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란 남자들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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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세기 2:20b~23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 시몬 드 보부와르, <제2의 성> 

 남자는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담이 자신의 늑골을 빼서 이브를 만들었다는 건 완전히 지어낸 말이며, 사실은 이브들이 훗날 아담을 만든 것이다. 자신들을 위해 - p153

 처음 창세기의 언급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속에 진실로 각인된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고전적인 생각일 것이고, 두번째의 시몬 드 보부와르의 글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차별당하는 존재였던 여성의 처지에 대한 자각 및 각성을 촉구하는데서 비롯된 아직도 여전히 남녀관계에 대한 하나의 틀로 받아들여지고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남성 중심주의적인 사고의 틀을 깨고 제3의 길을 주장하고 있으니, 바로 세번째 글에 나타난 인간의 근원은 여자이고 그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남성이니, 결코 남성들을 우월한 존재나 근본적인 존재로 취급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저자가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는 내용들의 시작은 과학의 발전과 궤적을 같이하는데, 안톤 판 레이우엔 훅(Anton van Leeuwenhoek)의 현미경의 발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성은 생명의 기본 사양인 여성을 변환시켜 만들어진 존재이다', '어머니의 유전자를 다른 누군가의 딸에게 전해주는 운반자, 지금 모든 남성들이 하는 일이 이것이다.' 아마도 이 책의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가지 주장의 근거에 이르기 위해 저자는 현미경으로 처음 정자를 관찰할 수 있었던 레이우엔 훅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로지 정자의 외양만을 관찰할 수 있었던 시대에서 시작하여, Y염색체를 발견한 네티 마리아 스티븐슨의 집념, Y염색체상의 남성화 결정 유전자의 발견을 위한 페이지 (ZFY 유전자 발견)와 굿펠로 (SRY 유전자 발견)간의 숨막히는 경쟁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통해 탄탄한 기초를 깔아놓은 뒤에, 저자는 남성과 여성의 수정란에서 시작되는 발생과정을 통해 생명의 기존사양이 여자인 이유와 남자들을 모자라다고 표현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성의 몸은 모든 것이 갖춰져 있고 남성의 몸을 그것을 취합,선택 또는 변조한 것에 불과하다. 기본사양으로 구비되어 있던 뮐러관과 울프관. 남성은 뮐러관을 일부러 죽이고 울프관을 속성으로 성장시켜 생식기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잔재주를 부렸다. 이리하여 소변을 위한 길이 정액의 통로를 차용하게 되었다. 또한 정자를 자궁으로 쏘아 올리기 우한 발사대가 방뇨를 위한 도구로도 사용되게 되었다. 여성은 절대로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뮐러관은 그대로 자라 생식기가 된다. 여성은 뭔가를 죽이거나 하지 않는다..... 아담이 이브를 만든 게 아니다. 이브가 아담을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수컷)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위의 두번째 주장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진딧물을 예로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암컷만으로도 자손을 효율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처녀생식 시스템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수컷에 의한 양성생식이 필요한 것은 처녀생식의 문제점, 즉 자신의 유전자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자식밖에 생산해 낼 수 없다는 단점 때문입니다. 처녀 생식이 다른 존재의 도움없이 수시로 자식을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단일한 유전자를 가진 집단밖에 만들어내지 못함으로 인해 급격한 환경변화가 발생할 때, 새로운 형질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이 시스템은 전멸의 위기에 노출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생명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남성(수컷)이라는 존재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즉 남성은 여성이라는 굵고 강한 날실을 연결해 주는 가는 씨실의 역할을 하는 존재, 어머니의 유전자를 다른 누군가의 딸에게 전해주는 운반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징기스칸의 Y염색체를 통해, 자신의 주장인 어머니의 유전자를 다른 누군가의 딸에게로 운반하여 혼합하는 일이 Y 염색체의 유일한 유업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성이 그리도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역할에 그리도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저자의 또 다른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입니다. 남성은 기본사양인 여성의 불완전한 변조물이며 유전자의 운반자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그러한 운반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완수하며 여성을 섬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생물학자들은 생식행위와 연관된 쾌락을 언급하고 뇌과학자들은 쾌락 중추와 생식행위의 연관성으로 그에 대한 답을 대신하지만, 이 지점에서 저자는 왜 쾌락이 생식행위와 연관되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과학이 답을 시도하는 '어떻게(HOW)'의 영역을 넘어서 '왜(WHY)'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겠지만, 저자는 이 지점에서 과감히 자신의 생각을 펼쳐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으면서 자신이 잠겨있는 매개체인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이 사람도 시간이라는 매개체에 온전히 잠겨 있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매개체를 깨닫기 위해서는 매개체와의 등속운동에 벗어날 수 있는 가속도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사람에게는 가속도를 느낄 수 있는 가속각이라는 여섯번째 감각이 분명이 존재하고, 가속각을 느낄 때 최고의 쾌감을 느낀다는 것, 사람이 순항하는 시간을 추월하기 위해서는 가속도가 필요하고, 가속되었을 때 시간의 존재를 깨닫는데, 그것은 최상의 쾌감이며 그것이 가장 직접적으로 삶을 실감하는 방법이라는 것, 그리고 바로 생존의 연쇄를 위해 유전자의 전달자로서 택함받은 모자란 남성이 자신의 책무에 충실하며 살도록 부여받은 것이 바로 가속각과 연결된 사정감이라는 것.....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과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삶과 생명체에 대한 애정어린 눈길 속에 깊은 숙고의 시간이 어우러진 생각들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P.S. 사람들이 사용하는 자동차 등의 기계류나 전자제품  등의 경우에는 기본사양에 여러가지 기능을 추가한 제품들을 더 고급스럽고 최신 제품이라고 여기고 더 많은 돈을 지급하여 구입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을 예로 든다면, 저자가 말한 남자는 여자라는 기본사양의 급조된 변조품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남자가 불량품이 아니라면 진화된 더 최신 사양이라고 할 수도 있는 바, 최소한 더 나은 사양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모자라다고 까지 자학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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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앵카레가 묻고 페렐만이 답하다 - 푸앵카레상을 향한 100년의 도전과 기이한 천재 수학자 이야기
조지 G. 슈피로 지음, 전대호 옮김, 김인강 감수 / 도솔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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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앵카레의 추측, 웬만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푸앵카레의 추측이 클레이 연구소가 100만 달러의 상금을 내건 밀레니엄 문제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실제 푸앵카레의 추측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는 못할지라도 말입니다. 이 책은 바로 100여년간 해결되지 않은 채 많은 천재적인 수학자들에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열정을 품게 했지만, 이러저런 상처만을 남기고, 결국 푸앵카레 병이라는 쓰라린 질병만을 남겼던 '푸앵카레 추측'이 천재적인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이한 인물인 페렐만에 의해서 풀리고, 그의 증명이 완벽한가를 재증명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한편으로는 수학 100년사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따로 떼어 놓는다고 하더라도 한편의 장대한 드라마로 읽힐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수많은 수학자들의 열정과 수고와 좌절, 그리고 극적이랄 수 있는 문제의 해결이라는 마침표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마침표에는 페렐만이라는 한 천재적인 수학자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의 업적에 당연히 따라 붙을 명예와 부에 대해 초연한 모습이 덧붙여지고, 그의 그런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에 대한 신선한 반역까지 담고 있습니다.   

 푸앵카레의 추측은 1904년 출판된 위치의 분석에 대한 다섯 번째 보충 논문의 마지막 단락에 쓰여있던 "어떤 다양체의 기본군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체가 구면과 위상동형이 아닐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이 질문은 우리를 너무 멀게 헤매게 할 것이다."라는 푸앵카레의 말처럼 지난 100년간을 많은 수학자들에게 푸앙카레 병이라는 희귀한 질병을 앓게 만들며, 많은 이들에게 담대한 도전과 쓰라린 실패를 안깁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중의 일부는 부분적인 성공을 그리고 페렐만이 등장하기 전까지 또 그 중의 일부는 증명에 이르기 위한 토대를 훌륭하게 다듬어 내고, 2002년에 페렐만에 의해 그 먼길이 끝나고, 2006년 스페인의 국제수학자대회에서 푸앵카레의 추측은 페렐만에 의해 풀린 것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은 푸앵카레의 등장에서부터 여러 수학자들이 도전에 실패하기도 하지만, 이 난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하며 난관을 하나씩 제거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페렐만이 앞서간 이들의 어깨에 올라타고 완벽한 증명에 이르는 과정과 그 이후 페렐만의 논문들이 검증받고 인정받기까지의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러사람들의 도전과 실패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도전하고 풀어나가던 수학적인 내용들과 그러한 내용의 의미들까지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일반적인 역사에 대한 기록과 다른 면이라고 할 수 있겠고, 또한 이 책을 독특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그러한 수학적인 내용들을 독자가 완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결코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흥미롭게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다양체의 기본군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체가 구면과 위상동형이 아닐 수 있을까?" 푸앙카레가 자신의 논문에서 물었던 이 내용은 저자가 현대적인 추측의 형태로 재구성하여 "거기에 있는 모든  고무 밴드들이 한 점으로 축소될 수 있는 그런 3차원 물체들은 구면으로 변형될 수 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라면 이 내용의 참과 거짓을 떠나 여기 씌여진 용어들에 대한 개념부터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것은 더더욱 아리송해집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그러한 아리송함이 해결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고 어렵다거나 혼란스럽다기 보다는 뭔가의 매혹적인 유혹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많은 수학자들이 앓았던 푸앵카레 병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학이 더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깨달음 뒤에 따르는 이 학문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 수학병에 전염된 때문일 듯 합니다.  조금만 관심이 있고 인내가 따른다면 많은 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던 것과는 다른 수학에 자체에 대해 재미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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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유혹 - 가장 과학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욕망
데이비드 슬론 윌슨 지음, 김영희 외 옮김 / 북스토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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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이제는 일반인들도 대강의 내용을 알고 있는 빅뱅이론에 입각한 설명을 하거나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말한다면 아마도 창조론자들과 진화론자들의 첨예한 대립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과학의 입장에서는 빅뱅과 진화론에 힘을 실어주겠지만, 분명 종교적인 입장에 선 사람들은 신에 의해 창조된 세상과 생명에 대한 신념을 포기할려고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창조의 틀안에서 진화론을 수용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겠고, 창조론과 진화론을 서로 다른 영역에 국한시켜 서로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두 신념 모두를 편리하게 사용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대세는 진화론과 창조론, 과학과 종교의 냉랭한 대립이지 않을까 합니다. 

 다윈 이후에 등장한 진화론은 분명 사람들에게 눈앞에 존재하는 세상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인간을 비롯한 여러 생물들이 지금의 특징을 지니게 된 이유들, 여러 자연재해를 비롯한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까지 살아남게 된 이유들에 대해서 보다 실제적인 대답을 해 주었고, 그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고유한 특성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도 제공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에 취해, 어느 순간부터인가 진화론이라는 도식속에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 또는 자만이 나타나면서 기존의 진화론이 가지는 장점이 경직된 이론이 되고 부족한 부분을 메꾸지 못하면서 이런 저런 부족한 면들이 부각되기도 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는 기존의 생명탄생 과정에서 현재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단선적으로 그 틀을 완성하여 진화의 과정을 설명하고자 하는 욕심이 결국은 수많은 연결부분이 아직까지 화석이나 다른 어떤 증거로 증명되지 못한, 빠진 고리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지고, 한편으로는 현재까지 진화하지 못하고 살아남아 있는 원시생물들의 존재에 대한 힐난도 있습니다. 또한 지적설계론을 내세운 종교의 반격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화론은 이 세상을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는 보편적인 원리라기 보다는 단순히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 하나의 뛰어난 이론적인 가설에 불가할 뿐인 것일까요...... 아마도 여기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세상의 실체를 이해하고 설명해 줄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원리로서 진화론의 매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어떤 존재의 의미나 특징을,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신에 의지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입장도 아니고, 눈앞의 실체를 부분으로 분해하여 설명한 뒤 그 모든 것의 합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과학적인 관점도 아닌, 그 존재가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을 부여받아서 선택받고 살아남았다는 제3의 사고방식을 열어주었다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한 자연선택의 관점을 단순히 생물의 진화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구조, 종교 등으로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즉 기존의 진화론자들의 단순히 생명체에 국한된 진화론의 적용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진화론이 생물학에만 적용되는 이론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훨씬 더 보편적으로 적용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부분이 저자가 말하는 진화론이 지닌 깊은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화론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이론일 뿐이거나, 과학자들만이 그들의 실험실 안에서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머리를 싸매고 이해하려고 하는 과학이론일 뿐이거나, 종교와 신을 내몰고 유물론적인 사상을 세상에 뿌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매력적인 사고 방식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책의 두께만큼이나 다양한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단순히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시작되어 지금의 과학 교과서나 잡지에 실린 생물학적인 내용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진화론이 사람과 생명체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와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간단명료한 설명을 들려줄 수 있는, 또한 생물학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정치학, 종교와 기타 인문학적인 사고들을 통합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는, 우리 일상의 많은 것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안목과 통찰력을 제공해 주는 매력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 방식은 열심이 연구하고 책을 읽고 실험실에서 날을 새워야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조금만 주의하여 살피고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세상을 이해하는 매력적인 사고방식으로서의 진화론..... 마음을 열고 저자의 주장에 귀기울여 볼만한 유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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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꿀벌의 세계 - 초개체 생태학
위르겐 타우츠 지음, 헬가 R. 하일만 사진, 최재천 감수, 유영미 옮김 / 이치사이언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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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번식을 한 개체군으로 개미들을 꼽는 텔리비젼 프로그램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고는 하지만, 무서운 번식력으로 세상의 곳곳에 뿌리를 내린 개미들은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보다 세상의 더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고, 그러한 개미들의 성공을 집단을 이루어 사회생활을 하는 개미들의 특성에서 찾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개미들과 더불어 우리에게 집단생활의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개체군으로 꿀벌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개체로서의 존재는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그들이 군락을 이루어 한 사회를 건설하고 유기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그 사회를 유지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이는 집단지능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초개체라는 개념으로 그러한 집단들의 특징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꿀벌이나 개미는 각각 별개의 생명을 지닌 개체이지만, 하나의 집단을 통틀어 보았을때는 언제나 그 집단 군락 전체가 하나의 개체처럼 행동한다는 개념입니다. 실제로 개미나 꿀벌의 사회생활을 살펴보면 전체 군락으로서의 집단이 각각의 개체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훨씬 더 복잡하고 경이로운 성취를 이루어내고 있음을 알수 있고, 아마도 그러한 성공적인 초개체로서의 발전 -또는 진화-이 지금이 개미나 꿀벌 왕국을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이러한 꿀벌의 초개체로서의 특징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획기적으로 꿀벌군락을 척추동물을 뛰어넘어 포유동물의 특성까지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생각한다면 포유동물과 꿀벌집단을 연결시킬 수 없지만, 저자는 세밀한 관찰과 연구 결과들을 통해 서로 비슷한 점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먼저, 포유동물의 번식률이 극단적으로 낮듯이, 꿀벌집단의 번식률도 매우 낮다는 점, 포유동물의 암컷이 자손을 양육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젖을 분비하듯이, 암컷인 일벌도 로열젤리(왕유)를 분비한다는 점, 포유동물이 자궁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자손에게 최적의 양육환경을 제공하듯이 꿀벌도 벌집이라는 사회적 자궁을 통해서 유충을 안전하게 양육한다는 점, 포유동물의 체온이 섭씨36도이듯이 꿀벌 유충의 체온은 섭씨35도로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점, 그리고 포유동물이 큰 두뇌로 척추동물 중 가장 뛰어난 학습능력과 인지능력을 지니게 된 것처럼 꿀벌의 학습능력과 인지능력이 단순한 척추동물을 뛰어 넘는 정도라는 점 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면적 유사점보다 더 중요한 점으로,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어떻게 기능 하는지' 에 대한 공통적인 특성을 들고 있는데, 능동적인 비축경제 활동과 안전한 생활 공간의 조성 및 환경을 능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변덕스러운 주변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자손을 번식하고 세대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포유동물로 간주될 만한 꿀벌집단에 대한 경이로움이나 초개체로서의 특징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이 보여주는 꿀벌들의 삶 자체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들은 읽는 이로 수많은 호기심을 자아내게 합니다. 개개 꿀벌의 진화를 통한 여왕벌을 중심으로 한 초개체로서 탄생과정, 꽃과 꿀벌간의 공존을 위한 생존전략과 상호작용, 꿀벌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춤)와 꽃을 찾아나서는 꿀벌의 시각과 후각의 역할 및 학습능력, 짝짓기와 새로운 개체-일벌, 수벌, 여왕벌-의 탄생과 분봉과정, 벌집의 구조가 담고 있는 다양한 기능적인 의미, 분업화된 다양한 꿀벌들의 직업과 나이에 따른 직업의 변화 및 유연성, 유충의 부화를 위해 정밀하게 유충방이 난방되고 온도에 따른 양육환경의 차이에 의해 나타나는 꿀벌들의 수명이나 학습능력의 차이, 꿀벌이 서로 협동하는 이유에 대한 유전학적인 고찰, 그리고 질병이나 온도변화, 저장꿀의 많고 적음 등 여러 변화에 꿀벌집단이 대응하는 방식 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개개의 꿀벌을 넘어서 훨씬 복잡하고 유기적으로 유지되는 꿀벌집단의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가지게 합니다.  

 초개체로서의 꿀벌집단에 대한 이해는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흥미로왔고, 또한 주변을 살피는 시야를 많이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개개의 꿀벌이 모여서 이룬 집단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작용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우리 개개인이 한 생명체로서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생물학적인 과정을 거치는 모습을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그 너머의 우리 주변의 환경들도 결국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나름대로의 균형과 조화을 통해 하나의 지구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개념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새로운 이해도 생겼으니 말입니다..... 꿀벌세계에 대한 여행만으로도 즐거웠던 시간이었고, 그에 덤으로 세상을 좀더 넓게 보고 생각할 만한 지혜 한조각도 얻을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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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랜드 - 신경심리학자 폴 브록스의 임상 기록
폴 브록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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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르 루리야, 올리버 색스. 신경과학 중 특히 신경심리학이란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익히 들어보았을 이름입니다.  좀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책 한두권 쯤은 읽었을 것이고, 책속에 담긴 여러 뇌손상이나 뇌질환으로 인한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일상적으로 대하던 세상이나 사람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소설같은 삶들을 대하였을 것입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질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설같고, 한편으로는 소설같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이한 이야기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 -우리 뇌를 들여다보며 그 신비함을 탐구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나 카를 구스타프 융과 같은 이들이 정신분석을 바탕으로 정신병이나 신경증 등을 통해 사람들의 내면 깊숙히 숨겨져 있던 심리학적인 문제들을 세상에 들춰내기 시작하면서 우리 정신세계의 이해를 위한 바탕을 마련하여,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 것이 1세기하고도 조금더 전의 일이었는데, 아마도 지금의 신경과학자들이나 신경심리학자들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뇌의 여러 질환과 증상들에 대한 임상증례들의 소개 속에도 그러한 경이로움과 영향력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소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특이해서 단순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거리에 머무는 것들이 아니라,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이 그랬듯이 그러한 증례들 속에는 우리의 존재나 자아, 의식, 그리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에 대한 연속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심오한 전망과 경이로움을 담고 있다는 생각때문입니다.  

 신경과학을 비롯한 뇌를 연구하는 여러 학문들이 아직까지 우리에게 상당히 낯선 것이 사실인데, 그래도 뇌를 촬영하는 다양한 영상학적 진단방법 개발되어, 우리 뇌를 간접적으로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가능해지면서 신경심리학과 같은 학문분야가 훨씬 흥미로워지고, 그러한 흥미로움이 우리의 시선을 끄는 이유일 것입니다. 실제로 알렉산드르 루리야나 올리버 색스의 책들을 읽다보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주인공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이 앓고 있는 질환과 증상들이 마냥 신기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두사람의 책은 실제 임상증례에 대한 3자로서의 객관적인 증상의 관찰과 그와 연관된 뇌의 이상 부위에 대한 설명의 형식이기에 그들의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도 그러한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와는 떨어져있는 타자로서의 더 객관화된 느낌을 가지기 바라볼 수 있었던 듯 합니다. 흥미롭과 관심을 끌지만, 내 자신의 문제, 내 등뒤에 지워져 있는 내 짐이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의 불행한 질환 또는 삶에 대한 이야기로 들리곤 하기에 그러한 질병과 함께 나타난 여러가지 증상들이 한 사람으로서의 나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없이도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의 두 사람의 책들과 이 책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이 책에 소개된 이야기들도 대부분은 저자가 다루었던 환자들의 증례이겠지만, 저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관점은 이야기 속 주인공의 삶을 저자 자신과 읽는 독자들까지도 자신의 일처럼 되뇌이게 만들고, 그러한 과정은 여러환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부단히 나의 대답이나 생각을 묻곤 합니다.  

 저자는 책에 소개되는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서, 단순히 특이한 증례들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을 자신이 의도한 세계로 이끌고 갑니다. 어제도 존재했고 오늘도 존재하고 내일도 존재할 '나'라는 사람이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근간이 되는 그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기억의 문제라면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속에 존재했던 나는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나를 나로 표현해 주는 자아란 무엇인가? 또한 의식이란 무엇인가? 머릿속 어디에 '나'라는 자아 또는 의식이 존재하는가? 등등 '나'와 자아, 의식과 영혼 등의 실체에 대한 질문들..... 아마도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안겨주고 싶었던 생각거리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머릿속 어디를 뒤져보아도 마음이나 자아, 의식이라는 개념이 담겨있을 장소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지...... 저자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마음이나 자아, 의식이나 영혼이라는 것은 '우리 뇌의 작동의 결과이고 우리 뇌가 물리적, 사회적 세계를 통과하면서 만들어낸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러한 것들은 '과정과 상호작용에서 생겨난 것이지 구체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나라는 존재가 생각, 느낌, 의도 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생각, 느낌, 의도 등이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다' 또는 내가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나를 말해준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잘 드러내 주고 있는 부분이 바로 '텔레포테이션과 복제인간'이라는 장에 담긴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나'는 누구인지, 그리고 자아란 무엇이고, 의식이나 영혼과 두뇌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등등..... 아마 저자는 자신의 환자와 학문이 다루는 영역을 통해서 이러한 질문을 독자들에게 진지하게 던져보고 싶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 던지기는 앞으로 우리의 두뇌를 다루는 여러 학문들을 통해 우리가 대하게 될 미래와 우리 자신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요구하는 듯 합니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나'는 누구라는 질문이나 대답이 의미가 있을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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