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많은 디자인 씨 - 디자인으로 세상 읽기
김은산 지음 / 양철북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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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디자인은 현대생활 그 자체이다.” - 나이젤 휘틀리(『사회를 위한 디자인』)

이것은 파인애플이다. 사과 한 쪽이 파였으니 파인 애플. 시덥잖은 농담에 눈살을 찌푸릴 수는 있겠지만 이 로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청바지에 검은색 터틀넥을 입은 스티브 잡스와 결합된 애플사의 로고는 첨단 과학의 이미지라기보다 현대사회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디자인과 그에 걸맞는 편의성으로 지구인을 사로잡고 있다. 우리는 왜 애플에 반응하는가. 무엇이 그들을 차별화 시켰을까. 이제 하나의 기호와 상징이 되어버린 애플의 제품들을 찬찬이 들여다보자.

아침에 눈뜨고 저녁에 잠들 때까지 한 순간도 손에서 떠나지 않는 휴대용 전화기는 현대인의 신체 일부가 되었다. 아이폰은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은 물론이고 시각적 단순성과 편의성을 앞세워 열풍을 몰고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단순성과 편의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디자인 때문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디자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이젤 휘틀 리가 말한대로 디자인이 현대생활 그 자체라는 말에 반박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아이폰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사용하는 모든 물건과 공간은 ‘디자인’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익숙함은 디자인에 대한 우리들의 시선을 무디게 한다. 보이는 곳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도 디자인은 숨어 있다. 그래서 디자인은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호와 상징이 될 수 있다. 김은산의 『비밀 많은 디자인씨』는 일반인들을 위해 디자인을 통한 세상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인문학에 바탕을 두지 않은 어느 학문 분과도 영혼 없는 육체가 되기 쉬운 것처럼 인간에 대한 관심과 철학적 고민이 없는 디자인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일시적 자극을 제공할 뿐이다.

이 책은 디자인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그것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담겨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십대를 위해 썼다고 밝히고 있지만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삶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필요하고, 디자인 자체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의지와 열정을 통해 삶을 변화시키고 싶은 열망이 있는 사람에게도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디자인’을 통해 사람들의 삶과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전해주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곳곳에 저자의 깊은 고민과 한숨 독자에 대한 따뜻함이 묻어난다.

한 권의 책을 디자인(구상에서 기획, 편집에 이르기까지)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선보이는 과정은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과 같다.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고 하듯이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에게 전해지고 그것이 독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은 살아 숨쉬는 유기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나 역동적이고 활기 넘치는 책의 일생을 꿈꾼다. 이 책은 ‘디자인’을 통해 충분히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성찰과 세상에 대한 통찰을 키워줄 수 있는 책이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디자인의 논리는 실은 ‘형태는 이윤을 따른다’는 현실의 논리, 시장의 논리를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 P. 88

책도 마찬가지지만 현대사회에서 디자인은 철저하게 ‘이윤’에 복무한다. 기능과 형태의 오래된 논쟁에서 벗어나 이제는 모두 ‘자본’에 복종한다. 시장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디자인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저자가 힘주어 강조하듯이 닫힌 디자인이 아니라 열린 디자인의 가능성에 도전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디자인은 상업적 이익을 위한 포장지로만 기능할 것이다. 지속가능한 가능한 삶을 위한 디자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물을 관찰하는 눈이 필요하다. 형태와 기능에 대해서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디자인은 공공을 위해, 장애와 성별과 나이를 뛰어넘어 사회적 소수자까지 배려해야 한다. <중요한 것을 먼저 하자 2002>에서 주장하듯이 환경과 사회문화의 전영역에 걸쳐 디자인이 필요하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디자인을 고민하는 것은 우리들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디자인은 막대한 자본이나 앞선 기술, 거대한 계획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세상을 근심하고 배려하는 디자이너의 작은 손길과 정성 그리고 자발적인 참여와 의지를 통해 차근차근 가능해진다. 그것이야말로 디자인의 진정한 가능성이자 힘일 것이다. - P. 183

저자는 이렇게 디자인의 힘을 믿는다. 작은 손길과 정성 그리고 자발적인 참여와 의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듯이 그런 디자인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내 삶을 디자인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디자인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우리들 주변의 소소한 디자인들이 어떠해야 하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엉뚱하게도 오늘은 남은 생을 아름답게 디자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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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법을 만나다 - 예술의 자유와 법의 구속을 말한다
박홍규 지음 / 이다미디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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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예술은 삶의 갈등이라는 동일 현상을 함께 다루고, 위대한 예술 작품은 법이 지향해야 할 인권의 신장을 지향한다. 그런 예술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예술가들의 사고와 경험 및 시야가 좁기 때문이고, 사회 전반의 지적 수준과 폭, 법치가 후진성을 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권의식이 낮은 탓이다. - P. 44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는 정치가나 법률가의 역할과 활동범위보다 좁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예술가들에 대한 비난과 냉소를 넘어 모욕에 가깝다. 자유롭게 사유하고 활동할 수 없는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맥락을 탓하기 이전에 기존 질서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몸짓이 부족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생각과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적어도 예술은 네모난 틀에서 벗어나 규범과 기존 질서에 의문을 던지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미적 성취를 이뤄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본능적으로 미의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지만 순수한 미적 감동은 오로지 자연과의 조화로움에서 기인한다. 순응적 질서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는 안일한 역할은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기술이 아닌 예술은 모방이 아닌 창조여야 하며 새로운 질서와 낯선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는 완고한 질서와 규범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예외적인 일탈 행동과 틀에서 벗어난 생각을 좀체로 용납하지 않는다. 마치 학교교육처럼. 하지만 예술가는 바로 이런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무질서한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법과 예술은 상충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박홍규의 『예술, 법을 만나다』는 화해할 수 없는 둘의 관계를 조망하는 책이다.

  『예술, 정치를 만나다』에서 예술가도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는 정치적 인간임을 확인한 저자가 이번에는 전공인 법과 예술의 관계를 파헤친다. 평소 폭넓은 인문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나의 주제를 꼼꼼하게 짚어나가는 저자 특유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예술과 법의 충돌을 이야기한다. 자유분방해야 하는 예술과 빈틈과 오차를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법은 한 이불을 덮을 수 없다. 법과 예술의 행복한 만남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목적은 예술과 법의 조화로움을 추구한다. 두 세계는 불행하게 만났고 지금도 여전히 서로의 영역에 대한 이해 부족과 자신의 영역에 대한 고집으로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 불편한 공존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가진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이 책을 단순히 예술과 법의 충돌과 화해에 그치지 않고 즐거운 예술사, 폭넚은 인문학의 성찬으로 만들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정의의 여신상과 법의 정의를 일갈하고 1, 2장에서 법과 예술의 행복한 그리고 불행한 만남을 역설한다. 이후에는 영화 속에 나타난 법의 모습을 살펴본다. 인권과 영화, 재판 영화는 물론 현실에서 법으로 금지된 영화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법과 영화 속의 법을 함께 돌아본다. 그리고 호메로스에서 괴테, 19세기, 20세기 문학과 법을 살펴본다. 음과 법, 미술과 법은 물론이다. 이렇게 크게 영화, 문학, 음악, 미술과 법의 관계를 고찰하는 동안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예술이 인간을 떠나 존재하기 힘들 듯이 인간과 가장 멀고도 가까운 법 또한 예술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는 존재이고 예술은 그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법은 예술의 영원한 주제이면서 인간의 존재 양상을 살피는 도구가 된다. 현실적으로 억압의 도구가 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며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부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과 법의 관계를 살피고 억압과 구속의 고리를 끊고 어두운 이면을 드러낼 수 있는 것 또한 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없이 자유로운 사회를 꿈꾼 예술가가 없듯이 법과 질서를 통해서만 행복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조화와 균형은 기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재단한다. 그것이 예술이든 법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유희 본능에서 출발한다. 일차원적인 욕망을 통제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법은 그 무분별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제한한다. 그래서 어쩌면 서로 다른 얼굴을 한 두 세계가 공존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두 세계는 끊임없이 서로를 욕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와 구속의 화려한 이중주, 위험한 줄타기가 바로 예술과 법이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아닐까 싶다.

법학이란 기본적으로 어떤 다툼에 어떤 법을 적용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말자면 컴퓨터의 키보드 같은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기술을 사용하기 전에 가져야 될 가치 판단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 판단 능력은 법학이라는 기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이 다루는 여러 현상에 대한 공부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 - P. 168

그래서 저자는 법을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단한 권력을 가진 법률가들에게 던지는 통렬한 자기 반성의 촉구가 아닐 수 없다. 기술자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존엄을 가지려면 법학 지식이 아니라 그 법이 다루는 인간과 현상에 대한 깊은 고뇌와 폭넓은 지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한민국의 만연한 법치(?)의 정신을 진정한 법의 역할과 권리로 착각할 지도 모른다.

 “모든 규칙, 모든 규범은 죽음을 낳는다.”(앙소르) - P.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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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미술관 - 그림이 즐거워지는 이주헌의 미술 키워드 30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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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창조성이다. 학문적 성취든 예술 감상이든 창조적인 시각만이 의미를 발견해내고 만들어낸다. 이 창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앞에서도 말한 직관이다. - P. 7
 

그림 읽어주는 남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기막힌 우연히, 혹은 정해진 운명처럼 사람을 만난다. 이 모든 만남이 항상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잊을 수 없는 추억과 행복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남기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가장 큰 삶의 목적이면서 불행의 시작이다. 우연한 만남이 삶의 방향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주헌의 『지식의 미술관』은 의도적인 만남을 원하는 독자에게 적합한 책이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를 처음 만난 게 10년 쯤 전인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한젬마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수없이 암기 위주의 미술 시험을 위한 공부를 벗어나 편안하고 재미있게 그림을 즐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렇게 우연한 만남 때문이었다. 당시에 이 책이 주목을 받았던 것은 예술에 대한 ‘권위’와 ‘지식’에 대한 불편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이전에도 여러 사람이 그림을 이야기했다. 나는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1~3』을 읽고 본격적으로 예술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여러 책과 칼럼을 통해 미술 이야기꾼으로 활약해 온 이주헌의 『지식의 미술관』은 대중적 그림 읽기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진중권의 현란함과 달리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림을 읽어주는 남자가 바로 이주헌이다.

  이 책은 제목 자체가 모순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그림 감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창조성’을 꼽는다. 지식보다 직관을 강조한다. 하지만 지식의 축적과 반복적 경험은 직관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지식과 직관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면서 영원한 순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말은 아닐까 싶다. 시작은 가볍게 무엇을 읽어내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나름의 방법대로 읽으면 된다. 그림을 보는 데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답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숨은그림찾기 같은 상징과 알레고리, 화가의 의도와 사회적 맥락까지 읽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손색이 없는 책이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에서 이 모은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림을 읽는 30가지 키워드

  이 책의 체계와 구성을 잠시 살펴보자. 전체 서른 개의 키워드를 배열하면서 다섯 개의 묶음으로 유사한 것들끼리 묶었다. 각 장 끝에 생소하거나 익숙한 용어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실제 사례를 통해 알기 쉽게 제시되었다. 똑같은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느냐의 문제는 작가만의 몫이다. 독자들이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더라도 작가의 입장에서는 정확한 사실과 개념들을 재미있고 쉽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능력은 바로 거기에서 판가름 난다. 이주헌의 글이 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밝힌 대로 그림을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창조성’을 기르기 위해 지식과 경험은 필수적이다. 그 서른 개의 구슬을 어떻게 꿰어야할 것인가는 어쩌면 독자들의 몫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책을 통해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어도 독자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그림을 감상하고 체험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모두 쓸데없는 잔소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책은 그림에 관심이 생기는데 체계적인 이론이나 미술사의 지식보다 우선 실제 그림을 통해 즐거운 감상을 시작하고 싶은 독자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나도 꽤 많은 미술 관련서적을 섭렵해서 잡다한 지식의 조각들이 머릿속에 헝클어져 있지만 계속해서 관점과 말하는 방식이 다른 작가의 책을 읽어댄다. 왜냐하면 읽을때마다 같은 그림이 다르게 보이는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나만의 주관적 관점이나 창조적 그림 읽기는 아직 부족하다는 말일 것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읽은 『그리스 귀신 죽이기』에서 박홍규는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이 여전히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한 그림을 이주헌은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를 통해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중첩되면서 상반된 부분을 찾아냈지만 창조적인 안목과 나만의 분석을 제시하기는 아직도 어렵게 느껴진다. 지식과 경험이 ‘창조적’ 그림 감상을 방해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다’는 말을 앞세우며 눈과 귀를 닫고 살고 싶지는 않다면 이 책을 통해 미술관에 놓여 있는 수많은 예술 작품과 대화를 시작해 보자. 그림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사실 이 책에는 조각과 현대의 설치미술까지 언급되어 있다. 수많은 미술의 이론과 용어들이 등장하지만 재미있게 보았던 그림이나 인상적인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만 기억해도 좋다. 다음에 또 다시 만날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다.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겹쳐지고 있지만 잊었던 내용을 다시 보는 즐거움 같은 그림을 조금 다르게 읽는 기쁨은 각기 다른 저자의 색다른 그림읽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보이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

  이 책에서 재미있게 읽은 시각상과 촉각상의 차이는 우리가 미술관에서 예술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말이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람과 아는 대로 그리는 사람의 우열을 가리자는 말이 아니다. 찰나의 대상도 중요하고 영원한 진리도 중요하다. 작가는 시각상보다 촉각상이 ‘진리의 전달’ 면에서 유리한 이미지라고 말하지만 ‘영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아니, 유한한 우리들의 인생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보이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는 현실과 이상의 거리만큼 멀고도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우리에게 서양 미술에 관한 다양한 지식과 미적 체험을 제공하지만 독자들을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삶의 애환과 굴곡진 역사 그리고 현재 삶의 모습을 돌아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모든 미술관에 박제된 예술품들은 우리들 삶의 감각적 재현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즐기고 예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어떤 측면을 보다 정밀하게 고민한다는 말이다. 단순한 문화 자본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러한 시간을 제공한다. 그래서 나는 보는 것이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곧 보이는 대로 그려진다는 것은 찰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요, 그것은 필멸의 운명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아는 대로 그려진다는 것은 영원한 질서의 대변자가 되는 것이요, 영생을 약속받는 것이다. 촉각상은 시각상에 비해 이런 ‘진리의 전달’에 보다 유리한 이미지다. - P.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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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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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에 들러붙은 아우라는 예술이 아직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던 시절의 흔적이다. 근, 현대 미술에서 종교적 숭배가치는 사라지고 미술관에서 전시가치만 갖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이를 한탄했지만 벤야민은 아우라의 파괴를 긍정했다. 종교 가치에서 전시가치로 변하는 것은 진보적 현상이라는 해석이다.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미술작품의 ‘아우라’를 통해 정면으로 충돌한다.

  미술관에 전시회를 보러가는 행위는 종교적 순례와 유사하다. 인터넷을 통해 어디에서나 선명한  FULL-HD LCD 모니터를 통해 미술품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특별한 전시 공간을 찾아가는 것은 원작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다. 기술복제 시대는 복제품을 예술 수용의 주체를 대중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원작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는 관객을 압도한다.

  그러나 사진과 영화는 대중들을 예술 수용의 주체로 그리고 예술 행위의 주체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 언제어디서나 주눅들지 않고 즐기고 감상하며 수용자에서 창조자로 변신이 가능하다. 누구나 사진을 찍고 보고 즐긴다. 더구나 인터넷은 이제 미술 전시의 공간까지도 변화를 가져온다. 예술 자체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물론 감상과 수용 그리고 창작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는 혁명적 변화를 경험했으며 그 변화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원작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한다. 중세와 르네상스 그리고 고전주의와 바로크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명멸했던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들 중에 영혼의 울림을 주는 원작과 대면하는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마그리트, 다비드, 샤갈, 르누아르, 마티스 등 많은 화가들의 원작을 보러 다녔지만 ‘영혼의 울림’을 경험한 적은 거의 없다. 원작의 아우라에 압도당한 경험은 있지만 깊은 울림을 느끼지 못한 것은 순전히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이해한 후의 감상태도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라루스 서양미술사를 시대별로 읽었지만 수많은 전문가들의 미술과 예술에 대한 이론을 이해했지만 감상은 별개의 것이다. 이제는 여유 있는 마음과 배경지식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하듯 그림을 감상할 기회를 갖고 싶다. 그것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미술관을 찾아가는 원작에 대한 확인 작업과 구별되어야 한다.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내게 이런 생각들을 떠올렸다.

  “나의 영혼에 울림을 준 그림은 마치 원래 한 몸이었으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둘로 쪼개져야 했던 자신의 반쪽과 같았다.”라는 진중권의 한 마디 때문에 책을 읽기도 전에 생각은 날개를 달아버렸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사진의 의미에 두 개의 충위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는 ‘스투디움(Studium)’으로,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의미다. 우리는 특정한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하곤 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그런 일반적 해석과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이다.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이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punctum)’이라 부른다. - 프롤로그 ‘푼크툼’으로서 그림

  사실 이 책은 조이한과 진중권이 함께 쓴 『천천히 그림읽기』와 비슷한 책으로 짐작했다.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진중권의 ‘푼크툼’을 빌려보려는 독자들에게 적합한 책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값진 경험을 하게 한다. 첫 번째는 새로운 그림 정보다. 익숙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그림도 몇 개 포함되어 있지만 처음 접하는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크다.

  두 번째는 다양한 해석의 즐거움이다. 진중권도 인용했듯이 수잔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모든 해석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보편적 구속력이 있는 정답으로 작품을 감싸버리면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품의 의미를 자유롭게 풀어주자는 것이다. 특히 문학의 해석은 혼합주의 양상을 띠기 때문에 서로 상이한 해석과 해석들 사이의 모순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의 가장 빛나는 부분으로 읽혀야 한다. 발랄한 진중권의 번뜩이는 재치가 아니라면 이 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 결국 이 책은 그림에 대한 ‘해석’의 발견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하겠다.

  <주의 얼굴에 침을 뱉은 자>부터 <고야의 개>까지 열 두 개의 그림은 정교한 알레고리를 통해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개별적 작품들의 해석이지만 한 권의 책으로 모여 즐거운 성찬이 된 듯한 느낌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원본을 감상하고 싶은 갈증만 높아졌다. 우연히 마주친 그림에서, 익숙했던 그림들 사이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무엇에 비할까. 여유 있고 풍요로운 삶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의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애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편안한 신발과 간편한 복장으로 아무도 없는 미술관을 어슬렁거리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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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즐거워지는 사진찍기 일상이 즐거워지는 시리즈 1
최정호 지음 / 홀로그램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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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가 찍은 훌륭한 작품 사진은 여러 사람을 감동시킨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찍은 소소한 일상의 기록들은 스스로를 감동시킨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찍고 내가 행복한 사진. 가끔은 덤으로 내 주위의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감동시키는 그런 사진. 그 정도면 내가 사진기를 든 보답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 곁에 사진기가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이제 그 행복을 당신이 느껴볼 차례다.

  ‘사진은 평범한 일상도 특별한 순간으로 재구성한다’는 저자의 말은 일상에서 우리가 찍는 사진의 의미를 규정한다. 일상은 평범할수록 빛이 나고 그 평범함은 사진으로 특별한 순간으로 간직된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고 사진은 기록의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 된다. 우리의 일상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했던 사람들과 잔잔한 웃음과 찰나의 기억 때문이다. 소중한 일상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일기 혹은 사진으로 남겨진다.

  네이버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했던 저자의 책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조용하고 순수한 미소를 지닌 최정호위원의 사진들은 열정으로 가득하다. 무엇을 보여주려는 몸짓이 아니라 순간을 기억하고 일상을 즐기기 위한 사진들이다. 그가 찍은 사진이 갖는 특별함은 아마추어의 열정을 넘어 나름의 특별한 시각과 여유를 담아낸다. <일상이 즐거워지는 사진찍기>는 그렇게 사진과 함께하는 일상의 즐거움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이제 특별한 도구가 아니다. 누구나 사진기를 들고 다닌다. 핸드폰에 대부분 포함된 기능이라 언제 어디서든 무엇이든 기록할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이 단순한 기록장치로 볼 수는 없다. 증명사진이나 기록필름이 아닌 일상을 담은 사진들은 희미한 기억을 선명한 추억으로 되살린다.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바쁘고 지루하며 반복적인가 돌아보자.

  오래 된 사진 속의 나를 돌아보면 박제된 시간을 들여다보는 같아 불편하다. 지금의 나와 다른 타인처럼 어색하고 생경하다. 사진은 정지된 순간을 현재화하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불연속적인 흐름으로 나열하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들을 각색하기도 한다. 사진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소소한 일상을 들춰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즐거움을 말하고 있다. 일상의 즐거움, 사진의 즐거움.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찍는 방법과 그 순간의 분위기 그리고 담아내고 싶었던 의도를 말해준다.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입문서가 될 것이고 이제 막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진의 재미와 찍고 싶은 마음을 선물한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도 듣기 좋고 그가 찍은 사진과 설명은 더욱 보기 좋다.

  집에 오래된 카메라가 있거나 최신형 카메라를 사두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사진의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일곱 개의 파트로 나눠져있다. 인물, 동물/식물, 풍경, 도시, 하늘/구름, 사물, 접사로 나뉘어 피사체에 따라 어떤 점을 유의해야 하고 또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앵글의 조화는 사진만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사진은 무엇을 담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저자의 사진들은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 우선 피사체를 자세히 관찰하고 프레임과 빛을 생각하며 앵글과 효과를 감안하기 때문에 한 장, 한 장이 모두 깊은 인상을 남긴다. 다른 사람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재미와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우리는 반복적 자극에 무감하다. 하지만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그렇게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일상의 즐거움과 알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순간들을 사진을 통해 정지시켜보자. 나만의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사진기를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재미는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다.

  낯선 곳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포착한 순간들이 내 삶을 말해준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일 수도 있다. 특별한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사진이다. 사진기로 무엇을 찍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먼저 생각해보자. 그렇게 찍은 사진은 피사체가 아니라 바로 나를 담은 사진이 된다.


090909-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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