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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 그림으로 읽는 세상 '근대편'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세상은 환상이다. 영화 ‘일루셔니스트’에서 마술사 아이젠하임이 물속에 빠져 죽은 황태자의 약혼녀 소피를 발견한다. 물속에 뛰어들어 사랑하는 그녀를 안아 올리기 전의 그 장면, 하늘을 보고 나무 가지 사이에 걸린 채 물속에 떠 있는 장면은 밀레이의 ‘오필리어’를 그대로 재현했다. 문학이 그림이 되고 그 그림은 영화에서 다시 재현된다. 모든 상상이 현실이 될 때까지, 혹은 환상이 현실이 될 때까지 우리는 늘 꿈을 꾼다.
그림을 읽는다고 표현하면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 스키마의 작용에 따라 같은 그림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 의미를 부여하고 많은 것들을 읽어내는 사람이 있다. 특히 서양의 그림들은 신화에 대한 배경지식과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인문학적 배경 지식이 없으면 단편적인 인상 비평과 감각적인 느낌이 전부가 된다. 그런 면에서 이택광의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는 읽을만한 그림에 관한 책이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적 바탕과 배경 지식은 그림을 한층 풍부하고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이택광은 철학과 문화이론을 전공한 학자로서 그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바탕으로 그림을 이야기한다.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서양 예술 전반을 아우르거나 폭넓은 시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깊이있고 집중력있게 몰두 할 수 있었다.
서양 미술을 ‘근대’라는 관점과 주제로 풀어내는 방법은 인문학과 그림의 만남을 의미한다. 쓸데없는 배경지식과 감각적으로 접근해야할 그림의 결합이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있을 수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특별한 부분에 집중할 수 있거나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보자.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과의 결합이거나 일반적인 시각적 이미지와의 결합이다. 그림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화가의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기도 하고, 그 이상을 관객들이 읽어내기도 한다. 결국 그림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다는 비관론으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읽은 그림과 타인이 읽은 그림 사이에는 분명히 공유할 수 없는 간극만큼 뚜렷하고 확실한 객관적 사실들도 숨어 있다. 이 책은 그것을 읽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내 맘대로 권법에 따라 주관적으로 그림을 감상하면 그 뿐이라는 태도를 지닌 사람에게는 무용한 책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저자는 ‘근대’의 풍경 속에서 인상파가 등장한 배경과 특징들을 짚어내고 있다. 라파엘전파와의 비교를 통해 두 유파를 분석하는데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편안하고 가벼운 어법으로 그림의 주변 풍경들을 이야기해 준다. 주관적인 감상에 치우치거나 객관적인 사실들의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의 꼼꼼한 설명을 듣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신 중심 사회의 붕괴와 산업혁명을 통한 노동 계급의 형성, 그리고 프랑스의 파리 코뮌이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림과 정치를 연결시키려는 인위적 의도가 아니라 급격한 사회 변화는 당연히 모든 예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림 속에 숨은 화가들의 정치적 성향들을 찾아내고 숨은 의도를 읽어내는 일이 괴롭고 힘든 일이 아니라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라면 저자의 그림 읽기에 동참할 만하다.
마음속의 이미지는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집단에 의한 것이다. …… 마음속의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인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미지이다. - P. 23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사르트의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인간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일은 언어의 분석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인 언어가 보여주는 세계의 유한성을 극복한 이미지는 우리에게 그림이라는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예술의 형태를 제공했다. 오래된 그림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듯이 들어보는 것도 의미있고 즐거운 일이다. 저자의 말투는 지루하지 않고 편안하게 독자에게 속삭이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때로는 입말의 어법이 지나쳐 거슬리기도 하지만 오래전 추억을 더듬듯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눈으로 더듬어 보는 일은 즐겁기만 하다.
근대의 그림 속을 걷는다는 것은 현재 이전의 저 너머를 바라보기 위한 기초 작업이며 우리의 지금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기준이 제시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술이 어떻고 철학이 어떻고 골치 아프고 복잡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한 번 쯤 편안하게 우리의 지난날들을 아니 서양의 과거를 추억하며 읽어 볼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070326-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