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사이언스 클래식 16
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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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에 대한 넓은 지식과 혜안을 담은 저술들로 일반인들에게 다른 여느 유명 과학자 못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인기를 얻은 저자의 능력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이 책을 읽는 시간 내내 마음 한쪽에 들어앉아있는 불편함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과학적 탐구의 여정을 통해서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면밀하게 따져본다면 저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라는 생각을,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신의 존재나 종교의 역할이라는 것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의미 이상은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자는 이 우주를 지탱하고 물리학적인 현상들이 유지되는 세상의 배후에 있는 단순한 법칙이라는 의미를 신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은 그 존재를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나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창조물들의 세상에 간섭하는 신의 존재는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물리법칙들은 증명이 가능하지만 종교에서 주장하는 그리고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체험하는 그런 신의 존재는 다른 이들에게는 동일하게 증명되지 않는 주관적인 것들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자가 화학물질들이 그러한 종교적인 체험들과 비슷한 경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그러한 종교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단지 일상적이지 않은 -또는 비정상적인- 자극이나 반응의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적어도 과학자로서 그리고 그러한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저술들로 일반인들을 과학의 세계로 인도한 사람으로서의 관점에서 저자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개념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물론 완곡한 어법으로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어떤 과학적인 증거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그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려해 보지 않았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1985년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자연 신학에 대한 기퍼드 강연'의 기록을 엮은 이 책은 저자의 이력에 어울릴만하게 우주에 대한 지금까지의 축적된 방대한 과학적인 사실들을 통해서 신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강연을 통해서 광대한 우주와 그 안에 담긴 우리 은하계와 태양계, 그리고 그 방대한 세계에서 밝고 푸른 작은 점에 불과한 지구위에 하찮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한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창조와 신의 존재, 우리의 존재의 이유와 의미에 대한 한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견해를 거침없이 펼치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인으로서의 견해가 아닌 철저하게 관찰과 증명가능한 과학적 사실들에 입각한 관점에서 그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런 관점에서의 신의 존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종교가 말하는 그런 신의 증거는 우주 어느 구석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관점은 철저히 과학적인 것들에 입각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철저히 물질적인 면을 고수한다는 점도 지적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7강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강의 내용에서 언급한 종교적 체험과 약물 등을 사용한 경험의 유사성에 대한 이야기나 심령술이나 영혼, 정신세계에 대한 언급을 보면 그 모든 것을 물질적인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거나 물질적인 증거가 없는 주관적인 의견에 불과하므로 과학적으로 논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여과없이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곧 과학이 다룰 수 있는 물질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으로 논의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광활한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별들을 보면서 경이를 느끼지만 그것이 우주 자체의 광활함과 그 체계를 유지하는 법칙들의 정교함 그리고 우리 지구와 생명으로서의 인간 자신에 대한 미미함 등에 대한 느낌으로서의 경이로움이지 그러한 천지만물을 만든 존재, 그러한 것들의 운행을 간섭하는 존재, 그리고 지구의 인간들에게 인격적인 교재를 원하는 그러한 존재에 대한 피조물로서의 경이로움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시대까지 서양에서는 종교가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고, 모든 사람이 그 권위에 복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되려고 했던 종교는 그에 반하는 명백한 과학적인 사실들이 확인되면서 세상을 설명하는 권위있는 자리를 과학에 물려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가 말하는 우주론은 그냥 신화 취급을 하지만 과학이 발견해서 발표하는 블랙홀이니 우주의 팽창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신뢰의 눈길을 보내며 경이롭게 받아들입니다. 저자가 말한대로 누가 보더라도 확연하게 증명되고 설명될 수 있는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지지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중세에 종교가 과학을 말살하려고 하였듯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역으로 과학이 종교를 반박하고 그 중심에 있는 신의 존재에 대한 공격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과학적인 입장에서 저자처럼 신의 존재에 대해서 수긍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에 대한 신 -하나님-의 계시를 특별계시와 자연계시로 나누어 설명하곤 합니다. 성경이라는 경전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을 특별계시라고 하고 우리 주위의 자연계를 통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경이로움 등에 담긴 것이 바로 자연계시입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이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행했던 '기퍼드 강연'은 바로 자연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명사들의 강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책의 내용으로 보아 저자는 자연계시라는 측면에서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신은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지점에서 과학지식을 어느 지점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신앙인으로서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과학이 말하는 많은 부분들이 분명 타당한 부분들이 있고, 과학의 탐구 분야가 넓어질수록 종교가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은 더 좁아질 것이고, 한편으로는 창조론에 이은 지적설계론이 종교에 대한 과학의 이러한 공격에 대항하는 것은 알지만, 철저한 과학자와 종교인 사이에는 서로 논쟁하기에는 좀더 근원적인 관점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이 '왜'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가? 또는 과학적 방법론이 신의 존재를 탐구할 수 있는 것인가? 중세의 종교가 그러했듯이 앞으로는 과학이 모든 것들 설명할 수 있다는 권위를 내세우며 그러한 권위를 인간사의 모든 면에서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등의 질문에 종교와 과학이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는 것, 사물과 세상을 다루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학이 무척이나 성공적인 방법론이기는 하지만, 다른 여러 가능성들을 희생하면서 이룩한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성공적인 체계화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가능성의 의미는 진화론에서 인간이나 영장류가 손가락이 여덟개나 열두개가 아닌 열개를 가진 존재로 진화했다는 사실에 담긴 그러한 의미에서의 가능성의 의미와 과학이 오로지 물질적인 것, 측정 가능한 것 등 만을 탐구영역으로 삼아 발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종교에서 말하는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 등의 영역에서는 아직까지 의미있는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의미에서의 여러 가능성 중 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하나의 성공적인 체계화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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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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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이라고 하면, 개인적으로는 무언가 대단한 것에 대해 언급하고 대단히 현학적인 말이나 글로 표현하고 대단한 행동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평범한 이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비슷한 감정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교육감 선거를 통해서 진보적인(?) 분들이 여럿 당선되면서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논란이 된 '학생인권'이라는 것도 뭔가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 같고, 또한 그것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대단한 행동을 해야 하고 특별한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이가 어느정도 든 세대에게는 권리를 찾는 것, 또는 누군가의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은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서 독재권력에 맞서 피를 흘리던 시절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러한 기억이 결국 인권이라는 말에 그러한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과 부담을 덧씌워 놓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담스러움을 말하는 것이 여러 부류의 사회적인 약자들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의 가치를 폄하하는 생각에서의 표현은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이니 권리, 자유를 언급할 때, 우리의 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담겨 있는 인권이란 뭔가 대단한 것이라는, 그리고 뭔가 대단한 변화를 가져와서 불안함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그러한 사고방식이, 대화를 통해 서로를 쉽게 용납하고 인정할 수도 있는 사실에 대해서 다수자 또는 권력을 지닌 편에서 너무 경직되고 완고한 자세를 취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입니다. 물론 자신들의 기득권이 더 중요한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의 심리적 장벽이 인권의 문제를 다룰 때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자가 그런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어서였는지, 이 책에서는 '인권'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엄숙하고 딱딱한 법이나 철학적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 우리가 훨씬 쉽게 받아들이고 다가설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인권의 정신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으로,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 애티커스 핀치가 말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권이 출발점이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고 상대편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라는 말은 어렵게 대단한 일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던 인권에 대해서 우리가 훨씬 부드럽게 다가 설수 있는 것, 내가 하는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도 있는 것, 그리고 매일 매일의 내 생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제도적인 틀이 중요하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우리 삶의 자세와 태도와 관계된 문제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내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받고, 장애인들이 선진국처럼 차별없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고, 노동자들이나 사회적 빈곤층이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받지 않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온전히 주장하고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은 분명 우리 사회의 대단한 변화를 의미하지만, 그러한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힘은 사회 구성원 각각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아주 단순하지만 성숙하고 고귀하기도 한 삶의 자세를 익히고 실천하는 데 있다는 말은 결국 국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사회 구성원 각각의 성숙한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 비약하자면 사회 각 구성원의 삶의 성숙도가 곧 한 사회나 국가의 인권지수라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청소년 인권, 성소수자 인권, 여성과 폭력, 장애인 인권, 노동자의 차별과 단결, 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검열과 표현의 자유, 인종차별의 문제, 제노싸이드의 9가지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모두가 한두번은 우리 사회의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었거나 매스컴의 많은 관심을 끌었던 사안들이기도 한 이 주제들은 한편으로는 세상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의견과 생각이 있을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따라서, 교육받은 환경이나 자란 환경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성수자 인권과 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무척 완고한 편이고, 나머지 주제에 대해서도 저자가 말하는 정도까지의 권리의 허용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부감이 있는 문제들도 있는데, 저자는 이러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의견의 대립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앞에서 언급한 두가지 정신외에 서로 대립할 때는 '약자의 입장에서 우선'이라는 성숙함을 요구합니다. 다수자나 권력이 있는 이들에게는 단순한 불편함이나 거부감으로 끝나는 문제들이 소수자나 약자들에게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이르게 하는 심각함을 지닌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한다면 일리가 있는 의견입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인권에 대한 문제들은 포괄적인 삶의 자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나 자신의 성숙함 또는 건강함에 대한 질문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느끼지 못했던 내가 처한 자리에서의 무감각하고 개념없음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게도 만듭니다. 저자가 말한대로 내 주위에 없기 -없다고 믿기- 때문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 성적소수자들, 아주 자랑스럽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군말않고 남자답게(?) 다녀온 군대에 대한 기억으로 인한 것일 양심적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상당히 완고한 생각은 분명 역지사지하는 자세,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저자의 의견처럼 이런 문제들이 매스컴을 통한 이슈가 아닌 내 이웃이나 동료, 가족의 문제였다면 훨씬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취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먼저 배려하고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수 있었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권에 대한 여러 문제들은 여전히 나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대단한 문제들로 생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내게 이 책을 통해 저자가 가르쳐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은, 나의 일상에서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기를 힘쓰는 것,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를 가지는 것, 그래도 이해가 안되고 무시하고 싶을 때는 약자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매스컴을 오르내리는 인권문제가 대단해 보인다면 내 삶속에서 이런 태도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세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기대하는 더 건강하고 바람직한 우리 공동체에 대한 소망이 훨씬 더 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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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절대적인 자유를 꿈꾸다 - 완역결정판
장자 지음, 김학주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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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者莊周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籧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그는 나비가 되어 펄펄 날아다녔다. 자기 자신은 유쾌하게 느꼈지만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하였다. 갑자기 꿈을 깨니 엄연히 자신은 장주였다. 그러니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만물의 조화'라 부른다.) -p98-99, 제2편 齊物論 중에서
  

 物我一體 (물아일체), 無爲自然 (무위자연)은 위의 호접몽(胡蝶夢)의 내용,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장자의 사상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절하게 그리고 많이 사용되는 한자성어인 듯 합니다. 노자의 '도道'에 대한 생각에 '무無'의 개념을 더욱 강조하여 '무아 無我', '무대 無待 '의 경지까지 확장하여, 모든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아무런 작위도 없는 무위의 경지에서 인간과 자연의 완전한 합일을 통한 완전한 자유, 절대적인 자유를 꿈꾸었던 사상가..... 이 책에 대한 해설과 여기저기 뒤적이며 장자의 사상에 대한 설명을 찾아 읽는다면, 아마도 이런 정도로 그의 사상을 간단히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을 세밀하게 읽고 스스로 내린 결론이 아니라, 막상 읽으려고 하지만 내용이 막연한지라 미리 저자와 다른 사람들이 정리한 내용을 예비지식 삼아 미리 이해를 하고 읽을 요량으로 본격적으로 읽기전에 이리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33편(내편 7, 외편 15, 잡편 11)의 이야기를 통해서 반복되는 '아무것도 하지 아니함', '본성대로 살아감', '자연과 하나됨' 등은 얼핏 이해한다면 우리가 사는 매일의 삶 속에도 담겨 있는 태도들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일상에서 받아들여 이해하는 방식과는 매우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매일의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면서 가끔씩 핑계를 대듯이 '아무것도 아니하고 본성대로 살아가며 자연과 하나되겠다'는 도피하는 식의 태도는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를 할려는 작위(作爲)에 해당되는 것이지 결코 장자가 말하는 식의 무위자연하는 모습은 아닐테니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장자의 사상을 통해서 현대인과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 또는 대안을 찾아 나선다는 것도, 현대사회를 이루는 근간 자체를 앞에 두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장자의 사상을 하나의 방편으로만 삼는 것이겠기에, 장자 사상의 진정한 알맹이는 빼고, 속살 조금과 껍질만 취하겠다는 태도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아주 단순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오류일 수 있으니, 또다른 장자 연구서들을 통해서 한번쯤 되집어보고 싶은 부분입니다.  

 이 책의 구성은 내편 7, 외편 15, 잡편 11, 총 33편의 글을 한글번역, 원문, 해설의 순서로 싣고 있습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다시 작게 단락을 지어서 적절한 분량으로 쪼개어 설명하고 있고, 원문에 대해서는 하단에 역주란을 통해서 따로 중요한 한자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원문에 대한 음과 훈이 전부 실려 있지 않아서 한자에 통달하지 못한 나같은 사람에게는 원문을 제대로 읽어볼 수 없다는 점이 불편함이 되는 듯 합니다. 물론 여느 책들처럼 음과 훈을 다 달아 놓으면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고 제대로 읽으려면 시간도 몇배가 걸리고 책 분량의 문제도 있을 것이기에, 전체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굳이 원문에 신경쓰지 않고 한글도 된 번역문을 성실히 읽는 것이 이 책을 대하는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다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천자문의  '天地玄黃'을 글자도 보지 않고, '하늘은 위에 있어 그 빛이 검고 땅은 아래에 있어 그 빛이 누르다'고 풀이한 내용만 읽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 읽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배우거나 들어서 알고 있는 것들을 실제 대하고 읽고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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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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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지 못하다', '공평하지 못하다', '의롭지 못하다' 등등... 우리가 일상 생활가운데 수시로 내뱉는 이러한 말 속에는 '정의롭지 못하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정의(正義; Justice)'에 대해서 정의(定義)를 내려보라고 한다면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시원하게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나름대로 생각의 틀안에 정의로움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 기준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자신들이 겪는 일이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의 대부분에서 그것이 바르거나 공평하거나 의롭거나 그렇지 못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반응할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이나 결론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기도 하고, 옳고 그름 등의 판단자체를 내리기가 애매한 좀더 교묘한 딜레마 상태의 경우에는  스스로 내리는 판단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면을 생각한다면 또한 각자 나름대로 형성한 사고의 틀이 엉성하기 그지없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도 만듭니다.  

 플로리다에 허리케인 찰리가 지나간 뒤에 발생한 가격폭리, 구제금융의 여파속에서 천문학적인 상여금을 챙킨 AIG 등의 탐욕(?), 그리고 사고실험으로 제안한 '철로에서 일하는 다섯 인부를 살리기 위해 다른 쪽에서 일하는 한 인부를 희생시킬 수 있는가'와 '다섯 인부를 살리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는 눈앞의 한 사람을 철로로 밀어서 기차를 멈추게 할 수 있는가' 등의 물음을 통해서 저자는 자유와 행복, 미덕이라는 측면에서의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가격폭리나 구제금융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바르지 못하다고 말하겠지만 그 사건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의해서 -관점이 자유에 바탕을 두는가 아니면 행복 극대화나 미덕에 바탕을 두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를 수도 있음을 설명합니다. 물론 철로에서 일하는 인부들에 대한 사고 실험도 세가지 관점에 따라서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자가 언급하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가지 방식은 첫째, 정의란 행복을 극대화하는데 있다는 공리주의, 둘째, 정의란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란 사상에 바탕을 둔 자유방임주의와 평등주의, 셋째, 정의는 미덕 그리고 좋은 삶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입장입니다. 저자는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러한 입장들의 주된 논점과 장단점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존 롤스까지 여러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주장과 그에 대한 반론을 통해서 정의에 대한 고민을 담은 다양한 상황을 생각하고 체험하게 만듭니다.  

 '어떤 이는 정의란 공리나 행복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선택은 자유시장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선택일 수도 있고(자유시장주의 견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행할 법한' 가언적 선택일 수도 있다(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의 견해). 마지막으로 어떤 이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독자들도 눈치챘겠지만, 나는 세번째 방식을 좋아한다.' (p360-361) 저자는 공리주의적 방식은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든다'는 점과 '인간 행위의 가치를 하나의 도량형으로 환산해 획일화하고 질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자유주의적 입장은 인간 행위의 가치를 획일화하고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와 유사하게 단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고,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게 마련인 논란과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대립하는 여러 개념들에 대한 논란과 이견의 과정에서 선택을 위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정의는 분배만의 문제가 아'닌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에서의 좋은 삶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그런 문제를 성이나 낙태만이 아니라 경제와 시민의 관심사라는 영역까지 끌어낼 수 있는 정치' 담론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1968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의 다음과 같은 연설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자가 생각하는 정의로운 사회-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의 모습-에 대해서 독자의 입장에서는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국민총생산은 한 해 8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기오염, 담배 광고, 시체가 즐비한 고속도로를 치우는 구급차도 포함됩니다. 우리 문을 잠그는 특수 자물쇠, 그리고 그것을 부수는 사람들을 가둘 교도소도 포함됩니다. 미국삼나무 숲이 파괴되고, 무섭게 뻗은 울창한 자연의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포함됩니다. 네이팜탄도 포함되고, 핵탄두와 도시 폭동 제압용 무장 경찰차량도 포함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팔기 위해 폭력을 미화하는 텔리비젼 프로그램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국민총생산은 우리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총생산에는 우리 시의 아름다움, 결혼의 장점, 공개 토론에 나타나는 지성, 공무원의 청렴성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해학이나 용기도, 우리의 지혜나 배움도, 국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나 열정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왜 자랑스러운가를 제외하고 미국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습니다. p363-364  

 우리 사회를 보면 여전히 대립과 자기주장은 넘치지만 대화와 타협과 양보를 찾아보기는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정치권과 사회는 여전히 4대강 공사의 옳고 그름을 놓고, 행정수도의 이전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며 서로 자기편이 옳다고 우격다짐을 하며, 우리보다는 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데 그러한 주장의 근저를 들여다보면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꾼들을 배제한다면-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자유와 행복과 미덕이라는 각각의 입장이 양보없이 부딪히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어떤 가치를 더 우선하느냐의 차이가 그러한 대립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서로의 가치관에 대한 이해없이는 결코 상대편과 타협하거나 대화할 수가 없는 문제이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책임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과거 5공화국 시절에 국민을 향해 총칼을 겨누었던 정권이 '정의로운 사회구현'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통치이념으로 홍보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한 구호로 정말로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었다고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문득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구호가 생각나는 것은 정의라는 미명으로 폭압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런 책 한 권을 열심히 읽고, 사람들이 읽도록 권장하는 것이 훨씬 더 정의로운 사회에 다가가는 방식이지 않을까 하는 허망한(?)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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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1 - 인사편
조용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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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浮雪居士 八竹詩 (부설거사 팔죽시)  

此竹彼竹 化去竹 (차죽피죽 화거죽) 
風打之竹 浪打竹 (풍타지죽 랑타죽)
粥粥飯飯 生此竹 (죽죽반반 생차죽) 
是是非非 看彼竹 (시시비비 간피죽) 
賓客接待 家勢竹 (빈객접대 가세죽) 
市井賣買 歲月竹 (시정매매 세월죽) 
萬事不如 吾心竹 (만사불여 오심죽) 
然然然世 過然竹 (연연연세 과연죽) 

 이런대로 저런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대로 살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대로 보고,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장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지 않아도,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내네 - 부설거사 팔죽시, p 171  
  

 <동양학 강의> 책 제목을 처음 대하면서 대학에서 강의를 듣거나 적어도 학교 다닐 때 어떤 체계안에서 학문을 배우던 형식을 생각하였습니다. 최근에 다시 노자의 <도덕경>이나 유학의 <논어>, <맹자> 등에 관심이 생겼던 터라, 더더구나 이 책을 펼치기 전에는 그러한 쪽에 대한 기대를 잔뜩 마음속에 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한데 저자가 서문에서 자신의 이 책을 '강호 동양학'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생각하고 기대하던 동양학이 아닌가 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는데,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고상한(?) 학문적인 체취가 풍기는 '강단 학문'에 취해 있는 내가 기대한 것이 바로 '강단 동양학'이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저자가 나누는 강단과 강호의 구분을 쉽게 말한다면, '강단 동양학'이 대학이나 학회 등의 기반이나 학문적인 토대를 갖추고 진행되는 것이라면 '강호 동양학'은 그런 구구절절한 학문적인 배경에 억매이지 않고 우리의 일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동양적인 삶의 자세와 사고방식, 철학과  사상, 종교 등 모든 것이 뒤섞여 이루어지는 동양인의 삶 자체에 대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단 동양학'이 칠판과 분필이 있는 교실 안에서 이루어진 강의라면, 저자가 말하는 '강호 동양학'은 강과 호수, 산과 들판을 돌며 풍찬노숙하는 과정에서 몸으로 배우고 느낀 인생의 희노애락과 깊음에 대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하니, 이 책을 통해 고상하게 논어와 맹자, 그리고 도덕경을 논하는 식의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선 접어두어야 할 듯 합니다. 

 두 권의 책-동양학 강의 1, 2-을 통해서 저자가 다루는 것은 동양의 고전이나 사상에 대한 것들이 아닙니다. 1권에서는 인물과 사회, 문화, 문명이라는 주제하에 이름과 역사와 사회와 정치, 가족과 민속과 시사와 지역과 의식주, 학문과 건강과 사고와 풍류, 기술과 유물과 재물과 연관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2권에는 자연과 천문, 종교와 운명이라는 주제하에 산과 바다와 동물과 식물, 날짜와 주역과 풍수, 종교와 유불선, 예언과 생사와 사주와 관상과 연관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저자가 강호를 풍찬노숙하면서 직접 듣고 보고 깨닫고 생각한 것들이겠기에 우리 삶의 어느 구석엔가 붙어있었던 것같은 생생함이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어디선가는 내 고향과 관련된 나도 모르던 이야기가, 그리고 어디선가는 피상적으로 국사시간에 흘려들었던 이야기가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등장하기도 하고, 이름을 외우며 그들의 사상이 어떻고 작품이 어떻고를 논하던 이들의 삶의 한부분이 눈앞에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결코 국사시간에 배우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웠던 많은 것들이 지금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며 이루어가는 것들처럼 삶의 땀방울을 머금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그런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이 책에 담긴 짧은 이야기들 속에, 사서삼경을 논하고 역사를 논하는 칠판앞에서의 강의보다 더 깊은 동양의 사상과 역사에 대한 것들이 담겨 있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있지 않을는지..... 또한 담겨진 이야기들 자체가 지금까지 이어진 우리 선인들의 삶의 행적과 체취들을 담고 있고 그러한 삶 속에 동양적인 가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겠기에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하나 하나가 동양의 사상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의 내용을 되집어가면서, 저자가 자신의 동양학을 '강호 동양학'이라고 설명하는 이면에는 -아니 자신이 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동양학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아마도 학문이란 무엇이고,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고민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사서삼경이나 먼지 쌓인 고서들을 뒤적이며 머리로 하는 작업을 학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실제 현실과 부딪쳐서 몸으로 겪으면서 배우는 것을 더 의미있게 생각한 사람이고 또한 그것을 직접 실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머리로 하는 학문을 저자는 몸으로 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학문적인 언어들로 씌여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이 생생히 담겨 펄떡거리는 신명나는 마당놀이 판처럼, 한 편의 신명나는 동양학 강의판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동양학 공부의 밑바탕은 서가에 쌓인 낡은 책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과 이웃, 산천과 만물 가운데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채워가는 것이라는, 그것이 모든 공부의 진정한 밑바탕이라는 이야기는 풍요를 쫒아 시간에 쫒기고 돈을 쫒으며 사는 현대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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