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행복한 이유 워프 시리즈 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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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에 실린 단편 「완전한 은둔자」를 읽었을 때 충격이 떠올랐습니다. SF는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서 잘 읽지 않습니다. 쥘 베른의 소설 같은 고전은 좀 읽었으나 김초엽의 소설도 읽다 덮을만큼 어느 구석에 닿지 못하나 봅니다. 독서모임의 장점 중 하나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을 책과 분야의 경계를 허무는 일입니다. 망설이다 끝까지 읽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단편인 「적절한 사랑」(1991)과 「100광년 일기」(1992)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의 뇌를 자궁에 품을 수 있다는 상상은 충격적입니다. 아마 이 소설을 읽었다면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모티브를 얻었을 듯 싶습니다. 어쨌든 상상력엔 한계가 없으니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달을 목도하는 현대인에게 불가능한 미래는 거의 없을 겁니다. 공동체의 윤리와 개인의 선택 사이에서 충돌하는 지점이 아마 가장 큰 걸림돌이 되겠지요. 바닷속을 여행하고 하늘을 나는 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장기를 갈아 끼우는 건 일도 아닌 세상이니, 뇌를 리부팅하거나 다른 몸에 이식해서 영생을 꿈꾸는 일도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두려운가요, 아니면 기대되나요?

순전히 ‘나’의 판단과 선택이라고 믿는 모든 일들이, 미래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착각은 아닐까요.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 문제는 종교와 철학의 분야가 아니라 뇌과학과 심리학의 영역으로 넘어온지 오랩니다. 그렉이건의 『내가 행복한 이유』(1995)에는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인터넷이 일상에 활용되어 네트워크 세상을 사는 우리에겐 조금 진부한 용어나 개념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번역자 김상훈의 해설대로 하드 SF를 읽는 일은 피학적 독서를 즐기는 분이 아니라면 생소하고 고통스런 경험일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최신 과학, 의학 이론이 주인공, 즉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에 천착하는 과정의 도구이자 장치라고 생각하기엔 분량과 스타일이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주제에 매몰된 1인칭 주인공의 사변적 고백이 ‘지루함’을 만들었습니다. 철학적 고민은 독자의 몫이어야 하는데, 주인공이 스스로 갈등과 번민에 빠진다면 곤란합니다. 주인공은 사건을 만들고 갈등을 일으키는 ‘말’과 ‘행동’에 치중해야 하는 게 소설의 고전전 문법이 아닐까요. SF 소설 매니아들이 들으면 쌍욕을 먹을 만한 볼멘 소리일까요. 읽는 재미가 덜해지는 이유는 자명하게도 긴장감이 떨어지는 스토리 전개와 지나치게 고뇌하는 미래 주인공들의 현실적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소설의 목적과 의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대개 사회과학, 과학철학, 윤리학의 문제라면 이미 그 분야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을텐데 굳이 소설이라는 도구가 필요한가 싶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와 달리 SF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독서 모임의 목적이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 다른 관점과 낯선 시선 때문이니 경청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테드 창과 그렉 이건의 차이, 김초엽을 비롯하 최근 경향까지 알게됐지만 찾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인 설득을 당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드 SF(자연과학 기반) : 휴머니스트 SF(심리학이나 인류학 등 인문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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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뉴웨이브 : 문학적, 인문학적으로 세련된 SF 지향

*1970년대 하드 SF : 다수의 고전 걸작 양산

*1980년대 사이버 펑크 : 스타일을 중시하면서도 정보과학과 생명과학을 위시한 첨단 과학의 내재화 강조

*1990년대 포스트 사이버 펑크 : 바이오테크놀로지BT, 인포메이션 테크놀로지IT, 나노 테크놀로지NT 등

신세대 하드 SF(테드 창, 그렉 이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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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기술에 대한 전문지식 : 실존하는 현실의 하부구조를 밝혀내는 성배 탐색에 준하는 행위

김상훈의 해설을 정리해봤습니다. 그렉 이건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SF계의 뱅크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답니다. 텍스트는 미술, 음악 분야의 감각적 인상과 다릅니다. 읽고 쓰는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주에서 인간존재란 무엇인가’와 같은 주제로 모아지지 않을까요. SF 소설도 그렇다고 하는데 개인의 정체성, 자유의지가 정치와 경제, 즉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프로파간다를 견딜 수 있는 개인이 있을까 싶은 우려는 저만의 생각이 아닐 겁니다. 사색하고 공부하라는 루쉰의 호통이 죽비처럼 현대인의 어깨를 내리칩니다. 소설이 소설로 끝나지 않고 현실과 인간의 삶으로 연결된다면 SF가 아니라 휴머니즘이 되겠지요.

「내가 행복한 이유」(1997)와 「내가 되는 법 배우기」(1990)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오갔습니다. 결국 모든 독서는 ‘나’에게 닿는 머나먼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블랙 미러」시리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영상으로 보는 포스트 사이버 평크 SF에 해당하는 건가 싶습니다. 다가올 미래, 아니 이미 당도해 있는 미래인 오늘, 겨우 1.4킬로그램 밖에 안되는 뇌의 사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존 레이티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아니 나는 온전히 나로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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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세미나 - 체제 이행기의 사유와 성찰
김규항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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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지만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사람 사는 일에 정해진 길이 있다면 누가 인생을 어렵다고 하겠는가. 통시적 관점에서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지금, 여기가 보인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절대왕정을 거쳐 신분제가 철폐되고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 세상을 만든 과정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진한 피냄새가 배어 있다. 원시 공산제와 고대 노예제를 거쳐 중세 봉건제를 지나 자본주의에 이르는 길에도 숱한 이들의 땀과 한숨이 스며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개인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함께 모여 이야기하고 어깨 겯고 걸어온 길들 위에 꽃이 피었다. 돌아보면 보이는 것들이 힘겨운 현실과 험난한 길을 걸을 때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김규항이 걸어 온 길, 그가 힘주어 이야기하는 자리에도 꽃이 피었을까. 오랜만에 읽는 김규항의 문장마다 힘과 결기가 느껴진다. 여전히 흔들리며 걷는 사람들 발자국마다 자본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괴물의 그림자가 스친다. 고정 불변하는 체제는 없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걸어야 하는 것일까. ‘체제 이행기’의 사유와 성찰이라는 부제가 이 책의 성격을 말해준다. 아나톨 칼레츠키가 자본주의 4.0 시대를 선언한지 10여년이 흘렀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 서서 반성하는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충돌하며 대한민국 사회에도 빛과 그림자를 만든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와 복지사회의 꿈이라는 상충하는 우리들의 꿈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누구를 위한 자유이며 누구를 위한 복지일까.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1867)이 출간된지 150년이 훌쩍 지났다. 인류 역사에서 모든 체제, 즉 인간이 만든 사회 제도와 시스템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끊임없이 생성, 변형, 소멸의 과정을 거쳤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대로 만물이 유전하듯panta rhei,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람도 세상도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생존과 적응에 매몰된 다수와 달리 조금 다른 시선으로 미래를 고민하거나 현실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학문적 관점에서든, 사익 추구를 위해서든, 인류애와 호기심 차원이든 ‘현상’을 넘어 ‘본질’에 집중하고 거시적 관점에서 변화의 흐름를 읽어내려는 노력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주 조끔씩 바꿔왔다. 반복적 일상에 균열을 발견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의무가 삶의 태도가 아닐까.

매일 숨쉬는 공기처럼 우리는 자본주의를 호흡한다. 욕망을 들이마시고 한숨을 내뱉는다. 주식, 코인, 부동산, 취업, 노후 준비에서 환율, 경상수지, GDP까지 실물경제에 대한 관심이 곧 현대인의 삶이다. 권력은 시장에 넘어간지 오래고 자본이 정치를 지배하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오늘의 일상과 내일의 행복을 좌우하는 자본주의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18개의 주제로 펼쳐지는 세미나는 200쪽이 안 되는 이 책의 분량과 무관하게 깊고 넓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물론 케인스와 신자유주의의 명암을 찬찬히 살핀다. 우리가 간과한 것은 무엇일까. 1997년, 2008년은 모두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활의 변화를 넘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안녕한가.

갈고 닦고 조이며 자본주의를 고쳐쓴지 오래다. 김규항의 세미나는 새로운 경제 체제를 도입하거나 혁명적 변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려는 의도가 없다. 문제의 본질을 살피지 못하고 현상에 급급하며 체제 자체의 모순을 간과하는 태도를 성찰한다. 신축아파트에 물이 새고 벽에 금이 가는 건 시공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설계 자체의 결함이 은폐됐을 수도 있다. 또한 건축 이론과 공법이 모든 지형과 기후에 적용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각국의 역사와 문화에 따라, 시대정신을 좇으며 새로운 얼굴로 탈바꿈해온 자본주의는 우리의 미래를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을까. 구조적 모순과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 대개 그러하듯 이 세미나에 참여한 독자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각 장마다 권민호의 그림이 환기 장치로 활용된다. 마지막 장에 소개된 그림과 제목이 인상적이다.

Karl Marx+Quo Vadis, 29.7×42cm, 2013

새로운 사회는 현재의 사회 안에서 자라납니다. 우리가 노쇠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바꿔 말하면 새로운 사회가 생겨나는 시기에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행기’를 살고 있습니다. 이행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일정을 갖게 될지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이행기의 성격을 고려할 때, 그 주역은 선구자나 지도자와 함께하는 군중이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로서 노동을 사유하는 최초의 개인들 말입니다. 유토피아는 없지만, 최소한의 사회는 있습니다. -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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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
마이클 샌델 지음, 이경식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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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of citizenship’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지혜로운 결합에 대한 고민이다. 정치는 경제에 예속된지 오래다. 경제는 정치를 지배하지만 자유와 평등을 고민하지 않는다. 공정과 정의는 민주주적 가치로 자본주의 이념과 거리가 멀다. 어떤 가치가 우선이냐에 따라 정책 방향이 달라지고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2010년 국내 출간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정의란 무엇인가』(2009)는 시대정신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 윤리적 의미의 정의와 경제적 정의는 결이 다르다. 마이클 샌델은 근대현대 윤리학과 정치철학에 해당하는 공리지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를 둘러싼 쟁점을 짚는다. 경제민주화의 열망, 사회 윤리적 갈등이 첨예하던 시기에 저자는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5년쯤 흐른 우리의 현실, 대한민국의 ‘정의’는 안녕한가.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1996)의 원제는 ‘민주주의의 불만’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먼저 마이클 샌델은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톺아본다. 겨우 200여년 남짓한 미국의 짧은 역사는 그 나름의 명암이 교차한다. 맨땅에 세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국가답게 고민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다. 철학자의 눈에 비친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은 출발점과 너무 달라졌다. 능력주의의 환상이 심어지고 기회의 땅이라는 수식어가 오늘의 미국을 오해하게 만든 건 아닐까.

북부의 임금 노예와 남부의 흑인 노예 비교가 인상적이다. 끊임없는 가난과 불안 속에서 살았던 북부의 임금노동자는 남부의 노예보다 실제로 자유롭지 않았다. “남부의 노예는 적어도 나중에 늙고 병들 때 노예주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자본은 인간 노예주가 노예를 대하는 것보다 한층 더 강력하고 완벽하게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유노동자는 일하지 않으면 굶어야 하는 일상을 살아가지만, 노예는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노예주가 먹여살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를 누리는 댓가로 얻은 현대인의 불안은 임금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인간답게 살기 필요한 기본적인 권리, 즉 인권의 출발은 경제적 자유다. 마이클 샌델은 공화국 초기의 경제와 시민적 덕목을 살피고 자유노동과 임금노동의 차이를 설명한다. 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케인스의 이론은 절차적 공화주의 승리와 고난을 함께 선물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국가의 역할, 즉 정부의 시장 개입에 필요성과 적절성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가장 첨예한 쟁점이다. 한쪽에서는 자유 시장경제를 목놓아 외치면서 입맛에 따라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고, 한쪽에서는 경제민주화를 부르짖으면서도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는 푸념을 하기 일쑤다.

더욱 놀라운 건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태도다. 사회주의를 적극 반영한 유럽선진국의 수정자본주의 국가를 부러워하면서 재벌과 기득권을 소수를 위한 정책에 박수를 보내거나 노동자, 농민들이 자기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과 정책을 반대한다. 루쉰의 말대로 “언제나 사색하고 공부하라. 그리고 열린 눈으로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라.” 그렇지 않으면 눈뜨고 코 베인(커트 코베인 아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절규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루스벨트는 ‘진정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 경제적 권리에는 ‘만족스럽고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가질 권리, 적절한 음식과 옷과 여가를 누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돈을 벌 권리, 모든 가족이 함께 괜찮은 주택에 살 권리,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 노령, 질병, 사고, 실업 등에 따른 경제적 두려움으로부터 적절한 보호를 받을 권리 등이 포함된다고 선언했다. 즉 개개인이 자기 삶의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으려면 반드시 물질적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런 생각은 루스벨트의 1944년 마지막 국정연설 내용이다.

80년이 지난 미국은, 아니 우리는 루스벨트의 복지국가 의제를 현실로 만들었을까. 현실은커녕 의제 자체에 대한 사회적 합의조차 이루지 못한 상태다. 홉스의 만인의 투쟁 상태가 지속되는 것같은 느낌적인 느낌은 단순한 착시 현상이 아니다. 민주적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미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또 현실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점검과 성찰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경쟁에서 이긴 자들의 승자독식체제가 용인되는 건 우리 사회의 작동방식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기보다 발빠른 적응과 순응적 태도 때문이다. 다수 시민들의 이기적 욕망이 충돌하고 타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좀체 바뀌지 않는다. 능력주의에 대한 오해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결국 공동체 전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걸까.


이 책의 초판이 나온지 27년이 지났으나 마이클 샌델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의 정치, 경제의 역사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살펴보는 데 집중하고 있으나 대한민국의 현실적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아 우리가 함께 고민해 볼 만한 쟁점들이기 도하다.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이듯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불협화음은 끊이지 않는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다수 국민들을 위해서 혹은 소수 기득권을 위해서 정치인과 시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이기적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전 국민이 화합하여 한 목소리를 내는 국론 통일은 생각만해도 끔찍한 전체주의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에 기초한다. 여러 가지 목소리와 의견이 부분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목소리들이 누구를 위하여, 어디를 향해 뱉어지는지 살필만한 안목과 통찰력은 길러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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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 소중한 것을 지키는 삶에 대하여
임승수 지음 / 수오서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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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란 녀석은 자신을 목격한 이에게 어김없이, 그리고 단호하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 53쪽

잠시 비가 그치고 나면 사람들은 젖은 마음을 말리려 바람을 햇빛과 바람을 찾는다.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은 돈이 없어도 누구나 즐길 수 있으니 다행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숨 쉬는 공기까지 비용을 지불한다. 여름에 시원한 바람, 겨울에 따뜻한 온기, 미세 먼지 걱정 없는 실내 공기는 공짜가 아니다.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나열하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돈의 액수가 행복의 크기, 인생의 만족감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왕과 귀족이 다스리던 시대를 지나 부르주아가 탄생하고 ‘혁명’을 통해 공화정이 들어섰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놀랍게도 ‘개나 소나’ 한 표를 행사하는 국민주권 시대, 절차상 완벽한 민주주의 시대를 살게 됐다.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한 현대 국가 체제를 감히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플라톤의 염려대로 대중들의 열망은 중우 정치 혹은 포퓰리즘으로 비난받고 거대한 ‘이권 카르텔’, 이를테면 법조 카르텔에 의해 입법, 사법, 행정의 견제장치가 무너진 과두 정치가 대한민국의 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심각한 현상은 국민 대다수가 이를 용인하며 현실을 변화시키는데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계층 상승의 욕망에만 몰입한다는 사실이다. 자존심이 세지만 자존감이 낮을 때 벌어지는 우울한 현실을 우리는 매일 목도하며 산다. 지긋지긋한 ‘을’들의 전쟁 말이다.

경제 체제로서 자본주의와 정치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성격이 전혀 다른 부부처럼 오랫동안 동거 중이다. 정부가 라면값에 개입하는 건 공산주의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다. 무상급식, 의료보험, 노인 연금 같은 모든 복지 제도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다. 어떤 ‘이즘-ism’도 사람보다 소중한 가치일 수 없다. 무엇을 표방하는 정부든 인간다움을 잃는다면 민주주의는 반드시 책임을 묻는다. 서로 다른 생각을 편견없이 수용하며 동의할 순 없어도 인정하는 태도를 잃는다면 그것이 곧 독재와 파시즘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본주의는 실체가 없다. 수없이 많은 변화를 거쳤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다듬고 고쳐가는 중이다. 수정자본주의는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민주적 가치를 받아들여 계속해서 변해가는 유기체와 같다. 정치, 즉 국민들의 삶과 삶의 가치에 따라 놀랄만큼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현실에 적용하기도 한다. 사회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유럽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복지를 부러워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쓸데없는 이념 논쟁, 이를테면 종북몰이와 수구보수 논쟁 같은 소모적 진영 논리에 갇혀 있는 건 아닌가. 전임 대통령이나 과반의석을 차지한 야당을 반국가세력으로 몰고 전직 대통령을 간첩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공직에 임명되는 현실을 우리들의 ‘상식’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들에게 정권을 넘겨준 이들의 면면과 실수 또한 작금의 현실에 버금가는 부피와 무게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어느 쪽이든 거대한 이권 카르텔, 기득권에 의한 과두 정치라는 사실을 국민들은 알고도 외면하는 것일까. 총선과 대선마다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이제 그들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여 보자. 세상을 흑백논리로 구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다른 대안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2008)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임승수는 페미니스트 아내와 함께 행복한 사회주의자로 살고 있다.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 개인적인 성향상 개인적인 이야기, 내밀한 고백은 대체로 불편하다. 소설가와 시인은 작품으로, 논픽션 작가들은 이성의 사유로 기능할 뿐이다. 개인으로서 그들의 삶이 궁금하지 않은 건 내 성향일 수 있으나 적어도 책을 통해 만나는 그들을 굳이 현실적 개인으로서 그 면면을 살피고 싶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로 사는 임승수의 생활이 궁금해 책장을 넘겼다.

글을 쓰고 강의하는 사람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에 고개를 끄덕였고, 명문대 공대 출신으로 안락하고 일반적인 삶을 거부한 사람의 행복과 자유에 동의했다. 사람들은 과격하고 폭력적인 ‘혁명’과 ‘전쟁’을 떠올리지 않고 냉정하게 사회주의를 들여다 본 적이 있이 있을까.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같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데 필요한 아이디어를 빌려올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상관없는게 아닌가. 수많은 ~~주의 너머에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먼저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인류 문명에 끼친 빛과 그림자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한 적은 없다. 합의는 절망과 체념이 아니라 배려와 양보다. 니체의 말대로 사실보다 결국 해석의 문제일 뿐이다. 이 책은 임승수 개인의 일상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과 다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한숨이다. 내게는 임승수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상식주의자’로 보인다. 제2, 제3의 더 많은 임승수가 나타나기를, 더 많은 사람이 ‘상식주의자’로 변해가기를 희망한다. 바꿀 수 있는 충분한 힘과 능력이 주어졌으나 스스로 외면한채 그들만의 리그에 진입하려는 이기적 욕망들이 현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아무도 당신의, 아니 나의 삶을 바꿔주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려하지 말고 내가 바뀌면 된다는 적응적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열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공감해야 답답하고 느리지만 작은 변화가 시작된다. 그 시작은 생각과 태도의 변화로부터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이기심만 가득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초래하는 공동체성 파괴와 인간 소외 현상을 마치 본성의 산물인 양 호도한다. 그런 언동이 인민을 착취하는 한 줌 지배 계급의 행동에 면죄부를 준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 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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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44
볼테르 지음, 송기형.임미경 옮김 / 한길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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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이후 벌어졌던 참혹한 살육과 잔인한 복수는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제노사이드의 기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유대교는 모두 하느님을 섬깁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간의 처절한 증오와 절멸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이라고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졌습니다. 야만의 시대를 지나 이성의 빛이 스며듭니다. 볼테르는 ‘이제 그만!’이라고 외칩니다. “고마 해라, 마이 묵읏다 아이가.” 영화 <친구>의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철저한 가톨릭 신자인 볼테르는 개신교를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던 거죠. 그러나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하느님을 믿는 방법이나 성경 해석 몇 줄 때문에 폭력과 살인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이성적 호소이자 애타는 절규입니다. “진짜 그만들 하라고!!!”

물론 볼테르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세상을 울리고 한 사람의 행동이 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타인의 공감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설악산 흔들바위를 옮기는 일보다 어렵습니다. 지지하는 정당을 바꾸고 응원하던 프로야구 팀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힘듭니다. 그러니 그만 싸우고 이제 나만큼 너도 중요하다는 사실만큼만 인정하자. 이해할 수 없어도 서로 죽이지는 말자. 맘에 들지 않는다고 칼로 찔러서야 되겠느냐.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 볼테르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볼테르의 이 말 한마디가 똘레랑스tolérance의 본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는 획일과 강요가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존중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토론과 타협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1534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신약을 번역 출간합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불의 발견, 직립보행, 농경으로 인한 정착생활 이후 가장 강력한 혁명적 변화였습니다. 지식의 독점 시대가 종말을 고했습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해주던 성직자들의 충격보다 다이렉트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된 사람들의 감동이 훨씬 컸습니다. 그러니 이제 누구나 자기 생각과 믿음을 갖는 시대가 열립니다. 종교적 도그마는 종파와 무관하게 한 개인을 넘어 집단적 무의식으로 자리잡습니다. 신들린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볼테르는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칼라스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써내려간 이야기는 한숨과 울분이 뒤섞여 있고 이성과 감정이 엉켜 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종교를 떠나 현재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이 들려주신 이야기들이 각자의 상황과 위치에서 어떻게 타인과 세상이 작동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설명해 줬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경제사범이나 유아 성범죄에 대한 불관용, 편견과 불안은 인정욕구에 대한 부작용이라는 지적,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서의 의도적 냉소와 본능적 구별짓기 등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 한켠을 두드렸습니다.

관용은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똘레랑스와는 맞지 않는 번역어입니다. 개념 자체가 다르니 새로운 한국어 단어를 만들거나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는 개념을 ‘통섭’으로 설명한 최재천과 이후의 논쟁들이 대표적입니다. 잘못 사용되면 ‘용서’ 혹은 ‘너그러운 태도’ 쯤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똘레랑스는 상대방을 향한 존중입니다.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존중받는 건 불가능합니다. 전제조건은 아니겠으나, 개무시 당하지 않으려면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별, 종교, 인종, 나이, 직업, 학력, 장애, 성적지향, 출신지역에 따라 ‘차별’하는 마음과 태도가 내안에 숨어 있다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티나지 않게 숨겨야 하는게 세상을 살아가는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기본 도리이며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관용의 한 중요한 요인은 우리가 그리 잘 알지 못하는 어떤 능력이다. 이 능력은 때때로 공감empathy이라고 불리는데, ‘다른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 ‘사회적 지능’, ‘사회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풍부한 의미가 담긴 독일어 단어를 비리자면 ‘인간 이해Menschenkenntnis’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공감하지 못하면 차별과 편견이 생기고 똘레랑스와도 멀어집니다. 말하자면 사회적 감수성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한 인간의 능력에 해당하므로 부단히 노력하고 꾸준히 학습해야 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키케로는 “Cui bono(누가 이득을 보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지 살피라는 말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른 관용과 불관용이 결정된다면 이기적 욕심과 똘레랑스를 착각하는 일일 겁니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의 지적대로 똘레랑스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박해’하지 않는 정도의 합의도 이뤄지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일상생활은 물론 정치,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관용의 정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사람들이 인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튜브 알고리즘에 길들여져 점점 좁고 깊은 자기만의 프레임 속에 갇혀 살게 됩니다.

19세기 말에도 볼테르처럼 용감하게 ‘나는 고발한다’라고 외친 에밀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한번 세계사의 중심으로 끌여들입니다. 프랑스의 지적 전통과 지식인들의 단호한 목소리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텍시 운전사』(1995)가 출간된지 3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당시 똘레랑스에 대한 관심만큼 우리의 생각, 말과 행동은 조금 나아졌을까요. 우리 사회는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인정’하고 대화하며 타협하는 문화를 갖게 됐을까요. 기득권의 카르텔에 침묵하며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눈감고, 주변 사람들과 내 일상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우리가 사는 내일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일요일 밤 늦은 시간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저런 생각에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오늘 아침 모두들 각자의 삶 속으로 또 치열하게 달리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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