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1 세미콜론 코믹스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김희정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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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만들다보면 남은 식재료나 주위에 흔히 보이는 계절 재료로 무언가 만들고픈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제 작가가 고향에서 살며 만들어먹던 것들, 이런저런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시도해 보았던 먹을거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하지만 그 속엔 그 음식과 얽킨 엄마의 기억, 남자의 기억, 친구와의 추억, 자기 삶의 고달픔이 녹아 있어 이 만화의 가치를 더한다.

먹기위해 산다거나 살기 위해 먹는것이 아니고 먹는 것은 삶의 일부임을 느끼게 해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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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46
임선희 지음, 최복기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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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세계와의 관계를 철학자다운 자기 중심성과 나타나는 상황을 아우른 세계파악 위에 세계와의 타협과 협력, 대치와 독립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관계 속에 파악된 존재를 죽음이라는 불안과 마딱드리게 하여 그 의미를 추구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존재의미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선 있는 그대로의 세계파악과 거기서 선택한 자기 세계관이 있어야한다. 인간은 과연 각자가 자기가 원하는 세계관을 선택할 수 있을까? 세계관을 강요당하게 되었던 때를 지나 이제는 각자가 택하는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강제되어 살고 있는 시대에 들어온 건 아닐까? 그것이 마케팅이든 민주주의 압력이든...어려움은 세계관에 있어 우리가 끌려다니고 있었다는 인식의 부재가 아니라 주어지는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하는 능력 없음이 아닌가?

 

또 다음 단계인 죽음을 끌어안는 실존적 부딪힘을 우리가 하지 못하고 도피하는 것은 우리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은 아닐까? 하이데거만큼 강하지 못한 우리는(^^;) 다가오는 죽음의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방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실존적 확신으로 살다 막상 죽음을 맞을 때 자기 존재라고 믿었던 것이 이건 아니었구나라고 하게 될 것이 뻔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실 앞에 자기 개똥철학이 일시에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또다른 불안. 근거가 자기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살면서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전존재타자(신)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 다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전존재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전존재타자를 조정하거나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이 구원을 이루는 까닭은 절대타자의 독립적인 우리를 향한 사랑을 알고 따르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불안을 제거하려는 경향으로 치닫는 루터교적 타락의 기독교를 힐난하였다. 불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타자인 신과의 올바른 보편성의 관계가 아닌 실존적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본 까닭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사랑의 신이 계실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건 마찬가지다. 신의 사랑에 대한 인식을 배제하고 불안을 존재자체로 이해한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불안을 조장하는 사고자체를 진리 본체로 삼고 이것으로 세계를 보려하였다. 하이데거는 보이는 세계의 현상적 흐름에서 불안의 인간을 당연히 실존주의로부터 길러내고 이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려 발버둥칠 수 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개방형과 폐쇄형 세계관, 인격적과 비인격적, 사랑과 생존의 세계관 중의 선택이었다. 

 

사랑의 신에 대한 세계관에는 또 다른 두 생각이 존재한다. [업다이크의 토끼]는 사랑을 향해 열린 태도만으로 충분히 전존재타자를 소유할 수 있도록 그는 약해지신 분이라고 믿는다. 이 키에르케고르적 불안의 인간은 그의 의지체계와 상관 없이 구원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며 그가 얻는 구원은 교회밖의 실존적인 것이라 여긴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므로 벗어나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며, 잊어버리고 있으면 어찌 될거라는  세계관이다. 이런 구원관의 혼란의 중심에는 인간의 행위와 예정이라는 주제를 실존적 입장에서 이해하려한다는 원인이 있다. [사랑의 하나님은 내 실존을 이해해 주셔야 한다.]  사랑의 신은 실은 감정적이고 같이 사는 아버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분명 관계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관계가 발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두고 보지는 않는다. 세계를 보는 방법을 깨닫게 하고 스스로 자기 것으로 만들게 하며, 죽음을 원래 모습대로 만만치 않게 여기게 하고, 동일한 인간 기준에 놓인 동료의 아픔을 느끼고 자기 힘을 넘어선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태도를 기르게 한다. 끝은 불안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만만하신 분이 아니라는걸 알게 된 [긴장의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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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리콘 - 노먼 린지 일러스트판
페트로니우스 지음, 강미경 옮김, 노먼 린지 그림 / 공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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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니우스의 외설문학으로 주목받은 작품. 그 가치는 사실 이미 망실된 줄거리가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보다는 이 책을 단편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사용한 채프먼, 드라이든, 오스카 와일드,시엔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 엘리엇의 황무지, 에즈라 파운드, 헨리 밀러의 참고문헌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

 내게 페트로니우스의 생애와 이 작품을 연결 지을 수 있는 단초는 풍자이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존경과 능력에 대한 기본가치 위에서 볼 때 사티리콘의 풍자는 분명 즐기기 위한 표현이 아니고 비웃음과 고발이다. 사티리콘(풍자)라는 형식 자체가 의미하듯.

수 많은 강탈과 어리석은 욕심의 여행으로부터 다다른 푸테올리, 그 강탈의 동료와의 더러운 욕망을 위한 다툼. 잠시 이어지는 무제한적 연회, 시인 과의 동행이 가져온 불행,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일도 행할 능력을 잃어버린 남자가 아닌 자가 되어버린 사내. 시인을 먹어치워 달라는 요구. 이 모든 풍자는 스스로의 풍요에 매몰되어 자신의 더러운 과거와 부끄러운 행적을 돌아볼 줄 모르는 로마의 나약함과 역겨움이다.

로마는 이 무력과 역겨움에서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수 밖에 없는 파멸로 치달을 것인가? 페트로니우스의 죽음은 이 풍자소설에 대한 마지막 결말이었는지 모른다. 로마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모험은 저급한 욕망을 위한 것 밖에는 남지 않았고, 흥청되는 풍요함 안에 존귀함은 그 어디에도 발 붙일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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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용기 도모생애교육신서 11
폴 틸리히 지음, 차성구 옮김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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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가 1952년 쓴 이 책은 그의 사상의 맥락을 잘 보여주면서도 대중에게 접근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작이다.

 

그가 설명하는 실존주의적 존재 이해에 기반한 자신의 실존을 뛰어넘는 진정한 용기는 우리의 죄됨과 파멸의 운명을 극복하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죄의 용서를 인정하는 용기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얻는 경험으로서 이루어진다. 거룩한 분과 교제할 수 있게 된 존재는 자신이 받아들여졌음을 인정한다. 파멸의 존재로서의 운명이 극복되었음은 자신의 불멸성 획득이 아닌 불멸의 존재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긍정이다. 인격적 만남에 들어간 자는 그 관계가 끊어지지 않을 것을 알므로 그 생명의 영원성을 눈치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믿어드리거나 획득한 것이 아니라 믿음은 존재자체의 힘에 사로잡힌 존재의 상태라고 말한다.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린 자이다.  존재의 힘에 사로잡힌 자는 존재 자체의 힘이 자신을 긍정함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런 믿음이 존재의 용기의 바탕이 된다.현실적으로 만나는 절망 속에서도 용납하는 힘을 경험하고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신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닌 이미 붙잡힌 자로서 그 분을 알아가는 관계가 된다. 이런 이해는 보편성에 기초한 유신론적 객관화나 인격주의로 이해되는 손에 잡히는 신을 거부한다. 그의 이러한 설명은 구원론 이해의 여러 일탈들을 피해갈 수 있는 근거와 구원 이후의 삶의 올바른 기초를 제공한다. 자기를 긍정할 근거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 것은 우리 구원의 확실한 근거가 되며 구원 이후의 삶의 실패에 대한 자기 이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용기는 구원 이후의 십자가를 지는 삶에도 적용되는 용기인가? 용기가 이렇게 주어지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믿음이라면 분명 따라 죽으러 가겠다던 제자들이나 자기는 부인하지 않으리라던 베드로의 용기와는 다를 것이다. 그 분이 용납하신 자는 용납하신 자를 알고 그 분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구원의 용기에 그치면 사랑 안에 거하는 용기는 알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업다이크의 래빗에게서 느꼈던 그 이질적 구원의 느낌이었나보다. 젖먹는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야 하는데 아직은 이 모양 이대로 몇년을 또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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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 세계기독교고전 14
우골리노 지음, 박명곤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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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무신정권 아래 고려시대무렵인 13세기 초, 교황청의 권력은 십자군 원정을 일으키던 무렵 한 청년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고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가 문자적으로 고치려던 교회의 본뜻은 교회의 원래 모습인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 뜻대로 사는 삶이었다. 이 청년 프란체스코에 의해 시작된 작은 형제들의 모임은 그 위대한 정신과 기적들로 점차 이탈리아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 수도회 운동의 출발이 된다. 

 

하지만, 아시시의 토지와 교황의 인정을 받는 기구로의 탈바꿈은 수도회 내부의 분열과 자리다툼을 만들고, 나름 더 성결하고 신령하다고 주장하는 파벌의 분리도 일으킨다. 이 신성주의자의 관점에서우골리노가 프란체스코 사후 백년 정도에 저술한 행적이 [작은 꽃들]의 기초자료가 된다. 기존 전기보다 기적과 영적 활동, 청렴과 기존세력 비판에 더 비중을 둔 이 작품은 도리어 신앙의 핵심을 인간과 조직보다는 신적 동기와 은혜, 전적인 수납과 겸손에 뿌리를 두어 이후 수도원의 정신과 종교개혁 운동에도 영향을 준다.

 

반대하지만 상대를 낫게 여겨 교회에 남으며, 복음을 설명하지만 상대의 비판 앞에 무릎꿇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 그것은 그 자신이 온전한 사랑의 은혜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면 어찌 가능할까? 권력과 성취의 신앙운동 한 가운데서 인격과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나는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결심은 내주하시는 영으로부터만 가능하다.  진정한 신앙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으로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누린다. 그래서, 명예와 부유, 넉넉함과 안정을 버린 이들만이 이제도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한 본보기도 남아있을 수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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