인 정치행태를 광범위하게 분석하여 경제력과 군사력 간의 긴밀한 관계를 규명하여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설명하고 있다.

정교한 학술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1987년 여름 발간되자마자 미국 독서시장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책이 출간되었던 1980년대 후반은 아직 냉전은 끝나지 않았고, 미국 경제는 불황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많은 지식인이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저자는 역사상의 강대국들의 성장과 몰락을 분석하면서 미래를 예견하고자 했다.

1500년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국가는 유럽 제국이 아니라 중국의 명나라였다. 그렇게 막강하던 명나라는 왜 당시까지는 후진적이었던 유럽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뒤지게 되었을까? 저자는 그 원인을 중국의 막강한 중앙집권적 권력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중국은 비옥한 땅과 인구, 지정학적 위치에서 강대국으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제국은 소극적이며 진취성이 부족했다. 중국은 막강한 함대를 통해 세계의 부를 긁어 모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닷가 지역이 지나치게 부유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베이징(北京)의 귀족들은 해운 산업 및 무역을 억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반해 유럽 각국의 사회는 봉건사회로 중앙집권적 권력이 없었고 각 봉건 제후들은 각자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 치열한 자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봉건 영주들의 자유경쟁이 뒷받침된 유럽은 막강한 부와 군사력을 가진 국가로 등장했고, 중국은 쇠퇴하고 말았다.

아시아에서는 유럽 국가와 사회 구성이 비슷한 일본만이 봉건적인 형태로 유럽과 유사한 국가발전의 길을 걸었다. 유럽은 분산된 국가체제가 가장 큰 약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으로 말미암아 유럽 국가들은 스스로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수단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고, 다양한 국가 간의 경쟁이 해상으로 뻗어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정치군사적 다원화와 지적 자유가 끊임없이 서로 작용하면서 ‘유럽의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자유경쟁에 의한 유럽 각국의 번영은 내부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몇 차례에 걸쳐 유럽의 국가들은 축적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충돌시키면서 ‘승자 없는 전쟁’을 되풀이하였다. 피레네조약에서 빈협정에 이르는 오랜 기간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유럽 각국 간의 내부 경쟁은 단기적으로는 전쟁과 파괴를 가져왔지만, 결과적으로는 군사적 경험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어 내는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견제와 상호보상이라는 이중원리로 유럽은 점차 경쟁하지만 일정 부분 협력하는 형태의 선진적인 다국가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강대국의 흥망을 결정지은 새로운 요소는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기술은 경제적인 번영과 더불어 군사적인 역량으로 이어졌다.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영국은 1815년 이후 기술을 바탕으로 나머지 국가들과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강대국이 되었다.

산업혁명으로 비유럽 지역은 점점 쇠퇴해 갔고,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지역은 점차 근대화라는 새로운 경제시대를 맞게 되었다. 산업혁명에 있어서는 후발국이었으나 유럽 내부 전쟁에 휩쓸릴 필요가 없었던 미국은 막대한 경제력을 축적하여,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경제대국이 되었다. 4년간의 남북전쟁으로 많은 것이 파괴되었지만 치열한 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은 군사적으로도 성숙하게 되었다.

이윤철 한국항공대학교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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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먼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
“고상한 신사숙녀도 동물의 속성을 버리기는 힘들다”

인류역사상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라는 구절만큼 심각한 오해와 비난과 질시를 받았던 말도 없을 것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직후 등장했던 이 말은 동물원 우리에 갇힌 침팬지와 고릴라가 바로 만물의 영장이자 과학과 문화의 수호자인 현대인의 조상이라고 지칭함으로 해서 진화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확산시키는 데 더할 수 없는 무기가 되었다.

물론 이 말은 틀렸다.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탄생하지 않았다. 다만 진화의 역사에서 원숭이와 인류는 같은 조상에서 유래하였을 뿐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영장류(靈長類)와 유인원(類人猿)의 차이를 아는가? 또 역사 시간이나 생물학 시간에 배운 원인(猿人)과 현대인의 차이는?

네 발 짐승을 일컫는 포유류 중에서 영장류는 고양이나 코끼리, 물개, 곰 등 다른 동물과 확연히 구별되는, 모든 원숭이류를 한데 묶어서 지칭하는 용어다. 여기에는 긴꼬리원숭이라든지 안경원숭이처럼 겨우 원숭이의 모양을 갖추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별로 친숙하지 않은 동물도 모두 포함된다. 영장류 중에서 유독 인간과 많이 닮은 원숭이 무리가 있는데 바로 꼬리 없는 원숭이인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 유인원이다. 유인원이란 말은 ‘인간을 닮은 원숭이’라는 의미다.

수백만 년 전의 먼 옛날, 영장류의 한 무리에서 유인원 무리가 새로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유인원 중에서 일부가 인간의 조상이 되었는데 이처럼 인류가 갈라져 나온 이후에도 고대의 유인원은 계속 진화를 거듭해서 현대의 유인원이 되었다. 또 인류의 조상도 진화를 거듭해서 마침내 현대인인 호모사피엔스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조상이 태어났다가 사라졌다.

원인은 바로 그런 인류의 먼 조상들을 지칭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만 년 전에 현생인류인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등이 탄생했는데 이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약 10만 년 전에 호모사피엔스가 태어났다.

따라서 침팬지나 고릴라와 같은 현대의 유인원과 인간은 다만 조상을 같이할 뿐이다. 분류학상으로는 가까운 형제라고나 할까? 하지만 유인원이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과학에서 동물학이라고 하면 사람을 제외한 다른 동물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에 대한 연구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영역이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물학자의 관심거리는 되지 못했다.(의학과 같은 실용과학은 물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것은 실용적 목적 수행을 위해서이지 과학적 호기심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관행에서 탈피하여 마치 개나 고양이를 관찰하듯 또는 침팬지나 고릴라를 연구하듯 사람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국의 저명한 동물학자 데스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였다. 그가 1967년에 발간한 ‘털 없는 원숭이(The Naked Ape)’는 인간을 원숭이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것을 관찰한 흥미진진한 연구보고서다.

Ape는 유인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털 없는 원숭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털 없는 유인원’을 지칭하고 모리스의 연구대상은 곧 인류의 가까운 형제동물인 침팬지나 고릴라에 빗댄 인간을 뜻한다. 이제 인간을 동물원 우리에 가두고 모리스의 관점에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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