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힘 Philos 시리즈 4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4년 마지막 3개월간 주제는 「신화」였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막론하고 신화는 공동체의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며 민중들의 생각과 경험과 기억이 보태진 집단 창작물이 바로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기록하면서 현재의 형태로 고정되었으나 기록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니 원본은 의미가 없고 디테일에 목숨 걸 필요도 없습니다. 세계 각국의 신화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고 문명 시대에도 예술에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21세기에도 라그나로크 같은 게임의 세계관을 제공하며 스타벅스 커피잔에도 세이렌이 새겨질 만큼 자본주의 첨병으로도 활약합니다. 그래서 조지프 캠베은 “꿈이 사적인 신화”라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이라고 정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종횡무진 세계 각국의 신화를 누비며 비교 신화학의 전설이 되어버린 저자에 대한 찬사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1987년에 세상을 떠난 조지프 캠벨의 이 책은 199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1992년 이윤기가 번역했고, 2002년 개정판이 나왔다가 2020년 출판사를 바꿔 재출간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면 싶은 책이지만 배경지식이 전혀 없거나 신화 입문용으로는 조금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너무 쉽고 재밌는 콘텐츠에 익숙하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적당한 난이도는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인터뷰어 빌 모이어스는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라고 정의합니다. 인상적인 발언인데, 이 말은 조지프 캠벨이 천착했던 칼 융의 ‘집단 무의식’을 설명합니다. 신화는 근대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전부터 군집 생활을 했던 인류 공동체의 삶과 꿈을 반영합니다. 원형적 상징으로서 자연에 대한 공포,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아 신화는 태초의 인류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조지프 캠벨은 “‘산타 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힌두의 구루導師의 가르침 속에 있습니다. 산타 클로스는 부모와 자식 관계를 이어주는 은유이지요. 관계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체험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산타 클로스는 없습니다. 산타 클로스는 관계를 인식하는 길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며 동심을 파괴합니다. 종교와 신화의 관계를 설명하는 태도가 객관적일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내재한 서양의 전통과 문화와 달리 우리는 유교적 전통과 가부장적 결속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화,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그게 무슨 삼각김밥 끈 떨어지는 소리냐고 할 수도 있으나 인간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가족과 사회를 통해 만들어진 욕망의 하수인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자유의지라는 거대한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건 사유하는 기능을 점검하지 않는 개인의 책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겨울 산에서 길을 잃어 아재 둘이 동사했다는 뉴스를 접하며 동호회원들의 무관심보다 어둡고 캄캄한 산속에서 난감했을 불안과 공포가 떠올라 한동안 마음이 쓰였습니다. 인류는 여전히 신화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먼 훗날 신화로 전해지지 않을까요.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동해로 떠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는 대신 다가올 미래는 결국 과거와 현재의 결과일 뿐이라는 걸 알면 어차피 연말에 후회만 남기는 신년 계획 대신 내 삶의 신화를 스스로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와 태도를 점검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달력이 바뀐다고 삶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희망 고문 대신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을 직시하는 일이 신화 읽기를 통해 우리 삶에 숨겨진 메타포를 읽어내는 방법일 겁니다. 그러니 계속 따로, 또 같이 걸어 보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은 언제나 인간의 현실 원칙을 넘어선 자리에서 욕망과 쾌락을 방기한다. 그것이 사회적 가면으로 가려진 자기 본능이든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든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의 간극 혹은 공감은 2차적 효과에 불과하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110년 전에 표현하고 싶었던 감정, 드러내고 싶었던 욕망 등은 기억 혹은 과거라는 안타까운 한계 속에 갇혀 아름답게 유영한다. 그것은 오롯이 쓰는 자의 행복과 자유에 기인한 고백과 독백에 불과하지만, 읽는 자의 내면에 호응하는 순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선택적 기억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추동하는 힘이 된다. 쓰는 자의 경험과 무의식 속에 허우적거리던 읽는 자의 아득한 기억들은 제멋대로 춤을 추고 현실 속에 과거를 소환하며 미래를 가로질러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기이하고 생생한 경험을 가능케 한다.

따뜻한 차 한잔과 마들렌 과자 혹은 바니시 냄새는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처럼 현재의 나를 온통뒤흔드는 트리거로 작동하며 기억과 무의식의 세계를 통해 지금-여기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후미각과 후각 혹은 시각과 청각 등 몸의 기억은 개인의 정체성을 나이브하게 드러낸다. 감추고 숨길 수 없는 조건반사처럼 각자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시간의 옷, 세월의 두께를 어찌하지 못한다. 한 인간의 언어와 비언어, 반언어들이 모여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듯 그것을 담아내는 육체는 즉물적 세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명한 ‘나’의 모습이다. 몸이 계급이다. 몸은 영혼을 지배한다. 그래서 몸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지표로 작동한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에 담긴 마르셀 프루스트의 시간은 헤아릴 수 없다. 한나절 혹은 며칠 동안의 상념일 수도 있고, 글을 쓸 당시까지 반추한 자기 삶의 기억일 수도 있다. 소설의 옷을 입고 있으나 콩브레라는 지명이 실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스완도 마찬가지다. 프루스트가 질베르트를 통해 느낀 마음, 즉 뇌의 반응과 몸에서 벌어진 감각적 변화가 없었다면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을 설명할 이유가 없다. 유대인이며 동성애자 문학청년이었던 작가의 인종과 성적 취향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설에 대한 해석과 실명으로 드러난 인물들, 뱅퇴유나 코타르, 비슈로 추정되는 인물 찾기 놀이는 호사가들의 즐거움일 뿐 읽는 자의 즐거움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플롯과 스토리를 따라가며 글의 의미와 프루스트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의미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고 외친 이유와 무관하게 때때로 읽는 자는 읽히는 대로 읽는 즐거움 그 자체를 포기하고 인터넷 정보나 유튜브를 뒤적이는 우愚를 범한다. 문학을 읽는 즐거움은 해석과 분석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벌어지는 읽는 자의 내적 갈등과 불안 혹은 행간을 뛰어넘는 상상과 의도적 오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은 제멋대로 읽기면 충분할 때가 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흥분과 열기가 가라앉은 다음 평정심은 되찾으면 그때서야 사랑인지 욕정인지 ‘생각’해 보는 일과 달리 프루스트의 소설은 망설이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몸을 맡겨도 나쁘지 않다. 문화적 환경, 역사적 배경, 사상적 토양이 다른 영국 작가가 지구 반대편에서 겪은 유년 시절과 스완의 사랑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어떻게 읽혔는지 기록하는 일은 부질없다. 프루스트는 “작품의 표면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내적 고향은 동일하며 따라서 작가란 엄밀한 의미에서 단 한 권의 작품밖에 쓸 수 없다.”라는 주장했다. 7편까지 읽고나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1편을 읽은 느낌은 낯설고 기이한 경험이라는 것일 뿐이다. 개인적 자아인 아니마와 아니무스 vs 사회적 자아인 페르소나의 치열한 사투가 이 작품의 본질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 존재를 해체하려는 집요한 시도와 죽음이 무의미한 삶에 대한 저항 행위라면 이렇게 시간의 궤적을 재구성하는 일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라는 첫 문장을 ‘오랜 시간 불면에 시달리며 잃어버렸던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라는 각주에 동의할 수는 없다.

프루스트는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 마르셀로 추정되는 화자와 질베르트의 사랑이야말로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음악처럼 흐른다. 부질없는 묘사와 표현이 마르셀, 아니 화자의 감정을 전달할 수는 없다. 읽는 자는 자기 사랑과 감정에 취해 각자의 기억을 더듬어 그, 혹은 그녀를 떠올리면 그만이다. 남은 이야기가 무엇이든 ‘잃어버린 시간’이 ‘잃어버린 사랑’이라는 통속적 한 줄 요약이 되지 않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2 사계절 만화가 열전 21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은 현실과 유리된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적이 없다. 모든 책은 인간 스스로 자기를 알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나’가 아닌 ‘너’와 ‘그들’ 그리고 외부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태’를 향한 호기심과 관찰의 탐구 과정을 담은 기록인 책은 폭발적 지식의 빅뱅을 가능케 했다. 단기간에 엄청난 지식과 정보 습득이 가능해지자 과학기술은 빛의 속도로 발달했고 인간의 인지 능력과 사고력은 무엇을 상상하든 실현 가능한 수준에 도달했다. 하늘이 파란 이유도 노을이 붉게 물드는 과정도 알게 됐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불합리한 선택, 종교적 도그마, 학살자의 심리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책들이 차고 넘친다. 그래서 책은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적이 없는데도 스스로 하나의 세계가 되어 버렸다.

인터넷 이후 시대, 즉 정보화 시대의 독서는 이전 시대와 그 목적과 방향이 전혀 다르다. 지식의 생산자였던 연구자들은 건재하나 소비 대중은 폭과 넓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누구나 읽고 쓰는 시대를 살면서도 ‘독서’는 가장 느린 매체가 되어 외면받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점점 중요해지는 문해력과 미디어 리터러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쇼츠, 릴스, 틱톡 등 점점 호흡이 빠르고 단축, 요약된 정보를 소비한다. 유일하게 줄지 않고 오히려 늘고 있는 건 인간의 욕망뿐이다.

현상이 어떠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창현의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1권과 2권은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안간힘으로 보여 안쓰러운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취향 저격인 책에 대한 상찬은 낯이 간지러워 솔직한 이야기를 쓰기가 어렵다. 만화에서 강유원을 만나는 어색함과 만화는 책을 읽기 싫은 사람들이 보는 거라는 편견이 어우러지면 이 책이 놓일 자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통쾌함을 느끼고, 동류의식에 위로를 받고. 나같은 사람들이 어딘가에 또 있을 거라는 기이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아무려면 어떤가, 나 혼자 뿐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중독인 것을.

만화의 소재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없다. 하지만 가벼운 독서법, 자기계발서, 서평집 따위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책 한 권쯤은 괜찮지 않은가. 왜 문학을 넘어선 자리에 이 책이 놓여야 하는지, 왜 강유원을 등장시켜 독서의 본질과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점검해야 하는지 살펴 볼 수 있다면 이 책은 서가의 어떤 책보다 중요한 자리에 놓여야 할 것이다. 좋은 책을 추천해 달라거나, 책을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되냐고 묻는 정도가 돼야 재밌는 책이다. 왜 책을 읽어야 하냐거나 독서가 꼭 필요하냐고 생각한다면 다른 책을 살펴보는 게 좋다.

유머를 이기는 방법은 없다. 독서 클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피는 건 메시지를 담는 포장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내뱉는 말과 행동을 살펴보며 자기 삶의 여유(개그)와 태도(의미)를 점검할 수도 있다. 무엇을 위해 왜 사느냐고 묻는 사람은 많지 않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드물다. 눈앞에 현실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늘이 흐리고 내일 아침은 혹한의 겨울이 시작될 거라는 예보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 고전과 신화를 뒤적이는 마음,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상상하던 사춘기와 시지프를 다시 생각하는 중년, 걷고 뛰고 땀을 흘리며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가해한 일들을 바라보는 오늘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바스라진다. 사라지는 모든 것이 아쉬움을 남기는 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무엇이 없지도 않다. 가능한 모든 일을 저지르고 도전하고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게 뭔지 다시 고민하려면 죽기 전에 읽어야 할 도서 목록보다 자기 몸과 유머를 챙겨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읽는 세계 신화 여행 - 오늘날 세상을 만든 신화 속 상상력
이인식 지음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오스와 코스모스. 혼돈과 질서는 우리 인생처럼 경계가 모호합니다. 평온한 일상이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삶이라면 불안하고 흔들리는 미래는 혼돈일 겁니다. 카오스는 가이아를, 다시 가이아는 타드타로스와 닉스와 헤메라를....카이아와 우라노스는 12명의 티탄과 크로노스를...크로노스와 레아는 헤라, 데메테르, 헤스티아,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를...제우스는 수많은...

이 책으로 세계 신화를 처음 시작하는 건 어떠냐고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편적인 사건과 사고, 신들의 에피소드는 훗날 그려진 명화를 설명하고 뒤이어 과학적 사실과 현실의 문제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신화 본래의 맛과 멋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다만 신화는 어차피 모두 허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신화가 주는 의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가 반영된 인류의 무지와 공포와 지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듯 싶습니다. 판테온pantheon에는 12명의 신이 있습니다. 제우스(최고의 신, 신과 인간의 아버지), 헤라(결혼), 아테나(지혜, 예술, 정의), 아폴론(빛, 음악), 포세이돈(바다), 아르테미스(술, 사냥), 아프로디테(미, 사랑), 헤파이스토스(대장장이), 데메테르(농업), 헤르메스(상업), 아레스(전쟁), 헤스티아(가정). 이들은 알 수 없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인격화한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합리화하는데 필요했을 거라 짐작합니다. 대표적인 그리스와 로마 신화 뿐 아니라 북유럽, 인도의 신화까지 정리해서 소개한 과학자의 수고로움에 경의를 보냅니다. 다만 신화와 관련된 과학적 사실과 현실의 이야기는 ‘통섭’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신화와 종교라는 전혀 다른 영역을 뒤섞어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부분들이 많아 아쉬웠습니다. 모든 걸 뒤섞는 게 통합이나 통섭적 사고가 아니라는 걸 모를 리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쨌든 이 책은 서른네 가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구성이지만 중복출연하는 신들이 있으니 서로 연결 고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틈틈이 한 편씩 읽어도 좋은 책입니다. 신화를 많이 읽었다면 과학적 해석에 흥미를, 읽지 않았다면 신화 이야기 자체로도 충분히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모임에서는 인어, 바벨탑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동성애, 임사체험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주제는 신화를 떠나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나눴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든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토피아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변치 않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 너무 복잡한 이해관계, 서로 다른 삶의 목적과 방향으로 매일매일 부딪치면서도 함께 사는 사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어떤 곳일까요.

이인식은 “세속적인 천년왕국주의는 여러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1771~1858)의 유토피아 사회주의, 카를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의 공산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의 나치주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548쪽)라고 황당한 주장을 하고 세속적 이념과 정치경제적 지향점은 천년왕국주의의 여러 형태가 아닙니다. 이 책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유토피아는 신들이 꿈꾼 적도 없고 인간들이 실현할 가능성도 없어 보입니다. 부정적 현실 인식이 아니라 지금-여기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꿈꿀 권리, 현실적 희망을 놓지 않는 용기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멀리서 오프 모임에 참석해 주신 회원님이 참석하신 모든 분께 선물해 주신 캘리그라피 필통이나 직접 육포를 만들어오신 사회자님의 정성을 감탄하며 사람들이 가진 따뜻함, 이타심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느낌니다.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빛나는 인간은 또 그만큼의 슬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이 부딪치는 자리, 오로지 단 한 권의 책으로 연결된 분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뵙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창비시선 491
유현아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이 겨울이라고 어는 건 아니다. 몸이 봄이라고 건강해지는 게 아니듯이. 찬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해가 지면 해가 지는 대로 오늘은 과거가 되고 어제와 조금씩 멀어진다. 오래된 기억은 추억으로 갈아입고 선택적으로 갈무리된다. 지나간 모든 일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고 싶어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려 노력한다. 그러나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현재를 지배하며 영혼을 잠식하고 미래를 채운다.

PTSD로 고통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억울함과 분노를 억압하거나 절망과 슬픔을 눌러 담은 사람에게도 다르지 않다.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이라고 다독여도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시는 슬픔의 미학이다. 유현아의 슬픔은 다른 시인의 슬픔과 다르지 않다는 게 아니라 허무와 냉소, 슬픔과 고통, 절망과 분노의 틈으로 자라는 작은 희망 같은 걸 믿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시집을 뒤적이는 게 아닌가.

오늘의 달력

어제의 꿈을 오늘도 꾸었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

바닥 밑에 희망이 우글우글 숨어 있을 거라고 거짓말했다

한 장을 넘겨보아도 똑같은 달의 연속이었다

못 하는 게 없는 것보다 어쨌거나 버티는 게 중요했다

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바닥의 목소리가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라질 때까지

당신의 박수 소리가 하늘 끝에서 별처럼 빛날 때까지

오늘도 달력을 넘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당신의 애인에게서 내일의 꿈을 들었다

서시에 해당하는 이 시에서 제목을 골랐다. 양경언은 해설에서 이 시집을 「사라지는 세상을 위한 시」라고 명명한 다음, “유현아의 시에서 희망의 얼굴은 바닥에서 나타난다.”라고 말한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면 희망은 디폴트 값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람들은 절망은 바닥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절망의 바닥을 뚫고 내려가려 애쓰기도 한다. 대책 없는 희망, 실현 불가능한 기대는 더 큰 절망을 예비하거나 엄청난 분노로 전환된다.

질문들

광장에서

오늘도 침묵이 침묵처럼 번지고 있다

거짓말들은 모여 거짓말이 되지 않는다

거품처럼 달아난 목소리는 지워진 경계처럼 낯설게 오다 도망친다

저녁이 되면 희미한 빗살무늬 기억이 켜지는 그곳에 치켜뜬 눈들이 박혀 있다

완벽하게 행복해,라는 대답은 새빨간 비문이다

입에서 수많은 물이 넘쳐흘러 도시를 습하게 만들었다


그날 밤에는 별 모양 하나가 반짝이며 광장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왔다

울음을 흡수하지 못한 별의 흉터가 하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도 침묵이 아니다. “완벽하게 행복해,라는 대답이 새빨간 비문”인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완벽하게’라는 수식어가 없어도 비문이 아닌 건 아니다. 게으른 햇살이 길게 눕는 아침과 금세 어두워지는 저녁이 멀지 않다. 울음을 흡수하지 못한 별들이 반짝이는 건 눈물 때문이 아니라 투명한 슬픔 때문이다. 외로움과 심심함을 구별하지 못하듯 슬픔과 눈물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흉터 난 자리마다 이유가 새겨지듯 애써 외면한 일들은 언제나 반드시 정면을 바라본다. 외로 튼 고개를 스칠 때마다 굳이 슬퍼할 이유가 없다.

때때로 찬 바람이 불어야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