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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oice - 자유무역과 보호주의, 도전할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러셀 로버츠 지음, 유종열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1
<경제학 카페> 의 저자 유시민씨는 '경제학은 반직관적 학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반직관적'이라 함은, 직관적으로 옮고 그름을 판단하기 힘들다는 것을 뜻합니다.

유시민씨는 '자유무역의 수해자와 피해자'라는 대목에서 이 얘기를 꺼내는데,
결국, 자유무역은 잃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많다는 결론을 내릴 유씨는,
아마도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심히 직관적인 나머지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있다는 얘기를 하고싶었던거겠죠.

직관적인 판단.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이익에 해가 될 때, '이건 안돼'라고 직관적인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사실, 어떤 사안이든 그렇습니다.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 보다는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를 따지기가 훨씬 쉽죠.
'옳으냐 그르냐'에는 하나 이상의 입장을 따져봐야 하는 양적 어려움도 있지만, 여러 이해관계들 사이에서 기준을 세워야하는 질적 어려움도 있죠.
하지만,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는 양적 어려움도, 질적 어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2.
그럼, 유시민씨의 얘기대로,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직관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 함은,
곧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로 자유무역이라는 국가적 사안을 판단하다니.. 라고 하면서, 몇몇 분들은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정당한 권리 아닐까요. 모든 경제활동이라는게 기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욕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자칭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얼치기 경제학도' 유시민씨 역시도 이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는 바둑의 귀퉁이집과 본집을 예로 들면서, 자유무역에 대한 반대는 이들에게 귀통이 한집을(당장의 이익) 내주기 싫어 본집을(장기적인 이익) 내어주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이 대목을 마무리 짓습니다.

#3.
하지만, 유시민씨의 견해는 자유무역에 대한 반대논리의 일부분을(그것이 주류이긴 하지만) 다룬 것 뿐입니다.
그가 자유무역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을 왜곡할 여지를 가지고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무역이란 반직관적으로도 반대할 수 있는 사안이며,
'자유무역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자유무역이 옳으냐 그르냐'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반대논리도 있다는 것입니다.

을순이가 갑동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을순이가 갑동이를 싫어한다고 할 수는 없는거니까요.
을순이는 단지, 갑동이의 이러이러한 점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입장들을 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나,
무엇보다도 자유무역을 둘러싼 논점/쟁점들을 정리해나가는 것 또한 하나의 접근법이 될 것입니다.

러셀 로버츠의 는,
유시민씨와 같이 도전하는 자유무역이 도망치는 보호주의를 설득하는 내용입니다만,
소설의 형식으로, 자유무역과 관련한 논점들을 풍부하게 펼쳐보였다는 데에서 나름의 의의가 있습니다.

#4.
'생각의 나무' 출판사에서는 연이어 두편의 경제소설을 내어놓았습니다.
한편은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에 대해서, 한편은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의 저자 데이비드 리카르도에 대한 것입니다. 제목은 각각, <아담 스미스 구하기> 와 입니다.

두편 모두, 19세기의 고전경제학파 경제학자들의 환영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죠.
<아담 스미스 구하기> 에서는 스미스의 영혼이 정비공 해럴드 팀스에게 투영되고, 에서는 리카르도가 하늘나라의 허락을 받아 직접 20세기 중반의 미국으로 내려옵니다.

의 리카르도가 현실세계로 내려온 이유는 텔레비전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 에드를 설득하기 위해서인데요,
에드는 자국(미국)의 텔레비전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찬조연설을 준비하고 있었죠.

리카르도와 에드의 대화는 전편에 걸쳐 이루어지고,
기네스 펠트로우가 주연한 <슬라이딩 도어즈> 처럼, 에드가 지지하는 그 법안이 통과된 1990년대 미국과 그렇지 않은 경우 1990년대 미국을 뛰어넘으며 서술됩니다.

그런데, 실제 이 두사람의 대화는 설득에 더 가깝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이 우화의 기획이라는게 실제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사상을 잘 이해하는 것일테니까요.

#5.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아담 스미스와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두가지로 우리에게 알려져있습니다.
상품의 가격은 그에 투입된 노동시간에 비례한다는 '노동가치설'이 그 하나이고,
1814년 영국의 농산물 보호법이었던 곡물법("영국에 들어오는 농산물에 세금을 먹이겠다!") 논쟁에 맞추어 쓰여진 대표적인 저작.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로 시작된 자유무역/보호무역 논쟁이 그것입니다.

뒤에서 말씀드리겠지만,
그가 주장한 '비교우위설'은 오늘날까지도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많은 경제학자들에게 인용되고 있구요.

그렇다면, 에드는?
에드는 당장 미국 텔레비전 시장의 개방으로 자신의 텔레비전 공장과 소속 노동자들의 밥벌이를 걱정하고 있던 차였죠.

앞서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 보다는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를 따지기가 훨씬 쉽다고 말씀드렸는데,
에드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텔레비전 시장 개방이 자신의 공장과 소속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판단하게됩니다.

경제학자 명함을 달고있는 리카르도의 경우 '비교우위설'이라는 이론을 통해서,
자유무역이라는 것이 직관적인 피해의식과는 달리, 무역을 하는 양국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반직관적으로 증명해내구요.

#6.
<아담 스미스 구하기>에 이어 까지,
[생각의 나무] 출판사의 연이은 저작들에 대해 호평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떠나서,
'19세기 경제학자들과 21세기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인위적인 설정 자체가,
경제학이 우리 삶과 즐거운 접점을 시도하는 것일 테니까요.

아주아주 긍정적인 시도입니다.

#보탬1.
쓰다보니 서론에서 시작해 서론으로 끝나버렸네요. 다음엔 본론을 올릴께요. ^^;

#보탬2.
오늘날 맹위를 떨치고있는 경제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라는 말씀을 드렸었죠.
얼마 전 <10년 후 한국>을 낸 공병호 소장을 비롯해서 유수의 경제학자들이 인용하는 <자본주의와 자유>가, 바로 신자유주의가 이론적으로 생산된 시카고 학파 밀턴 프리드먼의 저작입니다.

신자유주의 관련해서는 밀턴 프리드먼과 F.A.하이예크의 <노예의 길>을 꼭 읽어보셔야 해요.

여튼, '新자유주의'에서 '新'을 빼면 '자유주의'인데,
20세기 말에 새롭게 시작하려는 '舊자유주의'가 바로 [생각의 나무] 출판사의 고전경제학 시리즈들입니다.

묘한 맥락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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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란 학문 자체가 짠하고 세상에 나오게 한 사람들을 고전경제학파라고 합니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의 데이비드 리카르도 등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모르고있는, 고전경제학파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 중에 하나가 바로 '중상주의'입니다.
고전경제학이란 '중상주의'에 대한 반정립으로 나왔거든요.
"중상주의는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게 아니야!" 하면서 나왔습니다.

중상주의가 지배적인 시절에는 무역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억압적이었죠.
예를 들어, 영국이 프랑스에서 쌀 10가마를 사고 금을 한덩이 주면, 금이 유출된다 하여 싫어했습니다.
'자국이 보유한 금'이 바로 부의 척도였죠.

무역을 못하게 하니, 무역하는 사람들이 가장 불만이 많았겠죠.
오늘날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가 각국의 관세를 없애고, 자유로운 무역을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고전경제학파는 '무역'을 아주 좋아합니다.
무역이란, 내꺼 팔고 니꺼 사는건데요. 이게 대충 분업이죠.

고전경제학파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보면,
'분업'에 대한 강조가 꼭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분업 일반에 대해서,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국가간 분업인 자유무역의 이로움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저는 자유무역에 초점을 두고 말씀드릴께요.

# 서울과 부산 對 칠레와 한국

한-칠레 FTA 협정이나, 쌀시장 개방, 등등 자유무역과 관련한 진통들을 옅보면서,
자유무역이란 것에 대해서 한번쯤 고민해보신 분들이라면.

국가 내 자유무역과, 국가간 자유무역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서울 사람이 부산에 물건 파는건 아무렇지 않은데, 칠레 사람이 한국에 농산물 파는건 왜 문제가 될까.

위에서 말씀드린 중상주의가 지배적이었던 시절에는,
서울 사람이 부산에 물건 파는 것에도 세금이 붙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울 상인들은 집단적으로 반발해서 프랑스 혁명같은 부르주아 혁명을 일으켰죠.
그래서, 국가 내 자유무역이 성립이 되었습니다.

서울을 서울 나름대로, 부산은 부산 나름대로 생산의 이점들이 있겠죠.
그 이점을 활용하는 것이 바로 분업이고 무역입니다.

사람 많은 서울에서는 공장 지어 물건 만들고, 바다와 가까운 부산에서는 물고기 잡습니다.
그리고, 공산품이 필요한 부산 사람들과 생선 요리를 좋아하는 서울 사람들이 서로 교환을 합니다.

이렇게 분업에 의한 특색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어디는 무슨 도시, 어디는 무슨 도시 하는 명칭들에도 익숙해지게 됩니다.

국가 간 무역도 본질적으로 마찬가지 아닐까요.
도시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적인 생산의 이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점을 살려서 자유무역을 하는 것은 참 바람직한 일이겠죠.

하루 24시간 우리가 소비하는 것들을 모두 직접 생산한다는거,
쉽게 상상하실 수 없을겁니다.

현실적인 얘기로,
한국의 경우 자동차, 무선통신, 반도체, 조선과 같은 주력산업이 있고,
이 주력산업을 하기 위해서는 중동의 석유나 해외 자원들이 꼭 필요하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세계적인 분업체제에 한발을 담그고 있는 것입니다.

# 우회적으로 부유해지는 방법

제가 위 단락에서 말씀드린 '효율적인 생산을 위한 분업'.
이것을 수치적으로 정식화 한 것이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입니다.

영국에서 반도체보다 자동차를 더 잘 만들고,
프랑스에서 자동차보다 반도체를 더 잘 만든다면,
한 국가 내에서 비교우위가 있는 영국의 '자동차'와 프랑스의 '반도체'를 교환하는 것은 양국에게 이롭다는 것이죠.

『The Choice』에서 1960년대 미국으로 내려온 하늘나라의 리카르도는 '비교우위론'이라는 딱딱한 명칭 대신,
'우회적으로 부유해지는 방법'이라고 표현하죠.

영국에서도 직접 반도체를 만드는 것 보다,
자동차를 프랑스에 판 돈으로 프랑스에서 반도체를 사다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 자원의 효율적 배분

왜 효율적인고 하니, 바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원이란, 꼭 석탄/석유와 같은 지하자원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생산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죠.

국가마다 특성이 있으니만큼,
우격다짐으로 한 국가가 반도체, 자동차, 모두 만들기 보다는,
반도체 만들기 좋은 국가(프랑스)는 반도체만 만들고, 자동차 만들기 좋은 국가(영국)는 자동차만 만들자는 겁니다.

어차피 각국의 주력산업,
우리나라의 반도체, 자동차, 조선, 무선통신, 등등은 자국의 제품들이 경쟁한 결과로 선택된,
자국의 생산입지에서 가장 유리한 제품들일테니까요.

# 괴리에 있어서 현명한 판단을

개인적인 오만인지 모르겠지만,
전 여기까지를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자유무역을 두고 현실에서는 티격태격입니다.
현실의 자유무역화란 실제 굉장히 폭력적인 과정이죠.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려는 국가와 그 국가의 수출품에 매기는 보복관세와 같은 국가 간 갈등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산업들의 경우 엄청난 반발이 있기도 하죠.

이론과 실제.
이 괴리에 있어서 우리는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세계화가 대세이니 모든 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침튀기는 사람들이나,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모든 갈등들이 당장 자기 이익에만 집착한 '직관적 판단'이라 매도하는 사람들이나,
자국의 산업을 몰락시키는 세계화는 나쁜 것이라고 말 그대로 '직관적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나,

그다지 현명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 다양한 스펙트럼

사람들은 흔히 명쾌하게 말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래서, 니가 하고싶은 말이 뭐야?"

전 "윽박지르지 마세요." 라고 말하고 싶군요.

이 좋은 자유무역을 두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져 있다 하더라도,
실제 찬성하는 측이든, 반대하는 측이든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찬성하는 이유, 반대하는 이유는 제각각입니다.

요즘 TV에서 하는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보면,
극중 소지섭은 실로 다양한 행동을 하지만, 그 이유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잖아요.
소지섭군이 서지영양에게 접근한다고 해서, '소지섭이 서지영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감탄하는 사람이 있다면?

'TV 좀 봐라.' 그러겠죠.

# 스펙트럼 나눠 보기

'사랑'이란 것은 마냥 좋은 것이지만,
현실에서의 사랑이 보여주는 모습이란 천차만별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무역 역시도 마냥 좋은 것이지만,
누가 어떤 이유로 추진하느냐에 따라 현실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자유무역을 추진하는 주체가,
리카르도가 강변한 자유무역의 진정한 장점인 '자원의 효율적 분배'니 '우회적으로 부유해지는 방법'을 위해서 추진하고있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 선택, 합의 對 압박, 생존

아시겠지만, 자유무역을 추진하는 힘이란 '자원의 효율적 분배'에 대한 공정한 합의가 아닙니다.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대의로 밀어붙여지고 있죠.

제가 이렇게 뭉뜽그려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세계화의 화두가 되고있는 국제무역기구들 때문입니다.

세계화 하자면서도, 실제로는 크게 NAFTA, EU, ASEAN, APEC, ASEM, 등으로 쪼개어져있죠.
이중 결속력이 강한 것은 NAFTA와 EU뿐. (결속력이 약한 ASEAN에 대한 NAFTA와 EU의 구애의 결과가 바로 APEC과 ASEM입니다.)

이렇게 자국의 이해를 중심으로 시장을 넓히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세계화가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근거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결속력이 약한 - 즉, 자국의 이해를 반영할 시장이 좁은 - ASEAN 이나 중국, 일본, 러시아와 같은 국가들에게 세계화란,
선택이나 합의가 아니라 압박이고 생존의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압박에 의해 이루어진 '자원의 분배'가 '효율적'이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을지는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갑동에서 빵장사를 하던 갑이 을동에서 신발장사를 하던 을에게,
" 빵을 만들기엔 갑동이 더 낫군. 내가 보니 을동에서는 신발 만들기가 더 좋구.
을, 자네 갑동에다 신발 팔게. 대신, 난 을동에 빵 팔게. " 라고 한다면?

갑동의 신발장사들과 을동의 빵장사들은 억울하지 않을까요?
사실, 갑은 자기 빵을 을동에서도 팔려고 할 뿐인데.

# 윽박지르기

얼마 전에, 공병호 소장의 <10년 후 한국>을 보니,
곧 몰락할 위기에 놓인 한국 농업인들을 보고 그동안 정부가 준 지원금으로 경쟁력 향상 안시키고 뭐했냐고 하시던데,
이다지도 윽박지르시다니.

이 분은 자유무역의 요체인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걸까요.
정부가 준 지원금이면 한국 농업은 동등한 경쟁의 조건을 갖춘 것이고,
농업인들이 제정신만 차렸다면 모든 산업을 한국이 떠맡을 수 있다는 생각이신지?

갑이 을과 자유무역 체결하면서, 갑동 신발장사들에게 윽박지르기까지 한다면?
좀 그런데요?

하긴, 공병호 소장님.
자유무역이 무엇인지에 대한 얘기는 없고, '대세' '추세'만 강조하시더라구요.

# 자원의 이동성에 대해

자유무역에 따른, 전체적인 부의 증대, 그리고 일자리의 교환.

당장 국내 취약 산업의 일자리는 사라지더라도 주력 산업의 일자리가 늘어나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닌데에다,
주력산업이 활기를 띄니 경제가 활력을 보일 것이라는 소기의 목적.

그런데, 못된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 처럼,
주체와 방법이 비틀어진 자유무역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에도 어려움이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런지요.

일단, 갑동의 을동에서 빵을 팔게된 갑이,
갑동에서만 빵을 만들라는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갑동의 신발장사 중 빵공장에라도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이들 허탈해집니다.
을동이면 또 몰라도, 농업 하려고 칠레 건너가기는 힘든 일 아니겠습니까.

'자원의 각기 다른 이동성' 문제입니다.

세계화와 관련한 필독서로 알려진 한스 페터 마르틴의 <세계화의 덫> 서문을 보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세계화라는 것이 일반 사람들 - 월급쟁이들을 뜻하겠죠? - 에게 살갑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이동성의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에 비해 취업하는 사람들은 이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죠.

즉,
갑동에 빵공장이 증축될거라는 보장은 없는겁니다.
대신, 갑동 사람들은 을동 사람들과 경쟁력 싸움을 해야겠죠.

기업이 하나둘 한국을 떠난다는 '산업공동화'니,
주력산업에 대한 '경쟁력 강화 주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갑동 사람들, 갑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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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자유무역에 대한 찬반논쟁의 논점은 어느정도 왜곡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The Choice』의 경우,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을 쉽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쓰여진 듯 한데, 비교우위론이란 아직까지도 자유무역 찬성론자에게 두고두고 인용되는 고전이론입니다.

제가 자유무역에 대해서 선뜻 찬성이니 반대를 논하지 않으면서도 굳이 『The Choice』를 들먹이는 이유는,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하기 힘들지만, 어느정도 찬반논쟁상의 논점을 바로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
이를테면, 우리는 한국 기업이 외국계 자본에 매입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반대론자들이 갖는 논점상의 왜곡입니다.

얼마 전에 소버린이라는 투자기관이 LG그룹의 경영권을 인수할 ‘뻔’한 일이 있어서 이슈가 되었던 그런거요.
기업의 인수합병이 어제오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이슈가 되었던 이유는, 주체가 외국계 투자기관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겁니다.

흔히들, 외국계 투자기관은 핫머니(hot money)니 뭐니 해서 기업경영에는 관심이 없고, 자산 불리기에만 관심이 있다고 하는데,
외국계 자본은 그렇고, 한국계 자본은 그렇지 않다는 믿음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굳이 역설할 필요없이 현실적인 예를 들어볼께요.

01년에 대우자동차가 GM에 매각된다고 말이 많았었는데, GM에 매각되어 GM대우가 된 이 자동차회사. 어떤가요?
버젓이 자동차 개발하고 생산하고, TV에 광고도 내고있습니다. 매각되면 무너진다던 부천경제 역시 그대로입니다.

#
자본을 자본으로 보지않고, 자본의 국적을 따지기 때문에 자유무역의 진정한 논점이 왜곡됩니다.
그럼, FTA라는 국가간 협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무역과 투자에서 자본의 국적을 빼버린다면?

시장의 확장만이 남게됩니다.
‘자원의 효율적 분배’도, ‘국가기반산업의 보호’도 결국은, 시장의 확장에 대한 찬성반대를 두고 그럴듯한 명분을 붙인 것 뿐입니다.

한번 속는 셈 치고, ‘시장의 확장‘을 논점으로 자유무역의 찬반논쟁을 살펴보도록 하죠.

#
시장이 확장된다는 것의 의미.
그런데, 시장이란 재화나 서비스를 매매하는 공간에 불과하니만큼, 같은 확장이라도 매매의 주체마다 느끼는 바가 다릅니다.

A국가의 특정산업에서 업계순위를 A1, A2, A3가 각각 차지했고, B국가의 특정산업에서 업계순위를 B1, B2, B3가 각각 차지했다면,
통합된 A, B 양국의 특정산업시장에서 업계순위는 A1-B1-B2-(A2-B3-A3) 뭐 이런 식으로 되겠죠?

이렇게 되면, 소비자들에게는 선택의 폭은 넒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큰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생산자들은 다르죠. 상위 3개 업체만 살아남을 수 있는 업계특성상 과거 A2, B3, A3가 차지했던 시장은 A1, B1, B2에게 적당히 흡수될테니, 상위 3개 업체들 입장에서는 더 넓은 시장과 더 많은 이윤을 뜻합니다. 물론, 하위 3개 업체들은 아니겠죠.

#
이제 예상했던 반응을 기준으로 찬성반대로 편가르기를 해보죠.
[소비자와 A1, B1, B2] - [A2, B3, A3]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전자는 찬성을 후자는 반대를 할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간단한 편가르기에서 또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소비자 그룹이 제 예상과는 달리(훌쩍) 현실에서 그다지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도 특이할 만한 사항이구요. 생산자 그룹이 찬성과 반대로 나뉜 것이 인상적이에요.

찬성과 반대로 적당히 나뉜 생산자 그룹의 경우, 현실에서 나타나는 그대로입니다. 찬성 그룹은 반대 그룹의 ‘경쟁력 없음‘ 을 질타할 것이 뻔하죠.
그럼, 이 생산자 그룹에게 남는 선택이란, B국가에서 업계순위 2위를 하던 B2社와 같이 경쟁력 상승을 도모하야 업계 3위로 살아남는 방법 밖에는 없는겁니다.
오늘도 경쟁력 내일도 경쟁력. 다들 노력해도 승부는 상대순위겠지만.

한편, 소비자 그룹의 경우 현실에서 그다지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이기도 하기 때문일겁니다. 소비자가 아마 위 6개 중 어느 한 곳에 소속되어 찬성이든 반대를 주장할 것입니다.

결국, 이론상의 편가르기가 아닌 현실의 편가르기는,
[A1, B1, B2] - [A2, B3, A3]
이렇게 되겠네요.
생산자의 이해관계가 소비자로서의 이해관계에 우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미심장합니다.

#
결국, 자유무역에서 중요한 논점은 ‘시장의 확장’ 이고, 시장의 확장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자의 이해관계라는 그림을 그려봤습니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시장의 확장이란, 더 많은 생산요소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경쟁의 심화를 뜻합니다.

생산요소. 고등학교 때는 토지-자본-노동 이렇게 배웠는데, 이제 토지-자본-노동-지식 이렇게 된다더군요.
여튼 이런 생산요소들을 더 널리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거죠. 그리고, 넓어진 선택은 더 나은 조합을 만들어내기도 할 것입니다. 찬성론의 명분인 ‘자원의 효율적 분배’ 가 여기서 나오게됩니다.

하지만, 더 많은 생산요소를 이용할 수 있는 대가는 경쟁의 심화입니다.
그 결과에 따라, 상위 3개 회사는 추가적인 시장을 확보할 수 있고, 하위 3개 회사는 자신의 시장을 잃어야합니다.

#
이제까지 엉터리 그림을 인내심과 더불어 지켜봐주신 분이라면,
자유무역 찬성론자들의 ‘자원의 효율적 분배’ 가 왜 명분에 불과한지를, 그리고 왜 소비자의 목소리보다 생산자의 목소리가 더 큰지를 알게되셨길 바랍니다.

‘자원의 효율적 분배’ 는 시장의 확장에 따른 단면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찬성론자들이 ‘자원의 효율적 분배’ 만을 부각시킨다고 표현하는 것이 낫겠군요.

자원의 효율적 분배란,
나의 토지 대신에 타인의 토지를 사용할 수 있듯이, 나의 노동 대신에 타인의 노동을 사용할 수 있음을 뜻하고, 물론 동시에 타인의 노동 대신에 나의 노동을 사용할 수 있음을 뜻하고, 결국 그의 노동과 나의 노동이 생존의 경쟁을 해야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선택은 국적이 아닌 상대순위입니다.
그리고, 상품의 꽃(?)은 피어납니다.

#
한국은 90년대 초반까지 FTA에 반대하다가 뒤늦게 이에 합류했습니다. 한-칠레를 시작으로 미국, 일본, 싱가포르, 아세안에 이어 인도, 유럽까지 확장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한국이 회원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다자간협정인 WTO에 머무르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B2社와 같은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다자간협상이라는 방식은 모 아니면 도와 같은 방식이었는데, 이것이 난항을 겪으면서 FTA라는게 등장합니다. 협정을 맺은 상호국 사이에 WTO협정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특혜협정이 가능한 FTA.

땅따먹기 하듯이 EU는 물론, NAFTA(북미대륙FTA)니 AFTA(아세안지역FTA)가 잠식해오는데, 눈치만 보고있다가는 순식간에 따가 될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뒤늦게 FTA를 추진하기 시작한 한국에서,
앞으로도 찬반논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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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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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질과 정신의 관계는 어떠하냐?' 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일겁니다.


흔히,
유물론이라 하면, 물질이 정신에 끼치는 영향을,
관념론이라 하면, 정신이 물질에 끼치는 영향을 중시하죠.


예를 들어,
갑 을 모두 '성매매'에 반대한다고 가정하고,
두 사람이 술자리에서 얘기를 하는데, 이런 얘기가 오고갔다 치죠.


갑: 사람이 돈을 주고 사람을 사는건 있어선 안돼. 남자들이 각성해야 한다구.
성매매는 근절되어야 하니까, 특별법을 강력하게 시행해서 성매매를 못하게 해야한다구.


을: 성매매는 나쁜 것이고 특별법은 시행되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
중요한건 돈 문제라구. 성매매를 두고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남자들과 돈이 필요한 여자들이 있는 한, 그들은 어떻게든 포주를 통해서 만날거야. 따라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포주들의 행포가 더 심해질거라는 부작용도 예상해야돼.


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런 얘기들 속에는,
갑과 을이 철학에 관심이 있든 없든을 떠나서, 물질과 정신에 대한 갑과 을의 철학적 사고가 담겨있다고 봐야합니다.


비유인 만큼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제도라는 강제를 통해서 사회적 의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갑은, 관념론에,
의식변화는 바람직하지만, 의식변화 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을은, 유물론에 가깝습니다.


2.


몇일 전에 제레미 러프킨 교수의 <소유의 종말>을 읽고 난 느낌은,
그의 저서 <노동의 종말> 은 물론이고, 앨빈 토플러의 <제3물결>, 한스 페터 마르틴이 공저한 <세계화의 덫>, 등과 유사한 그것이었습니다.


첫번째 공통점은,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풍부하다 못해 질려버릴 정도죠.


제레미 러프킨 교수는 이 책 <소유의 종말> 을 쓰기 위해서,
꼬박 6년 동안, 350여권의 책과 1천여편의 논문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석 부분도 굉장히 두텁구요.


두번째 공통점은, 과거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세계화의 덫> 의 경우는 세계화 자체를 화두로 하기 때문에 다소 한정되지만,
나머지 책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 자체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세심하죠.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을 쉴새 없이 넘나들면서, 흐름을 정식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제기되었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어떠한가.


저는 여기서도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굉장히 관념적이죠. 제도나 의식의 변화에 매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3물결>이야 낙관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이었으니 다소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치더라도,
제3부문 비시장경제 <노동의 종말>, 유럽 경제공동체와의 균형 및 세계적 규모의 통치기구 <세계화의 덫>, 지역 문화 및 교류의 활성화 <소유의 종말> 의 귀결은 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맥이 풀린다고 해야할지.
지금까지 세밀하게 사회의 변화들을 고찰하고서는, 반면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리는겁니다.


" 이렇게 이렇게 변했는데 이게 문제니까 이제 이렇게 하자? "


그래서, 열심히 책을 읽고 난 독자의 한마디.
" 그게 말처럼 그리 쉽간디? "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구난방식으로 이것저것 끄집어내는 즉흥적인 방식이 아닌,
맥락있게 문제를 짚어내는 이들의 노력은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3.


제레미 러프킨 교수가 얘기한 <소유의 종말> 다음에 오는 사회는 접속의 시대입니다.


'접속의 시대'
이 그럴싸한 제목이 조금 낯설다면, '정보화 시대' '네트워크 시대' 라고 불러도 괜찮겠습니다만,
<제3물결>의 앨빈 토플러는, 이런 단어들이 모두 마음에 안든다면서 '제3물결사회' 라고 뭉뚱그려버렸죠.


뭐 사회의 변화라는 것이 일부분에 한정되어 일어날 수 없다는 점만 이해하시면,
앨빈 토플러님과의 갈등은 피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밤낮 연구만 전문적으로 하는 학자가 아닌 바에야,
사회 전반적인 변화까지 바라본다는게 쉽지 많은 않은 일이고,
직접 느끼지 않으면 별로 다가오지 않는 법이니까요.


당장 우리가 느끼는 것이야,
요즘엔 안정적인 직장이란 없다더라는 정도,
요즘엔 근면 보다는 창조적인 사고가 좀 더 대우를 받는다더라 정도,
요즘엔 재테크를 다들 일찍일찍 시작한다더라 정도겠죠.


뭐 그럼 여기서 시작해보는겁니다.


사회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할 때 하더라도,
왜 그런지 정도는 알고있어야 하니까요.


4.


안정적인 직장을 제공하지 않는 것도,
창조적인 사고를 더 크게 인정해주는 것도 모두 기업이니 만큼,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빠르겠죠.


이를 단순히 보면,
기업의 생산방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예를 들면, 구조조정 같은거요.


요즘 기업들은 최대한 덩치를 줄이려고 하죠.
운영과 브랜드, 마케팅, 판매망을 제외하고는 될 수 있는 한 소유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뭐 유명한 회사 중 하나인 Nike만 보더라도,
Nike는 생산공장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회사니까요.
대신, 입지가 좋은 해외업체와 생산계약을 맺죠.


우리나라의 현대자동차 역시도,
실제 생산라인에는 현대자동차 직원이 반, 하청업체 직원이 반 이러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기업의 생산방식 자체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고용의 문제가 발생한다?
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한번 더 생각하셔야 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기업의 생산방식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니까요.


고용의 좌지우지 하는 것이 기업이라면,
기업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시장이죠.


결국, 고용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시장이 되는 셈입니다.


5.


뭐 시장이란게 그렇습니다.
빵집이 잘된다더라 하면 우 빵집으로 몰려갔다가,
PC방이 잘된다더라 하면 우 PC방으로 몰려가죠.


물론, PC방으로 사람들이 몰려간 것은,
빵집 장사가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기도 하죠.
빵제조업이라는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산업분야야 다양하지만, 사람은 더욱 다양한 법.
이렇게 만들어낸 여러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는 것은 금방이겠죠.


이런 식으로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게되면,
즉, 동네에 빵집이 있을 만큼 있다면,


이제 빵집이 있다는 것 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듭니다.
빵집을 차리긴 했는데, 장사가 안될 수 있는겁니다.


빵집 차리는 문제가 끝나면,
이제 문제가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빵을 많이 만드는 문제로, 빨리 만드는 문제로.
그리고, 또 옮겨갑니다.
빵을 맛있게 만드는 문제로, 빵을 배달해주는 문제로.
계속 옮겨갑니다.
빵 판매 이벤트의 문제로, 문제로 문제로..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수많은 빵의 문제들을 다시 한번 보시면 산업의 이동이 보입니다.
제조업(빵집 차리기, 빵 많이 빠르게 만들기) - 서비스업(빵 배달하기) - 마케팅산업(빵 팔기 이벤트) 까지,
빵 산업의 변천이라고나 할까.


뭐 그뿐 아닙니다.
이렇게 이동하는 빵집 사장님의 고민에 따라 빵집 종업원들도 달라질 수 밖에 없는겁니다.
사장님은 이제 면접에서 이런걸 물어보니까요.
" 자네 1분에 빵 몇개 만들 수 있나? " 가 아니라, " 자네라면 빵을 어떻게 팔겠나. "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빵집 사장님은 빵공장을 팔아버릴 수도 있겠죠.
빵 기계니 배달이니 다른 빵집과 크게 차별화 할 수 없는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테니까.


6.


빵에 관한 이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곰곰히 보면,
사실 특별할게 없습니다.
그저 빵을 팔기 위해서였죠.


빵집 사장님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는 빵을 팔기 위해서)' 라는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결국, 시장의 문제라는겁니다.


빵집 사장님의 고민이 무엇이건, 빵집 종업원의 고민이 무엇이건,
노동의 시대건, 접속의 시대건,


결국은, 빵을 팔기위한 일대 헤프닝,
즉 시장의 문제입니다.


러프킨 교수의 풍부한 근거자료와 세심한 전개논리 속에 소외되어 있는 것도,
바로 이점입니다.


그는, 빵집 사장님의 심리 변화와 각 빵집의 판매전략 판매조건 등을 각양각색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우리 동네 빵집 뿐만 아니라 옆 동네 윗 동네 빵집들까지 모조리 조사하고 분석하지만,
결국은 시장의 문제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의 저작 <노동의 종말> 이 빵집 종업원들의 애환을 담은 것이라면,
<소유의 종말> 은 이제 빵집 브랜드로 체인사업을 벌이는 빵집 사장님과 그렇게 빵집 사장님과 멀어진 빵집 종업원의 애환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경영 컨설턴트 - 피터 드러커와 같은 - 의 명언에 혹하지 맙시다.


그의 명언도 결국 이게 전부니까요.
" 우리에게 중요한건 빵집이 아니다. 빵을 사는 고객일 뿐이다. "


경제학자들에게도 기죽지 맙시다.
" 우리는 빵을 먹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다. 팔기 위해 만들 뿐. "


7.


여튼,
제가 러프킨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불편함도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잡히지 않으면서 예시만 무지하게 많으니까요.


여튼, 시장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뺀체 제방업계에 대해서 장황하게 서술한 러프킨 교수 종말시리즈의 결론은,
'제3부문 비시장경제'<노동의 종말> '지역 문화의 활성화'<소유의 종말> 입니다.


그런데, 원인이 빠져있는 문제 분석에서 올바른 결론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의 결론은, 제도와 의식 변화를 촉구하는 관념의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 이렇게 이렇게 변했는데 이게 문제니까 이제 이렇게 하자? "


그래서, 다시 한번.
열심히 책을 읽고 난 독자의 한마디.
" 그게 말처럼 그리 쉽간디? "


8.


왜 어려운지 차근차근 얘기해보겠습니다.
빵 얘기를 하려던건 아니었는데, 빵 얘기가 나온 김에 계속 빵 얘기로.


'제3부문 비시장경제'란 이런겁니다.


예전에 10명이 필요하던 빵공장에 제빵기계가 들어오면서 이제 제빵기계 운전하는 1명만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9명은 빵 포장하는 일로 바뀌었는데, 또 포장기계가 나와서 8명은 다른 일로.


뭐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아무리 다른 일로 사람을 돌려도 한계가 있죠.
결국 빵집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러다보니 빵집 종업원들의 생계가 걱정이 되는겁니다.


그래서, 빵집 종업원들에게 새 일을 주는겁니다.
다름 아닌, 노인정 봉사활동!


빵집에서 한달에 100만원을 받던 갑동이는 노인정 봉사활동의 필요성을 강의받은 후, 봉사활동을 하면서, 50여만원의 사례금을 지급받죠. 그리고, 생계비 지원 명목으로 세금 면제, 혹은 교통비 면제도 이루어지구요.
국가의 재정 지원은 세금 확충을 통해서 해결합니다.


결국, 세금을 통한 생계 지원.
서유럽 복지국가들의 모델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 제3부문 비시장경제이죠.


하지만, 리프킨 교수가 제3부문 비시장경제라는 대안을 담은 <노동의 종말>을 발표하고, 학계 경영계에 바람을 넣은 것이 95년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서유럽 복지국가들은 꾸준히 복지정책을 축소해왔으니까요.


( 오해가 생길까봐 말씀드리는데, 서유럽 복지국가의 사례는 저 역시 충분히 다루어보지 못했지만,
90년대 중반 이후의 분위기 부터, EU 로의 결속이 더해지는 오늘까지의(엊그제 헌법 발표했대요.) 변화는 리프킨 교수의 모델과는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


[보탬]


<소유의 종말> 독서후기를 쓰려고 하다가 얘기가 장황해졌네요.
나름대로, 리프킨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불편함을 글로 풀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다음 후기에는 그의 예민한 지적들을 담아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소유와 접속' 이라는 관념에 대한 다방면적인 접근들은 굉장히 뛰어났던 것 같거든요.


그리고, '소유의 종말' 이라는 화두에 대한 우리나라의 실정도 돌아보고 싶고.
정보산업이라는 고부가가치 산업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최근 지적재산권에 대해서도,
러프킨 교수가 던져주는 문제의식은 참 많습니다.


아 결국 후기는 못쓰고 잡담만 늘어놓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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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조지 소로스 / 김영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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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아직 읽어보진 못했습니다만,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지 소로스의 경우는 칼 포퍼에게 수학을 한 사람인데,
그 스스로 칼 포퍼의 철학에서 상당부분 영향을 받았음을 얘기하고 있구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인식의 기본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는 '오류성과 반사성' 이 그것이죠.


2.
그런데, 저는 '오류성'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 "
" 당신도 충분히 오류를 범할 수 있다. "


는 것은,
맹신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옳은 태도입니다만,
자칫, 진리를 쫓는 진지한 논의마저도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소지가 있거든요.


오류성 자체는 옳은 개념인데,
오용될 소지가 있다는거죠.


" 누구도 완벽할 수 없어. " 라고 귀를 막아버리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는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는' 아이러니(irony) 니까요.


만약, 저라면 이렇게 얘기하겠어요.
" 전 완벽하다고 얘기한적 없는데요. 전 완벽한 것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제 생각을 얘기한거에요. 당신도 당신의 생각을 얘기하면 되구요. "


조지 소로스의 오류성은 그렇다고 봅니다.
(이건 선입견이긴 하지만, 냉전시대에 활약했던 칼 포퍼도 그다지.)


아마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에 대해선 이렇게 얘기하겠죠.
" 흥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니까 "


3.
경제 파트로 넘어오면 좀 더 재밌습니다.


조지 소로스는,
열린사회에서는 기대가 현실에 반영된다고 얼버무렸는데,
제가 보기엔, 기대가 주식값에 반영된다고,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얘기하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배당금을 보고 주식투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겁니다. 흔히, 대박 터진다고 해서 주가를 보고 투자를 하죠.
어느날 일어나보니, 500원짜리 주식이 5,000원이 되어있더라느니 뭐라느니. 어제밤 돼지꿈은 높은 연봉의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의 시세평가로 대체되구요.
주식이란 어차피 현재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투자하는 행위니까요.


몇달 전에 한 학자가(이름이 가물가물) 근대 이후 한국사회를 돌아보면서 평가한 논문을 봤는데,
그는 '경제 분야의 주도권만 변화하지 않았다.' 고 평가하더라구요.
이거 학자의 권위를 빌리는 모양새긴 한데, 제 느낌과는 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4.
요즘 대학에선 케인즈 경제학이, 재계에선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득세하는 모양입니다.
(아 물론, 대학에선 이것저것 다 가르켜줍니다만.)


조지 소로스의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란,
재계에서 득세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불안성에 대한 자발적 우려에서 나온거구요.
이는 사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논리 중에서 한 부류를 이루고있습니다. 재계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서도 제기되는 문제의식이에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반대논리로 많이 채택되고 있는 <세계화의 덫> 도 그와 비슷한 맥락인데,
이 책의 저자는 우리나라의 '한겨레'쯤 되는 독일 언론사의 언론인이죠.


여튼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되찾자'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과거에는 기업을 국가가 통제했는데, 지금은 기업이 국가의 품을 떠나 세계로 진출했으니,
이제 기업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국가규모가 아니라 세계규모의 통제기구가 필요하다는 논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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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의 경제성장과 발전전략 - 회고적 재평가, 동아시아연구단 총서2
윤진표 편 / 오름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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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동남아의 경제성장과 발전전략> 읽고있습니다.

제목과 개요만 보고 책을 골라버릇 하다보니, 늘 글쓴이는 뒷전이네요.
동아시아연구단이라는 컨소시엄에서 낸 논문집이더군요.

일곱분의 연구원께서 쓴 일곱편의 논문이 실려있는데,
서문에서 연구의 취지와 각 논문의 개요에 대해서 자세하게 적어놓은 편이라, 저는 순서대로 읽는 방식 대신 골라서 읽는 여유를 보이고 있지요.
일곱분의 연구원이 각각 다른 나라와 주제를, 각각 다른 방법으로 연구했다는 점이 다소 흥미롭네요.

첫번째. 박번순님 『동남아 경제의 발전요인과 특성』
두번째. 이요한님 『ASEAN 경제협력의 발전과정: 성과와 한계』
세번째. 윤진표님 『태국의 경제발전과 국가-시장관계의 변화: 회고와 재평가』
네번째. 전제성님 『인도네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구조와 모순』
다섯번째. 박승우님 『필리핀의 발전전략과 국가와 사회관 관계의 재평가』
여섯번째. 노영순님 『말레이시아 국가정책과 화인자본』
일곱번째. 이한우님 『사회주의권 쇠퇴 이후 베트남 사회주의 체제의 지속과 변화: 소유제 개혁을 중심으로』

일단, 첫번째 박번순님의 논문의 경우, 다른 논문과는 달리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난 '공통점에 주목' 했다는 점에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합니다만,
사실, 동남아 국가들의 발전이래봤자, 우리나라의 발전과정과 대동소이(大同小利) 한지라 크게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습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전제성님, 노영순님의 논문 또한 나중에 읽기로 했습니다.
두분의 연구원이 다루고 있는 두 나라의 경우,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족벌주의를,
말레이시아는 다민족국가로서의 민족간의 입김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죠.
우선, 일반화된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필요한지라, 특수성이 짙은 국가들은 뒤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이것저것 핑계를 대어 미루다보니,
결국 이틀동안 두편밖에 못읽었는데요.
윤진표님의 논문에 대한 후기를 써볼 요량입니다.

----------------

# 발전경제학

동남아의 경제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용어인 것 같습니다.
발전경제학은 성장의 엔진으로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인데, 쉽게 얘기해서 국가 주도 하에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배운 '국가개발O개년계획' 이거니 생각하시면 될겁니다. 당시엔, 국가가 세운 큰 안목의 경제발전계획에 기업들이 종속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겁니다.

언제나 열심히 연구하는 분들은, 우리와 같은 범인들의 머리 속을 말끔하게 정리해주는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필자는 발전경제학의 특징으로,
(1)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우위 (2) 시장에 대한 정부의 우위 (3) 수출산업의 주도, 이렇게 3가지를 꼽고있죠.
아 명쾌하여라.

# 준발전국가 태국?

필자는 위에서 설명한 발전경제학의 개념을 기준으로 태국의 경제 및 사회발전을 고찰하는데,
그의 결론인 즉은, 태국의 국가기구가 저 위의 3가지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 자격미달이었다는겁니다.

사실, 우리도 익히 겪은 97년 금융위기는 태국에서 시작되었죠.
태국에서 동남아로, 동남아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러시아, 브라질로 연쇄적인 금융위기가 일어났었습니다.

90년 중반만 해도 아시아의 호랑이로 인정받던 태국의 경제발전.
이 경제발전을 말아먹은 것이, 능력미달의 국가였다는게 필자의 결론입니다.
발전경제학에서 국가의 역할로 규정해놓은, 통화 외환에 대한 효율적 관리, 시장에 대한 합리적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면박을 주는군요.

# 태국정부만 잘못인가?

물론, 필자가 제가 받아들인 만치 단호한 논조를 취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경제위기의 요인을 내부와 외부에서 찾고자 할 때, 필자는 내부를 취사선택 한 것입니다만,
실제 논문의 대부분을 외재요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겁니다.

이 논문을 읽는 독자 조금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 외재적 요인

외재적 요인은 대충 70년대에 미적미적 시작해서, 85년 엔화급등에 탄력받아 급성장하고, 9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97년에 주르륵 무너지는,
동남아 국가 일반의 공통점을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태국의 경우,
70년대까지만 해도 주력산업인 농산물을 내다팔아 공산품을 조금씩 사서쓰는 수준이었는데, 80년대에 수출주도의 산업국가로 변모하게됩니다.
농산물 팔아서 공산품 들여오는, 수지타산 안맞는 무역수지의 적자가 큰 압박이 되었겠죠.

그런데, 농산품 팔던 태국기업에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럼, 돈이 덜 드는 산업부터 시작하는겁니다. 노동집약적인 섬유 의류 산업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외국인의 투자가 시작되는 시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외국인들은, 노동집약산업 보다 진일보한 전기전자 자동차 산업의 생산공장을 태국에 설립하게 됩니다.

이렇게 서서히 공업화되는 태국에 호재가 된 것은,
85년 일본의 엔화급등. 일본의 무역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자, 이제 일본돈까지 비싸게 쳐주고, 주변의 아시아 국가들의 화폐가치 또한 덩달아 오릅니다.

전엔 100원으로 런닝 1개 만들었는데,
화폐가치가 오르니, 100원으로 런닝 3개는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태국 1ㆍ2차 산업에 가격경쟁력이 붙게되면서, 태국 경제가 치솟기 시작합니다.

때맞추어 외국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자동차 업계들이, 대거 동남아에 생산공장을 세우게됩니다. (이때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도 진출했죠.)
우리나라 자동차업계에서 생산공정을 하청, 외주하듯이, 외국의 거대한 자동차업계들이 태국에 생산공장을 세우기 시작한겁니다.
물론, 자동차업계 뿐만은 아니구요.

때맞추어, 92년에는 금융이 자유화되면서, 외국의 공장만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돈 자체가 물밀듯이 쏟아지게되죠.

# 대외의존도

이렇게 태국의 과거사를 쭉 읊은 다음,
필자는 문제점을 꼽기 시작합니다.

태국은 한마디로 대외의존도가 굉장히 높다는게 필자의 지적인데요,
산업전체가 외국기업의 하청업체화 되어있고, 금융자유화 이후에는 금융시장 자체도 외국자본이 많아서 국제금융의 변동에 좌지우지 될 가능성이 많다는겁니다.

말은 맞는 말인데, 여기서 당황하는 독자.
이제껏 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외국의 투자를 주 요인으로 들어놓고,
이제와서 그것이 위기의 주요 원인이라니.

# 금융위기

결론에 이르면, 당혹감은 더 커지게됩니다.
태국경제에 대해서 상당량을 80-90년대의 특징인, 외국기업과 외국자본의 투자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 언급하고서,
화살은 태국정부로 돌아갑니다.

즉, 태국경제의 특징이 상대적으로 큰 대외의존도라고 설명하고서,
97년 경제위기의 원인은, 대외의존도가 큰 국내경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태국정부라는겁니다.

자세한 내막이란 이렇습니다.
태국정부는 '통화바스켓제도' 라고 해서, 태국 바트화를 미국의 달러에 고정시켜두었죠.

모든 환율은 對달러 비율로 씌여지잖아요.
달러도 한 나라의 화폐단위일 뿐인데, 기축통화로 사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안정적이라는겁니다.
이런 안정성을 빌리고자, 태국은 자국의 바트화를 달러에 고정시켜두었죠.
태국돈 25바트 가져오면, 언제든 10달러 주겠다고 한겁니다. 대신, 태국정부는 달러를 많이 모아두었죠. (외환보유고)
25바트 가져와서 바꿔달라면 바꿔줘야하니까요.

그런데, 90년대 초에 달러가치가 급등하게됩니다.
달러에 고정시켜둔 바트화도 급등하게 되는데, 미국경제가 잘된다고 태국경제가 잘되는 것도 아니니, 태국 바트화는 과대평가 되는 시점입니다.

이렇게되면, 바트화 가지고있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쟤들이 정말 달러당 25바트로 돌려줄 능력이 있는걸까 의심하기 시작하죠.

게다가 머리좋은 투기꾼들, 바트화를 대량으로 팔아치우기 시작합니다.
태국의 외환보유고가 심각하게 줄어들기 시작하죠.

가뜩이나 의심가는 상황에서, 외환보유고까지 줄어들게 되니 태국도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는겁니다.
결국, 통화바스켓제도 라는 일종의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선택합니다.

바트화는 달러당 56바트까지 뛰었다고 하네요.
1000원짜리가 순식간에 500원짜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태국국민들 짜증나겠죠.

세계를 요동시킨 외환위기의 시작입니다.

# 타박받는 태국정부

필자는, 달러가치가 상승했을 때, 태국정부가 바트화 환율을 조정했어야 한다고 타박합니다.

이것에 덧붙여, 뭐 여러가지 시장관리 능력에 대해서 덧붙이고 있긴 하지만,
핵심이 금융시장 통제능력입니다.

허허 태국정부 몹시도 억울하겠습니다.
그런데, 왠걸? 97년도에 같은 금융위기를 겪은 우리나라 정부도 몹시 타박받지 않았었습니까.

# 건방지게 말하기

물론, 10년 넘게 경제학만 연구한 경제학자들의 논리를 제가 따라가긴 도무지 역부족입니다만,
적어도 이 논문에서는, 조금 생뚱맞은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당 부분 언급한 태국경제의 대외의존도는 쑥 빠진 채,
태국정부의 위기관리능력만을 타박하는건 조금 야속해보입니다.

건방진 발언일지 모르겠으나,
필자의 경우 세계화된 경제에서 국가의 능력을 과대평가 하고 있거나,
시각 자체가 국가경제에 갇혀있는건 아닐런지.

# 다시 한번 대외의존도에 대해서

뭐 세계화라는게 그렇습니다.
국가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분업이 세계단위로 이루어지고,
국가규모의 시장이 세계규모로 커지고,
국가규모의 자본이 세계규모로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죠.

대외의존도 운운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겁니다.
세계화 자체가 국가 간의 의존도를 높이는 일인데, 세계화된 국가경제의 문제점으로 대외의존도를 꼽는다는 것은 약주고 병주는 모양새죠.

어차피 모든 생산활동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대외의존도란 좋은겁니다. 쌀 잘 만드는 국가에서 쌀 만들고, 자동차 잘 만드는 국가에서 자동차 만드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진정한 문제는, 의존 자체가 아닙니다.
의존의 주체와 방식이죠.

누가, 무엇을 위해서 의존하는 경제를 만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계화의 빛과 그림자는, 바로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이 부분은 칼럼에서 깊게 얘기해보도록 할께요.

# 낭만이라고는 없는 논문

이 다음엔 박승우님의 논문과 이요한님의 논문을 읽어볼 참입니다.

대학 다닐 적에 숙제를 열심히 안해서 그런지,
논문이란 형식은 굉장히 어색하네요.

하지만, 논문이라는게 형식 자체가 딱딱해서 그렇지,
문제의식 하나는 뚜렷해서 읽기 편하더라구요.

낭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책이라고나 할까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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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한편의 논문만 뽑아서 후기를 올렸던 <동남아의 경제성장과 발전전략>의 계속입니다.

저번에도 얼핏 말씀드린 것 같은데,
이 책은 동아시아연구단이라는 컨소시엄에서 낸 논문집이죠.

그런데, 컨소시엄이라는 단체의 성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동아시아연구단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한시적으로 모여 연구를 진행하는 곳입니다.
그 계기는 단연 동아시아 경제위기구요.

97년 태국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 브라질, 러시아까지 강타했던 금융위기는,
그 이전까지 표준적인 발전모델로 각광받던 아시아 모델에 먹칠을 했습니다.

덕분에, 술자리의 험담에서부터 시작해서 학계의 논문까지,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해명(?)하기 위한 무수한 시도들이 이루어졌었죠.
도서관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만한 분량이라고 하더군요.

'동아시아연구단'이라 정체성을 밝힌 이 경제학자 + 사회학자 그룹에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역시도 연구의 시작을 60년대, 즉 동남아 국가들이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경제개발을 시작할 때 즈음인 60년대로 설정했다는 점입니다.

60년대에 시작한 경제를 60년대부터 읊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실제 동남아(동북아도 마찬가지) 경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해외의 자본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중을 두고있으면서도,
정작 그 뿌리를 쫓지 않는다는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뭐 예를 들면, 80년대 태국의 자동차 산업으로 유입된 자본은 일본의 자동차 산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논문들에는 왜 일본의 자동차 산업에서 자본이 나오게 되었고, 그것이 태국으로 흘러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연구단이 사건의 소재들을 다루는 비중이란, 기실 그들이 가진 문제의식의 투명한 반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해외자본에 대해서 좀 더 천착했더라면, 논문들이 훨씬 매끄럽게 전개되었을 것 같네요.

오늘은 두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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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우 교수, 『필리핀의 발전전략과 국가와 사회관 관계의 재평가』

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따져보는데 있어서, 필리핀의 사례를 분석하는 것은 꽤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대부분이 보였던 반응이,
'국가가 시장에 너무 개입을 한 나머지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필리핀은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이 선택했던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던 국가였습니다.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그런 국가였던거죠.

그런 필리핀에서도 경제위기를 피하지 못했다는 점은,
시장만 자유로우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거라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논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인데,
논문의 서두에서는 바로 그런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난감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어떻게 문제를 풀어갈 것인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 과연 필리핀의 정치경제체제에 구조적 본질적인 한계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와 관계없이 특정의 국면에서 나타난 구체적인 체제 운용의 결함 때문인가. 이와 관련해 우리는 그 원인의 단서를 아무래도 필리핀의 국가체제의 특성, 국가와 경제간 관계, 국가와 계급간 관계에서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

그리고는, 1962년 마카파갈 대통령, 1972년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 1986년 아키노 대통령, 1992년 라모스 대통령까지,
시기별로 각 정부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으로 논문은 이어지고, 박승우 교수는 시기를 꿰뚫는 공통의 한계로서 다음을 결론내리게 됩니다.
필리핀의 정치경제체제는 (1) 약한 국가 (2) 가산제 국가 (3) 이권추구 자본주의 를 특징으로 하는데,
이런 체제 운용 상의 문제점이 필리핀의 자유시장경제를 경제위기로 몰아넣었다는 것입니다.

독자, 대략 난감해지기 시작합니다.

박승우 교수는 '약한 국가', '가산제 국가', '이권추구 자본주의' 라는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서만 많은 양의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저자 약력을 들추어봤더니 사회학과 출신이더라구요.)
대략 짚어보면,
'약한 국가'는 미국의 식민지배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필리핀에 정부를 운영할만한 관료집단이 없다는 점을 시사하고있고,
'가산제 국가'는 특정하게 마르코스를 지목한 것인데, 국가기구가 대통령 자신과 그 가족, 그리고 자신의 측근들을 위한 사적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꼽으며,
마지막으로 '이권추구 자본주의'는 기업들이 정상적인 기업활동 보다는 정치인이나 행정관료들과의 연줄 형성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을 뜻하죠.

결국, 동남아의 경제위기를 사회학적인 분석으로 접근하고자 했던 박승우 교수의 시도는,
약하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며, 이권만을 추구하는 국가를 탓하며,
손쉽게 시장의 손을 들어주고 마는겁니다.

아 허망하여라.
상당 분량의 개념 설명과 시기적 경제정책의 나열을 슬쩍 제껴놓고 보면,
박승우 교수의 논리 전개란 다소 황량하기까지 한겁니다.

결국,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전망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 필리핀은 1986년을 전후하여 시민사회의 급격한 성정과 민주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1990년대 초부터는 분권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민주화와 분권화의 새로운 경향은 시민사회의 역량으로 '약한국가'의 한계를 보정하고, 시민사회와 국가가 손을 잡고 개혁과 사회발전을 추구하는 새로운 발전전략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중략) 그러나,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후속 연구의 과제로 남겨놓을까 한다. "

박승우 교수의 말씀대로라면,
필리핀 정부가 지적받은 세가지 잘못을 깨우치고 민주화와 분권화를 이루는 것이 순조로운 경제발전의 충분조건이라는건데,

저로선 쉽게 동의하기는 힘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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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요한 연구원, 『ASEAN 경제협력의 발전과정: 성과와 한계』

이요한 연구원의 논문은, 그가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 ASEAN 창설 이래 경제위기 이전까지 ASEAN 협력모델 또는 지역협력이 역내 교역 및 투자비중을 증가키시지 못했던 원인을 살펴보고, 동남아 경제위기의 발생을 사전에 방지하지 못한 한계를 밝히고자 " 하는 것입니다.

이요한 연구원의 글은, 제가 앞서 비판했던 두편의 논문들에 비해 다소 낫다고 판단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접근방식이 ASEAN을 비롯해서 동남아를 둘러싼 국제기구들에 대해서 일종의 세력지도를 그려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추진하던 세계화 방식은 큰 틀로 국가들을 묶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름도 라운드(round)였죠.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던 우루과이라운드 또한 국제적인 협정으로 무역의 자유화를 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각양각색의 나라들이 하나의 협정에 동의한다는게 그리 만만하지 않은 법. 요즘은 FTA (Free Trade Area 맞나?) 라고 해서 국가간 협정이 더 인기인 모양입니다.

개별적인 무역협정을 하려면 이왕이면 가까운게 좋겠죠. 그러다보니, 일종의 블럭화가 이루어집니다.
북미대륙에서 한 집단, 유럽에서 한 집단, 아시아에서 한 집단.
(물론, 우리나라에서 이슈가 되고있는 한-칠레 FTA/한-일 FTA 가 보여주듯이, FTA 라는 것이 아무리 개별적인 무역협정이라지만 꼭 국지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NAFTA, EU, ASEAN, APEC, ASEM, 등등 수많은 협정, 회의들은 모두 그런 연유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ASEAN 은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협력체로 시작했죠.
그 시작은 1967년이라고 되어있는데, 67년이라는 숫자보다는 그 당시 시대적 배경을 그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동남아 국가들이야 이 나라 저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던 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45년 이래로 각각의 진통을 겪고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시기이겠거니 생각해봅니다.

논문을 보면, ASEAN 의 시기적 협력모델이라 해서 특혜무역협정(PTA), 산업협력(AIP, AIC, AIJV), 등등 여러가지가 나옵니다만,
지금의 ASEAN 에서 보시듯이 잘 안됐다는게 중요합니다.

경제규모도 비슷하고, 산업구조도 비슷하고, 무역 또한 회원국 전체가 비회원국인 일본이나 미국에 의존적이었죠.
모여서 뭔가 해보려고 했지만, 너무 고만고만했던겁니다. 그 왜 공부모임을 만들어도, 누군가 좀 뛰어난 한명이 있어야 하듯이.

물론, ASEAN 에도 기회가 있었습니다.
90년초 동구권 몰락과 함께 세계질서가 재편되면서, 95년에 베트남이, 97년엔 미얀마, 라오스가 가입을 했고,
때를 맞추어 경제협력이나 공동사업모델도 추진하게됩니다.

뭐 중요한건 또 잘 안됐다는겁니다.
때가 늦었다고 해야하나. 북미대륙엔 NAFTA 가, 유럽대륙엔 EU 가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겁니다. ASEAN 은 갈등했겠죠.
그리고, ASEAN 의 고뇌와 선택이 새로운 기구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북미대륙과의 연계가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확한 명칭은 저도 모릅니다.) 으로, 유럽대륙과의 연계는 ASEM(아시아유럽정상회담?) 이 되는거죠.

참 그럴싸한 얘기 보따리입니다만,
중요한건 여기서부터입니다. ASEAN 을 둘러싼 APEC과 ASEM의 이해관계죠.
이쯤되면 연구원의 얘기도 참 재미가 있습니다.

ASEAN의 경우는 자블록의 산업에 그다지 경쟁력이 없기 때문에, ASEM, APEC 회의를 통해서 최대한 선진국들의 기술과 자본을 유치하려고 합니다.
반면, ASEM, APEC의 선진국들은 동상이몽. 모든 면에서 부족할게 없는 그들은, 관세없이 통과 가능한 새로운 시장을 찾을 뿐이구요.
그러다보니, 96년에 출범한 ASEM 은 아직도 사무국 하나 갖추지 못한 정상회담 수준에 머무르고 있고, APEC에서는 강경한 미국과 조심스런 ASEAN 국가들의 실갱이가 계속된다는겁니다.

이 대목에서 이요한 연구원이 그리는 밑그림은 ASEAN과 동북아의 협력입니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게 참 쉽지않죠. ASEAN 과 BRICs로 총칭되는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과 같은 신흥 국가들, 그리고 한국, 일본까지.
이 국가들의 행보가 어찌될지는 좀 더 두고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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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번순, 『동남아 경제의 발전요인과 특성』

은 지금 읽는 중입니다.
사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자유무역'. 그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래 된 연인들을 보면 " 너희 어떻게 만나게됐어? " 물어보고 싶잖아요.

마찬가지로,
시대적 배경은 바야흐로 1970년대. 자국의 자본을 내보내야 했던 국가들과, 자본이 없어 경제개발을 하지 못했던 국가들의 '관계맺기'란 더할 나위 없이 궁금하고 중요한 얘기들인겁니다.

박번순 연구원께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갈지 조금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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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번순 연구원의 논문. 아 상당히 재밌습니다.

가장 메인(main)이 되는 논문이니 만큼, 주제 자체도 명확하고 여타 논문에 비해 깔끔하게 쓰여졌네요.
얘기의 흐름이 명확하게 보인다고 할까요.

박번순 연구원의 논문은 순서적으로도 제일 처음입니다.
전 마음 가는대로 여기저기 찾아 읽다가 이제서야 박연구원의 논문을 읽었는데, 연구단의 다른 논문들을 관통하는 핵심의 논리는 가장 첫 논문인 박연구원의 논문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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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학설이니 뭐니 하는 사회학의 방법론은 잘 모르겠지만,
'서론 - 동남아 경제의 발전 과정 - 동남아시아의 성장 요인 - 동남아 경제의 성장전략과 파생된 문제점' 의 순서로 전개되는 박연구원의 논리는 아주 표준적이기까지 합니다.
동남아 경제발전사에서 공통된 발전요인을 찾고, 거기서 꼽아두었던 문제점들을 모아서 정리하죠.

박연구원의 꼽는 동남아의 경제발전과정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학교-고등학교 거치면서 사회시간에 익히 들어온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수출지향적인 산업구조, 높은 저축률이 기반이 된 높은 투자율, 등등.

(저축율이 투자에 미친 영향을 읽다보면, 어렸을적부터 교육받은 저금통 문화가 생각납니다.
부모님께 받은 용돈을 저금하는 영철이. 훌쩍)

여기에 한가지 추가된다면, 동남아 경제에 일본이 미치는 영향 정도일거구요.

물론, 이 부분은 두번째 목차인 '동남아시아의 성장 요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연구원이라는 직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죠.
박연구원은 여러 도표들을 예시로 전술(前術)한 공통점을 구체화시킵니다. 70년대 동남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보이고있는 상당한 규모의 수출량, 경상수지의 흑자와 외채, 등등.
한마디로 동남아 국가들은 '모두', 외국에서 돈을 빌려 공장을 짓고 노동자들 고용하고 상품 만들어 열심히 팔았다는거죠.

#
그런데, 여기서 잠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동남아의 경제발전사를 듣고서 동북아 국가 한국의 경제발전사를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은,
동남아와 동북아 경제구조가 나름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사실, 동남아와 동북아의 경제구조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죠.
박연구원 또한, 남과 북의 차이점으로 국가주도경제이나 시장주도경제이냐를,
남과 북의 공통점으로는 빠른 속도의 자본축적, 공업화, 해외시장의 활용을 꼽고 있구요.

그런데, 저는 이 부분에서 박연구원에게 약간의 아쉬움을 느낍니다.
그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1970-80년대의 동남아 경제발전과정을 통해서 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 원인을 찾는 것이 논문의 목적이라면,
위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부각되어 서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의 경제위기라는 것이, 동남아만의 문제가 아니었을 뿐더러,
동남아에서 시작된 경제위기의 여파를 동북아 역시도 전혀 막아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동남아의 특징으로 꼽히고 있는 외국인 투자와 높은 금융개방도, 시장자유화의 병행이란,
동남아만의 특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90년 경제위기를 지난 후 동남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 완성되어가고 있는 경향이고, 동아시아 뿐 아니라 남미, 러시아를 비롯한 소위 신흥개발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입니다.

굳이 차이를 들자면, '시기적인 차이'가 전부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동남아 국가들이 6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해외투자를 유치했다면, 동북아 국가인 한국의 경우는 90년대에 걸쳐서야 본격화되었으니까요.

하긴,
동아시아연구단이라는 컨소시엄 자체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연구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배운 동아시아 성장전략이란 그리 눈에 띄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만,
주목할 만한 내용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동아시아 경제에 일본이 미치는 영향이 그것입니다.

책을 읽다가 눈이 휘둥그래지는 도표가 하나 있었으니,
53쪽에 있는 동아시아의 투자 및 무역관계 라는 그림도표입니다.

이 도표에서는,
미국-일본-NICs(동북아 신흥공업국: 한국, 대만)-ASEAN(동남아 신흥공업국: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이렇게 4개의 집단이 가지는 무역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요,
연구원의 논문을 직접 들어보이겠습니다.

" 무역과 관련하여 동남아 경제의 1985년 이후 구조는 동아시아 전체의 구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즉, 일본에 이어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들이 동남아에 본격적인 투자를 하기 시작한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동아시아의 투자 및 무역관계를 나타내주고 있다. 이 시기에 NICs는 일본으로부터는 기술과 자본재를, 미국으로부터는 자본재를 수입하고 있다. 동시에 이 시기에는 NICs의 對ASEAN가 시작되어 자본과 기술이 ASEAN 으로 진출한다.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 NICs와 ASEAN의 생산제품은 미국, 일본, NICs로 수출되는 것이다. 미국과 동남아의 관계가 단지 동남아의 시장으로서 미국의 존재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이 도표가 시사하는 바는,
박연구원이 세번째 목차인 '동남아 경제의 성장전략과 파생된 문제점'에서 꼽고있는 첫번째 문제이기도 합니다.

동남아가 미국과 일본에서 자본재를 수입하고, 그 자본재로 만든 상품을 미국과 일본, NICs로 수출했다는 사실을 두고,
" 와 엄청난 경상수지 흑자네. " 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 과정은 동아시아 경제가 일본과 미국이라는 큰 기업체의 하청기업 형태로 자리잡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연구원은 '하위구조'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원청기업과 생사를 같이 하기 때문에 하청기업이라고 합니다.
자동차 만드는 원청기업이 타이어/운전대/차체 이렇게 세가지 부품을 하청기업을 통해서 조달한다고 했을 때,
원청기업이 어려워 자동차 안만들면 하청기업은 당장 일감이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원-하청기업의 이런 이해관계를 두고,
원청기업이 하청기업 먹여살린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동남아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80년대 일본은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동남아 경제에 대규모로 생산 및 공정기술을 이전하고 자본을 공급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동남아에 고용이 창출되고 경제규모가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성장은 어디까지나 일본산업의 이해득실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동남아의 경제활성화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발전형태를 '안행형태(雁行形態) 발전'이라고 한다는군요.
일본은 선두에 서서 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쟁력이 저하되면 2선에 있는 국가가, 3선에 있는 국가가 이를 개발시키는 것입니다. 일본-한국, 대만-ASEAN 으로 산업이 이동해갔다고 하네요.

그 외에 박연구원께서 지적하고 있는 동남아 경제의 취약한 기술기반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죠.

#
박연구원의 논문은 동남아의 왜곡된 경제구조들을 짚어내는 것으로 끝납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한 집안에서 대학은 맏이 한명만 갔던 개발시대 농촌의 풍경이 생각났습니다.

90년대 경제위기를 지난 발전과정을 토대로 검토하겠다던 박연구원이,
동남아 경제의 왜곡된 구조를 밝히는데 그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맏이 뒷바라지 한다고 대학 진학도 못하고 부모님 농사일만 도왔던 막내에게,
넌 왜 이리 멍청하냐고 다그치는 것과 같지는 않은지 생각해봤습니다.

막내가 늘 맏이가 입던 옷을 물려입었고, 맏이보다 달걀프라이를 하나 덜 먹었고, 맏이가 교복입고 등교할 때 경운기 몰고 논에 나갔느니 어쨌느니하는 신파적 얘기며,
농촌에 대한 국가의 투자가 부족해서 농촌엔 희망이 없었고, 신동 나서 도시 대학에 진학해야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던 그 당시의 경제적 구조 때문에, 막내는 맏이의 대학진학을 위해 농사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매끄러운 분석까지는 좋았는데,

어째 마지막은,
그 동생 그래도 대학 졸업하고 넥타이 맨 맏이 덕분에 집안에 TV, 라디오도 들여놓았더라,
미적분도 못하고, 영어도 못읽고, 농사일엔 별로 희망도 없더라..

뭐 이렇게 끝맺는 것 같아서요.

#
아쉬움이 적지 않지지만,
동아시아 신흥공업국 개발상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엔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일본이나 미국경제의 개발상도 볼 생각입니다.
아니, 기회를 만들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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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2-05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요건 프린트해서 읽어 봐야겠네요. 퍼가겠습니다. 추천

sb 2004-12-05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족적인 마이리뷰인지라 쑥스럽네요. 감사합니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1.
소설로 읽는 경제학이라.

조나단 B.와이트의 <애덤 스미스 구하기>는 소설로 읽는 경제학입니다.
폭우가 억수로 솓아지는 어느날, 리처드 번스 박사를 찾아온 의문의 한 남자 해럴드 팀스. 팀스가, '애덤 스미스'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을 괴롭힌다면서 번스 박사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얘기는 시작됩니다.

리처드 번스 박사는 미국 유수의 경영대학과 MBA과정을 거친 유망한 경영 컨설턴트.
두달 후 세계 유수의 무역회의에서 러시아 알루미늄 시장의 민영화와 관련해 투자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안으로 발표를 하게되어있었고, 경제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라는 새뮤얼슨상을 수상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런 급박한 일정을 앞두고, 번스 박사는 해럴드 팀스의 몸을 빌려 영적대화를 행하는 애덤 스미스와 얘기를 시작하게 되죠.

자신의 명예를 되찾고자 하는 애덤 스미스와.

2.
수치나 그래프의 나열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따분한 경제학을 소설로 풀어낸다는 시도 자체에 의의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갑동이와 을순이가 등장하는 소설의 형식은,
경제학이라는 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따분함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 일상 생활에 꽁하니 자리잡고있는 편견의 집합임을 여실히 드러내줍니다.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라면,
'경제학 풀이'에 집착한 나머지 소설 자체가 굉장히 따분해 질 수 있다는 점이겠죠.

그런 점에서, <애덤 스미스 구하기>에 쓰여진 영적대화라는 방법은 다소 유쾌합니다.
특히, 애덤 스미스가 활약했던 1700년대 철학자, 경제학자들이 만나는 과정은 억지스러우면서도 웃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네바다주 올드 뒤랑고 살롱에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 장자크 루소, 볼테르, 심지어 케네박사까지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거든요.

애덤 스미스가 잠시 몸을 빌린 해럴드 팀스는 리처드 번스 박사 일행과의 여행 중에 뜬금없는 이유로 사라지게 되고,
리처드 번스 박사가 그를 찾아낸 곳이 네바다주 올드 뒤랑고 살롱, 번스 박사가 찾아낸 애덤 스미스는 모조리 다른 이들의 몸을 빌린 유수의 할아버지 철학자 경제학자들과 여유로이 카드놀이를 하고있었고, 번스 박사는 이를 옅듣게 되는거죠.

상상해보세요.
장자크 루소가 카드를 집어던지며 이렇게 말하는거에요.
" 이 패로는 게임 못하겠어! 흄이 벌서 내 걸 다 봤다구. 나한테 잡혔어. "

3.
사설이 좀 길었군요.

여튼, <국부론>과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익히 알려져있는 애덤 스미스는 자칭 그의 추종자라는 오늘날의 경영 컨설턴트와의 대화를 통해서,
오늘날의 시장만능주의자들이 아담 스미스의 권위를 빌려 시장의 원리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유쾌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용되고 있는 아담 스미스의 저작은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국부론> 보다는 <도덕감정론> 입니다.
사실,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그의 별칭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가 <국부론>을 출간하기 이전에는 딱히 경제학이라는 과목 조차 없었죠. 그 역시도 논리학 교수로서 영국의 글래스고 대학에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가 출간한 책이 바로 <도덕감정론> 입니다.
그런데, 이름조차 생소한 이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이, 실제로는 <국부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라는겁니다.
다시 말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전제한 내용을 바탕으로 <국부론>을 집필했다는거죠.
그런데, <국부론> 만도 아니고, 심지어 <국부론>에서 발췌된 일부분의 내용만이 그의 사상인양 사용되고, 아니 오용되고 있는 현실을 꼬집습니다.

물론, " 넌 아담 스미스를 몰라. " 라고 얘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인용하는 경제학자들이 1,200여쪽에 달하는 <국부론>을 일독 조차 하지 않았다느니, <국부론>의 전제가 되는 <도덕감정론>을 들어보지도 못했다느니 하는 얘기들은 그저 웃고 넘어갈 얘기들입니다.

우리는 아담 스미스를 알고싶은 것이 아니라, 가장 합리적인 경제논리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고싶어하고,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늘 당장 내가 느끼는 경제적 갈증을 풀고싶은거니까요.

물론, <애덤 스미스 구하기>는 촉망받는 리처드 번스 박사의 갈등을 통해 오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번스 박사가 두달 후 발표를 하게 되어있는 논문은,
러시아 민영화에 참여하는 기업들의 리스크(risk, 위함)를 분산하는 법, 즉 러시아에서 한몫 챙겨보려는 기업들이 투자한 돈을 잃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렇게 화두는 기업 경영과 윤리로 넘어가는겁니다.

4.
조나단 B.와이트는 애덤 스미스의 저작과 논문을 주로 연구해 발표한 학자이지만,
사실,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기업 경영과 윤리.

물론, 기업이 비윤리적 경영이 아담 스미스에 대한 몰이해 때문은 물론 아닐겁니다.
어차피 경제학이란 중립적 일 수 없는 학문, 기업은 그들 나름의 생존논리를 아담 스미스의 권위를 빌어 정당화하는거죠.

오늘날 기업 윤리 수준의 심각성을 꼬집고싶었던 조나단 B.와이트는,
아담 스미스의 권위를 빌어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 심지와 밀랍만 있으면 뭐 하나, 정작 산소가 없으면 양초는 탈 수 없지. "

자본주의의 시장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조직, 사회적 가치가 모두 얽혀 통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제도적 조직과 사회적 가치를 무시한 채 내달리는 시장의 몰락을 경고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얼마 전 주형씨가 독서후기를 올린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조지 소로스의 경우, 자본주의 경제의 경기변동이 우여곡절 끝에 평형을 이룰거라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비판하고 나섰는데,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다른 이름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이죠.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앞에는 구고전학파가 있었을테고, 구고전학파의 대표주자는 단연 아담 스미스.

재밌죠?
대부분의 경제학사에서 밀턴 프리드먼의 시카고 학파에게 붙여져있는 신고전학파라는 이름. 아담 스미스에 대한 평가는 의례 그와 같은 시장만능주의자 쯤으로 되어있던겁니다.

5.
여튼, 뭐 이런 분위기에서 해결은 기업의 자정능력으로 귀결되는 모양입니다.
여러 책들이 신랄하게 비판해놓고 결론에 와선 " 겁나지? 그러니까 잘하자. "라는 용두사미의 전개구조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 구하기>는 소설의 형식을 빌고있느니 만큼, 대안이란 것도 소설처럼 등장합니다.

여행을 떠난 번스 박사와 아담 스미스가 캠핑을 하던 도중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는 대목.
아닌 웬걸. 파도에 휩쓸려 갈 뻔 했던 이 사람의 이름은 피터. 그는 휴렛 팩커드니 인텔이니 썬, 시스코, 모토로라, 록히드 마틴과 같은 유수 IT 업체들이 결집해있는 실리콘 벨리에서 특수 반도체 공장을 경영하는 CEO 였던겁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 촉망받는 경영 컨설턴트 번스 박사, IT 산업의 CEO 피터.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후유증은 어디 갔는지, 그날 저녁 세사람의 화제는 기업경영으로 집중되고,
결국 여행중이던 번스 박사와 아담 스미스는 실리콘 밸리의 공장에 견학 아닌 견학을 가게되죠.

아직 아담 스미스에게 교육을 덜 받았는지 이윤에 따른 냉정한 구조조정이며 실리적 운영을 부르짖는 번스 박사,
그는 기업의 목적은 이윤이 아니라, 직원 개개인의 발전이라는 피터 사장님의 의견에 발끈해 회사를 찾아가게됩니다.

어디 그런지 보자며 씩씩거리는 번스 박사의 견학일에, 공교롭게 피터 공장의 주고객은 공장의 회계직원에게 된통 못된 짓을 하죠.
피터는 번스 박사 보란듯이 회계직원을 위해 주고객과의 거래를 끊어버립니다.

6.
조나단 B.와이트가 일종의 대안모델로 제시한 피터공장.
하지만, 현실은 정해진 이상향을 향해서 직선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실제, 극중 스미스는 이렇게 말하죠.
" 피터가 직원의 높은 포부에 호소해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면, 그리고 이건 물론 중요한거지만, 생산성에서 얻는 이득이 그의 비용을 능가한다면 이윤은 증가하겠지. 다른 회사들은 그의 방식을 따라가지 않으면 큰 손실을 입게 될거야. "

결국, 문제는 '생산성에서 얻는 이득이 그의 비용을 능가하는 것' 이라고 자기고백을 하는겁니다.
<도덕감정론>의 제도적 조직, 사회적 가치에 찍었던 초반의 강조점이, 다시금 비용의 문제, 즉 시장의 논리로 회기하는 순간이죠.

자신있게 주고객과의 거래를 끊어버리고 회계직원과 뜨거운 포옹을 나눈 후 피터의 얘기는 한술 더 뜹니다.
" 어쩌면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을 수도 있어요. 직원에게 힘을 실어 준다고 말하는 건 좋지만 회사가 부도나면 의미가 없어지죠. 결국엔 직원들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될 거구요. "

저는 이것이 유토피아 문학가가 아닌 경제학 박사 조나단 B.와이트의 솔직한 자기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책의 전면이 <도덕감정론>의 진정한 이해에 대해서 씌여졌다 하더라도, 경제학자는 현실의 이해를 반영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7.
언제나 제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책 표지의 온갖 홍보문구들.

" 부활한 애덤 스미스, 분노하다! "
" 시장경제의 필수사항인 신뢰와 도덕과 덕성을 강조하는 애덤 스미스의 철학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철학이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는 경제이론소설이라는 장르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다. " - 존 모톤, 미국경제교육협의회 부회장
"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와 함께 떠나는 뜻 깊은 경제학 여행! "

그러나 저는,
이 책을 두고 오늘날 필요한 철학을 제시해주었다고 매듭짓는건 책을 반밖에 읽지 않은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심지어 역효과가 날 수 있는 몰이해라고 생각해요.
책의 전면은 <도덕감정론>에 담긴 중요 철학을 서술하고 있지만, 숨겨져있는 현실적인 논리적 귀결의 공허함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철학이든 경제학이든 현실의 쓸모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책장을 덮고 스스로에게 질문하죠. 애덤 스미스의 명예를 되찾았고, 우리 시대의 철학을 되찾아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

[보탬 하나]

책을 읽으면서 일종의 함정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쪽으로 방향을 맞췄는데,
사실, 전면의 내용은 <도덕감정론>을 통한 아담 스미스의 이해인지라 그 부분을 빼놓은 것이 좀 아쉽네요.

<도덕감정론>에 대해서도 하고싶은 얘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음번에 기회가 되면 회원분들하고 같이 얘기해보고 싶네요.

[보탬 둘]

그리고, 저도 몰랐는데, 이 책 사니까 책 한권 더 줬어요. (인터파크에서 샀음.)
이 책을 옮긴 분이 안진환님이신데, 같은 출판사(생각의 나무)의 책 중 그 분이 번역한 책이 한권 더 왔더라구요.
<젊을 때 시작하라> 는 책인데, 보나마나 재테크 관련한 책이겠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세요-
(그때가 잠깐 이벤트 기간 이었을 수 있으니 한번 더 알아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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