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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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아무 서른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십대가 저물어 갈 무렵이었을 것이다.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를 보면서 르네 마그리트와 에셔의 그림과 판화들을 만나게 되었다. 예술적 감수성과는 무관하게 그림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4차 교육과정 세대라는 핑계 아닌 핑계가 아니라 미술 실기 시험을 위해 조각도로 비누파기와 몸 비틀며 정물화 그리기 이외에는 도대체 학창 시절의 미술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둔감한 미학적 감성 탓이겠지만 어느 순간 그림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전시회에 가서 어슬렁거리거나 예술 관련 서적을 뒤적거리는 것 이외에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진에도 손이가고 미술사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라루스 출판사에 펴낸 <서양미술사Ⅰ~Ⅶ>가 기억에 남는다. 도판과 해설이 적절하지는 않다. 지나치게 문장이 어렵고 일반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들이 많다. 하지만 시대별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7권에 걸쳐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어 볼 만하다.

  예술은 지식이 아니다. 조이한과 진중권의 <천천히 그림읽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읽어’준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무장정 그림을 보고 느끼라고 주문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다. 첫 번째 단계는 물론 관심이다. 관심없는 대상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에 관심을 갖고 보고 싶은 혹은 읽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사람들에게는 추천할 만한 책이다.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본다. 두 가지 태도를 보이는데 우선 나처럼 문외한의 경우 머릿속의 지식과 잣대를 들이민다. 일명 확인사살이다. 내가 아는 게 맞는지, 책에서 읽은 혹은 주워 들은 것들을 좌판처럼 펼쳐 놓는다. 배경지식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점검한다. 그림을 보러 왔다고 하기보단 공부하러 온 느낌이다. 작년 덕수궁에서 전시된 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 <비엔나미술사박물관전>이 그랬다. 왕가의 족보를 꼼꼼히 들여다 보고 모델이 된 인물들의 관상을 보고 누군지 꼼꼼이 들여다 봤다. 초상화의 경우 그렇게 보는게 굳이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피곤했다. 미술관에 왔나? 공부하러 왔나?

  두 번째 방법은 그냥 보는 거다. 그림을 읽는 게 아니라 보고 즐기는 마음으로 본다. <유럽 현대미술의 위대한 유산전>이 그랬다. 구상 작품 보다 추상의 경우가 더욱 그렇고 고전보다 현대 미술이 더욱 그렇다. 이 경우 그림은 놀이가 되고 관람은 가벼운 볼거리를 위한 산책이 된다. 잘못된 관람 태도라고 볼 수도 없고 특별한 목적이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 태도를 명확하게 구분하기도 어렵다.

  사실 미술 작품에 대한 독자 혹은 관객들의 태도는 각양각색일 것이다. 소장하기 위한 극소수의 사람도 있고, 미술관에서 주마간산격으로 평생 한 번 진품을 대략 몇 십초 간 감상하는 데 그치는 경우도 있다. 미술사를 전공하거나 비평을 위한 감상자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보고 즐기는 독자의 입장이라면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 자체가 무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전 미술 작품의 경우는 얘기가 조금 다르다. 이 책은 미술관에 가기 전에 천천히 읽었으면 좋겠다 싶은 책이다.

  도상학의 예비 단계와 묘사 단계를 거쳐 해석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은 우리들 머릿속에 각인된 각 시대별 흐름과 특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서양 문화의 전체를 조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신화와 종교, 정치와 사회, 사상과 학문 등 풍부한 배경지식과 상징, 알레고리를 모두 풀어내는 일은 전문가의 순준에서 요구되는 그림 독해법이다. 하지만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고전주의와 바로크 양식의 그림들은 색채와 구성 빛과 선이 주는 감동만으로는 그림을 제대로 읽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주문자에 의한 그림들은 화가를 장인 수준에 머물게 했고 표현과 창작을 시작한 진정한 의미의 예술로 탄생하기 까지 미술은 오랜 시간의 세월의 변화를 겪어왔다. 어느 예술 장르가 그렇지 않을까마는 미술 또한 앞선 시대의 극복과 시대 정신의 반영이라는 숙명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읽어내는 안목과 지식들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전체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호학적 관점의 예술 분석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 6장 ‘그림에는 요란한 의미의 움직임이 있다’만 진중권이 집필했다. 나머지는 전부 조이한의 글이다. 공동저자가 당연하나 진중권의 이름을 끼워 책의 소비층에게 다가가려는 출판사 혹은 저자들의 의도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이한의 글은 감각적이며 쉽고 편안하다. 본문 내용과 도판의 위치도 크게 어긋나지 않고 내용의 흐름에 따라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1,2장은 형식과 내용의 대비로, 3,4장은 개인의 심리와 사회의 대비로, 5,6장은 여성주의와 기호학의 관점으로, 7장은 현대미술에 할애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이나 각 부분의 내용들이 적절하고 그림을 읽고 싶은 독자들을 위한 안내서로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림을 읽는 비법을 제공하는 책은 아니지만 처음 그림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함을 전해줄 수 있는 책이다. 그림이 재미없거나 무엇을 보아야 할 지 어떻게 보아야 할 지 망설이는 사람을 위해서도 좋은 안내서 역할을 할 수 있겠다. 호기심은 관심을 낳고 관심은 애정을 만든다. 애정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머리에서 가슴까지 훈훈한 기운을 불어 넣어 주기도 한다. 그것은 예술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08022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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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8-02-25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책은 99년판이라 표지가 다르네요. 저도 이 책 꽤 재밌게 읽었는데, 그땐 공부하듯이 꼼꼼하게 읽었던 것 같아요. 저도 진중권이 공동저자라고 하기에 고개를 갸웃하긴 했던 거 같아요. 그의 색채가 묻어나는 책은 아니니까요. 반가워요. ^^

sceptic 2008-02-25 16:56   좋아요 0 | URL
네...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워낙 아는게 없고 문외한이라 읽을 때마다 새롭고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
이택광 지음 / 갈무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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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좀 읽었다는 장석주가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읽다가 울고 싶었다는 고백을 읽은 적이 있다. 이해하지 못하거나 육화되지 않는 책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철학적 기초가 부족하거나 번역상의 어려움, 관념적인 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 등 이유는 다양하다. 앎과 지식으로 내면화 되지 못하는 철학과 사상은 무의미하다. 현대 철학이든 고대 철학이든 사유의 방식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인 언어에 대한 문제만 남겨 놓는다면 쉽게 해결될까? 비트겐슈타인처럼 명징한 논리학으로 언어를 분석하기만 하면 철학적 명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들뢰즈나 가타리, 라캉과 푸코에게 빚지고 있는 현대 철학의 이론들은 명민한 철학자만의 몫은 아니다. 이택광은 <들뢰즈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라는 책을 통해 들뢰즈를 무기로 들고 나왔다. 대상은 전방위적 ‘문화현상’들이다. 문학에서 영화에 이르는 다양한 예술 장르와 사회 현상들을 아우르는 잣대로 삼는 것은 현대 철학의 분석틀이다.

  문화비평이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가 정착된 것은 80년대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붕괴로부터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좌우의 대립이나 민주와 독재의 대결 구도,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가 붕괴되면서 사회 현상은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정신적 아노미 현상처럼 이념을 대신하는 자리에 문화가 등장한다. 이론적 토대위에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는 현실에 대항하기 위한 도구는 책과 펜이다. 읽고 쓰며 실천과 행동으로 다양성을 표방하는 세대에게 탈주와 회귀를 읽어내려는 노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 이택광은 영문학을 전공한 후 영국으로 날아가 발테 벤야민을 연구했고 문화이론을 공부했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로 그를 만났다. 그림 이야기나 하며 소일을 할 만큼 안온한 현실에 발딛고 사는 것은 아니겠지만 2002의 그를 만나는 일은 신선하다. 개인적인 관심과는 무관하지만 시대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는 후일담이 아니라 현재를 알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저자의 지적 이력을 추적해 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탈주와 회귀, 차이와 반복, 시뮬라크르 혹은 욕망과 분열, 증식, 글쓰기 등의 생소한 용어들에 대한 개념들을 그가 이해한 방식들로 풀어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하게 철학적 개념과 용어에 대한 해설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과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하기 위한 좋은 바로미터가 되는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를 보지 않았거나 카프카의 <성>, <심판>을 읽지 않았거나 밀란 쿤데라의 <느림>을 모른다면 이 책을 읽을 이유가 없어진다. 어떤 책이든 한계가 있겠으나 이 책은 실제 상영된 영화, 출판된 영화들을 바탕으로 이론의 잣대를 들이밀기 때문이다. 들뢰즈나 가타리가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듯이 이택광의 방식은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

  편협한 문학이론이나 철학의 개념들을 억지로 끼워 맞춘다고 예술 혹은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달라지진 않는다. 거대담론은 언제나 구체적 문화현상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반 독자나 관객의 입장에서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은 어쩌면 무의미한 노동에 가깝다. 즐거운가? 재밌냐? 로 요약되는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점은 그들만의 리그로 끝날 우려가 있다.

  가장 최근의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라는 다소 동떨어진 책을 통해 그를 만났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글이 안내하는 혹은 그가 걸어온 관점의 변화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흥미있는 작업임에는 틀림없다. 개별 철학자들의 개념이나 이론들을 내면화하고 그것들을 실제 문화현상에 적용하고 분석하려는 개인적인 흥미와 관심들을 이해할 필요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면 혹독한 비판일까? 육화되지 못한, 한국적 풍토와 개념으로 전환되지 않는 사상은 낯선 이방인의 몸짓일 뿐이다.

  어쨌든 저자의 관심과 노력은 흥미롭다. 그가 이해한 개념들 사이를 따라 걷다 보면 현실밖의 현실들이 더 실감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것이 영화이든 소설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혹은 사유하고 있는 세상의 어떤 일면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것은 저자의 도움 없이도 걸을 수 있지만 그와 함께 걷는 길이 그리 낯설거나 불편하지는 않다.

  이어지는 이택광의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는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다. 하나의 사물을 다양하게 바라보는 일은 내게 언제나 커다란 즐거움이다.


0802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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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소개)『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
    from 도서출판 그린비 2008-08-11 14:32 
    ‘생명의 철학’으로 다시 읽는 들뢰즈『시네마』—탈인간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예술의 역능 『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클레어 콜브룩 지음 정유경 옮김|도서출판 그린비|갈래 : 철학, 인문발행일 : 2008년 8월 5일 | ISBN : 9788976823151신국판변형(150*220mm)|304쪽리좀 총서의 네 번째 권으로서 들뢰즈의 독특한 이미지론을 통해 철학과 영화 그리고 예술의 역능을 살핀다. 살아 있는 인간 신체가 이미지화하는 능력으로 세...
 
 
 
김영갑 1957-2005 - Kim Young Gap, Photography, and Jejudo
김영갑 사진.글 / 다빈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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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하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했던 1996년 가을의 제주도가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지만 기대와 열정보다는 니힐리즘과 시니컬한 태도로 팔짱을 낀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망도 기대도 인생에 대한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참 어처구니없는 20대를 보내고 있었다. 현실은 뿌연 안개 속에서 좀체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길고도 험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나 비슷하게 시작하는 직장생활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생의 의미를 알 수 없었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모호한 상태였다. 차츰 적응하기 시작했지만 투명한 유리벽으로 둘러싸여 깊은 바다로 침잠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살아지는 건가. 삶이란 이런 것인가. 청년 실업이 극에 달한 지금의 20대라면 배부른 돼지의 푸념으로 들리겠지만 그 당시 내겐 실존의 문제였다.

  그 해 가을 제주에 갔다. 김포공항에서 날아올라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거짓말처럼 금세. 예약해둔 차량에 올라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산포에 도착했다. 이생진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꺼냈다. 해삼 한 토막을 안주 삼아 ‘눈물처럼 맑은 소주’를 마셨다. 밤바람은 차가웠고 어둠은 습관처럼 찾아왔다. 멀리 성산포를 바라보며 제주도의 껍데기만 사랑했다. 제주도의 이미지만 가슴에 담아두었다. 다음날 아침 성산포에 올라 눈이 베일 것 같이 짙푸른 바다와 수평선 너머의 그리움만 확인하고 내려왔다. 2박 3일 동안 해안 도로를 달리며 파도와 바람 갈대만 바라보았다. 철저한 고립감 속에서 내가 만난 것은 어쩌면 제주도가 아니라 나의 고독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이십대는 아직도 규정되지 않고 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은 진실일까? 그 모든 기억들은 왜곡된 것일까? <김영갑 1957~2005>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벤야민의 말대로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의 예술에 바치는 경외와 감동은 복제된 것일지도 모른다. 집집마다 들어앉아 책을 들고 김영갑의 사진에서 느끼는 감회와 정서는 제각각일 수 있겠다. 제주도에 대한 기억과 아스라한 추억들, 혹은 제주의 역사와 삶을 뼈저리게 실감한 사람들의 회한과 눈물들 그 모든 것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사진일 수 있을까? 사진이란 무엇인가? 쓰지 않고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찍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을 나는 느끼고 있는 것일까?

  제한된 시야와 고정된 프레임 속에 담아내고 싶었던 ‘김영갑의 제주’는 무엇일까? 이 책은 그것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진집을 넘기다가 목울대가 울컥울컥했다. 형언하기 힘든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나는 보통 ‘울림’이라고 부른다. 머리가 혼란스럽거나 어지러운 상태, 이명이 들리거나 눈이 뿌옇게 보이고 아득해지는 느낌, 혹은 가슴이 따끔거리거나 뭉클거리던 덩어리가 빠져 나가는 느낌. 그것이 무엇이든 한 장 한 장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혹은 그의 글을 읽다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세밑에 사진으로 보는 제주는 10여 년 전 제주 공항을 출발하며 이제 영원히 가슴 속에만 묻어 두고 싶었던 환상의 섬을 다시 찾고 싶다는 욕심을 만들어 주었다.

내가 사진에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렬한 그 순간을 위해 같은 장소를 헤아릴 수 없이 찾아가고 또 기다렸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 아니라 대자연이 조화를 부려 내 눈앞에 삽시간에 펼쳐지는 풍경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 한 순간을 위해 보고 느끼고, 찾고 깨닫고, 기다리기를 헤아릴 수 없이 되풀이했다.
- ‘원시 오름에서 부르는 삶의 찬가’중에서

  루게릭 병으로 생을 마감하면서도 제주에 ‘두모악 갤러리’를 완성한 사진가. 그는 제주의 영혼을 들여다 본, 그것을 사진으로 남긴 최초의 예술가가 아닐까 싶다. 사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다소 역설적인 이유 때문에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영갑은 제주의 들판과 바람과 구름과 비와 안개를 보여준다.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은 그 순간에 집착한 것은 아니었을까? 찰나에 집착하는 것도 덧없고 허무하겠지만 한 장의 순간 속에 그것을 담아내려는 노력과 처절한 몸부림은 그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사진이 무엇을 보여 줄 수 있는지 묻기 전에 사진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결코 보여줄 수 없는 수많은 주체와 객체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를 묻는 사진은 어쩌면 불가능에 도전하는 어릿광대의 몸짓일지도 모른다. 보여줄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또 한 해를 맞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듯이 순간을 사진 속에 담아 둔다고 해서 사라진 시간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지나온 시간과 쌓인 세월들이 지금의 나이고 너이고 우리들이다.


07123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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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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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기다리면 보고 싶은 책이 나온다. 신기하게도 발테 벤야민의 책들을 체계적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이미 출판된 책들을 뒤적거리다 그만 둔 적이 몇 년 전부터 몇 번인가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도서출판 <길>에서 선집 10권이 출판되었다. 선집도 다 읽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인용되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2판과 3판을 나란히 번역해 놓은 책이 나왔다. <사진의 작은 역사>와 함께 매체미학에 대한 대표적인 그의 논문을 보며 20세기 초에 촉발되었을 논쟁들과 예술에 대한 혼란스런 개념들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확인하게 된다.

  1935년에 초판을 썼고, 1936년에 수정 보완된 제 2 판을 출판하려 했다. 그래서 제 2 판을 원판(Urtext)이라고 불렀다. 이후 독일어로 출간할 의도를 갖고 제 3 판을 쓰게되었다. 3판은 1963년이 되어서야 처음 출판된다. 현대 예술에 대한 미학적 접근의 출발을 의미하는 이 논문은 발터 벤야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의 세계관이 깨지고 새로운 시대의 예술이 시작된 것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단순한 변혁과 커다란 흐름의 변화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출발이다. 기존 예술의 전면적인 폐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새로운 장르의 탄생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중요한 개념인 아우라(Aura)는 신비적이고 비의적 요소로 유물론적 관점에서 브레히트나 하버마스의 비판을 판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 작품의 아우라이다.(P. 47)”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아우라 자체에 대한 개념의 모호성 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적으로 예술작품을 복제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했다는 자각일 것이다. 예술작품이 이제 더 이상 예술로서 의미와 위상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사진’과 ‘영화’의 탄생은 기존 예술에 대한 평가와 개념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

  의식에 근거를 둔 예술작품의 가치가 이제는 ‘정치’와 결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게 된 ‘영화’의 탄생이 이 논문의 기저를 이루는 정신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 논문은 번역자의 평가대로 영화에 대한 이론이며 현대 예술론이고 현대인들이 인식하는 지각과 경험에 대한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탁월한 한 편의 논문으로 사람들의 의식이나 관점의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과 개방적인 태도로 기존의 틀과 개념들을 반성적으로 돌아보았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이 논문에서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해 우려하면서 아우라를 이렇게 짧게 정의한다.

아우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 - P. 50

  이제는 가정이나 직장 학교나 공공장소 등 어디에나 복제 미술품 액자를 걸어 놓고 있다. 원본 그림이 전시되고 기획적인 열리지만 사람들은 진품의 확인이나 진품 자체만이 가지는 고유한 아우라를 즐기러 가는 것 같지는 않다. 수많은 복제품을 통해 그 그림이 주는 이미지와 감상을 원본과 비교해 보거나 심지어 크기와 색감 실제 존재 여부의 확인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시뮬라시옹의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원본 없는 복제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LG 전자의 CF난 신문 광고가 보여주는 예술작품에 대한 모욕 혹은 장난은 자본주의와 상업예술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듯하다. 재밌고 즐거움이 미덕이 되는 시대에 예술작품은 원본과 복제품의 아우라가 아니라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데 더 골몰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인 예술과 그것을 무한 복제 가능한 시대에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발터 벤야민에 의해 오랜 전부터 시작되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는 복제가 가능한 예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고민의 시작을 알린다. 이 논문과 관련되 저자의 노트의 메모가 이러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한다.

새로운 것이 승리하는 것을 도와주는 가장 확실한 중개자는 옛것에 대한 지루함이다. - P. 219

  옛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지루함을 이겨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이든 그것의 복제품이든 말이다.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라고 외치는 시인의 말처럼 이제는 새로움과 낯설음이 미덕이 되어 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술이 주는 의미와 가치를 새삼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는 책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사진’과 ‘영화’는 이제 예술이냐 아니냐의 논란을 넘어 우리의 일상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07122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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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세상에 홀리다 - 신화, 종교, 과학에 얽힌 시각적 경이로움의 역사
줄리언 스팰딩 지음, 김병화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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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의 의식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은 보는 것(seeing)이다. 시각적 정보에 의해 모든 사건과 사물들이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결정되며 그 시선은 간단하지 않은 우리들의 의식구조와 인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본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고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시각적 정보를 통해 우리는 세상과 만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1차적이고 즉자적인 정보는 오로지 시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감각들의 중요성이 덜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식의 차원에서 본다면 언어의 사용을 위한 청각보다도 우선적이다. 머릿속에 갈무리 되지 않은 언어의 개념은 무용하다. 기표(記表·Signifiant)는 기의(記意·signifie)를 전제로하는데 기표는 감각적 이미지의 재현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은 시각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당연한 진술이 나온다. 줄리언 스팰딩은 예술을 봄(seeing)으로부터 출발한다. <미술, 세상을 홀리다>는 출판사의 책 제목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지만 책 내용을 그다지 잘 담아내지도 못했고, 진부한 방식의 답습으로 강한 인상도 흡인력 있는 문구도 제시하지 못한 채 밋밋하게 ‘○○, ○○하다’는 제목이 주는 안정감에 편승하고 있어 조금 아쉽다. 번역서의 제목은 책의 이미지와 판매부수에 결정적인 요소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고민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제목을 시비 거는 이유는 훌륭한 내용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의 다른 표현이다.

  이 책은 다른 미술관련 책들과 많이 다르다. 우선 미술사를 표방하고 있지만 연대기적 서술이나 유파별 혹은 작가별 서술은 찾아볼 수가 없다. 미술사를 통찰하는 유일한 기준은 ‘경이로움(wonder)’이다. 책의 원제가 ‘경이로움의 예술(Art of Wonder): 보는 행위의 역사(A History of Seeing)’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국의 큐레이터이자 미술사가인 저자는 미술에 대한 또 하나의 접근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에 의한 미술과의 만남은 1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접근이다. 보는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수많은 미술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자리에 독자들은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눈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는 프랑스 소설가 마르셸 프루스트의 말로 시작되는 이 책은 미술 뿐만 아니라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여행의 중요성은 장소가 아니라 동행하는 사람인 것과 같이 무언가 깨달음과 각성이 필요하다면 새로운 풍경을 쫓을 것이 아니라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는 전언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한 오해와 관심은 사실 편견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없지만 보이는 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seeing) 자체에서, 우리 눈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과정에서 또다시 놀라운 것이 발견될 것이다. 사적 경험의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세계는 지금까지 사실관계만을 따지는 과학적 탐구 분야에서 오랫동안 배제되어 왔지만, 이제는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예술가가 활동할 풍요롭고 다채로운 사냥터이다. 의식, 죽음의 인식, 예술 제작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 있고, 이러한 연관성이 바로 우리와 다른 생물, 심지어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네안데르탈인과의 차이일 수도 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지평선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 경험의 핵심적 본질인 감정과 생각은 그 지평선에서 다시 한 번 경이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결국은 우리 눈에 별이 있는지도 모른다. - P. 315

  예술의 발생과 기원으로부터 출발해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적 표현과 흐름들을 재미있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저자의 노력은 책 곳곳에 배어있다. 우선 책날개 부분을 활용한 삽화들과 사진들은 낯선 작품과 애매한 느낌을 즉각 해소시켜 주는 시각 자료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다. 본문에 삽입된 그림이나 사진 자료는 물론이지만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크기와 편집을 통해 적절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배열하고 있어 가독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장점을 지니고 있다.

  과학과 종교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특히 서양 예술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신화의 시대부터 종교의 세기 그리고 과학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와 예술적 경향들 그리고 작가들의 노력이 작품을 통해 제시된다.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저자는 해박한 지식과 인문학적 배경으로 예술과 역사 그리고 색다른 예술의 세계를 소개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부한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은 미술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별과 태양과 달, 탄생과 죽음, 빛과 어둠 등 주제별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묶이면서 전체가 미술사 전체를 조망하도록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계획한다고 해서 아무나 쓸 수 없는 책임은 물론이다. 일견 부럽기도 하고 번역서가 가지는 다소 딱딱하고 건조한 문장이 가지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는 책이다. 어쨌든 대중적인 미술사로 이만한 책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책을 번역한 김병화가 인용한 마티스의 말을 다시 한 번 음미하며 책장을 덮는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후천적인 습관에 따라 다소 왜곡된다. 이런 현상은 영화 포스터와 잡지들이 온갖 틀에 박힌 이미지를 쏟아 내는 오늘날 더욱 자명해 보인다. 편견이 마음을 오염하든 이런 이미지는 눈을 오염한다. 왜곡 없이 사물을 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는 모든 대상을 항상 처음 보듯 대해야 하는 화가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어린아이와 똑 같은 눈으로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능력이 없으면 자신을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형태로 표현할 수 없다.” - P. 321(마티스)


07120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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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2-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도서로 보관해 놓은지 좀 되었는데...언제 읽게 될런지.^^

sceptic 2007-12-04 09:03   좋아요 0 | URL
묵혀 두었다가 마음의 여유가 생기실 때 읽어보셔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