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 그림으로 읽는 세상 '근대편'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세상은 환상이다. 영화 ‘일루셔니스트’에서 마술사 아이젠하임이 물속에 빠져 죽은 황태자의 약혼녀 소피를 발견한다. 물속에 뛰어들어 사랑하는 그녀를 안아 올리기 전의 그 장면, 하늘을 보고 나무 가지 사이에 걸린 채 물속에 떠 있는 장면은 밀레이의 ‘오필리어’를 그대로 재현했다. 문학이 그림이 되고 그 그림은 영화에서 다시 재현된다. 모든 상상이 현실이 될 때까지, 혹은 환상이 현실이 될 때까지 우리는 늘 꿈을 꾼다.

 그림을 읽는다고 표현하면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 스키마의 작용에 따라 같은 그림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 의미를 부여하고 많은 것들을 읽어내는 사람이 있다. 특히 서양의 그림들은 신화에 대한 배경지식과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인문학적 배경 지식이 없으면 단편적인 인상 비평과 감각적인 느낌이 전부가 된다. 그런 면에서 이택광의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는 읽을만한 그림에 관한 책이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적 바탕과 배경 지식은 그림을 한층 풍부하고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이택광은 철학과 문화이론을 전공한 학자로서 그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바탕으로 그림을 이야기한다.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서양 예술 전반을 아우르거나 폭넓은 시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깊이있고 집중력있게 몰두 할 수 있었다.

 서양 미술을 ‘근대’라는 관점과 주제로 풀어내는 방법은 인문학과 그림의 만남을 의미한다. 쓸데없는 배경지식과 감각적으로 접근해야할 그림의 결합이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있을 수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특별한 부분에 집중할 수 있거나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보자.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과의 결합이거나 일반적인 시각적 이미지와의 결합이다. 그림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화가의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기도 하고, 그 이상을 관객들이 읽어내기도 한다. 결국 그림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다는 비관론으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읽은 그림과 타인이 읽은 그림 사이에는 분명히 공유할 수 없는 간극만큼 뚜렷하고 확실한 객관적 사실들도 숨어 있다. 이 책은 그것을 읽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내 맘대로 권법에 따라 주관적으로 그림을 감상하면 그 뿐이라는 태도를 지닌 사람에게는 무용한 책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저자는 ‘근대’의 풍경 속에서 인상파가 등장한 배경과 특징들을 짚어내고 있다. 라파엘전파와의 비교를 통해 두 유파를 분석하는데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편안하고 가벼운 어법으로 그림의 주변 풍경들을 이야기해 준다. 주관적인 감상에 치우치거나 객관적인 사실들의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의 꼼꼼한 설명을 듣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신 중심 사회의 붕괴와 산업혁명을 통한 노동 계급의 형성, 그리고 프랑스의 파리 코뮌이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림과 정치를 연결시키려는 인위적 의도가 아니라 급격한 사회 변화는 당연히 모든 예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림 속에 숨은 화가들의 정치적 성향들을 찾아내고 숨은 의도를 읽어내는 일이 괴롭고 힘든 일이 아니라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라면 저자의 그림 읽기에 동참할 만하다.

마음속의 이미지는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집단에 의한 것이다. …… 마음속의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인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미지이다. - P. 23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사르트의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인간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일은 언어의 분석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인 언어가 보여주는 세계의 유한성을 극복한 이미지는 우리에게 그림이라는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예술의 형태를 제공했다. 오래된 그림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듯이 들어보는 것도 의미있고 즐거운 일이다. 저자의  말투는 지루하지 않고 편안하게 독자에게 속삭이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때로는 입말의 어법이 지나쳐 거슬리기도 하지만 오래전 추억을 더듬듯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눈으로 더듬어 보는 일은 즐겁기만 하다.

 근대의 그림 속을 걷는다는 것은 현재 이전의 저 너머를 바라보기 위한 기초 작업이며 우리의 지금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기준이 제시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술이 어떻고 철학이 어떻고 골치 아프고 복잡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한 번 쯤 편안하게 우리의 지난날들을 아니 서양의 과거를 추억하며 읽어 볼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070326-0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 예술을 읽다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과 예술의 관계는 철학과 다른 어떤 분야와도 관계가 깊다.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이 책을 읽어도 충분히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만나게 된다. 철학아카데미에서 나온 <철학, 예술을 읽다>는 예술에 대한 철학적 관점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한 사람의 주장과 분석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특정 분야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프리즘으로 햇빛을 들여다보듯 다양한 스펙트럼이 펼쳐진다. 풍성한 식탁에 차려진 철학과 예술의 성찬을 즐길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에서 예술을 ‘읽다’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읽는 행위는 감상의 차원과 조금 거리를 둔 듯하다.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고 미적 성취를 이룬 예술에 대해 평가하는 것과는 다르다. 예술가의 입장에서 작품의 대상과 표현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도 다르다. 관점은 하나, 철학이다. 철학의 관점에서 예술이라는 장르가 가진 특성과 아름다움을 분석한다. 철학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객관화할 수는 없겠지만 정형화된 예술에 대한 이해를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 된다. 예술을 바라보는 기존의 통념에 대해 좀 더 신선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가 이 책이 갖는 의미이다.

‘예술, 철학과 마주보다’라는 소제목의 1부에서는 예술 전반에 관한 논의들이 이루어진다. 고답적인 철학 안에서 이루어지는 답답한 문제들이 아니라 다른 학문과 예술 전반에 관한 폭넓은 이해와 분석들은 ‘철학아카데미’의 성격과 자유로운 가로지르기를 보여주는 것같아 강의를 듣고 싶은 욕망이 스멀거리게 한다.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가끔 타당해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조광제를 비롯한 저자들(강사들)의 이야기는 알기 쉽고 친근하면서도 고정된 틀이 아니라 열린 토론의 장으로서 역할을 한다.

작은 주제들 뒤에 붙어있는 ‘더 생각볼 문제’와 ‘더 읽어볼 책’은 아주 유용하다. 단순히 읽고 그치기 쉬운 시민들을 위한 철학학교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특히 ‘더 읽어볼 책’을 통해 미뤄뒀던 책이나 새롭게 알게 된 책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는게 다 ‘공부’하는 것이고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종류의 책은 큰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1부가 총론에 해당한다면, 2부 ‘철학, 예술 사이로 걷다’는 각론에 해당한다. 미술과 음악, 무용, 문학, 연극, 건축, 사진,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재미를 더한다. 각 분야를 두루 읽는다는 것은 깊이 읽을 수 없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선을 갖게 된다. 한 권의 책을 통해 깊이와 넓이를 모두 얻을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 책은 깊이보다 넓이에 해당한다. 철학이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을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간 경계를 허무는 일에 인색하고 높고 견고한 담을 허물지 않으면 동종교배로 인한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특히 모든 학문의 정점에 서 있는 철학의 경우 보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타 학문과의 교류에 힘써야 한다. 인문, 사회, 과학, 예술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유와 통합은 어떤 분야를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본다.

보다 쉽고 친근하게, 그리고 새롭고 예리한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들을 제시하는 책들을 독자들은 즐겁게 맞이할 것이다. 동양의 예술에 소홀한 점이 아쉬움이 남지만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협소했거나 중심 추를 바로잡지 못했다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된다. 더 읽어볼 책이 늘어만 간다. 행복한 비명일까? 아는 건 없고 궁금한 건 점점 많아진다. 인식의 힘은 쉽게 길러지지 않으며 산책과 사유의 길은 멀기만 해 보인다.

오늘은 첫 눈이 내렸다.


061106-125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6-11-06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신곳이 어디세요? 여기는 눈 안왔는데. -_-

sceptic 2006-11-06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요?...거기요..ㅋ..아침에 잠깐 내리다 비가 왔어요...

비로그인 2006-11-06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며 쓸 말을 준비하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첫눈'이라는 말에 모든 생각이 지워졌습니다.
'철학'과 '예술'이라는 단어는 그리 쉽지 않음에도 한번 읽어 보고 싶게 리뷰를 쓰셨네요.

sceptic 2006-11-07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호승의 '첫눈'이라는 시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에게는 우연이나
나에게는 숙명이다

쉽지 않지만 흥미로운 시선들이 돋보이는 글들이 많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세트 - 전4권 -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반성완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은이는 문학사와 철학 및 미술사를 전공한 헝가리 출생 문학사가이며 예술사회학자이다. 최초의 독일어판이 1953년에 출판되었으며, 66년에 <창작과 비평>에 연재되다가 81년에 완역되었다. 이후 1999년에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백낙청, 염무웅, 반성완의 번역작업이 고된일이었을듯 싶으나 나로서는 좋은 책을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대체 문학과 예술은 따로 분리될 수 있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가치를 떠나 분리될 수 있을 정도의 부피와 무게를 가지고 역사 속에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인가가 더욱 의문스러웠다. 제목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문학과 예술은 선사시대 인류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인류가 발생되어 끊임없는 종족보존 욕구와 생존의 몸부림 속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예술은 그렇게 처절한 삶의 투쟁속에서 꽃피기 시작했다고 본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가족에게 1차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학교나 사회를 통해 2차적 욕구들을 채워나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문학과 예술을 접하고 스스로에 대한 존재론적 의문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또다른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게 된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겪게되는 일반적인 패턴이다. 나만 그랬나? 하지만 과거에 문학과 예술의 경계는 당연히 모호했으며 예술가의 존재 또한 현재와는 달랐다. 시대와 관점, 그리고 학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과 생활은 그렇게 혼재되어 있었으며 생활과 밀접한 관계속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의 효용성과 실용성을 따지기 이전에 말이다. 발터 벤야민(W. Benjamin)이 옳게 지적했듯이 예술작품을 낳는 데는 두가지 상이한 동기가 있다. 즉 단순히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과 남에게 감상될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은 언제부터 남에게 감상될 목적으로 존재했을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선사시대,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세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로꼬꼬, 고전주의, 낭만주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이 책은 이렇게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역사시대의 순서에 따라 후대에 이름 붙혀진 각 사조의 명칭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지은이는 서양사와 서양 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분석으로 독자들을 압도한다. 그것이 처음부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교양서로 시작한 책이 잠시라도 집중력을 떨어뜨리거나 ‘빡빡한’ 서술에서 한눈을 팔게되면 책의 첫머리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지은이는 명쾌하고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문학과 예술이 사회적 관점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는지 혹은 역으로 사회 현상들이 문학과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차분히 분석해 내고 있다. 결국 문학도 예술도 사회적 인간에게 특정 영역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당연한 것이다.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얽혀있는 사회, 역사적 환경과 문학과 예술의 관계를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을 지닌 저자가 명쾌하고 치말한 논리로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소 딱딱하지만 너무나 큰 즐거움이었다. 결국 내가 이 책을 통해 얻게 된 안목은 어떤 문학과 예술이든 1930년 신비평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작품 내적 의미에만 충실하며 얻을 수 있는 즐거움 또한 당연하겠지만, 사회적 맥락 속에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예술의 흐름들을 짚어가며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눈을 조금 뜰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1
자닉 뒤랑 지음, 조성애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말타면 종부리고 싶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 욕망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을 읽다가 허황된 욕망에 빠진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스폰서가 내게 있다면, 아니 내게 무지하게 돈이 많다면 3년 정도만 세계 여행을 떠나고 싶다. 특히 각국의 미술관과 고대 건축물들만 돌아보는 코스로 3년. 책밖으로 눈을 돌리다 혼자 웃었다. 3년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유럽의 건축물들과 미술관을 순례하는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계획을 잡는다. 이 책의 도록은 그만큼 선명하고 사실감이 넘친다.


  이 책은 전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이 중세미술이다. 5세기경 고대 문명 사회가 붕괴되는 시기부터  15세기 르네상스로 막을 내린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대표되는 중세시기는 미술보다 건축과 조각 양식이 훨씬 흥미롭다. 작가 자닉 뒤랑은 10년 넘게 루브로 박물관에서 중세 예술사를 주제로 강의했다. 텍스트 자체는 분량이 많지 않지만 구체적인 도판과 해설이 충실하기 때문에 중세의 미술사를 이해하는 데 적절하다. 특히 전공자가 아닌 나처럼 예술에 문외한에게 더더욱 적당하다. 단숨에 1권을 읽어버리고 2권을 주문하고 나서 다시 책을 뒤적이며 여운을 즐긴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보면 수도원에서의 미술품 생산화 조직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고 건축 장인조합과 길드의 역할을 참고할 수 있다. 중세의 건축물과 조각품 하나하나에 묻혀진 장인들의 손길과 그들의 예술혼을 어떤 고귀한 정신에 비유할 수 있을까. 예술품보다 먼저 그들의 삶에 숙연해진다.


  이 책은 단순히 시대별로 예술가들과 예술품들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다. 문화사적 시각에서 사회경제적 흐름속에 놓이는 미술의 위치와 탄생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깊이 있는 책읽기가 가능하다.


  샤르트르 대성상, 랭스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고딕 건축의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직접 실물로 보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른다. 예술은 과거와의 대화다. 인류가 걸어온 시간을 더듬어 보는 떨림과 두근거림이 있고 인간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미에 대한 본질적 그리움을 달래준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그 안에 들어가 하루쯤 보내며 루앙의 대성당을 빛의 흐름과 시간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모네처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으나 제대로 된 여행을 위해 책으로 만족하고 예술에 대한 안목이나마 높힐 수밖에 없다.


  ‘서양미술사’는 곰브리치가 워낙 막강하다. 하지만 프랑스 라루스의 서양미술사 시리즈는 또다른 방식으로 눈과 손을 즐겁게 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분량과 한정된 도판 때문에 갈증을 배가 시킨고 객관적이고 잡다한 여러 지식을 나열하는 방식이 옳다고 볼 순 없지만 프랑스 중심의 서술이 간간이 거슬리기도한다.


  좋은 그림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내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서양 중세를 산책한 오늘 하루는 여유로운 아쉬움을 남긴다.

 


200502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1
자닉 뒤랑 지음, 조성애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말타면 종부리고 싶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 욕망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을 읽다가 허황된 욕망에 빠진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스폰서가 내게 있다면, 아니 내게 무지하게 돈이 많다면 3년 정도만 세계 여행을 떠나고 싶다. 특히 각국의 미술관과 고대 건축물들만 돌아보는 코스로 3년. 책밖으로 눈을 돌리다 혼자 웃었다. 3년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유럽의 건축물들과 미술관을 순례하는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계획을 잡는다. 이 책의 도록은 그만큼 선명하고 사실감이 넘친다.


  이 책은 전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이 중세미술이다. 5세기경 고대 문명 사회가 붕괴되는 시기부터  15세기 르네상스로 막을 내린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대표되는 중세시기는 미술보다 건축과 조각 양식이 훨씬 흥미롭다. 작가 자닉 뒤랑은 10년 넘게 루브로 박물관에서 중세 예술사를 주제로 강의했다. 텍스트 자체는 분량이 많지 않지만 구체적인 도판과 해설이 충실하기 때문에 중세의 미술사를 이해하는 데 적절하다. 특히 전공자가 아닌 나처럼 예술에 문외한에게 더더욱 적당하다. 단숨에 1권을 읽어버리고 2권을 주문하고 나서 다시 책을 뒤적이며 여운을 즐긴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보면 수도원에서의 미술품 생산화 조직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고 건축 장인조합과 길드의 역할을 참고할 수 있다. 중세의 건축물과 조각품 하나하나에 묻혀진 장인들의 손길과 그들의 예술혼을 어떤 고귀한 정신에 비유할 수 있을까. 예술품보다 먼저 그들의 삶에 숙연해진다.


  이 책은 단순히 시대별로 예술가들과 예술품들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다. 문화사적 시각에서 사회경제적 흐름속에 놓이는 미술의 위치와 탄생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깊이 있는 책읽기가 가능하다.


  샤르트르 대성상, 랭스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고딕 건축의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직접 실물로 보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른다. 예술은 과거와의 대화다. 인류가 걸어온 시간을 더듬어 보는 떨림과 두근거림이 있고 인간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미에 대한 본질적 그리움을 달래준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그 안에 들어가 하루쯤 보내며 루앙의 대성당을 빛의 흐름과 시간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모네처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으나 제대로 된 여행을 위해 책으로 만족하고 예술에 대한 안목이나마 높힐 수밖에 없다.


  ‘서양미술사’는 곰브리치가 워낙 막강하다. 하지만 프랑스 라루스의 서양미술사 시리즈는 또다른 방식으로 눈과 손을 즐겁게 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분량과 한정된 도판 때문에 갈증을 배가 시킨고 객관적이고 잡다한 여러 지식을 나열하는 방식이 옳다고 볼 순 없지만 프랑스 중심의 서술이 간간이 거슬리기도한다.


  좋은 그림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내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서양 중세를 산책한 오늘 하루는 여유로운 아쉬움을 남긴다.

 


200502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