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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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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준만의 강남 좌파론 

  '강남 좌파'라는 용어는 강준만 교수가 2006년 5월 <인물과 사상>에서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 않은 이들'이라고 정의하면서 사용되었지만, 노무현 정권이후에는 '보수 진영이 486 세대의 진보인사들을 꼬집어 사용'하면서 '정치적, 이념적으로는 좌파지만 행동은 '강남 주민스럽다'는 상당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주로 비판적으로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물론 강준만 교수는 단순히 보수 진영에 부정적인 딱지 붙이기에 이용하라고 '강남 좌파'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 축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 '강남 좌파'적 성향의 집단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정당한 평가와 비평을 하기 위한 시도를 한 것이라고 보아야 겠습니다. 이 책의 서론에 강준만 교수는 당시의 <강남 좌파: '엘리트 순환"의 수호신인가?>라는 글에서 제시했던 강남 좌파 현상의 명암을 다시 싣고 있습니다. 긍정론으로는 '첫째, 상류층 사람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하는 것은 그들의 파워를 생각한다면 하층 계급에 큰 힘이 된다', '둘째, 상층에도 진보가 있고 하층에도 진보가 있다면, 그 반대도 성립할 것이고, 이는 갈등의 양극화를 막는데 도움이 된다', '셋째, 위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상류층에 속하면서도 하층계급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맙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론으로는, '첫째, 권력과 금력을 누리면서 양심과 정의의 수호자로 평가받는 상징자본까지 갖겠다는 것은 지나치다', '둘째, 진보를 더 많은 권력 및 금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셋째, 강남 좌파의 진보 프로그램은 말로만 강경한 속성이 있어 실천보다는 당위의 역설로 그칠 가능성이 높고, 오히려 해낼 수 있는 실천마저 어렵게 만들수 있다'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이어서 '강남 좌파에 대한 논의는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엘리트의 본질과 맞닿은 문제'이며, '강남 좌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엘리트의 위선'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강남 좌파는 이념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엘리트에 관한 문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만이 생산적인 논쟁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르러서 강준만 교수는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다' 라고 선언합니다. '좌우를 막론하고 리더십을 행사하는 정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는 학력이나 학벌, 생활수준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야 하므로' 정치 영역의 좌파는 모두 강남 좌파일 수 밖에 없고, '우파라도 서민을 상대로 포퓰리즘 자세를 취하고, 말로는 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이타적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볼 때, 이러한 행태에 좌파의 요소가 농후하고 좌파적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노무현과 유시민, 문재인, 조국 등의 당연시 되는 인물들 뿐 아니라, 박근혜와 오세훈 같은 우파적인 인물들에 대한 분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강남 좌파 (또는 우파)와 그들의 초상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와 같은 강남 좌파의 실체에 대한 논의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3장 '노무현 시대의 강남 좌파 논쟁'에서부터 10장 '오세훈의 따뜻한 보수'에 이르는 각각의 인물에 대한 강남 좌파론에 입각한 분석 , 평가 및  비판에 담긴 내용 들이었습니다. 현재 우리 정치계를 뒤흔들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을 그들이 공인으로서 살아온 날 들의 무게만큼이나 쌓인 신문 등의 각종 자료를 통해서 날카롭게 분석하고 평가하고 비평한 내용은 그저 매스컴에 노출된 이미지를 통해 막연하게 형성된 그 인물들에 대한 나의 관념과 평가가 얼마나 허약한 바탕위에 부질없이 지은 것들인지를 새삼 느끼게 만들고 반성하게 하는 점이 있기에, 내게는 무척이나 흥미롭고 관심이 가는 부분이었던 듯 합니다. 국민들에게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노무현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에 담긴 강남 좌파 논쟁, 문국현의 창조한국당의 실패한 정치실험과 오마이뉴스의 강남 좌파 띄우기, 진보집권플랜이란 책을 통해서 다시금 부상하는 조국과 오연호, 그리고 오마이뉴스, 대부분의 이슈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여전히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로서 흔들림이 없는 박근혜의 인기비결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문제점, 분당 재보선을 통해 재기한 손학규의 과거와 미래의 정치역정에 대한 담론, 노무현 정신을 팔고(?) 다니는 노무현의 후계자(?) 유시민의 마키아벨리적인 이중성과 강약점, 최근 '문재인의 운명'이란 책으로 국민들의 관심의 중심으로 돌아온 문재인의 가능성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과거의 역할에 대한 반성 및 미래의 능력에 대한 평가의 부재, 무상급식 찬반 투표를 몰아붙이며 장렬히 전사(?)한 우파의 노무현을 연상시키는 오세훈의 전투적 프레임 전략 등의 이야기에는 새로운 정권을 탐내는 -노무현 대통령과 아마도 문국현을 제외하고- 우리 시대의 강남 좌파들에 대한 모습-적어도 신문 등의 매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던 그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자신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거나 비판했던 이들에 대한 상당히 낯선 모습과 비판을 마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의 강남 좌파 (또는 우파)의 초상이라고나 할까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벽' 대신 '다리' - 소통하는 정치를 위한 저자의 고언 

 아마도 강남 좌파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는 '다음 정권은 어디로 넘어갈 것인가' 관심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들 대부분도 차기 또는 차차기 대권의 유력한 후보들이라는 면에서, 그리고 우리의 정치가 언급된 정치 엘리트의 문제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관심과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논점은 강남 좌파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우리 정치권의 유력한 인물들을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강남 좌파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짚어보고, 그 안에 담긴 가능성과 부족함을 극복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매번 정권이 바뀌면서 우리가 확인하고 또 확인한 사실이 정당과 정치인들이 표방한 이념과 노선보다는 각기 생각이 다른 정치 세력과 유권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타협과 화합을 이뤄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엘리트 정치의 연장으로서의 강남 좌파론이 가지는 문제점이자 우리 정치의 문제점이 '인물중심주의'와 '승자독식주의'에 있다고 보고, 저자는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통과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승자 독식에서 자유로운, 권력자의 자의에서 자유로운 인사와 예산 영역의 투명한 제도화를 통한 비무장지대의 확대', '전부 아니면 전무인 인물 중심형 참여에서 벗어나 모든 정치 세력과의 소통을 배제하지 않는 목적 지향형 참여로의 인식의 전환', '권력 중심적인 인정 투쟁-세상사람이 알아주는 맛을 목적으로 입신양명을 추구하는 방식-문화에 대한 성찰 및 극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정치에서는 집권을 위해서는 이미지화된 스타 정치인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고, 열성적인 지지자를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소통이 거부되는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편향성(당파성)을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엄연한 현실임을 부인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저자의 말처럼 그의 소통을 위한 고언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수 밖에 없을 수도 있지만, 대중의 입장에서는 '결코 체념해 버릴 수 없는 꿈'이기도 하지 않을는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다음 대선에서는 대권을 위해 허망한 공약을 부풀리는 정치인들 보다는 대결과 갈등보다는 소통과 화합을 이루어가는, 그리고 과거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할 줄 아는 그런 강남 좌파 (또는 우파)를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이젠 그 누구건 더 이상 진보의 집권을 말하거나 보수의 집권을 말해선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노무현 정신의 계승을 역설하는 문재인 등 친노 세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권이 나라를 망친다"고만 외쳐댈 게 아니라, 왜 노무현 정권 시절 반대파들도 그런 말을 했는지, 이명박의 지지율이 그래도 노무현의 재임 때보다 더 높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게 모두 조중동 탓인지, 우리는 선이지만 그들은 악이라는 것인지, 양쪽이 더불어 살 수 있게끔 하는 비전은 무엇인지, 이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닐까? 진보건 보수건 그들은 이미 집권을 통해 처절한 실패를 온 국민에게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국민은 그들이 무슨 이유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인지 전혀 듣지 못하고 있다. '우파들의 반대와 저항 때문에' 또는 '좌파들의 반대와 저항 때문에'라는 이유만 지겹도록 들었을 뿐이다. 그게 진실이라면 양쪽 모두 어떻게 앞으로 그런 반대와  저항을 넘어서겠다는 말을 할 법도 한데, 또 이에 대해선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양측 모두 목숨 걸고 상대편을 적대시하도록 부추기는 '증오 마케팅'의 현란한 쇼만을 원 없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제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된다. 보수건 진보건 집권을 말할 게 아니라 집권 이후 어떻게 소통과 화합을 이루겠다는 청사진을 말해야 한다. -p405~406, 맺는말 '소통과 화합을 위해서' 중에서 

 (출판사 제공도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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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질문입니까? -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최고의 인재를 찾아내기 위해 던지는 60개의 질문과 천재적인 답변들
존 판던 지음, 류영훈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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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거 아는가? 세상이 정말로 흥미로워지는 시점은 바로 겉보기에는 무해한 일상적 질문 뒤에 숨겨진 생각과 쟁점을 탐구하기 시작할 때라는 것을. - p9, <한국의 독자들에게> 중에서  

 달팽이도 의식이 있을까? 60여개의 질문 중에 가장 흥미롭고 눈에 뜨였던 질문이지만 막상 내 생각을 정리하려니 머릿속에서 "있을까? 없을까? 어떻게?" 등의 생각만이 이리저리 맴돌며 그럴 듯하게 정리된 생각이 만들어지질 않습니다. 저자가 말한대로 먼저 '의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답을 해야 할 것이고, 또한 '그런 의식을 어떻게 우리가 파악할 것인가?'의 문제도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의식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잔뜩 늘어 놓은 뒤에 '결국 우리는 달팽이의 의식에 관해서는 달팽이만큼도 모른다'고 손을 들어 버립니다. 분명 달팽이 나름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또한 우리가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요'라고 간단히 넘어가 버리는 셈입니다. 무척 솔직한 답변이지만 왠지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사과란 무엇일까? How would you describe an apple? 처음 대할 때, 이 문제에 대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듯 합니다. 빨간 모양의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물론 훨씬 큰것도, 더 작은 것도 있고, 청사과도 있지만...- 동그란 과일, 안은 하얗고 과즙은 달콤하기도 하지만 완전히 익지 않으면 신맛이 나기도 하는... 등등의 실제 과일로서의 사과에 대한 표현이 나의 대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사과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내 사고의 단순함과 내 대답의 순진함(?)에 이내 부끄러움(?)이 솟아 납니다. 성경속에서는 인간을 유혹하기 위한 선악과였고, 뉴튼에게는 만유인력의 문제였으며, 빌헬름 텔에게는 아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한 과녁이었던 과일. 화가에게는 너무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는 정물의 대상이고, 수학자에게는 기하학적 관점에서 결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는 '사과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복잡성을 지닌 대상이며, 식물학자에게는 배과 과일로 장미과의 사과 나무속에 속하는 ...이라는 설명으로 시작할 수 있는 과일. 요리사에게는 돼지고기 요리와 찰떡 궁합을 과시하는 과일이고, 과일 장수에게는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는 상품이고, 아이폰의 애플에게는 세상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자신들이 상표..... 가장 고귀한 과일임에 틀림없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 아로새겨진 사과는 단순히 과일로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넒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합니다.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하나? 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옥스브리지의 면접관들이 입학 논술시험을 치르러 온 수험생에게 낸 60개의 문제들을 모아 놓고, 저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적절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그 물음들에 대한 답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저자가 적은 대답은 차치하고서, 출제된 문제들만 먼저 들여다 보면 첫 질문이 풍기는 포스(?)처럼 까다롭고 이상하고 기이한 문제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아이들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했다면, 조금 이상한 녀석 또는 엉뚱한 녀석으로 취급했을 수 있는 것들, 심하게 말하면 어딘가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을 만한 질문들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옥스브리지의 논술시험에 나왔다고 하니 감히 그런 식으로 매도할 수는 없는 일이고, 세상을 바라보고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서 접근하는 우리 식의 방식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도 같습니다. 여하간 주어진 질문들이 교묘하고 기이한 만큼 수학 문제를 풀듯이 딱 떨어지는 답이 있을 수는 없는 문제이고, 중요한 것은 이 문제들을 대하면서 얼마나 다양하고 깊이있게 생각을 하고 주어진 주제에 대해 얼마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그리고 때로는 질문만큼이나 기이하고 교묘하며 재치있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인 것 같습니다. 또한 이런 기묘한 질문을 쏟아내는 면접관들의 관점도 정답을 찾아서 공부만 한, 성적은 좋지만 평범한 학생들 중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사고체계를 작동하여 깊이 있고 창의적인 사고 영역까지 도달할 수 있는 정신적인 예리함을 지닌 학생을 찾아내는 데 주안점이 주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잠시 멈추어서서 생각하는 여유를 갖는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자신이 답한 질문들의 난해함과 그런 문제에 그럴 듯한 대답을 써 내려간 자신의 박학다심함이 아닌, 기묘한 문제들 앞에 서서 잠시 생각하며 그 문제들을 바라보노라면 세상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흥미로움을 갖는 것은 우리가 일상을 타성에 젖어서 흘려보내는며 무료하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그런 일상을 조그만 비틀어서 생각하고 호기심을 보인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에 주어진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지식과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라는 이야기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우리 나라에서 이 책이 흥미를 끌고 인기를 얻는다면, 결국은 생각의 즐거움을 얻는 신선하고 자극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보다는 입시와 면접이라는 지식과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방편으로서의 기대감 때문이지 않을는지 하는 노파심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노파심과 별개로 이 책을 대하는 모든 이들이 -어른들도, 학생들도, 아이들도- 긴장을 풀고 마음 편히 자신만의 대답을 찾으며 즐길 수 있는 흥미로운 독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만약에 영리함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없다면 허풍으로 당혹케 하라. - 미국 코미디언 '필즈' 

 (출판사 제공 도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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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은 왜! 사라지는가 - 배부른 세계의 종말, 그리고 식량의 미래
빌프리트 봄머트 지음, 전은경 옮김 / 알마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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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의문 발표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도우려면 배만 불릴 것이 아니라 배를 불릴 수 있는 사람으로, 자기 소유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자기 자신과 이웃을 부양할 수 있는 농민들로 만들어야 한다.' 자립을 위한 지원, 즉 낚시질을 가르쳐야 한다는 가난한 자들의 격언이 회의장에 퍼졌다. 배고픈 사람에게 생선 한 마리를 주면 그는 하루 동안만 배가 부르지만, 낚시질을 가르치면 늘 배부르다는 격언이다....(하지만) 세계식량회의는 어스름한 회랑이나 로비에서 일의 전개에 영향력을 미치는 다른 신호와 다른 관심사를 따랐다. 식량농업기구의 방향을 뒤에서 조종하는 정치적, 경제적 로비스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p315

 분명 아직까지는 곡식의 생산량이 세계를 먹여 살릴만큼은 되는 듯 한데, 왜 인류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고, 기아는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이 책이 제기한 인류의 식량문제를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먼저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 제목처럼 '식량은 왜! 사라지는가?' 또는 '최근 곡물 가격이 롤러코스터를 탓던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물을 수도 있겠고, 미래를 생각한다면 '21세기에는 인류의 식량난이 해결될 것인가?'라는 순진한 의문에서부터 현재의 세계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분명 '21세기는 새로운 기아의 세기가 되지 않을까?'라는 비관적인 생각까지 다양한 의문들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주변에 식량문제로 인한 위기가 닥치지 않았기에 마음에 여유가 조금 있을 수는 있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지구상의 곡물 - 즉 식량-이 사라지게 되는 이유들을 들어보면, 분명 식량문제에 대한 인류의 미래가 그리 희망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식량은 왜 사라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많은 부분은 이미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들의 반복입니다. 꼭 식량과 연관된 주제가 아니였고 또한 단편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기후의 변화와 땅의 사막화, 육식의 증가에 따른 사육을 위한 곡물 사용의 증가, 바이오 연료와 경쟁하게 된 곡물시장의 사정, 대형화와 기계화 된 농업방식으로 인한 소농의 몰락 등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저런 문제들과 얽혀서 우리들의 귀에 익은 이야기들입니다. 다만 그것들이 이 책에서처럼 심각해지는 식량문제와 연관되어 한꺼번에 독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적이 많지 않았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는 현재와 미래의 식량 위기의 원인으로 기후변화가 가장 중요한 요인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온 상승이 가져오는 환경변화가 결국 많은 지역에서의 수확량 감소를 초래하고 직접적으로 기아와 연관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바람과 물에 의한 침식과 염분화로 인한 비옥한 토양의 감소, 농업에 필요한 물 비축량의 감소 및 낭비, 고성능 작물이나 대량 축산 등으로 인한 물사용량의 증가 및 종의 다양성 소멸, 그로 인한 질병에 대한 취약성 증가, 인류의 육식 소비 증가로 인한 곡물을 사용해야만 하는 대량 축산에 대한 의존성 증가, 바이오 연료에 대한 갈망과 환상으로 인한 곡물의 연료화 경향, 인구의 과도한 증가 등이 저자가 지적하는 최근의 세계 식량 위기의 원인들이자 미래 인류의 식량난을 부채질하는 원인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직접적인 원인들의 이면에 은밀히 존재하는 집권을 위해 식량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을 거부하고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이용하는 부도덕한 정권들, 지구 반대편의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녹색혁명 -농업의 대형화 상업화로 이해해도 될 듯-의 환상에 빠져 가난한 나라들을 위한 현실적인 개선안에 딴지를 거는 선진국들과 거대 농업 콘체른의 뻔뻔함, 선진국 등에서 식량 문제가 어느 정도 완화된 뒤에 농작물 등과 관련된 연구비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정상적인 연구를 시행할 수도 없고 획기적인 결과물을 도출할 수 없게 된 현재의 상태, 식량문제를 해결했다고 환호했지만 결국 물부족 등의 문제를 더 부채질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진 자, 부유한 자들의 배만 불린 녹색혁명의 적나라한 실태 등에 대한 저자의 고발은 인류에게 닥친 식량문제에서 더 큰 걸림돌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끔씩 식량 안보에 대한 논쟁이 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최소한의 식량을 자급자족할 능력을 보유하지 못한다면, 식량이 넘쳐날 때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곡물 공급이 부족하게 되면 우리나라도 꼼짝없이 거대 곡물 콘체른이나 식량 수출국의 횡포에 그대로 노출되어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염려가 그러한 논쟁의 주요 요지일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 앞에서 각종 FTA 와 산업화의 진행으로 인해 갈수록 뒷걸음질하는 우리 농업의 미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그리 희망적일 수는 없겠지만, 저자가 다룬 아프리카 등의 소농의 활성화 방안이나 임업과 농업의 혼농 성공 등의 다양한 사례들이 우리의 현실에서도 좀더 튼튼한 농촌의 기반을 다지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2008년의 식량위기가 우리에게 큰 생채기를 낸 것은 아닌 듯하지만, 그러한 영향력에서 우리나라라고 안전하게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설탕이나 밀가루 등의 몇몇 식료품의 가격 문제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그런 개별 문제를 난감하게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을 더 근본적인 부분에 다가서게 하고, 그 문제가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닌 우리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문제 제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다가선 미래의 식량 위기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합리적인 대안과 성공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면에서 저자의 성실한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또한, 냉정하게 외면하는 것보다 나을수도 있지만, 우리가 가난한 나라를 돕겠다고 별 생각없이 보내는 헌옷가지가 그 나라의 영세한 사업가를 파산하게 만들수도 있고, 우리가 보내는 빵 한덩어리, 고기 한 조각이 현명하게 계획되지 않는다면 온갖 어려움 속에서 버티는 그 나라의 영세한 농부를 절망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 항상 기억할 수 있기를....

 국제정치는 성경공부 모임이 아니다. 여기서는 영향력과 돈과 지위가 중요하다. 식량농업기구도 마찬가지다. 온갖 수단이 동원된다. -p327  

 (출판사 제공도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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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서 악의 평범함(?진부함)에 대해서 논했던 아렌트는 20세기 독일 실존철학의 3대 거성인 하이데거, 후설, 야스퍼스를 차례로 사사한 여성 철학자(?)입니다. 실제로 아렌트 자신은 철학자라는 호칭에 대해, 철학은 '단독자인 인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리우는 것을 반기지 않았으며, 자신은 '한 인간'이 아닌 지구에 살며 거주하는 '인류'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철학자라기 보다는 '정치이론가'로 묘사했다고 합니다. 1906년 10월 14일 독일 하노버 근교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이후 쾨니히베르크 (칸트의 고향)와 베를린에서 자랐습니다. 괴니히베르크 대학을 졸업하고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하이데거와 철학을 배웠는데 그 과정에서 두사람은 연인관계로 발전하며 후에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이후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에게 현상학을 배우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야스퍼스의 지도하에 <사랑 개념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박해를 비해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정착하였고, 1951년 미국 시민권을 얻고, 1953년부터 프린스턴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버클리 대학, 시카고 대학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51년 간행한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명성을  얻게 되었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줌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이 책이 다루는 <인간의 조건>, <정신적 삶>을 비롯한 <폭력의 세기>, <혁명에 관하여>, <시민적 불복종>, <공화국의 위기: 정치에 있어서 거짓말>등이 있습니다. 그녀는 1975년 사망하여 뉴욕의 허드슨 강 유역 애넌데일에 있는 바드 대학에 묻혀 있습니다. 아렌트의 업적은 전체주의, 권력의 속성과 정치, 권위 등과 같은 주제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등 '전체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주장한 악의 평범성(진부성)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까지 크게 인정받고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왜 오늘 아렌트가 주목받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이 책의 뒷부분에 있는 <옮긴이 해제: 오늘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에 주목하는가?>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1990년 중반 서구 학계에 불어닥친 아렌트 재해석 열풍은 동유럽의 '벨벳 혁명'과 그에 뒤따른 시민사회의 태동이 기폭제가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사회주의 국가 통제가 해체된 자리를 민선 체제가 차지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요구되었는데, 이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이 한나 아렌트의 사상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같은 탈근대적 사회이론들은 비판이상의 정치적 대안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의 갈망을 채우지 못했지만, 아렌트의 정치 행위와 판단에 관한 이론은 시민들 각자의 행위와 정치적 결과의 상관관계를 조명하면서, 사회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매우 실질적인 지향점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현재 우리가 아렌트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1990년대 중반 서구에서 아렌트 재해석의 열풍이 불었던 때와 동일한 이유들을 들이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아렌트가 거침없이 비판했던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현재의 민주국가라는 미국이나 현대 국가의 이면에 숨겨져 있고, 대다수의 시민들이 정치에서 소외되어 버린 현실, <인간의 조건>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 행위-사적인 삶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공적인 장에 참여하여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수행하는 의사소통 행위-를 통한 인간다운 삶, '상호 약속'의 필요성과 정치행위로서의 용서의 유용성 등의 내용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서 현실화 되었으며, 사회 및 정치적으로 우리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이의제기에 대한 답을 담고 있다는 사실 등의 이유 말입니다. <정신의 삶>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아닌 '우리가 사유할 때, 의지할 때, 그리고 판단할 때 무엇을 하는가?'라고 묻는 사고의 변화를 통해서 사람과 인류와의 관계 맺음으로 표현되는 '정치'와 철학의 결합에 대한 숙고를 담고 있다고 해도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렌트 읽기,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그리고 <정신의 삶>을 통해서.... 

 <아렌트 읽기>는 아렌트의 대표작인 위의 세 책을 근간으로 아렌트의 사상을 소개한 것입니다. 초기 파시즘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정치에 눈을 뜨고 내놓은 <전체주의의 기원>,  그 이후 자신의 약속과 용서를 담은 정치이론을 통해 진정한 정치의 복원과 공적 행복을 주장한 <인간의 조건>, 그리고 사유와 의지와 판단을 통한 사랑과 우애의 철학을 말하는 <정신의 삶>에 대한 저자 자신의 해석을 곁들여 독자들이 아렌트의 사상의 숲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단순한 안내서라기보다 아렌트 사상에 대한 하나의 '개론서'정도로 취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 원서가 2006년에 발행된 것은 아렌트 탄생 100주년이라는 의의와 앞에서 언급한 동유럽의 벨벳 혁명,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 등을 통한 현대의 사회정치적 문제의 대안으로서의 아렌트 사상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렌트의 사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더 큰 이유는 그녀의 정치 사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여전히 필요하고 유용할 것이라는 기대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가 이번 한국어판 <아렌트 읽기>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는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61년 아렌트는 예루살렘 재판에 입회하여 육신을 가진 아이히만이 야릇한 독일 관료의 어투로 증언한 것을 직접 본 다음에, 아이히만이 아무런 독자적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나치의 계급 구조 내에서 진급하겠다는 일념으로 속속들이 진부한 자신의 사회에 철저히 순응한 한 사람의 천박한 인간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생각이 없는 thoughtless' 자였다. 아렌트에게 '생각없는'이라는 말은 무심하다는 뜻이 아니라 상식이 없거나 사유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무사유성 thoughtlessness'에서 '악의 평범성'의 근원을 보았던 아렌트는 무사유성을 '무지하고 분별이 없음, 혹은 어떨 수 없는 혼동, 혹은 하찮아지고 공허해져버리는 진실들의 자기만족적인 반복이'라고 정의 했으며, '우리 시대의 두드러진 특성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과에 대해 무감각한 관료이자 범죄국가의 대리인이었던 아이히만은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했으므로, 또한 세계와 소원했으므로 세계를 황폐케 하는 일에 일조할 수 있었'고, 결국은 우리에게 '흔치 않는 용기와 진짜 사려 깊음'이 없다면, 우리를 통해서도 '악의 평범성'이 드러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 입니다. 아렌트의 이러한 탁월한 분석에 대한 뒷받침이 될만한 심리학적인 실험으로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과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두려움에 굴복한 우리 내부의 폭력성의 발현은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성'과 진실한 용기가 없음과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물론 아렌트는 그러한 인간에 대한 세밀한 분석에서 끝내지 않고, 그러한 위험성에 노출된 사람들이 다시 풍요로운 삶과 정치의 주체로 거듭나고, 서로간의 소통과 합의와 용서를 통해 공동체적인 삶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면에서 더 큰 의미와 가치를 지녔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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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문화비평가'란, 저자가 인용하는 영어판 위키피디아(Wikipedia)의 정의에 따르면, '기존의 문화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급진적으로 비평하는 비평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되는 '급진적 radical'이라는 말은 '뿌리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는 의미로 단순히 '과격한 언사나 독설을 늘어놓는다고 급진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문화비평가란 '어떤 사안을 뿌리에서, 발본적으로 사유하는 자'라는 의미로 '존재한다기보다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존재하게 만들어야 하는' '당위적 존재'로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저자가 주장하는 문화비평이란 '언제나 전체적인 관점에서 개별 문화 현상을 바라보며 실행하는 급진적인 비평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전체적인 관점'과 '급진적 비평'이라는 말의 의미와 실재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지만, 책을 읽는 내내 숙고하더라도 답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듯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문화비평을 이해하고, 그러한 개념에 의거해서 시행하는 한국 사회의 문화 현상들에 대한 이 책의 비평을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인문학적인 소양'이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개념이나 용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 무턱대고 들이대는 것은 결국 오해와 오역을 낳게 되고, 저자가 말하는 문화비평의 진지한 면에 대해서마저 부정적인 인상을 남길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과거 문화비평가를 '문화좌파나 살롱좌파'로 매도하고, '겉멋 든 언사로 여자나 후리는 놈' 정도로 생각하던 시절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결국 '지금 여기'에서도 저자의 의도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다면 그러한 과거의 인상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그려지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인문학적 소양은 차치하고, 우리 사회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시민이요 문화비평이라는 장르에 그리 익숙하지 못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저자가 다루는 우리 문화 현상에 대한 시각과 분석들이 일관되게, 전체적인 관점에서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고 동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철학과 비평, 사회와 정치, 문화와 인물 사이를 넘나드는 저자의 비평행위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체적인 관점에서 뿌리를 드러내 보이는 치열함이 담겨 있다는 느낌이 강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좀더 근원적으로 이해하기에 난해함을 주는 표현과 시각에 담긴 불편함이 더 큰 이유일 것 같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시민'이라는 의미를 신문의 사설을 읽고 우리 사회의 흐름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정도 -물론 이건 너무 두리뭉실하지만 소양의 정도를 표현하자면 이런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로 말한다면 아마 저자가 생각하는 것과 독자로서의 간극을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도시에 대해 쓰는 것은 추억에 대해 쓰는 것'이라는 독일의 철학자 벤야민의 말이 옳다면 우리 후손들은 모두 아파트의 모양처럼 동일한 기억들을 갖게 될 것이다. 그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가 자신의 도시에 대해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유년의 기억이다. 한국의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이 기억은 아파트처럼 규격화되어 있지 않을까?  그나마 이 규격화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준은 얼마짜리 아파트에 살았는가 하는 것 정도일 테다. ..... 보기에도 아찔하고 흉물스러운 한국적 아파트의 모습은 건설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내재화한 우리의 증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건축 양식이다. -p119~120, 아파트라는 증상 

 그러나 이 스펙터클-김길태라는 악인의 충격적인 범행이라는-을 넘어서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그 여중생은 왜 집에 혼자 있었고, 그 동네는 왜 그토록 빈집들이 많았는지 말이다. 결국 재개발이라는 한국 사회의 도시 정책이 이런 사건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원인이 아닌지 우리는 반문해야 한다.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거주민들을 몰아내고 동네를 파괴하는 것이 누구에게 가장 극심한 피해를 주고 있는지 이번 사건은 정확하게 증명한다. ..... 이 사건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이렇게 마구잡이로 달려온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이다. 용산 철거민과 부산 여중생의 죽음은 사실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은 것이다. 재개발의 이권에 삶의 터전을 내어주는 악순환을 끝내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은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p186~187, 김길태와 한국사회  

  서구의 부르주아와 달리, 한국의 부르주아는 아직도 일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귀족계급이나 구체제와 투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한 경험도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 서구의 부르주아와 다는 특징이 있는데 바로 '서민 정서'라는 특이한 요소이다. 이 서민 정서로 인해 한국 자본주의의 노른자라고 불리는 압구정동에 여전히 연탄불 돼지껍데기집이 있는 것이고, 최첨단 아파트에 김치냉장고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p229, 서민은 나타나지 않는다 

 북한의 어뢰는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부재 원인'의 현신 같다. <개그 콘서트>가 사라져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이 욕망하는 현실이 개그맨의 대사들처럼 말도 되지 않는 억측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개그 콘서트>가 금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개그 콘서트>, 부재했지만 여전히 우리를 웃겨주었던 좋은 프로그램이다. -p357, 개그없는 정권 

 정말 전체적인가? 정말 근원적인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비평한 것인가? 저자 나름의 시각을 존중하지만, 저자의 글에 동의한다기 보다는 앞의 의문들을 들이대면서 뜯어보고 싶은 내용들의 일부입니다. 저자의 생각처럼 아파트 숲에서 자란 아이들의 기억마저 획일화 되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무엇인지, 아파트라는 거주구조가 갖는 의미가 상당하지만 아이들의 기억을 형성하는 것이 그러한 구조만이 아니라는 것은 왜 간단히 외면하고 말았는지, 김길태의 범행과 그에게 희생된 여중생을 우리 사회가 달려온 자본주의의 결과라고만 단정할 수가 있는 것인지, 그러한 논리의 전개가 여성의 옷차림이 성폭행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는 사고방식과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인지, 저자는 김치냉장고와 연탄불돼지껍데기를 왜 고급 아파트나 압구정동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천안함 사건에서의 정부의 대응과 갈등을 간단히 웃음을 주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개그맨들의 프로그램과 비교하는 것이 이 사건을 뿌리에서부터 바라보고 비평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지....... 

 책을 읽고 나서 문득 '허풍선이'이라는 단어를 떠 올렸습니다. 비평가와 허풍선이. 아마도 비평가에겐 허풍선이의 기질이 조금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비평가와 허풍선이 사이에는 그 둘을 구분하여 주는 선이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예를 들자면 허풍선이란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우기며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모으며 웃기는 사람으로, 그리고 비평가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지만 배꼽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면 사람들의 모든 시선을 배꼽에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열심히 보려고 노력하다가 정말로 보이는 듯이 열광하는 어른들의 시선이 아니라 '벌거벗었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었던 아이의 시선이 전체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근원적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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