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뇌과학 -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레너드 믈로디노프 지음, 장혜인 옮김 / 까치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 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존재 조건일까. 사랑에 관한 숱한 이야기와 노래와 드라마, 영화, 그림들을 떠올려 보면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살고 사랑 때문에 죽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기쁨과 슬픔 혹은 우울, 분노, 고독, 수치, 만족, 환희, 행복 등 설명하기 어렵고 경계가 모호한 감정의 편린들은 모두 사랑에 기인한 파생상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성의 강 건너편에 감정이 놓인 듯 변연계와 신피질의 기능과 역할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레너드 믈로디노프는 감정과 이성이 서로 구분되어 서로 다른 방에 거주하는 이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은행나무처럼 이성과 감정도 한데 깃들어 있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감정의 목적보다 흥미로운 몸과 마음의 관계가 최근 뇌과학의 관심사를 보여준다. 감정은 어떻게 진화했는지, 핵심 정서가 무엇인지 살피는 동안 인간은 도대체 무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피게 된다. 리처드 도킨스나 에드워드 윌슨 같은 과학자의 관점은 어떤 철학적 질문보다 ‘나’ 혹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분명하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 원하기와 좋아하기가 차이가 무엇인지 살피는 동안 과거로부터 그리 멀리 오지 못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이 바꿔놓은 인류의 뇌 구조, 아니 그것이 인간의 진화에 미친 영향은 머나먼 미래에야 밝혀질 수 있는 영역이겠으나 우리가 실감하는 극적인 변화는 생각과 감정의 변화보다 흥미롭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는 감정과 이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수학자이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데카르트조차도 인간의 물질적 몸과 비물질적이고 파괴할 수 없는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과연 그런가? 이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사랑, 종교적 믿음, 천국과 내세, 공덕과 업보 등 형이상학적 세계와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주장은 고대 철학부터 뉴에이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내면, 즉 감정에 역할과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한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 이성과 감정의 위계질서가 분명해지듯 싶지만 일상을 사는 우리를 지배하는 건 여전히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내 맘이야’라는 말속에 숨은 진의는 발화자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마음의 원인과 변화를 통제할 수 있거나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능하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 ‘해석’하려는 시도는 헛되고 헛되다. 다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감정을 배제하거나 느낌, 추측, 판단을 줄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저자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원인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정을 배제한 선택과 판단이 가능한가? 좌절과 분노, 쾌락과 행복은 어떻게 이해할까? 뇌과학이 밝혀낸 이론과 설명이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시간을 내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대체로 한 권의 책은 분명한 목적을 향해 독자들을 끌어간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동원하고 저자의 생각을 보태 주장하고 설명한다.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다양하게 시도되는 방법이 효과를 거둘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책은, 저자와 독자는 서로 타협하거나 어느 한쪽이 굴복, 좌절하거나 공감하고 연대한다. 냉소와 분노를 자아내는 책도 있고 감동과 흥분을 유발하는 책도 있다. 책을 읽은 후에 그 다양한 감정도 결국 저자의 글이 독자의 뇌를 자극하는 방법과 테크닉에 달려 있다. 좋은 책은 일시적으로 흥분을 유도하는 대신 단 한 문장 혹은 한가지 생각의 화두를 던진다. 오래 여운이 남아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책,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을 주는 책, 다른 책으로 독자를 이끄는 책이야말로 우리가 읽고 싶은 글이 아닌가.

시간이 해결해주는 많은 일과 달리, 그 자리

에 머물러 박제되는 생각과 감정도 있는 법이다. 감정의 뇌과학을 읽는 독자들은 결국 최근의 연구 동향이나 새롭게 밝히진 인간 뇌의 신비가 아니라 ‘나’ 자신을 읽게 된다. 모든 독서가 자기 이해의 출발이듯, 타인과 세상을 읽는 일과의 선후 관계가 어찌 됐든 결국에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가 이성과 감정에 대한 우리의 태도여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지 않으려면 -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필로소피 클래스
오타케 게이.스티브 코르베유 지음, 김윤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존과 번식을 위한 생리적 욕구는 본능이다. 자연 선택에 의한 적자생존 DNA는 인간의 1차적 욕망을 자극한다. 학습과 경험이 필요 없다. 하지만 본능적 욕구를 넘어선 고차원적 욕망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보고 듣고 배우며 익히고 자연스럽게 내면화된 존경과 자아실현의 욕구는 후천적 의지에 따른다. 짜장면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자유 의지나 욕망이 생길 리 없지 않은가.

변연계의 지배를 받는 감정, 즉 애정의 욕구는 생존과 번식에 필수적 요소다. 이성을 지배하는 전두엽의 발달은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근대 이후 종교와 맞선(?) 과학은 이성의 빛을 따라 걸었고 현재의 눈부신 문명을 이뤘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손꼽는 ‘생각’은 어떤 과정을 거쳐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도구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 온전한 자유인으로 거듭날 수 있으나 식욕, 성욕처럼 절대 사라지지 않는 본능과 달리 ‘이성’은 적극적 노력과 오랜 시간이 걸리는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래서, 혹은 귀찮아서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남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오타케 게이와 스티브 코르베유는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지 않으려면 김수영의 말대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행동과 실천이 철학의 종착역이라는 선언이 아니라 누구나 철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몸 철학을 전제로 한다. ‘옳음’이나 ‘대답’이 아니라 ‘프로세스’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가?” 이 책은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정교한 질문의 연속이며 앎과 삶을 연결하려는 노력이다.

대중적 철학서는 대개 철학사에 대한 이해, 철학자의 삶과 사상, 철학 개념에 대한 설명, 적용과 실천 등에 집중한다. 2차 저작물들의 특징은 쉽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철학과의 거리를 좁히는데 주된 목적을 둔다. 그러나 이 책은 철학 입문서가 아닌 철학 개념 정리와 실천적 워크북에 해당한다. 정리, 해체, 탐구, 발전, 재생, 창조 등 여섯 가지 철학 수업은 ‘보는 것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세계를 바꿔나가는 일’이라는 수업 준비를 통해 가능하다. 주로 근, 현대 철학자들의 핵심 개념을 짧은 분량으로 정리하고 삶의 문제와 직결되는 부분을 짚어준다. 적극적인 참여와 적용 문제는 독자의 몫이다. 좋은 책은 손 놓고 입 벌린 독자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라고 독려한다.

수업을 진행하듯 커리큘럼 소개라는 머리말에서 저자는 “철학을 ‘알아두어야 할 지식’으로 전달하는 일은 철학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을 하는 데는 반드시 신체가 필요하다. 철학한다는 것은 헛된 논의가 아니라 ‘행위’다.”라고 말한다. 지식이 육화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직접 경험을 통해서만 삶의 지혜를 깨닫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가 직접 봤다니까~’, ‘분명히 본인한테 직접 들었기 때문에~’로 시작되는 신념에 가까운 확신은 의심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 생각의 빈틈을 채우려는 지식과 정보에 대한 욕심보다 중요한 건 ‘관점’이다. 지식과 경험을 정리하고 해체하며 탐구하고 발전시켜 재생하고 창조하는 작업은 철학자의 고유 업무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태도다.

비판적 관점을 상실한 정보 수용, 맹목적 신뢰와 지지, 변함없는 신념과 자기 확신이야말로 철학의 최대의 적이다. 아니, 동굴에 갇혀 그림자만 바라보면서도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다. 아는 게 힘이 될 때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믿고 싶은 심정은 낮은 자존감에 기인한다.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 누구를 위한 말과 행동인지, 본질적인 목적과 이유가 어디를 향하는지 ‘생각’하는 건 고통스럽고 적극적인 노력과 변화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때때로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철학은 지속적으로 나를 의심하는 태도다. 온몸으로 내 삶을 밀고 나가는 힘의 원천은 1차적 본능을 넘어 인간다운 삶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2차적 의지에서 나온다. ‘뭣이 중헌디?’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과 차이에 대해서는 생각해야 한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그것이 철학하는, 아니 생각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작은 이익이자 행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술의 사회학적 읽기 - 우리는 왜 그 작품에 끌릴까
최샛별.김수정 지음 / 동녘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탄생은 우연이다. 우주적 필연이나 숙명 따위는 없다. 부모를 선택할 수도 없고, 원하는 자식을 낳을 수도 없다. 주어진 양육환경과 교육을 통한 사회화 과정을 거쳐 공동체에 적응한 성인으로 거듭날 뿐이다. 유전적 요소를 무시할 수도 없으며 부모의 문화자본과 상징자본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 현재 당신의 삶의 목표, 인생관이나 가치관, 문화적 취향까지 자유 의지에 의한 고민과 선택의 결과물이라고 하기 어렵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선택한 사람의 지적이고 고급 취향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중간계층이 선호하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문안하며, 하층 계급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두 자매》를 선택했다고 해서 부끄러할 필요도 없다. 인터넷에 떠도는 각종 심리테스트와 달리 예술적 상상력과 개인의 취향에는 사회 계급의 문화, 상징 자본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디트’를 해석한 다양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일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사회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단순히 배경지식과 역사적 맥락, 즉 작품 외적 요소를 통해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할 이유는 없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개인의 미적 감각과 세계를 이해하는 맥락에 대한 구조적 이해가 작품 감상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허나, 그림 뿐 아니라 공연, 전시, 음악, 무용, 문학에 이르기까지 예술작품의 탄생부터 감상에 이르는 과정은 총체적이고 집합적인 형태를 이룬다. 이것이 예술과 사회를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충분한 이유가 아닐까.

세상은 인간 사회보다 더욱더 촘촘하고 세밀한 그물망으로 짜여 있다. 네트워크 시대의 사회는 온, 오프라인을 넘어 빈틈없고 복잡한 구조를 이룬다. 그러니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의 차이를 살피는 건 현대사회의 복잡성에 비하면 매우 단순한 감상법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1793)과 보드리의 〈샤틀로트 코르데>(1860)는 시대적 거리만큼 남녀 예술가의 ‘관점’의 차이가 분명하게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회적 사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마라’의 인물에 대한 평가, 죽음 자체가 가진 미학적 선정성을 독자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사회학의 시선으로 예술을 읽는다. 기본적인 틀은 「보완된 문화의 다이아몬드」다. 문화 다이아몬드cultural diamond는 미국의 문화사회학자 웬디 그리스올드Wendy Griswold 가 처음 고안하고, 빅토리아 알렉산더Victoria Alexander에 의해 보완됐다. 문학 비평의 기본 구조인 표현론, 반영론, 수용론, 절대론처럼 시대를 거듭하며 작품을 둘러싼 해석의 주체와 방법에 무게가 달라진다. 두 사회학자는 철저하게 선행 이론에 근거해서 예술을 바라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정리하고 개별 작품에 적용하며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학교 교양과목으로 흥미진진한 이론과 지식수준, 문화 다이몬드의 틀에 대한 해석에 머물고 있어 마지막에 추가된 대한민국의 문화양상에 대한 분석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소쉬르의 ‘랑그와 빠롤’, 레비스트로스의 ‘양자 대립 구조’, 즉 구조주의로 이해하는 ‘007 시리즈’를 설명하는 움베르토 에코 – 선과 악의 영원한 갈등 구조 등은 다양한 인문학적 개념과 예술작품을 환기하는 즐거움이 있다. 아도르노는 “우리를 늘 깨어 있게 하는 음악”인 불편하고 기괴한 무조음악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 친숙한 멜로디와 화음이 아름다운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들어보자.

책을 입체적으로 읽는 방법은 다양하겠으나 저자가 소개하는 그림과 음악을 직접 감상하며 개별 독자가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현대인의 예술 감상 태도다. 아도르노의 평가와 무관하게, 구조주의와 같은 이론적 토대를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우선 각자의 문화자본의 총량, 상징자본의 크기가 경제 자본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심각하다. 삶의 목적과 방향과 태도를 포함한 한 인간의 성숙도는 단기간에 길러지기 어렵고 경제 자본으로 일시에 거머쥘 수 있는 물적 토대와 조금 다른 양상이다. 각자의 삶에 가중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바뀌고 취향이나 교양이 달라진다. 애들 손잡고 억지로 호퍼 전시장에 달려간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지만 트로트만 듣는 귀를 가진 채 성인이 되는 환경 또한 권할 만한 일은 아니다. 사회학의 관점으로 예술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안다’ 혹은 ‘보았다’와 ‘들었다’를 가로질러 인류의 역사와 전통,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현재와 미래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늘 그러하듯 조각을 모으는 일도 중요하지만 전체를 조망하며 구조와 시스템을 파악하는 거시적 안목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구 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 개정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 서광사 / 2008년 12월
평점 :
예약주문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라는 부제가 붙은 임마누엘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 영구는 없다. 현실적으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듯, 평화는 멀고 전쟁은 가깝다. 칸트가 말하는 인류의 영구 평화는 이상적 소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갈등과 투쟁의 역사가 인류 문명을 이룩하는 데 토대가 되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잠시 호흡을 멈춘다. 과연 법과 질서를 준수하는 세계 시민 사회의 평화는 가능할까.

홉스는 자연 상태를 전쟁의 상태로 보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 논리가 성립한다. 국제법이 없는 자연 상태의 세계질서는 상상보다 동물적일 수 있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현실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가 이를 충분하고 남을 만큼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며 갈등과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한 칸트의 고민은 높이 살 만하다.

칸트가 말하는 공화정의 세 가지 원리는 법의 지배, 삼권분립, 대의 제도다. 이 조건이 갖춰진 국가가 국가 간 영구 평화를 위한 첫 번째 확정 조건이다. 그렇다면 공화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국가와 공화정을 채택한 국가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또한 영구 평화를 위해 칸트는 국내법, 국제법 그리고 세계 시민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영원한 평화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논증하려는 칸트의 노력은 현실 적용 문제에 설득력을 잃는다. 이론적 논문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기엔 현실이 참혹하고 영구 평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에 동의하기엔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역사는 인류가 야만 상태에서 국가로, 그리고 세계주의로 점차 진보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과정은 치열한 투쟁과 야만의 시간을 거쳤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치와 도덕의 관계에서 (1) 행하라. 그리고 변명하라. (2) 만일 당신이 그것을 했거든, 부정하라. (3) 분할하라. 그리고 지배하라. 이 세 가지 원칙은 정치가들이 사용하는 궤변들이다. 권력을 거머쥔 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술책이다. 이런 일반적 처세술은 정치에서 도덕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정치인에게 가장 숭고한 가치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개인과 정파적 이익, 기득권 보호를 위한 노력이 뻔히 보여도 눈감고 표를 던지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보다 우선 그러한 현실을 거부하는 태도와 고장 비판적 감시 기능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게 아닐까.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예비 조항’ 여섯 가지와 ‘확정 조항’ 세 가지를 제시한다. 예비 조항은 “~~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형식이고, 확정 조항은 “~~를 하여야 한다”라는 형식이다. 금기와 당위는 하나의 거대한 꿈이다. 먼 훗날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과 유럽연합의 결성으로 구현되는 칸트의 원대한 이상은 아직 미완성이지만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한 철학적 기초를 정립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칸트가 주장하는 실천 철학의 형식적 원리는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게 할 수 있도록 행위 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는 도덕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것이 영원한 세계 평화의 근본적 토대다. 또한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보증해 주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인 자연”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자연은 현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이념으로서의 자연이다. 역자 이한구는 기계론적 자연이 아니라 반성적 판단력의 대상이 되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자연이라고 분석한다. 이기적, 감정적 동물인 인간에게 기대가 너무 큰 칸트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다. 전쟁과 평화도 마찬가지다. 영구 평화가 아니라 일시적 평화라도 좋다. 평화를 위한 노력 혹은 평화를 향한 발걸음이 중요하다. 변명하고 부정하고 지배하려는 자들의 말과 행동을 걸러내고 일상에서 평화를 위한 노력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국가 간의 평화는 국민들의 생각과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개인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성찰 없는 정치인과 정부는 전쟁보다 위험하다. 일상을 무너뜨리고 꿈과 희망을 빼앗는 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길고 긴 법 고전 산책이 끝났다. 마무리가 칸트의 영구 평화론이라는 건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놓칠 수 없는 희망 고문 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다의 이유 7
체사레 베카리아 지음, 김용준 옮김, 볼테르 해설 / 이다북스 / 2022년 4월
평점 :
품절


738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26세 때인 1764년 『범죄와 형벌』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은 억측과 예단, 종교적 편견으로 뒤덮인 야만적인 행형제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기념비적 저서로 남아 있다. 한마디로 전근대적인 범죄와 형벌에 대한 전근대적 시스템 자체를 뒤흔들고 사회계약설에 의한 국가형벌권, 죄형법정주의를 확립했다. 자연스럽게 고문과 사형과 같은 잔혹한 형벌 제도를 비판했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체사레 베카리아는 한 사람의 용기와 첫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듯하다.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의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유럽은 계몽주의, 즉 이성의 찬란한 빛을 찾아 먼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법은 사회적 합의를 지속하는 조건이며, 형벌은 범죄를 억제하고 예방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생각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설』(1762)의 이론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종교적 의미의 원죄 의식과 절대왕정의 핍박에 시달리던 중세적 개념의 전근대적 범죄와 형벌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 된 이 책의 의미는 현대 사법 체계와 형법에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

특히 고문에 의한 자백은 진실을 밝히지 못하며 부당하다고 강조한다.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서 주장한 내용은 250년이 지난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에서 지켜지지 않았다. 영화 『1987』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에서 전두환 쿠데타 정권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자행되던 야만적인 고문과 비인간적 수사 관행이 사라진 건 오래전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는 지금도 믿기 힘든 일들이 벌어졌고, 여전히 그 시절에 향수를 느끼거나 그 시절에 뿌리를 둔 정권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은 현실은 더욱 놀랍다. 베카리아는 절대왕정 시기에 이 같은 목소리를 높였으니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인 동시에 출간 즉시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베카리아 자신도 이 책의 반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니 실명이 아닌 익명으로 출간했다.

근대 형법의 토대를 마련한 베카리아의 용기는 현실에 대한 과격한 저항이었으며 합리적 이성을 향한 인류의 매우 중요한 진보였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시대를 앞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대체로 기득권의 탄압과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승인한 이후에야 실명으로 책을 출판했던 당대 유럽은 그래도 동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18세기 유럽의 지성사와 사회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관용론』(1763)의 저자 볼테르는 이 책을 계몽주의 시대 가장 중요한 저서라고 평가했으며 직접 해설을 썼을 만큼 깊은 애정을 보였다. 베카리아의 본문 분량만큼 기나긴 볼테르의 해설은 또 단순한 설명이 아닌 또 하나의 사회론이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죄형법정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원고와 피고에 따라 관점과 태도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으나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적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원칙이 달라진다면 법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이며 범죄와 형벌 사이에 놓인 생각의 차이는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20대 청년, 체사레 베카리아 생각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실적 문제와 고민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8세기 중반 유럽의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한 이해는 프랑스혁명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적 개인이 이성에 눈을 뜬 계몽의 시대에 절대왕정과 신의 권능의 자리는 위태롭기만 하다. 종교개혁과 인쇄술의 발달이 가져온 지식의 대중화는 왕과 성직자, 귀족들이 오랫동안 거머쥔 헤게모니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1764)과 볼테르의 해설(1766년)은 인류문명을 진일보를 위한 기폭제라 할 것이다. 개인과 국가의 관계 설정에 따라 범죄와 형벌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형벌의 기원부터 법률의 해석, 범죄의 구분, 형벌의 목적, 고문, 명예훼손, 사형, 자살, 파산, 사면에 이르기까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하고 현실에서도 논쟁이 되는 대목이 많다. 그래서 놀랍다. 26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이성의 힘, 아니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고민의 흔적은 시대와 무관하게 계속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공공의 이익, 인간애, 참된 종교를 열망하는 한 사람이 쓴, 죄 없는 여성들의 결백을 옹호하는 글에 따르면, 기독교 종교 재판에서 10만 명이 넘는 마녀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이 합법적인 대학살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된 이단자들을 더한다면 지구상에서 유럽은 판사, 경비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집행자와 희생자로 꽉 찬 거대한 처형대처럼 보일 것이다. - 볼테르 해설, 221쪽

1761년 10월, 툴루즈의 평범한 상인 장 칼라스의 아들 마크 앙투안이 집에서 자살한 사건이 벌어진다.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인 장 칼라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살해했다고 모함했다. 칼라스 가족이 모두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고 자살이 심각한 범죄였던 당대의 법 때문에 가족들은 앙투안이 살해됐다고 진술했다. 결국 아버지 장 칼라스는 살인 혐의로 수레바퀴에 묶여 사지가 찢기는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종교의 이름으로 규정된 범죄와 형벌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유럽의 역사는 잔인한 종교 전쟁의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볼테르는 이 소식을 듣고 구명운동에 나서 재판정에서 앙투안은 도박 빚 때문에 자살했으며 장 칼라스는 반가톨릭 광신자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결국 1764년 프랑스 황제 루이 15세는 사형을 선고한 재판관을 파면하고 칼라스의 무죄를 선고했다.

베카리아의 이 책은 같은 해에 출간됐으니 볼테르의 슬픔과 분노가 길고 긴 해설에 자세히 나타나 있음은 물론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저질러진 만행들, 이를테면 마녀사냥 같은 구체적인 사건과 비이성적이고 무도한 처벌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볼테르는 베카리아의 주장에 힘을 싣는다. 볼테르의 해설은 이단과 신성모독 등 종교의 이름으로 규정되는 범죄와 형벌에 대한 비판과 정치와 사회 관련 형벌과 집행에 대해 베카리아의 논의를 보충하고 현상적 분석을 가한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 일갈했던 데이비드 흄은 인간의 지식과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며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칸트의 관념론으로 정리되는 듯했으나 존재론과 인식론, 합리론과 경험론은 이후에도 숱한 철학적 난제를 남겼다. 베카리아는 법과 사회, 아니 국가와 개인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던진 철학자가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단순히 역사와 전통에 따라 시대정신이 반영된 지금, 여기의 법이 존재하며 그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는 사람들과 주권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따라 정치와 경제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여전히 헌법정신에 반영된 권력의 주체와 위임과정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가 양산하는 문제해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