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흔히 '진보' 혹은 '보수' 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가치라고 착각한다. 이런 착각은 주로 전자에게서 많이 나타나는데, 그들은 자신이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종종 진보적인 '척' 하는 실수를 범한다.

- 하지만, 진보와 보수는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는 분류일 뿐, 강박관념을 가져야 할 도덕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즉, 비도덕적인 진보와 도덕적인 보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 진보든 보수든, 한정된 권력을 적절하게 배분해야 하는 '정치적 이상' 을 목표로 한다. 보수는 현존하는 정치제도가 가장 합리적이라 주장하는 세력이고, 진보는 그것은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세력일 뿐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 진보와 보수의 도덕성은, 정치적 주장과 정치적 행동 사이의 시간과 권력의 차이가 발생하는 대의제 사회에서만 문제가 되는데, 왜냐하면, 직접 민주주의 사회라면 정치적 주장과 도덕성 사이의 시간적인 괴리는 없기 때문이다.

- 결국, 대의제 사회의 정치적 인간의 비도덕성이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추구'하지 않고 '이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비도덕적인 진보는 <혁명을 팝니다>가 지적했듯이,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정치적 이상을 이용하고, 비도덕적인 보수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이상을 이용한다.

- 권력을 잡는 순간, 대의제 사회에서의 괴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검증된다. 이것이 비도덕적인 보수 보다 비도덕적인 진보가 더 적어보이는 이유이다. 그리고, 확률적으로 보건대, 보수 혹은 진보 한 쪽이 도덕적으로 더 훌륭해야 할 이유 같은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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긁적 2007-10-04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당연하고 간단한게 무시당하는 현실이 슬프군요.

sb 2007-10-0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
 

- 난 종신형 가족제도를 불신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끊임없는 형성과 대립, 재구성의 운동 과정으로 바라보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제는 솔직한 누구나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현재진행형의 대립이 너무나 확연하다.

오늘날 행복한 가족이 많은가 불행한 가족이 많은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 집안일이나 회사일에 녹초가 된 부부들의 불행, 교육의 부담을 짊어진 부모들의 불행,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는 아이들의 불행, 경제 취향 종교로 인한 불화에서 오는 불행이 가족제도를 지키기 위한 불행이라면,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들의 불행, 편부모 자식들의 불행, 결혼하지 못하는 동성애자들의 불행은 가족제도를 선택하기 위해 감수하는 불행이다.

- 그럼, 이거 사서 고생인가. 쓰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불량 가전제품 처럼, 사회에게 강매당한 가족제도 속에서 곯치를 썩고 있는 것일까.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가족제도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회사일과 집안일은 자신을 괴롭힐 것이고, 교육비는 무거울 것이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따가운 시선은 여전히 불행할 것이다. 부모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여전히 길거리쉼터와 PC방을 전전긍긍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들은 가족제도의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단, 가족제도를 선택했을 때, 이중삼중의 고통으로 다가올 뿐이다. 나의 불행이 나의 가족의 불행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불행은 가족의 불행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가족간의 관계가 그렇다고 느끼게 만들 뿐이다.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 그렇다면, 행복도 관계수 만큼 배가 되고, 불행도 관계수 만큼 배가 된다면 적어도 손해는 아닌가? 그렇다. 손해는 아니다.

다만, 진짜 문제가 거기에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행복과 불행의 선순환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이 가족의 불행이고, 가족의 불행이 나의 행복일 경우 말이다. 나의 선택으로 인해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두 명이고, 불행을 느끼는 사람이 세 명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관계는 관계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완전히 행복하지도 완전히 불행하지도 않다.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해결되지 않는, 아니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 시작된다.

- 어차피 가족제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사회 속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관계로 인한 행복이나 고통, 행복도 고통도 아닌 갈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손을 놓아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에는 여전히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회에서의 갈등 해결 보다, 가족제도 내에서의 갈등 해결은 훨씬 비민주적이다.

사회와 달리 가족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종신계약이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한 번 이루어지면 영원히 유지되어야 하는 종신계약.

-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족제도 뿐만 아니라, 사랑, 신념, 취향, 등 영원할 수록 더 가치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아도 가치가 있다. 사람의 생각과 취향, 애정은 수차례 바뀔 수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상식적인 얘기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계를 맺을 때 이 상식을 잊는다.

계약, 그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충분히 돌아보고 그에 맞는 계약을 맺어야 한다. 일년이면 일년, 십년이면 십년, 종신이면 종신. 왜 천편일률 적으로 지키지 못할 종신계약을 맺는가.

- 이혼이나 가족의 해체와 같은 계약파기 행위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지사. 누군가가 물질적 정신적 대가를 치루면서 갈등이 수습해가야 한다.

하지만, 이들이 전적으로 파렴치한은 아니다. '무료'라는 말만 듣고 덜컥 가입한 서비스에 된통 요금을 치르는 휴대폰 사용자 처럼, 이들은 분명 자신의 약속(계약의 준수)을 지키지 못했고 그 대가를 치루어야겠지만, 이들이 계약의 주체가 되지 못한 불공평한 계약 과정도 참작되어야 한다.

- 적어도 나만은 종신형 가족제도를 선택하지 않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이루어질까. 내가 이것을 선택하는 것 역시도, 미약하지만 늙어가는 부모님께는 불행이고, 갈등의 소지가 다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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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7-28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 만만치 않죠. 국가, 자본만큼 제도라는 것이 말입니다. 없는 사람들의 가족이란 것이 말예요. 가족이란 틀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단란함, 사랑..등등도 말입니다. 공적영역을 사적영역과 분리해내고, 사적영역에 지나치게 관심갖게 만든 틀도 가족이란 제도에서 파생된다고 하더군요. 당위의 문제는 아니겠죠. 그 가족제도라는 것이 몇백년은 더 흘러가는 것이고...아니 더 길 수도... 현실은 그렇지 않으면서도...또 선택해야한다면...어이쿠 복잡해지네요. 그냥, 가족제도란 문제제기에 공감하면서 흔적 남깁니다.

sb 2007-07-30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천편일률적인 것은 나쁘지만, 가족제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스스로 선택하고 선택이 존중받았으면 좋겠어요.
 

진보/보수에 대해서는 (1)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용할 때 (2) 언론 매체에서 사용할 때 (3) 학계에서 사용할 때, 이렇게 3가지 경우 모두 제각각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진보/보수는 현재의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해서 머무르면 보수요, 나아가면 진보라는 것일 뿐, 굉장히 가치중립적인 용어입니다. 혼란은 각각의 상황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했는지'를 생략한채 진보/보수를 마구 갖다붙이는데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사회적 갈등 해결 과정에서는, 용어 먼저 합의하고 논쟁을 하라고 고등학교 때 배우는데. ㅎ)

(1)이야 사적 영역이니 만큼 오해 없는 대화로 극복할 일입니다만, (2)와 (3)의 경우는 공적인 글쓰기인 만큼, 기준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사회적 책무가 있겠지요. 우리가 공적인 매체에서 한 사람에 대해서 '진보적이다' 혹은 '보수적이다' 라고 총체적인 평가를 하려면, 개개의 사안을 기준으로 하기 보다는 그의 가치관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어떤 기준으로 진보/보수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 경우, 즉 공적인 글쓰기의 경우 (1)에서 주로 사용하는 기준인 문화나 관습, (2)에서 주로 사용하는 기준인 사회적 이슈를 사용해서는 안되고, 이것들을 포괄할 수 있는 총체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아니면, '진보적이다' 혹은 '보수적이다' 라는 총체적인 평가를 그만 두거나, 신중하게 '어떤 사안, 어떤 기준에서 봤을 때 이렇게 나누어 진다.' 라고 해야죠.

선거철이면 의례 등장하는 후보들의 이념 조사, 이거 무척 좋습니다만, 사안에 대한 태도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진보적이니 보수적이니를 판단하는게 혼란의 시작입니다.

저는 공적인 글쓰기에서 사용해야 할 총체적인 기준이 (3)에서 주로 사용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한국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만족하느냐 불만족하느냐는 감정적 태도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체제 전반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뜻합니다. 이것으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똑똑하신 분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리 없고, 학계에서 분명히 위와 같은 기준으로 말씀하시던 분들도 언론에 출현할 때는 기준을 두고 나오시는데, 모두가 '부러' 일으키는 혼란이라고 보여집니다. 용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순간 편가름이 확실해지고, 순간 뱀의 머리에서 용의 꼬리가 될 이들이 있을테니까요.

김규항 선생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런 사회적 합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가 절필 선언을 하고 어린이 잡지 만드는 것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 많이 지쳤다는 생각과 더불어 문제 제기로서의 그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더 이상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기득권(다른 표현으로 지배계급)과의 싸움의 하나일 뿐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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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쟁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즘 KBS 드라마 <서울1945>를 보고 있는데, 대하드라마가 늘상 그렇듯이 논쟁이 되고 있어요. 그 관련 기사를 찾다보니 여기까지 흘러왔습니다. (드라마와 학계의 논쟁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1979년 10월에 출간된 책입니다. 계엄 하에서 판금 조치될 정도로, 그간 공식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던 해방전후사를 다루며 인기를 얻었던 책입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판하며 지난 3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긴장관계 속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재출간을 하기도 했구요.
그리고, 한국정치학회는 이 논쟁을, 비판과 반비판을 넘어 통합적으로 논의하는 장으로 만들기 위해 연구를 시작한다고 하는군요.

언뜻 좌우파 이념 논쟁으로 비추어지는 이 논쟁은, 사실 민족주의를 제외한 확실한 논쟁점이 없어보입니다. 이념 논쟁은 불명확해요.
이들이 간신히 논쟁을 전개할 수 있는 이유는, 이념과 상관없이 양 진영 사이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데요, 비약하자면 한쪽 진영에는 민족주의 좌파와 우파들이, 나머지 한쪽 진영에는 탈민족주의 좌파와 우파들이 뒤섞여있는 것이죠.

저는 이 논쟁이 이념 논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소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없구요.
일전에 <이정 박헌영 일대기> 독서후기를 쓰면서, “해방 이후의 역사에 대한 어리석은 접근 중의 하나는, '왼쪽이 옳으냐 오른쪽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며, 자칫 소모적인 비난으로 치우치기도 합니다.” 라는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두 책을 둘러싼 학계의 논쟁은 이런 제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합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그것은 민족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체제입니다.
자본주의는 시장의 세계적 통합을 추진하는 체제이고, 사회주의 역시 세계적 생산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방식과 주체만 다를 뿐 경제의 세계적 통합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죠.

따라서, ‘민족주의 좌파‘, ‘민족주의 우파‘는 모순적인 표현입니다.
이런 표현은 한국에서나 쓰이는 것이에요. 모순적임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이 오늘날까지 공공연히 사용되는 이유는, 체제가 무엇이냐를 떠나 어느 누구도 분단을 원하지 않았던 해방전후사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있는 까닭이죠.

사람들은 간혹, 현실이 불만족스러울 때 과거를 돌아본다고 합니다. 식민지 운운하는 민족주의 좌파와 역사적 정통성 운운하는 민족주의 우파는, 과거에 집착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통일 정부 만능주의든, 정통 정부 만능주의든, 역사와 이념을 부적절하게 뒤섞은 것입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미래지향적인 사고에요.

탈민족주의 우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해방 직후의 자주적인 정부 구성에 대한 열망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아요.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와 1950년대 자본주의 경제를 단순하게 비교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오늘날 북한의 폐쇄경제를 두고 결과론적으로 해방전후사에 개입하는 것도 그렇구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진영에서 극소수에 불과하겠지만, 탈민족주의 좌파에 귀를 기울여 볼 생각입니다. 이들이야 말로, 과거에 집착하는 이들과 현재를 합리화하려는 이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역사 연구를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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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겨보는 한 드라마의 대사란 이런 것이다.
"빨갱이들이란 도무지 제 가족이란 안중에 없는 것들이죠."

몹쓸 놈의 이념이 가족을 가르는가?

그렇지 않다.
이념이 가족을 가른다는 일반화는 잘못되었다. 극중 동우와 해경이 그렇듯, 지배세력의 이념은 가족을 가르지 않기 때문이다.

동기와 운혁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이별해야 했던 것은,
그들의 신념이 적어도 지배계급의 그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지배계급의 신념에 동의하지 않는 당신에게 한마디 조언하고 싶다.

신념 이전에 형성되어 있는 가족인들 어찌하겠나.
다만,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의 비극이나마 막기 위한 최선은, 당신이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구성할 의향이 있다면, 우선적으로 신념을 따져보라는 것이다.

물론, 연애를 하고자 할 때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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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6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