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신화 - 대영박물관 신화 총서 7 세계 신화 시리즈 15
베스타 S. 커티스 지음, 임웅 옮김 / 범우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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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가 처음 알려지고 세계사의 기록에 자세히 남는 것은 아마도 구약성경과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통해서일 것이다. 아케메네스의 키루스 때부터 이 싸움 잘하는 민족은 가볍게 당시의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뒤를 잇는 중동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원수지간인 투르와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터키로의 서진西進을 거듭하여 드디어 그 지역에서 식민지 건설에 열올리고 있던 그리스인들과 조우하게 된다. 크세르크세스가 치명상을 입어서였던지 이 척박한 땅에 더 관심이 없어였던지 그들과 그리스와의 전투는 그리스측의 승리 주장만 역사에 남아있다. 정작 이 나라가 그리스에게 패배한 것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뿐일지도 모른다. 

이 지역은 오랜 옛날부터 문명의 발생지로부터 흠뻑젖는 혜택을 받아왔다. 메소포타미아와 인도문명 사이의 카스피해 아래에 위치한 탓에 분명 양쪽의 창조적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재생산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인적없는 삼림과 벌판, 어두움 속의 동굴로부터 유래했음에 틀림없는 마술적 힘과 신화의 동물들은 이런 밀집거주 지역의 문화와 만나 그들만의 독특한 페르시아 이야기들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충성과 용기, 힘과 지혜, 역경의 극복과 태생, 자연과의 조화와 전쟁의 일상성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비록 외적外敵에 불과한 알렉산더라 하지라도 그 영웅의 특출함은 그들에게 그를 한 이란왕의 사생아로 탈바꿈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한다. 그들은 영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랍 종마들을 달리며 사자가 출몰하는 북아프리카와 유라굴로가 바다를 뒤집어엎는 소아시아에서 코끼리를 몰고나타나는 인도 군대에 이르기까지, 낯선 전쟁터를 서로에 대한 신뢰, 충성과 승리의 의지로 생존해 오던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최강이라는 자존심은 알렉산더가 입힌 패배의 상처로 깊은 도전에 직면했었음에 틀림없다. 사산왕조에 이르러 주변 민족과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흐름이 생긴 것도 이런 패배로 인한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에서 생겨났다. 승리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념비적 건물에 집착하나, 패배한 자는 자신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고 자기를 구별하여 그 뿌리를 찾으려한다. 이런 기록 종교의 필요성이 비로소 조로아스터 종교의 명문화, 기존의 아케메네스 왕조후 소실된 [아베스타]의 복원과, [샤나메]의 창조를 가져왔다.

이 책은 주로 이 [아베스타]와 [샤나메] 속에 나타난 그들의 뿌리와 여러 영웅들과 주위의 적들의 사악함에 관한 묘사와 그들에게 거둔 승리에 대한 기록들이다. 그 출처가 되었을 떠돌이 이야기꾼들(naqqal)의 구전은 분명 민중이 원하는 맛깔대로 각색된 옛 선조들의 영웅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정작 왕이 아니고, 충성된 장군이며, 영특한 동물들과, 버림받은 왕자들이며,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하는 연인들이다. 사산왕조의 루스탐 이야기에 대한 애정은 우리 백성에게도 왕보다 더 가까왔던 이순신과 의병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이제 인류 모두의 것이다. 그들이 만들기도, 유통시키도 한 이야기들은 알렉산더를 빚댄 [임금님귀는 당나귀귀], 금세공쟁이 하산의 모험담을 다룬 [선녀와 나뭇꾼]으로 여러 문화안에 살아서 숨쉬고 있다. 춘분과 새해에 하는 액운을 쫓는 축제들(쯔리)은 여전히 여러 남아시아 국가와 일본에서 그 자취를 보인다. 페르시아는 유럽과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를 이어오던 한 끈이었음을 짐작케하는 증거들이다. 페르시아인은 지금은 일단 그들의 종교로 인해 유폐되었으나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세계를 아우르고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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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로스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욱송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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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의 작가다. 그의 자서전적 소설이 잘 드러내듯, 그는 끊임없는 죄의식과 무력감으로 살아갔다. 그의 이 단편집도 [달려라 메로스]와 [여학생]이외에는 모두 그의 힘겨웠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형과의 불화, 공산주의 운동으로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던 동경생활, 자살미수로 한 여자만 죽게 한 사건, 진통제 중독으로 빚과 정신병원 신세, 그리고 연인의 배신. 그의 이런 비참한 삶의 뒤로 그는 한 빛줄기를 본다. 자신을 걱정하여 주고 챙겨주는 사람들. 어떻게든 형과 화해시켜 주려는 따뜻한 마음. 끝나버린 줄 알았던 가족의 정이 불씨처럼 살아있음을 본다. 그는 희망을 미워하고 또 희망을 잡고 싶어한다. 

그의 마음에는 한 낯가리는 연약한 [여학생]이 자리하고 있다. 반드시 빚진 삶을 갚고픈 비장한 각오와 그 일만이 그의 삶을 유지시키는 끈이 되고 있음을 그도 잘 알고 있다. 버려진 슬픔만 처음에 없었더라면, 가녀린 그의 마음을 다독이며 어머니와 함께 오손도손 사는 기쁨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인간조건만 아니었더라면, 그도 이웃에게 친구에게 가족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보탬이 되고 기쁨이 되는 존재이었으리라. 

부모에게도 미안하고, 형들에게도, 죽은 여자에게도, 현재의 처에게도, 두 아저씨에게도, 소작농에게도, 혁명운동을 하던 친구에게도 그는 죄책감, 자신에 대한 분노, 포기하고픈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단편들은 그런 오사무의 한편에 살고픈, 행복하고픈, 자신을 용서하고픈 마음이 끊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을 어찌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부끄러움과 악행들. 마음에 아직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추악한, 용서받지 못할 모습들. 오사무는 마지막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더라도, 우리는 도움을 받으러 손을 내밀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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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브 공작 부인 밀레니엄 북스 91
라 파예트 지음, 김인환 옮김 / 신원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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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 라파예트 부인에 의해 쓰여진 이 책은 고전주의 소설의 시초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이전까지의 궁정한담과 같은 프레시오지테 소설이 심리적 변화의 묘사와 인간심리의 분석에 있어 이 책의 모태 역할을 하여 왔지만 이 소설에 이르러 비로소 라신의 비극에서  보이던 극적 전개의 탄탄함이 희곡에서 소설로 유입되어 소설의 신고전주의시대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이 17세기 소설에 대해 아무 쓸모 없는 지식이라고 말해 反사르코지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 이 연애담은, 실제 21세기 우리 눈으론 그저 하이틴 로맨스 같은 느낌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하이틴 로맨스라고 불리는 혹은 많은 연애 소설의 원조가 되는 이성적 판단과 감정의 충돌, 도덕적 사회 기반과 이성적 삶의 설계를 반하는 격정적 연애감정과 한눈에 반하기, 감출수 없는 표정과 손동작에 대한 표현들로 넘쳐난다.

라파예트 부인은 당시의 문학 흐름과 독자의 취향에 맞춰, 고전적 희곡 기법의 비극적 요소와 심리적 만족과 우아함의 당시 소설 기법을  동시에 어울어낸다. 비로소 소설이라는 형태로, 희곡이 만들어내던 긴장과 해소 속의 일체감, 즉 복선의 도입과 상승하는 갈등, 파국의 진행과 반전으로의 결말이 도입되었을 뿐 아니라, 소설 자체가 갖던 우아함과 말재주, 궁정심리의 재미들을 같이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르코지의 생각과는 달리 이 소설은 단지 그의 생각에 대한 반대로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를 위한 이정표로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예술 창작에 있어 이러한 낭만주의적 자유성과 고전주의적 형식성의 조화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쳤을때 빚어지는 어색함을 극복하게 한다. 형식적 식상함이나 와닿지 않는 어설픈 낯설음의 양쪽 극단을 극복하여, 아름다움과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균형을 갖게 하는 것이다. 라파예트 시절의 프레시오지테의 가벼움이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라면, 라신적인 그리스 비극의 무거움이 우리가 그간 여러 자유로운 내용에도 간직하고 있던 형식미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을 우리시대에 독자에 맞추어 엮어냄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닐까? 결국 이 둘의 대화는 양쪽이 변화하고 닮아갈수록 더 기발한 방식의 융합을 요구할 것이다. 일본소설로 말하자면, 하루키보다는 무거운, 오사무보다는 가벼운, 소세키 정도의...
하지만, 21세기판.
 
우리 삶이란 클레브 부인처럼, 격정을 이기려하면 할수록 그 감정과 가벼움에 휩쓸릴 수 밖에 없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지지 않고 질서를 부과하려 하는 존재이기에 아직 희망을 갖는지도 모른다. 감정을 잘 알아차리되 숭고함의 틀에 잘 맞추어가는 것이 정말 인생의 재미있는 부분이지 싶다. 무미건조도 허랑방탕도 별 끌리지 않으니까. 우리가 기다리는 문학도 아마 그런 가볍고 따뜻하며 진실되고도 놀라운 무엇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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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그리스도인
김기현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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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반드시 지속하여야 하는 습관임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일목요연하게 써졌고 많은 팁을 제공하여 새롭게 이 습관을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1. 글쓰기는 생각을 정리하여준다. 저자는 누구나 자신이 가진 역량을 개발하고 구체화시키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하라고 권한다.

2. 글쓰기는 자신을 객관화한다. 글은 자신의 흐르는 감정과 상대에 대한 느낌, 옳음과 오류속의 판단을 끄집어내어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비로소 무엇이 자신을 우울하게 하고, 상대에 대한 그런 감정을 갖게 했으며 내가 판단하는 사물에 대한 직관이 얼마나 많은 주위 정황에 영향 받은 것이었나를 알아차리게 해준다. 

3. 글쓰기는 새로운 생각을 배태한다. 물리적 배열과 달리 글쓰기는 화학적 반응이 그 매력이다. 연관 없던 사건들이 만나고 내 안에 연관되기를 기다리던 생각으 고구마 줄거리들이 10 여년을 기다렸다 줄줄이 끌려 나온다. 그것이 글이 문장으로 풀어져 나올 때를 기다려 그 틈을 타고 쏟아져 나온다. 기다렸다는듯이...  

4. 읽으면 써진다. 답답하게 막혀버린 글의 한 문단. 글쓰기의 막힘이 쓰는 재주가 아닌 생각의 결핍에서 오는 까닭에 읽기는 남의 생각과 만난 내 생각을 활성화 시켜 쓰기를 가능케 해 준다. 

5. 써 놔야 남는다. 초고속 카메라야만 보는 순간이 있듯, 우리 생각의 스쳐지나감을 멈추어 놓을 수 있는 것은 글 밖에 없다. 지나가면 끝이다.  

6. 3개의 key concept-3개의 key phrase-논리로 엮어라. 3은 열려진 그러나 지나치지 않은 창조의 순간이다. 둘은 제한되어있고 넷은 글로 쓰기에 너무 산만하다.  

7. 한문단에 한 생각. 전달은 글쓰기의 예절이다. 알아먹지 못하게 말하는건 듣는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다.  

8. 일관성을 위해 자기 글을 잘라내라. 다듬어지기 전의 조각은 돌덩어리에, 추한 구성물에 불과하다.   

9.묵혔다 다시 보고 고치라. 밤에 쓴 글은 창피하고 낮에 쓴 글은 감동이 없다.
 
일기와 독서기록, 논문정리와 기고글에 동기부여와 여러 방법론으로 분명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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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 - 지식의 초점 6-003 (구) 문지 스펙트럼 3
박성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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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수사학의 기존의 개념을 기술하고, 각 개념의 형성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과 그 과정에서 생겨난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수사학rhetoric은 [말을 통한 설득]이라는 최초의 정의에서 [잘 말하고 쓰는] 기술적 의미로 변화되어왔다. 최초의 수사학이 논거발견,논거배열,표현,기억,연기를 포함하는 목적지향적인 일련의 종합예술적 형태였음에 비해, 점차 표현술로서의 문체의 적합성과 규범의 일탈로서의 문채에로 그 관심이 이동해 왔다.

저자는 이런 과정이 기존의 이론과 달리  수사학의 쇠퇴의 과정이라기 보다 현대성 안에서의 수사학에 요구되는 상황 변화와 맞물려있다고 설명한다.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자층, 혹은 신문의 등장과 연관된 논증의 대중적 역할확대, 중심 이데올로기의 해체와 연관된 상대주의적이고 열린 토론환경, 수사학적 영역의 확대로 빚어진 타 학문과 연계의 발생은 수사학에 다른 시대적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의사소통의 대중화(블로그, 개인 컬럼, 온라인 매체)는 수사학에게 [오래되었으나 새로운] 논거제시의 기법과 [어디서 본듯하나 시의적절한] 문채의 제시라는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이 책은 나에게 우리시대의 [진실]이라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고대의 이데아 사상가들은 소피스트적 사고에 대해 [논리적이라도 진실은 아닌 것]이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20세기를 통해 이런 이성에 기초한 보편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짓밟는 것인지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다. 세계대전과 공산자본주의의 전쟁의 참 패배자는 이성주의였다. 이제 인문학적 보편주의가 물러앉은 자리엔 인문학을 조소하는 상대주의적 자연과학이 새로운 권력자이다. 이제 우리의 시대는 과학이 만들어내는 산물 이외의 것에서는 가치를 찾을 수 없는 또 다른 문제에 맞닥들임을 잘 알고 있으나 속수무책이다. 돈과 건강, 오피니언 생성과 미디어 장악이 중심가치를 이루어, 과학이라는 얼빠진 몸을 이루는 영혼역할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배경 아래에서 서로에게 [너는 진실하냐]고 묻는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천년전 빌라도의 이 질문에 수사학은 답할 수 없다. 수사학은 이제 대중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역할을 부여 받았다. 소피스트들이 돌아온 듯한 매일의 TV 라디오 신문을 보며 무력감을 느낀다. 기법만이 남는다면 진실이 설 자리는 없고 또다시 우리는 이건 아닌데라고 느끼면서도 달변가들에게 휘둘리고 살 것이다. 이제 제발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곳에 살고싶다. 진실만이 진실인 곳은 이 지상에는 없는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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