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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설희 (fromsoul@empal.com)

가리온 [GARION]

2004년 벽두부터 날아든 가리온의 앨범은, 한국 힙합에 애정이 있는 리스너라면 누구에게나 일단 반갑고 볼 음반이었다. 클럽 마스터 플랜 초창기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그들 특유의 둔탁하면서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비트로 아마추어 성향이 강했던 초기 힙합 씬에서 당당하게 빛났다. 하지만 어찌 되었던간에 이 큰 형님들의 정규 앨범은 이제야 나왔고, 데뷔 앨범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마치 베스트 앨범마냥) 그간 그들이 작업해 두었고 공개되었던 곡들을 정성스럽게 취합 되어 있었다. 따라서 새로울 건 없지만, 가리온의 음악을 듣기 위해 컴필레이션 음반을 뒤질 필요 없이 거라온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큰 묶음 안에서 이들의 음악을 한꺼번에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신인이 아니므로, 그들이 만들었던 그간의 결과물들을 가리온의 이름으로 거듭 생성하는 것에 대해 '새롭지 않잖아!'라고 격하시키기엔 앨범이 가진 의미가 크다. 게다가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으며 여전히 '가리온만의' 스타일이 확고한데다가 반갑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무거운 비트가 반복적으로 흐르고 MC 메타의 랩도 저음이어서 듣는 이에 따라선 지루하다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베이스 톤의 비트에 실린 짙은 힘과 다이나믹함은 이 먹통 힙합에 중독성을 불어넣었다. 따라서 형님들의 베스트인지 데뷔 앨범인지 분간이 모호한 첫 정규 앨범 [GARION]에 무조건 한 표!

각나그네 [Incognito Virtuoso] EP

재지(jazzy)하고 세련된 어반(Urban) 스타일의 곡도 곡이지만 각나그네의 가장 큰 장점은 그의 건실한 사상이 담긴 가사와 훌륭한 래핑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다른 MC들과 그를 확연하게 갈라주었다. 넋업샤니, 본킴, 큐빅과 함께 nusoulclassic 크루를 형성하고 있기도 한 그는 이번 EP에서도 이들의 도움은 대거 받았다. 앨범 중간에 'crescendo'라는 제목으로 Street Poetry Slam을 강행한 것도 다소 이색적이다. Poetry Slam은 시낭송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랩이라기 보다는 시를 낭송하듯 무엇인가를 읊는 것이다. Street Poetry Slam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읊음'은 길거리의 소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데 종교적인 믿음에 기대어 열정적으로 진행된다. 그가 음반에서 만들어낸 Poetry Slam는 '삶에 대한 종교적인 낭송'이었는데 랩과는 또 다른 시적인 표현들이 무자비하게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Poetry Slam가 보여주는 형식(스스로에 도취되어 라임을 만들고 그것에 몰입 되어 가는)은 낯설어서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각나그네의 EP 앨범은 설교자같이 딱딱함을 유지하지만 여기에 쓰인 음악적 재료들은 다양하게 잘 범벅이 되어 있어서 목사님 같은 그의 연설이 그런대로 재미있다. 그리고 그가 가지는 마인드와 주제도 그 자체로는 아빠의 잔소리처럼 고루해 보일지 모르나 씬에서 놓고 봤을 땐 '다양성'과 '참신성'으로 대변될 수 있을 만하다. 이정도의 EP라면 정규 앨범이 매우 궁금해 진다.

조 PD [Politics & Social change Pt. 1 / Love & Life Pt. 2]

음지의 조 PD가 인순이 선배님과 함께 양지로 나왔다. 사실 조 PD의 '친구여'는 조 PD 보다 인순이에게 더 의미 있는 곡이 아니었나 싶다. 덕분에 조 PD도 덕 많이 봤으니 올 힙합계 최고의 성공적 윈윈 전략으로 기억될 노래임에 분명하다. 조 PD는 '음지의 인물'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데뷔 때부터 매우 많은 대중들이 그를 알고 있었다. 당시가 급속도로 퍼져가는 인터넷문화에 대한 경이로움을 매체에서 앞 다투어 분석하던 시기였는지라, 당시 인터넷 상에 이슈가 되고 있던 조 PD는 9시 뉴스에도 나왔다. 그러니 온라인 안에서는 힙합이라는 음악으로, 오프라인에서는 인터넷 문화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는 전국구로 유명세를 탔다. 그가 인터넷에 자신의 음악을 올렸을 당시의 사운드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였지만 그 안에 갇혀 있어서는 비즈니스 측면에서 한계가 너무 분명했으므로 그는 결국 그곳을 나왔다. 그리고 그의 두 마리 토끼 잡기는 두 가지 버전으로 앨범에서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데, 특히나 착한 힙합 버전의 [Love & Life Pt. 2]은 그에게 많은 힘이 되었다.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사실 [Love & Life Pt. 2]에 좀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제 조 PD 스타일의 맹공은 더 이상 쇼킹하지 않다.

바스코 [The Genesis]

마스터 플랜의 2004년 상반기 야심작이다. 언더그라운드에서 래퍼로서 자질을 인정 받아온 터라 그의 정규 앨범은 은근한 기대를 받았다. 안정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저돌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그의 랩은 날카롭게 찌르기보다는 타이트하게 휘감아 돈다. 따라서 공격적이긴 하되 너무 예민하진 않으며 그렇다고 너무 튄다거나 반대로 너무 무던하지도 않다. 바스코의 이번 앨범은, 그 특유의 겁이 없어 보이는 마초적 성향은 드러났으며 즐겁게 들을 만큼 가치는 있으나 뭔가 바스코만의 특성을 살리기엔 부족함이 엿보인다. 함량이 미달된 건 아니고, 마스터 플랜 크루들 사이에서 엇비슷하게 들리는 고만고만한 사운드들의 전반적인 포진은 나쁠 건 없지만 익숙하다는 느낌이 드는 게 탈이다. 그 익숙한 느낌이 바스코만이 가지는 개성마저 익숙함으로 무던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실망스러울 것까진 없지만 다소 아쉬움이 드는 앨범이다.

피타입 [Heavy Bass]

부산 힙합 크루인 DMS로부터 전달된 음반이다. 작년 말 킵루츠의 반가운 정규앨범 이후 오래지 않아 나온 피타입의 앨범은 의식하고 있지 못한 사이에 얻은 또 하나의 수확이다. 킵루츠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휘성과 빅마마의 피처링 후원까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그만큼 호기심이 더 가는 앨범이기도 하다. 둔중하지만 너무 무겁지는 않으며 약간의 재지(jazzy)함이 주는 세련되고 깔끔한 사운드는 새롭진 않지만 조금은 특별해 보인다. 너무 산만하지 않으면서도 표정을 수시로 달리하는 비트는 곡 하나하나마다도 특성과 색깔을 달리하는데 앨범 전반에 걸친 프로듀싱에 '일관성'이 존재하는 까닭에 제 각각이 따로 놀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점은 라임. 다양하게 들어가는 액센트와 더불어 (노래할 때 소절에 맞게 감정을 달리 넣는 보컬처럼) 랩을 하면서도 소절마다 감정을 달리 넣으면서 동시에 흐르는 것을 잊지 않는 래핑은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표정의 라임과 비트가 서로에게 화음이 되어 시너지 효과를 부렸다.

다이나믹 듀오 [Taxi Driver]

씨비 매스(CB Mass)의 최자, 개코가 둘이 되어 돌아왔다. 씨비 매스는 3집 때부터 커빈과의 불화설이 나돌았기에 다이나믹 듀오의 존재는 일찌감치 예견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이나믹 듀오의 결과물이 어떠한 형태를 띄게 될지는 정말 모를 일이었다. 씨비 매스 후반으로 갈수록 최자와 개코의 역량이 높아지면서 씨비 매스 후반의 결과물과 다이나믹 듀오의 결과물이 어떻게 차이를 보일지 사뭇 궁금해지던 차, 무브먼트 크루로는 첫 주자로 여름을 맞이하던 늦봄 그들은 자신들의 앨범을 공개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단지를 열어본 결과 그 안에는 브라운 아이드 소울이라는 의외의 복병이 들어있었다. 이와 같은 변수는 그들에게 매우 유리한 입지를 선점할 수 있는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요건을 만들어 주었다. 나얼을 중심으로한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참여는 다이나믹 듀오의 음악을 3차원적으로 만들었다. 음반 곳곳에서 확인되는 그들의 훌륭한 보컬 피처링은 단순한 멜로디 랩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떤 시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각도가 달라질 때마다) 색깔을 달리하여 빛이 발하는 보석처럼 일관성과 개성을 고루 겸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마수를 얻은 그들은 씨비 메스를 넘어선 대중적 성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신인 아닌 신인 다이나믹 듀오의 데뷔는 매우 성공적으로 치루어질 수 있었다.

에픽 하이 [High Society]

무브먼트 크루의 두 번째 주자는 에픽 하이. 1집 때보다 선명해진 팀 컬러를 보여준 그들의 이번 앨범은 여러모로 1집 때 보다 삐죽이 한걸음을 더 걸어 나와 있었다. 전반적으로 랩에 쉽고 반복적인 멜로디를 붙여 '친근함의 매력'을 불어 넣었고, 가사는 [High Society]라는 제목이 주는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곡 하나하나가 가지는 메시지 자체는 이전에 비해 훨씬 밖으로 드러나와 있다. 덕분에 수록곡 중 4곡을 제외한 모든 곡이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 에픽 하이는 원래 사운드가 진일보 하다거나 카리스마가 넘쳐 나는 힙합 그룹은 아니다. 하지만 매니아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팝적인 사운드를 내는 그들의 위치는 그들의 이지 리스닝한 음악과는 달리 '에픽 하이의 음악에 대해 말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사실 곱상하게 그려진 그들의 이미지도 이런 팝적인 감각에서 기인되었는데, 이번 앨범은 사운드가 더욱 미끈해져 대다수의 곡이 불가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번 앨범이 1집 때보다는 뭔가 정리되고 나아진 모습임에는 확실하나 시기적으로 다이나믹 듀오보다 먼저 나왔으면 훨씬 더 주목 받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드렁큰 타이거 [하나하면 너와나 (One is not a lonely word)]

어쩐 일인지 나온다고 말만 무성하게 자라더니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싶었다. 이번 앨범은 DJ Shine이 빠진 상태에서 Tiger JK가 모든 것을 진두 지휘했고 그러면서도 Tiger JK의 솔로 앨범이 아닌 '드렁큰 타이거 5집'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왔다. 게다가 음악도 많이 바뀌었다. 그냥 한번 이렇게 해 보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감에 조금은 달라진 모습으로 세월을 희석 시키고 싶었던 것이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은 다음 음반으로 좀 미뤄두자. 빡빡하고 날카로운 기세가 죽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들은 가오에 대한 집착을 일부러라도 버려두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곡을 이끌어가는 JK의 카리스마는 여전하고 이전과는 다른 식으로 만들되 유행을 일방적으로 따르지도 않았다. 신나는 파티넘버를 만들어도 시류의 틀과 자신의 틀이 팽팽하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어 드렁큰 타이거 특유의 긴장감이 앨범을 감도는 건 여전하다. 그리고 남들 다하는 음악 나도 해본다 식의 곡이나 힙합 스타일의 구성에서 벗어난 곡들에서도 치밀한 구성력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내공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따라서 이번 5집은 타이거 자신에게도 타이거의 팬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앨범이다.

일단, 올 상반기에는 (이중에 다루지 않은 앨범까지 포함한다면) 내공이 쌓인 단단한 앨범들이 때늦게 새록새록 출시가 되었고 대체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만족을 주었다. 특히 봄에 시작된 조PD의 대박 행진에 이어 여름을 기점으로 무브먼트 크루의 대중적인 선전은 괄목할만하다. 음반시장의 장기적인 불황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이제는 그러한 불황에 사람들이 적응해갈 쯤이 되고 보니 음반을 사는 사람들의 취향도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 가는 듯하다. 소위 좀 나간다는 음반들을 보면, 대중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몇몇의 아이돌 스타들의 음반이나 실력을 앞세운 매니아 취향의 음반이 거의 주를 이루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힙합은 단연 인기 종목이다. 얼마 전 핫트랙스 앨범 판매 차트에서 동방신기 다음으로 새겨진 드렁큰 타이거의 이름을 보았다.

이는 두 가지 정도의 이유에서 기인된다. 하나는 그만큼 요즘 한국 힙합 씬에서 주조되는 음반들이 살만한 가치를 지닐 만큼 어느 정도의 퀄리티를 뽑아내고 있다는 뜻이며, 또 하나는 힙합 음악이 그만큼 인기가 있다는 뜻이다. 언더에서 시작한 일부 힙합 그룹들이 (매니아적 아티스트쉽을 가지고) 잘 만든 힙합 음반으로 공중파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간 매니아들만의 음악으로 치부되었던 힙합 음악이 길지 않은 시간동안 대중들에게 얼마나 많이 인지되었는가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잘 만들었지만 기회가 좁아서 소개되지 못하는 앨범들도 많지만, 잘 만들었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힙합 그룹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으로 통하는 문이 넓어져 가고 있음을 의미하므로 어쨌든 긍정적이다. 방송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푸념으로 넘기기엔 그들 앞에 닥쳐 있는 현실이 매우 딱딱하므로 힙합에 관한 생각을 마냥 긍정적으로 몰고 갈 수만은 없지만, 그래도 다른 종목에 비해선 상황이 낫다라는 말은 틀리지 않다. 남은 가을과 겨울에도 출시를 기다리는 힙합 앨범들이 많다. 그중에 기대되는 몇몇 팀에게 기대를 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소박한 보석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씬에 관심을 잊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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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나(soulgarden@hanmir.com)

한창 여름이 될라 치던 5월 중순께 소문이 흉흉했던 CB Mass가 전격 해체되고 최자 개코 체제의 다이나믹 듀오가 데뷔앨범을 냈다. 다이나믹 듀오의 1집 [Taxi Driver]는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도움으로 한결 입체적이고 세련된 어반이 되어 나타났기에, 앨범은 대박이 났고 그들은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뒤를 이은 7월, 2003년 힙합씬에서 최고의 기대를 모았던 에픽 하이가 소포모어 앨범을 들고 나왔다. 게다가 별로 거칠어 보이지 않는 그들의 앨범이 네 곡을 제외한 모든 곡에서 심의의 제지를 받았고, 이러저러한 정황들은 다이나믹 듀오에 이어 에픽하이에 이르기까지 무브먼트 크루 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어느새 달려와 버린 8월, 무브먼트의 숨은 고수 바비김이 실로 오랜만에 솔로 앨범을 냈다. 이렇게 반가움과 더불어 질적으로도 포만감을 줬던 무브먼크 크루가 여름 내내 몰아치던 2004년, 정작 나온다던 드렁큰 타이거의 앨범은 예약 판매라는 딱지를 붙이고 꽤 오랜 동안을 대기하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무브먼트의 깃발 드렁큰 타이거는 사실, 에픽 하이가 나오기도 전부터 5집에 관한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출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드렁큰 타이거는 DJ Shine이 거의 빠진 상태에서 앨범을 만들었고, 이런 와중에 기존과는 또 다른 변신을 꾀하기까지 하였다. 안그래도 무브먼트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유난히 집중되어 있는 요즘이 아니던가? 이 곳의 수장인 드렁큰 타이거는 (DJ Shine이 빠진 자리에) 패밀리를 대동하여, 이미 무브먼트라는 집단에 시선을 모으고 있는 팬들에게 새로운 분위기로 포효를 시작하였다. 한국말이 서툴긴 했지만 드렁큰 타이거의 랩실력은 데뷔할 때부터 유명했다. 그리고 무브먼트라는 일가를 이루면서 패밀리 안 밖으로 Tiger JK가 갖는 입지는 매우 견고했다. 그러던 그들이 어느덧 5집을 발표 했고, 한국판 갱스터 랩으로 카리스마를 풀풀 풍기던 그들은 매우 새삼스럽게도 한결 부드러워진 자태를 취하고 있었다.

인트로 스킷 없이 다짜고짜 시작되는 첫 곡의 제목은 '긴급상황'이다. '지금은 긴급상황/ 하던걸 중지해 지금 당장'이라는 다급한 훅을 먼저 날리는 이 곡은 비트 또한 매우 다급하다. 비트가 익숙한 듯 들리지만, '팀버랜드 견고하게 베끼기'가 어반(Urban) 음반에 있어 '고급스러움'의 잣대가 되고 있는 요즘의 시류와는 그다지 연관 있어 보이지 않는다. 트로트 멜로디를 전면에 깔아 놓은 '편의점'은 중간 중간 '투둑'하고 들어가는 드럼 프로그래밍이 마치 젓가락 장단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곡은 새벽에 편의점을 찾았다 그 곳의 아르바이트 여(女)를 한 눈에 사랑하게 된 (언뜻 듣기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남자의 애심가(愛心歌)로, 심각한 상황을 코믹하게 만들어 삼류 분위기를 내는 것이 DJ DOC의 '허리케인 박'과 정서가 닮아 있다. 훅 부분에서 울먹이는 소리로 앵앵 거리는 것과 애절하기 짝이 없는 바이올린 소리는 '허리케인 박'에서 우스운 멜로디와 창법을 써 나름대로 심각한 멜로를 삼류로 만들었던 것처럼, 심각을 가장한 삼류 멜로를 우스워 지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소스로 작용하였다.

파티 넘버의 '이 놈의 Shake It'은 바이올린과 기타, 베이스를 실제로 사용하여 각자 다른 높이에서 움직이는 현의 파장들을 서로 엇갈리도록 엮어 촘촘하고 특이한 그물을 만들었는데, 그에 반해 멜로디와 가사는 매우 단순하다. 귀에 확 꽂히는 멜로디, 끝에 가서 터트리는 야마, 그리고 가슴을 후비는 가사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저미는 음악의 세가지 요소를 요구하는 매니저의 말에 그들은 전인권 컨셉의 오천원 송 '가수 지망생'으로 보답한다. 고작 오천원 인생의 절규가 그 세가지를 다 충족해 버리고 마니, 노래가 우스워서 내 인생이 우스워서 실소가 절로 나온다. 레게처럼 엇박으로 훵키하게 절며 가는 'Liquor Shot(술병의 숟가락)'은 이 모든 연주의 중심에 기타가 있으며 쉴 새 없이 빠른 그루브를 그린다. 연주는 단순하지만 타이거 JK의 멜로디 랩은 매우 다이나믹 하며 중간에 잠시 흐르는 스크래치나 탐바레스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난타, 그리고 어느 순간 삽입되는 아주 부드럽고 쌉쌀한 앤(Ann)의 보컬이 매우 정신 없이 어우러져, (짧지 않은 런닝 타임을 가졌음에도) 언제 끝나는 지도 모르게 흥겹다가 일순간 종료되어 버린다.

고집스러운 무브먼트 크루의 피처링이 다양한 가사를 엮은 '고집쟁이'는 곡의 진행에 있어서는 다른 곡들에 비해 조금 평이하지만, 클럽 공연에서 재미있는 연출이 가능하도록 짜여진 훅이 인상적이다. 'Once Upon A Time'은 이민 1.5세대인 타이거 JK의 힘들었던 어린시절 타향살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지럽게 널려 있었던 미국에서의 게토 생활과 이를 떨쳐버리고 래퍼가 되기까지의 아픔이 있는 개인사를 자서전처럼 읊어나간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클럽 공연 절정 분위기용 노래인 '백만 인의 콘서트(노래방 Rap)'는 '고집쟁이'보다 훨씬 헐렁한 그루브를 그리며 놀새떼들의 한량기를 자극한다.

드렁큰 타이거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카리스마는 여전하지만 이번 앨범은 이전의 작품들과 확연하게 차이 진다. 랩도 랩이지만 사운드 메이킹에 보다 많은 치성을 들였으며 직설적이고 가오를 중시했던 랩 가사도 '비꼬는 투'로 다소 선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래 가지고 있던 삐죽 삐죽하고 날카로운 원형은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소리들로 가시와 가시 사이를 메웠는데, 가시와 가시 사이의 공간을 땜질한 그 물질들은 드렁큰 타이거라는 물질 본연의 것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물질에서 추출하여 붙인 것이 아니라 양 갈래로 갈려진 생채기사이에서 새살이 돋아 생채기를 없애듯 자신들이 가진 원재료가 불거져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거져 나온 그것은 기존의 자신들이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들로선) 새로운 것들이어서, 멀찌감치 떨어져 봤을 땐 색깔이 동일하지 않아 얼룩 덜룩해 보인다. 특히 앨범 상단에 자리 잡은 트랙들은 사운드에 대한 아이디어나 짜임만으로도, 타이거 JK가 쌓아둔 내공이 많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번 앨범은 보다 대중적인 포즈를 취하면서도 그 대중성을 음악성이라는 내공으로 일구었기에 단순히 '랩 잘하는 형님'을 선을 넘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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