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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에디나 베르나르 지음, 김소라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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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세부터 시작된 미술 여행이 이제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다. 지난 20세기를 근대미술과 현대미술로 나누어 일별하는 일만이 남겨져 있다. 20세 초반부터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는 1945년까지의 기간동안 세계사는 급박한 소용돌이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변화의 흐름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인류에게 커다란 충격과 혼란 그리고 새로운 전망에 대한 모색을 가능하게 한 시기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1차 혁명이 일어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되었으며 프로이트의 ‘성욕 이론에 관한 세 논문’이 발표된 것은 1905년의 일이다. 일본과 우리 나라 사이에 을사 늑약이 체결된 잊지 못할 불과 100년 전의 일이다. 근대 미술은 폴 고갱과 세잔의 죽음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미술의 한계는 이러한 사회적 불안과 과학적 혁명을 반영하며 정신분석학에 기여한 무의식과 니체, 베르그송 등의 철학적 직관들이 이 시대의 미술에 혼재되어 나타난다. 한마디로 규정 지을 수 없으나 나름의 특징을 짚어 낼 수도 있겠다.

  색에 의한 혁명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충동에 대한 이들의 거리낌 없고 심오한 분석은 에드바르 뭉크와 표현주의 화가들, 신즉물주의와 마술적 사실주의 화가들, 심지어 초현실주의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0세기 첫 번째 미술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야수파는 색의 자율성과 화가의 감정적 개입을 인식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마티스, 드랭, 루오, 블라맹크, 칸딘스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창가 풍경, 탕헤르’에서 보여주듯이 푸른색에 대한 마티스의 집념은 색채의 강렬함과 더불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표현주의 운동은 독일에서 야수파와 같은 시기에 전개되었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야생의 실존주의적 분노”, 미술가들의 감정과 세계에 대한 비극적 성찰이 결합된 것이다. 스페인의 고야, 영국의 블레이크, 독일의 프리드리히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리위의 소녀들’, ‘카를 요한의 저녁’, ‘절규’ 등으로 유명한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은 이런 한 유파의 특징을 넘어 근대 미술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봄 햇살은 우울한 등불로, 한가한 풍경은 음산한 분위기로 표현하며 어둡고 복잡한 감정이 주조를 이루는 그의 그림은 현대인의 불안을 대변하는 그림으로 이해된다. 앙리 루소와 모딜리아니의 그림도 눈에 띈다. 주로 초상화와 양식화된 누드화를 그렸던 모딜리아니의 인물들은 생전에 주목받지 못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추종자로 일컬어지는 샤갈의 그림들이 소개되지 않아 아쉬웠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그의 그림들은 하나의 유파로 규정지을 수 없을만큼 강렬했고 자유로웠다.

  형태에 의한 혁명으로 명명되는 입체파와 미래파, 절대주의자, 구축주의자들은 형태의 재구성을 통해 이전의 운동들이 진행해온 색에 의한 혁명의 성과를 심화하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아방가르드(avant-garde)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들은 앞선 세기들의 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학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20세기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시각의 현실이 아니라 관념의 현실에서 차용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입체파의 특징이다.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첫 번째 입체파 회화는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고국 스페인의 수난 당하는 바스크 지역에 헌정하는 걸작 ‘게르니카’는 고통과 죽음과 공포를 직각의 선과 대각선의 대비에 의해 혼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로 논쟁을 불러일으킨 마르셀 뒤상, ‘전쟁’을 그린 오토 딕스, ‘붉은 광선주의’를 그린 라리오노프, ‘호밀 수확’을 그린 말레비치 등 미래파와 러시아 아방가르드 역시 뒤틀린 현실과 급변하는 사회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의식들을 반영한다.

  “회화 앞에 물질의 해체에 관한 전망이 열리고 있다” - 바실리 칸딘스키
  “조형적 수단은 무채색이 아닌 원색으로 이루어진 직각의 면과 프리즘이어야 한다.” - 피터 몬드리안

  추상의 시대를 연 것은 칸딘스키다. 마넬리의 ‘서정적 폭발’, 클레의 ‘붉은 풍선’, 되스부르크의 ‘역-구성’, 리트벨트의 ‘적색과 청색의 의자’, 등은 청기사와 신조형주의라는 이름으로 이전에 보여지던 회화와 또 다른 충격과 느낌을 전해준다. ‘넌 날…’이라는 작품으로 뒤샹의 화려하고 복잡한 심미의 세계를 보여준다. 문학에서 기원한 다다이즘은 미술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형이상학적 실내’를 그린 조르지오 키리코를 기준으로 삼은 현실주의 또한 인간 무의식의 변형된 모습들을 비춰주고 있다. 아쉬운 것은 르네 마그리트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부족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있는 화가중 한사람데 ‘가면을 벗는 우주’ 한 작품 만이 소개되고 있다. ‘욕망의 수수께끼’, ‘깨어나기 1초 전 사과-석류 주위의 꿀벌 한 마리의 비행에 의해 야기된 꿈’을 그린 살바도르 달리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초현실주의를 온몸으로 보여준 화가이다. ‘빨강, 노랑, 파랑’으로 가장 엄격한 신조형주의를 고수한 몬드리안은 추상의 영속성을 확고히 하였다. ‘왕의 슬픔’을 그린 앙리 마티스는 원색에 기초한 강렬한 색채와 푸른색에 대한 관심으로 독특한 미의식을 창조해 내었다. 그 밖에 조형과 국제적 양식들은 현재에 볼 수 있는 형태로 이어진다.

  1929년의 대공황은 경제적 위기뿐만 아니라 인간 조건에 대한 위기이기도 했다. ‘인터내셔널’을 그린 그리벨, ‘실업자’를 그린 그로메르를 통해 구상으로의 회귀를 보여준다. 이 그림들은 사회적 사실주의와 노동자의 비참함에 대한 직접적 증언의 양상을 띠고 있다. 그랜트 우드, 에드워드 호퍼로 대표되는 미국의 회화나 라틴 아메리카의 회화는 간략하게 소개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프리다 칼로의 남편인 리베라 디에고의 그림 한 점만을 소개하고 있다.

  히틀러의 등장과 중국의 대장정, 제 2차 세계 대전과 원폭에 의한 종전 등 20세 초반의 지구는 끓는 물과 같았다. 염세주의와 부조리의 철학이 유행할 수 밖에 없었으며 실존에 대한 불한과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이전 세기와 비교할 수 없는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졌던 시기가 바로 근대미술에서 이야기 했던 20세기 초반의 모습이었다. 사회와 인간의 변화에 대응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 미술을 바라보고 화가를 이해하며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이 시대의 불안한 여유는 또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200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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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장-루이 프라델 지음, 김소라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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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호흡으로 시작된 책읽기였다. 지난 가을 '한국사 이야기' 22권보다 힘들었던 이유는 내가 미술에 문외한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라루스 출판사에서 발간된 서양미술사 일곱권을 생각의 나무에서 지난 연말에 번역 출판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세미술부터 읽기 시작했다. 한 번에 읽지 않고 한 권이나 두 권씩 읽는 방법을 취했다. 전체 분량은 7권 1,5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지만 시대별로 중세미술, 르네상스, 고전주의와 바로크, 낭만주의, 19세기 미술, 근대미술, 현대미술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그저 단순한 미술사를 개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문화와 사회사 그리고 사상사의 흐름까지 결합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물론 그 깊이와 폭이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지만 나름대로의 커다란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

  나처럼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에게 미술사의 흐름을 사회, 문화사와 더불어 이해하고 풍부한 도판을 통해 개별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을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책 뒤에 사회, 문학, 예술 분야의 연표를 제공해서 대략의 흐름들을 정리해 놓은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적절하다.

  1946년부터 그러니까 제 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의 미술을 현대 미술로 분류해서 20세기말까지를 정리하고 있는 마지막 현대미술은 익숙한 작가들보다도 현대 사상의 흐름 속에서 파악했기 때문에 흥미있게 오히려 고전적 의미의 예술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작품들이 결코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피카소의 ‘궁녀들’, 마티스의 ‘왕의 슬픔’을 필두로 장 뒤뷔페의 조각, 프랜시스 베이컨의 ‘울부짖는 교황 또는 이노켄티우스 10세’가 주는 색다름도 미래의 예술을 예견하게 하는 시금석이 된다.

  소련의 스푸트니크호의 충격으로 미국은 교육 정책의 기저마저 뿌리채 재정비했고 드리핑 기법의 충격을 던지며 대중에게 다가선 잭슨 폴록의 그림만큼 도발적인 모습으로 뉴욕은 이제 세계 예술계의 무게 중심을 파리로부터 이동시켰다. 콜라주 기법으로 대중들을 또 다시 당혹시키는 앤디워홀의 ‘아홉 명의 재키’등 일련의 작품들은 미디어의 발달과 광고, 사진등 우리들 일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대상들과의 결합으로 예술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미니멀 아트, 키네틱 아트와 팝 아트 등 이름만큼 다양해진 20세기 아방가르드의 예술적 유희는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누보 리얼리즘이 부활하여 아르망의 ‘쇼팽의 워털루’같은 충격적인 아상블라주가 탄생하고 구상이 부활하는 것도 다양성 측면에서 당연해 보인다. 핸슨과 위클뢰의 극사실주의는 사진과 미술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혼란스럽다. 추상이 부활하고 대지 미술이라 명명될 수 있는 작품들도 등장한다.

  세기말의 불안으로 표현될 수 있는 설치 작품들과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현대 미술의 또다른 성과로 표현된다. 해프닝, 퍼포먼스 등 고전적 의미의 미술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것만 같고 관객은 혼란스럽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건축분야의 눈부신 발달은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기능적, 미학적 측면에서 공간의 건축을 예술과 결합시켜나가고 있다.

  20세기의 철학자들의 분석대로 미래 사회는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시대를 뭐라 명명할 수 없을 것이며 진행형의 예술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더욱 무모해 보이기도 하니까. 다만 현실을 넘나드는 다양한 표현 방식들과 예술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모든 흐름들을 즐길(?) 수 있는 안목과 태도를 갖추는 것만도 쉽지 않음을 말하고 싶다. 결국 미학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또다시 바보 같은 질문과 생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되는 반복되는 어리석음(?)을 시작한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술은 다원적이고 모호하고 유동적이었다. 도처로 몰려든 이 시기의 미술은 미추의 구분 너머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이 시기의 미술은 삶 자체와 대립 관계 속에서 삶을, 어쩌면 존속까지를 누렸다. 외견상 점점 더 특수화되는 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나아가 경제적 영역의 볼모가 된 미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산되고 미디어화되고 대중화되었다. 이 시기 동안, 미술은 그 긴 역사를 통틀어 접했던 대중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규모의 다양한 대중을 사로잡았다. 지적, 정치적, 경제적 공론의 대상이었던 미술의 다양성과 영향력은 장 둔감한 무관심을 극복하여 어떤 이들을 매혹하고 또 다른 이들을 선동했으며, 격렬한 논쟁의 촉매제가 되었다.” - <현대미술, 서문>중에서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겠으나 이것으로 길지만 행복했던 미술사의 여행을 끝마친다. 기약할 수 없으나 하루 빨리 유럽으로 날아가 실제 그림과 건축들을 하나 하나 뜯어 먹으며 감상의 시간들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잠시 뒤로 미룰 수 밖에……

200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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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 - 치명적 유혹, 매혹당한 영혼들
이명옥 지음 / 다빈치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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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지향점은 늘 현실 밖에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회적 윤리와 도덕 속에 결합된 미술과 음악 그리고 문학은 지루함을 견딜 수 없게 한다. 정신적 순결함과 고결함을 느끼게 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폄하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의 본질은 현실에서의 일탈이 아닐까 싶다. 반영론적 관점에서 보이지 않는, 보려고 하지 않는 현실의 모습들을 들춰내는 것이 예술의 중요한 기능이라면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내면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은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아왔다.

  프랑스어 ‘숙명의 여인, 운명적인 여성’쯤으로 어원을 해석해볼 수 있는 ‘팜므 파탈(femme fatale)’은 매우 흥미롭다. 지은이 이명옥은 주제 선정의 탁월함을 내용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심리학이나 사회학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는 주제를 그림속에 나타난 여성들을 중심으로 편안한 설명과 함께 그림을 읽어주고 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그리고 흥미를 가지고 그림 감상 능력이라는 덤도 얻는다.

  ‘유혹은 사랑보다 숭고하며, 쾌락은 죽음보다 강렬하다.’는 선언으로 책은 시작된다. 인간의 본능에 해당하는 유혹과 쾌락에 대한 정의가 선정적이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성을 유혹해 지옥으로 빠뜨리는 악녀, 남성을 섹스로 유인해 파멸시키는 탕녀가 바로 팜므 파탈이다.”는 작가의 정의는 사람들이 왜 ‘팜므 파탈’에 열광하는가를 “현실 속의 여자에게서 해소할 수 없는 끈끈한 욕망을 매력적인 팜므 파탈에 투영했다. 윤리 도덕을 뛰어넘고 싶은 은밀한 갈망을 팜므 파탈을 통해 충족시켰다.”고 분석한다. 타당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증오심, 공포와 욕망이 뒤범벅이 된 남성은 지옥 같은 고통을 겪는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갈망과 거부, 쾌락과 죽음. 이 모순된 남성의 심리가 여성에게 반영되어 아름답고 사악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잔혹, 신비, 음탕, 매혹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가지고 살로메부터 해밀턴 부인에 이르기까지 주인공들의 생애와 특징, 다양한 화가들의 그림들을 소개하며 ‘팜므 파탈’에 대한 19말의 들불처럼 번진 현상들을 설득력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19세기 말인가에 대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19세기 이전의 요부들은 비록 아름답고 요염하지만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지 않았다. 또한 사회 전반에 걸쳐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한 유형이 고착되기 위해서는 판에 박힌 이미지가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야한다. (본문 182페이지)

  이러한 현상들이 지금은 광고와 영화를 통해 하나의 이미지로 재생산되고 있다. “19세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오늘날 광고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을 상품화한 섹시한 여인상을 형성하는데 독특한 기여를 했다.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자태로 남성을 유혹하는 팜므 파탈은 환상의 사랑이 실제 사랑보다 훨씬 강렬한 감정이요, 자극적인 것임을 증명한다.”

  개인의 삶이 파편화되고 속도감을 더해 가면서 유혹과 쾌락도 가속도를 더해간다. 더욱 강렬한 생의 자극이 필요한건 현대인들만의 속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치명적인 유혹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랑’과 결합될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까?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여인들을 도덕적 잣대와 윤리적 속성으로 판단한다면 전부 손가락질을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신화나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유명세와 상관없이 현실 속에 숨어 있는 다양한 형태의 ‘유사 팜므 파탈’에 대해, ‘팜므’는 아니지만 치명적인 그 모든 ‘유혹’들에 대해 갈등하게 되는 것은 ‘파탈’일지도 모른다.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화려하고 매혹적인 책이 될 수 있음에도 색지를 넣은 듯한 지나친 디자인으로 오히려 혼란스럽고 품격을 떨어뜨린 단점을 지닌 책이기도 하다. 미와 교코의 <성의 미학>에서 다룬 폭넓은 주제와 달리 ‘여성’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함으로써 전달 방식은 분명하고 선명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팜므 파탈’이라는 주제가 19세기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문학과 미술에서 비롯된 요부형 여성을 일컫는 말일지라도 ‘동양’의 여성들이 제외된 아쉬움이 크다. 
 
2005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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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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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이 가진 정신의 깊이는 수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으며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보통 사람을 판단할 때는 피상적인 모습과 한 두가지 인상에 좌우될 뿐 그 사람이 지닌 다면적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다. 일회적이고 계산적인 인간관계에서는 어쩌면 더 편리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으나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노력과 관찰, 그리고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보통 책을 통해 작가를 만난다. 활자화된 문자를 통해 그 의미를 파악하고 스키마를 통해 지식을 풍부하게 하며 행간에 숨겨 둔 미세한 떨림까지 확인하게 되면 독서를 더할 나위없이 즐거워진다. 간접적인 만남을 통해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고 세상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기 된다. 가을이기 때문일까?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그 어떤 산문보다도 서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비에 푹 젖어 사방으로 퍼지는 낙엽향처럼 진하게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그의 둘째, 셋째 형인 서승과 서준식은 박정희 ․ 전두환 군사정권아래 각각 17년과 19년을 복역하고 풀려난 사상범이었다. 갓 스무살 대학생이 접했던 이 상황은 일본에 살고있는 한국인으로서의 무게뿐 아니라 가족사의 치명적 고통으로 옥중에 두 자식을 남겨둔 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개인적 아픔을 겪게 된다. 일본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하고 일본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는 저자의 글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다. 미ƒ筆寵㈆括?‘반항하는 노예’를 보는 것을 의무로 치부해 두었으며, 그 조각은 바로 형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형에게 보낼 엽서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노예’의 주위를 돌고 있을 때 가슴 속에 몰아친 광풍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서양미술에 대한 감상의 기록이 아니라 작가의 개인의 아픔이자 시대의 아픔까지 녹아있는 기억될만한 특별한 감상이 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남겨진 1983년에 누이와 첫 유럽여행에서 촉발된 그의 서양미술 순례는 이후 1990년까지 무려 여섯 차례에 걸쳐 계속된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의 관심으로서는 도가 지나치다. 그래서 나이 사십에 펴낸 미술 관련 서적에 ‘나의’라는 수식어를 부칠만한 깊이과 안목이 읽을 수 있다. 진부한 표현과 화려한 수사가 없이 깔끔한 미감을 자랑하는 그의 글들은 단정해서 오히려 슬픔을 자아낸다. 길지 않은 문장과 그림에 대한 소박한 표현들이 작가 안에 숨어 있는 깊이와 조응하면서 독자들에게는 신선하고 새로운 눈으로 작품들을 대면하게 한다.

  유럽의 각 도시별 미술관에서 본 그림 중 인상적인 그림들을 골라 쓴 에세이 형식의 글들을 모았기 때문에 책 전체가 자연스런 흐름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단점은 있다. 일관성 있게 부드럽게 넘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 미술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쑤띤의 ‘데셰앙스’, 레온 보나의 ‘화가 누이의 초상’, 영국 앤드 알버트 박물관의 ‘상처를 보여주는그리스도’ 등의 작품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게르니카나 수태고지와 같은 대표작도 소개하고 있으나 작가의 여정과 개인적 감상, 80년대 한국적 현실과 교차 되면서 그 의미가 확대된다. 단순한 그림 쫓아다니기 여행이나 관광과는 다른 차원의 여행으로 비춰진다.

  몇 년간 떠돌아다닐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선 유렵의 미술관들만 실컷 둘러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지금도 꾼다. 서준식은 8년간 여섯차례에 걸쳐 미술관 순례를 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하다. 이론과 역사를 통해 작품의 의미를 감상했다면 미술 을 ‘그림을 보았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서양 미술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와 감상은 물론, 작가 서준식의 시선을 따라 그의 미술에 대한 취향과 감상을 따라가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간접 체험보다 직접 체험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지만 언젠가 만들어질 기회를 위해 잠시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200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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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진이 가르쳐준 것들
천명철 지음 / 미진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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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가입하고 활동하지 않는 예스24의 클럽 이름이다. 사진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 급변하고 있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발터 벤야민은 사진이나 영화같은 복제 가능한 장르에는 원본 예술품만이 지닌 시간과 공간의 현존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우라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아우라가 있든 없든 사진은 가장 보편적인(?) 예술로 인정 받았다. 사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누구나 사진을 찍고 즐긴다.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 모든 인간의 욕망은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으로 남는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일수록 지나간 사진을 들여다보며 과거를 추억하고 시간을 되돌려 생을 반추한다.

또한 사진은 자기 표현 시대의 대표적인 매체가 되었다. 미니홈피와 블로그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사진들은 직접 찍은 것이다. 사진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고 활자와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로 승부하는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가 되었다. 스스로의 모습을 찍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찍어댄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아마추어와 전문 사진가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눈에 보이는 것을 찍기 위해 셔터를 누르는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인지. 천명철의 <어느 날 사진이 가르쳐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돋보이는 사진집이다. 사진과 에세이가 곁들어진 책의 특성상 실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기획 취재에 걸맞게 온통 황량하고 허허로운 들판과 산자락에서 건져 올린 ‘봄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자에게 사진이 말해준 것은 ‘희망’이 아닐까 싶다. 겨울에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스산한 장면들 속에서 봄을 잉태한 사진들은 정적인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다. 노출와 셔터 속도가 어떠하든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겨놓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고민했을 흔적들과 대상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부분들이 잘 전해진다.

다만 크기와 사진의 특성을 오롯이 담아낼 수 없는 한계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가격과 책이라는 형식이 가진 근본적인 특징을 잘 살려내려고 했지만 두 페이지에 걸쳐진 사진을 대하는 독자들의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이 그림을 그리게 했는지 사진으로 발전했는지 알 수 없다. 보다 정교하고 발달된 매체와 기계 수단들이 즐비한 시대에 사진이 갖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눈에 보이는 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담아내고 싶은 숨은 욕망들이 꿈틀거릴 때 셔터를 누르는 걸까?

이제 닫힌 공간과 활자로 표현된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로 표현되는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결국, 사진은 피사체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찍는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일 테니까 말이다. 이 책이 출발선상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점은 단 한 가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사람과 멋있는 풍경만이 사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무엇을 찍고 싶은지, 왜 찍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사진에 관심을 갖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목적과 대상, 방법에 대한 고민은 모든 예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이 책을 통해 자그마한 해답을 스스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의 세계로 한 발쯤 넘어가고 싶다. 곧.


0611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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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6-11-01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와 닿는 글이네요. 이미 대중문화는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정말 사진이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갑자기 요즘 유행하는 렌즈달린 전문가용 사진기에 욕심이 생기네요. 이게 아닌데. ㅋㅋ

sceptic 2006-11-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용기 있는 자의 것이라고 누가 그러더라고요...저도 늘 새롭게 용기 낼 볼려구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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