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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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지. 하나는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네. - p213 

 월드 와이드 웹 (www) -인터넷- 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현대 정보통신사회의 모습에 대한 섬뜩한 경고를 담고 있는 고전으로 조지 오웰의 '1984'를 꼽는다면 조금은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간 사회에 대한 위협은 그런 식의 시각이지 않을까 합니다. 주변환경이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근본적인 인간성 자체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감정을 지닌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은 그대로 일 것이라는 환상(?)을 유지한 채, 문제가 되는 것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각 개인에게 외부에서 강요되는 억압이나 감시, 통제 등이 더 교묘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의식되지도 않은 채 실행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라는 식의 자세가 대중의 가장 일반적인 반응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이 지닌 시각은 신선할 뿐 아니라 우리가 타성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의 섬뜩한 경고음을 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사회시스템 안으로 융화되어 간다는 것은, 인간이 빅브라더에 의해 억압받고 통제받을 수 있는 수단이 늘어나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에 일차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전달 매체 또는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인터넷에 의해 인간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하는 내용이 언뜻 동의하기가 어려운 주장일지도 모르지만,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인터넷이 우리의 생활 패턴만이 아니라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까지도 인터넷에 적합한 모습으로 바꾸어가고 있음을 여러 과학적인 연구 사실들을 근거로 지적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닫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더 많은 정보에 빠져 사는 듯 하지만 실상은 표면만 훓고 마는 얕고 피상적인 지식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현대인의 모습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주제에 관련된 정보를 어디에서 어떻게 찾으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시각은 인터넷 세상의 신기루에 취해 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현실 -우리의 현실-과 위기를 조금은 더 현실감 있게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인터넷이 우리의 뇌구조를 바꾸고 있다'는 주장을 인간 뇌의 가소성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나이가 들면서 굳어져 정해진 경로를 따라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이와 관계없이 주어진 환경과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끊임없이 그에 적절한 뉴런간의 연결을 강화하기도 하고, 자극이 감소하는 부분은 연결을 감소시키는 등의 유기적인 변화를 지속하며 주변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계의 발견에 의한 시간 개념의 변화, 지도의 발전에 따른 공간 개념의 변화, 문자의 발견과 인쇄술의 발전에 따른 사고방식의 변화 등의 예를 통해서 기술의 발전이 혁명적 사고방식을 이끌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힌 사실을 주목하게 합니다. 우리에 대한 영향력을 논하라고 한다면 그러한 기술에 결코 뒤지지 않을 인터넷도 그 기술의 특성상, 이용하는 사람들이 그 특성에 효율적으로 적응해야 하고, 그러한 과정은 뇌가 그 시스템에 적합한 형식으로 사고하고 반응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혹자는 인터넷은 다만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에 종속된 일개 기술이며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서 소통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시스템에 묶이게 되면, 결국 사람들은 인터넷이 추구하는 논리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검색은 우리가 책을 읽으면서 정독하고 깊이 생각하고 여백을 이용한 정리의 과정을 통해 내면화하는 선형적인 정보 습득 과정과 달리 끊임없이 링크와 하이퍼텍스트, 광고와 다른 정보들의 유혹(?)을 물리치거나 거치는 과정을 통하게 되고, 그러한 과정은 집중력의 약화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보를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로 흘러가게 되어 많은 양의 정보를 접할 수 있게는 하지만, 깊이있고 창의성이 넘치는 통합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현대인이 열광하는 인터넷은 결국 많은 회사들이 자신의 업무를 아웃소싱하는 식으로 회사의 효율성을 높였듯이, 사람들이 머릿속에 저장하고 기억하면서 응용해야 할 지식을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아웃소싱하게 만들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많은 정보들을 접하지만 그냥 훓어보고 링크와 하이퍼텍스트를 따라 가며 인터넷이 인도하는 대로 아무 생각없이 흘러다닌 결과는 깊이 사색되지 않은 얕고 가벼운 지식들, 그리고 그 지식들마저 뇌의 공간에 기억해서 되새김질하는 것이 아닌 기억의 공간마저 인터넷에 아웃소싱해 버리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인터넷 정보사회가 가져온 놀라운 모습이라는 것은 우리의 가장 인간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기억과 사고, 열정과 통찰 등의 모습을 잃고 링크와 링크 사이를 떠도는데 익숙해진 화석화된 뇌를 지닌 '생각하지 않는사람'으로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의 모습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인터넷을 보편적으로 사용하면서 우리 사고 속에서 일어나는 풍부한 연관 짓기를 희생하는 위협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웹을 그 자체가 네트워크인 것은 사실이지만 온라인 정보의 비트들을 관련지어주는 하이퍼링크들은 우리 뇌의 시냅스와 같지 않다. 웹의 링크는 주소에 불과하고 브라우저를 다른 별도의 정보 페이지로 안내해주는 단순한 소프트웨어 태그일 뿐이다. 이들은 우리의 시냅스와 같은 유기적인 풍부함이나 민감성을 가지지 못했다. 이리 슐만은 뇌의 연결은 "단순히 기억에 대한 접근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대부분의 경우 기억을 구성한다"고 적었다. 웹이 만들어낸 연결들은 우리 것이 아니며, 우리가 아무리 많은 시간을 검색과 서핑에 쏟는다 해도 결코 웹의 연결이 우리의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기계에 기억을 아웃소싱할 때 우리는 지성이나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 역시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1892년 기억에 대한 강의를 끝맺으며 "연결은 진정 사고다"라고 했다. 여기에 한마디 더 덧붙인다면 "연결은 진정 자아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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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자다 - 박홍규의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
박홍규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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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대단한 고급 교양물'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만' 취급하는 점에 있다. 적어도 셰익스피어 당시에는 그 작품이 대중물이었고, 지금도 영미권에서는 수많은 영화로 만들어지는 대중물인데,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대중물과 고급물의 차이란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임을 주의해야 한다. 말하자면 대중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고급이 아니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 여하튼 셰익스피어가 고급이냐 아니냐는 나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나의 관심은 그의 작품이 대영제국이 시작되는 시기에 씌어졌고, 따라서 당연히 그 제국주의를 표상하는 것이므로 그런 관점에서 셰익스피어를 재검토하자는 것이다. -p31 

 삐딱하게 읽는다는 말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긴 것이 사실이지만, 이 책은 아주 대놓고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을 몰아붙이는 면이 있어서,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셰익스피어에 대해, 또는 영문학이나 문학에 대한 전공자가 아닌 일반적인 독자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자지 못한 사람인지라 저자가 펴는 논지를 무조건 동의만 할 수도, 그렇다고 딱히 정색을 하며 반박할 능력도 없는 묘한 처지를 느끼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셰익스피어 읽기를 삐딱하게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나 자신은 저자보다는 주류의 입장에 더 동화된 한 사람일 것 같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1564년에서 1616년의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와 그 뒤를 이은 제임스 1세가 다스렸던 시기입니다. 통상적으로 '엘리자베스의 시대' 일컫는 시기로, 정치적으로는 봉건주의 국가에서 절대주의 국가로의 이행 시기였고, 국가적으로는 대영제국이 기반을 잡아가면서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드는 즈음이었습니다. 저자는 셰익스피어를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배경하에서 그러한 체제에 순응하며 시대를 읽을 줄 알았던 유능한 대중작가이자 귀족들과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한 어용작가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평가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문호라든가, 대단한 문학 작품을 써냈지만 일생의 많은 부분이 감춰진 미스터리한 작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정신에 맞게 처신하며 대중들과 권력자들의 취향을 고려(?)하여 작품을 썼던 출세주의자이자 기회주의자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자가 당시 시대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셰익스피어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셰익스피어 작품에 담긴 위대함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밝히고 의견을 나누었던 위대한 셰익스피어 이면에 숨겨진 제국주의 시대를 살다간 제국주의자이자 보수주의자였던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속에 담긴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풀어놓은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가 제국주의라는 관점에서 분석한 작품들은 '리처드 2세'를 비롯한 사극, '베니스의 상인'과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오델로', '리어왕', '맥베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태풍'입니다. 

 제국주의자 셰익스피어. 또는 출세주의자, 기회주의자, 어용작가 등의 표현이 나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귀에 익숙한 표현도, 썩 듣기 좋은 의미도 아닐 뿐더러, 한편으로는 너무 과격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저자 자신이 부분을 너무 침소 봉대한다는 생각도 들 수 있겠고, 자신이 설정한 틀안에서만 셰익스피어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다고만 하는 것에 대해서 이리 조금을 삐딱한 시선을 작정하고 들이대서 읽어보는 것도 셰익스피어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우리가 대하는 위대한 셰익스피어는 400여년 전에 실존했던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아닌, 이런 저런 연구와 토론과 각색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셰익스피어임을 인정한다면, 저자와 같은 독자적인 셰익스피어 독법도 결국은 '그의 위대함을 손상하기보다는 그의 위대함을 더 공고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여하튼 이 책의 '셰익스피어는 제국자의자'라는 논점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음을 떠나, 대부분의 사람이 '위대하다'고 치켜세우기에 바쁜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을 독자적인 관점에서 읽어내려고 한 저자의 노력에는 큰 박수를 보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든 인물들은 자기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투의 가식이 많고 부자연스러운 언어로 말하고 있다..... 대사의 처음부터 과장이 엿보인다..... 저자는 그가 묘사하고 있는 사건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극중 인물에 대해 무관심하기까지 하다. 그는 무대만을 의식하여 극중인물을 만들어냈고, 극중인물들에게 관중의 관심을 끌 말만 시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이나 인물의 행동 또는 고통을 믿지 않는다. - p23, 톨스토이의 <셰익스피어와 드라마> 중에서 

 그의 많은 희곡은 동화에서 볼 수 있을 만큼의 신뢰성도 없다. 생계의 수단을 제외한 어떤 경우에도 그가 자기 희곡을 진지하게 간주했다는 증거는 없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작품이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미묘한 심리적 관찰로 가득 차 있으며, 일관성 있는 철학에 심오한 사상가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p24,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 중에서 

 내가 상상하는 셰익스피어는 시골의 중산 평민계층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난으로 인해 대학교육도 못 받고 지내다 18세라는 나이로 당시 신분 상승 방법의 하나인 돈 많은 집에 장가를 들었다가, 연기와 글쓰기에 재주가 있어 그것으로 열심히 노력해 출세한 젊은이, 그리고 당대 지배계급인 귀족들에게 잘 보여 당대 최고 인기 작가에까지 올랐다가 만년에 낙향하다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 말하자면 그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은 출세주의자이자 기회주의자였다..... / ..... 나는 그의 예술이 지금까지도 수많은 해석을 낳은 이유의 근본은 그의 기회주의가 낳은 애매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피비린내 나는 경쟁사회에서 그는 인기를 끌기 위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작품을 써야 했다. 그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작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언제나 진보적인 목소리도 그의 희곡에 담아냈다. 그것도 아주 적당하게 말이다. / 그런데 그의 보수주의의 본질이 제국주의인 점은 모두가 제국주의자였던 당시는 물론,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점이 밝혀져야 한다..... - p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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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시대 크로노스 총서 11
프랭크 커모드 지음, 한은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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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직자들은 매년 예수의 수난에 일어났던 일들을 그대로 따라 했고 평신도들 역시 자신들이 직접 만든 연극으로 이를 표현했다. 예컨대 성 요한이 그리스도의 의복이 찢어졌다고 선언하면 제단에서 적절한 순간에 리넨천 두 조각이 들춰진다. 그 후 미리 마련된 석관에 그리스도의 성체가 경건하게 안치된다..... 이런 표현 행위는 전문 연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유사 연극의 전통이 이어졌다는 견지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16세기 후반에 이르자 전문 연극인들이 교회의 연극 행위를 흡수하고 대중화했다. 그들은 연극을 정적이고 헌신적인 근원에서 끌어내어 런던의 여인숙과 극장으로 옮겨놓았다. 연극이 상업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전례로 규정되던 세계가 이제 자본과 노동에 좀더 연관이 있는 세계로 대체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전례의 세계에서 시간 자체는 다른 의미를 지녔었다. - p18, <종교개혁과 왕위 계승의 문제> 중에서 

영국의 역사에서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튜더 시대 (1456~1603) 말기로부터 '스튜어트 시대' (1603~1688) 초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1564년 4월 23일(?)에 태어나 1616년 4월 23일 사망하였고, 그가 태어나기 6년전인 1558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여 44년간 영국을 통치하였고 1603년 제임스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지상에서의 52년의 삶의 대부분은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해가는 시기였던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였고, 생애 후반부의 10여년은 제임스 1세 초기에 해당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엘리자베스 시대 -이 용어는 편의상 제임스 1세 초까지 망라하기도 한다고 하니-와 동일한 시기로 인식되고는 하는 듯 합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기 약 70여년 전인 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 도착하면서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그 이후 100여년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에 의해 식민지가 건설(?) 되던 시기였고, 셰익스피어가 살던 엘리자베스의 시대는 영국과 프랑스로 식민지 건설의 주도권이 옮겨지고 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종교적인 면에서는 공식으로 공표된 영국 국교회에 의해 카톨릭이 억압을 받던 시기였고, 공식적인 결혼을 하지 않은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 계승 문제가 제위내내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책 제목이 <셰익스피어의 시대>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앞 문단의 간략한 서술은 역사적인 사실들에 대한 서술이기는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시대에 대한 간단한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중심을 엘리자베스 1세라는 제왕을 중심으로 그 사회가 움직이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의미에서 엘리자베스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고, 셰익스피어는 그 시대의 일부로서 그려질 수는 있지만, 중심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제목 <셰익스피어의 시대 The age of Shakespeare>가 암시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저자는 이 책의 주된 흐름을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을 좀더 중심에 놓고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뿐만 아니라, 그가 주변에 끼친 영향이나 그의 작품이 가지는 의미, 인간 관계 등에 대해서 서술하겠다는 의도를 담은 것이라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저자 커머드는 셰익스피어의 런던 입성을 시작으로 작가이자 극장의 소유자로서의 셰익스피어의 여정을 따라가며,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공연 순서에 따라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작품의 사회적 배경과 의미, '당시의 작가와 후원자간의 의존관계', 공연했던 극장이나 무대에 대한 기록 등과 함께 그가 살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연극에 미친 영향들에 대해서도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말하는 셰익스피어의에 대한 많은 부분은 -셰익스피의 작품의 저작 순서에 대한 일치된 의견이 아직 없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실제에 살을 많이 붙인 추론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저자 나름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가장 그럴듯한 경로를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는 하겠지만 사실보다는 저자가 해석한 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에 대한 견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에 대해 미숙한 독자로서 -특히 셰익스피어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고 그의 작품을 모두 읽고 어느 정도 이해하고있는 독자가 아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분석한 내용들에서 느끼는 어려움이 상당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옮긴이도 언급한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언어가 이중적이고 여러가지 함의를 담은 것들인 것처럼, 저자 커머드의 서술 방법도 주제에 직접적으로 달려들지 않고 빙빙 돌리는 듯한 경로를 밟기 때문일 듯 싶은데, 한편으로는 자신의 넘치는 지식이나 하고 싶은 말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내 뱉은 결과물은 아닌지 하는 불편한 시선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이 책을 읽는다면, 머리가 좀 아프겠지만 시간을 많이 들여서 세심하게 읽든지, 이해가 될 때까지 여러번 반복해서 읽든지, 아니면 좀더 많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이해의 지평을 넓힌 다음에 느긋하게 읽는 것-개인적으로는 이 방법이 제일 좋을 듯-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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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
빌 브라이슨 지음, 황의방 옮김 / 까치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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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인간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적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작품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희극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천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단시들만이 전해졌다면, 그를 아주 검은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을 보고 우리는 그를 우아한 사람, 지적인 사람, 철학적인 사람, 우울한 사람, 책략에 능한 사람, 신경질적인 사람, 쾌활한 사람, 사랑이 넘치는 사람 등으로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작가로서 셰익스피어는 이 모두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셰익스피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거의 알지 못한다. -p27~28,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찾아서> 중에서 

 '깔끔하게 턱수염을 기른, 머리가 벗겨졌지만 그리 못생기지 않은 40대 남자..... 왼쪽 귀에 금귀고리를 달고..... 표정은 자신감이 넘치고 매우 호쾌하다. 이 남자는 당신의 아내나 다 자란 딸을 가볍게 맡길 만한 남자는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로 알고 있는 '챈도스 초상화'에 대한 작가의 설명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생존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무도 그가 진짜 셰익스피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 합니다. 다만 그리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지요. 셰익스피어의 초상으로 알려진 작품은 두가지가 더 있다고 합니다. 1623년 나온 셰익스피어 전집- First Folio-의 권두화로 실린 동판화-드뢰샤웃 판화-와 그의 유해가 묻혀있는 홀리 트리니티 교회의 벽으로 된 셰익스피어 기념물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채색된 실물대의 조상인데, 두가지 모두 셰익스피어의 사후에 그린 것으로 솜씨가 별로 좋지 않았던 화가들에 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한눈에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라고 알고 있는 그림은, 실은 신빙성이 높지 않은 작품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림을 모두가 그렇게 믿고 서로에게 말하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100여년 전의 명성황후의 모습과 사진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일어나고는 하는 논란을 생각해 보면, 400여년 전의 셰익스피어의 모습에 대한 논란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역사적인 자료로 당연시하며 존중하는 것들의 허술함 대해서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묘한 것은 우리가 그의 초상을 보면 즉시 그가 셰익스피어임을 알아보지만, 실상 우리는 그의 진정한 모습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생애나 성격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역시 비슷하다. 그는 잘 알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이 책은 이처럼 어설픈 초상화 세개를 가지고 누구나 그리 믿게 된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냈듯이, 우리가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알고 있는 빈약한 몇가지 사실만을 가지고 그의 완벽한 생애를 무리하게 재생해 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나온, 실제 알려진 사실보다 더 많아져버린 추측과 억측들, 그리고 그것들이 사실처럼 호도되어 버린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너무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어떤 것은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이야기되고 있기에,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상상을 가미한 사람들의 추측인지가 헛갈리는 것이 사실이기에, 실제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셰익스피어의 일생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사실과 추측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구분해 나가며, 현재까지의 자료에 근거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셰익스피어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처음 셰익스피어의 생애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겠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들을 분명히 인정하고, 타당성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 또한 충분히 남겨두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생애와는 별개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평가는 다양한 작품이 실제로 남아 있으니-실제 원작인지, 가필되거나 고쳐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실제 셰익스피어의 생애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풍요로운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도 그의 생애 자체보다는 더 다채로운 이야기들과 평가들이 나올 수 있으리라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이겠지요.  

 이 책의 내용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출생에서 죽음-1564~1616-까지를 다루는 앞부분-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보다는  마지막 9장의 '이색 주장을 펴는 사람들'편을 가장 흥미롭게 읽을 것 같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지금까지 알려진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담은 부분인데, 베이컨이나 옥스퍼드 백작 등이 실제 저자라는 주장의 허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셰익스피어가 죽고나서 200여년 동안 그의 저작에 대해서 의심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800년대 초반 델리아 베이컨이라는 미국 여성의 알수 없는 확신에서 시작된 셰익스피어가 진짜 작가가 아니라는 집착에 사로잡힌 연구의 결과가 뜻하지 않게 베이컨 저작설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였고, 그러한 주장이 일종의 종교처럼 번지며 소문이 소문을 낳는 과정을 거쳐 진실인양 확대 재생산 되고 있음을 추적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셰익스피어를 대신할  후보자로 베이컨에서 시작된 명단은 옥스퍼드 백작, 크리스토퍼 말로, 펨브로크 백작부인 메리 시드니 등을 거쳐 이제는 그 수가 50여명에 이른다고 하니, 호사가들의 실없음에 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실제 현재 우리가 접하는 셰익스피어의 명성은 분명 400여년전에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적인 작가였던 인간 셰익스피어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타 다른 주장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의 초상을 보며 셰익스피어라고 느끼듯이 그가 남긴 작품들과 그의 생애의 흔적들은 그가 분명 위대한 작가였고, 그러한 작품을 남길 만한 재능과 환경 속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초상속의 셰익스피어를 아는 것이 실제 셰익스피어를 아는 것과는 크게 상관이 없듯이, 우리가 접하고 인정하는 셰익스피어의 명성과 탁월함이라는 것도 400여년 전에 존재했던 인간 셰익스피어 자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라는 명성과 탁월함 속에는 400여년의 세월동안 그의 작품을 보존하고 정리하고, 시대에 맞게 이리저리 다듬고, 그 안에서 사람들에게 들려줄 탁월함과 흥미로운 것들을 찾아서 알린 수많은 학자들과 연극인들, 책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의 연극에 열광할 줄 알았던 관객들의 삶이 켜켜이 쌓여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리 주장할 수 있지만 그러한 영광의 근본 바탕은 물론 400년전 실존했던 스트랫퍼드의 윌리엄 셰익스피어인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겠지요. 이 책은 우리가 아는 영광의 관을 쓰고 있는 셰익스피어라는 신화적인 인물이 만들어지기 전의 인간 셰익스피어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을 독자들에게 진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바탕 위에서 이제는 그의 작품들의 탁월함을 감상하며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대한 문헌은 그 시대에 그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을 만큼 있습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사실 우리는 그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 어떤 극작가보다 셰익스피어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26, 데이비드 토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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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셰익스피어 How To Read 시리즈
니콜러스 로일 지음, 이다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욕심은 아닐 것입니다. 많이 알려지기도 했고 또한 널리 읽히기도 하지만, 각 작품에 대한 이해나 해석 또한 알려지고 읽힌 만큼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라, 그러한 다양함이 결국 의욕을 가지고 덤벼드는 나를 이내 기가 질리게(?) 하고는 합니다. 그저 수수하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즐거움을 느끼기 보다는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의욕이 앞선 때문이겠지요. 별반 다져진 기초가 없는데, 그래도 대가의 작품을 읽은 척이라도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니, 결국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초보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읽는 즐거움마저도 누리지 못하고 고꾸라질 수 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앞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번역본이 아닌 영어로 된 원문을 읽어야만 제대로된 작품감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는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번역을 하기는 하지만, 언어가 바뀌는 순간, 셰익스피어가 영어를 통해 꾸몄던 세밀한 말이나 단어의 배열을 통한 말장난이나 숨은 의미, 그리고 음율 등이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가지 의미는 전달할 수 있겠지만, 말을 통해서 그 배후에 이중 삼중으로 숨겨진 말의 의미는 전달되지 않으니 번역본을 읽는 것은 셰익스피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에 역자가 의도하고 이해한 부분만을 읽고 이해한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한 편으로는 영어를 웬만큼 한다는 사람들도 원저작을 제대로 읽고 그 숨겨진 작가의 의도까지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도 하니, 다른 언어를 쓰는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번역본이라도 감지덕지하며 자꾸, 자꾸 읽을 수밖에요..... 

 제목만 보면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처음 대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한 안내서로 느껴집니다. 실제로 저자의 의도는 독자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생생하게 읽어 낼 수 있는 방법, 즉 셰익스리어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니까, 분명 독자들을 셰익스피어의 작품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책 역시 영어 원서를 우리말로 옮긴 책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번역서로 읽는 것에서 오는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점이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역자도 후기에 그러한 아이러니를 이리 토로하고 있습니다. '<How to read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의 원문의 말맛을 깨우치기 위해 만든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읽을 계획이 없는 사람에게 이 책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읽을 실력이라면 독자 여러분이 이 <How to read 셰익스피어>를 번역본으로 읽고 있을까? 이 책 역시 원문으로 읽고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역자의 말대로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읽을 수 없다고 그의 위대함을 엿볼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역자는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읽을 실력은 안되지만, 그 말맛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이 책과 함께 원전을 곁에 두고, 이 책에서 인용된 원전 부분을 먼저 읽고 저자의 설명에 귀기울여 볼 것을 제안합니다. 그 후에 번역본으로 온전한 작품 전체를 대하고, 여력이 생긴다면 온전한 원전 읽기를 시도해 보기를..... 

 번역본으로서 이 책을 대한다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신선함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가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룬 천재임을 인정하고, 그가 사용한 언어의 맛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방법으로 저자가 제안한, 실마리가 되는 단어 하나로 작품 전체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실타래 같이 얽힌 언어의 마법을 풀어보는 방식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의 문을 열어 보이는 듯 합니다. 톡톡 튀는 재치꾼-베니스의 상인-, 환영-율리우스 카이사르-, 사랑에 흔들리는-좋으실 대로-, 벙어리들-햄릿-, 눈을 멀게하다-오셀로-, 안전한-맥베스-, 끄덕임-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등 일곱 작품 속에서 각각 단 하나의 단어만을 끄집어내서 전체를 꿰뚫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셰익스피어를 이해하는 탁월한 방식을 하나 깨우치게 된다고나 할까요....  부족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자꾸 자꾸 읽을 수 있는, 단어를 통한 좀 더 풍성한 상차림의 방식을 배웠다는 즐거움을 주는 책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언제나,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전제하에, 즉 움직임, 몸짓, 만들기, 행위 하기의 전제하에 해석되어야 한다. 앞으로 명확하게 보여주겠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이고 강렬한 느낌은 그가 언어를 사랑한다는 느낌이다. 말을 가지고, 그리고 말이 초래할 수 있는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은 제 생명이 따로 있거나 기계적인 힘이 있는 듯 느껴진다. 하나하나가 작은 검색 엔진이며, 참견쟁이 꼬마 도깨비이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기이한 생물 같다. -p12, 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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