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zeppa 문학과지성 시인선 597
김안(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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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으로 실린 「Mazeppa」는 우크라이나의 영웅, 이반 스테파노비치 마제파Ivan Stepanovich Mazeppa를 가리킨다.(류수연 해설, 「연옥으로의 한 걸음」, 108쪽) 또한 마제파Mazeppa는 리스트liszt의 초절기교 연습곡 4번이기도 하다.

나는 듣는다,

토끼가 겨울나무를 파먹는 소리,

얼어버린 눈동자가 물결처럼 갈라지는 소리.

나는 듣는다, 술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시인의 창밖으로 계절처럼

전진하던 기차 소리,

그 소리에 밤하늘의 불꽃이 흔들리고,

낭만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과,

죽은 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벌레의 날갯소리,

듣는다,

음독이 묵독이 되는 소리,

기억을 잃은 이들이 거울 앞에 서는 소리,

나는 실패하고,

나는 전진하기에,

이것은 나의 몫이므로.

_ 「Mazeppa」중에서

함정에 빠진 젊은 청년 기사의 사랑 이야기와 시련과 생존을 거쳐 독립 영웅이 되는 반전 서사는 이 시집과 닮은 구석이 없다. 시인은 리스트가 제안하듯 시의 기교를 연습한 게 아니라 매 순간 처음인 모든 이의 삶에 반전을 기대하라는 위로를 보내려 한 것일까. 왼갖 잡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순간들, 뵈는 게 없어도 좋을 것 같은 장면들이 떠오른다. 누구나 자기 삶을 실패하며, 또 전진한다.

‘내가 젊을 적 쓰고자 했던 것들은 어떤 빈곤함의 형상, 때론 논리와 신랄한 야유, 잠자리 날개 같던 당신의 이마와 별 무리와 당신의 끝’(「시인의 말」중에서)이 먼저 튀어나와 당혹스럽다. 이제 젊지 않은 시인이 쓰고 싶은 건 뭘까? ‘말의 해방, 말의 깊이 따위를 향해 손 내밀다니 겁도 의미도 없이’ 변명과 술수로 부끄러운 연옥을 포장할 순 없다. 언어의 세계가 존재의 한계라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인간이 전혀 다른 존재로 사는 건 아니다. 추악한 변명과 끝없는 변명으로 자신을 합리화할 뿐. 시인의 말은 이제 막 시작한 독자의 시 읽기를 방해한다.

그러다가 문득 ‘내 질문들은 자꾸만 어리석어지고, 어리석어지니 입을 틀어막고,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선의와 이토록 불가해한 다정함이 가득하니, 나는 그저 진부함과 유치함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뒤풀이」중에서) 버린 시인에게 공감하며 푸른 하늘을 잠시 쳐다본다. ‘세계의 절반은 어둠이고 그 남은 절반이 빛이라는 뻔한 술수’(「무의식」중에서)라는 사실을 몰라서 쓸쓸한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선의와 다정함이 필요한 건 어둠 때문이 아니라 빛의 그림자 때문이 아닌가.

이념도 없고 분노도 없는 계절이 왔다. 마음이 질겨서 봄이다. 이제 나는 한 줄로도 만족하게 되었다. 한 줄만큼의 어리석음이면 족하다. 그 정도의 망신이면 족하다. 부끄러운 봄이다.

_ 「입춘」중에서

허나, 2024년의 봄은 이념과 분노로 가득하다. 마음이 모질지 못하면 견디기 힘든 시절은 저마다 다른 빛깔과 모양일 터. 사람들은 어리석음과 망신은 항상 타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복잡하게 착하며 타인은 단순하게 나쁘다는 착각. 봄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외면과 부인 그리고 자기 합리화의 모순을 견디는 힘이 가끔 못내 부럽다. 입춘을 지나 우수, 경칩까지 스쳐와도 갈 길은 멀고 험하다. 봄이 온다고 해서 부끄러움 없는 생활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언제나 희망 고문이다.

‘설운 마음이 넘쳐서 누워만 있던 오후다. 잠든 딸아이 옆에 누워 머리를 쓰다듬다가 빗소리에 몸을 일으켜 앉으니’(「귀신의 맛」중에서) 창밖엔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가 두툼하다. 잠든 아이의 손톱을 깎던 평화가 전생 같다. 고개 한번 돌리면 시간의 저편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마음 밭에 거름을 주고 비가 와 촉촉하고 부드러운 상태가 되어야 쓸 수 있다. 읽는 일도 다르지 않다. 시인은 ‘지난가을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온종일 집에만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읽을 수 있는 책도 없었다. 지난가을이었다.’(「붉은 귀」중에서)라고 고백한다. 읽고 쓰는 일이 아닌 사람들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니라 할 일을 못하는 상태, ‘지난 가을’이 아니라 굳이 ‘지난가을’이라고 말하고 싶은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그 순간은 온다. 그러나 그 방법과 태도는 제각각이다. 지난 가을이 아니라 올가을로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창에 비친 나를 본다. 늙고 있다, 늙은 개 같은 인간 늙은 인간 같은 개 같던 지난가을, 네발로 나는 빈다. 나는 반성합니다. 보세요, 최대한 인간처럼 걷고 있습니다. 마치 미래가 있는, 생활이 있는 사람처럼 웃으며 전활 받고, 네네, 생활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반성한다.’(앞의 시)

생활인의 슬픔에는 시인의 말대로 ‘자본주의의 돼지’가 된 친구를 우연히 만나는 일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망각이 용서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 용서가 영혼을 병들게 만든다고 했던가.’(「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어쩌면 용서하지 못하는 건 타인의 음험한 욕망이나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산다는 무언가 그립다는 말 한마디 때문이거나 모든 것을 상실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내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건 세상에 없던 새로운 비유를 만드는 일 같달까. 아버지의 구석진 장례식장에 온 사촌 동생 부부의 고귀한 옷차림 같은 거랄까. 눈앞에서만 착한 학생들처럼, 나는 한껏 슬퍼했었지. 아니 그런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일 테다. 마음을 쏟는다는 말은 두 가지로 읽힌다. 최선을 다했거나, 더 이상 쏟을 것 없이 모든 것을 상실했거나.

_ 「마음 전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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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 - 앙드레 모루아

“한 인간의 삶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했다.” - 알랭 드 보통

세상에 필독서는 없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어떤 사람이든 현재 내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책보다 사람과 세상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틀린 건 아닙니다. 다만 아래 소개 글은 죽기 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 보려고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까 싶어 며칠 먼저 읽은 사람이 남기는 흔적입니다. 매우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일 수 있으니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1. 번역본 선택과 워밍업

마르셀 프루스트에 관한 찬사와 관심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합니다. 2022년 11월에 민음사에서 완간된 13권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추천합니다. 번역은 제2의 창작입니다. 특히 문학은 번역가의 역량과 출판사의 투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와 감동을 선물합니다. 문학동네, 창비, 민음사 등 대형 출판사가 독점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서 세계 문학 번역본은 반드시 한두 쪽이라도 비교해 보고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번역가의 역량에 따라 전혀 다른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작가의 집필 기간에 버금가는 시간을 투자한 김희영의 노고에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한 마음을 전할 뿐입니다.

이미 번역 출간된 국일미디어, 동서문화사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권을 읽다가 열화당에서 나온 만화로 먼저 스토리를 파악하고 워밍업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고전을 읽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2차 저작물을 통해 사전 정보를 얻고 전문가의 견해와 배경 지식을 토대로 접근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래 프루스트와 ‘잃시찾’ 관련 도서를 적어 두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결국 문학은 개별독자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줍니다. 누가 뭐라든 내가 읽은 나만의 ‘잃시찾’을 만들게 됩니다.

2. ‘잃시찾’ 효과

단 한 권의 책을 쓴 유일한 작가라는 평가는 이 책에 아우라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억과 시간에 관한 집착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추억합니다. 프루스트는 도대체 어떤 생각과 감정을 떠올리며 10여 년간 글쓰기에 매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장은 길고 묘사는 치밀합니다. 한 단락이 수십 쪽에 이르기도 하니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심리학 개념은 문학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자동기술법automatisme으로 발전합니다. 문학이론과 평가는 이 책을 읽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100년 전 프랑스의 금수저 귀족 집안에 태어나 무직으로 글만 쓰며 살던 프루스트가 바라본 세기말의 풍경과 사교계 인물들, 자기 경험에 대한 미치토록 지루한 TMI를 견디다보면 어느새 프루스트식 글쓰기에 매료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른 모든 책이 쉬워지는 ‘잃시찾’ 효과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홍차에 적신 마들렌은 1권 도입부에 등장합니다.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1~2권)만 읽으셔도 마들렌 효과(비의지적 기억을 통한 과거의 부활과 총체적인 인식)에 대해 대화를 나누거나 글을 쓰는데 불편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과 알베르틴 효과(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것, 늙음과 죽음, 욕망과 질투, 광기와 환상, 무의식과 타자)까지 살펴보시려면 완독을 추천합니다.

만연체 문장의 힘은 대단합니다. 세상을 0.5배속으로 보게 합니다. 슬로우 모션으로 돌아가는 영화처럼 프루스트는 끊임없이 중고등학교 때 애용하던 카세트 플레이어의 되감기rewind 버튼을 누릅니다. 속으로 ‘제발 그만 하라고!’라고 외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서사story 중심의 현대 소설과 전혀 다른 전개 방식에 지쳐갈 쯤 독특한 구성과 차별화를 경험하신다면 프루스트에게 감염되신 겁니다.

13권을 읽는 동안 수많은 등장인물이 독자를 괴롭힙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 등장인물 이름을 읽다가 덮어버리신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등장인물 뿐만 아니라 당대를 풍미했던 음악가, 화가들의 작품까지 살펴야 하는 매우 번거로운 각주 읽기가 되거나 의외의 재미이거나! 드레퓌스 사건은 시종일관 사회적 배경으로 소모되기 때문에 사회, 역사적 배경까지 공부하며 읽을 필요는 없지만 드레퓌스 사건과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한 정보는 간단하게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인물과 사교계의 복잡한 혼인 관계 등은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1편~7편이 시작될 때 등장인물을 미리 소개합니다. PDF 파일로 만들어 두고 출력해서 참고하시거나 핸드폰에 사진으로 저장하고 헷갈릴 때마다 수시로 확인하면 금방 떠올려집니다. 아래 첨부해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드레퓌스 사건, 유대인 차별, 전통 귀족, 신흥 부르주아, 살롱 문화 등 당대 사회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정보와 지식이 필요할 수도 있으나 프루스트의 설명만 따라가며 그땐 그랬구나, 정도만 이해하고 넘어가도 소설을 읽는 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목적이 어디에 있든 각자의 방식대로 읽으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3. 쓸데없을 수도 있는 몇 가지 안내

1권 50쪽 쯤 읽다가 전체 분량이 13권이라는 사실에 현타가 오시면 각 편 뒤쪽 김희경의 해설을 먼저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매일 일정 분량을 정해 놓고 읽는 방법도 좋지만 저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만 읽기를 권합니다. 최선을 다해 천천히 문장과 문제를 즐기려면 프루스트식 글쓰기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집중력 높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벨 에포크 시대 프랑스와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 혁명사』를 읽고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2》 등을 찾아보셔도 좋습니다.

스완과 오데트의 딸 질베르트는 화자인 마르셀 프루스트의 첫사랑입니다. 스완 양이었던 질베르트는 스완 사망 후 오데트의 재혼으로 포르슈빌 양이 되고 생루와 결혼해서 생루 후작 부인이 되었다가 생루 사망 후 게르망트 공작 부인이 됩니다. 인물들의 호칭과 관계 변화가 다양하진 않지만 중간중간 나오는 사망, 결혼 등 주요 사건을 놓치는 순간 회상과 미친 TMI에 길을 잃기 쉽습니다. 가급적 주요 등장 인물은 메모를 하며 읽기를 권합니다.

최초 구성은 1편 「스완네 집 쪽으로」, 3편 「게르망트 쪽」, 7편 「되찾은 시간」 3부작이었다네요. 나머지 2, 4, 5, 6은 알베르틴이 주연을 맡습니다. 물론 사교계 이야기와 다른 등장인물도 중요하지만 인과관계와 사망 시점 등이 마지막 편에 헷갈리기도 합니다. 1, 3, 7편을 먼저 읽고 2, 4, 5, 6편을 읽는 방법도 괜찮아 보입니다. 7편이 각각 다른 소설로 완결될 수 있으니 전체 구성을 이해하고 공간적 배경과 이동 경로를 감안해서 읽으시면 ‘시간’ 순서대로 ‘추억’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프루스트의 ‘기억’과의 싸움의 최전방에 참전하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전체 구성과 읽으면서 주요 등장인물과 사건을 메모하기 시작한 건 3권부터입니다. 혹시 참고가 될까 싶어 아래 첨부합니다.

소설은 계속해서 살롱 문화를 따라 갑니다. 사교계를 떠나지 않았던 작가의 삶은 관계를 맺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모두 살롱에서 배웠을 거라 짐작합니다. 타자를 향한 열정과 의심과 질투와 집착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대의 문화와 전통과 전혀 다른 21세기 한국인이 마르셀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없어 보입니다. 다른 소설과 달리 특정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공감을 목표로 한다면 잃시찾 읽기는 지루한 자기와의 싸움일 될 뿐입니다.

소설에서 각주 읽기는 당황스런 경험입니다. 김희영의 각주는 프루스트 연구자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사실관계를 설명하며 내용의 모순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주를 건너뛰면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프루스트의 의도를 놓칠 수도 있으나, 선택은 독자의 몫입니다. 각주 읽기가 소설 읽기를 방해한다면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 선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각주를 읽으며 음악, 미술, 오페라 등 당대 예술가들의 대표작과 특징을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4. 사족

조정래의 『태백산맥』(전10권), 『아리랑』(전12권)이나 이문열의 『삼국지』(전 10권) 혹은 앙투안 갈랑이 엮은 『천일야화』(전 6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전 5권) 등 연작 소설을 읽은 경험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가 당황했습니다. 각자의 소설 읽는 방식이 있겠으나 저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조금 색다른 독서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긴 사족을 덧붙입니다. 소설을 읽는 목적과 방법, 책을 읽는 이유에 따라 각자의 접근 방식을 선택하면 그뿐입니다. 물론 안 읽어도 그만입니다. 그래도 혹시 시작하신다면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민음사 1~13권 5,716쪽)

1편 「스완네 집 쪽으로」 : 콩브레

1부 콩브레(민음사 1권, 324쪽)

2부 스완의 사랑(민음사 2권, 432쪽) : 스완-오데트

3부 고장의 이름-이름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 상젤리제, 발베크

1부 스완 부인의 주변(민음사 3권, 376쪽) : 샹젤리제_베르고트, 질베르트(스완 양 → 포르슈빌 양 → 생루 후작 부인 → 게르망트 공작 부인)

2부 고장의 이름-고장(민음사 4권, 556쪽) : 발베크_엘스티르(마네), 알베르틴, 앙드레

3편 「게르망트 쪽」 : 콩브레, 동시에르, 빌파리지 부인의 오후 모임 vs 게르망트 부인의 만찬

1부(민음사 5권, 524쪽) : 동시에르_빌파리지 부인, 생루(로베르)-라셸, 샤를뤼스

2부(민음사 6권, 544쪽) : 게르망트_할머니의 죽음, 게르망트 부인, 알베르틴, 스테르마리아, 스완,

4편 「소돔과 고모라」 : 발베크, 동시에르, 게르망트 대공부인 저택 연회 VS 베르뒤랭 부인 집에서의 만찬

1부(민음사 7권, 448쪽) : 샤를뤼스-쥐피앵, 스완, 알베르틴

2부 1장 : 발베크_알베르틴, 앙드레, 캉브르메르 부인,

2장(민음사 8권, 540쪽) : 동시에르, 발베크_알베르틴, 생루,

3장 : 샤를뤼스 남작-모렐, 게르망트 대공-모렐,

4장 : 뱅퇴유 딸-알베르틴, 베르뒤랭 부인, 캉브르메르 후작 부인

5편 「갇힌 여인」 : 파리 샹젤리제

1부(민음사 9권, 328쪽) : 마르셀-알베르틴, 샤를뤼스, 모렐-쥐피앵 조카딸, 베르고트의 죽음,

2부(민음사 10권, 424쪽) : 스완의 죽음, 베르뒤랭 살롱, 샤를뤼스-모렐, 뱅퇴유 양의 친구-알베르틴, 뱅퇴유의 사후 연주회, 알베르틴과 이별

6편 「사라진 알베르틴」 (민음사 11권, 516쪽) : 투렌, 불로뉴 숲으로의 외출 → 질베르트 만남 → 앙드레와의 대화 → 베네치아에서의 체류

1장 : 알베르틴의 죽음, 생루, 에메의 조사와 편지, 에포르슈빌,

2장 : 포르슈빌(질베르트), 알베르틴의 진실(에메의 조사와 편지/앙드레의 방문/베네치아에서 가르파초의 그림)

3장 : 베네치아_노프루아, 빌파리지 부인, 빌파리지 부인의 조카이자 마르상트 부인의 아들 생루-스완의 딸 질베르트 결혼 소식

4장 : 캉브르메르 아들-쥐피앵의 조카딸과 결혼 소식, 생루의 동성애 성향과 질베르트에 관한 회상, 노르푸아-빌파리지

7편 「되찾은 시간」 : 파리, 콩브레, 탕송빌, 블로뉴숲 가로수길

되찾은 시간 1(민음사 12권, 312쪽) : 파리, 로베르-질베르트, 쿠르부아지에, 모렐, 콩쿠르, 제1차 세계대전, 베르뒤랭 살롱, 샤를뤼스, 브리쇼, 쥐피앵, 생루의 죽음

되찾은 시간 2(민음사 13권, 392쪽) : 게르망트 대공부인 살롱, 레투르빌 소위, 블로크, 샤를뤼스, 질베르트, 라셸, 라 베르마

# 주요 무대 : 콩브레, 샹젤리제, 발베크, 동시에르, 베테치아, 포부르생제르맹, 메제글리즈, 투렌, 탕송빌, 루생빌

- 콩브레 : 마르셀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

- 샹젤리제 : 어린 마르셀이 놀던 곳

- 발베크 : 마르셀이 여름 방학을 보낸 바닷가

- 동시에르 : 친구인 생루가 군대 생활을 했던 곳

- 베네치아 : 마르셀이 어머니와 함께 여행 갔던 곳

# 주요 인물 : 화자(마르셀), 스완, 오데트, 질베르트, 베르고트, 엘스티르, 알베르틴, 앙드레, 봉탕 부인, 노르푸아 후작, 게르망트 공작 부인, 베르뒤랭 부인, 포르슈빌 백작, 빌파리지 후작 부인, 르그랑댕, 캉브르메르 후작 부인, 뱅퇴유, 샤를뤼스 남작, 모렐(샤를리), 쥐피앵, 마르상트 백작 부인, 생루(로베르), 라셸, 블로크,

# 키워드 : 시간, 기억, 추억, 사랑, 죽음, 동성애, 살롱 문화, 전통 귀족, 신흥 부르주아, 드레퓌스 사건, 벨 에포크

# 관련도서

-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알랭 드 보통, 박중서 역, 청미래, 2023

- 프루스트 그래픽, 니콜라 라고뉴, 정재곤 역, 니콜라 보주앙 그래픽, 민음사, 2022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되찾은 시간 그리고 작가의 길, 오선민, 북드라망, 2021

- 프루스트를 읽다, 정명환, 현대문학, 2021

-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앙투안 콩파뇽, 장 이브 타디에 외, 길혜연 역, 책세상, 2017

-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 이성복, 문학과지성사, 2015

- 마르셀 프루스트 : 독서에 관하여, 마르셀 프루스트, 유예진 역, 은행나무, 2014

- 프루스트의 화가들, 유예진, 현암사, 2010

- 프루스트와 기호들, 질 들뢰즈, 이충민 역, 민음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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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 되찾은 시간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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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시간’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지나간 시간은 아쉽고 남은 시간은 불안한 법이다. 100년 전 사람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느 날 문득 “문학 작품의 모든 소재는 내 지나간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 시간 여행에서 되찾은 건 무엇일까. 늦가을에 시작한 소설이 봄에야 끝이 났다. 13권 5,700쪽에 달하는 분량의 소설을 읽는 동안 계절이 달라졌고 해가 바뀌었다. 콩브레를 읽는 동안 검은 머리는 옹브레가 되었다. 누구나 시작하지만 아무도 끝내지 못하는 소설이라는 소문부터 세상에는 이 소설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풍문까지 떠도는 책은 과연 그러했다. 지루하고 황망한 디테일에 숨이 막혔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수십 쪽은 기본으로 되새김질을 하는 문체에 독자들이 어떤 느낌이었을지 실감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프랑스의 사교계와 살롱 문화가 공간과 시간을 넘어 21세기 한국인에게 ‘감동’을 주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도서관이든 3권부터 새 책인 이유가 있는 법.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그 찐득한 답답함도 익숙해진다. 그리고 기나긴 만연체가 편안해지고 묘한 매력을 품기 시작하면 프루스트의 그물에 걸려든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지루한 서사가 오히려 마음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며 읽는 사람의 추억 속으로 안내하는 듯하다. 읽은 문장을 다시 읽고 또 몇 쪽 앞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은 복잡한 사건 전개나 난해한 문장 때문이 아니라 개별 독자의 ‘추억’과 프루스트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지나간 삶을 돌아보며 어쩔 수 없이 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되살아나거나 선택적 기억이 엉켜 사건을 재구성하는 동안 우리는, 아니 나는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견하며 삶에 엉뚱한 의미를 부여한다. 소설을 읽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읽는 독자는 ‘고르지 않은 포석의 감각과 뻣뻣한 냅킨과 마들렌의 맛’과 같은 각자의 소리와 향기와 감각에 집중한다. 과거를 소환하는 트리거는 선물이나 일기장만이 아니다. 인생을 반추하는 사람은 시간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기억과 추억 사이에서 ‘시간’을 되찾지 못한다면 마르셀 프루스트는 왜 읽고 싶은 것일까.

「스완네 집 쪽으로」 시작한 기나기 이야기는 7편 「되찾은 시간」으로 마무리 된다. 드레퓌스 사건(1894~1906)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함께 마무리 된다. 1909년부터 1922년까지 집필된 이 소설은 주관적 기억과 사랑, 질투, 열정에서 객관적 서사와 늙음과 죽음 그리고 예술과 글쓰기에 대한 성찰로 마무리 된다. 7편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이제 병들거나 늙고 죽는다. 그들을 닮은 다음 세대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동성애자이며 성도착(사드마조히즘)자인 샤를뤼스의 죽음과 전장에서 숨을 거둔 생루의 대비된 삶은 모렐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전편을 통해 끝끝내 성과 사랑의 문제는 베일에 쌓인 듯 모호한 추정과 해석만 난무한다. 불로뉴숲 가로수길의 게르망트 살롱에서 유년시절을 추억하는 회상의 회상 장면만큼 인상적인 장면과 깊은 성찰을 담아낸 문장을 옮겨 적다가 이 소설은 결국 기나긴 프루스트의 예술론, 작가론과 20세기 초 유럽 예술계의 이론과 흐름을 톺아보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삶과 죽음에 관한 서사가 소설의 본질이라면 프루스트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꼼꼼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게르망트 대공 부인 살롱의 후일담, 세월의 흐름 속에 늙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7편을 마루히 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이 아니겠는가.

‘스완 부부의 살롱이나 게르망트네의 살롱, 또는 이와 정반대편에 있는 베르뒤랭네의 살롱에서 보낸 사교계에서의 내 모든 삶’을 기록하는 거대한 문장들 사이에서 독자들은 길을 잃기 위해 책장을 펼치는 게 아닐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되찾을 수 없는 시간을 위해 프루스트의 문장뒤에 숨어버리는 건 아닐까. 왜냐하면 프루스트는 “오로지 유추의 기적만이 내게 지나간 날들을,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 주는 힘을 가졌고, 그 앞에서 내 기억과 지성의 노력은 언제나 좌초했다.”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인상을 파헤치고 규명하고, 자신의 언어로 옮기는 번역가이다.”라는 김희영의 해설은 “나는 본질적인 책, 유일하게 참된 책은 이미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위대한 작가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발명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번역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의 임무와 역할은 바로 번역가의 그것이다.”라는 문장에 기인한다.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책을 번역하는 시간을 위해, 바로 그 시간을 찾기 위해 우리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다.

세월은 흘러가며, 젊음은 늙음에 자리를 내주며, 가장 단단했던 재산이나 왕좌도 무너지며, 명성이 순간적이라는 걸 알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방식이, 말하자면 ‘시간’에 휩쓸린 그 유동적인 세계의 사진을 찍는 방식이 모순되게도 그 세계를 고정하기 때문이다. - 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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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기쁨 - 세상을 구할 과학자의 8가지 생각법
짐 알칼릴리 지음, 김성훈 옮김 / 윌북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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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객관적 진실일까. 인간의 호기심은 때때로 비극을 낳는다. 그것이 자연과 사회로 향할 때는 탐구와 관찰로 이어지나 개인을 향할 때는 관음과 무례를 빚어 관계의 파탄을 만든다. 인문, 사회과학과 달리 자연과학자들은 전혀 다른 관점과 언어를 사용한다. 짐 알칼릴리는 과학의 기쁨은 결국 과학적 방법론을 터득한 후에야 얻을 수 있는 판단과 선택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 이해도scientific literacy가 짧지만 강렬한 이 책의 특징을 요약한다. 사회학과 심리학에서 언급되는 체리피킹cherry picking, 탈진실post-truth,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등의 개념은 인간의 습성과 타성적 사고 특성을 나타낸다. 적응과 생존을 향한 몸부림은 다양한 인지 부조화를 극복하도록 각자의 뇌를 재구조화한다.

어쩌면 진실truth에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외치는 사람처럼 팩트fact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지 않을까. 우리는 개인이 속한 다양한 공동체의 도덕적 기준을 내면화 하지만 실제 그 경계는 모호하며 각자의 선택과 결과도 차이가 있다. 자연과학에서 주장하는 객관적 진리가 설 자리는 도덕적 진리의 대척점이 아니라 최소한 합의해야 하는 사회, 정치, 경제 등 교집합의 영역이다. 옳고 그름이나 선악의 가치판단에 관한 논쟁은 종교와 이념 논쟁만큼 소모적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과학적 방법론의 결정적 특성은 칼 포퍼의 주장대로 ‘반증 가능성’이다. 블랙 스완이 등장하는 순간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주장은 부정된다. 따라서 우리가 합의 혹은 동의할 수 있는 최솟값이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결과여야 한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진리가 사회적 과정을 통해 구성된constructed 것이다. 대개 사회적 대립, 정치적 갈등, 이념 논쟁은 이 구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통과 문화적 다양성에 기반한 인간 사회는 지역과 국가와 민족에 따라 합의의 기준과 영역이 다르다. 허나 시대와 공간을 가로지는 공통 언어를 우리는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의견이 아닌 증거에 집중하라는 조언, 타인의 관점을 평가하기 전에 할 일 등 저자는 ‘생각 바꾸기’를 두려워하지 말자고 독려한다. 기준틀이 의존적reference frame dependent보다 무서운 건 기준틀이 독립적 reference frame independent인 사람이다. 주체적인 사고, 판단 능력을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의 겸손을 모르는 우월감이 더 큰 비극을 낳는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는 이제 통계의 계절이 돌아왔다. 데이터에 기반한 확신과 주장이 넘치고 해석과 관점이 판을 친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정치와 생활의 틈에서 과학이라는 빛이 들 수 있을까.

우리가 나눈 각자의 경험 혹은 자기 성찰과 반성 그리고 세상을 향한 시선은 과학적 방법론에 기반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은 복잡하게 흔들리고 엉뚱하게 선택한 후에 황당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다. 아주 먼 바닷가에서 책 이야기를 나누기 올라 온 분의 열정 앞에 생각이 많아지는 건 가까운 거리에서 치열하게 사람들의 고민이 적어 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책과 현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섬이 있다. 그 섬에는 갈 수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다. 그 거리를 인정하며 아주 조금 가까워질 수 있는 다음 모임의 기회를 엿볼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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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라는 착각 -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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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진실성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안다면 말과 행동을 삼가게 된다. 그러다 대부분의 사람은 신념과 확신으로 가득하다. 타인을 단순하게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며 자신은 복잡하고 신중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모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며 생존 게임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한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의 불합리한 요소도 버릴 게 별로 없다. 이질적 존재에 대한 경계와 편견, 나와 다른 집단에 대한 적개심은 종족 보존과 항상성 유지에 도움이 된다. 끼리끼리의 카르텔은 깨지지 않을 것이며 그들만의 리그는 계속되리라.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신경과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필리프 슈테르처가 쓴 이 책은 과학의 영역조차 음모론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망상, 조현병조차 적응과 생존에 유리한 점이 있다는 점이 놀랍지만 ‘정상’과 ‘비정상’, ‘미친’과 ‘제정신’ 사이에는 경계가 없고 연속선 위에 놓여 있다는 지적은 새삼스럽지 않다. 언제나 경계 위에서 흔들리는 사람, 고민하고 질문하는 사람은 성장과 변화의 희망을 품어도 좋다. 그러나 현실은 모두, 각자 ‘제정신’인 사람뿐이다. 반대편 사람들, 즉 정치적 신념, 종교 등이 다르면 공생이 불가능한 적으로 간주한다. 몇몇 극단주의자의 태도가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과 취향을 가진 타인을 비난하는 모든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는 왜 타인을 인정하기 어려울까. 아니, 어느 지점까지 허용할 수 있으며 협력과 공존이 가능할까.

짐 알칼릴리는 『과학의 기쁨』에서 “확신이 몰락을 불러온다.”고 지적했고, 저자는 이 책에서 “확신은 본질상 가설에 불과하다.”라고 강조한다.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가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장착될 가능성은 없을까. 생존 기계에 불과한 인간의 유전적 본성에 반하는 데도 인간은 왜 스스로 합리적, 이성적 존재로 ‘착각’할까.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느라 하루 해가 짧다. 근대 이후 과학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성과 합리성은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으나 개인은 모두 ‘제정신이라는 착각’에 빠져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합리성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비합리성이 진화한 이유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이라는 시스템은 인식적 합리성 원칙을 표방한다. ‘인식적 합리성’은 확신이 증거에 부합해야 하며, 이런 부합성에 맞춰 확신을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실용적 합리성’은 어떤 확신이 자신에게 실용적 이익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마치 탈진실post-truth,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처럼 실용적 합리성은 뇌피셜과 합리화의 다른 이름일까. 비합리적 확신은 종교와 미신 그리고 음모론의 바탕을 이룬다. 미스터 스포크는 “나는 훈련 없는 지성에 반대한다.”고 선언했으나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인식적 비합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인지 왜곡’을 인지 편향 또는 인지 착각이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의 생각이 체계적으로 실수를 저지른다는 의미다.

대표적으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을 들 수 있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겸손은 옛말이 되었고, 인터넷 시대의 인류는 스스로 전문가가 되어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점차 확신을 갖게 된다. “우리의 인간적인 확증 편향이 인터넷에서 에코 체임버가 생겨나게 할 뿐 아니라, 에코 체임버가 확증 편향을 부추기는 것이다.” 필터 버블Filter Bubble과 체리 피킹cherry picking은 에코 체임버echo chamber로 확신을 신념으로 강화한다. 대니얼 카너먼이 말한 ‘네게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다What You See is All There is’라는 무서운 팩트fact와 진실truth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절대 네비게이션을 창작한 신인류가 등장한 건 아닐까.

‘예측 처리 이론’을 소개하며 왜 우리가 대체로 인식적 비합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심지어 망상과 조현병조차 적응과 생존의 방편이 될 수 있는지 살피는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그’ 혹은 ‘그들’의 생각과 태도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인간일 뿐 로직logic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나 로봇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는 과정은 곧 나의 착각과 확신을 점검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인간은 예측 기계라는 저자의 주장은 인간이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에 포섭된다. 의심과 질문은 겸손한 태도를 만든다. 공부하고 살피며 매일 조금씩 조정하고 수정하며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삶은 불가능할까. 목청 높여 노래 부르던 가수의 외침이 새삼스럽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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