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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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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11.07 ~ 1960.01.04]

  카뮈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은 <시지프의 신화>를 통해서 대했던 부조리와 맞선 인간의 숙명적인 반항을 찬양했던 철학자로서의 모습입니다. 많은 이들은 그를 실존주의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자 했지만, 그는 '실존주의가 끝나는 곳에서 나는 출발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다룬 '세상과 존재의 부조리함'과 인간의 그에 대한 '반항'을 실존주의의 한 줄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카뮈 본인은 실존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좀더 적극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한 것이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여하튼 젊은 시절의 독자들에게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와 이에 반항하는 '시지프(or 시시포스)의 모습은 철학적인 깊이를 떠나 매우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의 작품 <이방인>이나 <칼리쿨라> 등도 그가 천작한 '부조리의 사상'을 펼쳐 보이고 또한 부조리한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한 험난한 과정을 표현한 작품들입니다. <페스트>의 경우도 부조리에 대한 반항과 인간의 지성에 근거한 연대를 표현한 것인데, 아마도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암시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더욱 더 인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카뮈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콩바>지의 주필로서 대독일 저항운동에 활발하게 관여했던 사실일 것 같습니다. 그의 삶의 위치는 좌파적이고 정치 참여적인 모습이었지만, 결국은 유물사관이나 혁명에 의한 과격한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에서 등을 돌리고 점진적이고 개량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민주주의 진영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 사르트르의 혁명과 과격한 개혁도 마다하지 않았던 자세와 대조를 이룹니다. 그는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아쉽게도 1960년 1월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1905.06.21~1980.04.15]   

  무신론적 실존주의 작가이자 사상가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 사조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아직도 많은 호사가들에게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관계가 더 관심을 끌 듯 합니다. 카뮈가 식민지 출신에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던 것과는 달리 비록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외조부 슬하에서 자라면서 명문교육을 받았습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아프리카에서의 봉사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A. 슈바이처가 사르트르의 어머니의 사촌이라고 합니다. 비록 사르트르는 부르조아 출신의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평생동안 그의 출신 계급에 각을 세우고 살았습니다. 사르트르가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존재론적 체험의 우연성을 표현한-그리고 실존주의 소설의 첫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소설 <구토>를 통해서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하였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지만, 전쟁 당시에는 카뮈 만큼 적극적인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지는 않았던 듯 하고, 실제로 활발한 사회 참여는 전후에 잡지 <현대>를 창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르트르는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니힐리즘의 색채가 담긴 세계관에서 벗어나 개인주의적 실존주의에 의한 사회참여의 한계를 인식하고 더 적극적이고 과격한 경향성을 띠게 됩니다. 즉 공산사회주의적인 과격한 혁명과 폭력도 용인하는 태도를 취하는데, 이러한 사상의 변화가 아마도 카뮈와의 결별에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세기 지성계의 거인, 카뮈와 사르트르  

  카뮈와 사르트르가 처음 만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사르트르의 극작품 <파리떼> 공연 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후 선의의 경쟁과 우정을 나누던 그들은 1951년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 출간되면서 파국을 맞습니다. '프랑스 해방 이후 반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 '정의'와 '중용'을 추구했던 카뮈와 한때 공산주의 동반자가 되어 '폭력'과 '혁명'을 주창했던 사르트르의 이념적 성향'의 차이가 <반항적 인간>의 출간을 통해서 명확해졌고,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둘 사이의 간극은 메울 수 없는' 차이를 낳게 됩니다. 두 사람은 우정을 나누던 시기에도 자신들 고유의 사상적인 형식과 내용을 다듬어 가는데 사르트르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이 되지 않고서는 이미 폭력과 억압이 난무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관점에서 공산주의에 접근하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주저하지 않을 '혁명가'로 변해가지만, 카뮈는 폭력에 의지하는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을 완강히 반대하는, 폭력을 절대로 정당화하지 않는 '반항인'을 창조해 냅니다. 저자는 일관되게 '혁명가'와 '반항인'이라는 이 두 인간형이 지니는 차이가 두 사람이 결별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으로 파악하며,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때로는 얼굴을 마주하고, 때로는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자신들이 몸담고 있던 잡지의 기사를 통해서 교환하던 우정과 논쟁의 궤적을 따라가다 <반항적 인간>의 출간을 계기로 폭발하여 열띤 논쟁의 소용돌이를 거쳐, 갈등과 견제 속에서 두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저자는 카뮈와 사르트르 두 명 가운데 카뮈가 더 호감이 가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은 궁극적으로 두 사람 사이의 문제라기 보다는 폭력과 혁명, 정의와 중용이라는 시대적인 가치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한 승자를 논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사르트르일 수도 있고, 카뮈일 수도 있다"는 양시론적 입장을 취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한 현재-공산주의가 몰락한 현재-의 대답은 '카뮈가 오늘날의 승리자'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승리자라는 표현은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바라보기보다는 시대적 상황에 어울리는가 거스르는가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할 듯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카뮈와 사르트르를 분리시켰던 공산주의와 거의 모든 식민지가 사라지고 냉전의 막이 내리기는 했지만, 현시대에도 여전히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부추겼던 '폭력'이라는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두 사람의 논쟁의 역사를 통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배우는 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독자로서는 카뮈와 사르트르를 각자 개인으로 만나는 것을 넘어, 우정과 갈등을 나눈 두 사람 사이의 사상적인 대화가 그들의 작품에 담겨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두 사람의 작품을 좀더 깊이 있게 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출판사 제공도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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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이번 달의 관심 주제는 우주/지구.... 그리고 거기에 개정판이 나온 과학 콘서트를 덧붙여 본다.... 여전히 나만의 주목 신간이겠지만....  

 1. 암흑 우주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 우주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용어가 그렇게 낯설지는 않겠지만, 세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주의 질량의 96%를 차지하는 우리가 모르는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은하의 생성에 대해서 설명한 책이랍니다.... 결국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는 .....^^ 

 

 

 

 

 

 

2. 빅뱅 이전 

 우주의 탄생이 빅뱅에서 시작되었다는 가설은 이젠 초등생들도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대다수가 이 이론을 지지하고 있는 듯 하구요... 한데, 빅뱅과 함께 시간과 공간의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전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인지..... 과학이니까 단순한 말장난을 아닐 것이고, 궁금증이 한없이 부풀게 하는 책입니다.

 

 

 

 

 

 

3. 대단한 지구여행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우주를  논하기도 하지만, 지구에 대해서도 여전히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많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지구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이 책을 통해서 지구의 탄생과 변화, 그 위의 나라들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것까지 다양한 모습을 탐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지구위의 모든 역사 

   빅뱅과 지구의 탄생, 인간의 진화와 문명의 발달,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등 지구에 대한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졌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과학 콘서트 (개정판)  

 교양 과학서로서 두말할 필요가 없는 과학 콘서트의 개정 증보판이라고 합니다. 현대를 살면서 이 정도의 소양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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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 - 종교, 믿음을 팔고 권력을 사다
김상구 지음 / 해피스토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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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기독교인으로서 이 책이 다루는 주제와 같은 '변질된 종교와 타락한 신앙인'에 대한 날선 지적을 대할 때마다,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한 부끄러움과 손가락질 당하는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고는 합니다. 그들의 지적에 대해서 때로는 변명을 하고 싶고, 그래도 많은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항변을 하고도 싶고, 그럼에도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살아있는 손길을 알기나 하는 거냐고 따져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내 그 안에 담기 그들의 주장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라면,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는 합니다. 그래도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 나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감정안에는 진실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먼저요, 그 다음은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때로는 일면만을 침소봉대하곤 하는 이들의 편협함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주된 요지는 우리에게도 이제는 종교 단체를 통제(?)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종교 법인법' 형태의 입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소득세를 내지 않는 성직자를 비롯한 종교인, 막대한 부동산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실명제를 유유히 피해가는 종교계의 유지재단을 통한 명의 신탁, 개신교가 종부세라는 세금폭탄을 피해가는 과정 등을 통해서 성역화된 한국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며, 주류 언론도 힘있는 정치인도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러한 변질되고 세속화된 종교의 개혁을 위한 근본적인 개혁의 시도로서 저자는 '종교 법인법'의 입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2부 한국 종교의 뒤틀린 모습'을 통해서 우리나라 종교계의 치부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종교의 개혁이 필요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만들어진 기독교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의 허구성에 대한 지적은 유관순 열사,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손양원 목사 등의 과거에 대한 의문들로 연결됩니다. 또한 기업화된 대형 교회와 그들과 손잡고 돈을 굴리는 금융기관의 기가 막힌 유착, 여성차별을 아직도 공공연히 행하는 종교계, 정치권력과 야합하는 종교 권력, 종교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권보다 더 구린(?) 형태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의 타락 등 저자는 그동안 우리에게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더 종교계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더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 개혁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고 묻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주장하는 종교 법인법이 뒤틀린 우리 종교의 모습에 대한 개혁의 완성이라기 보다는 기틀이고, 그러한 기반을 통해 현재 사회적인 화두가 되고 있는 보편적인 복지를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계 50대 교회 중 그 절반이 대한민국에 있다!' 순전한 신앙인의 눈으로 교회의 부흥을 생각한다면 결코 부끄럽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 내면을 끄집어 내면 낼 수록 그 안에는 부끄러운 이면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리 성장한 교회를 향해 던지는 저자의 외침은 신앙인들의 마음이 무디어지지 않은 이상은 깊이 숙고하고 겸손히 반성-실제 신앙적으로는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할 제목들을 안겨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저자의 지적을 교회에 흠집을 내려는 사악한 자의 간교함 -분명 책의 내용 중 일부는 정통적(?)인 신앙인의 관점이나 기독교를 이해하는 입장에서가 아닌 신앙 밖에 있는 이로서 교회와 신앙인들의 모습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고 있다는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아닌, 있는 그대로 현재 우리의 종교가 안고 있는 변질되고 타락한 모습에 대한 따끔한 지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꿈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반성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는 '종교 법인법'을 뛰어 넘는 해결책과 변화된 교회, 처음의 모습을 회복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줄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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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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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리다와 해체주의    

  로고스(logos) 중심적이던 서양 철학을 근원적으로 비판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독자적인 사고방식을 해체주의라 일컫습니다.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서구 사상의 근간이 되었던 것들 모두를 상대화시켜 새로운 사상을 구축하려던 시도로서, 비판의 대상은 미리 주어진 것으로 존재하는 '전체성'이라는 사고방식과 그 배후에 있는 신 또는 로고스를 궁극적 존재로 삼는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입니다. 형이상학은 철학만이 아닌 서구 문화와 사상의 바탕이 되는 근간인데, 이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사고방식의 구축을 위해 맞닥뜨리는 해체의 대상은 사물과 말(언어), 존재와 표상, 중심과 주변 등의 형이상학적인 사고에 의해 지탱되어 온 모든 2원론적인 입장들입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자신의 해체주의에 대해서 여러 사상들처럼 깔끔하게 정리하거나 공표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가장 큰 이유는 해체주의가 품고 있는 근원적인 특징에서 유래하는 것 같습니다. 해체주의의 가장 큰 목적은 '기존의 권위, 기준에 대한 다시보기'로서 기존에 있었던 것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개선방향을 고민하는 기능적으로 존재하는 철학의 한 방식이지,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처럼 잘 정리되어 사회에 적용하고자 하는 사상적인 구조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상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결국 해체주의는 사상체계가 아닌 사유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기원(원전)과 대리보충이라는 의미도 해체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인 듯 한데, 기원(원전)이 순수하게 현전할 수는 없고, 우리가 기원을 대하는 방식은 문자를 통한 대리보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면에서 '순수한 기원은 없고 흔적(문자 또는 텍스트)의 기능만 있다'는 생각은 서양철학의 근간이 형이상학, 로고스에 대해 해체주의가 다가서는 주된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체주의 이러한 면을 상기한다면 이 책의 부재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에서 유령의 의미를 유추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눈앞에 나타나고 스쳐갔지만 결국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산산히 사라지는 유령처럼 해체주의가 대상으로 삼았던 것들은 그리 해체되어 버리겠지만 그에 상응하는 또 다른 체계나 대상이 해체주의를 통해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그리고 포스트 모던니즘

  구조주의란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개인의 행위나 인식 등을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총체적인 구조와 체계에 대한 탐구를 지향하는 사상적 경향을 일컫습니다. 세상에서 사물은 다른 사물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기 때문에 사물의 의미는 개별적으로 인식되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관계망 안에서 사물이 지니는 위치에 따라 규정되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전체 체계안에서 사물들의 관계를 기술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개개인의 행위나 인식을 포괄하고 그것들의 최종 성격을 규정하는 구조와 체계의 원리를 밝히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인간 주체에 앞선 '구조'의 강조는 실존주의 등의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대립하며 언어학에서 출발하여 문학, 인류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 거의 모든 인문사회학 분야에 확산되면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J. 데리다, M. 푸코로 대표되는데, 구조주의를 근간으로 그 안에서 나온 사상이라기 보다는 구조주의가 제기하는 철학적인 의미를 더 철저히 하려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를 중시한 나머지 관계라는 것을 무시했던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등장한 것이고, 존재의 가치를 상대화하여 모든 것을 관계성의 틀안에서 이해하려고만 했던 구조주의의 인간 경시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으로, 구조주의와 다르게 종교와 역사의 역할을 중요시합니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고대 이래의 철학 제도에 의문을 제기한 철저한 자기비판임과 동시에 정치, 윤리적 사상의 새로운 기획으로 이해되며, 포스트 모더니즘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탈근대주의)은 1960년대에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학생운동, 여성운동, 흑인민권운동, 제3세계운동 등의 사회운동과 전위예술, 그리고 후기 구조주의 사상에서 시작되어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 이념적 조류입니다. 서구에서 근대 혹은 모던(Modern) 시대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로 부터 시작한 이성 중심주의 시대를 일컫는 말로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을 주장하여 20세기 들어서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여러 도전을 받기 시작합니다. 포스트 모던니즘을 니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거친 후 J. 데리다, M. 푸코, J. 라캉에 이르러 시작됩니다. 철학에서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근대의 이성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탈이념, 광고와 패션에 의한 소비문화, 여성운동, 제3세계 운동 등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현상으로까지 확대되어 나타납니다 

 '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에 대하여  

  '평전'이라 함은 어떤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른 사람이 평가하여 쓴 전기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대했던 다양한 인물들을 다룬 위인전은 자서전을 제외한다면 대다수가 일종의 평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다루고 중요한 업적과 사상을 강조하는 식의 내용이 가장 일반적이겠지만, 쓰는 사람의 개성이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형식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대하다 보면 그러한 다양한 형식에서 더 벗어난 듯한 접근방식-난해함이라고 할 수도-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낯섦은 데리다의 삶을 따라 기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단선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가 삶속에서 형성해가는 사상적인 여정을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듯 합니다. 삶 자체보다는 그의 사상적 여정과 그와 관련된 작품과 작업을 중심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이 책의 독자에게 데리다와 해체주의, 그리고 그와 연관된 현대 철학사상에 대한 상당한 이해와 지식을 먼저 요구한다고 하겠습니다.  

 해체가 '이제껏 우리를 지배해온 전통적인 교의들의 허구성을 폭로하여 그것으로부터 남은 힘을 빼앗는 것이며, 기본적으로 체계나 정식화를 거부한다'고 이해하고, 사상의 체계라기보다는 하나의 사유방식으로서 인정한다면, 저자가 이 책을 쓰는 방식 - 데리다의 삶과 저작들을 따라서 그의 사상적 변화와 탐구에 담긴 그가 가진 문제의식과 열정에 찬 노력을 추적하는 방식-은 해체의 철학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해체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해체를 통해 새로운 체계를 세우거나 도식화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과 모든 기원은 문자를 통한 대리보충만이 가능할 뿐 현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그의 삶과 해체주의는 유령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도 그가 허무주의로 흐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것은 해체를 통해 얻어지는 것, 문자를 통한 대리보충을 통해서 도래하는 것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순수함이고 그것에 대한 열정을 일생동안 불사른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의 이해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이 물음표로 남는 것은 현대철학 사상에 대한 짧은 지식과 이러한 방식의 책읽기에 연습되는 않은 연유가 클 것입니다. 데리다와 해체주의,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후기 모더니즘 등에 대한 관련 지식을 앞에서 처럼 여기 저기를 뒤적여 정리하고 이해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 이 책이 저자가 데리다에 대해서 기울였던 포괄적인 고찰의 결과임을 인정한다면, 그런 노력은 주마간산의 효과도 되지 못할 듯 합니다. 결국 이 책은 어떤 이유에서든지간에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완전한 독서를 위해서는 데리다와 그의 사상에 대해 더 많은 대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숙제를 내게 남기는 그런 책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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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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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8년 세계를 강타했던 경제 위기는 국제 관계의 근간을 뒤흔들어 놓았다. 세계화의 흐름이 더 이상 모든 강대국에게 편익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또한 미국은 새로운 라이벌 국가의 등장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 세계는 기후 변화, 핵확산 같은 진정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문제들에 맞닥뜨려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국가간의 경쟁과 분열을 조장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세계는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던 국가간 협력의 시대를 끝내고, 경쟁과 분열이 지배하는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윈윈 세계는 제로섬 세계에 자리를 내주었다. -p8, 프롤로그 '다보스 2009'  

  2000년은 새천년을 맞이하는 기대를 담아 구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때였던 기억입니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나지 않은 2008년 발생한 경제위기는 그러한 새천년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무런 근거가 없었음을, 차라리 새로운 천년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지난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거대한 위험에 인류가 처해 있음을 확연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금융위기의 여파로 인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겐,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불안의 시대 또는 혼돈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불안의 시대'의 의미도 우리가 안고 사는 시대의 상황과 맞물려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서구인의 시각으로 쇠약해져 가는 서구 선진국의 입장에서 현재 세상의 변화를 읽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2008년 경제위기가 이러한 불안과 혼돈의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서로의 공통점을 간추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지난 30여년 동안의 세계 정치와 경제를 크게 전환의 시대, 낙관의 시대, 불안의 시대로 구분하고, 이 시대의 커다란 두 사건으로는 1978년 중국의 개방과 2008년 경제위기를 들고 있습니다. '전환의 시대'는 1978년 중국의 개방에서 시작하여 1991년 소련이 지도에서 사라지던 때까지의 시기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세계화를 수용하고 중국과 인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낙관의 시대'는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시작해서 2008년 국제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던 시기로, 저자는 세계화가 강대국간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윈윈 세계를 창출했던 시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안의 시대'는 2008년 경제위기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로 국제 정치가 더 위험하고 불안정한 쪽으로 흘러가며 제로섬 세계라는 위험한 논리로 빠져들 수 있는 불안 요인을 안고 있는 시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독자들이 저자의 시대 구분을 바라보면서 유의해야 할 점은 저자가 <파이낸셜 타임스>나 <이코노미스트>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지난 세기동안 세상을 지배하던 서구의 시각에서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를 불안스레(?)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라는 생각입니다.  

 아직까지는 미국이 제1의 강대국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서구 선진국들이 세계 질서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서구인의 시각에서는 아무래도 그러한 질서가 영구적으로 견고하지 못하고 균열이 가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러한 힘의 이동이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지난 30여년간의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정리하며 현시기를 불안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에도 그러한 시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구의 시각이 아닌 이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로 불리는 중국이나 브릭스 국가들,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가는 개발도상국들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불안정한 정세가 단순히 불안의 시대라기보다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시대로, 더 나아가서는 세계 정치경제의 주변부가 아닌 중심부로 나아가는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역동적이고 극적인 변화의 시대로 인식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가 저자에게는 불안의 시대로 불리겠지만, 우리에게는 긍정적인 변화를 담고 있는 새로운 도전의 시대, 기회의 시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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