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12
김호동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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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화 시대'나 '지구촌 시대'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한 일이 거의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지구상의 가고 싶은 곳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누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는 세계가 밀접하게 얽혀서 돌아가고 있음을, 그리고 현재를 사는 누구라도 그런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어렵지 않게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는 누구나 당연시하는 그런 사실들이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생각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이리 당연하게 여겨진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님을, 그런 사치는 과학과 통신과 교통 수단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후에나 가능한 일이였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시간과 공간적으로 '하나의 지구' 또는 '하나의 세계'라는 개념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인터넷이나 미디어의 발전, 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의 발전이 우리에게 안겨준 이동이나 정보 전달의 신속함에 함께 묻어오는 현실감이 중요한 이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의 생활 환경이 자연스럽게 그런 개념에 녹아들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세계사라는 측면에서도 그런 시간과 공간 개념의 확장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립된 각 지역의 개별적인 역사나 문명을 모아서 퍼즐 맞추기 식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세계(사)가  발전하고 상호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고립된 각 지역이 '상대적인 고립성을 극복하고 유기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사)'를 이루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시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이전과 그 이후는 분명 인류 역사에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통합된 세계(사)의 시작을 몽골제국의 출현에서 찾고 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수많은 나라와 문명, 제국들이 명멸하였던 역사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 즉 유라시아 각 지역이 그 이전의 상대적인 고립성을 극복하고 유기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몽골제국의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견해에 대해, 실크로드와 몽골제국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몽골제국 영향하에서 이루어진 세계지도와 세계사의 출현 과정을 독자들에게 차분히 설명하며 설득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장에서는 실크로드를 '동서간의 단순한 교역로'서의 단선적인 면에서 파악하지 않고, 동서간의 교류와 더불어 '남북으로 유목민과 농경민 사이에 이루어진 역동적인 관계'속에서 이해해야 함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세계사 전개과정의 한 축으로서의 유목민-일반적으로 '군사적으로는 강력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후진적'이라고 여겨진-에 대한 정당한 평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칭기스 칸에 의한 몽골제국의 탄생과 응징과 약탈을 주로하는 유목국가의 성격에서 벗어나 초원지대와 농경지대를 정복하여 지배하는 제국으로의 변화, 그리고 제국의 급격한 팽창의 결과로 빗어진 제국의 분열 -저자는 전통적인 몽골제국의 4개의 칸국으로의 분열이라는 관점을 수용하지 않고 각 울루스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긴 했지만 '대몽골 울루스'라는 제국적 연대감과 일체성을 보존하고 있는 울루스들의 복합체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단일한 정치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동서 대교류를 '팍스 몽골리카'로 표현하면서, 그러한 방대한 교류의 근간이 된 역참제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민족을 등용하고 각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고 소통을 위한 각 언어와 문자에 대한 사전 편찬 등을 통해서 유라시아 지역의 여러 전통들을 연결하고 통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은을 근간으로 한 화폐경제의 통합하여 원거리 교역과 여행이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졌고, 실제로 마르코 폴로, 랍반 사우마, 이븐 바투타 등의 동양과 서양으로의 대여행은 상대지역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4장은 세계사의 시작으로서의 몽골제국을 논하고 있는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등을 이루어 낸 '대항해 시대'의 시작은 팍스 몽골리카라는 몽골제국에 의한 동서 대교류에 편승하여 나타난 마르코 폴로 등의 '대여행 시대'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관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공간적인 차원에서 세계관의 확대를 의미하는 정확한 세계지도의 출현과정과 시간적인 의미에서의 세계관의 확대를 의미하는 라시드 앗 딘이 편찬한 '최초의 세계사' <집사>라는 책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유럽 또는 서양 중심적인 세계의 역사를 배우고 그러한 시각에서 씌여진 세계사를 당연시하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에는 그리스와 로마제국, 중세의 유럽과 신대륙의 발견, 근대의 산업혁명, 1차 및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근간은 모조리 서양 중심의 역사가 차지하고 있고, 중화를 기치로 삼는 중국의 역사마저도 세계사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변두리로 생각될 정도입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 또는 강한 자의 기록'이라는 냉정한 사실을 생각하면, 비록 한때 유라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현재는 겨우 나라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몽골제국의 역사를 아무도 세계사의 중심에 두고 합당한 대우를 해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자의 세계사의 시작으로서의 몽골제국의 역사에 대한 이 책의 고찰은 그리 경시되고 왜곡되어 온 인류 역사의 숨겨진 진실의 한 조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비록 저자가 말한 모두 다가 사실인 것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쌓이고 또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시각을 잃지 않은 역사의 진실을 더 많이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유럽을 질적으로 도약시켰지만, 그보다 훨씬 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던 정화 함대의 원정은 아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세계사의 중심축을 유럽에 넘겨주고 말았던 엇갈린 운명 또한, 몽골제국의 지배와 제국의 소멸 이후 출현한 유목국가들과의 충돌과정에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륙지향적인 정책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다는 분석은 몽골 제국이 남긴 세계사의 가장 큰 명암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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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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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이란 무엇인가'가 아닌 <왜 도덕인가>라는 제목 -원제는 Essay on Morality in politics-이 암시하고 있듯이, 이 책은 도덕의 근원을 탐구하거나 그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는 철학적인 책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도덕적 가치가 현대의 우리에게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 그리고 공동체나 정치 분야에서 다양한 도덕적 요구들을 아우르고 구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우리들의 자세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실용(?)적인 면을 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저자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서 다시 이 책을 대할 터인데, 읽기 전에 유념할 점은 두 책 모두 우리에게 '정의' 또는 '도덕'이라는 의미심장한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나 서술, 내용의 구성면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구슬을 잘 꿰어서 엮은 목걸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완성도나 전체적인 내용의 충실함 면에서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인기를 얻은 목걸이를 서둘러 모방해서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는 면이 있으니까요. 물론 도덕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부족한 면이 많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자에 비해서 많이 불편하고 어려움을 느낀 것은 분명 그런 부족함에서 기이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부 '도덕이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저자는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표출되는 문제들을 통해서 도덕적 가치가 우리의 실생활에 적극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복권사업을 시행하는 정부나 공공기관의 정책이 도박을 장려하는 것이나 매춘을 행하는 것과 도덕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는가?,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통한 소수인종의 특혜 또는 다수에 속하는 개인의 피해는 정당한가? 낙태와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가? 정치인의 거짓말을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는 것이가? 등을 통해서 다양한 가치관이 충돌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들여다보며 올바른 도덕적 판단과 실천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각 분야에서 대하게 되는 도덕적 현안들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실례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부 '도덕적 가치의 원류를 찾아서'에서는 밀의 공리주의에서 시작하여 칸트의 자유주의와 존 듀이 및 롤스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계보를 따라 그들의 사상에 기초한 자유주의 정치이론들을 소개하고 각각이 지닌 장점과 부족한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이론을 비판하는 저자의 관점은 시민의식과 시민의 덕목을 강조하고 공정한 시민사회의 생성을 역설하는 공동체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입니다. 3부 '자유와 공동체를 말하다'에서는 공리주의 이후 여러 모양의 자유주의를 견지해 온 미국의 정치가 활력을 잃고 외면당하는데는 사람들의 도덕적인 가치에 대한 갈증과 정치활동의 주축이 되는 시민사회와 공동체들이 파괴가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중요한 원인으로 경제의 팽창과 더불어 그것을 정부가 통제하지 못하고 경제 우선주의적인 사고에 매몰된 정치와 더불어 공공장소에서 도덕적/종교적 논의를 외면하는 정치의 가치 중립적 태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를 넘어선 공동체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데, 공적인 장소에서 도덕적 종교적 논의를 서로가 당당하게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도덕적인 가치가 소통하는 공적장소 및 공동체 의식의 회복, 공동체의 관점에서의 경제구조의 개혁 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대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적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서 논하는 이 책의 주제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저자가 우리에게 던졌던 공정성과 정의라는 주제보다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한 물음과 그에 대한 저자 나름의 고민이 담겨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유와 평등, 개인과 국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진보와 보수, 발전과 분배의 균형, 종교간의 갈등이나 지역간의 갈등 등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극심한 논쟁을 일으키고 분열과 후유증을 남기는 주제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그런 문제들의 저변에는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도덕적인 가치관의 차이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분명 이전의 정의에 대한 화두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는 면에서 반갑게 펼쳐볼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반가움과 무관하게 도덕적 가치나 도덕 자체를 논하는 근원적인 내용들에 들어서면, 이러한 주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무척이나 난해하다는, 한편으로는 저자가 말하는 용어들 자체를 이해하면서 따라 가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 처음 가졌던 반가움이 절반쯤은 절망(?)으로 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한 어려움은 아마도 내가 받았던 교육이나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깊이있는 배움과 생각을 나누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는 사실의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내용의 많은 부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통해서 저자가 말한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그리고 저자가 선호하는 공동체주의 등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각각이 견지하는 가치관의 기본적인 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의견대립과 갈등을 훨씬 합리적인 방식으로 서로간의 대화의 장을 통해서 헤쳐나갈 수 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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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 혜초, 천축 다섯 나라를 순례하다
혜초 지음, 지안 옮김 / 불광출판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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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스님 혜초가 법을 구하기 위하여 천축의 다섯 나라와 중앙 아시아, 그리고 아랍을 여행한 시기가 8세기라고 합니다. 기간은 4년여가 걸린 것으로 보고 있으며, 처음 출발한 뱃길 여행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여행은 도보로 하는 순례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현재의 더 나은 교통편과 숙박 등의 여건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지역을 4년여에 걸쳐서 순례한다는 것, 또는 4년이 아니라 며칠 만에 스님 혜초가 돌아보았던 지역을 현대적인 방식의 여행 수단을 통해서 동일하게 여행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그 시기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오로지 불법을 얻기 위해 나서서 순례의 길을 마무리한 것은 분명 대단한 용기와 각오, 그리고 인내의 시간들을 쌓아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사 시간의 초반에 우리 대부분은 불교의 전래에 대해서 배우고, 원효와 의상대사에 대해서 배우고, 또 하나 불교와 관련해서 빠지지 않는 부분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었습니다. 내용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 시기에 인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는 자체가 배우는 입장에서는 멋있어 보이고 흥미롭게 여겨졌던 기억입니다. 배울 당시에는 그런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지 그 내용이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가르치던 선생님들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주지도 않았고 찾아서 읽어보라 권하던 이도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늦게나마 이리 관심이 생겨 손에 들고 읽는 <왕오천축국전>은 학생때 제목만 듣고서 느꼈던 그런 경이로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지내온 순례의 길을 너무도 간결하고 담담하게 기록한 내용은 자신의 여행에 대한 단순한 기록 이상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도 만듭니다.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이리저리 꾸미기 보다는 자신이 보고 들을 것을 성실히 옮겨 적은 기록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이런 저런 여행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함과 색깔들을 생각한다면 초라하게도 느껴질 수 있겠지만, 혜초 스님은 자신의 여행을 나라의 위치와 국가의 문화나 풍속, 왕의 권력, 불교의 번성 유무, 대/소승 불교의 번성 유무 등에 대한 틀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만 치고 본다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혜초 스님이 그 몇줄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몇날 며칠을 더위 또는 추위속에,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노상을 헤매고 되돌아가는 고행의 시간을 거쳐야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기록 한 글자, 한 글자에는 단순히 책상 앞에서 써내려 간 화려한 문장이 가지지 못할 삶의 이면을 담고 있음을 기억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 한 가지, 이 기록이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레오에 의해서 돈황의 막고굴에서 발견되었고, <일체경음의>의 혜초전에 수록된 단어와 일치하는 단어가 있는 것을 근거로 <왕오천축국전>이라고 추정하기에 이른 것인라고 하는데, 실제 <일체경음의>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상/중/하권으로 나누어 실려 있고, <일체경음의>에 설명된 단어 중에서 이 필사본에 나오는 것이 17개 정도라고 하니, 적어도 우리가 지금 읽는,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무 단순한 기록이라고 실망하기도 하는 이 기록이 <왕오천축국전>의 온전한 내용이라기 보다는 극히 일부이거나 그보다는 전체 내용을 축약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한다면 더 방대한 원본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고, 간단한 축약본만 보고서 미리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시대에 몸을 아끼지 않고 법을 구하기 위해 천축을 찾아 나서는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스님 혜초의 용기와 삶에 대해서 더 집중하며 읽어 내려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달밤의 고향 길 바라보니 / 뜬 구름만 흩날리며 돌아가고 있네. / 편지라도 써서 구름 편에 부치고 싶건만 / 바람이 급해 구름은 돌아보지도 않는구나. /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는데 / 남의 나라 땅 서쪽 모퉁이에 와 그리워하네. / 더운 남쪽 천축은 기러기도 없으니 / 누가 고향의 숲을 향해 날아가려나. 

月夜瞻鄕路 浮雲颯颯歸 (월야첨향로 부운삽삽귀), 緘書參去便 風急不聽廻 (함서참거편 풍급부청회), 我國天岸北 他邦地角西 (아국천안북 타방지각서), 日南無有雁 誰爲向林飛 (일남무유안 수위향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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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생각의 한계 - 당신이 뭘 아는지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로버트 버튼 지음, 김미선 옮김 / 북스토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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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느껴지든지 간에, 확신은 의식적인 선택도 아니고 사고 과정조차도 아니다. 확신과 '우리가 뭘 아는지를 알고 있는' 유사한 상태들은 마치 사랑이나 분노처럼, 이성과 무관하게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뇌의 기제들로부터 일어난다. - p12 

 위의 글은 저자가 말하는 '확신' 또는 '안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이자 이 책의 중심 주제입니다.  즉 확신이나 신념이라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순수하게 신중하고, 논리적이고,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라, 겉보기와는 다르게 이성과는 무관한 무의식적인 뇌의 숨겨진 층에서의 은밀한(?) 작업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에 대해서 '안다' 또는 '확신한다'는 생각 -또는 느낌-을 가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믿듯이 어떤 확실한 증거나 과정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뇌의 기본작동 방식인 수많은 뉴런을 통한 입력이 뇌의 숨겨진 층이라고 할 수 있는 상호 작용에 대한 처리과정을 통해서 자각되는 것으로, 결국 모든 '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은 그러한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적인 과정을 통해서만이 생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확신이라는 것 또는 불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믿는 처음부터 끝까지 투명하게 알 수 있는 고유하고 순수한 이성적인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무의식의 과정이라는 불수의적인 감각을 통해서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한 개체의 유전적 소인이나 태어나서 주변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배우게(?) 된 여러 인자들에 의해 독특하게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으로, 그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순수하게 객관적인 앎이라든가, 결코 오류가 없는 진실 또는 이성이라는 것은  그 동안 사람들이 쌓아온 신화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저자는 생물학적인 우리의 신경망을 단순화하여 입력, 숨겨진 층, 출력의 과정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빛이 눈으로 들어가면 망막이 그 섬광을 전기 데이터로 바꾸어 시신경을 따라 뇌로 보내는 입력과정을  거치는데, 그 과정에서 데이터가 아무런 변형없이 순수하게 뇌에 도달하여 의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의 대기역으로 가서 그 동안의 모든 생물학적인 성향과 과거 경험들을 대변하는 문 뒤-의식의 뒤, 즉 무의식의 과정-에서 주어진 데이터에 대한 조사와 평가, 논의가 이루어진 뒤에 슬며시, 하지만 매끈하고 세련되게 합의된(?) 데이터가 의식의 세계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의 세계로 흘러들어온 데이터를 통해서 자기가 본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안다고 느끼게 되는데, 실제로 각각의 사람들이 가지는 신경망의 구조는 그 사람의 유전적인 소인과 환경 요인에 의해서 차이가 나고, 그 차이라는 것은 결국 문 뒤에서 작용하는 숨겨진 층 -무의식의 영역-이 주어진 데이터를 처리하는 방식의 차이를 낳게 되므로, 결국 우리가 안다는 것은 아주 객관적인 것,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각 개인의 앎의 차이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같은 빨간 색이라도 각 개인이 동일한 색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것, 같은 글을 읽고 그림을 보고 노래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각 개인이 느끼는 감각이 천차만별일 수 밖에 없고, 그 영역을 더 확장해서 생각한다면 종교와 과학간의 대립, 이성과 직관간의 대립 등도 결국은 그러한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이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껴 두번째 읽어보지만, 기본적인 개념들을 어느정도 알 듯하다가도, 더 읽어가다보면 어느 순간에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엉켜버리는 듯한 느낌을 자주 가질 수 밖에 없었었습니다. 이 책이 말하는 개념들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내용들은 뇌의 작동방식에 대한 생물학적인 이해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에 덧붙여 '인지부조화, 신경망과 인공지능, 모듈과 창발, 학습과 기억, 보상과 중독, 본성과 양육, 의식과 무의식' 등의 인지과학의 영역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가 대면하는 신앙과 과학, 객관과 주관, 이성과 직관 등에 대한 창의적인 사고를 적용할 만한 능력까지 요구하는데서 오는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내용을 완전하게 이해하는데 어령움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저자가 독자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각시키는 것이지 않을는지...... '확실성은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불쾌함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개연성이라는 언어와 도구를 주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의견이 맞을 가능성에 따라 그 의견을 분석하고 순위를 매기는 방법들이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200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데이비드 그로스의 '지식의 가장 중요한 산물은 무지다'는 말....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 다시 책의 주제로 돌아와서 '안다, 맞다, 확신한다, 확실하다는 느낌들은 신중한 결론도 의식적인 선택도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정신적인 감각들일 뿐이다.'....'당신이 무엇을 아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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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법칙 민음사 모던 클래식 35
러셀 뱅크스 지음, 안명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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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그건 아마도 내 모습이 아니었을까. 로즈 자매와 아이맨과, 플래츠버그의 스쿨버스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게 되고, 그 후에 개미 농장과 아캄퐁의 밭에서 아이맨과 지낸 날들을 통해 자신과 인생에 대해 배운 그 모든 것들이 없었다면 말이다. 건장한 악당 브루스 역시 내가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세이블의 불속에서 나를 구하려다 죽었고 그것 역시 내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사랑하겠다고 선택한 사람들은 세상에 오직 이 세 사람뿐이었는데, 모두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날 아침 모베이에서 마지막으로 러스를 본 날, 나는 귀여운 로즈 자매와 아이맨과 브루스가 내게 큰 재산을 남겨 주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나는 그 재산을 야금야금 꺼내 쓰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p470 

 이야기의 마지막에, 자신을 찾아 자메이카에 온 친구 러스가 이브닝스타라는 여인의 유혹에 끌려 그녀의 저택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는 독백입니다. 겉은 번지르하지만 뒤로는 아동 포르노를 만드는 일을 하던 버스터 브라운으로부터 구해서 집으로 돌려보낸 연약한 여자아이 로즈, 거친 폭주족이었지만 불길 속에서 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던 악당(?) 브루스, 그리고 방황의 끝에 갈 곳 없는 본을 보살피고 지켜보면서 혼자 설 수 있도록 인도했던 아이맨..... 본이 사랑한다는 세 사람은 모두가 세상에서 연약하거나 어두운 구석에 몰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데 본은 자신의 방황의 끝에서 친아버지의 연인이었던 이브닝스타의 물질적, 성적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자신만의 길을 가기 위해 굳은 발걸음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그 세 사람 덕분이라고, 그들이 함께하는 동안에 보여주었던 삶에서 배운 것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도, 자신의 친부모나 할머니도, 번지르한 옷을 입고 달변을 자랑하던 버스터 브라운 같은 사람이나 대학까지 다녔다고 하면서도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삶을 침식당하고 만 리처드나 제임스 형제와 같이 세상의 양지에 조금 더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포르노 제작자의 손에 이끌려 다니며 혹사 당하였지만 본에게 맑은 영혼의 밑바닥을 열어 보여 주었던 어린 소녀, 거칠게 세상을 대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인간애를 보여주었던 폭주족 대장 브루스, 그리고 자메이카에서 이주 노동자로 미국으로 건너와 대열에서 이탈하여 버려진 스쿨버스에서 숨어지내지만 세상을 외면하지도 다른 사람을 억지로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고 함께 동행해 주었던 아이맨과 같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을 음지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이 방황에 마침표를 찍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평생 되새기며 살아갈 수 있는 재산을 남겨 주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모나 주위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의도하고 만들어 놓은 삶이 아닌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된 것..... 아마도 그런 종류의 깨달음을 본은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거리에서 생활하면서 얻은 삶의 법칙으로서 말입니다.  

 물론 자신의 삶을 세상의 음습한 곳으로 직접 끌고 간 것은 본 자신이지만, 그를 그러한 나락으로 밀어 넣은 이들 중 하나는 그를 가장 잘 이해하고 품어 안았어야 할 그의 어머니였고, 십대의 어린 영혼에 결정적인 생채기를 낸 것은 어머니의 새 남편인 그의 양아버지입니다. 본이 반항적인 아이가 되고 마약을 마다하지 않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양아버지 켄의 성적학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겉으로 보이는 본의 생활태도는 누가 봐도 불량스런 청소년이었고,  그의 가족은 그런 주인공을 이해하거나 그 방황의 이면을 보듬어 주려는 따뜻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겉모습대로 그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행은 아이러니하게도 버스터 브라운 같은 사람을 통해서 겉모습의 허황됨을 비웃고, 본이 사랑한다는 세 사람을 통해서 겉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필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는 것은 본이 아이맨을 따라 자메이카로 건너가서 자신의 친아버지를 만난 뒤에도 여실히 증명됩니다. 거대한 저택과 물질적 풍요와 여유로움을 가진 이브닝스타와 그의 손님들이 보여주는 삶과 마약과 여자에 취해서 사는 친아버지의 모습은 육체안에 지탱되어 있어야 할 내면세계가 붕괴된 사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본은 자신이 일하게 된 요트의 손님으로 온 부부의 아이 조시와 레이첼의 모습에서 자신의 독특한 영혼의 색깔을 잃고 어른들의 소유물이 되어버린 듯한 아이들의 삶을 느끼면서 비로소 자신이 집을 나와 길거리를 헤매면서 배운 소중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의 별들 속에 로즈 자매 별자리, 사자와 아이맨 자리, 그리고 브루스를 위한 애디론댁 아이언 자리를 그려 만들고, 그 별들이 지는 것을 바라보며 행복해 합니다. '아무리 두렵고 당황스런 상황에 처하더라도..... 밤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세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기'에, '그러면 가슴은 ... 그들에 대한 사랑으로 부풀어 오르고... 더 강해지고 ... 정신은 더 맑아질 것'이기에.....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을 때, 아이맨에게 물어서..... 자신이 원하는 전부'인 '본, 네게 달렸어'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기에..... 

 '본, 네게 달렸어', 아이맨을 기억하며 본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결국 삶의 어느 순간에는 이러한 이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세상의 어두운 뒷골목과 낮게 여겨지는 곳을 헤맨 본이 별을 보며 그러한 깨달음을 완성하지만, 본이 보트에서 가엾게 여기며 바라보았던 조시와 레이첼도 그들만의 삶의 모퉁이 어디에선가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청소년기의 방황을 주인공 본처럼 거리를 헤매며 겪는 이들도 있겠지만, 더 많은 아이들은 학교와 집을 오가면서 겉보기에는 조용하게 보내고 있을 것이고, 그런 아이들의 모습은 본이 보기에는 아마도 조시나 레이첼과 비슷해 보이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게는 그러한 주인공의 시선에 대한 불편함이 몇몇 어두운 부분과 함께 이 소설에 대해 명쾌하게 모두를 공감할 수는 없는 이유가 되는 듯 합니다. 삶을 단련하고 긍정할 수 있는 건강함은 어두운 곳의 이면에도 숨어 있겠지만 대낮처럼 밝다고 생각되는 곳에도 무궁히 담겨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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