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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집을 짓고 사는 동물은 인간만이 아니다. 조류에서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여러 동물들이 집을 짓고 산다. 다만 기능적인 목적 이외에 아름다움이라는 목적을 더해서 집을 짓는 동물은 없다. 더구나 주거공간인 집의 개념을 넘어 예술이 되어 버린 ‘건축’은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영역이 되었다. 건축은 ‘공간’이다. 비움으로 얻어지는 공간.
그릇은 비어있는 공간을 위한 도구이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도자기라도 마찬가지도 실용적 측면에서 보면 빈 공간을 위한 낭비적 요소일 뿐이다. 집도 마찬가지다. 실용적 목적에서라면 기후나 지형 주변 환경을 고려해서 가장 최적의 공간만을 고려하면 된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주거의 형태와 문화가 형성되면서 집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이끌어 나가기도 한다.
건축은 이제 인간의 행복과 직결된다. 살아가는 동안 어떤 건축물 안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는지 생각해 보자. 인간의 옷만큼이나 친숙하고 중요한 공간을 만드는 건축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조건이다. 그 조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 건축가만의 몫일까?
철학자보다 에세이스트로 우리에게 익숙한 알랭 드 보통의 신작 <행복의 건축>은 건축에 관한 에세이다. 건축에 관한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고 건축의 학문적 관점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전문 건축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더 필요한 이야기들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건물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과 역할 그리고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들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건축의 중심에는 항상 사람이 놓여 있다. 단 하나의 개인과 가족을 위한 집을 짓는 경우도 있지만 여러 사람을 위한 건물을 짓는 경우도 있고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위한 건축도 있다. 다양한 종류의 건물들은 그 목적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제 역할과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과 미감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보통은 이 책을 통해 건물을 통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의미를 곱씹게 해 준다. 다소 사색적이고 주관적인 느낌과 개인의 감정과 정서가 객관적 대상을 왜곡할 우려가 있으나 저자의 관점은 한 쪽에 치우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만큼 삐딱하거나 독선적인 것은 아니다. 건축이 인간에게 주는 행복과 불행 혹은 건축의 역사와 문화가 각 지역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 왔는지를 여유 있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책의 장점은 뒤집어 보면 단점으로 바뀐다. 건축과 관련된 인문학적 접근이라는 나의 개인적인 판단과 다르게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건물들에 대한 인상 비평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책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을만큼 다양한 색깔을 띤 책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자칫 ‘건축’에 대한 지식이나 건축 관련 서적으로 오해하는 독자에게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수 있을 법하다.
행복을 위한 건축은 어떤 것일까? 저자는 우선 이렇게 평범하지만 거시적 관점의 주제를 던지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집이라는 사적이고 물질적인 장소와 심리적인 공간으로 변화해온 과정들을 살펴보면서 왜 건축이라는 분야에서까지 인간의 삶과 행복이라는 문제를 연관지어 살펴보아야 하는지 저자는 말하고 있다.
“유용하고,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것을 뭔가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건축의 의무다.”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은 그렇게 주장했다. “건축이 단순한 집짓기와 구별되는 것은 장식 때문이다.” 조지 길버트 스콧 경도 그렇게 말했다. - P. 52
건축과 관련된 옛 문헌들과 전문가의 견해를 통해 저자는 건축의 의미와 역할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들을 자주 제공한다. 숨 쉬고 살아가는 공간 전부가 건축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건축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치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는 것처럼 이제 건축은 우리 생활의 필수 여건이 되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역할을 깊이 생각하거나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신선한 충격이다.
어떤 스타일로 지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말하는 건물에 대한 설명도 저자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건물들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비평을 통해 답을 찾아가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건축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추억의 공간, 이상과 꿈을 실현하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다소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견해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이 책은 빈 들판에 인류가 이룩해 놓은 수직에 대한 꿈들을 점검하고 있다. 수많은 빌딩과 콘크리트 건물들의 삭막함 속에서 건축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어쩌면 사치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삽입된 건물들과 집들이 보여주는 공간과 건축에 대한 생각들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전통적인 한옥이나 옛 공간들이 보여주는 여유를 떠올렸지만 현재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집을 둘러보면 여전히 먼 곳에 위치한 그들만의 담론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예술 작품에서는 질서의 베일을 통해 혼돈이 아른거려야 한다.”(노발리스) - P. 198
혼란과 질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건물에서만 우리는 질서를 세우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 수 있다. - P. 203
건축에 대한 다양한 정의 속에서 저자는 “아름다움은 부분들 사이의 일치된 관계의 산물이다.(233페이지)”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겨 놓았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공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곧 행복과 직결된다. 고정관념을 깨거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거나 그 둘이 잘 조화를 이루거나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공간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어야 한다. 삽화가 들어간 비닐 하드 커버로 표지를 감싼 책의 디자인만큼만 행복을 전해주는 집에 살고 싶다. 이 책은 손에 잡히는 촉감과 시각적 이미지, 물리적 실용성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070520-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