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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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참으로 드문 환영을 보았어. 꿈을 꾸었는데, 인간의 머리로는 그게 무슨 꿈인지 말 못해. 그 꿈을 설명하려 든다면 인간은 나귀 같은 바보일 뿐이야. 내 생각엔 내가 - 누구도 그게 뭔지 말 못해. 내 생각엔 내가 그리고 내 생각엔 내게 - 하지만 인간은 얼룩옷 입은 바보일 뿐이야, 내게 있던 걸 말해 주려 한다면 말이야. 내 꿈이 뭐였는지는 인간의 눈으로 듣지도, 인간의 귀로 보지도, 인간의 손으로 맛볼 수도, 혀로 이해할 수도, 마음으로 말할 수도 없어. 피터 퀸스에게 이 꿈으로 가요 하나를 짓도록 해야겠어. 제목은 '바틈의 꿈'이 될 거야, 왜냐하면 거기에 바틈은 없으니까..... 4막 1장, 203~215행, '바틈'의 대사 중에서  

 문득 장자의 호접몽을 생각하게 하는 4막에서의 바틈의 대사를 보면서, 이 연극에서 가장 꿈다운 꿈을 꾼 인물이 바로 바틈이라는 생각에 듭니다. 나귀의 머리를 하고서도-요정 퍽의 장난에 의한 것- 우연에 의한 것이지만, 요정의 여왕 타타니아의 사랑을 받게 되었으니, 불행이라기 보다는 행복한 시간이었고, 정말로 꿈같은 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숲속에서의 꿈같은 하룻밤을 통해서 맺어지는 허미아와 라이샌더, 헬레나와 드미트리우스는 요정의 왕 오베론과 퍽의 실수-또는 간섭-으로 인해서 실제 사랑하는 대상이 바뀌는 관계의 변화를 경험하지만, 결국은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결혼식에 초청되어 함께 결혼식을 올리고 위태롭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사랑이 숲속에서의 혼란스런 꿈을 낳았고 그 꿈은 더 아름다운 현실을 낳았다고 할 수 있으니, 그들은 꿈같은 현실을 경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타타니아의 사랑을 받은 바틈은 그야말로 신비로운 사랑의 약초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던 일장춘몽을 꾼 셈입니다. 진짜 바틈은 없고, 나귀 머리를 한 꿈속의 바틈과 현실 속에서는 영원히 사라져버린 타타니아와 요정들이 만들어 낸 '바틈의 꿈'......  그것은 현실에서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꿈같은 이야기라서 꿈같은 노래 가락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나마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바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꿈과 현실이 서로를 넘나드는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아마도 셰익스피어가 말하고자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우리가 겪는 사랑의 여러 모습과 실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바틈과 그 동료들이 테세우스의 결혼식에서 보여주기 위해 연습했던 '피라무스와 디스비'-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와 비슷한-의 이야기 같은 비극적인 사랑,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떠나서까지 사랑을 이루려고 한 허미아와 라이샌더의 사랑, 변심한 드미트리우스를 떠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도는 헬레나의 사랑, 드미트리우스에게 비굴할 정도로 사랑을 호소하는 헬레나의 모습을 보고 정상적인 사랑을 이루어 주겠다고 나서는 요정의 왕 오베론 식의 사랑, 신비한 약초 또는 큐피드의 화살로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나귀 바틈과 타타니아 사이의 꿈같은 사랑 등..... 많은 사람들은 바틈의 꿈같은 사랑보다는 허미아와 라이샌더의 강렬한 사랑을 부러워하겠지만, 그러한 사랑 안에도 아픔이 담겨 있을 수 있음을, 오베론의 숲속에서의 하룻 밤사이의 배신과 악몽을 통해서 멋지게 표현한 것은 아닐는지..... 아뭏든 연극은 요정의 숲속에서 겪은 꿈같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바틈은 바틈대로, 허미아와 라이샌더는 그들대로, 그리고 헬레나는 또 그녀대로, 이런 저런 모습으로 만족스럽게 마무리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즐겁게 웃을 수 있는 멋진 이야기입니다.  

 강력한 상상력은 속임수가 뛰어나서 / 그 어떤 기쁨을 감지만 하여도 / 그 기쁨의 원인이나 제공자를 떠올리오. / 또는 밤에 무언가가 두렵다고 상상하면 / 덤불은 얼마나 쉽사리 곰으로 보입니까! - 5막 1장, 18~22행, 테세우스 

 저희 그림자들이 언짢으셨다면 / 이러한 영상들이 보였을 때 / 잠들어 있었을 뿐이라고 / 생각만 고치시면 다 괜찮죠. / 그리고 가볍고 시시하며 / 꿈처럼 헛것 같은 이 주제를 / 나무라지 마십시오, 여러분. - 5막 1장, 422~428행,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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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바로 뇌다 - 연쇄살인자, 사이코패스, 극렬 테러리스트를 위한 뇌과학의 변론
한스 J. 마르코비치.베르너 지퍼 지음, 김현정 옮김 / 알마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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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법을 위해 신경과학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현재의 법정이 범죄자가 이성적으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는 기본 원칙에서 출발한다고 비판했다. 그린과 코헨은 범죄자에게 이러한 기본 능력이 있음을 부인하고 사례를 충분히 들어 자신들의 견해를 입증했다. 이로부터 그들은 법체계의 합법성 역시 사회의 도덕관념에 좌우된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관념이 뇌 연구에서 확보한 인식을 바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판단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간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로 간주하는 양립적인 법 원칙의 오랜 결합과 자유와 관련된 도덕적 관념이 깨져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그의 사회화에 문제가 있는가?"  "그에게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그의 유전자에 문제가 있는가?"  "그에게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그가 처한 환경에 문제가 있는가?" "그에게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그의 뇌에 문제가 있는가?" 와 같은 전통적인 법적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회화나 유전자, 환경, 뇌 없이는 '그' 역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p240-241, '법에 대한 신경과학의 도전' 중에서  

 현재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형법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능력'이라는 기본 원칙위에 세워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파문을 일으키는 범죄가 발행하고 범인이 검거될 때면, 신문 또는 방송을 통해 언급되는 사이코 패스니 정신 질환자라는 언어가 낯설지는 않지만, 결국 법정에서는 그들이 자란 환경이나 사회적 압박, 정신질환의 문제에 대한 배려보다는 범죄자가 저지른 범행에 대한 처벌이 우선일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범죄에 노출되고 두려움을 느끼는 많은 일반인들의 관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그러한 범죄에 이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범죄자에게 책임을 지우고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이들은 드물 것입니다. 이 책이 주장하는 '범죄자는 그가 처한 환경에서 달리 결정할 수 없는 심리 기제와 사회적 행동에 장애가 있는, 반사회적인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그러한 시각에 큰 변화가 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범죄자를 만들어 내는 사회구조나 환경 등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양한 범죄에 대한 책임의 일부도 우리 자신과 사회가 공유하고 반성해야 할 부분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시각이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많은 범죄의 원인은 뇌에 있다고, 그 사람이 자란 가정적, 사회적 환경과 뇌손상이나 질환 등에서 연유된다고 주장하며 범죄자 자신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 책의 내용은 읽는 이에게 상당히 도발적으로 다가오는 면이 있습니다. 단순히 뇌과학 또는 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호기심과 지적 탐구를 위한 즐거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가 지극히 현실적인 내 삶의 안위와 범죄를 연결시킨다고 생각한다면, 단순한 읽을거리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일테니까요.   

 각 개인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고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 또한 각 개인에게 속해 있다는 원칙 위에 세워진 것이 기존의 법체계이자 인간 사회에서 범죄에 대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식이었다면, 이 책에서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범죄를 저지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록 자유의지가 주어졌다고 가정된다고 하더라도, 실제 범죄의 발생은 어떤 상황에서 감당해야 하는 스트레스나 감정적인 변화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받게 만드는 양육환경과 뇌의 손상 등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폭력이나 범죄의 근본 원인이 뇌에 있고, 선과 악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의 능력이 신경세포 회로에 암호화되어 있고, 신경회로망의 가벼운 오작동이 잘 유지되던 사회적 균형을 파괴하고 인간을 가볍게는 외톨이로, 최악의 경우에는 동정심을 모르는 짐승 같은 존재로 만들수 있다' 는 것이지요. 결국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는 뇌신경과학의 관점에서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단언할 수 없으며, 오히려 다른 식으로 결정할 수 있는 감정의 유연성이 몹시 제한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책임을 묻는다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아니면 현재 법체계의 자유의지와 책임이라는 환상(?)에 수정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물음과 그에 대한 신경과학적인 탐구가 바로 이 책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범인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여러가지 여건에 의해 손상되고 왜곡된 그 사람을 조정하는 뇌라는 것이 이 책이 말하는 일관된 주장입니다. 

 현실적으로 뇌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모든 범죄에서, 한 개인으로서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저질러진 어쩔 수 없는 결정론적인 이유들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범죄의 책임을 범죄자 개인에게 묻기를 원하지, 사회와 환경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을 찬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범죄자들이 '자신의 공격적 감정을 깊게 생각하고, 이를 제어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학문적인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법의 의미가 단순한 처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안정되고 풍요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현재와 같은 처벌 위주의 시스템이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범죄자들이 흔히 정신 질환을 앓고 있고 뇌손상을 입었으며 하층 출신이라는' 사실에 입각하여 그러한 조건과 환경에 처한 사람들, 특히 청소년기 이전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예방적인 조치들을 활용하여 미래의 범죄를 미리 차단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고 -물론 여러 제한이 따르는, 그리고 극단적이고 노골적인 정책은 그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미리 낙인을 찍는 일일 수도 있으므로 부드러운 접근책의 개발이 우선일 것입니다-, 이미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단순한 격리와 처벌이라는 접근보다는 치료를 통한 재범의 방지 및 재활이라는 측면이 사회적으로 더 유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처벌 위주의 형집행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더 안전하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고 인정한다면 더욱이..... 물론 그러한 시각의 변화와 정책의 변화는 간단하게 뇌과학 또는 신경과학과 법학과의 관계에서만 해결될 수 없는 더 큰 사회적인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 문제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범행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단호하면서 자비롭게 다루는' 지금보다는 더 합리적인 모습에 더 가까게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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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
빌 브라이슨 지음, 황의방 옮김 / 까치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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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인간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적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작품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희극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천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단시들만이 전해졌다면, 그를 아주 검은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을 보고 우리는 그를 우아한 사람, 지적인 사람, 철학적인 사람, 우울한 사람, 책략에 능한 사람, 신경질적인 사람, 쾌활한 사람, 사랑이 넘치는 사람 등으로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작가로서 셰익스피어는 이 모두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셰익스피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거의 알지 못한다. -p27~28,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찾아서> 중에서 

 '깔끔하게 턱수염을 기른, 머리가 벗겨졌지만 그리 못생기지 않은 40대 남자..... 왼쪽 귀에 금귀고리를 달고..... 표정은 자신감이 넘치고 매우 호쾌하다. 이 남자는 당신의 아내나 다 자란 딸을 가볍게 맡길 만한 남자는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로 알고 있는 '챈도스 초상화'에 대한 작가의 설명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생존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무도 그가 진짜 셰익스피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 합니다. 다만 그리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지요. 셰익스피어의 초상으로 알려진 작품은 두가지가 더 있다고 합니다. 1623년 나온 셰익스피어 전집- First Folio-의 권두화로 실린 동판화-드뢰샤웃 판화-와 그의 유해가 묻혀있는 홀리 트리니티 교회의 벽으로 된 셰익스피어 기념물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채색된 실물대의 조상인데, 두가지 모두 셰익스피어의 사후에 그린 것으로 솜씨가 별로 좋지 않았던 화가들에 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한눈에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라고 알고 있는 그림은, 실은 신빙성이 높지 않은 작품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림을 모두가 그렇게 믿고 서로에게 말하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100여년 전의 명성황후의 모습과 사진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일어나고는 하는 논란을 생각해 보면, 400여년 전의 셰익스피어의 모습에 대한 논란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역사적인 자료로 당연시하며 존중하는 것들의 허술함 대해서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묘한 것은 우리가 그의 초상을 보면 즉시 그가 셰익스피어임을 알아보지만, 실상 우리는 그의 진정한 모습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생애나 성격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역시 비슷하다. 그는 잘 알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이 책은 이처럼 어설픈 초상화 세개를 가지고 누구나 그리 믿게 된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냈듯이, 우리가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알고 있는 빈약한 몇가지 사실만을 가지고 그의 완벽한 생애를 무리하게 재생해 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나온, 실제 알려진 사실보다 더 많아져버린 추측과 억측들, 그리고 그것들이 사실처럼 호도되어 버린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너무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어떤 것은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이야기되고 있기에,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상상을 가미한 사람들의 추측인지가 헛갈리는 것이 사실이기에, 실제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셰익스피어의 일생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사실과 추측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구분해 나가며, 현재까지의 자료에 근거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셰익스피어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처음 셰익스피어의 생애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겠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들을 분명히 인정하고, 타당성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 또한 충분히 남겨두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생애와는 별개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평가는 다양한 작품이 실제로 남아 있으니-실제 원작인지, 가필되거나 고쳐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실제 셰익스피어의 생애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풍요로운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도 그의 생애 자체보다는 더 다채로운 이야기들과 평가들이 나올 수 있으리라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이겠지요.  

 이 책의 내용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출생에서 죽음-1564~1616-까지를 다루는 앞부분-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보다는  마지막 9장의 '이색 주장을 펴는 사람들'편을 가장 흥미롭게 읽을 것 같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지금까지 알려진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담은 부분인데, 베이컨이나 옥스퍼드 백작 등이 실제 저자라는 주장의 허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셰익스피어가 죽고나서 200여년 동안 그의 저작에 대해서 의심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800년대 초반 델리아 베이컨이라는 미국 여성의 알수 없는 확신에서 시작된 셰익스피어가 진짜 작가가 아니라는 집착에 사로잡힌 연구의 결과가 뜻하지 않게 베이컨 저작설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였고, 그러한 주장이 일종의 종교처럼 번지며 소문이 소문을 낳는 과정을 거쳐 진실인양 확대 재생산 되고 있음을 추적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셰익스피어를 대신할  후보자로 베이컨에서 시작된 명단은 옥스퍼드 백작, 크리스토퍼 말로, 펨브로크 백작부인 메리 시드니 등을 거쳐 이제는 그 수가 50여명에 이른다고 하니, 호사가들의 실없음에 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실제 현재 우리가 접하는 셰익스피어의 명성은 분명 400여년전에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적인 작가였던 인간 셰익스피어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타 다른 주장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의 초상을 보며 셰익스피어라고 느끼듯이 그가 남긴 작품들과 그의 생애의 흔적들은 그가 분명 위대한 작가였고, 그러한 작품을 남길 만한 재능과 환경 속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초상속의 셰익스피어를 아는 것이 실제 셰익스피어를 아는 것과는 크게 상관이 없듯이, 우리가 접하고 인정하는 셰익스피어의 명성과 탁월함이라는 것도 400여년 전에 존재했던 인간 셰익스피어 자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라는 명성과 탁월함 속에는 400여년의 세월동안 그의 작품을 보존하고 정리하고, 시대에 맞게 이리저리 다듬고, 그 안에서 사람들에게 들려줄 탁월함과 흥미로운 것들을 찾아서 알린 수많은 학자들과 연극인들, 책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의 연극에 열광할 줄 알았던 관객들의 삶이 켜켜이 쌓여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리 주장할 수 있지만 그러한 영광의 근본 바탕은 물론 400년전 실존했던 스트랫퍼드의 윌리엄 셰익스피어인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겠지요. 이 책은 우리가 아는 영광의 관을 쓰고 있는 셰익스피어라는 신화적인 인물이 만들어지기 전의 인간 셰익스피어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을 독자들에게 진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바탕 위에서 이제는 그의 작품들의 탁월함을 감상하며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대한 문헌은 그 시대에 그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을 만큼 있습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사실 우리는 그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 어떤 극작가보다 셰익스피어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26, 데이비드 토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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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일기 - 절망의 수용소에서 쓴 웃음과 희망의 일기
조반니노 과레스키 지음, 윤소영 옮김 / 막내집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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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나는 나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보다 낫거나 못한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이 전쟁에 말려들었다. 처음에는 독일의 동맹군인 이탈리아 군인이었지만, 마지막에는 독일군의 이탈리아 포로가 되어 버렸다. 1943년에는 영국군과 미군이 우리 집을 폭격하더니, 1945년에는 그들이 수용소에서 나를 풀어주고 깡통 우유와 통조림 수프를 선물로 주었다. 이게내 이야기의 전부이다. 흔해빠진 이야기 속에서, 나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떨어진 개암 껍데기 같은 존재였다. 아무런 훈장이나 메달도 없이 전쟁에서 돌아왔지만, 나는 승리자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이 소용돌이를 헤쳐 나왔으니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친구인 나 자신을 재발견했으니까 말이다. -p9-10, <사용설명서> 중에서 

 조반니노 과레스끼의 <신부님, 우리 신부님> 시리즈나 <까칠한 가족>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 만의 독특한 유머와 웃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접하면서도, 비록 수용소에서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런 기발한 웃음과 유머를 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자연스럽게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저자의 기질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다는 성급한 기대가 앞서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역시나, 현실을 억누르는 수용소에서의 절망적인 상황은 자유로움이 보장되는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고, 또한 그 안에서 살아남는 다른 방식을 터득하도록 만드나 봅니다. 배고픔과 고립과 절망,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를 곁에 두고 살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자세를 결코 잃지 않으려고 웃음과 유머를 찾고 있지만, 그런 삶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독자의 입장에서도 그러한 이야기 뒤에 담긴 어두움의 흔적들이 느껴지니 말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아무런 전리품도 없이 자신이 있어야 할 삶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절망속에서도 결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더 소중한 자신을 찾은 승리자'의 모습을 독자로서 함께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다른 작품에서 우리에게 주었던 웃음과 즐거움보다 더 의미있는 것들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보고 느낄 만한 도량이 되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1945년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와서, 1943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독일군의 포로 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공책에 '자신이 했던 일과 하지 못했던 일, 그리고 보고 생각한 모든 것'을 적은 방대한 메모에 살을 붙여 정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저자는 '하지만 그때 정리한 원본과 그 복사본을 모두 난로에 던져버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메모 일부를 그대로 정리한 것이 이 책이라면서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책으로 펴낼 수 있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모습 속에서 작가로서의 저자의 고집스러운 면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 썼던 정리된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자는 자신의 삶의 어둡고 절망스런 순간을 헤쳐 나왔던 기록의 생생함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대하는 독자의 자세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자신과 동료들은 결코 짐승처럼 살지 않았다고, 야만의 현장에서 자신들은 문명을 세우고 민주주의를 건설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저자의 자부심의 근원에 한발 더 다가서서, 삶을 긍정하고 희망을 키우는 노력들에 박수를 보내고 자신의 삶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여보고자 하는 공감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배고파! 배고프다고! 나는 배가 고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소망들과 아침 풍경에, 내 위장이 품고 있는 소망과 아침 풍경이 더해진다.'-p79 / '시간의 흐름, 삶, 죽음, 저 철조망 너머 세상에서는 이 모든 것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길가 한 귀퉁이에 버려진 것만 같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멀어져 도저히 그들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p90 / '최소한의 음식과 담배꽁초로 이루어진 비참하고 의미없는 이런 날들 속에서 유일하고 활동적이고,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꿈일 것이다. 꿈을 꾸어야 한다. 꿈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잊고 있는 가치를 재발견하고, 몰랐던 가치를 찾아내고,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p68/ '그들이 사흘에 한 번씩 쥐여주는 감자 몇 알에는 이제 벌레처럼 축축하고 잿빛이 도는 긴 싹이 나 있다. 봄이 왔나보다'-p67.... / '하지만 진리는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발견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생각하고,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을 위해 생각해주고, 어떻게 자유로워져야 하는지 가르쳐줄 사람을 찾아봐야 소용없다...... 자갈길에서 튀어나온 돌멩이처럼, 집단적인 공동 사고에서 벗어나 개개인이 자기 안에서 양심을 찾아야 한 다. 그리고 도덕적 개념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을 당신 자신이 지닌 의식의 체로 걸러내어 각각의 거짓을 가려내고, 진리를 찾아내야만 한다.'-p167-168 

 배고픔절망 속에서 을 잃지 않고 희망의 싹을 키우기 위해, 그리고 진리를 찾아 진정한 자유로움에 도달하기 위해, 내면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가장 내밀한 이야기..... 바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아무런 꾸밈없이 민낯으로 독자에게 다가서며 안겨주는 삶의 진짜 모습입니다. 저자가 겪은 18개월의 삶은, 똑같지는 않겠지만, 우리도 언젠가 한번쯤은 삶의 모퉁이에서 만나게 될,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뒤로 물러설지도 모를 그런 악몽의 일부는 아닐는지.....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꿈과 희망, 진리와 자유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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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셰익스피어 How To Read 시리즈
니콜러스 로일 지음, 이다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욕심은 아닐 것입니다. 많이 알려지기도 했고 또한 널리 읽히기도 하지만, 각 작품에 대한 이해나 해석 또한 알려지고 읽힌 만큼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라, 그러한 다양함이 결국 의욕을 가지고 덤벼드는 나를 이내 기가 질리게(?) 하고는 합니다. 그저 수수하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즐거움을 느끼기 보다는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의욕이 앞선 때문이겠지요. 별반 다져진 기초가 없는데, 그래도 대가의 작품을 읽은 척이라도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니, 결국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초보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읽는 즐거움마저도 누리지 못하고 고꾸라질 수 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앞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번역본이 아닌 영어로 된 원문을 읽어야만 제대로된 작품감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는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번역을 하기는 하지만, 언어가 바뀌는 순간, 셰익스피어가 영어를 통해 꾸몄던 세밀한 말이나 단어의 배열을 통한 말장난이나 숨은 의미, 그리고 음율 등이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가지 의미는 전달할 수 있겠지만, 말을 통해서 그 배후에 이중 삼중으로 숨겨진 말의 의미는 전달되지 않으니 번역본을 읽는 것은 셰익스피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에 역자가 의도하고 이해한 부분만을 읽고 이해한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한 편으로는 영어를 웬만큼 한다는 사람들도 원저작을 제대로 읽고 그 숨겨진 작가의 의도까지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도 하니, 다른 언어를 쓰는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번역본이라도 감지덕지하며 자꾸, 자꾸 읽을 수밖에요..... 

 제목만 보면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처음 대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한 안내서로 느껴집니다. 실제로 저자의 의도는 독자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생생하게 읽어 낼 수 있는 방법, 즉 셰익스리어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니까, 분명 독자들을 셰익스피어의 작품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책 역시 영어 원서를 우리말로 옮긴 책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번역서로 읽는 것에서 오는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점이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역자도 후기에 그러한 아이러니를 이리 토로하고 있습니다. '<How to read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의 원문의 말맛을 깨우치기 위해 만든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읽을 계획이 없는 사람에게 이 책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읽을 실력이라면 독자 여러분이 이 <How to read 셰익스피어>를 번역본으로 읽고 있을까? 이 책 역시 원문으로 읽고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역자의 말대로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읽을 수 없다고 그의 위대함을 엿볼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역자는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읽을 실력은 안되지만, 그 말맛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이 책과 함께 원전을 곁에 두고, 이 책에서 인용된 원전 부분을 먼저 읽고 저자의 설명에 귀기울여 볼 것을 제안합니다. 그 후에 번역본으로 온전한 작품 전체를 대하고, 여력이 생긴다면 온전한 원전 읽기를 시도해 보기를..... 

 번역본으로서 이 책을 대한다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신선함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가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룬 천재임을 인정하고, 그가 사용한 언어의 맛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방법으로 저자가 제안한, 실마리가 되는 단어 하나로 작품 전체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실타래 같이 얽힌 언어의 마법을 풀어보는 방식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의 문을 열어 보이는 듯 합니다. 톡톡 튀는 재치꾼-베니스의 상인-, 환영-율리우스 카이사르-, 사랑에 흔들리는-좋으실 대로-, 벙어리들-햄릿-, 눈을 멀게하다-오셀로-, 안전한-맥베스-, 끄덕임-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등 일곱 작품 속에서 각각 단 하나의 단어만을 끄집어내서 전체를 꿰뚫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셰익스피어를 이해하는 탁월한 방식을 하나 깨우치게 된다고나 할까요....  부족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자꾸 자꾸 읽을 수 있는, 단어를 통한 좀 더 풍성한 상차림의 방식을 배웠다는 즐거움을 주는 책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언제나,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전제하에, 즉 움직임, 몸짓, 만들기, 행위 하기의 전제하에 해석되어야 한다. 앞으로 명확하게 보여주겠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이고 강렬한 느낌은 그가 언어를 사랑한다는 느낌이다. 말을 가지고, 그리고 말이 초래할 수 있는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은 제 생명이 따로 있거나 기계적인 힘이 있는 듯 느껴진다. 하나하나가 작은 검색 엔진이며, 참견쟁이 꼬마 도깨비이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기이한 생물 같다. -p12, 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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