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제 - 700년의 역사, 잃어버린 왕국!
대백제 다큐멘터리 제작팀 엮음 / 차림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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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이라고 했던가? 역사와 유물속에 언뜻언뜻 비추이는 사라진 백제의 흔적은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었다고 말하는 듯 하지만, 실제 우리가 배운 역사속의 백제는 한반도의 남서부를 700여년간 지배하고 있다가 쇠망한 나라의 쇠락한 모습 뿐인 듯 합니다. 누군가는 역사를 논하면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멋진 표현으로 역사의 기록을 옹호했지만, 백제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현재의 내가 과거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곧 승리한 자 또는 살아남은 자의 입장에서 과거를 해석한다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으니, 결국 쇠망하여 살아남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진 왕국과 문화는 그 영광과 찬란함에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는 동안 흔적마저도 스러져버리는 것이 당연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과거의 영광과 찬란함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수백여년의 역사가 쌓이는 동안 승자의 역사 속에는 그 영향의 흔적보다는 새로이 발전시킨 자신의 영광과 찬란함이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일 터이니 이 또한 과거의 쇠망해버린 왕국의 영광과 찬란함을 담은 이야기가 들어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이유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대한 대륙을 향해 웅대한 기상을 펼쳤던 고구려,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신라의 역사에 가려져 삼국의 역사 가운데 유독 왜소하게 쪼그라진 작은 왕국, 그런 식의 백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역사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의 비운을 그대로 느끼게 만듭니다. 금동대향로의 찬란함, 익산 미륵사지터의 웅대함, 그리고 역사의 구석구석에 조그맣게 기록되어 전해져 오는 중국 대륙과 일본을 아울렀던 해상왕국의 흔적들은 백제가 그런 왜소한 나라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공적인 역사의 마당에서는 여전히 백제는 한반도의 남서부에서 잠시 번영하다가 사라진 작은 왕국의 역사일 뿐이니 말입니다. 

 이 책은 SBS, 대전방송 역사다큐멘터리 <대백제> 5부작의 방송 내용을 정리 보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단순하게 받아 들인 역사 속의 백제의 모습이 아니라, 찬란한 유물속에 담겨있는 '동아시아 최고의 선진 문물을 가진 문화강국'으로서의 백제와 역사서 곳곳에 기록되어 있는 '한반도는 물론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까지 진출한 거대한 고대' 왕국으로서의 백제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비록 잊혀져 버리기는 하였지만 또한 역사에 흔적이 남겨져 있음을 기대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희미하게나마 흔적으로 남은 백제의 참모습을 찾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서문에 이러한 작업의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 고대사에 대한 사료 자체가 거의 존재치 않는다는 사실'과 '몇몇 남아있는 사료와 역사서들은 ..... 너무 어렵기 때문에 현대적인 -적절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곧 백제가 우리에게 그리 왜소하게 인식되고 말았던 이유이기도 할 듯 합니다. 어찌보면 역사의 기록보다는 무령왕릉이나 미륵사지의 석탑의 발굴, 금동대향로의 발굴 등을 통해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 백제의 유물들이 우리에게 더 강력하게 백제라는 나라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작고 왜소한 나라가 아니었음을 일깨우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유물들이 그 찬란함을 통해서 말하는 것은 승리자 또는 살아남은 자의 기록에 머물러 백제의 역사를 그리 작게만 그리지 말고, 지속적으로 발굴되는 유물들과 백제인 자신의 기록과 현재까지 남은 흔적들을 꾸준히 찾아서 고대 왕국 대백제 모습을 웅대하게 그려보라는, 자신들의 비운을 위로하고 참모습을 찾게 도와달라는 초대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조각조각 흩어진 역사의 조각을 연결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겠지요. 

 책의 내용의 바탕이 된 것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 방송이기에, 아마도 역사적인 정확성이나 합의된 내용보다는 최대한 개연성이 있는 강력하고 찬란했던 백제의 모습에 대해서 그리려고 노력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대 백제의 영토와 영향력에 대해서, 그리고 각종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에 대해서도, 또한 백제가 남긴 유물과 그 영향력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되는 일본의 기록과 문화와 천황가의 역사들에 대해서도, <대백제>라는 제목에서 걸맞게 어떤 기록이나 사실들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개연성을 가지고 백제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백제 역사의 실체에는 미처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리고 공적인 역사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왕국 백제의 광대함과 찬란함이 분명 숨겨져 있으리라는 기대를 접을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간이 더 지나 광활한 왕국으로 여기저기 기록된 백제의 모습을 환기시키는더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고, 또 다른 기록들을 더 찾을 수 있다면 그동안 우리가 백제의 역사에 대해 그리했듯이 이 책의 내용도 대백제의 실제 모습에 그렇게 관대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야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이러한 기대가 단순한 관심으로 끝나지 않고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책의 내용이 전문적인 역사서로서의 세밀함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읽는 이에게 잃어버린 왕국 대백제의 큰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백제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남긴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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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
지허 지음, 견동한 그림 / 불광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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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사에서의 동안거 기간 동안의 선방 생활을 기록한 이 책이 우연찮게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책 소개를 보면서 언젠가 들은 듯한 기억 저편의 어렴풋한 그림자가 친근함으로 다가왔습니다.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 읽어보았던 책은 아닌데..... 어디선가 소개하는 글을 읽었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아니면 나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냥 막연한 기억의 장난일 수도 있겠습니다. 겨울 세 달여 동안의 선방생활을 스물 세편으로 엮어낸 글들은, 우리 역사와 문화의 굵은 한 뿌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불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바이지만, 실제 내용보다는 표면적인 외양만을 조금 알고 있는 내게는 상당히 색다른 세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잠시 들러 대웅전을 둘러보고 주변의 국보나 보물 등의 문화재를 찾아보고 나면 사찰의 중요한 것은 다 보았다고 생각하며 되돌아 나오던 내가, 사찰 안에서의 스님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해탈, 성불, 열반, 그리고 그러한 각성의 길에 들어서고 도를 이루기 위해서 정진하는 스님들의 생활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감각도 느낌도 없이 막연한 신비(?)로움 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저자의  글을 통해서 소개되는 선방의 생활을 들여다 보면서 문득 그들의 삶의 감추인 단면들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됩니다. 그런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화두'를 붙들고 추상같은 의지로 고행의 시간을 채워가는 모습들 중간중간에 끼어드는 스님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들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이 구도자로서의 깊은 사색과 성찰을 이루고자 수행의 시간을 갖는 스님들의 노력을 깍아내리지는 않는 것은 그들의 중심에 있는 수행을 통한 각성과 구도에의 의지를 온연히 느끼고 인정하기 때문이겠지요. 세상의 아무런 장식이나 꾸밈도 없이 세상에 온 그대로의 모습으로 구도의 길을 나선 그들의 모습은, 바쁜 일상 속에서 조용함을 찾으며 가끔씩 우리가 바라던 모습의 한조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나서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모습이지만, 읽는 이의 내면에 세속에 물들지 않은 신선한 바람 한줄기 스쳐가게 만들어 잠든 내면을 흔들어 깨우기에 충분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지전능하다는 신을 동경하고 메시아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그런 시일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은 자유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절대자의 괴뢰, 신의 노예, 그러한 천국이 있다면 차라리 나는 고통스러워도 자유로운 지옥을 택하겠습니다. 그러한 극락이 있다면 나는 차라리 도망쳐 나와 끝없는 업고의 길을 배회하렵니다." -p110-  

 나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책의 말미에 나오는 위의 저자의 언급이 상당한 걸림이 되는 구절일 것 같습니다.  '전지전능하다는 신을 동경하고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다른 말이 곧 '크리스챤'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물론 동료 스님과의 열반에 대한 이야기 중에 불자로서 불자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지만, 저자의 기독교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와 완고한 판단이 느껴지는 부분이기에 마음에 상당히 걸리는 구절이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행과 구도의 결과물로 얻어지는 해탈이나 자유로움을 이야기한다면 분명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꼭두각시로 보일 수 있겠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 안에서의 은혜와 자유를 인정한다면 불교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쓸데없이 자기 의를 세우는 헛된 노력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입니다. 상대의 종교와 가치관에 대한 열린 마음과 관심, 배려가 없이 오로지 자신의 교리에만 눈멀었을 때의 모습이, 얼마전의 젊은 기독인들이 물의를 일으켰던 봉은사 땅밟기와 같은 사건,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테러, 종교에 의한 살인이나 인종청소 등의 모습일 것입니다. 종교에서의 교리란 상대에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부처님은 자비를 이야기 하셨고, 예수님은 사랑을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서로에게 먼저 앞세워야 할 것은 자비와 사랑 안에서의 관심과 배려, 그리고 포용이 아닐까 합니다. 정치계와 불교계의 갈등이 깊어가고, 대통령의 종교로 인해 그러한 갈등이 불교와 기독교의 갈등으로 여겨지는 현재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내 것을 주장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듯한 우리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위의 구절이 더욱더 안타깝게 여겨지는 시간입니다. 물론 이러한 언급은 책의 전체 내용과는 큰 상관이 없는 지극히 지엽적인 부분이기는 하나, 종교와 종교의 마주봄이라는 관점에서는 아마도 이 책 전부보다도 더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에서 붙여보는 사족같은 감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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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리처드 포스터 지음, 정성묵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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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에는 교회에 가고, 예배와 기도, 찬양을 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하나님과 자신만의 개인적인 스토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사소할 수도 있고, 생사를 가르게 된 중차대한 문제였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간직하게 된 그러한 스토리는 한 사람의 신앙인을 지탱해주고, 믿음에서 멀어졌을 때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터닝 포인트가 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초기에 선배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함을 강조했었는데, 신앙의 처음 반석을 세우는데 그러한 개인적인 만남 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필요함을 말한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을 수 없어 매번 곁길로 가기 일쑤이고,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에 했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계2:4-5a)는 책망이 곧 내게 주어지는 책망이 되곤 합니다. 결국 신앙의 반석을 멋지게 세웠지만, 그 반석위에 멋지게 집을 짓지 못하고, 어찌할 바 몰라 짓다가 허물곤 하는 것이 많은 신앙인들의 모습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은 바로 신앙의 여정에서 자신의 집을 짓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의미와 그리 살기 위해 필요한 영적 훈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멋진 신앙의 집을 짓기 위한 뼈대와 벽을 견고히 세울 재료들, 그리고 내부를 내실있고 멋지게 장식할 가구들과 장식품들..... 그것이 무엇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서 집을 지을 것인지를 안내해 주는 안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크리스천은 성경을 먹고 산다. 인간의 몸이 음식에서 영양분을 얻는다면 거룩한 공동체는 성경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크리스천은 단지 성경을 배우거나 연구하거나 사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우리 삶 속에서 소화시킨다. 다시 말해, 성경은 사랑의 행위, 냉수 한 그릇, 온 세상을 향한 선교, 치유와 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행하는 정의, 아버지를 향해 뻗은 예배의 손길, 아들과 함께 씻긴 발로 변형된다' -유진 피터슨, <이 책을 먹어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뼈대는 성경 말씀임을 분명히 하는 말입니다. 영적 훈련의 기본은 바로 성경을 먹는 것, 배우거나 연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소화시켜서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성경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자신의 삶에서 체험하기 위한 자세와 훈련-노력이 아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러한 훈련의 주권을 우리 자신이 가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시는 것이라는 겸손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고 '나와 함께 하려느냐?'는 하나님의 초대에 믿음으로 응하는 일련의 과정에 필요한 영적훈련의 방법과 과정들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뼈대에 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고, 집 내부를 적절한 가구와 장식품들로 채우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할 때, 기도를 드릴 때, 찬송을 드리거나 감사를 드릴 때, 그 자리에 내 자신만 있고 정작 하나님이 소외될 때가 없는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의 참뜻이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서 내 자신을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책을 읽는 동안 내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서 많은 부끄러움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군더더기가 붙은 것을, 말씀과 어긋나는 많은 상황들을 어쩔 수 없는 삶의 방식이라고 합리화시키고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조그맣게 쌓은 성경지식과 신앙의 연수를 은연중에 내 신앙생활의 척도로 삼고 있는 모습이 비치기도 합니다. 내 삶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들어와 함께 거하시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 민감한 삶이 되기를 훈련해야 할 이유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나와 함께 하겠느냐?"는 하나님의 초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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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 - 전 세계 고난의 현장에서 만난 은혜의 이야기들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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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을 할 때 흔히 사람들이 묻는 것은 하나님이 왜 더 강한 힘으로 더 직접 개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그토록 엄청난 해를 입히도록 그냥 두는가? 왜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가? 몇 가지 가능한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과거에는 강하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셨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오래가는 신앙이 생기지 않았다. 지상의 강국들이 배운 것처럼, 힘과 자유는 껄끄러운 짝이며 하나를 강조하면 반드시 다른 하나가 작아지게 되어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자유 쪽으로 기우신다. 그래도 결국 우리는 확실한 답은 모른다. 하나님의 최종 계획을 잠깐씩 언뜻 볼 수 있을 뿐이다. - p347~348, 에필로그 '하나님이 없는게 무슨 소용인가'에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식의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창조주를 믿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묻고 그 대답을 구하려고 노력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분명히 악하고 부도덕한 행위들 앞에서,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전쟁의 소식과 폭력과 살인을 알리는 소식들 속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겪는 크고 작은 불행이나 아픔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미를 묻고 그 해답을 찾으려고는 합니다. 아주 단순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상황에서 가끔씩은 하나님이 악행의 현장에 나타나셔서 사람들이 눈에 볼수 있게 강력한 징벌을 보이셨으면 좋겠고 내가 어려울 때 나타나셔서 문제를 멋지게 해결해 주시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끔씩이라도 성경에 나타났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던 기적을 내 가족이나 벗들에게도 베풀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한다면 아마도 신앙생활은 훨씬 더 편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훨씬 수월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이젠 그런 모습으로는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군대 삼으셨던 것처럼 자신의 육적인 군대를 내세워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나타내시지도 않으시고,  또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셨던 현존하는 불기둥이나 구름기둥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때보다 더 많은 순간들을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십니까?' 또는 저자의 질문처럼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그때-구약의 시대-처럼 우리에게 응답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하시는 듯이 그리 곁에 조용히 기다리며 지켜보시고 계실 뿐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열 편의 이야기와 강연들 속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얻은 이들의 모습이 언뜻 언뜻 비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아마도 저자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런 만남을 경험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 나만의 스토리가 생긴다는 것, 그것이 곧 인격적인 만남의 일부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중요한 부분은 아닐는지..... 

 요즈음은 우리에게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중에 인기있는(?) 주제 중의 하나가 과학주의를 바탕으로 창조주의 존재나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적인 서적들입니다.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책들이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관심을 끌고는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읽었던 행크 데이비스의 '양복을 입은  원시인' 역시 그런 흐름의 하나를 이루는 내용이었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보았을 때, 최근의 추세는 과학으로 증명 불가한 미신이나 비합리성, 또는 뇌의 일부 영역에 국한된 부위가 자극되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으로 일축하는 경향인 듯 합니다. 결국은 영적인 면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오로지 남겨진 물질적인 세상에서 종교의 의미를 찾고서는 그곳에는 관련된 흔적은 있지만 창조주의 존재에 대한 증명 가능한 사실은 없다고 말하고는 합니다. 다만 인간의 나약함이나 비합리성, 또는 뇌에서 종교나 신과 관련된 영역이 활성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며 종교와 창조주의 의미 또는 가치를 부정해 버리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또한 이성적인 사람들의 자세로 강요(?)되곤 합니다. 또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부정적인 인종차별, 전쟁과 살인 등을 이야기하지만, 창조주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억압하고 사상을 강요하던 시절을 이야기하지만, 그 교회가 다른 면에서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등, 인권을 실현시켜주었고 아픔을 싸메고 더 나은 삶으로 인도했던 이야기들은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해 버리고는 합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화해나 성매매 여성들의 회복,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했던 총기난사 사건의 치유 등은 바로 과학을 등에 업고 종교를 공격하던 이들에게 대한 믿는 이들의 대답의 일부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를 조용히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신앙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저자는 열 가지 사례들을 통해 자신이 체험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 예수님이 보이셨던 삶의 모범이 실천된 곳, 그리고 용서와 화해가 넘치고 은혜와 사랑이 물같이 흐르던 곳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총기 난사의 공포에 떨고 있던 버지니아 공대와 공산 세력의 억압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흥왕해 가는 중국의 가정교회, 가족들에게서마저 버림받은 성매매 여성들의 회복 모임과 C.S. 루이스를 삶을 기리던 케임브리지의 모임, 엄격한 규율을 가진 온실 속의 신학교 학생들과 인종차별과 학살의 벽을 넘어 화해를 이룬 남아공의 현장, 지역사회를 섬기는 멤피스의 교회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중동의 사역자들, 그리고 시카고의 중독자들의 삶과 인도의 불가촉 천민들이 삶속에 넘쳐 흐르는 은혜와 사랑,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르는 정의와 공의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손길..... 바로 매일의 삶속에서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의 일부일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이 깨어 있어서 교회가 '죄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빚이 더 필요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생각이 다른 사람, 압제자와 압제받는 사람 모두에게 언제라도 은혜가 흘러나가는 곳, (교회가) 바로 그런 곳으로 소문'이 나게 되고, 그러한 은혜의 체험이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면 될수록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한 더 많은 대답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중독자들과 성매매여성들을 인터뷰하면서 삶을 지배하고 파멸시키는 악의 위력과 그 악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수십 편의 가슴 절절한 사연을 들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회의론자들도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한때 밑바닥까지 추락했으나 이제 자기를 구원해 준 은혜가 하나님한테서 왔다고 믿는 사람들-의 변화의 사연들을 들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그분은 나를 성노예와 마약중독에서 건져내셨다." '하나님은 내게 삶을 되찾아주셨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삶의 변화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겠지만, 한나절 동안 그런 이야기를 여남은 편씩 듣노라면 이성적인 논거가 곧잘 무색해진다. 예수님은 신학적 '증거'를 제시하신 적이 거의 없다. 그냥 열심히 삶을 변화시키셨을 뿐이다. -p345, 에필로그 '하나님이 없는 게 무슨 소용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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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입은 원시인 - 진화심리학으로 바라본 인간의 비이성과 원시 논리
행크 데이비스 지음, 김소희 옮김 / 지와사랑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양복을 입은 원시인'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 책의 주된 논점은 현대인들이 과학의 발전으로 다양한 풍요를 누리면서도 삶의 중요한 부분에서는 여전히 과학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미신이나 근거없는 믿음, 종교 등을 떨쳐내버리지 못하고 그 영향력 아래서 삶의 평온함을 구걸(?)하고 있다는 주장에서 시작합니다. 인류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진화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외모와 내면을 모두 갖추게 되었지만, 발전한 현대의 과학적 성취나 환경을 따라가지 못한 인간 내면의 부적응이 고스란히 남아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신을 이야기하고, 종교적인 믿음의 중요성을 굳게 신봉하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점을 치거나 기도를 올리는 현대인의 모습을 저자는 원시인류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던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발전시킨 내적인 메카니즘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것을 '원시 논리'라고 정의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특정한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거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외부의 힘에 의해 일어났다고 믿고 자동적으로 그 인과관계를 탐지하려는 자세, 심리학에서 인지적 지름길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발견법 (Heuristics)', 둥근 지구를 우리의 지각이 편평하게 느끼는 것과 같은 어쩔 수 없는 지각의 오류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 일상적인 언어생활이나 삶속에 숨어있는 미신의 흔적 - 어려운 일에서 벗어났을 때 무심코 내뱉는 '신이여 감사합니다' 등-, 출판계를 강타했던 '시크릿' 열풍 등이 저자가 열거하는 '우리 안의 원시 논리'의 모습들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러한 원시 논리의 영향으로 인한 우리 삶의 사소한 왜곡에서 전쟁에 이르기까지, 원시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폐해를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방법에 대한 교육과 회의주의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모든 사물을 의인화 시키는 경향이나 우리에게 인기를 얻은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창조 신화 등을 우리 안에 내재한 원시 논리의 영향아래 나타난 자연스런 그늘이라고 말하는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먼저는 저자 자신이 독자 서문에서 언급한 '진화 심리학'이고,  그 다음은 진화론을 근간으로 하는 '과학주의', 그리고 좀더 범위를 확장한다면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과 종교를 비롯해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해 낼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미신 또는 비합리적인 것, 원시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자세는 분명 세상을 물질로만 이루어진 곳으로 판단하고, 과학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설명해 낼 수 있다는 확신속에, 심리학에 진화라는 관점을 도입해서 실증적인 과학의 뼈대를 구축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현대 과학이 인간의 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밝혀내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인간의 마음이나 신의 영역에 대한 것들까지 어느정도 과학적인 설명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하는 글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저자의 그러한 모습은 과학 또는 자신이 말하는 진화 심리학에 대한 자신감 또는 당당함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원시 논리에 사로잡힌 현대인에 대한 설명과 그것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관점에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목적성이 없다는 것, 즉 고유한 인격체로서의 존재 의미가 없다는 것도 함께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영혼과 정신, 신과 초자연적인 능력 등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것들은 미신적인 믿음 또는 원시적인 인간의 잔재일 뿐이라는 주장에는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의미를 느끼는 스토리를 빼버리고, 무미건조한 물질의 덩어리만 남겨 놓는 것과 같습니다. 저자도 인정하듯이 이러한 주장의 바탕위에 본성을 뛰어넘고 원시논리를 극복하라는 설득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유와 설명을 찾고 자신에게 닥친 행운과 불행에 대한 초자연적인 설명을 구하려는 인간 본성에 확연히 역행하는 것이기에, 여기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과 인간 본성이 가장 강렬하게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러한 충돌의 가장 심대한 싸움터는 창조론과 무신론이 맞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다른 미신이나 현상들도 원시 논리의 범주에 넣어서 설명하고는 있지만,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미신이라고 지적하며 극복하기를 주장하는 부분은 종교와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무신론을 주창하는 책들의 뒤를 잇고 있다고 감히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의 원시논리에 대한 주장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고, 원시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간이 성공적으로 생존해 있다는 점이나 저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믿음의 과학적인 근거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의문이 남는 것이 사실이지만, 독자로서 느끼는 가장 큰 논점은 저자의 주장이 자연적이거나 물리적인 현상자체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인 접근을 배제하고 과학주의에 입각한 유물론적인 인간관에 근거한 가치판단을 담고 있다는 사실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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